12.26~30 경향 장도리
‘박옹성’은 신기루였나…최순실 국정농단 한방에 ‘와르르’ 1230 경향
ㆍ박근혜 대통령의 추락 ‘결정적 다섯 장면’
사진은…1월1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담화 발표, 2월16일 국회 연설, 3월16일 우병우 민정수석 임명장 수여, 4월13일 20대 총선 투표, 5월1일 이란 국빈방문, 6월26일 제주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참석, 7월18일 ASEM 순방 후 서울공항 도착, 8월4일 ‘사드 발표’ 후 새누리당 대구·경북 초선의원 청와대 초청 간담회, 9월20일 경주 지진피해 현장 방문, 10월24일 국회 시정연설 후 이동,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 12월9일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 주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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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무엇을 해도 30%대를 유지해 ‘철옹성’ 내지 ‘콘크리트’로 불렸다. 2013년 2월 취임 이후 계속되는 독단적 국정운영에도, 심지어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때도 지지율은 30%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던 지지율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제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① 기세등등 - 책상 내리치며 야당 맹비난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4년차 들어서도 기세등등했다. 1월13일 신년 대국민담화에서 “(안보·경제가) 동시에 위기를 맞는 비상상황에 직면해 있다”며 “가족과 자식들과 후손들을 위해 (국민) 여러분께서 앞장서서 나서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4·13 총선을 석 달 앞두고, “적어도 20대 국회는 최소한도 19대 국회보다는 나아야 한다”며 국민이 정치권을 심판해달라고 선동한 것이다. 여소야대를 굳히고, 새누리당을 친박당으로 만들어 국정을 마음대로 주도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퇴임 후를 대비한 정치적 세력화 의도도 엿보였다. 박 대통령은 또 북한의 4차 핵실험을 비난하면서 개성공단 폐쇄까지 이어진 대북 강경책을 예고했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 가능성도 처음 시사했다. 2월24일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선 야권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다. 박 대통령은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두고 “기가 막힌 현상”이라며 책상을 10여차례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내리쳤다.
② 권위추락 - 노골적 선거 개입에도 총선 참패
박 대통령의 노기 띤 기세는 집권 여당의 4·13 총선 참패로 한풀 꺾였다. 총선 참패는 친박계 핵심들이 주도한 막장 공천 등 시대착오적 행태에 지지층이 이탈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기저에는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등 대선 공약들을 폐기하고, 불통을 이어간 일방적 국정 운영과 실패에 대한 심판이라는 평가가 컸다. ‘야권 심판’을 외치다 박 대통령 본인이 심판당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총선 패배 후 닷새 만에야 첫 대국민 메시지를 냈지만, 반성과 성찰은 없었다. 박 대통령은 4월1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만 했다. 국정 실패에 대한 책임은 언급하지 않았다. 총선 민심이 요구한 국정운영 변화도 없었다. “국회와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것”이라면서도 ‘경제와 안보 동시 위기’를 강조하며 기존 국정과제의 흔들림 없는 추진만 고집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때부터 허물어졌다. 우선 노동시장 구조개편법 등 박근혜표법 추진은 불가능해졌다. ‘선거의 여왕’이라던 권위도 추락했다. 노골적으로 야권 심판론을 제기하고, 전국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하는 식으로 선거개입을 했지만, 여론의 반발만 불렀다. 특히 부산·경남에서 야당 후보들이 선전하고, 대구에서 ‘진박 후보’들이 고전하면서 박 대통령 정치적 기반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③ 반전시도 - 또다시 ‘위기론 카드’ 꺼냈지만
박 대통령은 후반기로 갈수록 신년 대국민담화에서 언급한 위기론을 빈번히 꺼내 들었다. 총선 참패, 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 등 일련의 상황을 거치면서 국정 장악력을 상실하고, 사회 분열이 극심해지자 위기론을 앞세워 국면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히 8·15 경축사에서 북한 붕괴론을 처음 시사하는 등 노골적으로 북한을 자극했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북한 당국의 간부들과 모든 주민 여러분, 통일은 여러분 모두가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한 것으로, 북한 당국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북한 체제 전환을 대북정책 중심으로 삼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박 대통령은 “(북한) 체제 동요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8월22일 을지국무회의)→“김정은의 정신상태는 통제불능”(9월9일 안보상황점검회의)→“자유로운 터전으로 오라”(국군의 날 기념식)→“북한 정권을 끝장내겠다는 각오로 고도의 응징태세를 유지하기 바란다”(9월13일 국무회의) 등으로 발언 수위를 높였다. 박 대통령이 보수지지층 결집용 ‘안보’론으로 국민을 편 가르고, 잔여 임기를 ‘내 편’만 데리고 가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을 안심시켜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앞장서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도 커졌다.
④ 촛불활활 - 국정농단 터지면서 민심 악화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민심 수습을 위해 1·2·3차 대국민담화를 냈지만,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민심만 악화됐다. 박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성난 수백만 촛불이 광화문을 덮었고, 지난 9일 국회에서 탄핵당했다. 최씨가 미르·K스포츠 재단을 설립·사유화했다는 의혹은 9월20일 언론보도로 점화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9월22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이라고 일축했고, 10월20일 같은 회의에서 “의미 있는 사업에 대해 의혹이 확산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10월24일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 완수” 카드를 갑작스레 제안하며 국면을 바꾸려 했지만, 그날 밤 대통령 연설문 유출을 입증하는 태블릿PC 존재가 보도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3차례 담화는 민심만 악화시켰다. 1차 담화(10월25일)에서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만, 기밀문서 유출이 드러났다. 2차 담화(11월4일)에선 “검찰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라고 해놓고 검찰의 대면조사 요구를 세차례 거부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일 여당 지도부와 만나 “헌법재판소 과정을 보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차분하고 담담하게 갈 각오”라고 했다. 탄핵안이 9일 국회 문턱을 넘는 즉시, 대통령 직무도 정지됐다.
⑤ 관저유폐 - 탄핵안 통과에 ‘민간인’식 대응
박 대통령은 탄핵 후 관저에 유폐됐다. 직무정지 기간 중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못하며, 성난 민심을 감안하면 외출도 불가능하다. 사실상 정치적 연금상태다. 탄핵안 통과 직후 국무위원 간담회가 마지막 행사였고, 대선 승리 4주년인 지난 19일도 일정 없이 보냈다. 그럼에도 반성과 성찰은 없었다. 박 대통령은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 어떤 말인지 알겠다”고 토로했다. ‘죄가 없으니 반드시 국정에 복귀하겠다’는 억울함으로 읽혔다. 청와대는 윤전추·이영선 행정관 등 핵심증인의 국조특위 불출석을 유도하고, 친박 의원들을 동원해 위증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헌법재판소에 낸 탄핵심판 답변서에서 “최순실 등이 국정 및 고위공직 인사에 광범위하게 관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입증된 바도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모든 사태는 저의 잘못”(2차 대국민담화)이라던 말을 바꾼 것이다. 박 대통령의 특검 조사 협조 가능성도 희박하다. 묵비권, 자료제출·압수수색 거부 등 ‘민간인 피의자’처럼 대응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틈날 때마다 “안보·경제의 동시 위기”라며 총화단결을 강조했지만, 진짜 위기의 진원은 대통령 자신이었다.
야당 비난·측근 비호·탄핵 불사…'양보' 없던 朴의 1년 1231 노컷뉴스
'정면 승부'로 2016년을 보낸 박 대통령의 말말말
31일 권한정지 상태로 한 해를 마감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을 '정면 승부'로 일관했다. 야당의 이견은 '불필요한 정쟁', 측근 감찰은 '국기를 흔드는 일', 2선후퇴 요구는 '법률에 없는 용어'로 치환됐고 '격퇴 대상'이었다. 새해에도 박 대통령은 탄핵심판과 특검 수사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승부를 이어간다.
2016년 들어서도 여전히 여당 과반이었던 19대 국회에서는 테러방지법 처리 강행, 개성공단 전면 중단 등 조치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야당 반대는 묵살됐다. '소수 야당'은 수차례 박 대통령의 심판 대상으로 거론됐다.
"계속 국회로부터 외면당한다면 국민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을 것"(1월19일 국무회의), "국민에게 희망을 줄 일은 하지 않고 지지해달라면 어쩌자는 것이냐"(2월24일 국민경제자문회의),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정치권 주장은 공허하다"(3월15일 국무회의), "국회에서 번번이 가로막히는 현실에 국민들 가슴은 미어질 것"(4월12일 국무회의) 등은 이른바 경제·민생 입법을 반대하는 야당을 겨냥한 메시지다.
일방통행식 국정은 4·13 총선 '참패'로 귀결됐지만, 이후에도 '상시 청문회법' 공포 거부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강행 등 박 대통령 기조에 큰 차이가 없었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하나가 돼야 할 것"(4월18일 수석비서관회의) 등 언급이 이어졌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이 바라는 상생의 국회는 요원해 보인다"(9월24일 장·차관 워크숍)면서 협치(協治)에 대한 부정적 심경도 밝혔다.
야당에 가혹했던 박 대통령은 자기 자신이나 핵심 측근에 대해서는 옹호로 일관했다. 비리 의혹을 제기한 언론과 정치권은 '부패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청와대 관계자)으로 매도됐다.
