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천에서 현동까지 강은 산 구비를 크게 다섯번 휘돌아 내림니다. 그 사이 영동선이 숨박꼭질을 합니다. 석포에서 승부, 분천까지 열차로 이동하는 중 낙동강이 기차와 숨박꼭질을 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이 구간의 낙동강은 크게 청량산의 영향에 놓여 있습니다. 강변의 수려한 경관은 길 걷는 사람의 피로 조차도 걷어 갑니다.
분천에서 현동까지 차량을 이용하면 5~10분 남짓 걸립니다. 굳이 도보를 이용함은 낙동강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또 가까이서 보기 위함입니다 . 다가서지 못한 구간은 다음을 기약합니다.
강은 여러번 모습을 바꿉니다. 하상이 모래였다가 자갈로 변신을 거듭합니다. 저 강 바닥에 우리와 더불어 이땅에서 살아왔던 한국 특산 어종들이 수수미꾸리 등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강을 따라 걷다 만난 양철 지붕 집입니다. 하지만 강가에 살던 사람은 집을 비우고 떠난지 오래입니다. 왠지 허전합니다.
물이 없습니다. 지난 겨울가뭄이 이 여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마가 들면 이 강도 넉넉해지겠지요 . 그 언저리에 밀이 익어 갑니다.
35번 국도 범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삼동치입니다. 범바위 전설이 있어 한 컷 남겨둡니다. 그 집채 만한 호랑이들은 다 어디갔는지, 우리는 백두산 호랑이라 일컷는 이 친구들의 정식명은 시베리아 호랑이라 하여 이마에 임금 왕 자 무늬가 선명한 동북아 최고의 포식자입니다. 일제시대의 남획과 전쟁과 개발에 따른 서식지의 파괴로 씨를 말리다 보니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민족의 야생동물입니다. 북한에는 개마고원 지대에 몇 마리가 생존해 있고 연해주 시호테알린산맥 쪽으로 가야 몇 개체를 볼 수 잇습니다. 현재 전세게적으로 150여 마리 밖에 없다고 합니다. 통상 호랑이 한 마리의 서식 범위 혹은 사냥권이 지리산 덩치만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호랑이가 득실득실했던 옛날은 어떤 상황이었까 ? 호랑이 한 마리의 세력권 아래 아무르 표범이며, 스라소니, 늑대, 여우 곰 등이 먹이를 나누는데 이 친구들이 없다보니 , 멧돼지가 지천입니다. 하긴 멧돼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그들의 영역 넘어까지 개발이며 경작을 일삼으니 자연 사람의 영역으로 침범하기 일쑤고 그러다 보니 갈등과 다툼도 잦습니다.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산작에서 표효하던 호랑이의 모습이 전설이 아닌 사실로서 확인되는 그날을 바래봅니다.
멀리 소수력 발전댐도 보입니다. 정부는 1982년 3월 급증하는 전력수요에 대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수력발전개발지원방안'을 마련하여 그동안 특정 기업체에 한하여 발전허가를 한 수력발전사업을 시설용량 3,000kW 이하의 수력발전개발사업에 대하여 민간의 참여를 허용했습니다. 그런 제도적 뒷받침으로 현재 봉화 등 18개소에 민간개발 소수력발전소가 들어섰으며, 총 시설용량은 3만 3,450kW에 이르고 이르고 있습니다. 물의 낙차공의 이용한다는 면에서 여타 에너지원에 비해 공해문제는 없지만 강의 상류역에 입지할 때는 강의 흐름을 고려한 설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낙동강 상류에서의 발전은 그리 좋은 방안은 아닌 듯 합니다.
본격적인 청량산 자락 길입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청량산은 이렇게 소개 되고 있습니다. '안동 청량산은 태백산 줄기가 들에 내렸다가 예안 강가에 우뚝하게 맺힌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묏부리 두어 송이 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안에 들어 가면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모두 만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 없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청량산의 머리가 보입니다. 명호에서 관창폭포가 있는 낙동강 우안길을 택했습니다. 키높이 까지 자란 물억새와 풀숲을 헤치고 관창2교를 건너 청산농원 아래서 다시 낙동강 좌안길로 걸었습니다. 안동시가 주변을 손질한 덕에 길 걷기가 수월합니다.
청량산삼거리에서 농암고택으로 향합니다.
쏘두실 마을에서 만난 접시꽃 무리들입니다.
그 길에 만난 아지매 어디서 오냐며 반가운 얼굴로 대합니다. 저녁찬거리라도 할 요량인지 감자를 몇 개 케는중이라고 하더군요.
고산정이 보이고 가사리 마을앞에 농암종택이 1km 남겨두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이 걸오온 길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일정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너무 걷는데 치중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걷기의 최고 매력인 찬찬히 보는 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햇습니다. 다시 가야할 길입니다. 스치고 지나온 것이 너무 많습니다.
모퉁이를 돌면 농암고택이 나올 것입니다
농암고택(聾巖古宅)이 보입니다. '어부가'로 이름이 알려진 조선시대 학자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종택, 그러나 포크래인이 강변길을 내느라 이 골안 가득했던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반감시켰습니다. 하는 짓이라곤 ...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낙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농암(籠岩) 이현보(李賢輔) 선생 종택과 사당이 있던 분천이 안동댐 건설로 잠기게 되자 현재 위치인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로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긍구당(肯構堂)과 사당은 수몰 당시 다른 곳에 급히 옮겨졌다가 두 번째로 이곳에 자리 잡았고, 본채는 사당과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 ㅁ자 구조이고 긍구당과 명노당은 별당입니다.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별채, 긍구당에서 민박을 운영합니다(054-857-6381). 한칸 방 3만~4만 원. 두 칸 방 5만 원선. 예약은 전화(054-843-1202)로만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농암이 기거했다는 긍구당을 찾았지만, 고작 하룻밤 자고 가는데 이 고택을 음미할 시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다음으로 기약하고 그냥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에 충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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