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의 국제화-시사인 535호 17.12.20
러시아 혁명에서 평화를 배우자-한겨레 17.11.7
경제학이라는 색안경-시사인 527호 17.10.26
기레기·국레기와 문재인 정부 -미디어오늘 17.10.17
한반도에서 ‘홀로코스트’를 막으려면-한겨레 17.10.10
보수파 경제학자들이 틀어대는 철 지난 레코드- 시사인 520호 17.9.8
정치의 민중화부터!-한겨레 17.9.5
학회에 오는 아기들-시사인 518호 17.8.24
갑질의 뿌리-한겨레 17.8.8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 한겨레 17.7.27
최저임금 타령-경향 17.7.24
문재인 정부의 케인스주의를 환영한다-시사인 512호 17.7.14
대한민국의 저주, 군사주의-한겨레 17.6.3
지연된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시사인 506호 17.5.30
철학을 가진 정부를!-시사인 500호 17.4.20
적폐 대 통합? ‘장미대선’의 독가시 -미디어오늘 16.4.18
군함외교, 142년 만에 돌아오다- 한겨레 17.4.18
촛불의 힘에만 기대어 개혁할 수 있을까?-시사인 497호 17.3.31
북한의 눈으로 남한을 한번 보자!-한겨레 17.3.21
다음 대통령의 최우선 공약-미디어오늘 16.3.16
이것은 보수가 아니다- 시사인 493호 17.3.2
살아 있는 죽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시사인 492호 17.2.24
우리에게 없는 것, 정치적 선택의 자유- 한겨레 17.2.21
성장에 목매지 말자-경향 17.1.12
햇볕정책의 국제화
속도의 완급은 있겠지만 결국 북한 경제는 시장화를 확대할 것이다. 북한이 국제사회로 나오는 것이야말로 김정은의 유일한 활로임을 설득해야 한다.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뒤를 이어 김정은이 ‘경애하는 최고 령도자’가 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3대에 걸친 핵실험 여섯 번 중 네 번을, 그리고 63번(116발)의 미사일 발사 중 50번(85발)을 그가 이 짧은 기간에 감행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조만간 북한이 미국 본토에 이르는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경제 병진 노선’을 내세웠고 이미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한국은행이 추정한 북한의 2016년 경제성장률은 3.9%로 우리의 2.8%를 넘어섰으며 그동안 1% 가까운 성장을 했다.
지난 6년간 북한의 경제이론지 <경제연구>는 핵·경제 병진 노선 외에도 ‘새 세기 과학기술혁명(또는 지식산업시대)’ ‘인민 경제생활의 향상’이라는 구호로 점철되어 있다. 최근 북한의 경제 전략은 ‘최첨단 돌파’라는 말로 표현된다. 김정일 시대부터 강조했던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컴퓨터 수치제어) 기술이 마침내 광명성 3-2호의 성공 덕에 우주산업으로 이어졌고 장차 원자력산업에 응용할 수 있는 핵기술 역시 ‘최첨단 돌파’를 이미 증명했으니 이제 북한의 ‘인재대군’을 밑천으로 해서 나노기술이나 생명기술에도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경제연구>의 거의 모든 논문이 사회주의 소유제도가 계획과 집단주의 때문에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알리바이처럼 보인다. 2012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연구하라고 지시한 ‘우리식 사회주의 경제관리 방안’의 내용은 현실의 시장화를 기존 이론으로 합리화하고 나아가서 정책적으로 시장화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라 밝혀지고 있다.
2015년경부터 과거의 ‘독립채산제’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관리체제’로 정식화되었는데, 기업이 ‘실제적 경영권’을 가지고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재정과 금융에 관한 논문이 부쩍 많아진 것도 시장화에 따른 거시적 조정의 필요성 때문이며, 구체적으로는 20년 시장화로 민간에 쌓인 돈을 국가 기업의 운영에 동원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국제금융 제도나 기법에 대한 소개가 매호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늘어났고 경제특구의 외국인 투자 유치 방안에 대한 조사도 소개되고 있다. 파생 금융상품의 가격 변동을 독자적으로 예측하고, 새로운 파생상품을 설계할 뿐 아니라 이를 조작해서 외화를 벌어들이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2002년 ‘7·1 조치’를 주도했다가 보수파의 반격으로 2007년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던 박봉주가 다시 총리로 등용됐다. 지난해 5월에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임됐으며 당 중앙군사위 위원에까지 올라 당·군·내각에서 모두 입지를 굳힌 것도 의미심장하다.
북한은 비핵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야심찬 전략은 ‘핵보유국’을 인정하라는 주장과 함께 곧바로 휴지조각이 되고 말 것이다. 2009년 화폐개혁과 같은 조치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를 좌초시킨다면 그때처럼 경제위기가 닥칠 뿐 아니라 이제는 책임자 한 명(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의 사형으로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속도의 완급은 있다 하더라도 결국 북한 경제는 국제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나노와 바이오기술의 개발과 산업화 및 당장 절실한 외화 획득을 위해서는 국제제재가 풀리고 국제기구에 가입해야 한다. 결국 체제 안보에 대한 국제적 보장이 진전되는 데 맞춰 비핵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다.
한국도 ‘한반도 비핵화’를 대화의 조건이 아니라 장기 목표로 삼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와 시진핑을 설득해서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국제사회로 나오는 것이야말로 김정은의 유일한 활로라는 점도 설득해야 한다. 북한 경제가 더욱 발전해서 국제사회에 녹아들면 들수록 한반도 평화도 굳건해질 것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국제판 햇볕정책이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시사인 535호 17.12.20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러시아 혁명에서 평화를 배우자
정확히 100년 전에, 춥고 시무룩한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계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사상 최초로 피억압 계층들을 기반으로 하는, 비시장적이며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는 대안적 미래를 지향하는 급진정파가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데에 성공했다.
