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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이전 흔적

사는이야기 2010.1.27 -허황후를 찾아서

by 이성근 2016. 9. 16.

 

 

2월2일 습지의 닐을 앞두고 환경부가 주최하고 걷고싶은부산 , 습지와 새, 국가습지사업센터 주관 습지생태관광 시연회 준비를 위해 허황후 초행길과 하구 지형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기 위해 사전 답사겸 아이들을 데리고 김해를 다녀 왔습니다. 진시장에서 1004번 버스를 타기 위해 잠시 차 시간이 있어 이웃한 자성대를 둘러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밝던 아이들의 표정이 얼마 못가서 지겨워 했습니다. 종점과 종점인 구간에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다행히 기사분의 친절로 버스 정류소가 아닌 능 정문 근처에서 하차하는 배려를 받았습니다.

구지봉과 허왕후 능 사이 굴다리로 사라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아이들이손을 흔들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1930년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맥을 자른다면서 도로개설을 구실로 허왕후릉과 이어진 구지봉의 거북 목 부위를 댕강 잘라버림ㅇ로서 만들어 진 길입니다. 정기의 말살 차원에서 였습니다. 마산으로 통하는 국도 14호선의 배경입니다. 그렇게 한 세월 보내다 지난 1990~93년 잘린 거북의 목 부위에 토석을 덮는 식으로 맥을 잇는 작업 끝에 오늘날과 같은 굴다리가 만드어진 것입니다.

구지봉으로 가기 전 수로왕비릉 입구입니다.

능역 입구입니다. 홍살문이 왕족 능임을 말하고, 숭보재와 내삼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능은 원형 토분이나 특별한 시설은 없었습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는데,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이라고 2행으로 각자한 능비가 있습니다.

 

파사석탑에는 문외한이라 인터넷을 뒤져 합당한 글을 보고 옮겨 보았습니다. 김해 금강병원 원장님으로 계시는 허명철의학박사님의 글입니다. 필요한 부분만 떼왔습니다. ...김해 구산동 구지봉 산자락에는 사적 제 74호인 가야 수로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 있다. 이 경내에는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시집오면서 가져 온 탑이라고 전하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하도 마모와 파괴가 심하여 두께 20정도의 돌 다섯 개를 그냥 쌍아놓은 것 같다.(사실입니다)

 

15년 전의 일이지만 모 신문사 언론인이 김해 허황후 무덤에 뭉그러진 다섯 개 돌덩어리를 쌓아 놓고 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유물이 부족하다보니 뭉그러진 돌을 쌓아두고 야단이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난다. 그때 역사에 대하여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형편없이 망가진데다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탑의 크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이 120의 낮은 것이어서 탑이라는 개념은커녕 돌무더기에 불과하였다. 이 탑이 2000년 전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이라고 전설적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문중에서 겨우 관리하는 정도로 지방 문화재조차도 등록하지 않은 그야말로 잊혀지고 버려진 돌무더기에 불과하였다. 문화재관리국이나 석탑을 전문으로 다루는 불교계까지도 아예 이것을 탑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심 밖에 있었다.

 

과연 탑이 아닐까?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일까? 전설인 구전설화는 진실성이 없는 것일까? 나는 구전설화를 믿으면서 2000년 전 역사로 돌아가서 하나하나 음미해 보고 싶었다.

 

삼국유사 금관성(김해) 파사석탑편에 이 파사석탑은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왕비가 되기 위하여 가야국으로 항해하여 올 때 가져온 것이며, 공주가 양친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해 가야국으로 올 때 파도신(波申)의 노여움을 만나 항해를 할 수 없어 다시 돌아가 부친께 사실을 고하니 부왕께서 이 탑을 싣고 가게하여 무사히 가야국에 도착할 수 있게 하였다. 이 탑은 모가 진 사면의 5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조금 붉은 빛의 반전이 있고 석질이 좋아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탑이 波申을 눌러 파도를 진정시키므로 일명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가면 파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믿고 몰래 조금씩 떼어가 망가뜨렸기 때문에 사각형의 돌이 마치 원형처럼 망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연선사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돌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본초강목이라는 중국 한약책에 보면 婆娑石은 해독작용이 있으며 아주 값비싸므로 가짜가 많아 진위를 가리는 법으로, 태우면 유황 냄새가 나며, 닭벼슬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피가 물로 화하여 흘러내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탑돌아래 아주 적은 파편을 주워서 실험해 본 결과 분명 파사석이 확실하였다.

