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19.3.1 백범 김구의 '두 얼굴'과 문재인 대통령 -'정치인' 김구는 왜 실패했나
한겨레 19.3.3 ‘태극기부대’의 공로
경향 19.3.4 탄핵 2년, 한숨만 나온다
경향 19.3.11 탄핵 2년의 현장, 광화문광장
한겨레 19.3.11 두 개의 캐슬
한겨레 19.3.12 장자연 사건 이후 잃어버린 10년
프레시안 19. 3.14 나경원은 태극기부대 '수석대변인'인가
경향 19.3.20 한 시민 사상가에 대한 기억
경향 19. 3.21 1%를 위한 성장
프레시안 19.3.22 한국당의 역사 반동정치가 노리는 것
한겨레 19.3.26 국토부 장관님처럼 투기하면 되나요?
경향 19.3.28 제발 어른답게 행동하자
한겨레 19.3.28 황교안과 ‘돈키호테 우파들’
한겨레 19.3.28 일자리 양극화, 미래도 암울하다
CBS노컷뉴스 19.3.28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베정권 우경화, 그래도 희망은 있다
경향 19.3.29 ‘천안함’은 진행형···‘2%의 진실 찾기’ 계속돼야 한다
프레시안 19. 3.29 '한미동맹'은 그렇게나 신성한 것인가? 한국 언론이 시대를 망친다
프레시안 19.3.30 문재인 정부의 도덕적 해이, 심각하다
미디어오늘 19.3.30 격동기의 언론, 제대로 해야 한다
한국 19.3.30 미국인 식탁에 오를 고속성장 연어
미국인 식탁에 오를 고속성장 연어
결국 미국인의 식탁에 유전자변형(GM) 연어가 오르게 됐다. 2015년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이 연어의 식품 이용을 허가했지만 판매는 될 수 없었다. 한 달 뒤 의회가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매장에서 연어의 정체를 알 수 있도록 표시제가 마련될 때까지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였다. 지난해 말 마침내 표시제가 확정됐고, 3월 초 GM 연어의 판매가 승인됐다. 하지만 미국인은 이 연어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표시제가 모호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GM 연어는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다. 우선 신청에서 허가까지의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 생명공학회사 아쿠아바운티는 보통의 연어에 다른 물고기들의 유전자를 삽입해 2배 빠르게 자라는 ‘고속성장 연어’를 만들고, 1995년 FDA에 식용 승인을 신청했다. 이후 인체와 환경에 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까지 20년이나 걸렸고, 판매 허가까지는 3년이 더 소요됐다. 왜 그랬을까. GM 연어를 섭취하는 당사자인 소비자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세계인이 먹어온 GM 식품은 콩이나 옥수수 같은 농작물이었고, 그 대부분은 가공식품 재료로 사용됐다. 이에 비해 연어는 동물인데다 인간이 직접 섭취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실감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가족 식탁에 이상스레 빨리 자란 연어를 올리기에는 아무래도 찜찜하다.
물론 심리적 이유만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개발자는 GM 연어의 성분이 보통의 연어와 동등하고, 육지의 밀폐 공간에서 기르기 때문에 바다에 방출될 염려가 없으며, 설령 방출된다 해도 불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생태계에 영향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전성을 파악하기에는 현재의 승인 요건이 철저하지 못하고, 인간의 실수나 자연재해로 양식장 연어가 바다로 탈출할 수 있으며, 일반 연어와 교배해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소비자의 반감을 일부나마 줄일 수 있는 방안은 표시제였다. 미국은 GM 식품의 최대 생산국이면서도 2016년에서야 표시제 의무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현행 표시제는 GM 연어의 판매를 오히려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목소리가 크다. 용어 선택부터 그렇다. 생명공학이 적용됐다는 의미로 ‘BE(BioEngineered)’라고 표기함으로써 유전자라는 말을 피했다. QR코드를 사용해도 된다. 따라서 스마트폰을 갖지 않았거나 QR코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또한 적극적인 소비자라 해도 식당에서 요리돼 나오는 연어의 정체는 알 방법이 없다. 표시는 제품의 포장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에 2년 앞서 GM 연어의 판매를 승인한 첫 번째 나라는 캐나다였다. 표시제는 예전의 미국과 비슷해 아직도 캐나다인들은 자신이 어떤 연어를 얼마나 먹고 있는지 모른다. GM 연어가 보통의 연어보다 비싼지 싼지 알 수도 없다.
GM 연어의 미국 시장 진입은 식용 GM 동물의 본격적인 확산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GM 새우와 송어가 곧 뒤를 이을 태세다. 중국은 고속성장 잉어를 개발해 상업화를 앞두고 있다.
우리와 무관한 얘기가 아니다. GM 물고기는 지금까지 GM 농작물이 그랬듯이 승인만 이뤄지면 언제든 국내로 들어올 수 있다. 식당에서 추어탕이나 장어구이를 먹을 때 물고기의 정체를 의심해야 할 날이 조만간 닥치지 않을까 싶다. 당장은 예상치 못한 경로를 통해 승인도 되지 않은 GM 연어가 들어올 일에 대비해야 한다. 3월 초 해양수산부가 GM 연어 검출 키트를 개발해 수입 연어를 적극 검사하겠다고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연히 적지 않은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미국의 연어 소식에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해진다. / 김훈기 홍익대 교양과 교수 한국 19.3.30
격동기의 언론, 제대로 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경제문제, 성폭력과 관련한 추문 등에 대한 뉴스들이 뒤범벅이 되어 신문과 TV 뉴스, 인터넷 매체 등에서 쏟아진다. 기분이 좋은 뉴스는 별로 없다. 촛불혁명 뒤로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던 탓일까, 뉴스 접하기가 싫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언론만을 탓할 일이 아니지만 그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 때 ‘기레기’로 지탄받았던 언론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의 언론은 촛불혁명 이전에 비해 확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부실한 비핵화 관련 기사들
가장 중요한 이슈인 비핵화와 관련해서 공영, 진보 언론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쳐다보거나 미국 백악관의 대변인 말을 옮기는 수준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는 기사는 거의 없다. 미국과 북한을 대등한 유엔 회원국 수준으로 놓고 비핵화에 접근하는 언론의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핵화와 관련해 수구집단들의 광기를 보면 전율을 느끼게 되지만 그런 광기의 부당함을 지적할 명쾌한 기준 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동북아의 지각 변동을 유발할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분단이후 최대의 호기를 살리기 위해 언론이 제대로 보도책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없다. 언론은 비핵화에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국가나, 미국과의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를 잘 살피면 시의적절한 기사를 발굴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아무리 두렵다 해도 독자와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날 러시아 외무장관은 타스통신을 통해 ‘카다피, 후세인의 참극 때문에 북미 간 일괄합의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국내 언론은 그것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향후 북한의 대미 협상 전략은 러시아 쪽 견해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다.
한미군사동맹 필리핀과 미국의 경우와 비교해야
국내에서 신성시 하는 한미 군사동맹을 객관화 시킬 필요가 있는데, 필리핀의 경우를 참조 할만하다. 필리핀은 미국과 평등한 군사관계를 맺고 있는데도 남지나해에서 미·중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필리핀이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될 소지가 크다며 최근 미국에게 필리핀과 미국의 군사협정을 개정하자고 정식으로 요구했다. 우리 언론은 불평등한 한미군사동맹과 필리핀의 경우를 비교하는 보도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미국은 툭하면 한반도 전면전쟁 가능성을 공언했는데 그런 전략이 한국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를 따지는 국내언론 보도가 드물었다. 가까운 일본도 미국과의 방위협정이 한미의 그것처럼 불평등하지 않다는 점도 언론 소비자에게 소개해야 마땅할 것이다.
