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오른지 한 시간 여 안동호 주변을 마주하는 일이 지겹고도 끔찍했습니다. 댐 주변의 산자락은 마치 앙상한 갈비뼈만 드러내놓고 바싹 말라 비틀린 아우츠슈비츠의 유대인처럼 기약없는 죽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배 승선에서 탈락해서 육로를 이용하여 도산서원으로 갔던 나머지 일행들이 부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시선을 줄 수 있는 정경을 담았습니다.
민둥섬입니다. 안동호 한 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
지겨운 나머지 일행들은 핸드폰을 꺼내어 뭍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수면에 삐죽하니 가지를 내민 나무들의 나이가 긍굼했습니다. 졸지에 수장되어 마치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며 손을 휘젓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1982년 mbc가 가뭄이 들어 물이 빠진 안동댐을 촬영했습니다. 그때 졸지에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이 몰려들었고, 카메라는 그들의 울먹이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그 광경을 시인 이동순은 그의 장시 '물의 노래'를 통해 이렇게 전합니다.
그대는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죽어 물이나 되어서 천천히 돌아가리
돌아가 고향 하늘에 맺힌 물되어 흐르리
예 섰던 우물가 대추나무에도 휘감기리
살던 집 문고리도 온몸으로 흔들어 보리
살아 생전 영영 돌아가지 못함이라
오늘도 물가에서 잠긴 언덕 바라보고
밤마다 꿈을 덮치는 물 꿈에 가위 눌리니
세상 사람 우릴 보고 수몰민이라 한다
옮겨간 낯선 곳에 눈물 뿌려 기심 매고
거친 땅에 솟은 자갈돌 먼 곳으로 던져 가며
다시 살아 보려 바둥거리는 깨진 무릎으로
구석에 서성이던 우리들 노래도 물 속에 묻혀으니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불러 보아도
돌아 오지 않는 그리움만 나루터에 쌓여 갈 뿐
나는 수몰민, 뿌리채 뽑혀 던져진 사람
마을아 억센 풀아 무너진 흙담아
언젠가 돌아가리라 너희들 물 틈으로
나 또한 한많은 물방울이 되어 세상길 흘러흘러
돌아가 고향 하늘에 홀로 글썽이리
두 시간이 가까와 올 무렵 배는 댐입구에 닿습니다. 그 즈음 안동과 예안의 양반소굴과 그들의 문화를 생각해봤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지배계급으로서 그들이 이땅의 정신문화에 기여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가. 다만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학봉 김성일이나 서애 유성룡 등의 명신과 거유의 흔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역은 아니든가. 다시말해 면면히 흐르던 선비의 정신이 현대에 이르러 게승되지 못하고, 박물관이나 수많은 종택 혹은 서원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입니다.
컨데 학문적 도덕적 세계의 구축과 더불어 금권에 농락 당하지 않는, 나아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소리'가 단절된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시방 언어도단의 4대강 정비 따위로 국토가 풍전등화에 처했는데, 이 지역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에 불만인 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의 선대가 그러했듯 잠자코 강물의 흐름이나 살피는 것인지...
나면서 어리석고 / 자라서는 병이 많아/ 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줄겼는데 / 만년에는 어찌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 수록 멀어지고 /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지네 / 나가서는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 나라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구나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 관복을 벗어버려 / 모든 비방 씻었거니 / 내 모음을 제 모르니 /나의 가짐 뉘 즐길까
생각컨데 옛사람은 / 내 마음 이미 알겠거늘 / 뒷날에 오늘 일을 / 어찌 몰라줄까 보냐 / 근심 속에 낙이 있고 / 낙 속에 근심이 있는 법
조화타고 돌아가니/ 무엇을 다시 구하랴 퇴계 이황의 자찬명문( 退溪自銘)
오리배며 물놀이 시설이 보입니다.
이 장면만 떼어 놓고 본다면 새만금에서 물막이 둑과 흡사해 보입니다.
생명이 깃들 것 같지가 않은 산자락
실제 유기물은 죄다 빠져나간 모래성분입니다.
만수위가 되면 물을 방류하겠지요
사진: 수자원공사
형식 土石댐, 높이 83m, 길이 612m, 폭 360m, 만수면적 51.5㎢, 저수용량 1.248백만㎥, 발전용량 9만kw, 홍수조절 110백만㎥, 용수공급 926백만㎥ 안동댐에 대한 기본적 현황입니다. 태백 황지에서 제가 보았던 발원지 물은 정상적으로라면 이미 부산 다대포를 바져나가 남해와 동해 물과 몸 섞어며 또 다른 비상을 꿈꾸고 있겠지만, 필경 저 댐에 갇혀 있으리라
한국에서 가장 긴(312m) 목조다리 월영대를 기준으로 상하류의 모습입니다.
하류에는 높이 20여 m 길이 2백여 m의 보조댐이 있습니다.
점심을 안동 대표음식인 헛제사밥으로 먹어보았습니다. 담백한 맛입니다. 배가 고파 탕국이 나오기 전에 국이 빠진 상차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상업화된 토속음식이기에 망정이지 본래 이 지역 제사라는 것이 '알아주는 형식'의 것이 라서 음식을 장만하고 대접하는 일이 '격식'을 넘어 '예법'으로 때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예와 격식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정신을 계승하여 정성스리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상을 대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제사의 필요성을 요즘에 맞게 해석해 본다면 필요한 장치라고 봅니다. 예컨데 산업화와 도시화로 고향을 떠나온 삶이 부지기수인 터에 가족과 친족의 울타리를 확인하고 보담아 주는 장치가 제사인 바, 나아가 지금처럼 사회안전망이 불안전하게 작동하거나 위태로울 때는 그것을 대신하는 기능까지 담보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숭배가 아니라 결속과 나눔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종부나 장남 중심으로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헛제사밥 한 그릇 놓고 말이 길었습니다.
안동시내 입니다. 제 생각으론 이런 중소도시가 21세기가 요구하는 도시상이다 싶습니다. 거대도시는 스스로의 덩치 때문에 세상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극명합니다 그래서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 인구의 규모가 적고 1차 생산지 바로 연결되는 중소도시의 경우 에너지 문제며 물, 식량의 기본적 필수조건에 대한 경쟁력이 높은 데다, 안동같은 역사와 문화적 조건이 우수한 도시의 경우 생존과 경쟁에 있어 앞서 나갈 수있을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세계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엘리트들이 생가하는 발전상은 모방과 따라잡기인듯 해서 안타까왔습니다.
안동 짐닭입니다.
이상루 고택 (안동김씨 태장재사) (台庄齋舍) 입니다. 여기서 1박을 하고자 했으나
춤사위와 국악 한마당이 진행중이었습니다.
밤 11시 경에야 방을 찾아 몸을 눕힐 수 잇었습니다.
Last Exit To Brooklyn (Finale) - Mark Knopfler
출처: 다음 블로그 음악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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