 

파사석탑의 '婆娑'의 뜻은 무엇일까? 노파'', 춤출'' 즉 노파가 춤추는 석탑이 되는데 이런 불탑명이 있을 수 없으므로 한문식 뜻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인도의 범어식 뜻으로 음미해 보면 '''Bha'로서 진리이고 '''Sa'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진리가 현존하는 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인도식 석탑명이 분명하므로 인도에서 제작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실험과 언어적 고찰 등을 하면서 곰곰히 탑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불탑이 확실하다는 심증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학문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것인가 하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약 2000년전에 범선을 타고 죽음의 바다인 인도양을 거쳐서 인도에서 가야까지 항해를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답은 대부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탑을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믿기에는 많은 항해사적 고증이 필요한 것이다.

 

...가야사를 구성하는 요소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등 다양하지만 나는 우선 전설적으로 김해사람이라면 누구나 믿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도래지가 고구려(소수림왕 AD 372)가 아니라 가야(AD 48)라는 사실에 비추어 종교분야에서 가야불교의 증명, 복원, 확립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황후는 국제결혼을 통하여 인도 아유타국에서 시집오면서 가져온 파사석탑과 더불어 불교를 최초로 전래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모화사상에 물든 저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AD 372년 중국에서 다소 강압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께 전파하는 왕권불교로 이것이 한국 최초의 불교전래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 충렬왕때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AD 48년 허황후가 파사석탑과 함께 최초로 전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삼국유사의 기록은 전설인양 정사로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사학계의 흐름이었다.

 

불교의 전래를 증명하려면 반드시 삼요소가 성립되어야 한다. , (불상 및 불탑), (불경책), (스님)이다. 따라서 가야불교를 증명하려면 옛 가야 땅 어디를 헤매어서라도 불탑을 반듯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6가야 지역을 돌아다녀도 의심가는 탑이라고는 뭉그러진 다섯 돌덩이로 전설을 간직한 이 파사석탑 뿐이었다.

 

잠깐 불교의 미술학적 이야기를 하자면 인도에서 불상은 언제부터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BC 5세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후 많은 탑을 세워 사리를 보관하여 부처님을 대하듯 경배하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다. AD 1세기말경에는 부처님에 대한 경애심이 강하여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BC 5세기AD 1세기까지는 無佛像시기이며, AD 1세기말 이후부터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즉 허왕후가 시집온 AD 48년에는 인도에서 조차도 불상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허왕후는 불상이 아닌 불탑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탑은 어느 것이며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것을 풀어야 가야사의 수수께끼는 풀리게 되는 것이다.

 

가야불교의 증명으로 종교문화의 전래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보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국제결혼을 통하여 평화적이며 자율적으로 직접 전래되었다는 것이 나을 것이고 또, 한국 최초의 불교 전래지가 김해라면 가야 후예인에게 역사적 긍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등에서 꼭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명상기도 덕택인지 몰라도 꿈에 파사석탑 아래에서 너무도 아름답고 맑은 백의의 관음보살님이 두 손을 내밀며 당겨달라는 듯 하였다. 그날 밤 꿈을 꾼 후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돌탑에 가서 다시 살피기 시작하였다. 탑돌 아래에 이상한 문양이 보였는데 인도 어느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문양과 비슷하다는 감을 느꼈다.

 

