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맘때면 심신이 지친다. 연말정산에 각종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12월 내로 기간이 좁혀 졌다. 통상 12월 중하순부터 1월 중순까지 였는데 관련 법의 개정과 행정의 요구 때문이다. 아직도 마무리 되지 못한 일이 몇 건 있는데다 일이 힘들다고 나간 친구가 제대로 문서 정리를 해두지 않고 나간 뒤로 별도로 정리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탓하지 않고 욕 하지 않으려 했는데, 남겨진 일을 치닥꺼리하다 보니 절로 입에서 욕이 끓는다. 남는 자의 배려와 떠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금 각인된다. 무릇 아름답게 떠나는 일에 유념할 일이다.
그래서 주말이 없고 거의 매일 야간에 새벽 귀가가 부지기수다. 여기에 감기까지 얻었다. 고단한 세월이다. 이런 심사를 아는지 뜬금없이 지인이 기막힌 사주풀이를 해주는 곳이 있어 심심풀이로 해봐라하여 해 봤더니 축약해서 보자면
"강직하며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의지에 찬 성품이다. 대지대업으로 성취하여 입신양명한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자수성가하여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심신이 건전하고 인내력이 강하여 능히 대성공할 것 이며 명예가 사해에 울려퍼지게 된다"
"태생적으로 그릇의 크기가 크게 가지고 태어난 편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잦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키워온 통찰력과 이해력으로 초년에서 중년, 중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갈수록 부귀가 더해간다고 하겠습니다. 진흙 속 진주와 같이 고결한 성품을 가진 당신은 자아 성찰적인 모습이 있으며 심신의 안정을 취하기 때문에 모태신앙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종교에 몸을 담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부, 목사, 스님 등의 종교가로 귀의하기도 하겠습니다. 대기만성형인 당신은 꾸준하고 근면한 생활을 영위하며 배움에 끊임없이 정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적절한 호기심과 탐구 정신으로 하나의 사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파고든다 하겠습니다. 만약 이러한 성향이 연애에까지 미친다면 다소 집착으로 여겨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과의 사교를 즐기기 보다는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명상으로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하겠습니다. 고독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결혼은 다소 늦은 시기에 할 수 있겠습니다. 가능하면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무난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려 하지만, 다툼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끈질긴 토론과 논쟁으로 상대를 좌절시킵니다. 강한 추진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반드시 원하는 것은 손에 넣고야 말 것입니다."
듣기싫은 소리는 없다. 맞는 것도 있고 아닌 것고 있다. 이것이 정답 아니든가. 솔직히 가끔 토정비결이니 이런 사주에 따르면 나는 어디에도 그늘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아마도 그렇게 심심파적 해보라 권했던 지인이 노렸던 결과도 이런 류의 위안과 덕담이 아니었을까 . 그의 배려에 고마움을 전한다.
주말 갑자기 대타로 현장 안내를 하게 되었다. 충남 금산문화의 집에서 산복도로 견학을 온다고 가이드를 찾다 적임자를 찾지 못한 후배의 요청이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으나 흔쾌이 수락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대상지는 슬로산복이 아닌 영도 흰여울마을로 택했다, 겸사겸사 였다. 바람도 쉴겸 흰여을 사후도 궁금해서 확인할겸, 무엇보다 지갑 사정이 좋지 않아 사례도 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나선 흰여울 마을 방문은 저무는 이 한해를 다시금 뒤돌아 보게 했다.
겨울 흰여울 골목은 조용했다. 다만 주말의 갈맷길에서는 해녀들이 건져 낸 이 바다의 해산물로 오가는이들의 발걸음을 붙들고 있는 등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흰여울에는 마을을 사진에 담고자 하는 사람들과 테이터 족 몇 명 만 오갔다. 녹색골목 조성 때 심었던 초화류와 관목들의 상태느 양호했다. 포토존 안내판은 곧 부착할 것이다.
유유자적한 안내였다. 마을의 형성과 지향적 특성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뿔논병아리 한 마리와 청둥오리 두 마리가 보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개체들이다. 행렬을 놓쳐버리고 어쩌다
골목을 돌아 겨울 흰여울마을에서 보았던 오후 한때의 풍경들을 담아 보았다.