일부 정치권과 학계, 통일운동 진영에서는 비핵화와 남북관계가 한참 더 진전되기 까지 한미동맹, 국보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고, 국보법이 허용하는 공간 안에서 비핵화와 대북 정책을 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특히 국보법의 혜택으로 70 여 년간 정치적 특혜를 누렸던 수구세력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공영 및 진보 언론도 정권과 보조를 맞추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정말 실망스럽다. 언론은 제 4부라는 헌법적 위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촛불혁명이 촉발된 이유의 하나가 ‘기레기’ 언론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한반도 당사자가 문제의 핵심에 대해 침묵하는 지금의 상황은 구한말보다 더 심각하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미국이 슈퍼갑인 한미동맹과, 북한을 궤멸시켜야 할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보법은 지난 70여 년 간의 남북의 극한 대치를 유지시킨 두 개의 축이라 하겠다. 국보법 속에서 남북 교류협력이 얼마나 활성화 될 것이며 평화협정 합의이후에도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보장하는 상황에서 남북 평화통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도하는 언론은 없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남북 평화공존을 위해서는 한미동맹 관계의 정상화와 국보법의 개폐가 왜 중요한지 언론은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국보법에 의한 자기검열이 체질이 된 언론은 한미동맹의 문제점에 대해 철저히 침묵한다. 이를 국제 사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우리 사회는 촛불 혁명으로 들어선 정권이 지난 2년 동안 지속한 헛발질과 내로남불 태도 등이 원인이 되어 수구세력의 지지도가 여당에 육박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공영 및 진보언론이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촛불들의 분노가 또 폭발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고승우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 미디어오늘 19.3.30
문재인 정부의 도덕적 해이, 심각하다
취임 후 최저 지지율 43%는 레임덕의 길목
한국갤럽이 지난 26~28일 전국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29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지난주보다 2%포인트 떨어진 43%로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에 부정평가는 2%포인트 오른 46%였다. 갤럽은 '3·8 부실 개각'이 지지율 하락의 주요 원인이라고 해석했다. 이 여론조사에는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29일 오전 청와대 대변인을 사퇴한 '김의겸 사건'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부산·울산·경남의 지지율이 31%로 전국 최저이고, 대구·경북이 32%, 대전·충청·세종이 38%라는 조사결과이다. 호남(76%)을 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문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이 갈수록 커지고 있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017년 5월 10일 취임한 문 대통령은 고공비행하는 지지율(갤럽 84%, 리얼미터 79%)을 바탕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2018년 9월 첫째 주 갤럽 기준으로는 지지율 50% 선이 무너졌다. '개선되지 않는 경제지표, 최저임금 인상 논란'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같은 해 9월 셋째 주에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힘입어 60%대를 회복했지만, 11월 다섯째 주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부정평가(50%)가 긍정평가(46.5%)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와 집권당은 '촛불혁명에 힘입어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통령 지지율이 43%로 최저치를 기록하고, 더불어민주당도 35%(갤럽 29일 발표)까지 떨어진 지금도 문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는 그런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 2016년 10월 말에 시작되어 거국적 시민운동으로 발전한 촛불혁명은 단 한 건의 폭력도, 구속된 사람도 없이 박근혜의 '국정농단 체제'를 뒤엎은,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평화혁명이었다. 그 결과로 박근혜와 최순실은 물론이고 이명박까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촛불혁명의 직접 수혜집단인 문재인 정부는 그 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성실하게 구현하고 실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에는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 듯 했지만,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면 사법부와 검찰 개혁, 경제 민주화, 노동조건 개선, 교육과 문화예술 혁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정부의 독선적 인사를 비판하며 '인사 5대 원칙'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위장 전입, 논문 표절, 세금 탈루,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공직후보자는 청와대 내 인사시스템과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엄격한 검증을 거칠 것”이라며 “역대 가장 깐깐한 인사 검증을 했던 민정수석이 저 문재인”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드러난 인사 결과는 그 약속과는 달랐다. 2017년 7월 17일자 중앙일보는 “지금까지 지명된 인사청문회 대상인 국무총리와 장관(후보자) 및 위원장 22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 15명(68.2%)이 5대 원칙의 하나 이상에서 논란이 됐다”고 보도했다. 이낙연 국무총리,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각각 4개 분야에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사과'를 하고 '유감'을 표명한 뒤 임명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지율 최저치를 기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도덕적 해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특히 최근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인물들의 반사회적 행태는 문재인 정부의 도덕적 해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25일 가장 먼저 국회 청문회에 나간 최정호 국토교통부장관 후보자는 1996년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아파트를 사서 지난달까지 살다가 같은 달 18일 장녀 부부에게 증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딸에게 준 집에서 살면서 월세 160만 원의 임대차 계약을 했다. 그가 세종시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는 값이 두 배 가까이 뛰었고, 배우자 명의로 서울 잠실의 한 아파트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주관하는 부서 장관으로 '부동산 과다 보유자'가 임명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그 정책과 집행과정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는 청와대가 세운 인사검증 7대 원칙 가운데 성범죄와 음주운전을 제외하고 위장전입, 병역특례 등 5가지 분야에서 의혹을 받고 있다. 문성혁 해양수산부장관 후보자의 아들은 대학 시절 학점이 낮고 자기소개서가 부실한데다 인증기간이 지난 토익점수를 제출하고도 '꿈의 직장'이라고 알려진 한국선급에 채용됐다고 한다. 세계해사대(WMU)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인 문 후보자가 2015~2016년에 네 번이나 그 회사를 방문했는데 그 일정이 아들의 한국선급 채용 시점과 일치한다고 한다.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또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민정수석실을 통해 실상을 신속히 조사한 뒤 '진실'로 밝혀지면 당연히 임명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면 문재인 정부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주권자들의 비판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지지율이 계속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지지율이 30% 아래로 추락한다면, 때 이른 레임덕의 길목이 될 가능성도 있다. 촛불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시민들은 물론이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를 옹호하던 정치세력의 재집권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도덕적 해이를 떨쳐버리고 진정한 개혁과 쇄신을 과감히 추진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프레시안 3.30
'한미동맹'은 그렇게나 신성한 것인가?
한국 언론이 시대를 망친다
한반도 비핵화와 경제 문제, 성폭력과 관련한 추문 등이 뒤범벅돼 신문과 TV 뉴스, 인터넷 매체 등에서 쏟아진다. 기분이 좋은 뉴스는 별로 없다. 촛불 혁명 뒤로 뭔가 달라지리라는 기대가 컸던 탓일까, 뉴스 접하기가 싫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언론만을 탓할 일이 아니지만 그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 때 '기레기'로 지탄받았던 언론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의 언론은 촛불 혁명 이전과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가장 중요한 이슈인 비핵화와 관련해서 공영, 진보 언론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거나, 미국 백악관 대변인 말을 옮기는 수준에 여전히 머무른다. 북한에 대해서는, 미국의 시각에서 벗어나는 기사가 거의 없다. 미국과 북한을 대등한 유엔 회원국 수준으로 놓고 비핵화에 접근하는 언론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핵화와 관련한 수구집단의 광기를 보면 전율을 느끼게 되지만, 그런 광기의 부당함을 지적할 명쾌한 기준 등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동북아의 지각 변동을 유발할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다. 분단이후 최대의 호기를 살리기 위해 언론이 제대로 보도 책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없다. 북한 비핵화에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국가나, 미국과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를 잘 살피면 시의적절한 기사를 발굴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아무리 두렵다 해도 독자와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날 러시아 외무장관은 <타스> 통신을 통해 ‘카다피, 후세인의 참극 때문에 북미 간 일괄합의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국내 언론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향후 북한의 대미 협상 전략은 러시아 쪽 견해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다.
한미군사동맹 필리핀과 미국의 경우와 비교해야
언론이 국내에서 신성시 하는 한미 군사동맹을 객관화할 필요도 있다. 필리핀의 경우를 참조 할만하다. 한국과 달리 필리핀은 미국과 평등한 군사관계를 맺고 있다. 그럼에도 필리핀은 남지나해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필리핀이 이에 자동적으로 개입하게 될 소지가 크다며 최근 미국에 군사협정을 개정하자고 정식으로 요구했다. 우리 언론은 불평등한 한미군사동맹과 필리핀의 경우를 비교하는 보도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미국은 툭하면 한반도 전면전쟁 가능성을 공언했는데 그런 전략이 한국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합당한지를 따지는 국내언론 보도는 드물었다. 가까운 일본과 미국의 방위협정도 한미의 그것처럼 불평등하지 않다는 점도 언론 소비자에게 소개해야 마땅할 것이다.
일부 정치권과 학계, 통일운동 진영은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가 한참 더 진전되기까지 한미동맹, 국보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상책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 문재인 정권이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고, 국보법이 허용하는 공간 안에서 비핵화와 대북 정책을 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특히 국보법의 혜택으로 70여 년간 정치적 특혜를 누렸던 수구세력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공영 및 진보 언론도 정권과 보조를 맞추는 것은 정말 실망스럽다. 언론은 ‘제4부’라는 헌법적 위상을 외면해서 안 된다. 동시에 촛불 혁명을 촉발한 원인의 하나가 '기레기 언론'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한반도 당사자가 문제의 핵심에 침묵하는 지금의 상황은 구한말보다 더 심각하다는 비판을 자초한다.
미국이 슈퍼갑인 한미동맹과, 북한을 궤멸시켜야 할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보법은 지난 70여 년 간의 남북의 극한 대치를 유지시킨 두 개의 축이다. 국보법하에서 남북 교류협력이 얼마나 활성화될 것이며 평화협정 합의 이후에도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보장하는 상황에서 남북 평화통일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보도하는 언론은 없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남북 평화 공존을 위해서는 한미동맹 관계의 정상화와 국보법의 개폐가 왜 중요한지 언론은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
국보법에 의한 자기검열이 체질이 된 언론은 한미동맹의 문제점에 철저히 침묵한다. 이를 국제 사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촛불 혁명으로 들어선 정권이 지난 2년 동안 지속한 헛발질과 내로남불 태도 등이 원인이 되어 수구세력의 지지도가 여당에 육박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공영 및 진보언론이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촛불들의 분노가 또 폭발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프레시안 3.29
‘천안함’은 진행형···‘2%의 진실 찾기’ 계속돼야 한다
천안함은 진행형이다. 상당수 진실이 밝혀졌다고는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지진판 감지기록 시간인 2010년 3월26일 오후 9시21분58초에 멈춰 있다.
이명박 정부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을 북한 연어급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인한 ‘폭침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관련 책자도 쏟아졌다. 천안함 침몰 사건 조사 관계자나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한 기자들이 저자였다. 그러나 애매모호했던 부분들에 대한 의문점들을 이 책들에서 해소하기란 어렵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에 ‘천안함의 진실’은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정치적 공방 대상이 돼버린 대통령의 추모식 참석 여부가 더 큰 취재거리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났는데도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 국민들은 여전히 많다. 왜 합동조사단 발표를 믿지 않는 국민들이 상당수인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안함 침몰은 북한 소행’이라는 발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생긴 의문점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북한 소행이라는 100% 근거를 찾아내 완벽한 조사를 했다고 발표한 탓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진실은 팩트가 모여 만들어지지만 팩트가 취사선택될 경우 진실은 가려질 수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합조단이 수집하고 분석한 증거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도 이를 조합해서 발표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점을 파생시켰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런 면에서 이제라도 합조단이 발표한 내용의 근거를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러 정황과 증거들을 볼 때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는 것은 98%의 확률로 보인다. 이는 100%에서 2%가 모자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합조단 발표가 100% 과학적 결론이라고 보기엔 미흡하다며 국내외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 근거가 미약한 주장도 있지만 합리적 의심에 기초한 학자로서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부분들도 상당수다. 이들은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침몰됐다는 것을 부인한 게 아니라, 합조단 발표의 과학적 허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걸어 이 학자들을 비난했다.
문제는 과학적인 허점이 드러나는 2%가 98% 확률을 깨뜨릴 수 있는 파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합조단은 2010년 5월20일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는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확실’ ‘단언’ 등 단어가 들어간 확신에 찬 발표였다.
합조단은 증거가 ‘차고 넘친다’ 하더라도 겸허했어야 했다. 당시 합조단 발표가 확신의 ‘100% 확률’을 채우기에 ‘2%’ 부족했던 사실은 나중에 드러났다. 그런 만큼 ‘최종 조사결과’도 ‘중간 조사결과’ 발표였어야 했다. “98%의 확신이 있지만, 나머지 모자라는 2%의 확률을 채우기 위한 과학적 검증 작업은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어야 했다.