박 대통령은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가기 바란다"(7월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고 각종 비리 의혹이 제기된 당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격려했다. 또 참모의 입을 빌어 "중대한 위법행위이고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자, 국기를 흔드는 일"(8월19일 홍보수석 브리핑)이라며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우 수석 감찰정보 유출 의혹을 비난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등 자기 자신이 연루된 의혹에도 박 대통령은 완강히 맞섰다. 국정 비밀자료 유출 의혹에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10월25일 대국민 담화),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11월4일 담화), "단 한 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았다"(11월29일 담화) 등 부인과 읍소 전략을 폈다.
그러나 국민적 분노를 막는 데는 실패했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참가자가 수백만명에 달하고, 국정 지지율은 4%까지 폭락하는 지경에 내몰렸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박 대통령은 그럼에도 "거국중립내각이라는 것은 헌법에 없는 용어"(11월9일 홍보수석 기자간담회)라며 퇴진은커녕 '2선후퇴' 가능성마저 닫았다. 말바꾸기도 이어졌다. 검찰 수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던 대국민 약속은 "상상과 추측을 거듭해서 지은 사상누각"(11월20일 대변인 브리핑)이라는 검찰 수사내용 폄훼와 함께 번복됐다.
결국 국회에서 탄핵소추 의결이 이뤄졌지만, 박 대통령의 전의는 꺾이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특검의 수사에 차분하고 담담하게 대응할 것"(12월9일 국무위원 간담회)이라고 했고,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은 점은 위헌적 처사"(헌재 제출 답변서)라고 항변했다.
지난 1월1일 박 대통령은 황교안 총리 등 각료들을 청와대로 불러 조찬을 함께하면서 "역사는 우리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역사가 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권한을 정지당한 대통령이자 탄핵심판 피소추인, 특검의 형사 피의자로 1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박사모 "유재석, 당신도 김제동과 좌파지?" 수상소감 비난 1231국민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가 개그맨 유재석의 수상소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유재석은 지난 29일 방송된 '2016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날 유재석은 수상소감을 통해 "‘무한도전’을 통해 많은 걸 배운다. 특히 역사를 배우면서 나라를 구하는 건 국민이라는걸, 나라의 주인 역시 국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어 유재석은 "소수의 몇몇 사람만이 꽃길을 걷는 게 아니라 내년에는 대한민국이, 그리고 모든 국민이 꽃길을 걷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재석의 수상소감을 들은 박사모의 한 회원은 30일, ‘이번 유재석 연예대상 소감을 보면서 당신도 좌파연예인인지'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유재석의 대상 수상 소감을 지적했다
글쓴이는 “유재석씨한테 유감이다”면서 “유재석 소감의 저의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저런 애매모호한 발언으로 무한도전 시청자들을 우습게보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무한도전이 안 그래도 촛불 세력을 지지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들을 방송 중간 중간에 넣고 박근혜 대통령님 담화문까지 패러디 했던 것 까지는 참았는데 대상 소감으로 말한다는 게 고작 이런 거였나”라며 “당신은 김제동이랑 다를게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박사모의 회원들도 “이참에 확실하게 좌빨 연예인이 누군지 알게 됐으니 유재석이 광고 출연하는 제품 불매운동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멤버들도 다 좌빨일걸요? 그냥 깨끗하게 폐지하고 피디부터 나오는 출연진들까지 방송 못하게 막아야 한다” “언론을 온통 좌빨이 장악했으니 그도 눈치를 보는 것이다” 등의 글을 남기며 불만을 토로했다.
해당 소식이 커뮤니티로 퍼지자 네티즌들은 "이제는 유재석도 좌빨이냐"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네티즌들은 “소수의 박사모 빼고 나머지 국민들은 다 좌빨로 보이느냐?” “유재석이 저런 말했다고 좌빨이면 김정일한테 편지 쓴 박근혜는 뭔가?”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자 박사모 회원들은 “유재석 건드린 것은 실수인 것 같다”면서 수습에 나섰다.
한 회원은 “유재석을 건드릴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면서 “빅뱅, 엑소 팬들보다 더 많은 팬들의 집단이 유재석이다. 이런 일로 온 국민들에게 트집 잡혀서 낙인찍히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자”는 입장을 보였다. 또 다른 회원은 “안 그래도 우리 이미지가 안 좋은데 이런 일까지 엮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유재석 같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연예인들은 비난하기에 앞서 숨을 한번 고르고 하는 게 현명하다"고 말했다.
이에 일부 회원들은 “유재석이 박대통령보다 더 중요하냐?” “ 왜우리가 눈치를 봐야 하느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 27일 박사모 회원들은 배우 유아인에게도 “현직 대통령을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고, 탄핵해야한다고 촛불 들다가 군대 가라고 하니까 31살까지 안가고 버티다가 이제는 현역에서 빠지려고 수를 쓴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닫힌 정치’를 ‘열린 정치’로 만든 장본인 1230 한겨레
촛불집회·청문회와 세월호 유가족
12월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탄핵안 표결을 참관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304명의 목숨을 실은 배가 가라앉을 동안 청와대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잃은 지 1000일이 다가오도록 그들을 방치하고 외면했던 ‘정치’는 새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슬픔과 분노에 절규했던 그들의 가슴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안산 단원고 학부모 10명에게 촛불·탄핵·청문회 등 숨가쁜 ‘최순실 정국’을 거쳐온 소감을 물었다. 과연 정치는 앞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그들이 처음 국회에 온 건 2014년 5월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계획서’가 채택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세월호특별법도 즉각 제출하고 필요하다면 특검도 실시하겠다”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생중계된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당연히 국조특위 계획서가 재깍 본회의에서 처리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여당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국조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유족들이 처음으로 ‘기춘대원군’의 힘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유족들이 의원회관 회의장의 찬 바닥에서 2박3일을 기다린 끝에야 국조특위 출범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건 앞으로 견뎌야 할 오랜 기다림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14일 다시 국회를 찾아야 했다. 여야의 세월호특별법 협상이 공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아빠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야당 의원들은 ‘릴레이 단식’을 하며 유족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유족들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세월호특별법 협상으로 야당은 내상을 입었고, 박영선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물러나며 새정치민주연합은 리더십 실종 상태에 이르렀다. 텐트·깔개 등 국회의사당 앞에 차려놓았던 이들의 남루한 거처는 넉달 뒤인 11월7일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된 이튿날에 치워졌다. 그동안 유가족들이 겪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재철 국조특위 위원장(새누리당)은 “수학여행을 가다가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해달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카톡을 돌렸고, 국조특위 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세월호 참사를 ‘조류인플루엔자’(AI)에 비유해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김태흠 의원(새누리당)은 이들이 전깃줄에 수건 널어놓은 걸 가리키며 ‘노숙자’라고 조롱했다.
재보선 대승 뒤 안면몰수 나선 청와대
‘미니총선’이라고 불린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이 11 대 4로 새정치연합에 대승하자 청와대와 여당은 아예 안면몰수하고 나섰다. 야당이 대패한 이날 밤 국회 농성장에서 만난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의 유경근 대변인은 “이제 싸움이 진짜 길어질 거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든지 (청와대에) 찾아오라”고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0월29일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러 국회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면담을 애원하는 유가족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의 슬픔이 이념 간 진영 논리로 찢겨질 동안 정치는 무력했다.
그러나 촛불은 숯덩어리처럼 새카매졌던 유족들의 마음을 환히 밝혔다. 인터뷰에 응한 유족들 대다수는 가장 가슴 벅찬 순간으로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보다 ‘청와대 앞 100m’ 행진을 꼽았다. 촛불이 일어나기 시작할 초반, 그들은 광장 한편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지난 4·13 총선 때 혹여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이 표를 주지 않을까봐 도라에몽 인형 탈을 쓰고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던 이들이었다. 그만큼 주눅이 들어 있던 이들은 광장에서도 마음껏 소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촛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이들의 자리도 옮겨졌다. 12월3일엔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청와대 앞까지 걸어갔다. 권지혜 엄마 이정숙씨는 “그동안 마음이 독해져서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광화문부터 청와대 앞까지 내내 울었다”고 말했다. “예전엔 ‘보상금 많이 받았는데 왜 자꾸 거리에 나오느냐’며 손가락질하던 이들이 많았는데, 이번엔 광화문광장에서 100만명이 우리를 격려해줬다. ‘이제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밝힐 수 있겠구나’ 싶었다.” 창현이 아빠 이남석씨는 “그동안 우리가 전국을 다니면서 단식이며 삼보일배며 노숙농성이며 안 한 것 없이 ‘우리를 좀 봐달라’고 했는데 왜 지금 와서야 우리 목소리를 귀담아듣는지 한탄스러워하는 유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아, 세월호 유족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거다. 광화문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은 ‘미안하다, 내가 한참 전에 유족들에게 와봤어야 했다’고 사과하더라”고 말했다. 청와대 앞에서 이들은 만감이 교차했다고 했다. 애진이 아빠 장동원씨는 청와대 앞에서 “막상 청와대 앞에 가보니 별것도 없더라. 그런데도 우리를 왜 그토록 못 오게 막았을까 싶었다”고 했다. 안주현 엄마 김정해씨는 “대통령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원없이 목소리를 한껏 높였고, 아이들 사진이 좀 더 잘 보이도록 최대한 높이 치켜들었다. 그런 기회가 허락된 것에 눈물 흘렸다”고 말했다.