이 돌탑은 그동안 신성시하여 특히 왕능을 지키는 노인장께서 더욱 그러기에 감히 망그러진 돌을 쌓아 놓은 둣하지만 해체 분해할 생각초차도 할 수 없었다. 또 분해해 본다 해도 어떠한 결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200회 이상 다녀도 그저 바라보고 경배시 할 뿐이었다. 그동안 관찰의 대상이 되면서 점점 친숙하게 되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더욱더 경배시하였기에 소중히 모시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러나 꿈에서 손을 내미는 것을 미루어보면 꼭 분해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분해한다는 것은 그저 무너지지 않고 안전하게, 넓고 큰 돌은 아래로, 좁고 적은 돌은 위로 순서대로 쌓아놓은 삼각형 형태를 다시 하나씩 내려놓고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드디어 분해하기 시작하였다. 아주 정중히 소중하게 숨을 죽이면서 가만히 가만히 하였다. 놀라웠고 놀라웠다. 그저 이름없는 돌이 아니라 사리보관소의 구멍(지름 10, 깊이 6)이 있는 돌과 사리공을 덮는 뚜껑돌을 발견하면서 이것은 분명히 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물론 사리는 없었다. 그것은 예견된 사실이었다. 이 탑이 원래 허황후가 계신 궁중터 즉, 호계사라는 절터에 있던 것을 약 130년전 김해부사가 왕후께서 가져오신 것이라고 능침 곁으로 옮겨 모시게 하였기 때문이다. 각 돌마다 정교히 측정하면서 무늬모양도 세밀히 관찰하였다. 역사적으로 이 탑의 이름만 있을 뿐, 그 크기나 형태에 대한 기록은 한 곳도 없었기에 이번 분해로 탑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탑을 분석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원형대로 석고를 복원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모양이 삼각형이 안정형이 아닌 역삼각형으로 아래층이 좁고 위로 갈수록 넓고 큰 돌로 쌓이게 되었다. 이런 형태의 탑은 우리나라에는 아예 없고, 인도의 동굴사원인 아잔타 엘로아나식에서 볼 수 있는 축소형 스트파 즉, 불탑과 일치하였다. 그 형태, 크기, 문양, 사리보관소, 석질, 탑명 등을 확인 검토한 결과 인도에서 만들어 가져온 축소형 불탑이 분명하므로, 허왕후가 인도에서 불교를 직접 김해로 전파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물적자료가 되었다.

 

이제 이 탑은 전설이 아닌 삼국유사에 기록된 국보가 분명하므로 지방문화재로서 겨우 등록되어 세인의 이목을 받으며 가야에 남은 유일무이한 국보급문화재가 되었다. 이 긴 여정의 역사풀이로 허왕후께 다소나마 후손으로서 일을 한 듯 하며, 잊혀진 국보급 파사석탑에 새로운 경애심을 느끼며 가야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출처:http://kin.naver.com

 

애들은 역사는 뒷전입니다. 놀데를 발견하고 미끄럼을 타고들 있습니다. 큰놈이 타니 작은 놈이 따라 합니다.

금관가야 성립의 한 축인 허황후의 도래는 여전히 미스테리가 많습니다, 그 누구도 정확히 단정짓지 못하고 추정 할 뿐인데 전하는 말을 쫒아 그 초행길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락국의 왕이 된 수로는 이듬해 궁궐을 새로 짓는 등 내치에 힘쏟는데, 그때까지도 마땅한 배필이 없어 신하들이 배필을 맞아들일 것을 청합니다. 그 상황을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 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 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 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 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 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地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錦繡綾羅·衣裳疋段·金銀珠玉·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 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集而護之. 於是 王與后 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國公主也. 姓許 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 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莅家邦 未定匹偶 卿等須遣公主 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 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首敢叨 龍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 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 遂還來船 篙工楫師共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 廻鑾 與后同輦 媵臣夫妻 齊鑣並駕 其漢肆雜物 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勅賜媵臣夫妻私屬 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 以賓館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豊羨.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건무(建武) 24년 무신년(서기 48년) 7월 27일, 아홉 간들이 입궐하여 뵙고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청컨대 신(臣)들의 시집가지 않은 딸들 가운데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서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소서.”

왕이 말하기를,

“짐(朕)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에 의한 것이다. 짐의 짝이 되어 왕후가 될 사람도 역시 하늘에서 명하실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고 하고는,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는 서울의 남쪽에 있는 섬이다. 승점은 임금의 가마가 닿을 만큼 가까운 언덕이다.]으로 가게 하였는데,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로부터 붉은 돛을 단 배가 꼭두서니빛 깃발(旗)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에서 불을 피우고, 곧 물을 건너 뭍으로 내려와서 앞다투어 달려왔다. 신귀간이 이것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들어가 아뢰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곧이어 아홉 간들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노를 가지런히 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들어서 맞이하게 하였다. 아홉 간들이 되돌아서 모시고 궁궐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왕후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평생 알지 못한 터에 어찌 경솔하게 따라 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관리들을 거느리고 행차하여, 궁궐로부터 서남쪽 6천보(步) 가량 되는 곳의 산기슭에 장막을 치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너머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매어두고 상륙하여, 높은 고개에 올라가 쉬었는데,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나라에서부터 시종하여 온 잉신(媵臣)이 두 사람이었는데,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고 하였고, 그들의 처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고 불렀다. 따로 노비가 도합 20여명이었고, 가지고 온 각종 비단과 의복, 금・은・주옥과 각종 구슬, 보물과 그릇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점차 행궁에 가까이 오자, 임금이 나아가 맞이하여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과 그 아래의 무리들은 계단 아래에서 알현하고 곧 물러갔다. 임금은 관원을 시켜 잉신 부처들을 인도하게 하며 말하였다.