게다가 조사결과 발표 전에 군 당국이 보여준 모습은 국민들의 의구심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사건 초기에는 “천안함 침몰 영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가 언론 보도로 관련 영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뒤늦게 공개했다. 속초함이 76㎜ 함포로 사격한 대상인 괴물체가 ‘새떼냐 잠수정이냐’를 두고 논란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격파사격 영상 일부가 삭제된 사실조차 비밀에 부쳤다. 은폐 사실은 9년이 지난 최근 드러났다. 당연히 이 사실은 백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설사 기기 오작동으로 녹화영상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1분가량이 삭제됐다 하더라도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실제로 기계가 고장난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똑같은 오작동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장비 결함 여부를 살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또 포렌식을 통해 지워진 영상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군 당국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군 당국이 천안함 침몰과 관련한 증거를 찾기 위해 ‘군의관이 백령도 인근에서 발견된 돌고래 사체까지 부검’한 해프닝까지 언론에 공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천안함 침몰과 관련한 증거를 놓고 ‘입맛’에 맞게 가공했다는 의혹은 사지 말아야 한다. 검증한 결과 부식 정도로 봤을 때 1번 어뢰가 1개월 보름 정도 바닷속에 있었다고 발표했던 게 대표적 사례다. 국방과학연구소(ADD)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그 어떤 전문가도 그런 결론을 내리고 합조단에 통보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합조단의 발표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와 어느 전문가 회의를 통해 나온 것인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굳이 논문과 비교하자면 각주가 제대로 달린 것인지를 검증해 보자는 것이다.
군 당국은 미국과 호주, 영국, 스웨덴 전문가가 합조단에 합류해 국제 공조체제하에 합동조사를 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결과를 도출했다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합조단에 참여한 국내 인사들은 이들 국가 전문가의 경우 전시가 아닐 때 발생한 어뢰 폭발이 매우 희귀한 사례여서 관련 자료를 연구하기 위해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나 합조단의 종합조사결과는 향후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데 중요한 자료라는 점이다. 깔끔한 북한의 사과는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여는’ 미래지향적인 남북관계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대신 북한의 사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북측이 꼬투리를 잡지 못할 정도로 깔끔한 근거자료가 마련돼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의 천안함 백서나 합조단의 조사결과가 조금이라도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검증해야 하는 이유다. 만약 천안함 관련 재판에서 조사결과 발표의 일부라도 부정하는 판결이 나오면 어쩔 것인가. 남은 2%를 최대한 찾아내는 것 역시 천안함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방식이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경향 19.3.29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베정권 우경화,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람'이라고 한 줄로만 기록돼 있다. 나는 여러 교재와 자료를 가지고 수업을 했는데 수업을 들은 후 안 의사가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고 이해하는 학생도 있었다."
지난 26일 서울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스즈키 히토시 전 요코하마 시립중학교 교사의 말이다. 스즈키 씨는 1994년부터 매년 한국으로 건너와 안 의사 추모식에 참석해 왔다. 안 의사에 대해 "미래를 내다보는 훌륭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도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100여년 전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평가는 교육현장에서 행동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재직했던 학교 등에서 수업을 통해 일본 내에서 '암살자'나 '테러리스트'로 인식되는 안 의사를 올바로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최근 아베 정권 아래서 일본은 우경화 일변도의 노선으로 가고 있다.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이제 매년 치러지는 행사로 정례화 돼가고 있고 일본 평화헌법 개정과 자위대의 군대 전환 추진도 노골화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강제성이 없었다는 반론을 강화하는 등 역사의 왜곡도 서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수용하기는커녕 각종 보복조치 위협을 하고 있고 초계기 사태를 쟁점화하면서 군사적인 긴장을 고조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교실 우경화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신청한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 등이 담겨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초등학교 5,6학년 사회교과서 6종 모두에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다.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어 일본은 항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일본 정부가 2017년 확정한 학습지도요령과 해설에 따라 의무화된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는 수순의 하나로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내용이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한 반성을 어느 정도라도 하고 있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교과서가 나왔다고 해서 독도의 법적인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미래세대가 독도에 대해 왜곡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렇게 심화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 대해 무력시위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교나 경제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그래서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초치해 항의하지만 그 항의가 위력을 발휘하리라고는 우리 정부도 기대하지 않는다.
한일 양국 국민의 감정 골만 더 깊어가는 형국이다. 문재인 정부로서도 답답한 노릇이다. 일본에 대해 과거와 미래를 분리 대응하겠다는 투트랙 전략으로 나가고 있지만 미래를 향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스즈끼 씨와 같은 일본인이 있다는 것은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던져준다. 일본 안에서도 과거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는 양심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에 안중근 의사 추모식에는 스즈끼 씨 외에도 20여명의 일본인이 참석해 안 의사를 추모했다. 이 가운데는 5년 동안 일본인 500여명에게서 성금을 모아 일본에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를 건립한 사람도 있다.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의 전후 보상과 관련한 일본 내 소송에서도 양심세력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인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40여건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일본인 변호사가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확정판결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커녕 우경화 일변도로 나아가는 아베정권을 보면 과거사 해결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이들 양심세력이 바로 희망이다. 이들 양심세력이 더 많이 늘어나고 그들의 양심에 입각한 행동과 그 울림으로 한일 두 나라 국민의 신뢰 회복과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 CBS노컷뉴스 구성수 논설위원 19.3.28
일자리 양극화, 미래도 암울하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에서는 노동을 숙련과 비숙련 혹은 고숙련과 저숙련 노동으로 간단히 분류해왔다. 기술변화는 노동에 대한 수요에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단순노동이 아니라 교육을 잘 받은 숙련노동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더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에 숙련 편향적 기술진보라는 근사한 학술용어를 붙였다.
그런데 최근에 주목하는 것은 이른바 업무(task) 접근법이다. 이 접근 방법은 개별 직업마다 필요한 숙련도와 교육 수준이 다르며, 다양한 직업을 숙련의 정도에 따라 연속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 개념을 실제 자료에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몇몇 실증 분석은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영국 런던정경대의 호스와 매닝은 유럽에 대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오터는 미국에 대해 비슷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들은 1980년대 또는 1990년대 이후의 변화에 주목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최고의 숙련도를 요하는 직업, 예를 들어 전문직과 관리직의 고용은 증가했다. 그러나 청소, 돌봄, 건설현장 노동 등 숙련도가 가장 낮은 직업군의 고용도 동시에 증가했다. 최고숙련과 최저숙련의 직업군은 고용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꽤 올라갔다.
반면 중간 정도의 숙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직업, 예를 들어 단순히 기계를 조작한다거나 사무직 또는 유통 업무에 종사하는 직업군은 고용이 줄었고 임금이 줄거나 정체했다. 즉, 고숙련과 저숙련 노동에 비해 중간숙련 노동은 고용과 임금 면에서 모두 열등한 위치로 내려앉았다. 이러한 현상은 지난 20~30년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일자리 양극화다.
그런데 기술이 연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면 1980년 이전에도 내내 같은 현상이 일어났어야 하지 않을까? 호스와 매닝 등 런던정경대의 전통을 잇는 학자들은 1980년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서 설명한다.
이른바 산업혁명의 역사는 1820~1980년의 오랜 시기와 1980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980년 이후의 기술혁신은 정보통신기술이 주도한 것으로 그 이전과 구별된다. 예전에는 전기, 철도, 자동차, 관개시설, 그 밖의 다양한 기계 설비의 도입과 확산이 사람들의 생산성과 숙련도를 전반적으로 향상시켰다. 게다가 20세기 들어 공교육이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이 정규 교육을 받고 숙련도가 높아지면서 소득불평등도 축소되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기술혁신은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핵심은 자동화와 그 연장선에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다. 엄청난 속도의 계산능력과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거의 모든 업무를 사람 대신 수행한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실수와 오차 없이. 생산의 방식은 돌이킬 수 없이 이런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로봇이 사람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청소와 돌봄, 미용 서비스 등은 사람의 손과 서비스 정신으로 세세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작업들이다. 무언가 제품을 만들거나 조작하는 일은 쉽게 자동화되지만 아무리 해도 자동화되지 않는 일은 여전히 많다. 허드렛일에 가깝지만 사람끼리 대면해서 충성심을 발휘해야 하는 일들, 이런 분야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편리하게 자동화된 서비스도 원하지만 충성 어린 대면 서비스도 원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수준의 교육과 숙련도를 요하는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 대신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일을 하거나 관리를 하는 업무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증가한다. 이들은 스마트한 기계와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하거나, 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증식하는 핵심적인 노동이므로 자본과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대부분의 노동은 자본으로 대체되지만,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노동도 있기 때문에 일자리는 고임금직과 저임금직에 집중되고 중간임금 지대는 점점 얇아진다.
인공지능화 추세는 일자리 양극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시장에서 충분하게 창출되지 않고 있다. 막연한 기대는 실망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최근의 일자리 통계와 분배 통계는 우리 경제도 이러한 추세에 본격적으로 합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혁신성장과 복지확대로 대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일자리 양극화 해소는 난제 중의 난제다.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한겨레 19.3.28
황교안과 ‘돈키호테 우파들’
“한반도는 결전장이다. 북한 백두혈통 사교 집단과 남한 운동권이 합쳐 그쪽으로 끌어가느냐, 북한 주민의 ‘여망’과 남한 자유민주 진영이 이쪽으로 끌고 오느냐 하는 사생결단….”
“문재인 정권 핵심은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다. 그들에게 타협이나 협상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 협치란, 가시꽃의 향연일 뿐이다. 소득주도성장, 비정규직 제로, 공공일자리 확대…, 문 정권의 모든 정책은 이 카르텔을 지키기 위한 포퓰리즘이다. 썩은 뿌리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
두 글의 공통된 키워드는 ‘운동권’이고 ‘사생결단’ ‘뿌리를 뽑는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앞은 오랜 세월 ‘좌익 척결’에 앞장서온 전직 언론인의 글이고, 뒤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페이스북 글(2019년 3월19일)이다.