레닌은 세계 무산대중, 식민지의 피억압 대중에게 호소하면서 독일과 같은 과거의 적을 친구로 만들 줄 알았다. 우리도 한반도에서의 평화, 공존, 군축 정책을 추진하면서 세계의 양심에 호소할 수 있다. 세계성과 평화 지향이야말로 바로 지금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
이번 11월에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된다. 정확히 100년 전에, 춥고 시무룩한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계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사상 최초로 피억압 계층들을 기반으로 하는, 비시장적이며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는 대안적 미래를 지향하는 급진정파가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볼셰비키들이 기대했던 세계혁명은 불발로 끝났고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은 고립되었다. 레닌이 애초에 꿈꾸었던,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주체들이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도 결국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었다. 소련이 제공한 대안적 산업사회의 모델, 그리고 소련과 그 동맹국으로부터의 지원이 없었다면 과연 1945년 이후의 식민지 해방운동이나 쿠바, 베트남 혁명 등은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은, 그때까지 복벽론(조선왕조 복구론)과 공화론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던 독립운동의 판세를 바꾸었다. 사회주의가 가장 대중적인 독립운동 세력이 되었고, 그 외의 정파들도 그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헌법상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지만,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년)은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명시한 바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제대로 이어받자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국민기업으로 만드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1917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와 박근혜 퇴진 이후의 대한민국의 상황이 다른 만큼 러시아 혁명 때의 정책을 그대로 오늘날에 적용하는 거야 불가능할 것이다. 온 나라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되고 대도시에는 기근이 임박하고 농촌에서는 지주의 토지를 하루빨리 무상몰수, 무상분배하려는 농민들이 지주의 저택에 방화를 하곤 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사실 오늘날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보아도 본받을 만한 정책을, 혁명 시절에는 꽤나 많이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체제가 다른 타국들과의 공존공생과 평화를 위한 외교였다. 사실 평화 문제야말로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민중과 엘리트 사이 갈등의 핵이었다. 민중은 3년 동안 지속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도살극에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전쟁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한데 우파나 중간파뿐만 아니고 혁명정당 안에서조차도 다수의 정치엘리트는 ‘조국 방위’의 입장에서 적국이었던 독일과의 즉각적인 평화협정 체결에 결사반대했다. 러시아 총인구의 3분의 1이 살았던 광활한 영토를 독일에 내주면서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맺은 레닌은 볼셰비키당 안에서조차도 동료들로부터 ‘역적’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데 그 조약이 체결된 8개월 후에는 독일에서도 1918년 11월 혁명이 일어나 조약은 무효화되고 독일 군대는 러시아 영토를 떠났다. 평화를 향한 외교로 레닌은 국제적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로 추천됐으며, 국내적으로 전쟁을 혐오하는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등의 정권들은 훼방공작과 무장간섭을 통해 평화협정을 방해했지만, 레닌은 평화외교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평화외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의 탈퇴로 끝나지 않았다. 이 외교의 일차적인 대상은 바로 당시 세계 무대의 약자들이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상대방의 이념을 따지기 전에 일단 열강이라는 이름의 강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다른 세계 약자들 사이의 ‘공통분모’부터 모색했다. 예를 들어 일당 체제인 소비에트 러시아와 다당제 의회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시대(1919~33) 독일은, 전쟁으로 얼룩진 과거를 넘어 1922년부터 수교해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 치하의 터키는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민족주의 국가였지만, 열강에 공동으로 맞서는 반제 전선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영토적 양보를 받았으며 1930년대 말까지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봉건왕국이었던 아프가니스탄과도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9년에 일찌감치 수교하여 기술원조 등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에 맞선 아프가니스탄의 독립투쟁이 이념의 차이를 넘을 수 있는 공통분모였기 때문이다.
한데 주요 열강인 영국, 프랑스와도 소비에트 공화국은 1924년에 수교하여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정당외교를 펼쳤다. 단, 영국이 소비에트 공화국한테 인도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말 것을 요구했을 때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 마찬가지로 1925년에 일본과의 관계는 회복했지만, 조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지원도 지속되었다. 심지어 경성(서울)의 영사관을, 조선 사회주의자들에게 코민테른 지원금을 전달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평화와 협력을 지향하되 결코 혁명적 이상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탈린의 독재가 한창이던 1930년대 말 소련 외교에 제국주의적 특색이 다시 나타났지만, 그 전까지는 조선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도 평화 유지와 약자와의 연대 중심의 소련 외교에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우리에게 레닌의 외교에서 배울 만한 교훈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민중의 평화 염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넘는 공존과 상생의 기술이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과 1920~30년대의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이념이나 체제를 달리해도 그런 외교적 노력의 결과로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었다. 볼셰비키와 영국 노동당은 이념을 달리하는 부분은 적지 않았지만, 평화 지향 등을 특히 노동당 좌파와 공유할 수 있었던 만큼 꽤나 우호적인 관계 만들기도 가능했다.
오늘날 한국의 경우 같으면, 북한과의 차이가 크다고 해서 꼭 서로를 적대해야 하는가? 차이도 크지만, 그보다는 양쪽이 지불해야 하는 너무나 비싼 분단과 적대의 비용을 줄임으로써 초래되는 공동이익이 훨씬 크다. 북한 젊은이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10년간의 징병의무를 짊어져야 하지만, 한국의 징병제도 젊은이들에게 다대한 피해를 준다. 군 사망사고가 경향적으로 줄어들고는 있지만 작년 한해만 해도 군 복무 중에 81명의 젊은이가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병영에서의 구타도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예비역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면 약 절반 정도는 폭력 행위를 경험했다고 한다. 북한이라고 해서 군에서 폭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증언들도 나온다.
