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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19.1.8~3.1 분노의 힘

by 이성근 2019. 3. 28.

북미회담 결렬 '북한 탓'하는 언론-PD저널 19.3.1

BTS의 티셔츠 행동과 3·1100주년 경향 19.2.28

강의 자연성과 사회의 민주성은 한 몸 한국 19.2.28

황교안이 2의 문재인이 될 수 없는 이유 한겨레 19.2.28

분노의 힘 경향 19.2.28

20대 남자라는 문제경향 19.2.27

청춘과의 공조 허버포스 코리아 19.2.26

나눔과 비움 경향 19.2.26

공화국의 배신자들 경향 19.2.25

자유한국당의 폭주 PD저널 19.2.22

노덕술의 국가, 김원봉의 조국 미디어오늘 19. 2.19

수소경제를 위한 변명. 경향 19.2.19

미중 무역분쟁 속 한국 앞에 놓인 네 가지 시나리오 프레시안 19.2.18

연애할 때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것 19.2.15 시사인 제596

법관의 감수성 한국 19.2.18

혐오의 정치학 한겨레 19. 2.14

제국의 위선 한국 19.2.14

시민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 경향 19. 2.14

자유한국당 5·18 모독의 뿌리 한겨레 19.2.13

지식인은, 이미 죽었다 한겨레 19.2.13

박수환 문자가 놀랍지 않다 미디어오늘 19 2.13

가장 무지한 종경향 19.2.11

관료를 믿어야 하는가 시사인 제59419.2.1

압축성장의 복수  한겨레 19.1.27



수소경제와 에너지민주주의 경향 1.24

체육계 침묵의 카르텔은 적폐다 시사인 제59219.1.18

정치판의 촛불, 김미숙의 정치 미디어오늘 19.1.15

평등한 성장과 촛불 정부의 초심 시사인 제59019.1.7

프레카리아트 혁명의 시대? 한겨레 19.1.8



북미회담 결렬 '북한 탓'하는 언론

채널A 기자 트럼프에 '북한 제재 강화' 질문...‘거짓말하는 북한시각 여전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체제구축의 기대감을 높였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성과없이 막을 내렸다. 세계의 매스컴은 회담 시작 전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700기차대장정에 초점을 맞추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등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과연 미디어는 기대만큼 회담 시작과 마무리까지 제 역할을 다했을까.

 

국내 언론은 2차 북미 정상회담 보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먼저 협상결렬의 원인을 한쪽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그 주장을 진실로 단정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7~28일 하노이에서 이뤄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유를 북한이 (영변 핵시설 해체의 대가로) 모든 제재를 해제하길 원했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제제 해제를 원했다. 전체 제재를 다 해제해 달라고 해서 우리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회담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언론이 잘못한 것은 없다. 북한쪽의 입장이나 주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언론보도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문제는 어떤 협상이든 결렬됐을 때는 양쪽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균형잡힌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대북제재 해제 요구 대가로 미국이 과연 북한에 어느 수준의 비핵화를 원했는지 알 수 없다.



채널A'트럼프 대통령에 대북제재 질문한 당찬 여기자는?'이란 제목으로 자사 기자를 부각한 '숏토리' 화면 갈무리.

 

기자회견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은 어느 수준의 비핵화를 요구했는지, 볼턴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북한을 압박하는 질문이 국내 언론사로부터 나왔음이 알려졌다. 채널A의 한 기자는 북한 지도자가 언제 회담장에 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제재를 강화해서 압박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있지만, 협상 결렬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 강화를 과연 국내 언론이 꼭 해야 할 질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국내 보수 언론의 냉전적 대립구도에서 나오는 일련의 보도태도의 연장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 리용호 외무상이 31일 새벽(현지시간)에 기자회견을 열고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원인에 대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 아니고 일부 해제라고 트럼프의 일방 주장을 반박했다. “구체적으로는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년부터 2017까지 채택된 5, 그 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구체적 내용까지 밝혔다. 이 주장에 근거하면 트럼프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회담 결렬 책임을 어느 쪽에 물을 것인지, 왜 그렇게 됐는지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양측의 이야기를 균형있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미국은 선, 진실, 북한은 악, 거짓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도 행태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세계일보>는 제목에서 숨겨온 3의 핵시설들통이라며 북한을 거짓말쟁이로 보도했다. <조선일보>1일자 사설은 최소한 지금 김정은은 핵을 포기할 뜻이 없고 비핵화는 가짜라는 제목으로 단정했다. <조선일보>는 전날 사설을 통해 가장 큰 걱정은 국내 정치 때문에 업적 조바심을 내고 있는 트럼프가 실질적 비핵화 조치가 아닌 지엽적 합의를 성과라고 자랑하며 1차 회담 때 느닷없이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을 줘버린 것과 같은 중대한 양보를 할 가능성이라며 만에 하나 영변 플루토늄 고철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면 북은 핵보유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악몽이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미국의 합의 서명을 두려워했고 트럼프가 못마땅했다. 그 전에는 또 다른 사설 북미 '종전선언' 가능성에 "우리는 나라도 아닌가"라며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청와대가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종전선언' 합의 가능성을 언급하자 조선일보는 "한국 빠진 6·25 종전선언이라니, 우리는 나라도 아닌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종전선언도 나오지 않았고 작은 합의조차 없었지만 일부 언론은 미리 흥분하고 예단했다. 협상이 결렬되는 순간, 정확한 협상 결렬 원인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실에 접근하는 질문보다는 오히려 북한을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부적절한 질의가 이어졌다. 불필요한 지엽적인 보도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담배 피우는 김정은 모습, 재떨이를 들고있는 김여정의 모습 등 본질과 관계없는 흥미위주의 보도는 과연 꼭 필요한 것인지 이런류의 보도를 반복해야 하는지 언론계 내부의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북한은 은둔의 국가에서 미국과 2 차례 걸쳐 정상회담에 나서며 핵실험, 미사일 실험 등을 일체중단했다. 동창리 등 일부 지역 핵시설도 폭파하는 등 나름 성의를 보이고 있다. 그 노력과 성과가 기대에 못미친다 하더라도 다시 한반도에 전쟁의 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일은 막아야 한다. 북한을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입장 변화와 그 노력까지 폄하하는 불공정한 보도 행태는 냉전시대 유물이다.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에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는 것이 국민과 미래를 위한 일이 될지 보다 언론계 내부의 고민과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김창룡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PD저널 19.3.1

 

BTS의 티셔츠 행동과 3·1100주년

3·1100주년을 사흘 앞두고 BTS는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 등 3관왕을 차지했다. BTS는 수상 소감에서 사실 이 상이 가지는 권위와 품격에 비해서 저희가 작년에 불참해 너무 죄송하고 한이 컸는데, 올해는 훌륭하신 분들을 직접 뵙고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대중음악상이 비록 화려한 시상식은 아니지만, 그들은 이 상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나이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아침이슬을 노래한 양희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듯한 많은 시상자, 수상자들과 함께하면서 BTS는 아마도 자신들의 음악 정체성을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 식민지 지배에 맞서 민초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3·1100주년 오늘, 작지만 의미 있는 한국의 한 시상식 무대에 선 BTS의 무게감을 새삼 상기하면서, 광복절 티셔츠 사건을 다시 복기해본다. BTS 멤버 지민은 2017년에 제작한 유튜브 다큐멘터리 번 더 스테이지촬영에 문제의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티셔츠 뒷면에는 광복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 원자폭탄 투하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고, 애국심, 우리 역사, 해방, 한국이라는 영문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영상에 노출된 티셔츠는 출시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작년 말에 일본 미디어의 보도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더불어 2013년 리더 알엠이 광복절에 올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쉬는 것도 좋지만 순국하신 독립투사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대한 독립 만세라는 멘트도 일본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일본 상업 매체 및 극우단체들은 BTS의 행동에 대해 자국 역사에 대한 뿌리 깊은 콤플렉스로 비난하거나, 도쿄돔 시위 협박에 이어 급기야는 방송출연 저지행동에 나섰다.

 

결국 아사히TV <뮤직스테이션> 방송출연이 무산되었고, 이 사태에 대해 양국 미디어 사이의 감정적인 대응기사가 쏟아졌다. 일각에서는 지민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하는가 하면, 개념 있는 행동으로 옹호되기도 했다. 가장 많은 글로벌 팬덤을 보유한 K팝의 대표주자일수록 특히 민족주의와 식민지 유산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한편으로 일본 극우단체들의 극성 행동으로 전범국 일본의 식민 역사의 만행을 전 세계 아미들이 알게 된 반전의 계기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일부 일본의 양심 있는 언론인은 방송출연 취소를 개탄하는 반면, 일부 한국의 언론은 BTS의 행동을 영웅적 민족주의로 몰고 가기도 했다.

 

유명 음악인들이 민족, 인종, 성차, 자본의 모순에 맞서 벌이는 이른바 티셔츠 행동은 매우 다양하다. 최고의 하드코어 밴드인 RATM의 멤버들은 평소 체게바라 인물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 연주하며 제국의 자본권력을 비판했다. 미국의 래퍼 디디투표 아니면 죽음이라는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흑인 인권을 위해 오바바 대통령의 선거를 도왔다. 음악인의 티셔츠 행동은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BTS의 지민 역시 티셔츠에 새겨진 이미지와 글귀가 의미하는 메시지를 전적으로 몰랐을 리 없으며, 그것이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지민의 티셔츠 행동은 자신의 암묵적인 의견과 태도의 메시지를 내장한다.

 

티셔츠의 원폭 투하 이미지가 가져다줄 수 있는 전쟁과 핵공포의 위협, 그리고 그 원폭 피해자에 대한 배려심 없는 이미지의 잔혹함은 분명 또 다른 타자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설령 설익은 민족주의 행동의 결과이자, 민족주의 담론으로의 포획과정이라 해도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티셔츠 행동의 메시지는 정당하다. 나라 잃은 악소국 국민의 후예로서 광복의 해방감은 식민지 착취와 폭력 종식의 열망을 담고, 원폭의 역사 역시 이 착취와 폭력의 반동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유산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식민지 저항과 청산의 기억은 다양한 행동을 통해 재현되어야 한다. 그 행동이 암묵적으로 체화된 무의식적 코드에서 비롯되었건, 사후 학습에 의해 훈육된 민족적 코드에서 비롯되었던, BTS의 티셔츠 행동은 경솔함과 무모함을 상쇄할 만한 역사적 유산에 근거한다.

 

이미지는 애초부터 위험하고 잔혹하다. 언어는 자신이 뿌리내린 토양에서 역사적 유산을 갖는다. 그들의 티셔츠 행동은 전 세계 아미와 연대하여 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원폭티셔츠를 해방의 감성을 담은 광복티셔츠로 전도시켰다. 그들의 티셔츠 행동이 비록 항일 독립투사의 운동에 비견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3·1절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는 오늘만큼은 철없는 딴따라보다는 나름 개념 있는 문화청년들의 퍼포먼스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경향 19.2.28

 

강의 자연성과 사회의 민주성은 한 몸

강은 우리 삶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강과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강을 바라보는 관점, 강에 부여하는 가치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강은 생명의 터전, 식수의 근원, 농업과 공업 등 경제활동을 위한 용수의 공급지, 놀이와 여가의 공간, 홍수와 가뭄을 대비한 다스림의 공간 등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하는 일과 사는 곳, 쌓아온 경험, 관계 등에 따라,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강은 다르게 이해된다. 같은 사람이라도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렇듯 강의 다면성과 강에 부여하는 가치의 다양성은 강을 둘러싼 여러 활동을 다르게 이해하는 배경이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이란 무엇일까? 새삼스레 사전을 찾아보았다. “넓고 길게 흐르는 큰 물줄기란다. 강의 생명은 흐름이다. 흐름이야말로 강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흐름을 막아버린다면? 이어짐이 끊어져 생명의 움직임은 차단되고 고인 물은 썩는다. 그러면 물속이나 물가의 생명들이 살아남기 어렵다. 강물이 오염되면 깨끗한 식수 공급을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써야 하고 강물을 활용한 다양한 활동도 힘들어진다. 강이 강다우려면,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

 

4대강이 또 다시 사회적 화두로 부상했다. 지난 222, 4대강 조사평가 기획위원회가 금강과 영산강의 5개 보 처리방안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세종보와 죽산보 해체, 공주보 부분해체, 백제보와 승촌보 상시개방을 제안했다. 보 처리방안을 논의하게 된 것은 4대강 사업 완료 이후 녹조라떼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녹조가 심각해진 강에 큰빗이끼벌레가 나타나는 등 강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4대강 사업에 대해 여러 차례 감사원 감사가 있었는데, 마지막 감사에서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의 이수치수 효과는 거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부는 20176월부터 16개 보 중 13개를 개방한 후 모니터링을 해왔고 지난해 114대강 조사평가 기획전문위원회(이하 기획전문위원회)를 조직하여 수계별보별 맞춤형 조치를 제안하기 위해 과학적 분석 결과를 검토해왔다.

 

전문위원회는 수질·생태, 수리·수문, 유역협력, 사회·경제분야 등 33명의 학계 전문가들과 4대강을 직접 모니터링해온 10명의 시민단체 현장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필자는 한국환경사회학회 회장으로서 사회·경제분과에 참여하였다. 기획전문위원회 발족식 때 홍종호 공동위원장은 과거 4대강 사업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4대강 보를 책임 있게 평가하여 처리 방향을 분명히 매듭짓는 일이라면서 참여자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4대강의 미래를 고민하고 최선의 대안을 강구하기를, “국민과 국토,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혼신의 힘을 기울여줄 것을 당부했다. 참여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무겁고 엄중하게 받아들이면서 진정성과 전문성, 학자적 양심과 역사·사회적 책임감을 깊이 느끼며 활동했을 것이다.

 

강에 부여하는 의미와 강에서 얻는 이익이 다르기에, 어떤 보 처리 방안도 사회적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조사평가단에서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결과를 도출하고자 했다. 기술·경제·사회·생태적 요소들을 두루 고려하되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안전성과 경제성 평가를 실시한 후, 관리 방안에 따른 수질생태 개선 효과나 이수치수 효과를 검토했다.

 

사회적 결정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편익과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동시에 그 결정으로 영향 받는 이들을 배려·지원해야 한다. 이미 조사평가단에서는 보 해체와 상시개방이 지하수위에 영향을 미쳐 주변 농업에 가져올 부작용을 예상하여 비용에 반영했고, 환경부는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역주민들과 대화하며 문제를 풀어갈 예정이다. 강의 자연성과 사회의 민주성이 함께 회복되기를 희망한다.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 19.2.28

 

 

황교안이 2의 문재인이 될 수 없는 이유

황교안 자유한국당 신임 대표의 정치 입문 경로는 문재인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 애초 정치 체질로 보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부터 그렇다.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대통령의 불행이 정치 입문의 계기가 된 것도 비슷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3년쯤 뒤에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황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구속된 지 2년 뒤, 한국당에 입당한 지 불과 43일 만에 제1야당의 대표 자리를 거머쥐었다. ‘정치적 속성재배의 신기록이라 할 만큼 정치인으로의 변신 속도와 모습이 훨씬 빠르고 화려하다.

 

그러면 황 대표는 문 대통령이 앞서간 길을 밟아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일단 당대표에 당선됨으로써 차기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후보가 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그는 박 대통령 탄핵소추가 가결된 뒤 다섯달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은 바 있다. 권력의 정상에 불과 한 발짝 떨어진 거리까지 근접한 셈인데, 문제는 바로 그 한 발짝이다. 앞날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정치의 세계지만, 아무리 보아도 황 대표의 마지막 한 발짝의 성공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모시던 대통령과의 관계에서부터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의 유업을 완수해야 할 임무를 안고 정치를 시작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탈권위, 반칙 없는 세상 등 노무현 정신을 구현해야 할 책무가 정치 출발선에서부터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그럼 황 대표가 구현해야 할 박근혜 정신은 무엇인가. 서슬 퍼런 권위주의, 소통 부재, 인권 억압, 반칙과 특권? 여기에 그의 일차적 딜레마가 있다.