앞의 글은 사실 고색창연하다. 이른바 ‘좌파 파시즘’이라는 현 정권이 북한과 한통속이니 결딴내야 한다는 것인데, 요즘은 웬만한 보수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놀라운 건 황교안의 인식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문 정권=80년대 운동권=썩은 뿌리’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운동권 좌파’, 다시 말해 현 정권은 뿌리 뽑아야 할, 타도 대상이다. 협치는 ‘턱도 없는’ 소리다.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사람 좋아 보이는 황교안이 어쩌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도그마에 빠진 걸까. <황교안의 답―황교안, 청년을 만나다>에서 그는 인생의 첫 전환점은 교회, 두번째는 아내, 세번째는 공안부라고 썼다. 기독교와 공안이 그의 인생을 이렇게 버무린 것이다.
공안검사로 28년을 지냈으니 기록할 만한 족적은 거의 공안이다. 상사와의 갈등으로 겪은 사표 파동, 고검 검사로의 좌천, 두번에 걸친 검사장 승진 탈락 등이 시련 목록이다. ‘삶에 파란을 일으킨’ 특기할 만한 일은 강정구 교수 국가보안법 사건,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정도다.
6·25 때 월남한 실향민의 아들, 고물상을 했던 아버지, 시장에 나가 노점상을 한 어머니,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하면 선생님이 라면을 끓여주던 일 등 애잔한 에피소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도자로서의 스토리는 별로 없다. 이런 탓에 그가 정치에 뛰어들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들 봤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황교안은 요즘 제1야당 대표로 순항하면서 대선주자 경쟁에서 성큼성큼 선두를 달린다. 한 여당 중진 의원은 “황교안이 대통령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고 했다. 오랜 세월 강북의 작은 교회를 다니며 쌓은 기독교 근본주의, 우리 현실에서 고도의 정치행위와 다를 바 없는 공안 경험이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현 정권의 무능과 쇠락이라는 ‘손님 실수’는 더 큰 원군이 될지도 모른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는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그 악을 때려잡는 공안이 황교안을 ‘20세기 혁명 시대’에 사는 꼴통 보수, 공안 보수로 남겨놓았는데, 이 둘이 오히려 그의 강점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황교안 얘기대로 문재인 정부가 80년대 운동권 출신의 카르텔이라면, 1987년 6월항쟁, 1997년 첫 정권교체, 2002년 노무현 집권, 2016년 촛불은 도대체 무엇인가? 황교안식이라면 이 모든 게 80년대 운동권 카르텔의 ‘밥그릇 지키기’다. 국민은 그저 광장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민주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국민이다. 극렬 운동권은 한 시대의 화석일 뿐이다. 설령 남아 있다 해도 극히 미미하다.
대한민국은 좌파의 나라도, 우파의 나라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박정희의 나라인 동시에 김대중·노무현의 나라이기도 하다. 우파가 산업화, 민주화를 다 했다고 하면 억지다. 좌파는 훼방만 놓으니 축출 대상이라는 건 너무 나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얘기가 공안 우파, ‘빨갱이 토벌’ 우파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라는 점이다. 돈키호테처럼 허상의 좌파, 화석으로 남은 좌파, 상상 속의 좌파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우파’들이 아직도 활개 치고 있다. 이것이 황교안의 모습이고, 대한민국 정치의 비극이다.
백기철 논설위원 한겨레 19.3.28
제발 어른답게 행동하자
2019년 3월15일, 수많은 10대 청소년들이 세계의 주요 도시들의 거리로 뛰쳐나와 세상의 어른들을 향해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미래를 뺏지 마세요. 제발 어른답게 행동해주세요!”
그들이 이렇게 당돌한 말을 하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지구사회에 닥치고 있는 가장 두렵고 긴박한 사태, 즉 기후변화에 대한 어른들(특히 정치가들)의 너무나 무책임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런 단체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음에도 그들 사이에는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 공동의 행동을 위해 거창한 국제회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세계의 청소년들은 어른들 몰래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깊이 근심하면서, 더 이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지난 금요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 300여명의 청소년이 집결하여, 1인당 화석연료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급인 한국이 “기후 악당 국가로부터 탈출”할 것을 촉구했다.
청소년들이 평일에 학교 수업을 ‘빼먹고’ 시위에 나서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청소년들의 행동은 완전히 정당하다. 대규모의 화석연료 소비 때문에 기후변화가 초래되었고, 그 진행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파괴적이라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증언해왔음에도, 오늘날 세계의 주류 사회는 이 엄청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끊임없이 미루거나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설혹 미국 공화당이나 트럼프 대통령처럼 기후변화를 누군가의 ‘음모’라고 치부하며 대응 자체가 필요 없다고 뻔뻔하게 말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정치·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는 여전히 경제력과 군사력의 증강이 중요하지, 기후변화는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물론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회의가 뻔질나게 열리고는 있으나, 끊임없이 회의만 거듭될 뿐, 회의의 결론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대부분의 정치가, 기업인, 관료, 경제전문가, 학자, 언론인들이 화석연료 사용을 대폭 줄이면 경제가 죽는다는 ―경제성장 시대를 통해서 굳어진― 낡은 사고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고습관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의 일상적인 의식과 거동에서도 드러나 있다. 이는 세계 공통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서 기후변화나 환경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론하는 지식인은, 공론장이나 사석을 막론하고, 아직도 희귀종이다. 이른바 ‘진보파’일지라도 대부분의 관심사는 남북문제, 경제성장, 일자리, 노동인권, 복지 등등에 국한되어 있다. 혹간 그들의 대화 중에 환경문제를 누군가가 꺼낸다면 금세 분위기가 싸늘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세계의 청소년들은 그들에게는 절체절명의 문제인데도 어른들이 극히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크게 화가 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어른들한테 “지금 집에 불이 났는데 대체 뭐 하느냐”고 묻기 위해 등교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이 점을 가장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은 스웨덴의 16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이다. 최근 한국의 언론에서도 소개된 바와 같이, 툰베리는 이상고온이 북유럽까지 덮친 작년 여름부터 학교는 그만두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계속하며 스웨덴을 비롯하여 선진산업국 정부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할 것을 간곡히 요구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두어 차례 큰 국제회의에서 행한 명연설 때문에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되었지만,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어른들의 위선과 거짓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그 명석한 논리와 단호한 자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툰베리는 나중에 환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어른들이 무시하는 ‘과학’을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냐”고 항변하고, 장래에 기후과학자가 되는 게 어떠냐는 주위의 권고에 대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후과학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행동”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툰베리의 이런 말을 들으면서,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늘 현실의 복잡성과 정치의 어려움을 빌미 삼아 끝없이 사태 해결을 미루고 있는 ‘어른들’이 미래세대에 대해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죄를 짓고 있는지 새삼 통렬히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덟 살에 이미 환경위기를 인지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심지어는 일종의 자폐증까지 갖게 되었다는 툰베리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개인적인 얘기지만, 왜 사람들이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느냐고, 왜 환경을 걱정한다는 사람들마저 빈번히 항공여행을 하고 육류와 낙농제품을 계속 먹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툰베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한때 심취했던 철학자 루돌프 바로가 생각났다. 바로는 우리가 땅과 숲과 생명을 살리려면 자동차와 짐승고기를 포기해야 하고, 산업체제 바깥에서 생계를 강구해야 하고, 무엇보다 무기를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탄’이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과격한’ 주장은 현대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리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내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전환 없이 이대로 상황이 계속된다면 곧 인류사회가 대파국에 직면할 것임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활방식의 변화 이전에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국가적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의 방향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아무리 검소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대량의 에너지와 물자의 낭비를 강요하는 무역-경제 시스템, 국가적 인프라, 초고층 건물 위주의 도시 구조 등이 혁파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헛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정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공공의 정신이 극도로 마비·위축돼 있는 오늘의 정치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이나 절망을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행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희망도 생겨난다, 라고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 툰베리는 말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경향 19.3.28
국토부 장관님처럼 투기하면 되나요?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의 다주택 보유 과정을 들여다보면 ‘부동산 투기’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경기도 분당구 정자동 상록마을라이프2단지 아파트(전용면적 85㎡)에 살던 최 후보자는 국토부 장관 비서관 시절인 2003년 부인 명의로 당시 재건축 움직임이 있던 서울 잠실 주공1단지 아파트(35㎡)를 2억5500만원에 샀다. 이 아파트는 예상대로 2년 뒤 재건축 승인이 났고 최 후보자 부인은 2009년 잠실 엘스로 재건축된 아파트(60㎡)를 취득했다. 이 아파트의 현재 시세는 13억원대다. 지난해 ‘9·13 대책’이 나오기 직전엔 15억원대까지 치솟았다. 전형적인 재건축 아파트 투기다. 최 후보자는 25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실거주 목적으로 구입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최 후보자는 지난 16년 동안 이 아파트에 하루도 산 적이 없고 계속 전세를 놓았다.
잠실과 분당에 아파트를 2채 가지고 있던 최 후보자는 2016년 국토부 2차관 시절 세종시 반곡동 캐슬앤파밀리에디아트 펜트하우스(156㎡)를 공무원 특별공급으로 분양받았다. 사실상 3주택자가 됐다. 공무원 특별공급은 세종시에서 계속 일할 공무원들에게 안정적인 근무 여건을 만들어준다는 게 취지였는데, 머지않아 퇴직할 최 후보자가 분양받은 것이다. 그는 “퇴직 이후 거주할 목적으로 분양받았다”고 해명했다. 퇴직 뒤에 부부가 세종시에서 살려고 대형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분양가가 6억8천만원인 이 아파트의 현재 시세는 12억원대로 프리미엄이 5억원 이상 붙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기 직전인 지난 2월 딸과 사위에게 증여한 분당 아파트까지 합치면 최 후보자는 20년 동안 다주택 보유를 통해 2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올렸다. 최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다주택자가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아 오래전부터 여러번 팔려는 생각을 가졌으나 처분 기회를 놓쳤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두해도 아니고 16년 동안 팔려고 했는데 못 팔았다는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집값 상승을 통한 시세차익을 노리고 계속 보유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한 의원은 “최근 부동산업계에 ‘국토부 장관처럼 투기하면 되나요?’라는 말이 있다”고 꼬집었다. 허투루 들을 일이 아니다. 만약 투기세력이 ‘부동산 정책을 총괄하는 국토부 장관도 투기를 했는데 왜 우리만 문제 삼느냐’고 항변한다면 정부는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다주택자들의 투기 수요를 집값 불안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동안 ‘주택시장 안정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닌 집들은 좀 파시라”며 다주택자 규제를 강화했다. 정부 정책은 무엇보다 국민 신뢰가 중요한데, 앞으로 어떤 논리로 국민을 설득할지 걱정이 앞선다.