상호 대치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병영질서를 유지시키고 있다. 북한은 선군이라는 이름으로 군에 주안점을 두지만, 문재인 정부의 내년 국방예산도 9년 만에 가장 큰 폭(6.9%)의 증가율을 보인다. 북한은 의료부터 기본 인프라까지 다 추가투자를 필요로 하고, 한국은 복지예산이 태부족한데, 왜 하필이면 천문학적인 돈을 동시에 무기 경쟁에 낭비해야 하는가? 레닌 외교의 선례대로 과감하게 서로에게 접촉하여 군축을 논해도 되는 신뢰모드의 구축에 함께 돌입하면 양쪽에 훨씬 더 좋지 않을까?
레닌은 세계 무산대중, 식민지의 피억압 대중에게 호소하면서 독일과 같은 과거의 적을 친구로 만들 줄 알았다. 우리도 한반도에서의 평화, 공존, 군축 정책을 추진하면서 세계의 양심에 호소할 수 있다. 냉전과 신냉전의 최악의 피해자가 된 분단 한반도의 평화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면, 지금 트럼프의 호전적인 정책에 맞서서 투쟁하려 하는 미국의 많은 유권자들이 지지를 보내리라 확신한다. 북핵 문제가 일본 극우들에게 이용되지만, 한반도의 평화모드는 일본의 군사화를 반대하는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혁명은 폭력적 측면을 내포한다 해도 세계성과 평화 지향이야말로 바로 지금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한겨레 17.11.7
경제학이라는 색안경
한때 혁명적으로 여겨졌던 행동경제학은 경제학과 경제를 혁신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주류 경제학에 무난하게 흡수되었다.
시카고 대학의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승자의 저주> <넛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등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그의 책은 대중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책에는 온갖 재미있는 일화들, 특히 교과서적 경제 이론을 정면으로 거스름으로써 읽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화들이 가득하다. 초기에 주류 경제학은 리처드 세일러 등의 지적을 ‘호기심 천국’이라고 무시했다.
리처드 세일러 교수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 전망(The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에 ‘이상현상(Anomalies)’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연재했다. 이 글들을 나중에 <승자의 저주>로 엮었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그의 눈에는 부지기수였다.
그는 그 이유를 인간의 인지능력 부족에서 찾고 이러한 한계를 정리했다. 첫째는 사이먼(197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저 유명한 ‘제한 합리성’이다. 인간은 모든 정보를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극대화(maximizing)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그냥 만족할 만한 정도(satisfying)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고, 이는 나중에 ‘정신적 회계(mental accounting)’ 이론으로 발전했다(예금통장에 충분한 돈이 있는데, 이자율이 훨씬 높은 카드 빚을 갚지 않는다). 두 번째는 ‘제한 의지(bounded will power)’로 ‘계획자-실행자 모델(planner-doer model: 우리 마음 안에는 멀리 보는 계획자와 근시안적 쾌락을 추구하는 실행자가 항상 갈등한다)’로 발전했다. 세 번째는 ‘제한 이기성(bounded self-interest)’이다. 사람은 보통 경제학이 예측하는 만큼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는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 이론이 되었다.
그의 예리한 관찰은 독특한 정책 방향을 낳았는데 ‘넛지(nudge)’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완전히 시장(즉 개인의 선택)에 맡기지 않고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제한적인 개입으로 아주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제안이다. 연금의 확충(자동 가입과 탈퇴의 자유)이나 학생들의 건강한 식생활(뷔페의 앞쪽에 야채와 유기농 음식을 놓는다) 등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오바마 정부와 영국의 캐머런 정부 등 각국의 전략실에 넛지팀이 생길 정도였다.
리처드 세일러의 행동경제학은 경제학과 경제를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가끔 그런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리처드 세일러의 주장은 상당한 갑론을박을 거쳐 주류 경제학에 무난하게 흡수되었다. 코즈-윌리엄슨으로 이어지는 거래비용 이론도 마찬가지인데,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시카고 대학이 코즈와 리처드 세일러를 영입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30년 전, 리처드 세일러의 연재물 제목 ‘이상현상’은 쿤의 패러다임 혁명을 연상케 하는 제목이지만 현실에선 라카토스의 ‘보호대(핵심 명제를 보호하는 주변의 여러 이론들)’가 된 셈이다.
이질적 행위자의 상호작용에서 거시적 흐름 파악해야
한편 현재의 금융위기 맥락에서 주류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거시경제 이론의 대가들(스티글리츠, 크루그먼 등)도 행동경제학에서 경제학 혁명의 미시적 기초를 찾는다. 즉 이질적 행위자의 상호작용에서 거시적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균형이란 제도와 규범의 일정한 범위 안에서 안정성을 보이는 것이며, 이질적 개인들의 누적 상호작용의 결과, 그 범위를 벗어나면(이것이 ‘티핑포인트’ 또는 ‘임계점’이다) ‘돌연변이=이상현상’이 복제를 거듭한 결과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지금과 같은 대위기와 장기 침체가 지속될 것이다.