‘오늘도 부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족들은 2년 전에도 국회 방청석에서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었다.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될 때였다. 그때 유족들은 기대 반, 절망 반이었다. 유족들은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줄 것을 줄곧 요구해왔지만, 여야 협상 과정에서 제외됐다. 이남석씨는 “당시엔 매우 미흡한 법안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얘들아, 미안하다. 부모들이 너무 힘이 약해서 이렇게밖에 못했다’고 되뇌며 눈물을 머금었다”고 했다. 김정해씨는 “유족들은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도 없는 반쪽짜리 특별법이라며 그날 밤 모여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정숙씨는 “그래도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돼서 어느 정도 진상규명은 되겠거니 기대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후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선체 인양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박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까지도,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1주기인 지난해 4월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에서 단원고 2학년 7반 영석이 엄마 권미화씨가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타고 있는 차량을 막아서며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안산/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최윤민 엄마 박혜영씨는 “9일 본회의장 들어가기 전에도, ‘오늘도 부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동안 아무리 진상규명을 요구해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고, 항상 부딪혀 깨지기만 했다. 그러니 이날도 안 될 수도 있으니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안했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우리 뒤에 있잖아, 그러니까 힘을 내자’고 마음먹었다. 그게 우리의 첫 승리였다. 오늘 하루만 웃자고 했다”고 전했다. 이남석씨는 “전광판에 ‘234’라는 숫자가 나올 때 나는 너무 좋아서 ‘와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방호원의 제지를 받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았다”고 했다. 영석이 아빠 오병환씨는 “나는 4월16일 이후 딱 두번 웃었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당선됐을 때, 그리고 이번에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였다. 일단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켜 놓으니 안심이 되더라”고 했다. 김정해씨는 “탄핵은 이번에 정말 국민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전에 사람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은 끝났다고 했을 때, 나는 ‘이제 시작도 안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시작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여전히 국회를 믿지 못한다. 이번에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특위 활동에 대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속 터지는 것은, 증인들이 “기억 안 난다”, “모르겠다”고 일관하는 것이었다. 오병환씨는 “낙제점이다. 국회의원들도 대부분 그동안 언론에 나온 걸 질문해서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김영재 성형외과를 현장방문했을 때 김 원장의 서명이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 의미있다고 볼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청문회의 소득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증인들이 말 바꾸는 거 보면서 ‘아, 저 사람들이 지금 위증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한 점”이라고 꼬집었다.
“대통령이 없는 나라였다는 게 확인됐다”
임요한 엄마 김금자씨는 “국회의원들이 좀더 예리하게 질문했어야 한다. 증인들이 거짓말하면 빼도 박도 못하게 집요하게 매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이재욱 엄마 홍영미씨는 “청문회의 맹점을 잘 아는 사람들은 청문회가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 이용하고 보여주는 계기였다. 세월호 참사 본질은 대통령 미용이 아니라 왜 재난구조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가다. 학생들도 이렇게 청문회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재난이 닥칠 때 컨트롤타워가 없었다는 것, 각 기관들과의 협조가 왜 잘 안 됐는지 등이 명확히 밝혀져야 했다”고 말했다. 이정숙씨는 “이완영 의원(새누리당)은 2년 전에도 세월호 국조특위 하면서 졸고 하품했던 인간이다. 이번에도 엉망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또 이번에도 특위 위원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2년 전 열렸던 세월호 진상규명 국조특위보다는 낫다는 평가가 많았다. 오병환씨는 “그래도 이번에 ‘세월호 7시간’이 부각되면서 진상규명의 동력이 생겼다는 데서 의의를 찾는다”고 했다. 그는 “나는 솔직히 박 대통령이 그 시간에 머리를 올렸든 보톡스를 맞았든 별 관심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집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면 누구든 관저에 가서 박 대통령 깨우고 직접 보고해야 하지 않나. 보고 계선에 있는 사람들도 다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짚었다. 박혜영씨는 “증인들이 다들 모른다고 해서 너무 답답하고 화나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찬찬히 볼 수가 없었다”면서도 “2014년엔 ‘7시간’ 얘기는 금기시됐던 거였지만 이젠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게 됐다. 또 진전이 있다면 새누리당 의원들이 증인들에게 위증하도록 사전 모의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금자씨도 “청문회를 한 것의 의미는, 우리의 억울함을 벗을 수 있어서였다. 예전엔 ‘7시간’ 얘기만 나오면 ‘유족들이 돈 때문에 그렇다, 지겹다’며 고개를 돌렸는데 이젠 사람들이 다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7시간에 대해 알게 된 게 아니라 박 대통령 일상생활을 알게 됐다. 국민들은 뼈 빠지게 일하고 사는데, 박 대통령은 출근도 안 하고, 알고 보면 일상생활이 엉망이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0월29일 국회에서 시정연설과 여야 영수회담을 마치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지도부와 함께 나갈 때 세월호 유가족 대표들이 본청 2층 정문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정해씨는 “그래도 청문회에선 우리나라가 대통령이 없는 나라였다는 게 확인됐다. 이제 국민들은 오히려 초등학생들이 대통령보다 더 똑똑하고 확고한 자세를 갖고 산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나. 또 대한민국이 사찰공화국이라는 것도 똑똑히 알게 됐다. 대법원장까지 사찰하는 나라 아닌가. 유족들은 참사 이후부터 ‘좌파’로 몰리면서 끊임없이 감시·사찰당해왔다”고 말했다. 홍영미씨는 “이번 청문회는 방송중계된 게 너무 좋았다. 과거 세월호 참사 특조위가 청문회 할 때는 방송중계를 따내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방송 3사 어디도 중계하려고 하지 않았다. 청문회 장소 섭외도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구했다. 특조위를 없애려는 공작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번 청문회 때는 방송사들이 앞다퉈 중계하려고 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남석씨는 좀 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원래 청문회라는 것이 여야를 떠나서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것인데, 그동안의 국회 활동은 오로지 여당 의원들이 잘못 덮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 새누리당이 친박-비박으로 나뉘는 바람에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만큼 열심히 해줬다”고 했다. 이정숙씨는 “박영선 의원은 2년 전 우리 의견을 담지 않은 세월호특별법을 협상해와서 정말 미워했던 사람이지만, 이번엔 시민들 제보받아서 공개하는 등 열심히 활동해서 이제 미운 마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족들은 박 대통령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지점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정숙씨는 “누구나 월급 받으면 출근하고 일한다. 아무리 눈치 없고 공주로 자라났다고 하더라도 출근도 안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오병환씨는 “나라를 위해서였다, 내 잘못 없다 하는 박 대통령 태도가 가장 분노스럽다.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터진 뒤 유족들이 원하는 대로 법도 제정해주고 필요하면 특검도 실시하고, 유족들을 언제든 만나주겠다며 울먹였는데 그게 모두 ‘악어의 눈물’이었다. 이번에 세차례 사과 담화 한 것도 다 거짓말인 걸 알았으니 그렇게 수백만의 사람들이 뛰쳐나온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금자씨는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서 예전엔 박 대통령을 향해 ‘회개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번 일 겪으면서 ‘구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이 4월에 퇴진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을 거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되기 이전부터 계속 거짓말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혜영씨는 “올림머리 하느라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늦게 갔다는데, 나는 차라리 7시간 몰랐으면 좋겠다. 이런 거 하느라고 나는 내 딸을 잃었단 말인가 싶었다. 다른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올림머리 같은 어이없는 사실들이 더 터져나올까봐 사실 겁이 난다”고 말했다. 홍영미씨는 “박 대통령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도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이제 야당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됐다고 했다. 세희 아빠 임종호씨는 “야당 의원들은 정권 바뀌기 전엔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다. 4·13 총선 때 여소야대 국회가 되니까 이번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희망을 봤다. 지금은 야당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합쳐야 야당이 국민 편에 서서 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관후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토요일 집회에 나갔을 때 세월호 유족들이 광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걸 보면서 이들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는 “세월호 유족들이 맨 뒤에서 꿋꿋이 버텨줬기 때문에 광장에서 시민들은 노래도 부르고 공연도 하고 논쟁도 하면서 민주주의를 즐길 수 있었다. 세월호 유족들이야말로 ‘닫힌 정치’를 ‘열린 정치’로 만든 이들이었다”고 평가했다.
광화문에 가면 칼과 저울이 있다 12.30 시사인
광화문광장 촛불 속에서, 박근혜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 중계를 들으면서 계속 법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법은 무엇일까. 1215년 영국에서 대헌장이 공포된 때만큼이나 지금 우리는 법치에서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고 생각했다. 대헌장은 라틴어로 돼 있고 뜻도 모호해 실제로는 해독하기 어렵다는데 제39조만은 언제 읽어도 힘 있다.
“자유민은 그와 동등한 자의 적법한 판정에 의하거나 국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되거나, 재산이나 법적 보호가 박탈되거나, 추방되거나 다른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를 공격하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 공격하지 않는다.”