 

박근혜란 단어는 황 대표의 정치적 힘의 원천인 동시에 앞날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다. 자유한국당 경선 후보 토론회 과정에서 탄핵 불복' 문제를 놓고 갈팡질팡한 것이나, 최순실씨의 태블릿피시 조작 가능성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것 등은 그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웅변한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박 전 대통령의 존재는 시시때때로 황 대표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게다가 때가 되면 박 전 대통령이 옥중 정치를 본격화할 가능성도 있다. 유영하 변호사의 저격 발언에 화들짝 놀라 그가 박 전 대통령 특검 수사 기간 연장을 불허했다고 애써 변명을 늘어놓은 것은 박 전 대통령과의 순탄치 않을 관계를 알리는 예고편이다. 국무총리 시절 못지않게 유폐된 여왕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인 황교안의 숙명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와 비판은 황 대표 승리의 또 다른 견인차다. 하지만 반대는 반대로만 그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자유, 실용, 경쟁, 개방, 통합 등 보수의 아름다운 깃발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과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극단보다는 중도, 비판을 위한 비판보다는 대안 마련, 비관보다는 낙관, 부정보다는 긍정, 안주보다는 변화와 도전을 추구하는 것이 보수라고 한 보수정당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은 주장했는데,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모습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박근혜 정권 폭정의 맨 선두에 섰던 황 대표가 문재인 정권의 폭정을 연일 외치는 모습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보수의 혁신, 보수의 재탄생은 태극기부대와의 절연이 출발점인데도 오히려 그는 태극기부대의 등에 올라타 정치를 시작했다. 보수의 혁신과 재정비는 박근혜 이후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시곗바늘을 박근혜 시절로 돌려놓았다. 황 대표는 대한민국을 다시 되살리겠다고 기염을 토했으나, ‘박근혜 정권 시즌2’를 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안보는 전통적으로 자유한국당이 강점으로 내세워온 분야다. 그들이 자랑하는 튼튼한 안보 능력은 실제로는 냉전과 대결을 바탕으로 삼은 구시대적 안보였다. 그래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미증유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자유한국당은 방향과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 황 대표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낭만적이라고 공격했으나 정작 비낭만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은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안보와 관련된 황 대표 개인의 결격사유까지 겹쳐 있다. 앞으로 황 대표는 야당의 대표로 국가안보에 관해 이야기하는 횟수가 늘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의 군 면제 의혹도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다. 두드러기를 이유로 군대를 슬그머니 빠진 사람이 애국과 안보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국민의 피부에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지켜볼 일이다./ 한겨레 편집인 kjg@hani.co.kr19.2.28

 

분노의 힘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수천의 아카이아인들에게 수많은 고통을 가져다준 분노를! 수많은 영웅들의 강건한 혼백들을 하데스로 보냈고, 그들을 개들과 새들의 먹이로 던져버렸다네. 이렇게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다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분노의 노래로 시작한다. 트로이전쟁이 배경이지만, 전쟁보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작품을 끌고 간다. 처음 아킬레우스는 영주 아가멤논이 애인 브뤼세이스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하자 격노한다.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분노다. 대응은 전투 보이콧이었다. 분노의 소극적 표현이다. 두번째 분노는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자 폭발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찌르고 시신을 마차에 매단 채 질주한다. 분노의 정점이자,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그렇다고 분노의 해소가 <일리아스>의 주제는 아니다. 정당한 분노는 정의로 연결되고, 정의는 개인의 권리로 이어진다는 깨우침이다.

 

<일리아스>뿐 아니다. ‘분노는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됐다. 자연히 분노는 인간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분노하는 인간(homo iracundus)’의 탄생이다. 분노는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감정이다. 게으름과 무지에 분노한다. 갑질에 분노하고, 혐오에 분노한다. 5·18 망언에 분노하고, 빈부 격차에 분노한다. 분노는 피할 수 없다. 조절하지 못하면 광기가 된다. 반면 잘 조절하거나 조화시키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 ‘분노의 힘이다. 호메로스는 그 방법을 알았다.

 

방탄소년단을 이끌고 있는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분노를 이야기했다. 지난 26일 서울대 졸업식 축사를 통해 나를 만든 에너지의 근원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불만과 분노였다고 말했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안일에 분노했고,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는 타협에 화가 났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변화를 이끌었다면서 세상의 부조리와 몰상식에 맞서 싸워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했다. 방탄소년단의 성공 비결은 분노의 힘에서 나왔다. 미학을 전공한 방시혁 대표는 호메로스처럼 분노의 조절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조운찬 경향 논설위원 19.2.28

 

20대 남자라는 문제

‘20대 남자에 대한 말잔치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20대 남자들의 현실을 자세히 보려는 노력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관심사는 이들이 어느 당을 지지할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20대 남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스피커들 역시 매우 편향되어 있다. 소위 명문대출신이거나, 안티페미니즘을 통해 주목을 끌고 그것을 돈이나 명성과 같은 자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발언을 20대 남자의 생각과 주장으로 치환하는 것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갈등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에게 권위를 실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대 남자들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을까? 통계에서 확인되는 것들이 있다.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자의 고용률 및 실업률은 2008~201710년간 별로 개선되지 않았거나 악화됐다. 5세 단위로 끊어서 보면 15~29세 남성 중 대부분의 구간은 10년 전 고용률을 회복했지만, 24~29세의 고용률은 200870.7%에서 201767.9%로 하락했다. 20대 남녀를 통틀어 가장 큰 고용지표 악화를 보여준다. 실업률의 증가폭 역시 가장 커서 20087.5%이던 실업률은 201711.6%였다. 2017년의 경우 20대 전반에서 여성의 고용률이 남성보다 높다. 특히 20대 후반에서 여성의 고용률이 남성을 앞지른 것은 2017년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30대로 넘어가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30~34세 남성의 2017년 고용률은 87.3%에 달했고, 같은 나이대의 여성은 10년 전보다 9.1%포인트 올라 61%였다. 15~29세에서 여성이 3.9%포인트 높은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로 역전된 것이다.

 

한편 2008~2017년 한국의 10만명당 자살사망률은 등락을 반복했으나 결과적으로는 26명에서 24.3명으로 줄었다. 20대의 경우 여성은 모든 구간에서 눈에 띄는 자살률 저하가 나타났다. 20~24세 남성 역시 줄어들었다. 그런데 25~29세 남성의 경우에는 오히려 자살률이 증가했다. 200824.4명에서 201725.3명으로 늘었다.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20대 남성도 꾸준히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정신질환실태조사에 따르면 18~29세 남성의 주요 우울장애 일년유발률은 20061.4%에서 20163.5%, 불안장애의 경우 3.5%에서 7.4%로 증가했다. 물론 유발률 자체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문제다.

 

하지만 20대 남자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가령 남성 자살사망자 수를 학력별로 보면 중·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은 자살사망자가 발생한다. 한국복지패널조사에 따르면 자살 생각, 계획, 시도 모두에서 저소득층이 일반가구에 비해 월등히 높은 비율을 나타낸다. 20191월을 기준으로 경제활동인구를 보면 학력이 같을 경우 남자가 여자에 비해 아주 높은 경제활동참가율을 보인다. 대졸 남성은 86.7%가 경제활동인구인 반면 대졸 여성은 66.6%로 차이가 크다. 고졸 남성은 72.4%로 대졸 여성보다 높고, 고졸 여성은 54.9%에 불과하다. 빈곤율 역시 일관되게 여성이 더 높다. 남성 임금노동자가 여성보다 230만명가량 많지만, 비정규직은 오히려 여성이 68만명 더 많다. 이런 통계들은 끝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20대 남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신호가 있다. 그렇다면 논의는 이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나 20대 남자를 위한다는 이들도 심지어 스스로 당사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여성이나 사회적 소수자 탓을 하거나, 페미니즘 탓을 한다. 나는 이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 의미 없는 갈등과 혐오를 조장해서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의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힘없고 가난하고 위험에 노출된 남자들은 안티페미니스트들의 분탕질 소재로나 동원될 뿐이다.

 

진짜 문제는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히 질식해가는 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혐오 유발자들의 사회적 질식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경향 19.2.27

 

청춘과의 공조

20대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사회 일원으로 책임을 지고 싶고 타인 삶에 대해 관심도 갖고 싶어서 여기저기 다닌다. 그런데 한달 꼬박 일해서 받은 월급이 학자금 대출 상환, 월세, 생활비로 다 빠져나가고 십만원 남는다. 그런 내게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의하던 자리였다. 청년은 질문을 마치기 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줍지 않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탄핵 촛불이 한창이던 때 어떤 청년이 했던 말도 잊히지 않는다. “광장에 나오면 모두가 하나인 것 같고, 승리하는 것 같은데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순간 여전히 청년백수에 불과하다고 했던 말. 창원의 젊은 기술 노동자가 했던 말도. “박근혜는 내려올 것 같은데, 그다음 내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 미래가 있을 것이라 믿다 산업재해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난 이후, 삶이 그에게 물었을 법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말들. 촛불이 정권을 바꾸고 햇수로 3년이 흐른 오늘, 그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들이 떠오른 건 최근 여당 중진 의원들이 20대에게 했다는 말들 때문이다. 민주당에 대한 20대 지지율 하락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난 정권의 반공 교육 때문이라는분석의 말들. 전적으로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으며 결과에 한가지 요인만 있을 수 없다. 20대 민주당 지지율 하락이 곧, 보수화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여당을 향한 20대의 불만이 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여당 의원들 견해가 20대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촛불혁명이 정부와 여당의 관용어가 되는 오늘, 촛불 광장에 서 있던 이들의 상당수였던 청춘이 느끼는 절망과 단절감에 대해 고작 지난 정부 교육 탓을 한다는 것이 아쉽다.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다. “20대 탓 많이 하시는데요. 20대를 누가 키웠습니까? 당신들이 부모입니다.” 모든 인간은 경험을 기본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습성이니,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반추하며 타인 평가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극단적 양극화, 상대적 빈곤, 노동의 불안정성, 불안한 복지라는 삶의 조건 앞에 놓인 20대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들이 보수화되고 정치적으로 우경화된다 한들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냐고 울먹이던 그를 몇년이 지난 오늘도 잊지 못하겠다.

 

딸이 스무살이 되었다. 그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엄마는 부지런히 집회를 다녔고 딸은 아이돌 콘서트장을 다녔다. 우리는 가끔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를 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기도 한 시절을 살고 있다. 가끔 너희들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니?’라고 물으려다 참는다. 내가 알지 못한다고 그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닐 테니, 궁금함은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외환위기가 시작되기 전 대학을 나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었던 미래와 너희들의 것이 같겠는가? 다만 나는 그대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의 자원까지 남김없이 소비해버리는 파괴적이며 약탈적인 삶에 반대하겠다. 고독한 개인으로 살아가더라도 벼랑 끝에 내몰릴 만큼 안전망이 무너진 사회는 만들지 않겠다. 그대들이 어떠한 정치적 가치와 신념을 갖더라도 박해와 억압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도래하는 것만은 막겠다. 그대의 정체성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차별받지 않고 혐오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 그 정도는 되어야 서로에게 던질 말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대들과 공존하기 위해 그대들과 공조하고 싶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허버포스 코리아 19.2.26

 

나눔과 비움

얼마 전 뮌헨에서 독일 여성 두 명이 한 대형매점이 유통기한이 지나 쓰레기통에 버린 식품을 수거하다 고발당해 약식재판을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 했으나 절도죄에 걸려 33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먹어도 건강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식품이었다. 독일에서 이렇게 버려지는 식품이 한 해 동안 무려 1100t에 달한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법개정을 서둘러 그러한 식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도 분분해졌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대형매점이 멀쩡한 식품을 폐기처분하다 적발되면 건당 3750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젊은 시절 김지하 시인이 남겼던 시 하나를 문득 떠올렸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동시에 이 시의 토양을 제공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한살림공동체를 이끌었던 박재일 선배를 떠올렸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 같은 길을 아직도 꾸준히 걸어가는 절친한 농부철학자윤구병이 있다. 변산공동체에 이어 지금은 민통선 평화마을을 꾸리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앞서 언급된 두 사람과 김지하 시인이 동학과 노장사상에서 생명과 공동체적인 삶의 원류를 읽었다면, 농부철학자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인 자연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서울을 떠났던 1960년대 중반은 정말 끼니를 때우는 일이 문제였던 시절이다. 8억명 이상의 세계인구는 극도의 기아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엄청난 양의 식품폐기로 인한 자원낭비가 사회적으로 문제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시민운동도 있다고 들린다. 그동안 한국의 소비생활 형식도 미국이나 서유럽의 그것과 많이 비슷해졌으며 과잉소비를 해야 돌아가는 사회체계 안에서 모두들 바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긴 사회에서는 이런 성장모델에 내재하는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추구가 다양했고 그의 내력 또한 길었다. 성장과 소비 우선에 대한 반성은 1972년에 발간된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를 통해 종합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른바 68혁명의 좌절에 이어 온 두 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에 의해 촉발된 녹색운동은 이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이런 발상과 사회적 실천은 그 후 정치·경제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생활세계의 거의 모든 부문으로 확산되었다.

 

국내총생산으로 파악되는 성장의 개념 대신에 지속 가능성, 그간에 이루어진 현대화를 반성하는 성찰적 현대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미니멀리즘이나 축소성장(decroissance/degrowth)이라는 삶의 새로운 형태를 논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원래 1960~1970년대 미국에서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에서 복잡한 기교 대신에 예술의 본질적인 요소만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미니멀리즘이 최소화된 소비생활을 지향한다는 의미로도 전용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프랑스에서 시작된 축소성장운동은 소비생활의 철저한 자제 없이는 제한된 자원을 가진 지구촌의 미래는 없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성장이 가져오는 풍요 속에 나타난 낭만적이며 세기말적인 반동이자 풍요와 쾌적함을 추구하는 인간본성을 거스르는 사고와 행동이라는 비판도 있다. 근자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처럼 탈성장의 의미가 아주 제한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대량소비사회에서 방 안에 계속 쌓아놓은 물건더미 속에서 허우적대는 현대인에게 정리된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만 정작 문제의 핵심인 과도한 소비행위에 대해서는 대안 제시가 없다.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주의의 본질이 특히 소비자 스스로가 소비를 통해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이 그의 희망과 욕망, 그리고 행동양식을 통제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강요된 구매자의 위치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뜻을 지녔던 개인은 사라지고 통제된 사회 안에서 단지 소비하는 집단의 성원으로서 살아간다.

 

지구화시대 시민운동의 여전사로 불리는 나오미 클라인이 제기한 노 로고(No Logo)’ 운동이나 칼레 라슨이 시작한 캠페인 월가를 점령하라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은 깨어난 시민들이 이런 모순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소비주의운동이 전투적인 근본주의와 과도한 규범주의에 갇혀 있다는 비난의 소리도 들렸다. 그래서 개인의 각성에 호소하고 절제와 나눔의 생활을 일깨우는 사고의 조용한 혁명이 강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카너 수도승이 실천했던 철저한 금욕과 규율에 복종했던 삶을 최근에 다시 조명한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최근 저서 <최고의 빈곤>이 있다. 자신의 삶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세계 안에서 함께 살면서 절제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르친 노장사상과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이 마찬가지로 우리를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인도한다. ‘성인은 쌓아두지 않는다. 이미 남을 위해 다 사용하였으나 쓰면 쓸수록 자기에게는 더 있게 되고, 이미 남에게 다 주었으나 주면 줄수록 자기에게는 더욱 많아진다를 가르친 <도덕경>,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묘행무주(妙行無住)와 일상무상(一相無相)의 세계를 밝힌 <금강경>이 나눔과 비움의 덕을 비춘다.