기실 리처드 세일러의 ‘이상현상’이란 보통 사람들이 매일 겪고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의 실천이다. 단지 경제학자들에게만 어떻게든 해명해야 할(리처드 세일러를 공격하건 옹호하건) 괴이한 현상이 되곤 한다. 이는 경제학이라는 색안경을 벗는 사람이 리처드 세일러처럼 가끔씩만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시사인 527 17.10.26
기레기·국레기와 문재인 정부
기레기와 국레기. 솔직히 글로 옮기기 거북스런 말이다. 누가 누구를 ‘쓰레기’라 정죄할 권리가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쓴다. 한 시대를 담아내는 민중의 언어 앞에 겸손하자는 뜻만은 아니다. 기레기와 국레기라는 말이 실제로 현실을 꿰뚫고 있는 살풍경이 무장 벌어지고 있어서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자유한국당의 어느 의원이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위원장이라는 분”이나 “이효성 씨”라고 불러대는 치기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당의 또 다른 의원은 전국언론노동조합을 “정권의 홍위병”이라고 살천스레 부르댔다. 홍위병인 언론노조 뒤에서 “정권 실세들이 기획해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것이야말로 적폐”란다.
두 의원은 모두 언론인 출신으로 그 당의 대변인 노릇도 했다. 특히 언론노조를 ‘홍위병’으로 모욕한 국회의원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강효상이다. 그가 편집국장 시절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소신껏 수사하던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들춰내 결국 수사가 흐지부지 됐다.
KBS와 MBC 노조의 파업을 놓고 언론인 출신 두 국회의원이 방송통신위원장을 훌닦는 작태는 ‘기레기’와 ‘국레기’라는 말의 적실성을 새삼 확인해준다. 물론, 모든 기자와 국회의원이 쓰레기는 결코 아니다. 기자들이 도매금으로 욕먹고 있지만, 애면글면 진실을 보도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젊은 기자들을 나는 얼마든지 증언할 수 있다. 나름대로 나라에 헌신하는 국회의원도 있을 터다. 기레기와 국레기는 내가 칼럼에서 써온 ‘언론귀족’과 ‘정치모리배’를 ‘순화’한 말일 성싶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강효상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은 기레기와 국레기가 만난 상징이다. KBS와 MBC 구성원 대다수가 문재인 정부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정말 생각하는지 ‘팩트’를 중시한다는 그의 ‘기자 경력’에 언론계 선배로서 묻고 싶을 정도다.
딱히 강효상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기레기와 국레기들이 말살에 쇠살을 늘어놓으며 말끝마다 ‘국가’나 ‘안보’를 들먹이는 행태를 보자면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일러주고 싶다. 강효상이 오랜 세월 기레기로 활동해온 조선일보와 지금 몸담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대한민국 국기를 문란케 한 국정원의 범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아예 모르쇠를 놓고 있다. 과연 그들이 ‘보수’라 할 수 있는가. 차라리 내가 보수를 자임하고 싶을 정도다.
얼마 전에는 국정원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상대로 ‘와해 공작’을 벌인 사실도 드러났다. 국가안보의 중추기관이 ‘전교조 교사’로 위장해 인터넷에 전교조를 ‘폭로’하는 ‘양심선언’ 글을 올리는 범죄까지 모의했고 언죽번죽 실행했다. 그 글을 올리며 외국인 명의로 아이디를 조작하고, 추적을 피하려 인터넷주소 우회 프로그램까지 동원했다. 국정원이 안보는 뒷전인 채 내부에서 불법 공작을 한창 벌일 무렵에 조선일보는 “늙고 작아지는 전교조… 20대 조합원 2.6%뿐” 따위의 기사들을 내보냈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도 보도조차 않는 기레기들과 딴전만 피우는 국레기들을 어떻게 보아야 옳을까. 기레기와 국레기의 활갯짓은 언론사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했다는 윤똑똑이들의 천박한 수준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너그럽게만 보기엔 ‘촛불 정부’의 갈 길이 멀고 시간은 짧다. 바로 그곳에 기레기와 국레기의 노림수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개혁 정책을 힘 있게 펼쳐가기보다 ‘신중하게 좌고우면’케 함으로써 집권 첫해를 넘기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보아야 옳다.
가령 전교조는 아직도 법외노조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아직도 철창에 있다. 이영주 사무총장은 내내 수배 중이다. 현실적인 요건을 몰라서가 아니다. 신중해야 옳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촛불 정부라면 지금보다 치열해야 옳다. 장관과 수석들에게 묻는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7.10.17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반도에서 ‘홀로코스트’를 막으려면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나서 인류는 그 누구도 비인간화 내지 악마화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만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구미권이나 일본 내지 한국의 보수 언론들의 대북 보도를 보다 보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인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진행 중인 북한과 북한인에 대한 악마화는 결국 평양이나 원산의 민간인을 대량 살상할 폭탄을 하등의 가책 없이 떨어뜨릴 잠재적 전범들을 키우고 있다. 한 사회를,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적 지도자를 따르는 세뇌된 좀비들의 무리로 그린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범죄적이다.
