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를 마치고 송산 이모집으로 가다 잠시 짬을 내어 궁유 일붕사로 향했다. 길 옆 느티나무 수림대가 정겹다. 노거수는 저렇듯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다.
일붕사는 궁류 봉황대 적벽에 들어섰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지역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련지는모르겠다만 입지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ㅈ 않는다.
초겨울을 앞두고 주변은 겨울같은 풍광이다.
신록 만연한 봄날이었다면 해본다
일붕사 딱 여기까지만 이었드라면 해본다. 늘 넘치는 과욕이 문제인것 같다.
예전에는 이런 폭포도 없었다. 인공이다. 물길을 돌렸거나 동력을 이용한 것 같다
그 아래 인공조성 석굴이 입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무량수전과 대웅전은 그 크기며 깊이가 세계최대라 하여 기네스북에 등재 되기도 했다.
규모가 안되면 주목받지 못하고주목받지 못하면 도태당한다는 믿음이 이곳에도 작용한 것일까. 진실로 불사 아닌 불사다. 눈길을잡았던 것은ㅇ 산신각 옆 암벽에 음각한 나반존자였다.
안타까운 사실은 시나브로 궁류 봉황대란 명성보다는 일붕사가 먼저라는 것이다. 사실 일붕사가 이곳 평촌 봉황대에 거처를 마련한 것은 1세기도 안된다. 일붕사는 창건주 일붕 서경보 스님이 일붕사의 전신인 성덕암(신라 성덕여왕 때 창궐)이 잦은 화재로 소실된 이유가 봉황산의 기운이 너무 세다고 여겼고 하여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하는데 ... 봉황이 깃들지 않는 봉황대가 되었다. 후회스러운 일은 간만에 갔는데 봉황루에 오르지 않있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빌려온 그림으로 대신한다. 사진출처: http://blog.daum.net/mkhur1004/1512
송산으로 간다.
이모집 뒷편 야트막하니 신촌 저 너머까지 까지 이어진 구릉은 언제봐도 매력적이다. 내 유년의 놀이터이기도 했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또래들과 어울려 옥동까지 놀다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신촌출신이고 이곳은 방학때나 오는 곳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생각함 얼굴 붉어지는 순간도 있었다. 같은 학년 동년배들이 어울려 놀았다. 풋풋함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겁 잆이 마셔된 술 때문에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기도 했고...
에전에 이모집은 답배를 팔았다. 골목 초입에 이모하고 뛰어 들어 가던 내 유년이 보인다.
집뒤 논에는 보리와 양파가 자라고 있다.
송산 박씨(밀양박씨) 선령에서 이종사촌형과 감을 따 보기도 했다.
마을이 차분히 들어 앉아 있다. 마을 앞을 유곡천이 흐르고 그 앞 산 너머 외가가 있었던 장실이다. 가끔씩 손없는 집이 되어버린 외가 할배할배 묘에 벌초를 가기도 한다, 어머니 어린날의 이야기 조금은 들어 안다, 인민군이 대밭에 머물다간 기억이며 외조부의 이야기 등을
이모가 마실간 사이 송산 방앗간에 둘러 쌀을 찧었다.
손자들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과 할배를 바라보는 장손의 눈길에서 닮은 구석을 찾아 본다,
이모집에도 작은 도장기가 있다. 굳이 방앗간까지 오가며 힘써지 말라고 자식들이 마련해 준것이다. 필요할 때 마다 필요한 만큼 편해진 세상이다.
어머니와 이모 두분이서 한되 더 가져가라니 못가져가니 ...
그 모습 새삼 정겹다 정겨운 것운 골목이기도 하다. 이곳은 이런 돌ㅇ 많아 다들 집을 짓고 담을 쌓을 때 이렇게 쌓았다. 지금에사 스렝트에 기와 일색이지만 에전에 초가며 기와집 뿐이때는 의식주의 모든 것이 이땅에 널부러진 것들이었다.
둘째 여동생과 잘 어울렸던 또다른 박씨 뮨중의 딸이 살던 집, 여기도 집성촌이다. 담을 경ㄹ계로 큰집 작은잡 다닥다닥 붙어 있다. 신촌 우리집도 그랬다.
이제 여기도 빈집이 된지 오래다.
아침 저녁으로 아궁이에 불때며 밥상이 대청이며 안방으로 오르내렸던 분주한 걸음들 보인다 또는 대청에 걸터 앉아 담배피는 이의모습도
그 시절 사람들이 보고 싶다.
시골와서 달리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큰아들은 이곳 저곳 혼자 돌아 다니다 못해 고개를 파묻고 잠을 잔다. 기나마 막내 아들은 자전거 타는 재미라도 있어 온종일 분주하다. 그리고 마침내 귀가가 이루어질 때 앙들은 지겨움에서 벗어난 듯 활기를 뛴다.
손자들에게 기어코 용돈을 쥐어주는 이모를 우리 아이들도 좋아 한다. 시양에서 멀어질때까지 손 흔들어주는 이모의 모습을 보며 고향마을을 스친다. 반주 삼아 마신 술기운 때문이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부산이다.
고향집을 두고 도시 내 사는 집으로 오면 문득 낮설어 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번다하고 불빌 휘황한 이곳이 좋다고 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 - 이정희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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