전국 가구 중 무주택 가구 비율이 2017년 기준으로 44%에 이른다. 서울은 51%로 절반을 넘는다. 최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9·13 대책 등의 영향으로 시장이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언제든지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라며 “어느 국민도 집 걱정이나 이사 걱정을 하지 않도록 실수요자 중심의 안정적 시장 관리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무주택 서민들은 최 후보자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을지 모르겠다.
인사청문회에서 최 후보자의 투기 의혹을 따져 물은 국토위 소속 의원들도 최 후보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국회의원 재산 신고 자료를 보면, 국토위 전체 의원 30명 가운데 13명(43%)이 다주택 보유자다. 일반 국민의 다주택 가구 비율인 15%보다 훨씬 높다. 민주당은 13명 중 5명(38%), 자유한국당은 12명 중 7명(58%)이 다주택자이고, 나머지 한명은 바른미래당 소속이다. 특히 자유한국당의 민경욱, 박덕흠, 송언석, 이헌승 의원은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된 강남과 과천에 아파트를 2채씩 보유하고 있다. 다주택 국토위 의원들이 다주택 국토부 장관 후보자를 질타하고 후보자는 다시 궁색한 변명을 되풀이한 것이다. 집값 안정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 안재승 논설위원 한겨레 19.3.26
한국당의 역사 반동정치가 노리는 것
역사 왜곡과 수구의 부활
'촛불'에 의해 사라진 줄 알았던 '냉전의 후예'들의 부활 조짐이 뚜렷하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탄핵 부정과 5·18 망언에 대한 사과 없이 문재인 정권을 좌파 '포로정권'의 덫을 씌워 공격하면서 당의 존재감을 알리는 '괴물정치'의 포로가 되고 있다. 한국당 지도부가 쏟아내고 있는 발언들은 집권세력과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영역을 넘는 저주에 가까운 수준이다.
한국당의 의도된 발언이 가져오는 정치실종과 민주당의 '과도한' 반응이 동일한 층위에서 비판받는 프레임은 정치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킨다. 한국당은 이에 편승하여 냉전을 부추기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의 역사적 당위마저 부정하는 듯한 희대의 발언으로 친일과 반공주의에 친화적인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반지성적 언술들은 오히려 '보수정당'에 대한 잠재적 지지자들을 현재(顯在)적 지지자로 바꿔놓고 있다. 한국당 지지율 상승이 그 증거다. 역설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한국당은 부진한 북미 비핵화 협상을 이용하여 냉전 의식을 상기시키고 또 다시 '퍼주기' 프레임으로 진보진영을 공격함으로써 숨죽이고 있던 보수들을 결집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차마 수구반동적인 한국당을 지지할 수 없었던 중도보수들은 '촛불'의 퇴장과 어두운 경제전망 등을 명분삼아 본래의 이념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반동 정치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제1야당의 행태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얼마나 지난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87년 민주화는 독재정권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의미했고 이 목표의 달성은 곧 민주주의의 달성으로 오인됐다. 1987년의 민주화를 민주주의를 향한 출발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최종 결론으로 이해한 결과다.
1980년의 5·18 민주화 운동을 지금도 폭동이라고 날조하고 5·18 유공자를 괴물집단으로 지칭하는 자들에 대한 국회 제명이 논의조차 되지 않는 현실은 3·1운동 100주년이 지난 현재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 과오의 당연한 결과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 협조로 민족을 팔았던 친일세력들이 해방 후 미 군정에서 부활하고 산업화 과정에서 쿠데타 세력의 반공주의에 편승하여 특혜와 편법을 누린 세력의 후신은 '태극기 부대'에 의해 명맥을 유지한다.
탄핵 2년이 지나고 총선 1년을 앞둔 시점 민심은 어디로 향할까. 촛불의 도덕적 우위와 정치적 명분의 동력이 사라지고 선거민주주의 틀에 갇힌 일상적 정치문법이 작동되면 선의와 역사의식으로만 선거를 치를 수 없다.
비상한 시기다.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반역사적 발언을 비판하면 이를 '친일 우파 프레임'이라며 역공하는 탄핵 부정 집단의 허위의식을 벗기기가 쉽지 않다. 그들에게 아무리 당위를 설파하고 역사의식과 민주주의를 설득해도 진실 왜곡이 정치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는 집단에게 도덕과 역사는 한낱 사치다. 일단 진영논리의 틀에 갇히면 어떠한 논리도, 지성도 통하지 않는 게 한국정치의 본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는 명분과 실리, 가치와 사실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규범보다 존재론적 현실이 승부를 가른다는 사실을 한국정치는 숱하게 경험했다. 또 다시 냉전사고와 반공주의로 한반도가 전운에 휩싸이고, 친일 논리가 고개를 드는 현실은 막아야 한다. 역사 교과서가 국정화의 길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정치세력이 들어서느냐는 그래서 중요하다. 상황은 집권세력에 유리하지 않다. 경제가 그렇고, 북미 관계도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가 많다. 그러나 이를 돌파해야 할 책무가 집권세력에 있다. 분위기 반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는 재빨리 수구로 회귀할지 모른다. 보수언론이 대기하고 있고 기회만 보던 기득권의 반발이 더욱 노골화할 수 있다.
다시 친일과 반공으로 무장한 수구세력이 권력을 가지고 사회를 과거로 되돌리는 시나리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남북 긴장 고조 등은 당연한 부산물일 것이다. 집권세력은 정치보다 역사를 생각해야 한다. 엄혹한 시점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3.22
1%를 위한 성장
대망의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열렸다. 3인 가족이면 1억원 넘게 벌었다는 얘기다. 선진국 진입의 징표라는 이 기준을, 인구 2000만명을 넘는 국가 중에서는 아홉 번째로 달성했다.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성장’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정부는 이 호재가 남의 나라 일인 양 조용하기만 하고, 오히려 국민은 정부의 경제무능을 하염없이 탓하여 지지율은 추락하고 있다. 이 기회를 틈탄 수구세력은 국가위기라 선동하며 극복을 위해 기업의 효율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 김용균씨, 고 황유미씨는 그들의 기억에 없다. 최저임금을 낮춰야만 하고 사람의 생명을 돈 몇 푼으로 바라보는 저열한 기업의 노동환경개선 속도를 늦춰야 한단다.
미세먼지와 폭염의 고통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감내해야만 한단다. 기업이 지금보다 돈을 더 잘 벌어야 국민이 잘산단다. 그래서 규제를 타파해야 한단다. 급기야 정부는 타당성도 없는 토건사업에 수십조원을 쏟아붓는단다. 기업만 배불린 ‘4대강사업’은 ‘고향의 강’ ‘생태하천’사업으로 둔갑하여 더 빠른 속도로 하천을 유린하고 모든 산에 케이블카를, 모든 지자체에 공항을 건설할 기세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진다. 개인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이고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설명하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경제는 더욱 그렇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한국은 자원이 없어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한다. 그럼 수출이 잘되면 국민이 잘살아야 하는 것이 기본 이치이다. 작년 한국의 수출은 역사상 최초로 6000억달러를 돌파했고 경상수지 흑자는 80개월 넘게 연속되고 있다. 2008년까지 많아야 200억달러 수준이었던 연간 흑자규모는 2009년을 시작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여 2013년부터는 매년 700억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에도 저축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무를 늘려 2013년 500조원이 채 안되던 빚이 작년에는 700조원을 돌파했다. 2013년부터 작년까지 무역 흑자는 5000억달러를 넘었고 빚은 200조원이 넘게 증가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고, 정부가 돈을 뿌렸는데도 정작 대다수 국민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피폐해지고 빚만 늘어갔다. 대기업의 재산은 주체할 수 없이 늘었는데 일자리는 줄고 실업자가 늘어난다. 파이가 커지는데 국민에 돌아오는 양은 더 작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업을, 자본을 위한 투자를 늘려야 하고 자본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안전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면, 오염물질을 덜 배출하게 하면 기업이 힘들고, 돈이 정체되고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위기가 온다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 좀 솔직해지면 안될까? 규제 완화 정책은 극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이다. 오죽하면 무노동의 건물주가 최고 선망의 직업이 되었겠는가?
낙수효과는 없다. 이제 경제성장이 우리를 잘살게 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기업의, 자본의 효율성 강화라는 명목으로 시행된 각종 규제 완화로 서민은 더욱 어려워졌음을 인식해야만 할 때이다. 지금 주장하는 효율성 강화는 쉬운 해고와 낮은 임금체계로 노동을 착취하거나 환경파괴행위를 용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강화된 효용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지만 정작 국민의 삶과 국토는 유린된다. 미국의 리먼사태 이후 경제부양에 쏟아부은 돈의 90%는 정작 위기를 초래한 1%의 부자에게 돌아갔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다. 경제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예비타당성조사도 없이 퍼붓는 토건비용은 부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언어모순에서 벗어나, 촛불정부의 초심으로 돌아간 ‘나눔주도성장’이 절실해 보인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경향 19. 3.21
한 시민 사상가에 대한 기억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유신체제가 종막을 향해 가던 시절이었다. 사회학과가 지금은 사회과학대학에 있지만 그때는 문과대학에 속해 있었다. 당시 널리 알려진 문과대학 교수는 세 사람이었다. 국문학과 박두진 교수, 사학과 김동길 교수, 철학과 김형석 교수였다. 세 교수 가운데 내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이는 김형석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인 <고독이라는 병>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의 저자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대개 그러하듯, 대학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배우기 전에는 제도와 구조보단 개인과 실존을 중시한다. 유신독재의 그늘이 짙었던 1970년대 중·후반, 그 그늘을 만들었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등장과 작동 방식에 대한 사회과학 지식이 부족했던 10대 후반인 내게 고독, 사랑, 영원과 같은 어휘들은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 위안을 안겨줬다. 그땐 몰랐지만 구조적 강압이 클수록 자아는 추상의 개념들로 쌓아올린 실존적 성채 안에 홀로 거주하려는 성향을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역사의 격류에 휩쓸렸다. 1학년 가을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2학년 봄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나는 사회과학 공부에 열중했고, 고독, 사랑, 영원이 아닌 민중, 투쟁, 해방에 익숙해졌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 시대를 막 지나 민주화 시대로 나가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당시 내 손에 잡힌 건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었다. 김형석이란 이름은 내 시야에서 그렇게 멀어졌다.