며칠 전 나는 아들의 학급을 인솔하고 아우슈비츠를 견학했다. 아들의 학교에서 실시하는 홀로코스트 교육의 일환으로 아우슈비츠를 찾은 것이다. 가스실이나 피해자들의 잘린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방직물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말로 묘사하기조차 어렵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인류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극악무도할 수 있다면 과연 이 지구가 인간의 존재를 언제까지 참아줄 수 있을까 싶었다. 피해자들의 마지막 순간들을 상상하기만 하면 지금 여기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는 것부터 죄스럽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지만, 내 아들의 급우들에게도 전쟁과 학살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체험하게 하는 드문 기회였다. 국내 아이들도 평화, 반전, 비폭력 교육 차원에서 방학을 맞아 대구 가창골처럼 ‘국부 이승만’의 하수인들이 보도연맹학살이라는 한국 사상 최악의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던 현장을 찾아 비명에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국가폭력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우슈비츠의 한 팻말에 쓰인 조지 산타야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라는 명언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를 둘러봤을 때 피해자들의 고통 이외에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가해자들의 심리였다. 아우슈비츠 방문 전후에 내가 구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소속 간수, 관리자들의 수기나 일기, 인터뷰 기사들을 다 읽었다. 가장 믿기지 않았던 것은, 그들 중에는 말년까지 “죄책감이 별로 없다”고 답한 이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근무 당시에는 대다수가 아예 죄책감은 물론이거니와 문제의식조차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유대인이나 ‘빨갱이’, 그리고 ‘감히 아군에 저항하는’ 폴란드인 등 ‘열등한 슬라브 민족’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아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특히 유대인 ‘전멸’은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해충에 불과한 존재들에 대한 ‘청소’였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 악마화는 이렇게 결국 학살자들을 낳았던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나서 인류는 그 누구도 비인간화 내지 악마화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만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구미권이나 일본 내지 한국의 보수 언론들의 대북 보도를 보다 보면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인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1~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1918~39년간) 유럽 극우파의 유대인 비인간화에 못지않은 북한인 비인간화가 미디어에서 판친다.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북한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하나의 ‘위협’으로만 묘사된다. 북한의 국민총생산은 미국 군비의 35분의 1에 불과하고, 북한이 핵을 갖는다 해도 그 보유량은 미국 핵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북한의 핵 개발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좌우간 자기방어를 위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역학관계나 여태까지의 패턴으로 봐도, 북한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위협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할 만한 여지가 더 많다. 한데 세계 주류 언론들의 서술을 보면 북한은 당장이라도 한·미·일을 공격할 괴물로만 묘사된다. 이는 악마화가 아니고 과연 무엇인가?
전간기의 유럽 극우파들은 유대인들을 종교 내지 공산주의 ‘광신도’로 몰아세웠다. ‘광신도의 무리’인 유대인들이 유럽 문명을 위협한다는 논리였다. 오늘날 세계 언론들은 북한인을 세뇌 교육을 당한 로봇으로 묘사하곤 한다. 언론뿐인가? 몇 년 전에 스캔들을 일으킨 미국 영화 <인터뷰>에서는 북한 지도자를 지키는 군인들은 가차 없이 죽여도 되는, 생각 없는 기계로 형상화되었다. 물론 그 어떤 악마화도 비록 과장된 표현들을 쓰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일부 사실들을 이념적으로 주어진 프레임에 끼워맞추는 방식으로 독자나 시청자의 신뢰를 얻으려 한다. 굳이 따져보면 특히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적대가 많았던 동유럽에서는 유대인들 사이의 집단결속은 근본주의적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까지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미·일·한의 적대나 중·러의 꽤나 패권주의적 행태로부터 자기방어를 하려는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일종의 강경 좌파민족주의를 기조로 하는 철저한 이념 교육을 실시하는 것까지는 사실이다.
원칙상 그 어떤 국가적인 이념 강요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한데 과연 대한민국에는 국민의례 등 모두에게 무조건 강요되는 국가주의적 의례들은 없는가? 일본의 진보적 교사들이 지금도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많은 학교에서는 매일의 교육과정을 성조기에 대한 충성 맹세로 시작하지 않는가? 굳이 국가적 이념 강요를 비판하자면 북한만이 아닌 전세계 각국의 이념 강요 행태를 똑같이 비판하는 게 더 정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이라는 특정 집단만을 이념에 세뇌당한 로봇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로 악마화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 ‘메뉴’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던 부분은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나 명망가, 유명인에 대한 개별화된 적대 선전이었다. 보통 나치들은 ‘전세계에 대한 지배를 노리는 유대인 자본가’를 비난하면서 로스차일드 등 저명한 유대인 부호를 거명하곤 했다. <시온 현자들의 기록> 등 반유대주의 고전(?)에서도 보통 유대인 사회 지도자들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서술되곤 한다. 나치즘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천은 바로 반공주의였는데, 유대계 소련 공산당 지도자나 동유럽 공산주의자들은 빠짐없이 ‘유럽의 미래를 위협하는’ 괴물로 묘사됐다. 나치들의 상상의 세계에서는 일반 유대인들은 이런 ‘거물 악한’들을 무조건 따르는 좀비 같은 비인간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과연 북한인에 대해서 세계 주류 언론의 소비자가 갖게 될 그림은 그렇게까지 다를까?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조지 부시는 김정일을 “난쟁이”라고 불렀으며, 현직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김정은을 ‘리틀 로켓맨’(little rocket man)이라고 조롱한다. 한 주권국가의 지도자에 대해 다른 나라 지도자가 신장 등 신체적 특징을 거론하며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한 명칭을 사용한 경우는 전후 세계사에서 전례조차 찾을 수 없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보수 언론들은 김정은을 ‘도발’만 일삼는 ‘악한’으로 묘사한다. 나치에게 로스차일드나 트로츠키 같은 자본주의적 혹은 공산주의적 ‘악마’들이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듯이 주류 구미권, 일본, 한국 언론에 ‘모든 북한인’은 ‘마왕 김정은’의 생각 없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물론 세습권력이라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니다. 삼성의 세습권력도 북한의 세습권력도 마찬가지다. 한데 김정은은 정말 ‘악마’일 뿐인가? 2년 전에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63%가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농 제도를 사실상 도입하는 등 합리적 경제정책으로 다수의 삶살이를 개선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언론들은 이런 이야기를 각종 ‘북한 도발’ 서사에 비해 얼마나 다루고 있는가?