바다는 눈이 부셨다. 올 때마다 이 바다의 흐름과 빛깔을 기록으로 남겼다. 매번 달랐기 때문이다. 이곳 주민들은 그 다름의 바다를 매일 볼 것이다.
두번째 대상지는 목도와 남북형제의 모습이다. 문득 2000년대 초 점 섬들을 찾아다니며 생태조사를 했던 때가 또 올랐다, 그때의 인연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부산의 최 남단 남형제섬에서 매가 살고 있음을 발견한 일은 더욱 그랬다. (2001년 9월20일 -12월20일)자연생태의 재발견이란 타이틀로 시작된 이 시기의 조사 활동 결과는 나중에 '아빠는 생태박사'로 단행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후 10년 마다 증보판을 내기로 했던 4인방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바빠서 였다.
당시 부산일보 이병철기자는 형제점 답사를 이렇게 적었다. "...무엇이 있을까. 남형제섬에 대한 첫 답사는 두근거림으로 시작했다. '부산의 섬'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를 겸한 취재는 이번 답사가 처음일 뿐만 아니라 남형제도가 한국 해양환경오염사에서 잊지 못할 유류오염사고가 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 95년 9월21일 벙커C유 2천800여t을 싣고 항해하던 유조선 제1유일호가 남형제섬 암초를 들이받고 좌초한 사건 현장을 취재했었다. 당시 벙커C유가 시커멓게 덮었던 남형제섬과 그 인근 해상에 유화제를 마구 뿌려대던 광경을 해경헬기와 경비정을 타고 지켜봤었다.
어떻게 변했을까. 이번 답사에서 취재기자를 비롯,수중팀은 남·북형제도에 각각 40~50여분씩 스쿠버다이빙했다. 안전을 위해 다이빙 횟수는 하루 2차례,수심은 15m로 제한했다. 두 섬 모두 수중 시야가 10m 이상으로 수면에서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좋았다. 좋은 시야와 산호의 서식 등은 물이 맑다는 뜻이었다. 취재의 결론은 그 섬은 '내 형제처럼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에 다시 한번 경외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난 1일 '자연생태의 재발견' 답사팀은 부산항 5부두에서 부산시 어업지도선 부산221호(선장 김두칠·40t)에 승선,몰운대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남형제섬과 인근 북형제섬을 찾았다. 겉으로는 바위섬에 불과해보였던 무인도 남·북형제섬에는 자연이 살고 있었다. ...답사팀은 육상팀과 수중팀으로 나눴다. 육상팀은 접안시설이 전무한 남형제섬에 가까스로 내려 암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발을 헛디디면 바다에 떨어지는 위기일발의 순간. 눈앞 벼랑틈 사이에 갯까치수염 도깨비고비 땅채송화가 소담스레 피어있다. 순간 '킷 킷 킷 킷' 하는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답사팀을 주시하며 선회하는 새 두마리가 카메라에 잡혔다. 매였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인 매(천연기념물 323호)가 부산에도 살고 있는 것이다. ..."
뒤돌아보니 나름 이 도시의 산과 강, 바다, 습지 등 발 딛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지난 2009년에서 2012년까지는 갈맷길을 만든다고 두루 접했고 시방은 공원과 노거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기회를 가져 보았을까. 복이다 여긴다. 비록 더불어 사는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세월이었다만
마을 끝 백련사 밑에 공영주차장 공사가 한창이다. 사실 마을 주차시설은 전무한 상태다. 그렇지만 일부 주민은 그런 주차시설이 사람들을 불들들여 피곤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노출될 궁색함이 싫고 무엇보다 별로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다. 지역 재생 측면에서 나름 성공했다고 하는 동구 안창 남구 문현동 벽화마을 감천의 사례가 좋게 보이지 않은 이유가 그런 것이다.
그나저나 골조(아시바) 사이 갇혀있는 저 팽나무는 어떻게 될까
그동안 이곳을 오가며 노거수가 없다고 판다했는데 바닷가 사면에 뿌리내리고 있는 팽나무 한 그루 주목하게 됐다.