 

집단적인 운동이거나, 아니면 개별적인 자성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량소비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이어온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는 유일한 행성인 지구는 인간이 쌓아놓은 쓰레기더미 속에 결국 묻히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16%만이 살고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된 한국을 포함한 이른바 선진산업국은 세계 쓰레기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에는 세계 쓰레기의 양이 오늘보다 70% 정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이 그래서 과잉소비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19.2.26

 

공화국의 배신자들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의 사회모델 비교연구를 위해 몇몇 나라를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의료, 연금, 복지 등을 담당하는 관료를 만났다. 프랑스는 GDP 대비 공적사회지출이 30%를 넘어서 OECD 1~2위를 다투고, 우리에 비하면 거의 세 배 가까이 된다. 문제는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30년 넘게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적사회지출 30위권 바깥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흥청망청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재정적자가 너무 쌓이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반면 복지지출은 과도해 보이는데?” 그가 곤혹스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 즉각 답이 돌아왔다. “프랑스에는 사회적 최저선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동지들이 사회적 최저선 미만으로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들을 위한 지출을 줄이는 건 처음부터 고려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재정적자는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지들이라고? 처음부터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관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이런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공유된 사회적 가치가 있다. 공화국을 함께 만들었다는 자부심 말이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으로 흔히 자유, 평등, 박애를 든다. 앞의 두 단어는 괜찮은데 박애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박애은 한자의 넓을 박()’인데, 이렇게 되면 박애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박사라고 할 때의 도 같은 글자인데, 박사는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전공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요즘은 우애라는 번역도 쓰는데, ‘박애보다는 낫지만 이것도 친구를 사랑한다는 밋밋한 뜻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박애의 원문은 프랑스어로 ‘fraternit’이고 영어로 옮기면 ‘fraternity’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동지애혹은 좀 넓은 뜻으로 옮겨도 형제애가 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렸고, 오랜 기간의 역사적 간난신고를 거치며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귀족과 성직자만 인간으로 대접받던 세상에서 모든 시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세상으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획기적인 변곡점이고, 목숨을 걸고 이 전환을 함께 만들어낸 사람들은 동지이고 형제이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공화국이다.

 

마침 위에 인용한 관료가 소속된 부서의 이름은 보건연대부(Ministry of Health and Solidarity)’이다. 우리로 치면 복지부에 해당하지만, 그들의 관점은 공적사회지출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복지가 아니라 동지들의 연대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명이다. ‘자유, 평등, 동지애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에 처음 명시되었고, 1958년 채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5공화국 헌법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공화국의 핵심 가치이다.

 

이런 역사가 다른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에도 나와 있다. 임시헌장 1조는 민주공화국, 3조는 평등, 4조는 자유를 각각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이 모두 담겨있는 셈이다. 마침 218일자 경향신문이 마련한 윤평중 교수와 김호기 교수의 대담은 이 점을 잘 상기시켜주었다. 두 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100년 전에 이미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을 이루었고 민주와 공화는 유신헌법이나 5공화국 헌법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한 채 유지되어 온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경향/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19.2.25

 

자유한국당의 폭주

전당대회, 역사와 국민도 두려워하지 않는 막말 퍼레이드

수구적 퇴행의 늪으로 달려가고 있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의 와중에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세 사람이 역사왜곡 전문가를 내세워 저지른 망언 파동이 큰 물의를 빚고 있다. 그들이 저지른 망언은 단순히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망언은 단순히 민주주의 역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공화국, 즉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공화국이 있을 수 없었듯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공화국은 없다. 진보·보수가 다를 수 있고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배신한 자는 더 이상 우리의 동지가 아니다. 알고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망언 소동을 일으켰다면 스스로의 후안무치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몰라서 그랬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징계나 제명이 문제가 아니다. 공화국의 배신자들은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의 어떤 공적인 자리에도 설 수 없게 해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18.2.25

 

자유한국당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유례가 드문 기이한 행태를 연속극처럼 이어가고 있다. 당내 문제에 그친다면 논의조차 할 필요가 없지만 역사와 진실을 부정하고 대통령을 모욕하고 국민을 무시하는 언행은 우려할만하다.

 

서막이 요란했다. 전당대회 초기부터 철지난 이념 분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국회 안방에서 북한특수군 침투설을 꺼내 국민적 분노를 가져왔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민정당의 노태우 정부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고 선언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보수정부와 국방부까지 5·18은 민주화운동이며, 북한군 침투설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의를 내렸다. 역사의 평가도 끝났고 법원 판결도 다를 바 없다.

 

여론의 비판 속에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사과를 하고 당 차원에서 징계를 서둘러 사태를 봉합하려했다. 망언 3인방 중 비례대표 이종명 의원은 제명이라고 하나마나한 징계를 했고 김진태김순례 의원은 전당대회 출마자라는 이유로 징계를 유예했다. 사실상 징계쇼가 된 셈이다.

 

징계가 보류된 두 후보는 공개석상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으로 광주시민과 진실을 우롱했다. 자유한국당의 전당대회는 태극기 부대의 시위 모습으로 당내 중진들조차 우려를 토로했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막말과 욕설은 빠지지 않고 터져 나왔다. 최고위원 출마자인 김준교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저딴 게 무슨 대통령이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제게 90% 이상의 표를 몰아주면 문재인은 반드시 탄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치 이전에 기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난폭한 언사는 사회윤리 규범을 파괴하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모욕하고 탄핵 운운하면 환호하는 합동연설회장의 분위기는 국민이 기대하는 제1야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극우세력의 놀이터가 된 자유한국당은 사태를 수습할 수 없는 혼란과 몰상식의 연속이었다. 부산에서 열린 합동토론회에서 태극기부대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사실 왜곡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인 황교안 후보는 박 전 대통령이 돈 한 푼 받은 것도 입증되지 않았다. 과연 탄핵이 타당한 것인지 전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국회 여야가 동의하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부정하는 이런 발언은 당장 친박표 흡수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앞으로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

 

여기다 황 후보는 최순실의 태블릿 PC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데도 공감을 표시했다. 검찰 수사,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원 판결 등을 통해 조작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발언이다. 합리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런 식의 진실 부정, 역사 왜곡은 전당대회 이후 더 큰 사회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일련의 막장 드라마 같은 토론회를 통해 국민과 역사에 대한 존중이나 기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전당대회 출마자 8명중 3명만 출마한 반쪽도 안 되는 대회였다.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징계가 유보된 후보, 또 다른 후보는 당규상 후보조건을 갖추지 못해 논란 끝에 겨우 출마한 상황이다.

 

사회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이런 움직임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끝난 뒤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한국당의 위기의식 속에 보수 언론의 문재인 정부 흠집내기, 집권당 공격이 더욱 거칠어 질 가능성이 크다. 북미정상회담과 함께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로드맵도 퍼주기여론몰이로 난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국민도 역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한국당의 폭주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김창룡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webmaster@pdjournal.com PD저널 19.2.22

 

노덕술의 국가, 김원봉의 조국

일제 강점기에 친일은 모두 엄벌해야 할까. 부끄럽게도 어쩌다 늙은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친일 행위에 상황을 감안하자는 주장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은 아무리 작아도 정당히 평가해야 옳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희생적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없다. 친일파가 호의호식하며 자녀를 키울 때, 풍찬노숙하고 후손도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목숨을 건 투쟁의 길이었다.

 

31혁명 100돌을 앞두고 명토박아둔다. 독립운동을 어떤 이유든 폄훼한다면 자기성찰이 얕아서다. 최종 평가 기준은 1945815일이다.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어도 그 시점에 친일을 했다면 변절자일 수밖에 없다. 친일을 했더라도 개과천선해서 그 시점에 독립운동을 했다면 유공자로 평가해야 옳다. 요컨대 그 시점에 일제와 싸우고 있었다면 그의 사상이 무엇이든, 또 해방 이후의 행적이 무엇이든 그 사람은 독립유공자로 판단해야 상식이다.

 

약산 김원봉. 사진=위키백과

 

그럼에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정치적, 사상적 이유로 독립 운동가들을 국가유공자에서 배제하거나 낮춰왔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를 유공자로 선정하면서도 마치 무슨 시혜나 선심 차원에서 주는 모습마저 나타났다. 국가보훈처가 규정에 따른 심사를 한 뒤에 사상을 이유로 무조건 한 등급씩 깎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이는 보수정부냐 진보정부냐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격의 문제다. 현실은 사뭇 개탄스럽다. 두루 알다시피 노덕술은 단순한 친일경찰이 아니다. 독립투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데 앞장선 천하의 악질이다. 일제로부터 훈장마저 받을 정도로 악명 높았다. 탐욕스런 노덕술이 가장 체포하고 싶던 독립투사가 약산 김원봉이다. 현상금 100만원, 지금 돈으로 340억원 안팎이다. 독립운동의 대명사 백범 김구 현상금의 거의 두 배다.

 

노덕술은 일제 강점기 시절 친일 경찰로 활동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사진=나무위키

 

1945815일 시점에 약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국방장관 격이었다. 본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에 노덕술은 재빨리 숨었다. 친일 죄악이 너무 또렷했다. 그런데 정작 해방 뒤 귀국한 약산을 노덕술이 체포한다. 해방정국에서 다시 경찰간부가 된 노덕술은 친일파 청산을 주창하는 약산의 뺨을 갈기며 고문했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생명에 위협을 느낀 약산은 월북한다. 곧 김구조차 총을 맞는다. 김일성은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권을 세울 때 입각시켰지만 결국 1950년대 중반을 거치며 숙청했다.

 

일제가 세계사적 현상금을 건 독립운동의 상징 김원봉은 지금 남과 북 어디에서도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밀양사람김원봉만이 아니다. 월북했지만 숙청당해 평양에서 아예 지워진 독립투사들을 온전히 평가하는 결단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높일 수 있다. 더구나 평양의 특정 가계 중심 독립운동사 서술에도 간접적이나마 비판적인 눈길을 던지면서 남북을 아우른 독립운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다. 지금 국가보훈처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언론을 보라. 가령 조선일보는 독립운동한 북 지도부도 대한민국 유공자인가?”라든가 김원봉 독립유공자 서훈? 김일성에게도 훈장 줘라따위의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표제를 엉뚱하게 내놓는다. 사주가 친일파인 신문답지 않게 얼핏 애국심이 넘쳐 보인다.

 

20107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 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참으로 생게망게하다. 31혁명 100돌을 맞도록 노덕술 따위가 이승만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인 현실엔 침묵한다. 자유한국당의 정치꾼들은 접어두자. 뿌리가 친일인 신문과 방송에 부닐며 김원봉을 도마에 올리는 교수들의 작태는 민망할 정도다.

 

대체 그 애국자들이 노덕술에 침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묻고 싶다. 대한민국은 노덕술의 국가인가? 약산의 원혼은 작금의 국가유공자 서훈 논란을 정중히 거부할 성싶다. 그럼에도 후손들의 의무는 있다. 약산을 온전히 평가하는 일이다. 뒤늦게나마 남이든 북이든 먼저 그를 올곧게 평가하는 나라가 김원봉의 조국이 될 터이다. 나는 그 나라가 대한민국이길 바란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9. 2.19

 

 

수소경제를 위한 변명.

기술혁신은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최고기술을 지닌 대기업이 특정 기술궤적과 상용화만 고집하다가(lock-in) 몰락한 사례는 기업사에 흔전만전이다. 예컨대 개인용 컴퓨터 기술도 가지고 있었지만 메인프레임(대형 컴퓨터)에 집착했던 IBM은 그만 서비스 업체가 되었고 애플이 컴퓨터 업계를 호령한 바 있다. 테슬라가 거대 내연기관 자동차 기업을 제치는 사례가 추가될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정부는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했고 내 주위는 미친 짓이라는 비판으로 가득 찼다. 수소경제는 바야흐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미래경제의 핵심+친환경 에너지혁명”(p1)을 불러일으킬 텐데도 말이다. ‘에너지 자립, 분산형 에너지, 친환경적 경제에 생태운동 쪽 사람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다니,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보고서의 수소차역시 전기차다. 다만 배터리로 모터를 돌리는가(Battery Electronic Vehicle), 연료전지로 모터를 돌리는가(Fuel Cell Electronic Vehicle)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연료전지라는 번역 역시 배터리를 연상시키지만 이 장치는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서 전기를 만드는, 소규모 발전소다. 어차피 전기로 가는 차라면 왜 굳이 수소를 싣고 다니면서 한번 더 발전을 하는가가 수많은 비판 중 핵심이다. “우주물질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풍부하지만수소는 물에, 그리고 메탄과 같은 가스 속에 화합물로 존재한다. 여기서 수소를 추출하려면 열이나 빛, 전기와 같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을 전기분해(수전해)하려면 전기가 필요하고 메탄을 개질(reforming)하려 해도 열에너지가 필요하다. 현재 생산되는 수소의 96%는 화석연료(천연가스, 원유, 석탄)에서 추출되며 오직 4%가 수전해인데 여기 들어가는 에너지 역시 대부분 화석연료에서 나왔을 것이다. 최초의 에너지원이 화석연료라면 수소의 생산과 두 번째 발전에 들어가는 전기만큼 수소차는 반환경적이다(이 보고서는 암묵적으로 부생수소-암모니아 생산 등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수소-를 사용하면 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데, 그 자체도 의심스럽지만 이 보고서가 실은 수소차만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다).

 

수소와 전기는 똑같이 에너지 담지자지만 수소는 전기와 달리 에너지 저장수단이 될 수 있다. 수소경제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용되지 않은 전기는 곧바로 사라지고 현재 배터리에 담을 수 있는 양은 극히 제한적이다. 재생에너지, 특히 풍력에너지는 불규칙하게 전기를 생산하므로 장차 이 에너지원으로 상당량의 전기를 생산한다면 때에 따라 많은 전기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때마다 이 전기를 수소 생산에 사용한다면 필요할 때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수소경제를 대중화한 리프킨이 극찬했던 것도 바로 이 녹색수소이다.

 

즉 대통령 보고서가 수소차 활성화 로드맵이 아닌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이라면 녹색수소의 생산과 저장, 운반과 배송의 로드맵이어야 했고, 특히 재생에너지에 의한 수소 생산을 어떻게 획기적으로 늘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생태 쪽의 비판은 여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원자력 발전에서 수소를 얻는 방안을 검토했고, 현 정부는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를 거론하고 있다. 양자 모두 당장 어디에 지을 것인가가 문제이고 그 이후엔 이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생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재생에너지원에서 전기를 얻는 방법은 지역마다 다르다. 정부가 제대로 수소경제를 만들려면 지역마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가장 바람직한 재생에너지원 믹스를 찾아내 분산 발전을 늘리도록 해야 한다. 수소를 압축하거나 액화해서 운반할 수 있다면 무인도에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전국 곳곳에 부생수소 충전소(수소주입소)를 지어 수소차에서 앞서가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나올 만하다. 전기 인프라는 200년 동안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보완되어 왔다. 한성에 전기가 들어온 지도 120년이다. 수소 인프라를 단기간에 그만큼 갖추는 건 매우 어렵다. 다행히 현대기아차는 전기차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수소차도 전기차다). 그런데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현대기아차가 한정된 자원을 수소차의 특유한 장치 개발에 쏟아부었는데 기술궤적이 기존의 전기차 쪽으로 전개된다면, 예컨대 다른 나라에는 수소차 인프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한국 자동차 산업은 바로 위기에 빠질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는 테슬라가 없다.