악마화, 비인간화란 결국 제노사이드로 연결되는, 타자에 대한 최악의 접근법이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 중 하나를 준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같은 방법으로 지금 진행 중인 북한과 북한인에 대한 악마화는 결국 평양이나 원산의 민간인을 대량 살상할 폭탄을 하등의 가책 없이 떨어뜨릴 잠재적 전범들을 키우고 있다. 한 사회를,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적 지도자를 따르는 세뇌된 좀비들의 무리로 그린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범죄적이다. 우리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막고자 한다면 우선 상대방이 우리와 똑같은 존엄성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부터 인정해야 한다./ 한겨레 17.10.10
보수파 경제학자들이 틀어대는 철 지난 레코드
소득주도 성장의 원래 이론은 임금주도 성장론으로 포스트케인스주의 학자들의 이론과 실증 연구에 기초한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세계적으로 케인스주의가 복귀한 시대에 보수파 경제학자들은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간판 경제학자인 에드먼드 펠프스 교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지금은 케인스주의자들이 득세하지만, 곧 세력이 약해질 거예요. 두고 보세요.”
지금 한국의 많은 이들이 그와 비슷한 심정인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우자 보수적인 경제학자들과 언론은 이를 때리기 바빠 보인다. ‘성장의 결과가 소득인데, 소득을 높여서 성장하자는 것은 인과관계를 바꾼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소득주도 성장론이 경제학에서 극소수인 비주류 이론이며 근거 없는 가설이자 위험한 실험이라고 주장한다.
소득주도 성장의 원래 이론인 임금주도 성장론은 수요가 성장에도 중요하다는 포스트케인스주의 학자들의 이론과 실증 연구에 기초한 것이다. 이들의 모델은, 임금과 이윤 사이의 소득분배가 총수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한다. 노동소득의 몫이 높아질 때 총수요가 확대되는 경제를 ‘임금주도 체제’로 부를 수 있는데, 실증 연구에 따르면 여러 선진국들과 한국이 임금주도 체제다. 나아가 임금 인상으로 수요가 촉진되고, 기업들이 비싸진 노동력을 신기술로 대체하면 생산성도 따라서 상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비판자들은, 임금이 기업에겐 비용인 만큼 임금 상승이 투자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임금소득의 몫이 높아지고 소비가 늘어나 총수요와 성장이 촉진되면 거시적으로 투자가 저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른바 ‘비용의 역설’이다.
다른 이들은 한국 경제는 수출의존도가 높으니 소득주도 성장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임금 상승이 수출에 미치는 악영향은 제한적이다. 제조업의 총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10%에 불과하다. 현재 주력 수출품은 자본집약적 제품들이며 수출은 다른 요인들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국내의 실증 연구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임금과 노동소득 분배율이 높아지면 소비가 크게 늘어나는 반면 투자와 수출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생산성과 기업 이윤에 비해 임금과 가계소득의 비중이 오랫동안 낮은 상태인 한국에서 소득주도 성장의 추진은 적어도 단기적·중기적으로 수요를 확충하고 성장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여러 비판은 별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득주도 성장론도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진보적인 경제학계 내에서도 논쟁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노동소득 분배율 자체가 총수요에 영향을 받거나, 외생적인 충격 혹은 경제의 구조 변화가 임금과 총수요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면 실증 분석 결과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설사 임금주도 경제가 아니라 해도, 임금을 높이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 경우 정부의 적극적 재정 확대가 함께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보수 경제학자들의 저주에도 케인스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
소득주도 성장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정부가 민간 기업에 임금 인상을 강제하기 힘든 시장경제 사회에서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이기는 실로 만만치 않다. 더 많은 복지와 증세에 기초한 소득재분배가 소득주도적인 성장을 위한 현실적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혁신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강조하듯, 정부는 혁신을 촉진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다시 선진국을 돌아보자. 7년 전 펠프스 교수의 기대와 달리 케인스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수파인 ‘공급 측면 중시’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감세와 규제완화 그리고 정부지출 억제를 주장하고 있다. 1980년대 레이건이 틀었고 트럼프도 내밀고 있는 경제학의 레코드판이다. 문제는 그것이 고장 났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들이 주장하던 낙수효과는 작동하지 않았고 불평등만 심화되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새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과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레코드판을 꺼낸 셈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부터 하고 보는 이들은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혹시 철지난, 고장 난 레코드판을 틀고 있는 건 아닌지.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520호 17.9.8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정치의 민중화부터!
직업적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의 거리가 먼 근원적 이유는, 한국의 주류 정치가 여전히 ‘위로부터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중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만한 동료들에게 정치권력을 위촉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정치엘리트들이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동원하는 방식이다.
노르웨이 국회에는 다양한 비주류 정당들이 있다. 전체 169석 중 29석을 진보적 소수 정당들이 차지한다. 소수정당과 경쟁을 실감하기에 거대 중도좌파 정당인 노동당도 ‘밑’의 이해관계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적어도 국회를 돈 많은 부촌 아저씨들의 놀이터로 만들지는 못한다.
한국의 수많은 이율배반 중 하나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상당히 자기모순적 태도다. 일면으로는 공적인 정치란 대다수의 깊은 불신만 살 뿐이다. 한국의 택시에서 정치인에 대한 험담·욕설은 많은 경우 가장 인기있는 화제로 등장한다. 개별적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 차원을 넘어 정치영역 자체가 불신의 대상이 된다. 작년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87%가 정치인이라는 부류를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무리로 보며, 73%가 정치인의 말을 믿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 사이의 정부 신뢰도도 34% 정도밖에 안 되지만, 국회의원 등 정치영역에 대한 신뢰는 행정부만도 못하다. 한국에 가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많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인이란 ‘성공한 사기꾼’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정치인이란 그저 지대추구적 행동만 일삼는 행위자일 뿐이다.