“사람마다 각각 한 방씩 쓰게 하고, 그 이하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 사람씩 들어가 쉬게 하라.”

그리고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료와 식사를 내리게 하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이부자리에서 자게 하였다. 그리고 의복과 비단과 보물들은 군사들을 많이 배치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왕과 왕후가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께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 여섯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젯밤 꿈에 똑같이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말씀하시기를 ‘가락국 원군(元君) 수로라는 자는 하늘에서 내려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성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그의 배필로 삼게 하라.’고 하시고는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에서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이제 곧장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서 멀리 증조(蒸棗: 남쪽 바다의 섬)를 찾아가기도 했고, 방향을 바꾸어 아득히 반도(蟠桃: 동쪽 바다의 섬)로도 가보았습니다. 이제 보잘 것 없는 얼굴로 외람되이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부터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아래 신하들로부터 왕비를 받아들이라는 청이 있었으나 들어주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몸소 찾아왔으니 이 몸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오.”

드디어 동침하여 이틀 밤과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공주가 타고 왔던 배를 되돌려 보냈는데, 뱃사공들 열 다섯 명에게 각각 쌀 10섬씩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이 왕후와 수레를 함께 타고 돌아오는데, 잉신 부처들도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수레를 탔다. 중국산의 갖가지 물건들도 모두 수레에 실어 서서히 궁궐로 들어오니, 때를 알리는 물시계[銅壺]는 정오를 가리키려고 하였다. 왕후는 중궁에 거처케 하고, 잉신 부처와 그 종들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 종들은 20여 칸 되는 객관 한 채에 사람 수를 적당히 배정하여 따로따로 안치하고, 매일 풍족한 음식을 제공하였다. 싣고 온 보물들은 궁궐 안의 창고에 수장하여 왕후가 사시사철 쓰는 비용으로 삼았다

허황후는 기원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묻힐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하여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습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구지봉은 원래는 거북이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龜首峰)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의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편으로 쪽 내민 것이 거북의 머리모양이라고 하여 구지봉(龜旨峰)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역시 삼국유사(번역: 강종훈)에 따르면 구지봉에서 일어난 수로왕의 천겅과 개국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 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裏著抱持 而歸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高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 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서기 42년) 3월 계욕일(禊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의 북쪽에 있는 구지(龜旨)[이는 산봉우리 이름이다.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며 무엇인가 부르는 듯한 기척이 있었다. 무리 2・3백 명이 이곳에 모여드니, 사람 소리 같은 것이 나는데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아홉 간(干)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을 무엇이라 하느냐?”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구지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하느님[皇天]께서 내게 명하시기를, 이곳을 다스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君后]이 되라고 하셨다. 이런 이유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를 파서 흙을 뿌리며 노래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아니 내밀면 불에 구워 먹으리라.’ 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서 뛰게 되리라.” 고 하였다. 아홉 간들이 그 말대로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조금 있다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자줏빛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에 닿아 있었다. 끈이 내려와 있는 곳을 찾아가니,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상자가 보였다. 열어서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무리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서, 함께 백 번 절을 하였다. 얼마 후 다시 알을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는 무리들이 각기 흩어졌다.
열 이틀이 지나고 난 다음날 동이 틀 무렵에 무리들이 다시 함께 모여 상자를 열었더니, 알 여섯 개가 사내아이로 변화하여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훌륭하였다. 이에 평상 위에 앉히고, 무리들이 하례의 절을 올리니, 그 정성이 극진하였다.
아이들은 나날이 성장하여 십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이나 되어 은(殷)나라의 천을(天乙)이요, 얼굴은 용과 같으니 한나라의 고조(高祖)요, 눈썹은 여덟 색깔을 띠매 당(唐)나라의 고(高)임금이요,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서 우(虞)나라 순(舜)임금이었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왔으므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한다.[이것은 돌아가신 후의 시호이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다.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일컬었으니, 곧 여섯 가야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이요, 서남쪽은 넓은 바다요,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이요,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요, 남쪽은 나라의 끝으로 되었다. 임시 궁궐을 짓게 하여 들어가 사셨는데, 다만 질박함과 검소함을 바랄 뿐이어서 이엉을 자르지도 않았고 흙으로 된 계단은 석 자의 높이 밖에 안되었다.