 

수소차만을 위한 인프라가 아니라 수소경제 전체에 이용할 수 있는 범용인프라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소를 싸게 생산, 저장, 운반할 수 있게 된다면 운행거리와 출력 면에서 강점을 지닌 수소차가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재생에너지원의 충분한 확보와 전기분해기술의 고도화가 수소경제를 위해서도, 결국 수소차를 위해서도 먼저 추진해야 할 일이다. /경향 /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19.2.19

 

미중 무역분쟁 속 한국 앞에 놓인 네 가지 시나리오

미중 무역전쟁, 그리고 한국사회의 세 가지 인식 조정

·'무역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세 가지 조정기를 겪고 있다. 첫째, 무역전쟁이 알고 보니 무역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미래 패권경쟁'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경제 논리에 의하면 '싸우면 둘 다 손해인 무역전쟁'이 이내 타협을 볼 것으로 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장기화할 가능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타협 불가피론'이 조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셋째, ·중 갈등이 '그나마 무역전쟁이라 다행'이라는 시각이다. 총 들고 싸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는 미·중 관계에서 '무역'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온다. 미중 관계의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미중 무역전쟁의 성격은 판이하게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것은 그동안 산적한 미중 갈등을 막아주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과 같다.

 

한국은 미·중 관계 악화에 따라 양 강대국 사이에서 가장 '포지셔닝'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 거친 국제정세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이 어느 쪽의 불만도 사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 간 힘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양국 간의 무역전쟁은 미·중 간 미래 패권경쟁이라고 볼 때, 미중 관계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과정은 단기적 과제가 아닐 것이다. '미중 사이 한국의 선택' 문제는 향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분열적인 담론으로 등장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필자)

 

'무역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조정기를 겪고 있다. 첫 번째 조정은 미중 무역전쟁이 알고 보니 단순한 '경제문제의 갈등'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통상적 무역 불균형에 대한 문제라고 봤는데 본질은 갈수록 '미래 패권경쟁'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정은 무역전쟁은 '싸우면 둘 다 손해니까 미중이 샅바싸움을 하며 신경전을 벌이긴 해도 이내 타협할 것'이라고 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중 '타협 불가피론'도 조정을 받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미중 '타협 불가피론'은 이제껏 한국사회에서 무역전쟁 향방을 점치는 가장 주요한 프레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아마도 '경제 논리'의 관점에서 보면 '타협'이 본연적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주체의 지상최대 명제는 '이익추구'. 그것의 마지노선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서로 싸우면 둘 다 손해니까 결국 타협을 보는 것이 경제논리에서 보자면 자명한 논리다. 한미 FTA 협상에 직접 관여했던 한 고위관료도 미중이 곧 타협할 것이라고 내다 봤었다. 그것이 두어 달 전이었다.

 

그런데 '싸우면 둘 다 손해'인 미중 무역전쟁이 2019년 새 해에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월말에 개최되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 전후로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 양국 최고 지도자 차원에서 무역갈등을 매듭짓는 수순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그 회동도 전격적으로 무산되었다. 설사 미중 정상이 만나 합의가 나와도 미봉책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고, 트럼프는 이것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자신이 '승리'(victory)했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봉합 후 다시 악화', 그리고 다시 봉합 그리고 다시 악화, 이러한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미중관계가 '하향평준화' 포물선을 그리면서 악화의 트렌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연합뉴스

 

무역전쟁이라 더 위험한 미중 갈등

미중 '무역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에서 조정이 아직도 미뤄지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미중 갈등이 '그나마 무역전쟁이라 다행'이라는 시각이다. 총 들고 싸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얼핏 들어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인식 조정'이 미뤄지고 있는 것일 테다. 무역 갈등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빈번히 있기도 하다. 동맹관계인 한미 사이에서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수교 40주년을 맞는 미중 관계의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미중 무역전쟁의 성격은 판이하게 그 무게감이 틀리다. 그것은 그동안 산적한 미중 갈등을 막아주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과 같다. 이는 미중관계에서 '무역'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은 정치체제, 사회구조가 판이하게 다른 사회다. 지난 40여 년간 인권문제, 대만 문제, 티벳, 언론 자유, 소수민족 핍박, 종교 억압, 이데올로기 대립 등 미중간에는 만성적인 충돌의 뇌관들이 무수했다. 그러한 대립이 양국관계를 본질적으로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준 '완충제'가 바로 미중 양국의 긴밀한 경제적 상호의존이었다. 미중 간의 깊은 '전략적 불신'을 극복하게 해준 것도 바로 경제적 '공동 이익'이었다 (전 미국 고위 관료의 소회).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그러한 미중 갈등의 완충 역할을 했던 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산적했던 갈등이 표출되는 것이다. , '무역전쟁'은 미중관계를 지탱해 왔던 버팀목이 무너진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러한 맥락은 왜 미중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국에서 공화·민주당의 정당에 상관없이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반중정서가 전반적으로 고조·확산되고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갈수록 미국사회를 반영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 대학들이 중국 유학생들에 대한 비자 심사 강화, 미국 내 중국 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운영되는 '공자학원' 폐쇄 움직임, 중국 기업인들의 미국 첨단기업 투자나 인수·합병 및 산·학 협업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그리고 최근 화웨이 부회장 체포 등 일련의 조치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역 이외에 미국 사회의 '전방위'적인 중국 경계 분위기 확대

또한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 중국을 경계하는 미국의 모습이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20181월만 해도 폼페이오 당시 CIA 수장은 중국을 '러시아와 동급으로 미국에 큰 위협'(as big a threat to US as Russia)이라고 표현했다. 거의 1년이 지난 2018년 말 폼페이오는 1210일 러시아를 쏙 빼고 중국만 꼬집어 "중국은 미국에게 가장 큰 위협(China presents the greatest challenge that the United States will face)"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중국에 대해 경계를 넘어 적대시하는 경향은 무역 전쟁이나 정치인의 수사(修辭)를 넘어 미국 정부의 공식적 전략문서에 공개적으로 명시되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공식화', '문서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세 가지 전략보고서, 201712월에 발간된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 20182월에 나온 핵태세검토보고서(NPR), 20188월에 의회를 통과한 '2019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은 모두 일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국군수권법 섹션 1261'미국의 대 중국 전략'(United States Strategy on China)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과의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이 미국의 주된 우선 사항이라고 '선포'(declares)한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주어는 미국 의회. 트럼프 행정부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미중 무역마찰이 시간이 갈수록 경제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설사 '90일 휴전' 후 미·중 간 무역전쟁에 대한 잠정적인 타협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미국의 대중국 압박은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포지셔닝' 가장 어려울 수 있는 국가

한국은 미중 관계 악화에 따라 양 강대국 사이에서 가장 '포지셔닝'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 미중 관계 '악화'는 미중이 반드시 물리적 충돌로 간다는 극단 편향적 결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중 '강대강' 정치 구조 중간에 위치한 한국으로서는 '저강도'의 미·중 갈등도 그것이 한반도에 투사될 때는 '국가적' 수준의 도전이 될 수 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한국이 한바탕 치룬 홍역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미중 간의 힘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양국 간의 무역전쟁은 미중간 미래 패권경쟁이라고 볼 때, 미중 관계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과정은 단기적 과제가 아닐 것이다. 즉 금방 끝날 사안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미국 의회 차원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long-term strategic competition)이라고 명시한 것에 미중 갈등의 장기 지속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판단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중 반목이 심화되면서, '안보=미국', '경제=중국'이란 공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한국 외교가에서 대두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은 미중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데 미중은 한국이 자기편에 서기를 원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중간 힘의 경쟁에서 지속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한국은 계속 선택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선택을 하지 않고도 강대국의 '줄세우기' 강요를 거부할 수 있는 외교 맷집을 지녔는가의 여부, (2)한쪽을 선택 했을 경우의 리스크, (3)선택을 미루다 자발적으로 할 경우의 리스크, (4) 선택을 미루다 타의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경우의 리스크, 등 각각의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기회비용'을 냉정히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프레시안 19.2.18

 

연애할 때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것

연애할 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뭘까? 때에 따라 내가 더 돈을 많이 낼 수도 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애인을 오래 기다릴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며 생기는 기나긴 싸움을 견딜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다 포기한다 하더라도, 내가 나 자신이기를 포기하며 살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타인을 포함해 나에게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진실하지 않은 삶은 아무리 잘 살아도 가짜일 테니까.

 

언제나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받던 A 선배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그가 선비 같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했고,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근처에 살던 우리는 종종 밤 산책을 했는데, 그는 자신에 비해 내가 자유분방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선지 질문이 많았다.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만났어? 어떤 대화를 했어? 잤어? 좋았어?” “나는 여자친구를 처음 사귀는데 여자친구는 그렇지 않나 봐. 이게 자꾸 생각나고 서운하다라고도 했다. 이런 얘기도 했다. “여자친구와 모텔에 가잖아. 그러면 벽 뒤에서 다른 여자 신음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면 되게 흥분돼. 그런데 여자친구가 신음소리를 크게 내면 좀 꺼려져.”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 나는 그에게 벽 뒤의 신음소리구나. 그는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 그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집에 가겠다는 내 손목을 붙잡고 가로막으며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다.

때로는 나도 신음소리를 크게 내 애인을 불편하게 하는 벽 안쪽 여자친구였다. B는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 있고 싶어 했던 충성스러운 애인이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류의 여자들의 생김새와 행동, 꾸밈새에 대해 자주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남자들의 눈요깃거리, 몰카와 강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서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고, 야한 화장을 하지 말고, 은밀한 단둘만의 공간이 아니라면 섹스 얘기를 꺼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명시적으로 돈이 오가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움과 보살핌, 관계 유지를 위해 섹스를 하는 게 성매매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그는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들과 너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다그쳤다. 나는 그가 나를 익명의 타인과 철저히 구분하고 특별하게 바라본다는 점, 나를 강하게 열망한다는 점이 썩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난감했다. 그가 내게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사람들마다 각각 살아가는 방식과 성격이 다른 정도로 다를 뿐이었다. 그와 내가 다른 꼭 그만큼만 달랐다.

 

그가 원하는 존재로 사는 게 사랑일까

구애를 받는 여성은 정말 권력을 가진 존재일까. 그들에게는 사랑이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지만 여자에게는 자주 나로 살 것이냐, 아니면 그가 원하는 존재로 살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둘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무게가 이만큼이나 다르다면 그건 과연 평등한 관계일까. 나는 자신이 구축해놓은 세계의 범위를 넓히고자 모험을 감행하는 남자가 택하는 일탈의 대상도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지켜줘야 할 유리 덮개 속 장미꽃도 아니었다. 구태여 그런 역할에 나를 맞추며 살 필요는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오랜 시간 외로움을 견디는 게 나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얘기한다. 또 수많은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결국 눈치를 보다 지쳐 침묵하게 된다면, 그래야만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여전히, 감히 사랑일까. - 김민아 (페미당당 활동가) 19.2.15 시사인 제596

 

법관의 감수성



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정의의 여신이 왼손에 든 법전은 법치를, 오른손에 든 저울은 공평무사한 결정을 상징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형사재판 발전사는 재판을 거는 쪽(주로 국가)에 점점 불이익을 부과해 간 과정이었다. 권력이 개인을 피고인으로 세워 범죄자로 확정하기까지, 그 과정을 실체적형식적으로 더 까다롭게 만들어 온 것은 역사발전의 명확한 방향이었다.

 

왕조시대, 신민은 왕의 심증에 따라 언제든 대역죄인이 될 수 있었다. 대체로 그 과정엔 증거나 검증은 필요치 않았다. 근세 초 교회는 애꿎은 이를 마녀라 고발하고, 스스로 판결을 내려 화형대에 세웠다. 소추와 재판권한이 분리된 현대에도 형사재판을 거는 쪽은 재판받는 이보다 항상 절대적 우위에 서 있었다. 유신정권5공화국 조작 사건에서 너무도 쉽게 유죄가 인정된 것을 봐도 그렇다.

 

전능했던 소추권자가 피고인과 비슷한 지위로 내려와 공판의 한 당사자로 대접받은 건 매우 최근 일이다. 이제 국가는 고문도청으로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 유죄를 입증할 수 없다. 진실을 밝히는 주무대는 검사실에서 법정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사법제도는 형사재판을 거는 쪽에 갈수록 높은 입증책임을 부과해, 법원이 유죄를 선고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쪽으로 발전했다. 유전정보(DNA), 폐쇄회로(CC)TV, 위치추적장치(GPS) 발전은 과거 적발이 어렵던 범죄를 단죄할 수 있게 했지만, 이는 증거 자체의 범위가 넓어진 것일 뿐 증거를 해석하는 법관의 재량 자체를 넓힌 건 아니었다.

 

판사가 유죄를 내리기 쉬운 세상이 결코 우리가 지향할 모습이 아니라는 데 공감대도 형성됐다. in dubio pro reo, 의심스러우면 피고인 이익으로.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법학자가 처음 제시한 이 가치를 향해, 우리는 접근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이 들고 나온 성인지 감수성은 흐름을 바꿨다. 성인지 감수성은 생활에 존재하는 성별 불균형을 인식해 성차별 요소를 감지하는 민감성이란 뜻. 이 개념은 유무죄 경계에 선 사건에서 법관의 심증을 유죄 쪽에 가깝게 끌어당기며 큰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성차별이 실재해 온 현실을 감안할 때, 공익을 추구하는 적극적 국가 작용인 행정의 영역에서 성인지 개념이 도입돼 예산 배정이나 사업성 판단에 활용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엄존하던 차별을 개선하고, 배려받지 못하던 소수자를 챙기는 일에 효과적 행정력이 미치도록 하는 일은 정당하다. 만일 성인지 감수성이 재판 절차 수준에서만 도입됐더라면 큰 논란이 일지 않았을 것이다. 비공개 재판을 확대하고, 피해복구와 상담에 인력예산을 투자하며, 피해상황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과정에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행정이나 사법절차의 울타리를 넘어, 유무죄와 흑백을 가리는 사법 본질의 영역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가져야 할 자질의 개념으로 설정했는데, 피해자의 맥락에 좀 더 공감한다는 얘기는 결국 법관이 같은 증거를 두고 유죄로 심증을 굳히는 과정에 활용될 소지가 크다.

이 대법원 판례는 사법부가 행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이후 범죄 입증 책임을 덜고 법원이 더 쉽게 유죄를 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간 첫 후퇴 사례로 기록될 지 모른다. 대법원은 이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들고 나오며 전원합의체를 거치지도 않았다.

 

이번 판례로 합리적 이성에 기반했던 법관의 자유심증 형성에 감수성 변수가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이 허용됐다. 감수성 장착으로 넓어진 법관의 재량은 CCTVDNA가 감지해 내지 못한 결정적 장면을 향해 한발 더 다가가는 긍정적 효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법관의 재량이 커지는 과정에는 언제나 오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정의를 실현할 가능성과 오판의 개연성을 동시에 높이는 제도와 개념을 두고 고민해야 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 왔는지, 그리고 해야 할 지는 비교적 자명하다/ 한국일보 이영창 사회부 차장 19.2.18

 

혐오의 정치학

광주 사람들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들인가?”