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본인이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인이라면 예외라고 생각하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속칭 ‘빠’ 현상이라고 한다. 가끔 특정 정치인의 열성 지지자들과 논쟁할 때, 상대방이 본인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무오류성을 믿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성적 토론이 불가능할 정도다. 민주화의 수준에 큰 차이는 있지만, 정치와 정치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한국과 러시아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러시아에서도 국회의원 등을 “운 좋게 형벌을 피해 성공한 범죄자”로 보는 시각은 일반적이지만 본인이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딱 한 명의 정치인만큼은 맹신하는 듯한 태도가 눈에 띈다. 단, 한국과 달리 다수가 열광하는 정치인은 러시아에서는 복수가 아닌 단수, 딱 푸틴 대통령 한 명이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본인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자신을 완전하게 일치시키려는 듯한 맹종은, 궁극적으로 전통사회에서 ‘문중 어르신’, ‘나라님’, ‘스승님’ 등 ‘군사부’(君師父)에 대한 태도를 방불케 한다. 당시는 개인이 소속집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한 점의 회의 없는 ‘맹신’은 당연했다. 이러한 전통사회가 이미 까마득한 기억이 된 지금에 와서도 그런 태도가 종종 나타나는 이유는, 극단적 원자화가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시대의 많은 개인들이 ‘소속’을 간절히 요구해서다. 이들은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는 ‘상상의 공동체’들을 조직하곤 한다.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은, 독재 시절 국가에 대한 민중의 소외로부터 비롯됐다. 군사독재 시절의 어용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 야당의 지도자들도 실제 풀뿌리 민중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계급 소속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정서’나 ‘지역개발에 대한 약속’ 같은 방식이 아니면 정치인은 지지를 호소하기가 힘들었다. 애당초부터 그와 유권자 사이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여야가 이제 정치적 위치를 서로 바꾸는 등 제도적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엄청나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지금도 그 사회·경제적 신분상 평균적 유권자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20대 국회의원의 평균 재산은 약 41억원이지만, 한국의 가구당 평균 재산은 3억6천만원에 불과하다. 즉, 국회의원은 그를 뽑은 유권자보다 평균적으로 약 11배나 더 부자인 셈이다. 다수의 흙수저들이 국회에 들어간 소수의 금수저들을 냉소적으로 본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물론 정당별로 보면 약간씩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국민의당 의원의 평균 자산이 60억원이라면 더불어민주당의 경우에는 36억6천만원 정도다. 유권자들의 평균 자산과 엇비슷한 자산 보유의 현황을, 오로지 정의당 의원(3억7천만원)만이 보여준다. 하지만 국회에서 그들은 불과 6명이다.
재산만 그런가? 한국 국회의원들 중에서 고졸은 거의 없고, 절반 이상은 아예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물론 한국은 세계에서 전체 인구의 학력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하지만 30살 이상의 성인 인구에서 대졸자 비율은 아직 40%에 불과하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가방끈 긴 의원이, 가난해서 대학 문턱도 가기 어려웠던 유권자를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노동인구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서비스업 종사자, 영세자영업자, 그리고 제조업 근로자다. 그러나 이 직군의 일선 담당자들을 국회에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변호사 출신 의원만 16명이나 있어도 말이다.
직업적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의 거리가 먼 근원적 이유는, 한국의 주류 정치가 여전히 ‘위로부터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중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만한 동료들에게 정치권력을 위촉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정치엘리트들이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동원하는 방식이다. 흙수저들은 이 동원의 주체가 아닌 대상물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 같으면 해당 지역 ‘유지급 인물’이거나 그 지원을 받는 사람이 나가는 경우가 많고, 전국구 비례대표라 하더라도 공천을 받을 만한 명망이나 네트워크 등을 가진 유산층 ‘인사’가 훨씬 유리하다. 그래서 한국의 전형적인 국회의원이란 상당한 재산을 보유한 속칭 ‘명문대’ 출신의 40~50대 남성이다. 지금도 서울대를 졸업한 국회의원의 비율이 20%를 넘는데, 15년 전 같으면 아예 48%나 됐다. 하나의 대학을 이렇게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졸업하는 건, 세계사에서 전례를 찾기도 힘들다. 한데 여성 의원의 비율은 여전히 17%에 불과하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 말이다. 20~30대들은 겨우 3명뿐이다. 서울대 등 ‘명문대’와 인연이 없는 젊은 흙수저들이, 그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려고 온 돈 많고 ‘지체 높은’ 분을 왜 하필이면 신뢰해야 하는가?
유형적으로 보면 오늘날 한국 의회정치는 미국과 흡사하다. 미국에서도 절반 정도가 100만달러(한화 약 10억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부호들이 국회 양원을 메우고, 뉘앙스가 달라도 대기업 이해관계의 표방에서 별 차이 없는 거대 주류 정당들이 정치 무대를 독점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치나 정부에 대한 불신은 당연하다. 그나마 민초들이 정치인들을 믿을 수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풀뿌리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비주류, 소수, 민중 정당들이 정치에서 보다 큰 몫을 차지하는 곳들이다.
내각제 국가인 노르웨이에서는 의회와 내각에 대한 신뢰도가 70%에 이르러 한국이나 미국보다 두배나 되는데, 노르웨이 국회에는 다양한 비주류 정당들이 대표를 보낼 수 있다. 전체 169석 중에서 29석을 진보적 경향의 소수 정당들이 차지한다(좌파당, 사회주의 좌파당, 녹색당, 그리고 농민의 당인 중도당). 소수정당과 경쟁을 실감하기에 거대 중도좌파 정당인 노동당도 ‘밑’의 이해관계에 좀 더 세심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급진주의와 경쟁을 의식하는 만큼 적어도 국회를 돈 많은 부촌 아저씨들의 놀이터로 만들지는 못한다. 의원의 절반 가까이가 여성이고 전체 평균 연령은 46살이지만, 약 4분의 1은 20~30대들이다. 내가 재직하는 대학의 학부생 중에도 국회의원이 있다. 그리고 절반이 대졸이긴 하지만, 고졸 출신으로 육체노동을 하다 노조활동을 통해 결국 정치인이 된 사람도 상당수 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정치에 대한 극단적 불신과 혐오라도 면할 수 있다.