욕심은 많았지만 멍청했던 존 왕을 핍박해 이 대헌장에 서명하게 만든 영국의 귀족이 특별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이타심에 불탔던 것은 아니다. 왕권이 쇠퇴한 틈을 타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확실하게 지킬 기회를 엿봤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헌장은 영국의 역사는 물론 나중에는 세상을 바꾸는 큰일을 해냈다. 대헌장은 모든 자유민이 동등하다고 전제해 시민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싹트게 만들었다. 영국이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면서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 덕분이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고려시대 <삼국유사>가 쓰일 어림에 작성된 문안이란 게 믿기질 않는다. 대헌장은 프랑스와 미국으로 건너가 법이 곧 왕이 되는 법치주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한성원 그림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정치인들은 정확하게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탄핵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기 힘들고, 가결된다 해도 몇 달이나 걸려 헌법재판소라는 만만찮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야당도 적법한 절차를 밟는 걸 망설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가 나올 때까지도 여야 모두 혼란스러워했다. 촛불 민심도 하나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도도한 큰 흐름은 일관되게 법대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시민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헌법이 있었다. 여야는 모두 시민의 명령에 복종했고 압도적인 표 차로 탄핵안을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그동안 우리의 삶은 법과 동떨어져 있었다. 우리 존재의 근간인 헌법 자체를 유린한 범죄마저 제대로 단죄한 적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그의 긴 임기 동안 벌어졌던 헌법 유린, 부정선거, 정적 암살, 부패, 독직 혐의가 모두 덮이고 말았다. 이런 추악한 스캔들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적법한 조처가 취해졌다면 우리는 역사의 단추를 새로 끼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 시대의 과오는 또 다른 헌정 유린 세력인 박정희 군부가 들어서면서 시중의 술안줏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뒤 18년간 자행된 박정희의 헌법 파괴와 인권 탄압, 그리고 이루 열거하기도 힘든 권력형 범죄 사실 역시 불의한 세력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내란 혐의 역시 김영삼 정부 당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정치 검찰의 논리에 말려 법정에 가지도 못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헌정을 짓밟고 그것을 외면하는 긴 여정이었다.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자나 그 가족, 그리고 시민단체는 종종 이런 종류의 범죄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의 양형이 너무나 가볍다며 들끓곤 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헌법학자 김욱 교수(서남대)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문화가 폭력에 관대한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거기다가 유아원 폭력까지 좀처럼 근절되지를 않는다. 김 교수의 가설에 따르면 우리는 수십 년간 군사정권의 폭력과 파시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왔다. 부당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 저항했던 세월도 길다. 폭력 자체에 대한 무감각이 자라날 수 있다. 그것이 들어서는 정권마다 범죄를 근절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어째서 실제로 사법부의 처벌은 솜방망이처럼 보이는지 설명한다.
이를테면 법질서 확립은 평등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의 불법 시위만 처벌하고 자본가의 부당노동행위는 눈감아준다면, 절도는 처벌하면서 재벌의 편법 증여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면, 교사·교수의 위법행위에는 엄격하면서 재단의 비리에는 눈감는다면, 블루칼라는 가혹하게 처벌하면서 화이트칼라는 놔준다면, 촛불 시위자와 인터넷 댓글러들은 엄벌하면서 인사 청문회에서 태연하게 위증하는 대법관은 법 위에서 노닐도록 방치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결국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형량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시민의 법의식은 훌쩍 자랐는데 뒤를 이어 들어선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시민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노무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간 검찰은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여줬다. 검찰은 수사권·수사지휘권·기소권·기소재량권을 독점한 폐해를 스스로 증명하기에 바빴다. 미네르바, 촛불집회,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 정연주 KBS 사장과 <PD수첩> 수사에서 정치 검찰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급기야 현직 검사장과 부장검사가 부패에 연루돼 구속되는 초유의 일까지 벌어졌다. 비교적 청정지역으로 보였던 법원에서도 악취가 진동하는 중이다. 검사와 판사가 권력과 자본의 시녀라는 전통적인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형사사건 피의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쌓아간다고나 할까. 법을 다루는 자들의 범법에 법원의 팔은 번번이 안으로 굽는다. 4차 청문회에서는 청와대가 대법원장을 사찰했다는 의혹까지 터졌다. 사법부는 거의 벌거벗은 채 촛불 민심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청문회에 등장한 재벌 총수들은 대한민국의 법이 얼마나 무력한지 말해주는 증인들이다. 축구대표팀 감독처럼 미국이나 영국 혹은 독일에서 검사와 판사를 영입했다면 장담하건대 청문회에 참석한 재벌 총수들은 모두 감옥에 가 있을 것이다. 대를 이은 그들의 형량을 합치면 족히 천년은 넘지 않을까. 웬만한 범죄는 사법부가 외면해버리는 가운데서도 2004년 이후 형사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 일가는 20개 기업집단 30명에 달한다. 그중에는 중형을 받아 마땅한 누범도 있다. 그런데도 실형을 산 이들은 거의 없다. 맞춤복을 입은 듯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총수 가운데는 최태원 SK 회장이 복역 중이었으나 박근혜 정부의 특별사면을 받아 청문회에 참석해 눈만 끔뻑거리고 있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들이 아무런 직함도 없는 최순실 모녀에게 갖다 바친 그 많은 돈이 뇌물이 아니라면 무엇을 뇌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여야 의원들은 재벌 총수들을 호되게 몰아붙이거나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했지만 감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들은 국민에게 사과하라거나, 전경련이나 그룹 컨트롤타워를 해체하라고 다그쳤고 총수들은 쩔쩔매는 듯 보였지만 결론이 뻔한 3류 드라마처럼 비쳤다. 의원들은 재벌 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느라 바쁘고, 재벌 총수들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 챙겼다. 재벌에 대한 의원들의 태도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광장의 민심은 싸늘하기만 하다. ‘재벌도 공범’이란 구호는 ‘이게 나라냐’만큼 흔하다.
젊은 법학도라면 한 번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읽어보았을 독일의 저명한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쓴 명저 <권리를 위한 투쟁>에 따르면 광화문의 촛불 민심은 지금 각성한 상태이다.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는 법을 가늠하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법을 관철하기 위한 칼을 들고 있다. 예링에 따르면 저울이 없는 칼은 노골적인 폭력일 따름이다. 반면 칼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 그 자체이다. 그는 법이란 신이 부여한 이성의 안내로 들판의 풀처럼 자연스럽게 획득한 것이라는 전통 법철학의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법은 투쟁을 수반할 때만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통 없이 누리게 된 법은 언젠가 황새가 물어가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은 불의한 자들이 아니라 비겁한 자들이 져야 할 것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의와 무법이 오만하게 판을 친다면 그것은 법을 방어할 사명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했다. 책임은 불의한 자들이 아니라 싸움을 피한 비겁한 자들이 져야 한다. ‘불법을 저지르지 마라’와 ‘불법에 항거하라’ 중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영국인이 법의 보호 아래 자유를 만끽하게 된 것은 오스트리아인보다 10배는 더 작은 법 위반에 민감했기 때문이라며 자기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가 윤리적 분노가 폭발하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 현장, 그리고 박근혜 게이트에 항의하는 광화문광장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윤리적 폭발력은 모든 것을 발아래 굴복시킬 정도로 숭고하고 장엄하다. 순수한 분노가 가져다주는 자극은 용서와 품격을 갖추게 된다. 이는 그 주체와 세계의 도덕적 공기정화 장치라고 부를 만하다.’ 그는 마치 광화문광장 한복판에서 분노가 화려하게 폭발하면서도, 차분하고 관대하게 승화돼가는 장관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법치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이기는 하지만 만능키는 아니다. 법은 본래 기득권 친화적이다. 근대법은 근본적으로 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하려고 만들었다는 점을 언제나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치가 곧 경제 정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재벌의 불법을 응징하려면 긴 싸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기본은 법치이다. 법이 가진 한계가 분명하지만 법의 지배를 받아들인 나라에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나라에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인정해야만 한다고 했던 영국의 전 대법관 톰 빙엄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법 감정을 회복하는 게 어떤 대량살상무기보다 더 확실하게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는 예링의 말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바른 사법체제에 대한 갈망이 작열하는 광화문광장에 있으면 북핵 따위는 사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존 왕 못지않게 공동체 의식에 불을 지르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참고한 활자:<권리를 위한 투쟁/법 감정의 형성에 관하여>(새물결), <법의 지배>(이음), <법을 보는 법>(개마고원)
反인류범죄 앞에 무력한 유엔1230 시사저널
국제기구 전문가 클로에 모렐 박사 인터뷰
“이것이 반(反)인류범죄행위가 아니라면, 우리는 더 이상 후세에 어떤 교훈도 줄 수 없다.” 프랑스 녹색당의 세실 뒤플로 전(前) 당수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12월12일 프랑스 녹색당 하원의원들은 내전 중인 시리아의 알레포 방문을 시도했다. 파국으로 치닫는 시리아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 언론은 시리아, 특히 공습이 집중된 알레포에 대해 “지옥이 생중계 중이다”라며 연일 심각성을 전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수록 시선이 쏠리는 곳은 유엔이다. 프랑스-독일 합동 방송 채널인 아르테는 ‘유엔은 어디에 쓰이는가?’라는 주제의 좌담회를 방영했다. 당시 토론자로 참여했던 국제관계 전문가인 제라르 샤리앙은 “유엔에겐 희망이 없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이 주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당시 토론자로 출연했던 국제기구 전문가인 클로에 모렐 박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모렐 박사는 현재 프랑스 국립연구소에서 국제기구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2015년 저서 《유엔에 대한 구상들의 역사》를 출간했다.