이랬던 김형석 교수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우리 사회 고령화 현상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그가 펴낸 <백년을 살아보니>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행복 예습> 등을 읽게 됐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 봤을 때 그는 환갑 직전이었는데, 어느새 10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10대 후반이었던 나 역시 환갑에 다가서는 나이가 된 셈이다.
개인적 기억이 길어졌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김형석의 ‘100세 철학’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김형석이 대중에게 고독과 영원의 사상가였다면, 이제 그는 지혜와 행복의 사상가로 다가서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나이 듦을 피할 순 없다. 언젠가 찾아오게 돼 있다. 늙는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김형석은 말을 잇는다. 젊었을 땐 용기가 필요하다면, 늙었을 땐 지혜가 요구된다. 지혜의 핵심은 자기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우리 인간은 늙어서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다음 세대에게 존경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 공부하고, 취미 생활을 하며,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는 들려준다.
김형석의 주장이 크게 새로울 건 없다. 그의 책들은 철학적 담론이라기보다 대중적 에세이다. 돌아보면 그는 처음부터 시민을 위한 사상가였지 전문가를 위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적 에세이라고 해서 사유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정보사회의 진전과 네트워크사회의 만개로 우리 인류는 본격적인 대중사회를 이제야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회문제라 하더라도 제도적 처방과 개인적 대응이 동시에 중요하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 제도는 노후복지를 강화하고 고용 및 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한다. 50%에 육박하는 노인빈곤율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노인자살률을 지켜보면, 노후 정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정치사회는 노후 대책과 노후복지의 제도적 처방에 대한 역사적 타협을 서둘러야 한다.
더불어, 늙어감에 대해 개인적 차원에서 준비해야 한다. 60세를 전후로 은퇴한 후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를 50세에 다가서면서부터 고민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나날로 이어지는 삶이라면, 100세 시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남은 5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과 방법을 포함한 ‘후반기 인생’의 여행 지도를 마련하는 실존적 과제는 개인적 대응의 몫인 셈이다.
김형석의 정치적 견해까지 동의하진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판단은 그의 사유의 일부일 따름이다. 경험만큼 더 강력한 설득의 언어는 없다. 공부와 취미와 봉사의 노후 생활은 절로 획득되는 게 아니다. 습관과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고 요구된다. 오십에 다가서는 이들에게 감히 권하는 바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19.3.20
나경원은 태극기부대 '수석대변인'인가
극우정치는 민족공동체의 파괴를 부를 뿐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 나경원이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시간 남짓에 걸쳐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했다. 그가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을 향해 퍼부은 독설은 극우정치가 어떻게 민족공동체를 증오와 분열의 수렁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먼저 연설문의 요지를 보여주는 대목들을 보기로 하자.
"국민 여러분, 지난 70여년의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좌파정권 3년 만에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의 역사가, 기적처럼 몰락하고 있습니다. 한미동맹은 붕괴되고 있고, 경제는 얼어붙고, 산업 경쟁력은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습니다. 힘겹게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이 나라가 무모하고 무책임한 좌파정권에 의해 쓰러지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옹호와 대변 이제는 부끄럽습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나경원이 강조하는 '지난 70여년의 위대한 대한민국 역사'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1948년 8월부터 1960년 4월까지 계속된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 민선정부를 뒤엎은 박정희가 18년 동안 이나 계속한 군사적 통치가 그 '위대한 역사'에 포함된다는 뜻인가? 박정희의 죽음 이후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과 노태우의 집권 12년도 그 평가 속에 들어 있는가? 사리사욕을 위해 국정을 농단한 이명박과 박근혜의 집권 9년은 또 어떤가?
문재인 정부가 경제 분야에서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우지 못한 채 젊은 세대의 일자리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하면 '촛불혁명'의 정신에 충실하게 적폐 청산과 개혁을 추진하지 않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구·극우세력을 대변하는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가 '무모하고 무책임한 좌파정권'이 이 나라를 쓰러뜨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옹호와 대변 (···)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문재인 정권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비해 적대적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출발점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갖은 뒤 발표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이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합의 내용은 남한과 북한이 전쟁 없는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확약의 표현이었다.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데 대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판문점 선언이 나온 이후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남과 북은 평화공존 체제를 굳혀 가고 있다. 현재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회담은 정체 상태이지만 남과 북의 신뢰 관계는 확고하다. 그런데도 나경원은 원내대표 연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정책은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위험한 도박일 뿐입니다. 이제 그 위험한 도박을 멈추십시오." 그러면서 나경원은 "자유한국당이 직접 굴절 없는 대북 메시지 전달을 위한 대북특사를 파견하겠다"는 '뜬금없는' 공약을 했다.
나경원은 문재인 정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결국 자신들만이 오직 선이요 정의며, 모든 반대세력을 악과 불의로 규정하는 이분법과 선민의식에 찌든 정권입니다. 사상독재, 이념독재, 역사독재입니다. 대한민국의 자유, 다시 세우겠습니다." 그러면서 '먹튀정권, 욜로정권, 막장정권'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비난도 퍼부었다. 마치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 거리와 서울시청 광장을 누비는 태극기부대의 '수석대변인'을 자처하는 듯한 언행이었다. 이런 정치인은 민족공동체의 화합이 아니라 파괴를 부르는 극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프레시안 3.14
장자연 사건 이후 잃어버린 10년
장자연씨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났다. 사건의 실체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 데에는 유력 일간지 사장 일가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강남 클럽과 연예계를 뒤흔든 사건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문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있는 게 아니라 성상납과 성접대 자체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장자연씨 이후 몇몇 여성 연예인들은 소위 스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미투’를 했지만 우리 사회는 엉뚱하게 제안을 한 쪽이 아니라 받은 쪽이 어떻게 했는지를 궁금해했다.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용했다고 알려진 여성 연예인은 법정에서 성매매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법정 바깥에서는 여론 재판을 받은 반면, 이 문제에 가담했던 연예기획사와 브로커들 대부분은 증거불충분 혹은 혐의없음의 판결문을 날개옷처럼 손에 쥐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확장했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된 ‘여성연예인 인권침해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여성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 여성 연기자들을 일종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사회 유력 인사들에게 제공했고, 사회 유력 인사들은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들과 유흥을 즐기며 광고 계약과 방송 출연 등을 빌미로 성접대를 받았다. 방송, 광고 등에 영향력을 미치는 유력 인사와의 자리는 비공식 오디션의 성격부터 성매매 알선이라는 범죄적 성격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고 장자연씨 사건의 목격자 증언을 했던 윤지오씨는 자신의 책 <13번째 증언>에 이 구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씨는 연예기획사 대표 ㄱ씨가 방송, 광고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일종의 비공식적인 오디션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장자연씨도 당시 비슷한 자리에서 만났고, 같은 방식으로 몇번의 모임에 참석한 후 둘 다 해당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계약 이후에 벌어졌다. 계약만 하고 나면 연예인으로서의 연습과 준비를 하는 스케줄이 잡힐 줄 알았지만 계약 이후에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자리에 불려 나갔다. 윤씨는 그 과정에서 운 좋게 기획사에 계약금 2배를 물어주는 정도의 수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장자연씨의 상황은 훨씬 좋지 않았다. 대중에게 얼굴이 막 알려졌는데 소속사에서는 배우를 에로 영화에 사전 협의도 없이 전라로 출연하게 했고 성상납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커리어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상태에서 장자연씨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연씨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는 스폰에 응했는지 아닌지, 술자리에서 접대를 했는지 아닌지, 그 결과 배역을 따내게 된 건지 등 여성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질문을 하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클럽 버닝썬 사태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클럽의 관계자들은 강간을 가장 스릴 넘치지만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상품으로 기획했고 성공적인 접대를 위해서 여성의 몸을 상차림에 올렸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대화방에서 스스로 자백했듯이 클럽에서의 강간과 성접대 모두 여자 탓으로 돌리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매력 자본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유명 남성 연예인조차 여성에게 의사를 묻고 동의를 구할 노력을 굳이 하지 않고 약물강간과 불법적 성거래, 그리고 성관계 영상 유포 등의 범죄에 직간접으로 가담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더 악화된 것이다. 이번에는 ‘누가’의 문제를 넘어, 성상납 혹은 성접대라고 일컬어져왔던 폭력적인 성문화이자 현행법상 불법인 ‘성거래’ 전반을 문제 삼자. 그래야 바뀐다.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한겨레 19.3.12
두 개의 캐슬
얼마 전 서울대 의대에 자식을 진학시키기 위한 부모의 사교육 이야기를 다룬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드라마 제목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은 또 하나의 캐슬이었다. 최상위 0.1%의 까마득히 높은 성을 둘러싸고 있는 상위 10%의 성 말이다.
한국 사회는 국제적으로 볼 때 상위 10%가 전체 소득과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상위 1%의 소득집중도는 2016년 현재 약 12%로 주요 선진국 중 5위지만, 상위 10%의 집중도는 약 43%로 미국 다음으로 2위이다.
그렇다면 상위 10%는 누구일까? 노동자의 연봉만 따져보면 2017년 기준으로 연간 6746만원 이상을 벌어야 개인 기준 상위 10%에 들어간다. 아르바이트 등 모든 노동자를 포함한 수치임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낮다. 가구소득 기준으로는 2018년 상위 10%의 경계값이 약 1억원이다.
이 상위 10%의 성 안 사람들은 사업가와 전문직 부자들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과 공기업 노동자 그리고 일부 공무원들이다. 성 밖에 90%인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소상공인들이 살고 있다. 더욱 먼 곳에는 노동시장 바깥의 빈곤층과 노인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성 안팎의 격차가 더욱 커지고 성벽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에서 2016년까지는 금융소득과 같은 비근로소득의 집중도 증가로 상위계층의 소득집중도가 약간 높아졌다. 또한 지난해 4분기 가구소득 상위 10%의 소득은 전년 동기 대비 약 13% 증가하여 소득분배를 악화시켰다.