두 그루인듯 해서 그 흉고상 아직 젊은 나무라 여걌는데 자세히 보니 근원부에서 줄기가 두개로 뻗은 것이다. 결국 한 나무라는 것인데
하지만 보다 시피 이런 낭떨어지다. 하지만 또 욕심이 생겼다. 측정해봐야지 하는
금산 단체방문자들은 일정상 여기까지 탐방하고 일박을 위해 송정으로 갔다. 그들을 보내고 혼자서 마을을 되짚었다.
저물녁 남항 묘박지는 주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 선다. 흰여울에서의 일박이 필요한 이유다. 조만간 주민들이 준비한 게스트하우스가 그런 욕구를 채워주리라
석양을 등지고 있는 장군반도 암남공원쪽 하늘에 갑자기 새들의 비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새떼의 정체는
이제 나도 귀가를 서둔다. 귀가라기 보다 귀사가 맞다. 햐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설치미술 작가 박경석이 만든 작품, 작명은 내가 했다. 박작가도 그럴듯해서 좋다고 했다.
앞서 보았던 작품은 그냥 갈매기의 꿈이고 아래 작품은 흰여을 갈매기의 꿈이다. 방문지를 위한 것도 있지만 주민의 여망을 담은 상징물이다.
그 너머 남북형제섬을 다시 본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가덕과 거제의 존재가 불빛이 말해주고 있다.
마을 공동체는 마을의 변화를 추구하되 가능한 원풍경을 지키는 방향으로 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변호인을 촬영한 이 낡은 집도 원형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가자고 했다. 문득 영화에 등장했던 실제 인물이었던 고 노무현대통령이 보고 싶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1994년 펴낸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돈 잘 벌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재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1981년 9월과 10월, 이듬해 4월 세 차례에 걸쳐 구속됐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해 1차로 구속된 고호석, 송병곤 등의 변론을 맡았다.
나는 어쩌다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인권운동을 한 변호사는 이흥록, 김광일 두 분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사건에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변호를 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된 것이다. - 자서전 <운명이다> 77p
아마도 고호석씨나 송변곤씨가 더 그를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길은 다소 달랐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영화에서 노변은 송강호 주연의 송우석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김영애가 국집집 주인으로 나오는데, 사람들이 그녀가 이곳 영선동 출신인줄은 잘 모른다. 김영애는 변호인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06년에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언하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암투병중인 그녀가 쾌차하기를
남항대교에 조명등이 커지고 천마산의 줄기였던 남부민일대 들어선 아파트들이 묘한 대비를 보여준다.
누군가 흰여울 마을을 한국의 산토리니에 견주기도 한다. 그런 풍경을 동경한 것인지, 마을을 보고 싶었는 건지 그런 비교는 적합지 않다. 그냥 흰여울아믈이다.
흰여울 점빵 앞, 문을 닫고 이층에선 아마도 종석이가 같이하는 IC밴드 일원이지 싶은데 열심히 기타 연습중이었다.
흰여울길 마지막 골목 모퉁이자 첫 모퉁이 이 꺽어지는 모퉁이가 매력적인 장소다. 그 다음은 뭘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불러 일어키는 곳이다.
하기사 초입에서 이미 전체 풍광은 다 드러나긴 한다만 그래도 밤과 낮 아침이 매양 다르니 이 또한 매력적인 장면이다.
내친 김에 흰여울에 속하지 않는 보건고등학교 지점까지 돌아다 본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곳의 변화다. 흰여울이 조명을 받고 사람 발길 잦은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자 외지인들이 땅을 사들여 이익을 도모하는 일들이 많아 진 것이다. 이른바 흰여울이 보여주는 풍광을 공짜로 취득하고 그런 곳을 찾는 사람들의 찾는 사람들의 지갑을 노리는 짓이다. 한마디로 미운 짓이다. 주민들이 마을기업이니 협동조합 등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내일을 도모하는데, 그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이나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있다면 그런 배려는 기본적으로 장착할 이다.
아무튼 씁쓸하다. 이런 이기적 세태가 ..그리고 작금의 암울한 이 시절이
눈 오는 저녁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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