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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이전 흔적

2010.4.20 4.19 혁명 50주기에

by 이성근 2016. 9. 16.

 

혁명의 아침 비가 내렸습니다. 50년 전 4월19일, 꽃다운 청춘들이 산화해 간 날입니다. 그리고 50년 후 4월19일 아침 대통령이 특별 방소을 통해 천암함 침몰사고과 관련 ,철저한 원인규명과 순직 장병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흘려 보냈습니다. 믿음이 안생겨서 입니다.

 

그해 4월 현역일선기자들이 기록한 현장 기록입니다. 300쪽 이상의 분량이지만 워낙 낡아 뒷장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목차는 서시와 서문(학우여 대답하라/ 불란스 혁명처럼/ 승리의 길은 이제부터다 를 비롯 , 교수단 일원 중원 중에서 '서문을 대신하여'를 통하여 책 발간에 따른 의미와 정신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19~26일 투쟁사의 성격과 발단, 경과, 제반성과, 외국의 반향, 수기, 에피소트, 비화 형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부록으로 사월혁명 희생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시(序詩)

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

서을 수송국민학교 제4학년 5반 강 명 희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 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 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 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 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 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 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4.19의 시작은 대구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책은 이를 두고 근인(近因)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해 2월28일 일요일 전통적 야당도시인 대구에서 민주당 장면박사의 1차 유세가 있는 날인데,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명령이 내려졌다 합니다. 이날 이 황당환 등교에 분개한 대구와 경북고 학생들은 '학생 인권 옹호와 민주주의를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휩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곤봉과 구둣발 세례를 받고 이중 30여명은 경찰의 취조를 받았는데 배후와 정당의 사주를 케내려 했자만 허사였습니다. 대구 데모 이후 데모는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3월15일 부정투표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저항이 마산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정선거를 즉시 중단하라 ! 경찰은 이날 시민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마산에서는 十여명이 총탄에 쓰러졌고, 三十여명이 총격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닥치는대로 검거가 이루어졌고, 모진 고문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각 방송들은 이승만 40%, 이기붕 30%의 득표를 올렸다고 집계 결과를 앞다투어 보도 했고, 검찰과 경찰고위층은 마산사태를 공산분자들이 조직한 조직적인 폭동이라고 단정하고 최인규 내무장관은 데모대 속에 대남간첩이 끼어 있다고 발표하면서 그 사람이 수사 기관에서 이용하다가 실종된 함남 단천(端川) 출신의 괴뢰군 총사령부 정찰국 소속 대남간첩 심금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날 데모대를 향해 발포를 한 경찰은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 경위 등이었는데, 그 자는 악명높은 친일 경찰 아라이 겐베이 였습니다. 반민특위에도 회부되었던 작자가 해방 후에도 경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만의 아픔이 아니라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자 역사의 정의를 외면했던 대한민국의 자화상입니다. 그 자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 유기 과정에 대해 '3월 15일 밤 10시쯤 교통주임으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에게 보고하자, 서장이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자 지프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 시체를 담아 싣고 일단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서 시체를 유기하기로 마음먹은 후 다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로 시체를 가져가 순경 한대진과 지프차 운전수의 조력으로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고 자백했지만 허술한 세월 속에 그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살다 어느 틈엔가 자유인이 되어 15년 전까지 부산에서 식당을 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허망하기 까지 합니다.

 

박 종 표

꼭 다문 보랏빛 입술 살쾡이눈 그리고 빼갈 네 도꾸리
1미터 60의 낮은 키
일본 헌병 오장(伍長) 아라이(新正) 앞잡이 박종표
일제 말 동포 고문 및 고문치사 수십 건
해방 이후
마산경찰서 경비 주임 박종표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마산시위

학생 김주열이 얼굴에 최루탄 박혀 즉사했다
경찰서장 손석래의 지시로
그가 나서서
그 시체에
돌 여섯 개 매달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 던져넣었다 가래침 탁 뱉었다