805월의 일주일 동안, 광주 민주항쟁은 프랑스 공영 티브이의 저녁 8시 뉴스 시간에 연일 톱으로 보도되었다. 국내에서는 언론통제로 아무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세계는 보고 있었다. 화면 중에는 최근 상영된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그 비사가 알려진 독일 제1공영방송(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찍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뉴스를 접한 프랑스인들의 반응 중 하나가 광주 사람들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들인가?”였다. 그들의 눈에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두 손을 뒤로 묶여 굴비처럼 엮이고, 팬티 바람으로 트럭에 끌려가고, 마구 쏜 총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 시민일 수 없었다. 그보다는 한나 아렌트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로 칭한 파리아들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소수민족도 이교도도 아닌 광주 사람들에게 진압군이 보인 잔혹성은 혐오감정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혐오가 정치적 힘을 지속적으로 갖는 이유는 약자와 소수파를 차별, 지배하기 위한 강자, 다수파의 감정기제여서 제어되지 않는데다, 감정이기 때문에 합리성으로 해소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특히 혐오는, 전두환 무리가 그렇듯이, 탄압은 물론 살육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력에게 양심의 짐을 없애준다. 19239월에 발생한 일본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방화한다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천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인들의 조선인 혐오 감정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듯이, 90여년이 지난 오늘 아베 정권을 비롯하여 일본의 극우세력이 이 사실을 부정하고 위안부문제에 사죄할 뜻이 없는 것도 혐한(嫌韓) 감정으로 양심의 짐을 벗어던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경남 합천군에 일해공원이 있다. 본디 이 공원은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했는데 나중에 일해공원으로 바뀌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꾸로(‘일해공원에서 새천년 생명의 숲으로 바뀐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상식의 향방이 그렇기 때문이리라. 공원 입구에는 전두환이 직접 일해공원이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뒷면에는 이 공원은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대통령의 아호를 따서 일해공원으로 명명하여 이 표지석을 세웁니다. 20081231일 합천군수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3·1독립운동 기념탑도 이 공원에 세워져 있다는데, “국가권력에 의한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따른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암매장 사건 등이 자행되어 헌정질서를 훼손한 사건”(민변 성명서)의 수괴인 전두환과,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는 공원 사이에 놓여 있는 것 또한 혐오감정이다.

 

전두환 등을 법으로는 단죄했고,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등의 영화가 호평을 얻었어도 일부 사회구성원에게 혐오감정은 끈질기게 살아 있다. 혐오는 사랑보다 힘이 세다. 가령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전사모)에게도 전두환을 사랑하는 감정보다는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정이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사랑이 우리 눈을 멀게 하듯이, 혐오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민주·반민주 구도를 흐리게 하는 것도 혐오의 힘인데, 그 파장력이 강력한 만큼 다수는 혐오감정을 갖지 않아도 된다. 이 혐오에 분노로 맞서지 않는 착한 방관자들이 다수로 남아 있기만 하면, 그래서 일해공원을 찾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생각하지 않는사람이 다수면 되는 것이다. 혐오의 정치학이 이와 같다.

 

최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킨 자유한국당 소속 세 국회의원은 스스로 혐오의 정치의 달인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정치는 혐오의 언어로 혐오감정을 부추기는 것이다. ‘80년 광주폭동’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등의 발언이 그렇거니와, 세월호 희생자를 두고 국가를 위해 전쟁터를 싸우다 희생되었는가시체장사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따위의 발언이나, “활동 사항 보니 동성애 관련이 많은데, 동성애자는 아니죠?”(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같은 질의도 마찬가지다. 비상식적인 내용, 가짜 뉴스로 선동을 일삼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자유한국당이 재집권하기 어려우리라는 불안감, 초조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혐오의 정치가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를 혐오스럽게 여기게 하여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부수적 효과를 거두어 혐오스러운 정치인들이 정치를 계속 독점하도록 한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혐오는 앞서 말했듯이, 가진 자, 힘센 자, 다수파가 못 가진 자, 약자와 소수파에 대한 차별, 억압, 지배를 관철하기 위한 감정기제로서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조선인을, 오늘의 이스라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인을 혐오했고 혐오하고 있는데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내국인이 난민,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는데, 그 역이 성립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혐오가 시민성에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에 맞서는 분노를 억압하고 이를 무산시킨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가령 한국의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여혐-남혐으로 대립각을 세워 싸우는 것이 지배세력에겐 실로 아름다운 혐오의 정치학인 것이다.

 

혐오의 정치에 휘둘리는 대신 사랑의 정치에 귀 기울이고 이를 펼칠 때가 되었다. 이것이 촛불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70년 적폐를 쌓은 수구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혐오의 정치를 통해서 관철되었다. 그들의 담론에서 북한과 진보좌파에 대한 혐오,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 점은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식이나 일왕 생일 축하연에는 참석하면서도 남북 철도 연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최근 행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분단체제의 70여년을 지나 새로이 정립되는 남북관계의 전망 앞에서 이 땅에 강고히 뿌리내린 혐오의 정치와 결별해야 한다. 누군가 말한,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을 기본 소명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에 담긴 정치의 본령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혐오감정의 덫에서 차별금지법을 해방시켜 입법해야 할 책무가 촛불정권, 촛불시민들에게 있다. 차별을 금지하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요구다. 유럽 나라들에서는 “21세기는 성소수자의 해방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에겐 동성결혼권은커녕 동거권(생활동반자법)조차 없어 성소수자들은 헌법상 권리인 행복추구권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차별금지법에 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비켜갔는데, 집권 후 나온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은 제외되었다.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성소수자 혐오 때문이라는 점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공론장에서 설득도 하지 않고 논쟁도 없이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혐오 옆 착한 방관자비겁한 위선자의 다른 이름이다.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 정치지도자가 아쉽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대표 한겨레 19. 2.14

 

제국의 위선

자고로 그들은 얼마나 확신으로 충만했는지 모른다. 프랑스인 소설가 크리스토프 바타이유가 스물한 살에 쓴 다다를 수 없는 나라’(1993)는 마지막 봉건 왕조가 움트던 18세기 말 무렵 베트남이 배경이다.

 

실권한 섭정공 응우옌 푹 안은 1787년 루이 16세의 프랑스에 일곱 살 아들을 보낸다. 군대와 선교사들의 힘으로 하느님의 왕국을 회복해달라는 세속적인 간청과 함께였다. 황제는 거절했고, 알현한 지 며칠 뒤 아이는 죽었다. 그 아이가 제 가족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 주교는 무신앙의 질곡에서 베트남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이들을 모았다. 하느님의 왕국은 크면 클수록 좋았다.

 

사이공(호찌민)에 닿자 파견대가 쪼개졌다. 군인들은 무장한 농민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자기들 나라에서도, 전쟁에서도 먼 곳에서 외로이 죽었다. “군인들은 베트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 점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바타이유는 적었다. 그러나 교회도 일방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번역한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후일의 역사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제국주의의 확장과 무관하지 않음을 주시하게 된다고 책 말미에 썼다.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으로 세상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수단이 뭐여도 상관없고 가장 효율적인 도구는 힘이라고 말이다. 하느님 영토가 늘어나는 데 투입됐던 유럽 제국들의 신념과 열정은 그러나 맹신과 광기로 바뀌기 일쑤였다. 단순하고 선명하게 정의(定義)된 정의(正義)는 견고하고 구심력이 강하다. ()의 척결보다 숭고한 사명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보라. 중세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이 흥건한 피 말고 대체 남긴 게 뭔가.

 

이제 선은 힘의 다른 이름이 된 듯하다. 독선의 제국에게서 패권을 계승한 강대국들은 자기들이 선하다고 믿을까. 더 이상 선은 추구되는 게 아니다. 쟁취하는 것이다. 힘이 곧 선이다. 하지만 선악 구도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인류는 진보해 왔다는 게 우리 믿음이다. 국가 간이면 몰라도, 적어도 나라 안에서는 약육강식이라는 남루한 진실이 드러나선 안 된다. 그래서 위선의 시대다.

 

일제(日帝) 비호로 강점기 식민지인들을 강제 동원한 기업이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상식적 인권 문제를 일본이 기어이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것도 초강대국 미국 주도로 강대국 이익이 늘 관철되게끔 짜인 전후(戰後) 질서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입맛대로 약소국 청구권을 말소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의 위계(位階)를 서방이 전복시킬 리 없다는 심산에서일 것이다. 국제법이 힘에 좌우된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악이나 야만이라는 낙인을 찍어 북한이 핵을 못 갖게 만들려 했다. 애초 역할이 북한은 범죄자, 자기는 경찰이었다(브루스 클링너 미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핵 보유권이 타고나는 거냐는 비보유국들의 반발에 차츰 줄여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러웠다. 자기가 하면 불륜도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었다. 현재 미 조야에 만연한 비핵화 회의론은 이런 선악관의 변종이다. 흐릿하고 복잡한 세계의 입체성에 조응하는 필연적 의심이라기보다, 종교적 교조와 편협한 경험에서 비롯된 확실한 불신에 가깝다.

 

2017년 방한 국회 연설 당시 문명국을 대신해 말하겠다같은 선악 이분법적 대북 수사(修辭)들로 십자군 꾸리듯 비장함을 연출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해 대화에 나서고부터는 상인(商人) 출신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상대를 절멸하려는 신념 전쟁 대신 계산적이고 실용적인 거래가 북미 사이에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소설의 프랑스 선교사는 베트남에서 자신을 구속하던 열망에서 벗어났다. 27~28일 하노이에서 재회하는 북미 정상 둘 모두 더 자유롭고 냉정해졌기를 기대한다. /한국 권경성 정치부 기자 19.2.14

 

 

시민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

지난주 아시아의 에너지전환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워크숍에 참가하느라 도쿄에 다녀왔다. 거리의 차들을 보니 경차가 많고 경유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요즘 미세먼지 탓에 다른 나라에 가면 대기질에 민감해진다. 도쿄의 공기는 서울보다 한결 좋았다. 과거에는 나빴다가 200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확연히 개선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2015년부터 PM10 기준 25/이하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만찬자리에서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하나같이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No) 디젤카정책을 지목했다. ·일관계나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지만, 이시하라 지사는 경유차 그을음을 페트병에 넣어 다니면서 유해성을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게 했다. 중앙정부보다 앞서 신차에만 적용되던 배출가스 규제기준 미충족 경유차를 아예 운행하지 못하게 하면서 배출가스 저감장치 부착비용을 지원하고 대중교통 시설을 확충했다.

 

당시에도 경유가격이 휘발유가격보다 낮았지만 연비 좋은 하이브리드차가 제작·시판되는 시기와 맞물려 연료비 절감을 위해 굳이 경유차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의 휘발유가격 대 경유가격은 100 84100 86인 우리보다 약간 더 낮다. 게다가 일본 자동차회사들이 경유 승용차를 만들지 않아 국산차를 선호하는 일본 소비자들이 외제차인 경유차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강력한 정책과 기술 발전, 시민 인식과 소비자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지금의 우린 어떨까? 한국에서도 경유차는 도시 미세먼지의 주요 원천이다. 2015년 기준 수도권 미세먼지 발생원의 22%는 경유차로 비중이 가장 높다. 게다가 경유차 미세먼지는 2012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자동차는 사람들이 거주하거나 이동하는 생활공간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고 유동인구가 많은 도시지역의 경우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미세먼지 우려가 심각한데도 201812월 말 현재 국내 경유차 등록대수는 993만대로 전체 차량 2320만대 가운데 42.8%였다. 역대 최고치다. 1년 만에 무려 35만대가 늘었다. 경유차 중 화물차 비중은 33.8%인 데 비해 승용차가 58.1%에 달한다. 연료로서 경유 제조단가가 높음에도 휘발유보다 상대가격을 낮춘 건 경유차가 대부분인 화물차 물류비를 낮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승용차, 특히 SUV 차량 비중이 더 높아져 버렸다. 화물차의 경우, 경유 이외 대안이 별로 없다. 소형 화물차는 LPG 차량이 시판되고 있고 전기차도 일부 있지만 중대형 화물차를 대체하기 위해선 기술발전을 얼마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승용차는 굳이 경유차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휘발유차가 있고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수소차 등 친환경차를 선택할 수 있다. 대중교통이란 대안도 있다. 2018년 이런 친환경차는 46만대, 총차량의 2.0%로 전년 대비 12만대가 늘었을 뿐이다.

 

15일부터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약칭 미세먼지법)”이 시행에 들어간다. 같은 법 10조에 따라 미세먼지특별위원회가 이날 자로 출범한다. 정부가 미세먼지 배출량 통계의 신뢰를 높이면서 다양한 정책을 집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동시에 시민인식도 함께 가야 한다. 경유차를 유지하거나 늘리면서 미세먼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건 연목구어다. 내가 모는 경유차가 시민 건강을 해친다면 자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엇보다 경유의 상대가격을 조정해야겠지만 그 이전에도 취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다.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과 도보를, 자가용을 몰아야 할 상황이라면 작은 친환경차를 선택할 수 있다. 미세먼지 해결은 시민 실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민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이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경향 19. 2.14

 

자유한국당 5·18 모독의 뿌리

 

1980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무참히 폭행하는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보수진영이 화들짝 놀랐다.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세 국회의원의 5·18 모독 발언이 보수 전체를 들쑤셔 놓았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당내 의견이니 다양한 역사해석이니 하는 궤변으로 넘어가려다 보수 내부의 거센 비난 앞에 결국 세 의원을 당 윤리위에 회부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을 쏟아내던 보수 언론들은 이번엔 총구를 자유한국당으로 돌렸다. 분위기도 좋고 전당대회를 통해 보수 결집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왜 이런 악수로 지지율을 까먹느냐고 질타했다. 보수 명망가들조차 ‘5·18 북한군 개입설은 철지난 음모론이라며 김진태 의원 등과 선을 긋고 있다. , 이제 망언을 한 세 국회의원을 적당히 징계하고, ‘5·18은 민주화운동이며 북한군 개입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사과문을 내면 모든 게 끝나는 걸까.

 

그러나 이 사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12“(세 의원의 주장이) 일반적 역사해석의 차이를 넘었다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가리켜 헌정질서 문란 행위자라고 비난했지만, 이런 태도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언제나 바뀔 수 있는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다. 19901, 5공 군부독재를 계승한 민정계와 민주화운동을 했던 민주계(김영삼계)의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이 자유한국당의 뿌리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몸속에 흐르는 독재의 피가 정화되지 못했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북한군 개입과 같은 허무맹랑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광주 무력진압이 1980년 봄의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북한에 맞서 자유 질서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정치행위였다는 해석은 보수 본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비교적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 광주는 정치적 약점일 뿐,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빛나는 자산이란 인식은 약하다. 이런 기류 속에서 정치적 상황이 좀 나아진다 싶으면 부지불식간에 비집고 표출되는 게 바로 김진태식 언행이다.

 

한번 돌아보자. 노태우씨가 회고록에 “5·18 진범은 유언비어라고 적은 것이나 전두환씨가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회고록에 표현한 건, 그들이 광주학살의 주범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07년 대통령 예비후보 시절 광주를 방문했을 때 ‘5·18 사태’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내내 사용했다. ‘광주사태1980년대 군부정권이 5·18폭동으로 색칠하고 무력진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썼던 용어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더구나 그 기반 위에서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단어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해 제창할 것인지 여부가 여야 청와대 회동에서 논란이 됐다. 당시 우상호 민주당·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독립군 후손에게 독립군가를 부르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느냐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해달라고 박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좋은 방안을 찾도록 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국가보훈처는 기념곡 지정을 거부했다. 대통령의 묵인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유한국당 출신 대통령들의 5·18 인식이 이런 걸 보면, 일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독버섯은 습한 환경과 고사목 지대가 있어야 피어나는 법이다.