이 성의 높고 공고한 벽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 등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오랫동안 쌓인 것이다. 그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공정경제의 확립과 성 밖 노동자들의 조직화 등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 함께 대기업 노조와 공공부문, 그리고 각종 규제와 면허에 기초한 기득권들도 성벽의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쟁의 촉진과 임금체계를 포함한 공공부문의 개혁도 필요한 이유다.
노조가 기득권을 내려놓으려는 노력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사무금융노조는 사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나설 경우 올해 임금을 동결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렇게 노조가 사회적 책임을 지는 모습은 보기 드물다. 지금은 상위 10%라 해도 회사를 나가면 똑같이 성 밖의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세금을 올리고 그것을 사회복지와 안전망을 대폭 확대하는 데 쓰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공공사회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터키보다 낮은 약 1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20%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의 2016년 근로소득 상위 10% 경계값의 총급여 기준 근로소득세 실효세율은 약 6%이고 상위 20% 경계값의 경우 약 3%에 불과하여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다. 최상위 0.1%에 집중되어 있고 최근 소득집중도 상승의 배경인 자본소득이나 자산에 대한 증세와 함께,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근로소득에 대한 광범위한 증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증세가 이리도 힘든 것은 역시 여론과 정치를 주도하는 것이 성 안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스스로를 성 밖의 중산층이라 생각한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높은 성벽으로 갈라지고, 하는 일이 아니라 위치가 소득을 결정하는 사회는 경제의 역동성이 둔화되기 마련이다. 한국이라는 드라마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상위 10% 캐슬 안에서부터 성문을 열고 성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19.3.11
탄핵 2년의 현장, 광화문광장
주말에 광화문광장 인근에 갈 때는 마음을 단단히 해야 한다.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는 이스라엘기가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안된다. 또 고성능 스피커에서 나오는 연설은 듣지 말고, 깃발에 쓰인 구호는 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5·18은 북한 인민군의 폭동” “민족반역자 문재인 끌어내리자!” “박근혜 무죄 석방” “탄핵 무효”와 같은 주장과 구호는 이곳에서는 매우 점잖은 것들이다. 군인들에게 내란 선동하는 구호들도 튀어나오고, 누구누구를 찢어 죽이자는 험한 말도 난무한다. 대한민국에서 이만 한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의 경연장을 찾기 힘들 것이다.
시대를 착각하게 하는 군가들도 들린다.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넘쳐나고, 그들 중에는 박정희 흉내를 낸다고 선글라스를 낀 이들도 많다. 황교안 대표의 당선을 축하하고 벌써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게 하소서”와 같은 목사의 기도 소리도 들린다. 성적인 설교로 유명해진 정광훈 목사가 대표로 있는 한기총이 태극기부대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북·미회담이 실패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공산주의를 무찔러야 한다는 주장은 단골 메뉴다.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전하는 유튜브 채널만 믿는다. 1000만 유튜버들을 조직해서 승리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만이 진실이라는 확증편향이 지배하는 게 이들의 세계다. 그러니 탄핵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며, 그것도 헌법재판소의 음모이므로 탄핵 결정 2주년 집회는 당연히 헌재 앞에서 열렸고, 헌재는 당장 사라져야 할 악마 기관이라 한다.
2년 전 헌재의 박근혜 탄핵 결정에 눈물 흘리며 승리를 자축했던 시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탄핵 결정 뒤에 잦아들 것이므로 무시하자고 했던 이른바 ‘태극기부대’가 촛불항쟁의 중심지인 광화문광장 일대를 매주 주말 점령하고 있다. 2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들은 지치지 않고 나오고 있고, 최근에는 오히려 세력이 더 강화되고 있다. 서울역, 대한문, 동아일보사, 동화면세점, 종각, 교보문고 앞 등에서 보다 극우적임을 경쟁하던 각각의 세력들은 집회 뒤에는 꼭 광화문광장을 한 바퀴씩 돈 다음에 해산한다. 매주 주말 광화문 일대는 이들의 집회와 시위로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그런 광화문광장의 초입에 세월호 천막이 있다. 세월호 참사 3개월 뒤인 2014년 7월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맨바닥에 앉아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40일간 단식을 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해서 격려했던 곳이다. 교황은 세월호 노란 리본을 떼라는 한국 천주교 성직자에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뒤에 몽골 텐트가 들어섰고, 분향소와 전시관, 시민들의 공간이 자리를 잡았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활동들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펼쳐지는 소중한 장소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항쟁은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발화된 항쟁은 끝내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요즘 매주 주말마다 이곳을 지키는 유가족과 시민들은 태극기부대 대오에서 날아오는 온갖 악담과 모욕들을 견뎌내야 한다. 지겹다, 이제 그만해라에서 빨갱이, 종북좌파까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주장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혀를 끌끌 차면서 “죽은 애들 앞세워 돈 뜯어내는 떼쟁이”라고도 한다. 경찰이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당장 천막 쪽으로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다. 어떤 때는 태극기부대 시위 대오 중에서 쇠구슬이 날아오기도 했고, 지난해와 올해 3·1절 때는 일부 시위 대오가 난입해서 전시물을 부수고 촛불조형물을 불태웠다. 태극기부대의 공격 대상이 되어 버린 세월호 천막은 4년7개월 만인 이번 주에 철거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단장된 기억공간이 들어선다.
주말 이곳에 나와 보면, 이런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그해 겨울 꼬박 촛불을 들고 이 광장을 지켰나 회의감이 밀려온다. 저들이 석방을 주장하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도 할 수 없었다. 청와대로 가는 길엔 몇 겹의 경찰 차벽이 들어섰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장착한 경찰들이 막아섰다. 촛불항쟁 덕분에 지금 광화문을 거쳐 행진해서 청와대로 가고, 그 앞에서 집회도 할 수 있게 된 것이 겨우 2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넘실대는 촛불 바다의 감동은 가뭇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정치개혁이 지연돼 이런 정치판이 만들어졌다. 탄핵 이전에 구성된 20대 국회는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아왔다.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적폐세력들은 개헌, 선거법, 권력기관의 개혁법안들을 모두 막아섰다. 국회는 촛불항쟁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 책임은 한국당에만 있지 않다. 정부는 이벤트와 레토릭만 근사하게 하면서 국민들의 기대감을 높여만 놓았지 촛불정신에 부합하는 정책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책임 있는 개혁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요즘은 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정책을 집행하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경사노위가 대표적이다. 경사노위는 경영계의 요구를 수용해서 사회적 대화를 제기하고, 노동계의 양보를 형식적으로 완성하는 기구로 활용한다. 정해진 답에 청년, 여성, 비정규직 대표를 들러리 세우려 한다. 초기부터 다부지게 적폐청산과 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한 탓에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노동제의 효과는 사라지고 있다. 경사노위를 통해 노동권이 후퇴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아니라 지금도 무권리 상태에서 신음하는 미조직 노동자들이다. 이들만 더 골병들게 된다.
그러니 주말 광화문광장은 정치 실패를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를 보여준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가짜뉴스와 혐오가 판치는 주말 광화문광장에 나와 보기를 권한다. 답은 현장에 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경향 3.11
탄핵 2년, 한숨만 나온다
역사는 나선형으로 흐른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 지 2년, 대한민국은 직진하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은 탄핵 전으로 돌아갔다. 정치분석가 박성민은 현재 한국의 유권자 구도를 30·20·30·20의 네 그룹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30%는 진보진영이고 두 번째 20%는 진보 쪽에 가까운 중도, 세 번째 30%는 중도보수, 마지막 20%는 태극기세력으로 대표되는 강경보수다. 현재 한국당 지지율은 갤럽 20%, 리얼미터 28%로 나온다. 맨 마지막 태극기 그룹과 비슷한 수치다. 지난 대선에서의 홍준표 득표율(24.0%) 그대로다. 지지층이 확장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전체 유권자의 20%를 차지하는 강경보수는 이번 한국당 전당대회를 주도했다. 아스팔트 위를 떠돌던 이들은 장내로 들어와 한국 정치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난장판을 만들었다. 연설회장에는 ‘탄핵 부역자 나가라’는 팻말이 물결쳤다. 보수의 미래를 다투자는 전대는 ‘박근혜 배신자 찾기’로 변했다. 황교안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다 결국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심을 산 강경보수 황교안은 대표가 되고, 민심을 얻은 중도보수 오세훈은 떨어졌다. 한국당은 딱 이만큼 민심과 떨어져 있다.
황 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전투’와 ‘통합’을 선언했다. 20대 국회 들어 한국당의 국회 보이콧만 16번이다. 북한 인사의 방남을 막겠다고 한겨울 벙거지를 쓰고 통일대교를 막기도 했다. 달이 떠도 반대, 해가 떠도 반대였으니 새삼스럽게 전투 선언은 하고 말 것도 없다. 통합은 공허하다. 새누리당이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으로 쪼개진 것은 친박과 비박 간의 갈등이 탄핵 정국 속에서 더는 동행이 어려울 정도로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을 나간 바른미래당이 다시 합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총선 전략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다고 그 결합이 오래갈 리 없다. 황 대표는 첫 당직 인사에서 내년 총선을 진두지휘할 사무총장 자리에 친박 원조(한선교)를 앉혔다. 새 대변인은 박근혜의 대변인(민경욱)이 맡았다. 좌파독재를 저지하겠다며 ‘신적폐저지특별위원회’(김태흠)를 만들었다. 친박은 똘똘 뭉쳤고 좀비처럼 다시 살아났다. 한국당은 타임머신을 탄 듯 완벽하게 과거로 돌아갔다.
분노는 문재인 정부와 여당으로 향하고 있다. 정부 출범 3년차가 됐는데도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과거의 것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위기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은 위기 곱빼기 상황이다. 과거의 것도 죽지 않고 새로운 것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 정부의 법치·민주주의 훼손은 역사의 퇴행이었고, 촛불은 그를 회복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이 시작한 거대한 변화는 정치 앞에 멈춰 섰다.