그 시체가 떠오를 줄이야
바다 밑 물속에 깊이깊이 가라앉았다가
매단 돌덩이들 빠져나가
시체가 떠오를 줄이야
하필이면

홍합을 잡던 노인의 눈에 발견될 줄이야

소스라쳤다
소스라쳤다

쇠갈퀴 끌어올렸다
낙배에 실었다
부둣가에 내려놓았다

죽은 고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었다
김주열이었다
김주열이었다

김주열 시체가 떠올라 4월혁명으로 내달렸다

박종표
그는 이승만의 끝
그 자신의 끝이었다

대구교도소 형장
일제시대 이승만 시대의 끝이 그의 끝이었다 (시인 고은 '만인보'에서)

 

 

김 주 열

마산 3월의거 한 돌이 지나간다
세상은 잠 이룰 밤이 없었다
공포였다
불안이었다
다음날 물가는 또 뛰었다
1960년 4월 11일 오전
이런 시절에도
중앙부두 물 위에 낚시꾼이 있었다

낚시꾼 눈이 커졌다
벌떡 일어섰다 걸려든 물건을 보았다
시체
썩은 시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
하고 외쳤다

눈에서 뒷머리 쪽으로
20센티 쇳토막이 박혀 있었다

하나둘 모였다
하나둘 모였다
어느새
천 명이 모였다
살인선거 물리쳐라
시체 인도하라

3월의거가
4월의거로 불붙었다
4월 12일
만 명이 모였다

또 만 명이 모였다 나아갔다
마산시청
자유당 마산시장
국민회 지부
서울신문 지사에 돌을 던졌다

야당이다가 여당으로 돌아선
국회의원 집
시의원 집
사장의 집
우체국
소방서
어용신문 서울신문사
마산형무소에 돌을 던졌다

4월 13일 다시 궐기하였다

마산상고 합격자 김주열이
경찰에게 타살된 3월
타살되어
아무도 몰래 물에 던져진 뒤
그 주검
가라앉았다가
그 주검에 매단 돌 풀어져
떠오른 뒤
거기서 4월혁명은 시작되었다

하나의 죽음이
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
뜨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목이 탔다

이제 마산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시인 고은 <만인보> 중에서

4월19일 경무대 입구 도로 제1진 바리케이트에서 총격하는 경찰과  데모데의 투석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기마순경

 

4월18일 고려대 데모대가 동대문에서 종로로 이동하는 장면,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다음 귀교 도중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배후는 반공청년단을 움직이던 엘리트 깡패 유지광이었고 이정재였습니다. 나중에 이정재는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정재는 이승만의 경호책임자였던 곽영주 경무관과 의형제를 맺기도 하였지만 둘다 교수형으로 사라졌습니다.

 

19일 경무대 앞에서 일제 사격을 받고 뒤로 몰리는 데모대, 이때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4월19일 경무대로부터 중앙청 쪽으로 데모대를 압박하여 나오는 경찰사격대, 이날 결찰의 발포로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천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 희생자들은 대학생 22명, 고등학생 36 명 노동자61명 중학생. 국민학생19명 무직 33명 화이트칼라 19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날까지도 부정선거 상황을 몰랐다고 합니다.

25일 교수단 데모가 데모대에게 힘을 싫어 주었다고 하나, 그들은 역시 지식인이었습니다,

 

26일 아침 데모대와 군인에게 박수를 보내는 군중

4월27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가는 이승만 박사

하이에나들입니다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모리배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또 옷을 갈아 입겠지요

 

아래 왼쪽 사진은 교수형 후 진단을 위해 다시 끌어 올려진 당시 경무관 곽영주입니다.  

당시 17세로, 마산상고 1학년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가 자행된 3월 15일 밤 마산시청 앞 시위에 참가했다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경찰은 그 처참한 모습을 숨기려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유기했는데, 근 한 달만인 4월 11일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하여 마침내 2차 시위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가두시위로 확산됐고, 이는 마침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떠오른 마산 앞바다 현장입니다

 

    [오월의 꽃 / 범능스님

 

4월19일 시골에 와서

                                              신경림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위에

살구꽃이 피고

피어서 꺽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나는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에 와서

통금이 없는 빈 거리를 헤메이며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티끌처럼 쏠리며 살아온 나날

돌처럼 뒹굴며 이어온 세월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친구를 생각했다. 찬돌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에 들었을 친구를

그 손톱에 베었을 핏자국을

 

4월이라도 바람은 그냥차고

살구꽃이 피어도 꽃가지에 와 매달려

친구들의 울음처럼 잉잉댔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꺽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문학사상 1985년 4월호 4.19 15주년 특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