자유한국당 주변엔 비슷한 생각을 하는 보수세력, 정확히는 보수를 가장한 극우세력이 좀더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만약 여당 국회의원이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발언했다면, 보수언론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이적행위헌정질서 부정이니 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맞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그런데 헌정질서 부인 행위이며 민주공화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세 국회의원 발언엔 왜 그런 식의 대응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지지율을 까먹는 자유한국당 실수가 허탈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안타까움만 배어 있을 뿐이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한국 정치에선 진보 대 보수의 구도가 자리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구도에선 더불어민주당도 진보 블록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5·18 망언 파동을 보면, 진보-보수 구도로 슬쩍 덮었을 뿐 민주 대 반민주전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19.2.13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한겨레] 지식인은, 이미 죽었다

최근 국내의 한 강연 자리에서 요즘 지식인들의 고민들이 옛날에 비해 훨씬 덜 치열한 것 같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실 나로서는 답변다운 답변을 내놓기가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과연 요즘 같은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를 지식인으로 지칭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지식인은 한국의 20세기 역사가 만들어놓은 중요한 발명이었고 20세기 역사의 주역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누구를 여전히 지식인이라 호명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의문이다.

 

지식인뿐인가? 신자유주의는 한국 사회 계층의 지형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노동계급을 사례로 들어보자. 나는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주당 평균 48시간이나 일하고 기업 경영에 발언권을 갖지 않는 대기업 정규직은 중간계층에 가까운 노동자일지는 모르지만 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크다. 그런데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연봉이 대기업 정규직의 연봉에 비해 40%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두 계층을 같이 아울러 노동계급이라고 부르는 것도 옛날처럼 쉽지 않다. 그만큼 신자유주의는 과거의 노동계급을 심하게 분열해놓았다. 그런데 지식 노동자 사이의 분열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과거와 같은 지식인 초상은 증발되고 말았다.

 

한국의 지식인인텔리겐치아의 번역어다. 근대 번역어들의 대부분은 서구의 언어, 즉 영어나 불어, 독어에서 기원한 것들이지만, ‘지식인은 드물게 러어의 인텔리겐치아를 번역한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역사적 발전의 과정상 서구보다 러시아는 한국에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세계적 자본주의 발달을 주도하는 구미권 핵심부 국가에서는 지식 기술자, 즉 인텔렉추얼 계층은 국가와 자본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으며 그 성향상 자유주의적이거나 보수적이었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나 조지 오웰(1903~1950)처럼 급진 사상이나 문학을 창조했던 무일푼의 괴짜들은 구미권 인텔렉추얼 중에서는 늘 비주류로 밀려 있었다. 한데 근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준주변부로 분류되어 혹독한 압제 밑에서 살아야 했던 러시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급진파일수록 오히려 폭정에 지친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레프 톨스토이(1828~1910)와 같은 문호일수록 국가와 대립의 각을 세우는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만들어진 인텔리겐치아라는 개념은 서구의 인텔렉추얼보다 동아시아의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지사(志士)’에 더 가까웠으며, 그만큼 지식인으로 번역되어 한국 사회에서 쉽게 뿌리를 내렸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역사적 조건은 크게 달라졌지만 그 70여년간 한반도 땅에서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엇비슷한 함의를 계속 지녔다. 지식인은 좁게는 민족이나 계급을, 넓게는 인류를 시야에 놓은 사상분자였고, 민족 내지 계급, 아니면 인류 보편의 이해나 원리원칙에 거역하는 지배자들에게 저항을 해야 하는 주체였다. 저항은 못 해도 적어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지식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식인은 운동의 장에서 대중을 만났고 늘 현장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이러한 지식인 개념에서 문제를 찾자면 천가지, 만가지도 넘을 것이다. ‘지식인대중을 나눈다는 묵시적 엘리트주의 자체가 그다지 민주적 발상이 아니었다는 것부터 당연히 문제삼아야 한다. 게다가 지식인의 거시적 역할은 그 미시적인 삶의 현장과는 거의 연결되지 않았다. 사회에서 참여 지식인으로 명성을 누리는 민중 신학자민중 사학자는 학교라는 소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독재자와 같은 면모를 보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지식인은 중산층 남성들이었고 적어도 그 사생활에서는 중산층 내지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마디로 20세기 한국 지식인이 생산하는 담론과 그 지식인의 삶 사이의 괴리는 상당했다. 그러나 적어도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현장으로 눈을 돌리게끔 하는 것은 이런 당위적 지식인의 초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의 변화가 찾아왔다. 1970년대 말 레이건주의와 대처주의로 시작된 세계적 보수화의 물결은 1990년대 초중반에 한국까지 덮치고 말았다. 물론 그 상황 속에서 한국적 특성도 보였다. 문민정부 출발과 함께 군 출신들이 정부의 요직에서 대거 물러나게 되고, 이렇게 해서 비워진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학벌 좋은 지식인이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아예 운동 사회의 일부 지도층까지 정부 요직에 흡수되었고, 그만큼 그들이나 그 출신 단체들이 주류화, 보수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의 부동산 경기 호황 시절에는 일단 집을 보유한 기존 지식인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는 보유 자산 가치의 엄청난 인상을 봤고 사회적 위치 차원에서 단순한 지식 노동자에서 중간계층이나 그 이상으로 상향 이동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쓸모 있는지식 위주의 극도로 신자유주의적인 신지식인론을 제창한 1999년에는, 운동 사회와 연결돼 있었던 과거의 지식인 사회는 이미 사실상 와해돼 있었다. 이에 뒤이은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인텔리겐치아와 같은 유형의 지식인을 확인사살 하고 말았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화를 경험한 대학은 착취 공장으로 변모했다. 4년제 대학의 정규직 교원 수는 5년 전에는 64천명, 작년에는 68천명으로, 거의 늘지 않는다. 한데 국내만 해도 1년간 박사학위를 새로이 취득한 이들이 1만명 이상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지난 20년 사이에 공장이 각종 비정규직의 종합세트가 됐듯이 대학도 무늬만 교수의 왕국이 됐다. 강의전임교수, 산학협력교수, 교양교수, 연구교수, 비정년트랙 교수, 겸임교수, 계약교수새로운 직급을 나타내는 신조어는 다양하지만 의미는 매한가지다. ‘배운 사람으로 하여금 찍소리도 못 하게해놓고 정규직보다 훨씬 더 적은 연봉을 주면서(대개 3500만원도 안 된다) 영어논문 생산과 강의 등을 강요하며 싼값에 지식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과연 사회 참여할 엄두를 내기가 쉽겠는가?

 

이렇게 해서 과거의 지식인 계층은 노동계급처럼 분열되고 말았다. 지식의 착취 공장, 한국 대학의 피라미드를 뒷받침하는 시간강사와 비정년 교수, 연구자들은 말 그대로 지식 무산 계급으로 재편됐다. 정권이 바뀌면 정치적으로 불온한예술인·연예인의 블랙리스트가 해지되지만, 조금이라도 윗사람이나 소속기관에 저항했던 비정규직 연구자들의 비공식적 블랙리스트는 정권이 아무리 교체돼도 그리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지식 무산 계급이 투쟁의 현장으로 나가기는 지난한 일이다. ‘지식 무산 계급을 관리하면서 그 노동의 일부 과실을 착취하는 지식 기술자’, 즉 전임교원들은 이제는 대개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충원된다. 그들은 태생적으로사회의 문제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맨 위에서 대학과 연구자 사회를 총지휘하는 고급 지식 관리자들의 대부분은 도미 유학파 출신으로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신봉자들이다. 오늘날의 속칭 헬조선을 만드는 데에 앞장선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텔리겐치아는 죽고, 서구형 인텔렉추얼을 지향하는 지식 기술자관리자’, 그리고 그들이 착취하는 지식 무산 계급만이 남아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피해자들은 배운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필요한 부분을 스스로 배워나가면서 이 나라를 지옥으로 만든 신자유주의 체제와의 투쟁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비정규직 노동자임을 깨달은 지식 무산 계급의 일부 역시 언젠가 난관을 뚫어 이 투쟁에 크게 보탤 수 있을 것이다. 19.2.13

 

박수환 문자가 놀랍지 않다

[윤형중 칼럼] 국내 언론 현실을 인식한 뒤 보면 남들보다 좀 더 일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탐사보도 매체 뉴스타파가 언론과 기업의 낯 뜨거운 유착 관계를 보여주는 박수환 뉴스컴 대표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도했다. 문자메시지들은 대부분 기업이 박 대표를 통해 홍보성 기사나 기사 수정 및 삭제를 청탁하고, 언론사 간부가 이를 들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끈끈한 유착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박 대표는 평소 언론사 간부들에게 금품과 명품 등을 지급했고, 때론 언론사 간부 자녀의 취업 청탁마저 기업에 전달했다.

 

손석희 JTBC 대표가 차량에 누구랑 동승했는지나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배우 김부선씨 사이의 공방을 경마식 경쟁 보도로 열을 올리는 언론들이 박수환 문자에 대해선 이상하리만치 무관심하다. 박수환 문자를 보도하는 매체들은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시사인, 미디어오늘, 고발뉴스, KBS, MBC 뿐인데, KBSMBC를 제외하면 이들 매체엔 공통점이 있다.

 

201310월 박수환 전 뉴스컴 대표와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 사진=뉴스타파

 

그 공통점은 이 글 말미에 언급하겠다. 그보다 먼저 이 칼럼 주제인 언론 수익 모델의 현황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언론의 핵심 수익 모델은 1800년대에 광고로 정착된 이후 200년간 유지됐다. 생산물인 뉴스를 직접 팔기보다는 뉴스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뉴스 옆에 광고를 붙이는 방식으로 언론사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뉴스를 제작하며 회사를 운영했다.

 

200년간 문제 없이 돌아간 이 수익 모델은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급격하게 무너졌다. 지난해 11월 메리츠종금증권이 발표한 ‘2019년 미디어광고시장 전망보고서를 보면 2017년 전체 111290억원의 광고 시장에서 신문과 잡지는 17000억원을 차지했다.

 

전체 광고 시장은 매년 조금씩 커지고 있으나, 신문과 잡지가 기록하는 광고 매출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중이다. 반면 광고 시장에서 온라인의 존재감은 지속적으로 커졌다. 일례로 네이버는 2002년 광고 매출액이 740억원에 불과했으나 2017년 광고 매출액은 26000억원이 넘는다.

 

의외로 눈여겨 볼 점은 기성 매체의 광고액이 예상보다는 상당하다는 점이다. 신문과 잡지가 여전히 전체 광고 시장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광고 효과 때문일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신문이나 잡지 광고를 보고 물건을 구매한 분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오랜만에 신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예상 외로 여전히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광고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사는 광고 효과가 없는 광고라는 상품을 어떻게 팔고 있는 것일까. 이미 언론사와 기업의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언론사의 핵심 수익 모델이 광고에서 보험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언론사는 보험에 가입한 기업의 이익에 종사하고, 보험을 해지하거나 보험금을 적게 낸 기업들에 보복을 한다. 이런 이유로 일선 기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데스크에게서 홍보성 기사조지는 기사를 발주 받는다. 그런 발주를 받은 뒤 비판할 만한 사안을 찾아서 보도하더라도 기자도 모르게 온라인에서 사라지는 기사들이 적지 않다.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 보험상품의 경쟁력을 확인하는 것이 보도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2010년을 기억한다. 그해 조선, 중앙, 동아,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 언론사들은 종합편성채널을 신청하기 위해 자본금 3000억원을 채워야했다. 언론사의 보험수익 모델이 기업들을 유난히 괴롭힌 한 해였다. 언론사가 콘텐츠광고가 아닌 보험을 판다는 이 희한한 상황이 고착화된 현실을 인식한 뒤 박수환 문자를 보면 별로 놀랍지 않다. 새로운 시장환경에 잘 적응한 이들끼리 남들보다 좀 더 일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박수환 문자를 제대로 보도한 매체들은 핵심 수익 모델이 보험이 아닌 공통점이 있다. 보험을 팔지 않아 영세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언론이 보험을 파는 현실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계속 이래야 하는 것인지, 대안은 무엇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필자는 9년여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가 돼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의제화에 실패했다. 계속 실패하지만 다시 한번 문제제기를 해보련다.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media@mediatoday.co.kr 19 2.13

 

가장 무지한 종

공룡은 두 차례에 걸쳐 멸종했다. 첫번째 멸종은 6600만년 전 인도 데칸고원에서 발생한 초대형 화산 폭발로부터 시작됐다. 화산재와 온실가스가 지속되며 공룡 24종 가운데 10종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15만년 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다. 나머지 모든 공룡도 사라졌다. 공룡은 화산폭발과 소행성 충돌이라는 원투 펀치를 맞고 멸종했다.

 

자유한국당은 2016년 총선에서 졌다. 1당을 빼앗긴 충격은 컸지만 122 123, 의석은 불과 한 석 차이였다. 멸종까지는 아니었다. 박근혜 탄핵은 화산 대폭발에 비견할 만하다. 그 여파로 한국당은 정권을 넘겨주고 다음 지방선거도 궤멸적 참패를 당했다.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의 3연속 패배는 보수정당 사상 처음이다. 여의도와 중앙에 이어 지방권력까지 넘어가며 권력 주류는 완전히 바뀌었다. 공룡처럼 군림했던 보수정당의 1차 멸종이다.

 

그런 한국당이 2·27 전당대회를 앞두고 꺼진 박근혜에 다시 불을 붙이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번째는 전대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 대표 선거는 일반 시민 대상 여론조사(30%)에 책임당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 투표(70%)로 이뤄진다. 20177·3 전당대회 당시 16만명이었던 책임당원은 현재 34만여명으로 배 이상 늘었다. 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태극기부대를 포함한 극우세력이 대거 입당원서를 써냈기 때문이다. 책임당원 중 절반이 TK(대구·경북)를 비롯한 영남이다. 이들은 박근혜 광팬들이다. 이들을 잡지 않고서는 선거에 이길 수 없다. 그래서 구미의 박정희 생가, TK는 후보들의 성지순례 코스가 됐다. 전국의 15%에 불과한 TK 표심은 한국당에서 과대 대표되고 있다. 노년층의 박근혜 셀러브리티(유명인)’ 심리를 자극하는 건 다음으로 중요한 선거전략이다.

 

교도소 안의 박근혜는 이를 잘 알고 있다. TK와 노년층은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존재감을 다시 보여줄 때가 왔다. 박근혜를 유일하게 접견하는 변호사는 허락을 받았다며 방송에 나와 메시지를 전했다. 황교안은 친박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깜짝 놀랐다. 20173월 수감된 이후 678일 만에 나온 첫 메시지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독방에 책상과 의자를 넣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데 더욱 놀랐다. 옥중의 박근혜에겐 우주와 혼만큼 책걸상이 가장 큰 현안이요, 감방 내 비정상의 정상화가 중요했던 것 같다. 박근혜는 제1야당의 리더를 뽑는 데 비전도 가치도 아닌, 책걸상을 중대 변수로 만들었다. 박근혜 지지층은 책걸상과 황교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대혼돈에 빠져들었다.

 

두번째는 민심의 변화다. 민주당과 한국당 간 지지율 격차는 10%포인트로 바짝 좁혀졌다. 이만큼 근접한 격차는 탄핵 후 처음이다. 그동안 금기어나 다름없던 박근혜이름 석자를 꺼내고, 석방론을 주장하는 것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지방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떠난 홍준표는 내가 옳았다고 돌아왔다. 탄핵 총리 황교안은 나는 국정농단과 무관하다며 뛰어들었다. 염치도 도의도 없지만 그 동네에선 상관없다. 5·18망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도 살 만해지니까 나온 얘기다. 한쪽의 표를 얻기 위해 다른 한쪽을 희생시키는 저급한 정치다.

 

한국당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잘못했습니다라며 무릎을 꿇은 건 위장이었다. 개혁하고 쇄신하며 미래로 나아가기는커녕 친박·비박 대결 정치, 정부 발목잡기, 수구적 태도 그대로다. 지금 한국당 지지율 상승은 여권의 잇단 악재에 따른 어부지리지, 한국당이 잘해서 올라간 게 아니다. 한데도 폐족 위기에 몰렸던 친박은 책임도 반성도 사과도 없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 쓸모없는 선물교환 1위가 한국당 입당원서라고 한다. 2G폰 충전기, 폐타이어를 제쳤다.