이번 시리아 사태에서 보인 유엔의 무력함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유엔은 ‘거부권 행사 권한’ 때문에 마비돼 버렸다. 러시아는 공습을 중단시키기 위해 마련된 중재안에 6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유엔은 속히 ‘거부권’을 삭제하고 더 민주화돼야 한다. 현재 거부권을 가진 나라는 프랑스·미국·영국·중국·러시아다. 이들은 지구촌 인구의 30%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더 많은 나라들에 참여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시민을 해치는 범죄가 자행되는 분쟁지역에 보다 필요한 군사력을 동원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에 더 많은 힘을 주기 위함이다.
파리의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의 파스칼 보니파스 소장은 ‘유엔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기도 했다. 유엔이 현재 정체돼 있다고 보는가.
-유엔의 참모위원회는 15일 간격으로 회의를 열고 있지만 어떤 구체적인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속히 잠자고 있는 조직을 깨워야 한다. 분쟁지역에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엔이 세계를 발전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길이다.
러시아 푸틴과 미국 트럼프, 두 정상들 사이에서 유엔이 자리를 제대로 찾을 것이라고 보는가.
-미국은 언제나 유엔을 향해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번번이 유엔을 컨트롤하려 했고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참여를 거부했다. 러시아 역시 미국처럼 스스로 국제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방주의 노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정체돼 있는 다자주의에 유엔이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평가도 해 달라.
-반 총장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국제무대에서 유엔을 어떻게 홍보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카리스마가 부족했으며 대놓고 미국의 이익에 헌신했다. 세계 분쟁지역들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번번이 상황의 끔찍함과 참담함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분노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반 총장처럼 ‘비참하다’고 말만 하는 건 충분치 않다. 유엔은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임무가 있다.
반기문 총장은 한국 차기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의 행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한국의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람이 좀 더 진보적인 후보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모든 국민의 행복을 위한 리더가 필요하지, 정치적이고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는 리더는 필요치 않다.
12월9일 미국 뉴욕에 위치한 유엔본부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시리아 알레포 철수 감시단 파견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하고 있다. © EPA 연합
“반기문, 역대 최악의 사무총장”
유엔의 역사 중 최고의 유엔 사무총장은 누구이며 또 최악은 누구인가. 그 이유는.
-다그 함마르셸르와 코피 아난이 최고였다. 그들은 대중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역동적으로 유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유엔에 이상적인 인물들이었다. 반면 반기문과 쿠르트 발트하임이 최악이었다. 특히 발트하임은 나치 전력까지 있었다. 유엔의 수장이 되려는 인물로선 치명적인 결함이다. 유엔은 인사에 있어 더 민주화될 필요가 있다.
반 총장 후임 안토니오 구테헤스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엔을 더 강화시키기를 기대한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더 많은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유엔의 협약들에 더 강한 강제권을 부여해야 한다. 테러리즘, 자본 도피처, 공해 등 지금 세계 문제 대부분은 초국가적이다. 하나의 국가가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전 세계 국가들을 연합하고 있는 유엔과 같은 국제조직이 적극 나서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시리아 사태에선 무력한 유엔이지만, 유엔의 미래를 전망한다면.
-유엔은 현재 난국에 처해 있다. 시리아 사태에서 보여준 무력함으로 그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유엔이 없는 지구촌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엔을 지켜야 하고, 유엔이 더 개선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한다.
IMF 20년, 현실은 여전히 아프다 2017. 1.3 주간경향
1997년과 경제상황 달라졌지만 20년 전 위기 지표 적잖게 다시 발견돼
20년 전, 1997년 새해 첫 신문지면은 파업 소식이 장식했다. 1996년 세밑에 당시 집권여당이던 신한국당이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을 노동계는 파업으로 대응한 것이다. 지금 봐선 익숙하지만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내용이 개정된 노동법에 포함됐다. 변형근로제와 정리해고제였다. 근무시간과 출퇴근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변형근로제나 경영상의 이유 등을 들어 대규모 정리해고가 가능하게끔 법적 근거를 처음 마련한 정리해고제는 당시로서는 낯설었던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한국 사회에도 밀어닥친 결과였다. 변형근로제는 이후 단시간·저임금 근무, 고용 불안정 등을 특징으로 하는 비정규직 노동이 사회에 만연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정리해고제는 적어도 이전까지는 법적으로나마 대규모 정리해고는 불가능했던 사측에 정리해고를 할 수 있게 면죄부를 쥐어주는 제도로 자리잡고 말았다.
“명퇴하고 나니까 일은 계속 꼬였어요”
서울 은평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권모씨(67)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던 시기를 “어, 어, 하다보니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던 때”였다고 회고한다. 권씨는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1996년쯤부터 경기가 안 좋다고 TV에서 얘기가 많이 나오긴 했어. 그러다가 1997년 되니까 이전까지는 잘나가던 대기업들이 계속 쓰러지고, 연말쯤 되니까 IMF가 왔다고 그러대. 그땐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가 그 다음해(1998년) 되니까 내가 다니던 공장에도 덜컥 정리해고한다는 소리가 돌더라고.”
당시 현대차는 최초 4800여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노조에 통보했다. 노조는 파업으로 맞서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노사는 정리해고 인원을 270명 선으로 줄이는 선에서 협상을 타결했다. 권씨는 정리해고 전 회사의 압박에 못 이겨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작업복을 벗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버텼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그땐 뭐가 씌었는지…. 끝까지 (회사에) 붙어 있어야 됐는데, 나오고 나니까 일은 계속 꼬이고….” 권씨의 퇴직 이후 도전은 순탄치 못했다. 납품업체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살던 친척이 사업을 같이 해보자고 권씨를 설득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얼어붙은 경기가 풀리기에는 시기상조였던 터라 적잖은 손해를 안고 그만둬야 했다.
1998년 1월 한 취업박람회에 구직자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IMF 시작되고 은행이자(금리)가 (연) 20%를 넘던 때니까 다들 사업할 생각은 못하고, 남 등쳐먹던 놈들도 부지기수인 때였지. 그때 퇴직금에다가 모아놓은 돈 꼴랑 몇푼 믿고 일을 벌이니까 될 리가 있나.” 남은 돈이 빠듯해 겨우 구멍가게 수준의 동네 슈퍼마켓을 차렸다. 20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경기도 회복되어 먹고살 만한 정도가 된 것도 잠시, 동네상권은 점점 메말라갔고 집값만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겨우 만든 단골을 놓치기는 싫었다. 그래서 대기업 편의점 업체 직원 말에 넘어가 편의점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한동안은 편의점으로 바꾸고 벌이가 좀 된다 싶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네. 골목마다 편의점이 들어서니까 장사가 돼야 말이지.” 영업이 점차 어려워지다 보니 인건비라도 줄이려고 시급이 가장 높은 야간시간대에 권씨가 직접 카운터를 지킨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권씨의 삶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울산의 공고 출신 대기업 생산직 사원이 서울의 편의점 점주가 됐다. 서울에 온 뒤로는 집 한 채도 소유하지 못하고 전세살이를 계속하고 있다. 과거 도시락 싸들고 출근하던 새벽이 이젠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가게를 맡기고 퇴근하는 시간대가 됐다.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을 넘어 넉넉하게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현실은 마음 같지 않다. 아르바이트는 그나마 주말과 주중으로 나눠 쉬는 날이 있지만 권씨는 365일 밤이면 밤마다 쉬지 않고 가게를 지켜야 한다. 당연히 친지나 친구를 만나는 등의 인간관계는 꿈도 못 꾼다.
그래도 권씨에게는 작은 바람이 있다. “새해부터는 옛날처럼 경기 좋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야간 시급 듬뿍 주고 일할 친구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나도 등산이라도 좀 다녀올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지. 나라 돌아가는 걸 보니 어떻게든 크게 바뀔 모양새이긴 한 것 같이 보이니까.”