정권이 바뀌면 달라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개혁은 철벽에 가로막힌 듯 힘을 잃고 있다. 국정 어젠다에서 개혁 의제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무능한 이미지가 겹쳐진다. 초기의 당당함과 신선함, 파이팅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 완장이라도 찬 듯한 행세, 시민단체식 아마추어 발상, 그 얼굴이 그 얼굴인 돌려막기 인사, 말뿐인 개혁에 시민들의 시선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다. 20대 폄훼, 판결 불복, 100년 집권론 같은 오만한 언행이 잇따르는 건 시민의 정서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징후다. 민주당 토론회에서는 “현 상황이 계속된다면 야당의 실수 없이는 총선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결국 재집권에 실패해 현재 집권세력이 제2의 폐족으로 전락할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새해 교수들이 꼽은 사자성어 ‘임중도원(任重道遠·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에도 이런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촛불의 무거움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때 80%대 대통령 지지율은 태극기세력을 제외한 모두가 지지했다는 의미다. 그 슈퍼 지지율은 근 반토막이 났다. 지금 민주당 지지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식 반대로 일관해온 한국당과 한 자릿수(리얼미터 9.5%포인트) 격차로 좁혀졌다. 한유총이 정부의 멱살을 잡고 흔든 것도 해볼 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폐세력이 적폐저지위원회를 만드는 마당이다. 개혁을 하려면 담대한 발상, 과감한 도전, 실천이 필요했다. 정부와 여당은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권교체는 시대교체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있다. 희망은 실망으로, 실망은 절망으로 변하고 있다. 돌아가든 직진하든,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는 걸까. 시민들은 묻고 있다. 한숨만 쉬고 있다.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19.3.4
‘태극기부대’의 공로
‘1% 법칙’이라는 게 있다. 미국의 마케팅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법칙이다. 처음엔 웹사이트의 콘텐츠 창출자는 전체 이용자의 1%라는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이젠 어느 분야에서건 꼭 1%가 아니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전체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걸 가리켜 ‘1% 법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 법칙’은 한국에서도 입증됐다. 2018년 네이버에서 댓글을 작성한 회원은 전체 회원의 0.8%에 불과했다. 6개월간 네이버 뉴스에 한 건이라도 댓글을 단 사용자는 175만여명이었지만, 1000개 이상의 댓글을 단 아이디는 약 3500여개였다. 전체 인터넷 사용자 인구 대비 0.008%에 해당하는 사람이 전체 댓글 여론에 영향을 미친 셈인데, 이게 바로 댓글 조작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2018년 4월24일)
시민의 참여는 민주주의와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한 전제조건이지만, ‘1% 법칙’은 ‘참여의 딜레마’를 말해준다. 누구나 절감하겠지만, 참여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리자면, 참여는 “자유로운 저녁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는다”. 노력도 요구한다.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시간과 노력은 곧 돈인데, 그들에게 참여를 하라는 건 목돈 내놓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일지라도 정열이 없으면 참여를 너무 성가시고 힘든 일로 여긴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정치적 신념을 종교화한 사람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한다. 종교적 열정으로 뭉친 이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바치는 ‘순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순수성이라는 ‘도덕적 면허’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파에게 법과 윤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전적 공격성을 보인다. 어느 집단에서건 이런 강경파는 1% 안팎의 극소수임에도 지배력을 행사한다. 뜨거운 정열로 똘똘 뭉친 그들은 참여를 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비해 ‘1당 100’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준 게 2009년부터 수년간 미국 정치를 뒤흔들었던 우익 포퓰리즘 운동단체인 ‘티파티’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은 티파티에 찍힐까봐 벌벌 떨곤 했다. 공화당 내부에선 “티파티에게 더 이상 휘둘려선 안 된다”는 불만이 들끓었지만,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나서진 못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누가 공화당을 대표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 의문은 오늘날 한국의 일부 정당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최근 언론은 자유한국당이 ‘2% 태극기부대’에 휘둘린 현실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개탄했지만, 이건 ‘태극기부대’를 폄하하거나 그들의 자제를 요청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간 수많은 학자들이 이 ‘참여격차’의 문제를 연구했지만, ‘딜레마’라는 진단을 넘어선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언론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론적으론 다양성이 살아 있는 광범위한 참여가 답이지만, 아직까진 이론일 뿐이다. 사실상 기존 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인 청년들이 정당을 향해 침만 뱉지 말고 정당으로 쳐들어가 당원의 자격으로 정당을 개혁하자는 주장이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이라면 대안이었다. 이 대안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런 주장과 실천 시도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끌어들이는 데엔 적극적이지만, 자기 패거리가 아닌 사람이 당원이 되는 데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아니 오히려 방해물로 간주한다. 이를 잘 아는 시민들은 정당원을 좋게 보지 않는다. 김경미 정치발전소 이사가 청년의 정치참여와 관련해 지적했듯이, “당에서 오래 활동한 친구들은 ‘정치낭인’, ‘구태정치꾼’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벌어지고, “정치인이 되려는 인재들은 로스쿨에 가거나 ‘알아서’ 당이 영입하고 싶은 인재가 돼 들어오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종교적 순수주의자가 되거나.
정당들이 낮은 자세로 “제발 우리를 바꿔달라”고 호소하면서 당원 가입을 요청하는 캠페인을 벌인 걸 본 적이 있는가? 이걸 단 한번도 본 적이 없거니와 정치를 독식하기 위한 음모의 냄새가 농후한데도 광범위한 참여를 실현되기 어려운 꿈으로만 봐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정치의 ‘1% 법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정당이 스스로 애써 만들어낸 게 아닌가? 태극기부대는 우리의 민주주의 운영 방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변화를 촉구한 공로자가 아닌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19.3.3
백범 김구의 '두 얼굴'과 문재인 대통령 -'정치인' 김구는 왜 실패했나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6일 효창동에 있는 백범 기념관에서 사상 첫 국무회의를 열었다. 백범 묘역 등을 참배하였음은 물론이다. 문 대통령은 "친일 청산이 정의의 시작"이라고도 말했다. 좋은 일이고, 잘한 결정이며, 구구절절 옳은 소리이다.
그런데 나는 3.1만세운동 백주년인 오늘 딴지를 걸고 싶다. 정신 없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백범 김구가 위대하지만, 실망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꼽는 게 많이 이상하고,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기는 것도 불편하다.
김구를 자연인이 아닌 공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볼 때 김구는 독립투사로서의 얼굴과 해방 후 이승만과 권력을 놓고 경쟁한 정치인의 얼굴로 나뉜다.
위대한 건 독립투사로서의 김구의 면모다. 김구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석권하던 일제에 맞서 견결하기 이를데 없는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의 시기에 김구는 강철 같은 의지와 사자의 담대함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벌였다. 가난과 풍찬노숙과 신변에 대한 위협과 미래에 대한 암울함이 백범 김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김구는 거인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건 견인불발의 독립지사로서의 김구다.
실망스러운 면모는 해방 후 정치인으로서의 김구다. 김구는 국제정세와 국제 역학관계를 보는 눈이 어두웠고, 정무감각도 현저히 떨어졌으며, 새로운 나라에 대한 비전도, 새로운 나라를 만들 식견도 너무 부족했다. 그런 김구가 권력의지는 강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정치인으로서의 김구의 전략적, 정치적 패착은 크게 세 개다. 우선 김구는 이미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에 상해 임정의 정통성을 인정해 달라는 실현불가능한 요구를 미군정에 하다 너무 늦게 그것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다. 해방 직후 같은 비상한 시기의 한 달은 평소의 십년과도 같은데 김구는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다 천금 같은 시간을 탕진한 것이다.
두번째는 김구의 최대 과오로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잘못으로 김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담의 결과인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말이 신탁통치이지 실은 조선이 독립국가가 될 역량을 형성할 때까지 몇년 간 미국과 소련 등이 후견인 역할을 하겠다는 것) 결정을 수용하고 인민들을 설득하는 대신, 권력의 중심에 설 생각에 오히려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잡고 '찬탁은 식민지배를 연장하는 것'이라며 반탁운동에 앞장선다. 김구의 결정은 분단과 전쟁을 예방할 기회를 상실하는데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인민 다수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이에 형성되었던 '민족 VS 반민족' 구도를 '찬탁 VS 반탁' 구도로 변질시키는데도 일조했다. '찬탁 VS 반탁' 프레임은 곧 '좌익 VS 우익' 프레임으로 등치된다. 수세에 몰렸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탁'의 편에선 후 '우익'의 자리로 옮겨 대한민국을 자기들의 나라로 만든다.
마지막 김구의 과오는 48년에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불참한 것이다. 이미 단정 수립이 대세(김구 등에 의해 신탁통치가 무산된 후 남과 북의 분단은 필연이었다)였는데, 그렇다면 이승만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라도 김구 등은 총선에 참여해 제도 정치권내에서 지분을 갖고 균형자 역할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김구 등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단독선거 개최를 반대하며 이를 보이콧하는 정치적 패착을 저지른다. 남한만의 선거를 통해 의회가 구성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제도정치권에서 배제된 김구 등의 힘은 급속히 위축된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건만, 김구는 그런 권력의 속성에 둔감했던듯 싶다.
'삼팔선을 베고 죽겠다'며 평양행을 강행한 김구의 단심은 평가받아야 하겠지만, 이미 그때는 남과 북이 피의 구덩이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때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꼭 일년후 남과 북은 동족상잔의 전쟁에 돌입한다.
독립투사로서 그리고 테러리스트로서의 김구는 우뚝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김구는 무능하고 불민했다.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책임진 정치인의 무능과 불민은 너무나 가공할 재앙을 초래한다. 요컨대 권력의 장악과 행사라는 측면에서,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과 정치적 후각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인 김구는 악마적 마키아벨리스트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그건 김구 자신과 민족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소득없이 끝난 지금, 나는 우리가 위대한 김구의 얼굴과 시시한 김구의 얼굴 모두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에게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대표 / 프레시안 19.3.1
'세상과 어울리기 > 외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4~4.30 우리시대를 생각한다. (0) | 2019.05.01 |
---|---|
19.4.1~11 文정부의 세 가지 '오판 (0) | 2019.04.11 |
19.1.8~3.1 분노의 힘 (0) | 2019.03.28 |
18. 7.12~12.30 동맹의 갑질 (0) | 2019.03.06 |
2018 1.15~7.5 (0) | 2019.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