 

지구에 거대한 멸종이 일어난 건 온난화 때문이었다. 지구 평균온도가 최대 11도 상승했다. 그 결과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 소멸했다. 과학자들은 이를 50억년 지구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꼽는다. 이 논문을 발표한 커티스 도이치 워싱턴대 교수는 인류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지구 역사상 가장 무지한 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보수야당이 과거와 일획을 긋고 진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기를 시민들은 바랐다. 하지만 친박이 한국당을 해체 수준으로 재창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수구적 이념, 노선, 가치, 인물을 바꾼다는 것도 기대 난망이다.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2020년 총선은 또 한번 심판의 장이 될 것이다. 한국당은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무지한 종이 되고 있다. / 박용래 논설위원 경향 19.2.11

 

관료를 믿어야 하는가

경제는 잘 모르는 탓에 그저 관료들을 믿을 뿐이고, 투자 증대를 위해 재벌의 말을 순순히 따라야 한다면 이 정권을 과연 촛불 정부라고 할 수 있을까?

두 달째 모든 경제 이슈를 뒤덮어버린 신재민 폭로 사건’. 도대체 그는 무엇을 폭로한 걸까. 세수가 남아도는데 왜 정부는 추가로 적자국채를 발행하려 했을까? 온갖 음모론이 제기됐지만 내 결론은 세계잉여금, 즉 국회의 감독을 받지 않는 주머닛돈을 남겨서 다음 해에 쉽게 재정을 충당하려 했다는 것이다. ‘꼼수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이 기술은 증세 없는 복지라는 대통령의 공약을 조용히 지키기 위해 동원되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문재인 정부도 2018년 성장률을 실제보다 높게 예측했다. 2017년을 빼고 지난 세 정권 모두 0.5% 내지 1% 포인트가량 실제보다 더 높은 성장률을 예상했다. 교과서 수준의 경제학에서 세금 수입은 GDP에 평균세율을 곱해서 얻는 것이고, 이런 예상 성장률에 기초해 세수를 계산했다면 예상보다 세수가 부족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내가 수소문한 바, 이 수수께끼의 답은 지난 정부 국세청이 신기술을 도입하고 기재부가 세금 부과 대상을 확대해서 줄어든 성장분보다 더 많이 세금을 거뒀다는 것이다. 훌륭하다. 이제 부동산을 잘 안다는 청와대가 개혁 진영의 온갖 비판을 들으면서도 종부세율을 찔끔 올리고 만 이유도 이해가 간다. 세율 인상 없이 공시지가를 현실화하면(즉 세금 부과 대상을 늘리면) 된다.

 

공유경제·수소경제 활성화정책의 허와 실

물론 이것도 명백한 증세다. 하지만 정치권의 논쟁을 일으키지 않고 세법 개정을 위해 국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증세다. 기획재정부는 세원을 늘렸으면 세수 예측도 이에 따라 높여야 하는데 왜 계속 틀리는 걸까? 무능해서가 아니라면, 한편으론 각 부처나 청와대에 세수 부족이 예상되니 지출을 최대한 줄이라 하고 실제론 계속 세입을 확대해서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의도적으로 긴축재정을 지속한 것이 아닌가? 봉황의 큰 뜻을 알 리 없는 참새가 정의로운 폭로를 했으며 청와대는 어떻게든 국회를 에돌아가고 싶어 묵인했을 것이다.

 

새해가 열리자마자 대통령 주재하에 두 가지 주요 정책이 전광석화처럼 발표됐다. ‘공유경제 활성화 방안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이 그것이다. 둘 다 미래 기술, 그리고 생태 혁신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엔 대통령 보고서가 아니라 대기업의 투자유치서였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자 이리저리 잴 것 없이 재벌들의 투자에 목을 매달고 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로 대표되는 공유경제는 플랫폼의 독점가격 설정 및 가격차별화, 극히 불안정한 노동(프리캐리아트)의 양산, 그리고 데이터 독점 위험 때문에 세계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문서 전체를 통틀어 이에 관한 대책은 단 한 줄도 없다. 현실 세계에서 이 경제는 소유에서 공유로라는 아름다운 구호를 실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과연 자동차 소유가 줄어들었을까?) 오직 알고리즘이 발행하는 무면허 개인택시만 증가했을 뿐이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의 선점이라는 점에서 수소경제는 더 위험하다. 수소경제의 혁신성은 화석 에너지인 석탄이나 석유를 수소로 대체한다는 데 있다. 대량으로 오랫동안 저장할 수 없는 전기 대신 압축수소나 액화수소의 형태로 에너지원(energy carrier)을 저장할 수 있다면 정부 말대로 미래 경제의 핵심+친환경 에너지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 문제는 우주 물질의 75%를 차지하는수소의 압도적 부분이 물 안에 들어 있어서 전기분해해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수소경제는 재생 가능 에너지로 생산한 전기가 남아돌 때만 의미가 있다. 이 문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명박 정부 때 핵심 생산 기술로 제시된 원자력 수소나, 한마디 언급된 대규모의 태양광발전소의 수소를 내심 고려하고 있다면 스스로 강조한 분산 발전과 모순될 뿐 아니라 이 정부의 기본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

 

경제는 잘 모르니 관료들을 그저 믿을 뿐이고, 투자 증대를 위해 재벌의 말을 순순히 따라야 한다면 이 정권은 과연 촛불 정부일까, 아니면 관료와 대기업의 정부일까?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시사인 제59419.2.1


압축성장의 복수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20여년 전에 출간된 김진경의 책 제목이다. 한국의 놀라운 압축성장의 명암을 실감나게 표현해준 명언이다. 김진경은 한국은 60년대 이래 30년 동안에 서구의 300년을 압축해 따라갔다무서운 속도의 서구 흉내내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일로도 간주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장은 압축할 수 있지만 성숙은 압축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성장한 만큼 성숙할 수 없었기에 빚어지는 온갖 사회적 문제는 압축성장의 복수라고 해도 좋겠다. 이 복수의 구체적 사례를 다룬 두 권의 중요한 책이 2013년에 출간됐다. 박철수의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와 박인석의 <아파트 한국사회: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이다. 나는 이 책들이 압축성장의 복수를 입증한 동시에 지금도 살아 있는 한국 사회의 작동 방식을 폭로한 탁월한 사회과학서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자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집단 이기주의와 사회적 약자 차별을 보도하고, 우리는 그런 보도에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두 저자는 그 이유를 아파트 단지정책에서 찾는다. 역대 정부들은 매년 초 올해는 몇만채의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를 해왔으며, 최근의 3기 신도시 정책 역시 그 방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런 정책에 대해 박철수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정말 정부가 공급한 것인가요? 실제로는 주공이나 아파트 건설업체들이 아파트를 분양하는 것이었고, 정부는 마치 자신들이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건설업체에 아파트 안에 공원, 놀이터 등 부대 복리시설을 만들게 정해놓으면 복지공간을 정부 돈을 들이지 않고 공급하는 셈이니 정부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이 모든 시설은 아파트 단지 입주자들의 부담이었다. 당연히 주민들은 높은 담을 두르고 타인의 출입을 막았다. 아파트 단지는 철저하게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인석은 아파트 단지 담장은 소중한 내 사유재산을 남들이 무단으로 사용하여 내 생활을 교란시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 안전장치인데 이것을 이기주의라고 탓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탓해야 할 것은 도시 환경과 사회 체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역대 정부들이 해온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의 사회적 비용을 뒤늦게 치르고 있다. 역대 정부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군사작전 하듯이 속전속결로 해치워 보여주기 위해 공동체 의식, 시민들 간의 신뢰와 협력, 나눔과 돌봄의 문화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 아니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무형 인프라를 희생시키는 일을 해온 셈이다. 가해자가 감춰지는 이런 부정적 결과는 애초에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른바 알고리즘 독재라는 말을 실감나게 만든다. 주택공급이 시급했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속전속결이라는 사회적 알고리즘이 낳은 결과는 참담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압축성장 전성기의 알고리즘 슬로건이었다. 자식을 용으로 만들기 위한 부모들의 무서울 정도로 헌신적인 교육열은 오늘의 한국을 만든 힘이었다. 그러나 고성장 시대가 끝나면서 이 알고리즘의 각자도생 원리는 용이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강요하면서 빈부 양극화와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압축성장의 복수는 선의일망정 압축성장 시대를 산 사람들의 몸에 각인된 알고리즘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지는 비극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미꾸라지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보다는 용을 지향하는 사회에 집착한다. ‘모든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화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기약 없는 목표에 매달린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박종성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잘 지적했듯이, 정규직 진입은 사활의 문제가 되고, “정규직의 성안으로 들어가면 문을 닫아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혈안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차별에 한이 맺힌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도 정규직 드나드는 정문 앞에서 데모 한번 하고 싶다고 절규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는 의자 뺏기 게임희망 고문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마저 압축성장의 복수로 여겨야 하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19.1.27


 

수소경제와 에너지민주주의

미세먼지와 폭염으로 못살겠다는 원성이 한계에 달한 지금 친환경을 명목으로 수소사회로의 전환이 갑자기 급부상했고 정부가 통 크게화답하는 모양새다. 지금까지 환경오염을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왔던 에너지회사와 자동차회사를 국민들 돈으로 돕겠다는 것이다. 왜 수소인가는 잠시 접어두고, 수소사회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과정을 보자. 수소가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라 주장하는 핵심은 국내 독점적 지위의 자동차회사인데, 친환경 이미지는 별로다. 전 세계 주류 친환경자동차인 전기차 시장점유율은 2%에 불과한 반면 이 회사 디젤차들의 실주행 대기오염물질 발생량은 메이저 회사 중 최고 수준이다. 폭스바겐의 클린디젤 사기가 드러난 것이 2014년이니 이 회사 또한 이미 오래전에 디젤차의 오염물질 배출 문제를 알았겠지만, 국민에게 등 떠밀린 정부가 뒤늦게 클린디젤정책을 폐기할 때까지도 디젤자동차 판매에 열을 올렸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젤의 오염문제에 침묵한 채 돈을 벌어왔던 기업이 정부의 클린디젤 정책 폐기와 동시에 청정에너지로의 획기적 전환을 외치는 상황이 공감이 가지 않는다. 설마겠지만 타이밍은 참 절묘하다.

 

다시 돌아가서, 왜 수소일까? 답은 간단하다. 2차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에너지만큼 독점적인 산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독점을 무너뜨릴 에너지가 확산되고 있다. 바로 태양과 바람 등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는 구조다. 독점에서 벗어나 소규모 분산시스템의 구축이 가능한데, 심지어 집에서도 생산할 수 있는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에너지다. 반대로 중앙집중식에 더해 복잡하고 어려운 통제기술을 요하는 수소는 막대한 투자비용이 따르고, 선점하면 소수 기업이 독점 구조를 강화할 수 있다. 그런데 독점을 위한 초기 위험을 국민의 세금으로 해결한다? 이것은 집과 직장, 길거리 어디에나 있는 장벽 없는 전기가 아니라 불안에 떨며 충전소를 찾아야 하는 에너지자본에의 노예화를 정부가 나서서 만들어주는 꼴이다. 전기차시장을 주도하는 테슬라가 스스로 전 세계에 촘촘히 충전소를 건설하는 것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수소는 전혀 깨끗한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수소 자체는 청정하겠지만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은 미래가 없다. 지금의 미세먼지와 폭염은 과도한 화석에너지 사용이 원인임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수소는 이 화석에너지에서 나온다. 화석에너지 생산은 최근 셰일가스와 셰일오일의 포집(프레킹)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보다 최대 80배나 강한 온난화물질인 메탄이 대기 중으로 대량 확산된다. 이미 수소를 만들기 전 원료생산과정에서 훨씬 많은 오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화석에너지로 수소를 만들고(메탄가스 개질) 또다시 각종 고가의 장치를 통해 자동차를 움직이는 구조가 과연 깨끗할까? 정부의 수소충전소 구축전략에 따르면 대기오염 개선에 효과가 있을 부생수소기반 충전소는 전국에 단 3곳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거의 모두 이런 방식으로 수소를 공급하려 하고 있다. 정부의 에너지 전환정책은 탈원전과 탈화석에너지가 기반인데 수소는 화석에너지정책의 유지에 불과하다. 여기에 보조금을 주는 것은 독점적 화석에너지자본에의 종속을 연장시켜줄 또 다른 게이트를 만들 뿐이다. 정부가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폭염재난의 기폭제가 될 수소사회 대신 친환경 전기충전소를 전국에 확산해야만 한다. 그리고 저렴하게 공급하면 보조금 없이도 국민이 스스로 전기차를 선택하는 셀프혁신을 보일 것이다.

 

자본이 밀실에서 만들어내는 정부포획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만을 만들 뿐이다. 친환경 전환 시점에서 국민의 건강이 아닌, 자본의 이익을 위한 정책으로의 전환은 미래라는 말을 지구에서 제거하는 지름길이다./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경향 1.24

 

체육계 침묵의 카르텔은 적폐다

심석희 선수의 폭로 이후 문체부가 발표한 긴급 대책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성폭력·폭행 등을 불러오는 체육단체 관계자들의 침묵의 카르텔부터 깨야 한다.

필자가 스포츠 인권문제에 관여하게 된 것은 10년 전쯤부터다. 20082월 초,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일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방영된 한 방송사의 스포츠 성폭력 관련 탐사보도가 계기가 되었다.

선수는 자기가 부리는 종이야. 육체적인 종이 될 수도 있고. 선수 장악을 위해 여자니까 (성관계를) 가져야 날 따라오고.”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 그런데 나에게 더 놀랍게 다가온 사실은 또 있었다. 국민에게 사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스포츠계가 인권 사각지대였다는 점이다.

 

인권위는 당장 체육계를 비롯해 폭력·성폭력 문제 전문가들과 대책반을 꾸렸다. 필자도 그 한가운데 있었는데 다들 열정적으로 일했다. 2008년은 스포츠 인권과 씨름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권위에 신고센터를 열어 제보된 사건을 조사하고 전반적인 실태 조사도 했다. 그 결과는 폭력 및 성폭력, 학습권 침해가 얼마나 체육계에 만연한 병폐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대한체육회의 눈 가리고 아웅 식 인권교육

선수와 지도자, 학부모와 관계자까지 포괄하는 대대적인 인권교육도 실시했다. 심각한 학습권 침해와 폭력·성폭력 같은 인권유린이 용인되는 그 밑바닥에는 메달 지상주의와 엘리트 체육정책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하고 생활체육으로의 전환 같은 좀 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대책이 이행되지 않고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권고했다.