 

한편 이영식교수(인제대 역사고고학)의 가야사 여행에 따르면 거북아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가 사실은 각색돠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이야기인 즉 ...구지가는 가락 9촌의 촌장들이 불렀습니다. 따라서 원래의 구지가는 구간사회의 굿판에서 불러지던 기원의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구지가는 '머리를 내어라' 했기에 나타난 (우두)머리가 수로왕이었다고 전합니다. 머리 수(首)에 나타날 로(露)가 이름이 되었던 거지요. 지금 우리가 아는 구지가는 구간사회의 노래가 아니고, 가락국의 성립과 수로왕의 등장을 신성하게 꾸몄던 노래입니다. 청동기시대의 구간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던 구지가가 철기시대 가락국의 건국자를 맞아들이는 노래로 각색되었던 겁니다.



수로왕이 철기문화를 가지고 청동기문화의 가락 9촌 사회를 통합해 가락국을 세우고 보니 신성화의 도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가락국 '용비어천가'의 제작입니다. 마침 알맞은 소재가 있었습니다. 선주민의 구간사회인들이 신성시하던 구지봉과 구지가가 있었습니다. '됐다! 이 장소에, 이 노래에, 나의 출현을 담아보자'. 그래서 바다 거북이를 괴롭히며 해신에게 해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던 노래가, 하늘에서 건국자를 내려주는 이상한 모양이 되었다...는 겁니다

허황후가 이동했음직한 남쪽바다를 조망해 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추정만 할 따름입니다.

망산도(望山島) - 승점(乘岾)- 별포(別浦) ?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세운 나라가 남긴 유물과 흔적들을 살피러 갑니다.

 

 

 

 

 

 

 

김해시민의 종에 음각된김수로왕 탄생신화와 허 황후 도래기입니다.

 

 

 

 

 

 

 

수로왕능입니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도 합니다. 고려 문종 대까지 잘 보존되었으나 조선 초에 들어 황폐해져, 1439년(세종 21)에 능역 30보를 정화하고, 1446년(세종 28)에는 수로왕비릉과 함께 봉분의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능역을 확대하였다고 합니다. 1580년(선조 13) 영남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으나 이곳 역시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1647년(인조 25)에 능비를 세웠으며,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겼으며, 1884년(고종 2)에는 ‘숭선전(崇善殿)’이라는 호를 내리고 침묘(寢廟)를 개축하고, 안향각(安香閣)․신도비각․석양(石羊) 등을 설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언어학자 강길운 교수의 '가야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라는 논문에 의하면 ‘가락(Karak)’은 옛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것이고, ‘가야(Kaya)’는 지금의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관람시간이 동절기에는 오후 5시30분이라 아쉽지만 돌아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애들은 지겨워 죽을라 합니다.

귀가를 위해 김해시 중심부로 나서다 보니 이외로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습니다. 허황후의 도시 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설에는 김해가 허왕후를 통해 다문화가정과 최초의 평등부부상을 선 보인 곳이라 합니다. 그 후손들인 김해사람들이 은근히 내세우는 자랑입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한가 라는 물음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안타까운 사연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비열한 놀음입니다.

단지 살기위해 한국을 찾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큰아이가 말을 함부로 하기에 꾸짖고 인권이란 것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꾸짖고 난 다음 미안하기도 했지만, 언제 그런 지적을 받았냐는 듯 큰아이는 또 까불거렸습니다. 속터지는 노릇입니다만 그게 제 자식입니다. 작은애가 오줌이 마렵다 하여 내린 가야에서 만난 신석정님의 시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Lee Oskar-Before The 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