권씨가 바라는 변화가 있으려면 먼저 아프지만 현실의 위기를 지켜볼 필요도 있다.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 20년 전과 달라졌지만 20년 전의 위기상황을 가리키는 수치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치솟은 청년실업률에 따라 장기적인 실업을 경험하는 비중은 외환위기 당시 수준으로 높아졌고, 실업의 질도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다. 법원에 파산관리를 신청한 기업의 수도 이미 외환위기 시절 수준에 육박했다. 신용등급이 강등된 기업 수는 외환위기 이후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2016년 11월 청년실업률은 8.2%를 기록했다. 같은 달 기준으로 외환위기 이후 경기회복이 본궤도에 오른 2003년 이후 13년 만에 최고로 높은 수치다. 기업들의 도산이 이어지던 1997년 11월의 6.0%보다도 높다. 청년실업률은 2016년 2월부터 8월까지 같은 달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운 데 이어 하반기에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한 채 외환위기 당시 수준에 근접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외환위기 여파로 청년실업이 극에 달하던 1999년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더해 6개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장기실업자가 늘어나는 양상 역시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2016년 8월 기준 6개월 이상 장기실업자 수는 18만2000명으로 1년 전보다 6만2000명이나 증가했다. 장기실업자 증가 폭은 실업자 통계 기준을 바꾼 1999년 6월 이후 최대이며, 실업자 수로 따져도 1999년 8월 27만4000명을 기록한 이후 최대치였다. 전체 실업자 중 장기실업자 비율도 18.3%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9년 8월 기록한 20%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실업률 치솟고, 기업 신용등급 강등 최대
실업률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청년층의 현실 못지않게 고용을 책임져야 할 기업의 현실도 심상찮은 실정이다. 산업지표 곳곳에서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더욱 심각해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 경제를 이끄는 동력 역할을 한 제조업 분야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침체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2015년 연간 제조업 가동률은 74.3%까지 떨어져 1998년 67.6%를 기록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 분위기는 2016년 2분기 제조업 가동률이 72.2%로 떨어지는 데까지 이어져 IMF 외환위기 시기와 비슷한 수준에 근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의 신용등급 역시 낮아지고 있다. 2015년 신용평가사들이 무보증 회사채 신용등급을 내린 기업은 전년보다 26곳 늘어난 159곳으로, 신용등급 강등 업체 수는 2010년 34곳을 기록한 이래 꾸준히 증가해 2014년 133곳을 기록한 바 있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71곳이 강등된 이래 가장 많은 숫자다.
각종 경제·산업지표가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1997년 이후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 엄혹한 시기를 버티고 있는 청년층의 반응은 비교적 무덤덤한 편이다. 외환위기 전과 후의 극명한 차이를 경험한 권씨 같은 세대와는 달리 현재의 청년실업의 한가운데 있는 청년층은 보다 긴 기간을 두고 현실에 젖어든 셈이기 때문이다.
엄혹한 시기 청년층은 이상하게도 ‘무덤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김무열씨(31)에게 연말연시는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 때다. 한 해의 공무원시험 합격자 발표는 이미 마무리됐고, 김씨의 수험생활은 1년 더 늘어난 셈이 됐다.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지만 최대한 희망을 품고 활기차게 생활하려고 노력해야 축 처지는 기분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에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내년에는 웃으면서 한 해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버티는 이유를 찾을 수 없어요.” 김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김씨는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생업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던 과거가 있다. IMF 외환위기에는 버텼던 부모님의 가게가 김씨가 군대에 있던 무렵인 2007년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전역 후 대학 복학을 미루고 부모님의 일을 도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지병이 악화돼 쓰러지면서 김씨와 김씨의 여동생이 함께 취업전선에 나섰다. 김씨는 전남 여수, 경남 창원 등 대규모 공단이 있는 곳으로 파견직을 나가기도 하고,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하며 집안 살림에 보탰다. 하지만 몸이 버텨주지 못해 그만둔 때도 많았다.
“좀 더 어렸을 때는 깡으로 버티며 일하긴 했지만 원래 몸이 약해서 오랫동안 현장 일을 하지는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니 대학도 중퇴, 스펙은 없고, 결국 공무원밖에 없었죠.” 김씨는 이미 실업상태에 익숙해져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구직 과정에서의 낙방이나 탈락에 익숙해진 것이다. “자격이 초대졸이라길래 그래도 대학 2학년까지는 다녔으니 원서를 넣어보면 탈락이라는 곳도 많고, 아예 고졸 일자리라고 가도 자격증이나 경력 있는 사람들한테 밀리니까, 막상 취업하려고 해도 갈 데는 파견업체 통해서 공장이나 창고 같은 데 가는 길 말고는 잘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겨우 찾아간 일자리는 대개 노동환경이 나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은 김씨 말고도 부지기수였다. 때문에 일을 가르쳐주는 것부터 구내식당에서 차려주는 밥, 화장실 청소상태까지 김씨의 표현대로 “모든 게 뜨내기 장사 하듯 대충대충”이었다.
2016년 3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현대·기아자동차 협력사 채용박람회를 찾은 취업준비생들이 면접을 보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김씨는 공무원 학원과 독서실, 고시원이 밀집해 있는 서울 노량진 근처에서 만나는 시험준비생들 치고 김씨와 비슷한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더 찾기 힘들 거라고 말했다. “고시원 옆방에 있던 애는 멀쩡히 대학도 4년제 졸업하고, 나름 열심히 취업 준비했는데도 200군데 이상 떨어져서 ‘공무원밖에 없구나’ 생각했대요.” 고용 불안정과 낮은 질의 노동환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유지하게 만드는 청년실업의 장기화가 1997년 이후 20년간 한국 사회가 만들어온 수렁 같은 현실로 자리잡아 버린 것이다.
실업이 같은 세대가 공유하는 공동의 질곡처럼 되어버린 청년층에게는 이 긴 터널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필요하다. 이미 경기수축 국면은 IMF 외환위기 당시보다 더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한국 경제가 더욱 긴 경기수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내놓은 ‘경기침체기의 가계소비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2011년 8월 경기순환에서 정점을 찍은 뒤 5년 넘게 경기수축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29개월간 경기수축이 이어진 것보다 훨씬 긴 것이다.
현 경기후퇴 IMF보다 충격 덜해도 길어져
전문가들도 현재 경기 불황이 외환위기 때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외환위기 직후 수준만큼 나빠졌다는 진단과 함께 이 국면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이 짧은 기간에 강력하게 밀어닥친 데 비해, 최근의 경기후퇴는 충격은 덜해도 더 길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 느끼는 체감 고통은 더 나쁠 것이라는 것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IMF 외환위기의 충격은 1년에서 1년 반 정도에 걸친 단기적인 영향으로 끝났다”며 “지금은 충격의 강도는 그때보다 약하지만 저성장이 굳어지고 경기 부진이 너무 길어져 국민의 체감경기가 더 나빠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 실장은 “외환위기 당시는 실업자가 한꺼번에 양산됐지만 최근은 구조적인 문제로 청년층 실업자가 자꾸 누적되고 있어 IMF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도 “외환시장 관련 지표는 양호해 보이지만 실물경기는 외환위기 직후와 거의 유사한 정도로 가라앉았다”며 “디플레이션 우려로 소비와 투자를 미래로 미루면서 내구재 관련 소비·투자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정부가 앞장서 경기를 살릴 수 있게 정책적·재정적 자원을 집중한다면 현재의 악화되는 상황을 멈추고 서서히 경기를 반전시킬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통화와 재정, 구조개혁의 세 가지 대책을 전방위적으로 추진해 나가서 경제 주체들에게 경기가 반전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상조 교수 인터뷰 “취약계층 현실 개선하는 정책적 수단을 써야”
냉정하게 보면 희망적인 점을 찾기 어려운 때다.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며 맞은 2016년 연말이었지만, 2017년 한국의 경제가 처한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IMF 외환위기를 맞은 뒤 20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 경제에도 변화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기는커녕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지도 못한 탓에 1997년의 ‘한보사태’ 못지 않은 정경유착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의 지적이다. 그렇기에 2017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운명의 해가 될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를 평가한다면.
-“IMF 외환위기는 1960년대 이래의 고도성장식 개발주의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면서 새롭게 밀어닥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한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수출주도형 경제로 고도성장을 추구해온 군사독재 시대의 한계를 전혀 극복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충격을 받으면서 또 다른 폐해에 노출된 데 있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되풀이된 정경유착은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기존의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세계화가 던진 새로운 과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쌓아둔 셈이다.”
적어도 구체제의 문제는 해결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정부의 개혁 방향이 혼선을 빚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시작된 ‘차이나 이펙트’가 너무 강했던 것도 이유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중국 시장의 급성장으로 한국에선 재벌을 비롯해 사회 전체가 단맛에 빠져 자율적인 경제질서를 세워야 할 과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그동안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은 위기를 맞았고, 노동세력도 비정규직화를 막지 못한 채 여전히 힘을 가진 재벌에 휘둘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현재의 체제를 개혁할 방안을 서둘러 모색해 추진하면 되지 않을까.
-“현 시점에서는 명확한 모델을 제시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주도 경제가 남긴 오래된 문제에 더해서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새로운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존의 방안을 개혁의 모델로 제시하기에는 현재 진행 중인 기술과 산업의 변화가 너무나 급속하고, 따라잡기 어렵다. 현재의 과도기를 지나야 어느 정도 윤곽을 그릴 수 있는 상황이다.”
경제구조를 바꾸자는 대안들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지적인가.
-“경제구조를 바꾸는 데는 리더의 일관성과 국민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은 냉정하게 말해 최악이다. 대통령을 탄핵소추하면서 국민들도 정치권도 고양된 분위기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경제개혁은 쉽지 않을 수 있다. 다음 대통령은 정책 방향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채 취임할 수밖에 없는 데다, 개혁적 정책을 둘러싸고 좌우 진영이 정치적 충돌로 치달아 국민 전체가 두 쪽으로 분열될 가능성도 크다. 개혁의 과제는 장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밖에 없다.”
결국 경제개혁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분석 같다.