 

그로부터 만 11년이 지난 2019년 새해 벽두. 쇼트트랙 심석희 국가대표 선수가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빙상계의 또 다른 선수들이 지도자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슬프고도 허탈하다. 참담할 정도로 반복되는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를 보면서 지난 10년간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심석희 선수의 폭로 직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긴급 발표한 대책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기존 대책에다 가해자 엄벌과 예방 기구 설치를 추가한 정도다. 문제는 대책이 없어서 스포츠 성폭력이 반복되고 피해자가 방치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합뉴스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제22차 이사회에서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태에 대한 쇄신안을 발표하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2019.1.15

 

대한체육회가 지난 10년간 운영해온 스포츠인권센터나 인권교육은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시늉만 냈다고 할까. 피해자는 많지만 대한체육회에 신고하지 않는다. 대대적인 개편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문체부가 내놓은 정책 대부분은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에 맡겨서는 손톱만큼의 진전도 가져오기 어렵다. 근원적인 문제는 또 있다. 문체부의 긴급 대책이 임시방편은 될지언정 스포츠계 성폭력을 뿌리 뽑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싹은 자르되 거대한 뿌리는 그대로 남겨두는 격이다. 스포츠계 성폭력은 체육계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복종 문화와 성차별이 중첩된 데서 기인한다. 엘리트 스포츠 체제하에서 지도자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가족과 유사한 강한 결속력을 특징으로 하는 스포츠 공동체의 폐쇄성은 피해자 보호나 문제의 해결보다 공동체의 명예나 기득권자의 이해관계를 더 우선으로 고려해왔다. 사건이 터졌을 때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거나, 심지어 가해자에게 넌지시 알려주어 무마시키고 2차 피해를 자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시도 체육회와 가맹 단체 관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해묵은 침묵의 카르텔은 체육계의 적폐이자 성폭력 등 스포츠 인권 문제의 본질적 요소다. 이 묵은 적폐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체육계의 많은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피해자들의 신고를 격려하고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 신체 접촉이 많은 운동의 특성이 있다 해도 훈련을 빙자한 성폭력은 단호히 근절되어야 한다. 인권의식과 인권기준 등의 교육을 강화하고, 피해자 치료와 치유, 2차 피해에 대한 철저한 예방 등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신고율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2, 3의 심석희 선수가 홀로 고통을 감내하며 숨죽이고 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시사인 제59219.1.18

 

정치판의 촛불, 김미숙의 정치

김미숙. 그 이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하다. 참혹하게 잃은 아들의 이름을 앞에 쓰자니 가슴이 아린다. ‘를 붙이기엔 너무 한가롭다. 지난 칼럼에서 어머니를 강조한 까닭이다.

나는 지금 그 이름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견주고 싶진 않다. 기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너무 가시밭 길이어서다. 더구나 나는 먹물로 지내며 그 길을 권하기란 염치없는 짓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업상상도 못했던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착하고 성실했던 아들이 참사를 당했기에 어머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추궁하듯 하소연했다. 행여 어머니에게 악성댓글이 인터넷에 오르내릴까 싶어 누가 이 어머니에게 정치적이라 비난할 것인가. 아니 나는 차라리 이 어머니가 진정으로 정치적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썼다

 

[ 관련 칼럼 : 김미숙의 슬픔, 문재인의 사과 (20181218) ]

 

기우였다. 어머니 김미숙은 여의도 정치판과 당당히 맞섰다.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 김용균법통과를 국회의원들에게 다그쳤다. ‘국가 경제를 언죽번죽 들먹이는 자유한국당을 압박해 마침내 법안 통과를 이뤘다. 그랬다. 김미숙은 2018년 세밑 국회의사당의 촛불이었다. 제 잇속이나 제 사람 챙기기로 일관해온 정치판의 짙은 어둠을 온 몸으로 여울여울 밝혔다.

 

지난해 121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김용균 태안화력 발전소 노동자 사망사고 현장조사 결과 공개 기자회견에서 김 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은 아버지 김해기씨. 연합뉴스

 

하지만 마음 놓을 수 없었다. 통과된 산업안전법은 자유한국당의 개입으로 누더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미숙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형벌의 상한선은 높아졌지만 하한선이 없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건 똑같다. 용균이 동료들도 (위험의 외주화 범주에) 안 들어갔는데 새로 진일보한 김용균법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늦은 만남 제안에도 냉철을 잃지 않았다. 진상조사와 책임자 규명조차 전혀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만나면 자칫 상황이 종료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책위에서 일하는 박석운 민중공동행동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차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진상조사와 정규직화를 지시했는데, 대통령 령이 안서는 건지 사장들이 항명하는 것인지 납득이 안 된다고 개탄했다. 정말이지 나도 궁금하다. 대통령의 지시를 왜 내각과 비서실이 수행하거나 점검하지 않는가. ‘친정체제노영민 비서실장이 치열하게 짚어볼 사안이다. 내각에서 대통령의 생각을 구현하지 않고 있는 사안은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 김미숙은 그 자신도 비정규직 노동인으로 알려졌다.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들 잃은 고통의 시간을 어머니가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힘들다. 잠을 거의 못 잔다. 2~3시간 자다가도 벌떡벌떡 깬다지금 이때 나서지 않으면 (사안의 관심이 떨어져) 아무것도 못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한다. ‘나라가 어떻게 하면 바뀔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용균이 동료들을 살릴까자다가도 이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데 그럴 때면 휴대폰에 이것저것 적는다.”

 

그 적바림을 바탕으로 김미숙은 집회에서 읍소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숨지기 전에 이미 11명이 참사를 당했다는 사실이 되우 안타깝다.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13명 째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머니를 용기 있는 실천에 나서게 했다

김미숙은 이 나라 노동인들에게 드리운 깊은 어둠을 밝혀가고 있다. 지상 75m에서 세계 최장기간 굴뚝농성을 벌인 노동인 홍기탁과 박준호는 협상 타결의 배경을 김용균의 죽음에 이어 어머니가 비정규직 고통 호소에 앞장서며 사회 여론이 움직인 데서 찾았다.

 

묻고 싶다. “나라가 어떻게 하면 바뀔 수 있을까를 오늘의 어머니처럼 밤잠 설치며 고심하는 정치인이 지금 국회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에는 또 얼마나 있을까.

 

외동아들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인 김미숙의 정치는 정치판의 촛불이다. 글로나마 서툰 연대의 인사를 건넨다. 힘내시라. 수많은 민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머니를 응원하고 있다. /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9.1.15

 

평등한 성장과 촛불 정부의 초심

2018년 정부가 초과 세수 26조원만큼 재정지출을 늘렸다면 고용과 분배가 개선되었을 것이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힘을 쏟았을 뿐 공정경제나 사회복지 등 다른 정책에는 한계가 컸다.

안식년을 맞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여기서 만난 해외의 진보적 경제학자들도 평등한 성장을 추진 중인 한국 경제에 관심이 크다. 때때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에 대해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 세미나에서 나는 먼저 소득주도 성장은, 불평등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로막는 현실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강조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성장의 과실을 모두가 골고루 나누는 포용적 성장을 전 세계가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주류 경제학 연구들은 심각한 불평등이 정치적 불안정과 신뢰, 교육의 격차를 악화시켜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한 바 있다.

 

현실에서 여러 나라가 불평등을 개선하고 중산층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 대응하여 중산층과 빈곤층의 소득을 지지하는 내용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시행했다. 캐나다의 트뤼도 정부는 부자 증세와 중산층 감세, 사회복지 확대 그리고 적극적인 재정 확장으로 국제통화기금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일본의 일억총활약계획은 취약한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을 통해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을 추진하고 있다. 내수 주도의 성장을 위한 중국의 소득배증계획이나 영국·독일 등의 성공적인 최저임금 인상 사례도 있다.

 

물론 소득주도 성장은 주로 임금 인상과 노동소득분배율의 개선으로 소비를 확대하는 총수요 경로에 주목하며 재분배보다는 임금 인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포용적 성장과 차이도 있다. 그러나 사회안전망이 모자라고 자영업자가 많은 현실을 반영하여 임금주도 대신 소득주도 성장이 제시된 것처럼, 포용적 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은 가까우며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소득주도 성장이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확장적 재정정책의 실패가 중요한 요인이다. 초과 세수가 2018년 약 26조원, GDP1.5%에 이를 전망으로 재정은 사실상 긴축이었다. 만약 정부가 재정지출을 그만큼 더 늘렸다면 2018년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3%를 넘고 고용과 분배도 현실보다 개선되었을 것이다. 해외 경제학자들은 왜 한국 정부가 결과적으로 긴축재정을 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보수적인 관료의 저항 외에도, 재정확장을 실행하기 위한 청와대의 의지나 실력이 충분하지 않았음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포용적 성장을 추진한 선진국의 경험은 확장적 거시경제 정책과 취약한 노동자들의 권익 강화, 그리고 복지와 재분배의 확대 등 정책 조합을 패키지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에 힘을 쏟았을 뿐 공정경제나 사회복지 등 다른 정책에는 한계가 컸다.

 

소득주도 성장 추진했는데 불평등이 깊어진 까닭

해외 학자들은 소득주도 성장을 추진했는데 왜 불평등이 심화되었는지도 궁금해했다. 통계적 논란이 존재하지만, 역시 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노동자들이나 영세한 자영업자들에게 단기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노동소득분배율이 상승하더라도 미시적으로 취약한 경제 부문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세심한 정책의 설계와 집행이 아쉬운 지점이다.

 

2019, 집권 3년차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서 소득주도 성장은 사라지고 경제 활성화가 전면에 제시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지율 하락 앞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 깃발을 내리기 전에 지금까지의 소득주도 성장에 관해 진지한 평가와 반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진보 세력은 또 그럴 줄 알았다며 실망하면서 정부에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평등한 성장의 길을 열겠다는 촛불 정부의 초심과 진정성은 여전히 믿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망이 아니라 애정 어린 비판과 생산적인 문제 제기, 그리고 정책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압력일 것이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제59019.1.7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프레카리아트 혁명의 시대?

노란 조끼들의 이유 있는 반란은 새로운 계층이 정치 무대에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8486월 파리의 시가전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무산계급이 탄생했다면, 노란 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한국 진보가 프랑스 진보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프레카리아트의 투사, 하도급 노동자와 청년 실업자, 편의점 알바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밑으로부터의 혁명적 에너지가 진보적 변혁의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작년은 바로 1848년 혁명 17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데 보통의 한국인들이 의식하든 안 하든, 1848년에 유럽 각국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혁명들은 사실 한국사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20세기 한국사의 핵심어가 된 민족주의, 정치세력으로서 다민족 제국들의 절대왕권에 대항한 1848년 혁명들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차후 조선을 침략하는 일제의 근대화 모델은 바로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 민족 통일을 이룩한 독일제국이었는데, ‘독일 민족 통일의 표어는 실은 1848년 혁명 속에서 처음으로 제시됐다.

 

그런데 1848년에 태어난 것은 민족주의만이 아니었다. 근대적 혁명의 또 하나의 주체가 될 무산계급 역시 1848년에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에서 노동자들을 위시한 모든 인민들의 투표권을 요구한 인민헌장20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는가 하면, 18486월 파리에서는 국가적 취로사업의 폐지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 산업혁명이 진행된 두 나라의 무산계급은 투표권과 취로사업 같은 형태의 생계 보장,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되어 제대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을 요구했다.

그 후로 170년이 지났다. 1848년에 급진적으로 들렸던 ‘11표제 민주주의요구가 현대적 정치의 상식이 된 지 이미 70여년이 되었다.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각종 사민당 지도자들이 정치 엘리트 집단에 편입된 것이 당연시된 지도 오래다. 그런데 왜일까. 170년 전의 노동자 반란을 방불케 하는 일이 또다시 같은 파리의 거리에서 일어났다. 직접적 원인이야 유류세 문제였지만, 유류세 도입 계획이 취소된 뒤에도 노란 조끼를 입은 대중들의 항의는 지속되고 있다. 한겨울 추위에도 시위 대열은 계속 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일부 폭력 분자들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왜 70% 이상의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응답하고 있는가? 다수의 국민이 다 폭력의 편이 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노란 조끼들의 이유 있는 반란은 새로운 계층이 정치 무대에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8486월 파리의 시가전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무산계급이 탄생했다면, 노란 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그리고 노란 조끼들에 대한 다수 노동계급 구성원들의 지지는, 이 새로운 계층이 모든 피착취 계층의 전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앞으로 다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면 바로 프레카리아트의 혁명일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말 그대로 불안 노동자들의 계층을 의미한다. 비정규직, 저임금, 무주택 노동 인구가 바로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고용관계가 불안하거나 월급이 낮거나 자기 집이 없는 노동자들이야 늘 있어왔다. 한데 세계 자본주의 황금기, 1945년부터 197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는 구미권에서는 주변부적 불안 노동은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젊은이들은 몇년간 계약직으로 일하며 셋집에 살아도 언젠가는 당연히 정규직이 되어 은행 융자를 받아 자기 집을 사거나 영구임대주택 같은 안정성 있는 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생설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부모보다 조금 더 잘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도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후반 이후의 신자유주의 도입은 이와 같은 등식을 뒤엎어 노동계급을 분리시켜 놓았다. 전체 노동자의 50~60% 정도인, 주로 남성, 중년, 고숙련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생활의 안정성을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한데 노동계급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정규직마저도 실제 임금의 인상은 더디거나 거의 없고 해고의 불안이 갈수록 높아져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제조업 같으면 내가 태어난 1973년에는 평균 명목 시급이 4달러였는데 지금은 22달러다. 한데 그 46년간의 인플레이션까지 계산한다면 구매력 차원에서는 제조업 노동자의 임금은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거기에다가 오늘날 미국 일자리의 4분의 1은 저임금 일자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구미권 나라에서도 제조업은 쇠퇴하며, 그나마 새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서비스업에서는 젊은이들은 저임금 노동자나 비정규직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구매력이 늘지 않는, 그리고 자녀가 자신보다 잘살기는커녕 저임금 직장밖에 얻지 못하는 노동자 부모들은, 노란 조끼들의 반란 같은 대중행동을 지지하지 못할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프레카리아트의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유럽에서 신자유주의가 덜 치열한 노르웨이만 해도 약 9%의 피고용자는 비정규직이며, 최하위 10%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액은 전체 임금액의 5%에 불과하다. 대체로 전체 노동자의 1할이 빈곤층이 되었고 그들의 다수는 여성이나 청년들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오랫동안 추진되고 있는 영국의 경우에는 대부분 신흥 빈곤층인 자영업자가 16%에 이르며 저임금 피고용자는 20% 정도다. 전체 인구의 38%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을 소유하지 않고 집세를 내고 있다. 즉 전체 근로인구의 30~35%가 프레카리아트이거나 프레카리아트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청년층의 경우 프레카리아트나 준프레카리아트가 이미 절반을 넘는다. 이들은 부모만큼 상대적으로 편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은 물론, 평생 동안 저임금 이상의 정규직과 내 집을 가져볼 확률이 거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오늘날 파리의 거리에서 보이는 행동을 폭력이라고 비난하는 한국 보수언론들은 과연 절망의 절규라는 게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가?

 

노란 조끼를 입은 프랑스의 프레카리아트는 지금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대부분 이 요구들을 지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레카리아트는 노동계급의 전위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프랑스의 좌파정당이나 노조들이 이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이끌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고숙련 조직노동자에 의존해 의회정치에 안주해온 타성 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레카리아트는 노조 가입을 하고 싶어도 할 여건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의회정치 자체를 불신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직접 행동의 언어로 발화한다. 기존의 좌파들은 다시 한번 거리 행동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유럽 프레카리아트의 혁명적 움직임들은 한국인들에게 남의 일일까? 결코 아니다. 한국의 경우 비정규직 비율(32%)과 저임금 노동자(전체 고용인구의 23.7%), 영세 자영업자(전체 근로인구의 약 18%)의 비중, 무주택 가구(전체 가구의 44% 정도)의 수 등을 염두에 두면 광의의 프레카리아트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35~40%, 구미권 평균을 오히려 웃돌 것이다. 프랑스 등과의 가장 큰 차이는 절망의 수위다. 프랑스의 프레카리아트는 족쇄밖에 잃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지만, 한국의 알바생이나 파견직 노동자, 월세방 거주자들에게는 아직 가족의 도움이나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다. 한데 이 기대들이 없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래서 한국 진보가 프랑스 진보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프레카리아트의 투사, 하도급 노동자와 청년 실업자, 편의점 알바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밑으로부터의 혁명적 에너지가 진보적 변혁의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희망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어차피 급진화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좌파가 그들을 이끌지 못한다면, 그 자리를 잘못하면 극우파가 대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19.1.8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