-“한국 경제가 처한 일면 비관적일 수도 있는 상황을 보면 어느 때보다도 변화가 시급하다. 그렇기 때문에 분위기에 도취되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해 개혁을 차근차근 실행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더욱 나빠져 온 취약계층의 현실부터 개선하기 위해 적재적소에 정책적 수단을 써야 한다. 미래세대의 양육 문제나 청년실업 문제, 은퇴세대의 노후 문제 등 가장 필요하고 적실한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단, 장기적인 개혁이 시급한 시점에서 진영 간의 정치적 논쟁으로 전체 역량이 소모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점진적 로드맵을 바탕으로 국민 다수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과제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점차 개혁 추진에도 탄력이 붙을 수 있다.”
우리 안의 ‘유사 자유주의’ 극복해야, 제2의 박근혜가 오지 않는다 12.2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박근혜 정부가 극적으로 몰락했다. 지난 4년 동안 강고하게 보였던 권력의 아성이 무너진 것이다. 오직 대통령 자신만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선실세와 그에 공모한 이들이 쏟아내는 진술들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대통령을 지목하고 있다. 대통령은 숨어 있던 배후에서 불려나와 전면에 서게 됐다. 한때 ‘레이저를 발사하는 눈빛’으로 유명했던 박근혜라는 개인의 이미지는 이제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온갖 ‘나쁜 쾌락’을 탐닉한 ‘욕망의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대통령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공적인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는 자명하다. 이런 명확한 증거들은 박근혜라는 개인을 공직 수행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각인시킨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연 박근혜가 그렇게 자질 부족이었다면 그를 대통령에 앉힌 이들은 무엇을 했던 것인가. 지금 와서 몰랐다고 발뺌하는 것은 우스운 노릇이다. 이미 각료들은 제대로 대통령을 독대해서 보고도 올리지 못했다. 이상 징후는 처음부터 감지됐지만, 이 정부에 몸담은 누구도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박근혜가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면 누군가 나서서 그 사실을 알렸어야한다. 일신의 안위가 걱정됐다면, 대나무 숲에 가서라도 고백했어야한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모두가 쉬쉬하면서 입단속을 하기에 바빴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학내 문제로 농성을 이어가지 않았다면 이 사실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감춰졌을지도 모른다. 국정 농단이 4년 동안 자행되고 있었음에도 한 나라를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들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했다는 뜻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위반하다
돌이켜보면 박근혜라는 이름은 왜 호출됐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까마득히 잊힌 것처럼 보이지만, 박근혜라는 이름이 불려나올 그 당시에 쟁점은 바로 경제민주화였고 복지국가의 추진이었다. 박근혜는 다른 무엇도 아닌 평등의 이름으로 호명된 것이다. 이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그때 박근혜 지지자들은 믿었다. 왜 박근혜 지지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것이 2012년 내가 품었던 궁금증이었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 아니다’ 참조). 말하자면, 이 박근혜라는 우리의 ‘병’은 먼 곳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손쉽게 이 문제를 ‘박정희 향수’라고 규정한 채 넘어가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게으름이다.
박근혜 정부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반하는 집단이다. 박정희 체제를 계승한다는 ‘명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근혜 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또는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위반할 수 있는 예외성을 권력에 부여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측근 비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역설적으로 박정희 체제의 명분은 ‘자유민주주의’였지만, 어디까지나 이런 논리는 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에서 정치라는 것은 대화를 통한 이해관계의 조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 체제에서 경제라는 것은 인구와 자원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박근혜에게서 박정희를 봤던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독재를 해서라도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지, 민주주의에 기초한 낭비적인 정치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의 유신을 중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을 위한 결단으로 이해하는 지지자들도 많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통일을 위해 북한과 비슷한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도 있을 정도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이것이야말로 박정희 체제의 ‘진리’를 말해주는 증상일 것이다. 박정희 체제를 민주주의와 대립시켜서 단순하게 ‘악’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오히려 독재는 민주주의의 결함을 극복하고 지도자와 ‘국민’이 혼연일체를 이루고자하는 열망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덕의 범주는 대립구도를 만들어내어 사안을 선택의 문제로 보게 만든다. 박정희의 ‘유령’은 이런 도덕의 범주로 체제의 문제를 판단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에서 배제된 인민주권의 과잉, 루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반 의지’에 대한 충동을 드러내는 증상이 바로 박정희의 유령이다.
‘국민’이 원한다는 전제에서 독재라는 사태는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의회제도보다 훨씬 효율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독재는 이렇게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을 압도한다. 결과적으로 1인의 독재자는 다수의 ‘국민’을 대리해서 ‘국민’의 의지를 완력으로 관철시키는 것이기에 다수의 의견이 서로 다툼을 벌여야하는 의회보다 속전속결이다. 그러나 이렇게 ‘국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슈미트가 명제화한 ‘독재’라는 예외성이다. 이것이 박정희 체제의 딜레마였다. 권력을 집행하기 위해 독재는 언제나 예외상황을 조성해야했다. 정치적 적대자를 ‘빨갱이’로 몰아서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이런 예외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처였다.
박정희 파시즘 체제의 자체적인 모순
이처럼 박정희 체제는 국가에게 개인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파시즘이었다. 국가에 개인을 완전하게 귀속시킴으로써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체제가 자체적인 모순으로 인해 붕괴하고 찾아온 198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가치가 대립했던 시기였다. 1987년 6월 항쟁은 사회주의운동을 지향했던 학생운동의 급진성을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이념은 점차 자유주의 이념에 밀려났던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현실사회주의 또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이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과두정’은 유럽식 다당제보다도 미국식 양당제를 선택했다. 돌이켜보면,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야권지도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의 저항을 통해 열린 정치적 공간은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이런 결과가 개인의 야욕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 전망의 한계 때문인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1987년의 성과는 모두 ‘대통령 직선제’로 수렴돼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에 대한 ‘선택 아닌 선택’으로 한정돼버렸다. 민주주의가 자유롭고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여기에서 깨진다. 물론 이것을 지금 현재의 한계로 보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운동의 지속을 위해 타당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의 모순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이 모순이야말로 민주주주에 대한 요구를 지속시킬 수 있는 요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제도의 안착은 다양한 정치세력의 경쟁을 통해 더 나은 방식을 선택하게 만드는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축소시켜버렸다.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이 상황은 강력한 대통령제와 의회제가 공존하는 한국형 민주주의의 구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의 불안정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코 제도화할 수 없는 정치적 열망이 끊임없이 선거과정을 통해 분출되고, 이것이 의회정치의 원칙을 뒤흔드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상황은 한국의 ‘후진정치’를 보여주는 끔찍한 상황이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일정한 균열을 내부에 간직한 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하나로 묶어놓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근본 모순을, 한국의 정치현실이 폭로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어떤 대통령을 선출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축소돼버린 것은 한국의 정치 수준 때문이라기보다 민주주의가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선택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민주주의의 한계다. 마치 ‘좋아요’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페이스북처럼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대의 민주주의’의 문제가 ‘민주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80년대의 투사가 1990년대의 자유주의자로 이행
한 마디로 ‘민주화’는 반독재 전선에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1980년대의 ‘투사’가 1990년대의 ‘자유주의자’로 이행 또는 대체되는 과정이었다. 독재 권력과 직접적으로 충돌해본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른바 386세대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시민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386세대 대다수의 윤리는 공동체주의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주의를 통해 한때 사회주의 또는 급진적 민족주의에 경도돼 있었던 386세대가 개인의 권리와 사유재산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의 입장과 결합한 것이 1987년 이후 ‘민주화’로 불려온 일련의 과정이었다. 386세대의 변화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은 이제 ‘쓸모’가 없거나 아니면 공허한 이상론이 되어버렸다는 의미다. 바야흐로 386세대는 혁명주의를 버리고 1980년대의 경험에 근거해 ‘불안정한 정치’를 지양할 수 있는 완벽한 ‘통치 기술(The art of governing)’의 완성을 ‘진보’라고 믿는 경향에 힘을 보태게 됐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국가론의 반대편에 있는 이른바 ‘보수’의 주장은 대체로 시장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복지국가론이든 시장주의든, 둘은 자유주의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전자가 앞서 이야기한 ‘변형된 자유주의’라면, 후자는 원본 자유주의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에 ‘최소 정부’가 정치의 목적으로 등장하면서 ‘통치 기술’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푸코는 이것을 ‘자유주의의 통치성’이라고 불렀다. 푸코는 ‘경제적 자유’를 자유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하면서, 이것을 ‘시장의 자유’와 등치시킨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시장은 ‘정의(Justice)’의 장소였다. 여기에서 ‘정의’라는 것은 공정하다는 뜻이다. 어원에 따르면, ‘정의’라는 말은 서로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거래를 의미했다. 자유주의 이전에 시장의 개념이 ‘정의’의 장소였다는 것은 그만큼 공정한 거래를 위한 규제가 강력하게 작동했다는 뜻이다. 절도나 사기 같은 범죄를 방지하는 것은 물론, 부당한 가격이나 거래에 적절하지 않은 물건의 반입을 막아야 했다. 식료품과 같은 기본적인 생산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가난하든 부유하든 필요한 물건을 공평하게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은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는 특권적인 장소”여야만 했다. 이런 시장이라면 중요한 것은 ‘가격’이라기보다, 거래의 공정성이다. 말하자면, 물건을 속여서 파는 ‘사기꾼’이 없어야 했던 것이다. 규제의 목적은 가능한 좋은 물건을 유통시키는 것을 장려하는 한편, 절도나 사기 같은 범죄행위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시장은 범죄의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측면에서 사법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정의의 장소로 받아들여졌던 시장을 전혀 다른 범주로 변화시켰다. 시장이 예측 불가능한 메커니즘을 가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진리(Truth)’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규제의 대상이었던 ‘가격’도 ‘신비한 시장의 작동’을 통해 만들어진 ‘자연의 산물’인양 간주됐다. 이와 같은 시장 개념의 변화가 정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이 정의이고 진리’라는 자유주의적 사고의 횡행
시장이 ‘정의’의 장소라고 한다면, 정부는 범죄를 단속하는 경찰 노릇에 충실하면 임무 끝이다. 그러나 시장이 ‘진리’의 장소라고 한다면, 행여 이 ‘진리’에 부합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정부가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앞서 논의했던 ‘불신’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좋은 정부가 되려면 진리에 따라 정부가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시장이 의미”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은 시장의 ‘진리’를 따르는 정부의 기능을 지칭한다. 정부 운영과 경제를 결합시키는 정치경제학이 ‘국정철학’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 이런 까닭이다. 이로써 정치의 목적은 경제의 발전 내지 안정에 있다는 자유주의의 정언명령이 완성된다.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시장의 ‘자연성’ 또는 ‘진리’라는 것은 개인적 경제활동의 자유를 사상의 중심에 놓았던 자유주의의 발명품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과정에서 언제든 소멸할 수 있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진리’인 것이다.
자유주의가 이상으로 내세우는 정부는 시장의 ‘진리’를 침해하지 않는 ‘최소 정부’다. 시장에 대한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며 자기 스스로를 제한하는 검소한 정부야말로 자유주의의 이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됐을 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푸코가 지적하듯이, 정치경제학에 조응하는 공공의 법에 대한 고민이다. 과거 시장에 대한 규제가 법의 주요 기능이었던 반면, 이제 시장의 경제활동에 사법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조건에서 공공의 권력을 실행하기 위한 법은 어떤 근거에서 마련돼야하는 것인지 애매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 근거를 찾는 방식에서 자유주의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루소처럼 “모든 개인에게 속해 있는 자연적이고 기원적인 권리”를 통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이유로, 그래서 어떤 이상이나 역사적 절차를 통해” 그 권리를 제한하거나 인정할지 결정하려는 태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부의 운영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해 이런 통치성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현재적 한계라는 측면에서 그것을 분석”하고자 하는 태도다. 푸코는 전자를 혁명적(Revolutionary) 접근으로, 후자를 급진적(Radical) 접근이라고 명명한다. 천부인권사상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혁명적 접근은 정부보다 자연법에 따른 개인의 권리를 우선순위에 두는 입장이다. 통치성의 한계를 개인의 권리로 설정해서 이를 보장하지 못하는 정부는 없애버려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권리가 정부의 합법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한편, 급진적 접근은 오늘날 생각해보면 전혀 급진적이지 않을지도 모르는 효용성(Untility)에 초점을 맞추는데, 벤덤을 비롯한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급진적이라는 말은 ‘정부나 통치성에 대해 효용성이 있는가 없는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효용성에 근거해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것이다. 공리주의는 ‘통치 기술’이고, 공공의 법이라는 것은 무한한 정치의 목적을 제한하려는 사법적인 기술이다. 이런 면에서 공리주의는 일정하게 전통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권리를 자연법의 영역에 놓는 혁명적인 자유주의의 입장과 차이를 드러낸다.
루소에게 법이란 의지의 표현이고 이런 의지란 것은 자명한 근거였다. 그러나 의지의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언제나 개인의 의지와 일반 의지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 의지의 표현으로 실행되는 법은 양도된 개인의 의지들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런 대의 또는 대표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공리주의는 이런 한계를 개인과 법을 서로 떼어놓음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입장에서 개인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다. 이런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사법이다. 모든 개인은 법을 통해 자유를 보장 받는다. 개인의 자유가 법으로 보장 받지 못할 때, 그 법은 나쁜 법이라는 논리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유라는 것은 개인의 기본 권리의 실행이라기보다 정부로부터 분리돼 있는 개인의 독립성이다. 통치와 피치의 관계가 멀면 멀수록, 다시 말해서 정부의 영향력이 개인으로부터 배제되면 배제될수록 공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것을 유럽 자유주의의 기원이자 특징이라고 말하는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두 자유주의는 서로 삼투하면서 복합적인 양상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유주의를 ‘수입’하는 처지에 있었던 한국의 경우 이런 양가적 특징들은 굳이 구분할 필요 없이 뒤섞여 있다는 생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의 경우 대체로 ‘진보’로 분류돼왔던 입장이 ‘통치 기술’의 합리화 또는 세련화를 요구하는 공리주의에 가깝다는 점이다. 386세대가 대표적으로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1980년대에 사회와 국가의 변화를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장 받아야한다는 혁명적 입장을 취하다가 ‘민주화’ 이후에 제도의 합리화를 요구하는 입장으로 바뀐 386세대의 ‘전향’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1980년대를 마르크스주의의 전성기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현실은 이런 낭만적 회고와 다른 것이었다. 여전히 그 시대에도 주류는 자유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와 나란히 경쟁하는 대안적 가치로 대접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당시에 ‘민주화’ 운동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자는 요구에 가까웠다. 1980년대는 혁명적 자유주의의 시대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실체에 가까운 규정일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의 문제는 복합적이고 양가적이다.
민주화 이후, 자유주의에 영향 받은 ‘진보’의 개념
‘민주화’ 이후에 ‘진보’로 불려온 일정한 정치세력은 마르크스주의보다도 자유주의에 더 깊이 경도돼 있었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대안일 수 없었다. 과거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던 이들은 희미하게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언급하면서 ‘사민주의자’를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 역시 정치적 전망에서 기존에 ‘진보’로 분류돼왔던 급진 자유주의와 크게 변별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발전을 우선시하든 자유를 우선시하든, 자유주의의 급진성은 관습에 대한 저항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 ‘진보’의 개념은 다분히 이런 자유주의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강준만을 위시해서 1990년대에 대거 등장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386세대의 공동체주의를 자유주의로 대체하는 역할을 했다. 자유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시장의 ‘진리’가 독재의 유산 또는 관습을 청산하기 위한 효용성의 척도로 제시됐다. 시장은 ‘진보’의 상징이었고, 합리적인 정부는 이 시장의 원리를 잘 구현한 ‘통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선거가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행정가를 선출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이런 자유주의의 렌즈를 통과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 감시’의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시장의 ‘진리’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선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도 결과적으로 시장과 정부의 괴리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심장한 문제이다.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과 자본주의 사이에 일정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자유주의는 그 내재적인 모순, 다시 말해서 정부의 ‘통치 기술’을 끊임없이 시장의 ‘진리’를 통해 검증 받아야하는 문제를 항상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재현이라기보다, 예측불가능한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대한 대응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온갖 기술을 동원해서 자본주의 경제를 ‘합리화’하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이래로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은 20세기에 이르러 난관에 봉착한다. ‘최소 정부’를 주장하면서 시장의 ‘진리’를 이야기했던 자유주의는 퇴색하고, 미국의 뉴딜과 같은 복지정책이 등장한다. 물론 복지정책의 명분은 실업으로 인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비용은 시장의 ‘진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마련할 수 없다. 자유의 확대가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했을 때,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최소 정부’에 기초한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이 결코 모든 자유를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증명돼버리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후일 마가렛 대처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치인이 시장의 적으로 복지국가를 지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자유와 만인의 평등, 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돌한다는 것은 이미 존 로크 같은 초기 사상가의 주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제였다. 로크는 사유재산을 옹호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시민이 동의해준 권력만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자유주의가 자연스럽게 ‘진보’의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끊임없이 정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자유주의의 급진성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충분히 한국에서 발생한 ‘급진 자유주의 운동’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고 본다.
박근혜 퇴출 후 ‘박정희 체제’ 박멸하려면…
그러나 불행하게도 ‘급진 자유주의 운동’의 황금기는 10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세계적인 국면에서 자유주의의 영향력이 퇴조하던 그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18세기에 처음 발명된 뒤에 지속적으로 작동해왔던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이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위기에 봉착하고, 그에 맞춰 등장한 신자유주의라는 대응책마저 또 다른 이행기를 맞이할 무렵에 한국은 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 일정하게 급진성을 확보했던 한국의 자유주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고 그 위기의 중심에서 박근혜 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야말로 ‘민주화’의 결과로 출현한 ‘선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반민주주의의 종착역이자, 이명박 정부를 통해 극복하려다가 실패한 ‘자유주의’의 위기를 국가에 대한 요청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국민’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이 지난 4년 간 배반당했다는 것이 확연해졌다.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노가 박근혜 정부를 만들어낸 ‘기원’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박정희의 딸을 권좌에서 쫓아낼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병’이 시작된 그 박정희 체제를 박멸하지는 못할 것이다. /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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