좋은 자본주의라는 건 없고, 그 어떤 자본주의적 정치체제도 궁극적으로 총자본의 지배를 뒷받침해준다. 그래도 북유럽처럼 선거제가 완전히 정당명부투표로 바뀌어 사표심리가 설 자리가 사라지고 민중정당들의 당세가 확충되면 적어도 오늘과 같은 민중과 정치 사이의 괴리라도 약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헬조선이 살만한 나라가 되자면 정치의 민중화, 정치 참여의 대중화·일상화야말로 그 이상으로 가는 첩경일 것이다. 한겨레 17.9.5
학회에 오는 아기들
미국에서는 학회 세션에 아이를 데리고 오거나 학회장에서 우유를 먹이는 장면이 특이하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면 다른 학자들을 방해하는 ‘맘충’이라 비난받을 것이다.
출산과 양육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과제이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출산과 양육은 여전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적으로 ‘엄마 몫’이다. 개인화되고 사유화된 출산과 양육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 대세일 때, 기혼 여성들이 일과 양육을 병행하는 것은 어렵다. ‘맘충’ 또는 ‘솥뚜껑 운전사’ 등 양육과 살림을 하는 여성에 대한 다양한 비하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결혼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편견과 역할 규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개별성이 부재한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엄마’라는 이유로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가치 절하되고 부정되곤 한다. 결국 이러한 사회는 ‘모성의 이데올로기화’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다층적 모습들을 억압하는 사회가 된다.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더구나 한국 ‘엄마들’은 특유의 입시제도로 인해 자신의 성공 여부가 자식의 대학 입학 결과로 테스트받아야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양육 과정에서 ‘엄마 몫’이 더욱 비대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 큰 학회에 갈 때마다 내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학회에 오는 아기들이다. 아기들을 데리고 학회 세션에 들어오거나 학회장에서 우유를 먹이는 장면은 이제 특이하지 않다. 그 아기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많다. 학회가 열리는 곳에서 모유를 먹일 공간을 찾는 것, 모유를 먹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흔해졌다. 큰 학회가 열리는 곳에서는 대부분 아이를 돌보아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학회에 참석하곤 한다.
유사한 장면을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할까. 한국에서 학회장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아빠 학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엄마 학자들이 혹시 눈에 띄게 되면 ‘애 엄마가 집에서 애나 기르지, 무슨 학회까지 데리고 오나’ 하는 시선을 던질 것이다. 다른 학자들을 방해하는, 눈치 없고 이기적인 ‘맘충’이라는 표지가 붙여질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라는 사실, 그들의 다양한 사적 또는 공적 역할들이 인정되지 않을 때, 결혼한 여성들이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요청되는 지속적이고 끈질긴 훈련 과정을 견디어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가부장적 이해가 바뀌지 않고, 그 출산과 양육을 공공화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없을 때, 여성들이 결혼이나 출산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가정에서도 출산·양육·가사노동이 엄마 아빠 모두의 과제라는 인식, 출산과 양육이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책임이라는 인식의 제도화가 확산되지 않는 한, 결혼은 물론 출산을 하고자 하는 여성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타자를 향한 시선은 강력한 언어이다. 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아빠 엄마, 대학원에 다니며 아기를 낳고 기르는 엄마 아빠, 결혼 후 직장 생활을 하며 아픈 아이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하는 아빠 엄마, 학회에 아기를 데리고 오는 엄마 아빠가 있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타자를 향한 시선은 강력한 언어다
한국의 학회장에서, 다양한 공적 공간에서 아기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아빠 또는 엄마들을 보고 싶다. 학회장에서 모유를 먹이는 엄마나 우유를 먹이는 아빠를 따스하고 인정하는 미소로 바라보는 시선들을 보고 싶다. 그러한 변화들이 소리 없이 한 귀퉁이에서라도 진행되기 시작할 때, 지금보다는 훨씬 인간화된 사회가 될 것이다.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출산과 양육이라는 중요한 사회 국가적 과제를 혼자서 끌어안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21세기에 한 인간으로서 꿈과 희망을 펼쳐가고자 하는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의 책임이 온통 자신의 어깨에 놓일 것임을 보면서 ‘감히’ 출산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대학에서, 지역에서, 또는 학회장에서 아기들과 아이를 보호하고 맡아주는 시설과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기들을 동반하는 아빠 엄마의 등장을 냉소와 비난이 아닌 따스한 지지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원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시사인 518호 17.8.24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갑질의 뿌리
영어사전의 한국어 계통 외래어 명단에 요즘 하나 더 추가되게 생겼다. 바로 ‘갑질’이다. 착취·억압에 극심한 인격 모욕, 아니 하위자의 인격 부정까지 포함하는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갑질’이라는 개념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한국 정부는 원조분배권을 독점하여 미국이라는 ‘슈퍼갑’ 그늘 아래에서 자본 위에도 군림하는 ‘갑’이 됐다. 박정희 시절에 원조가 차관 등으로 대체됐지만, 국외자금을 독점적으로 배분하면서 정부의 위상은 그대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가의 초대형 갑질은 당연지사였다.
주체사상의 ‘주체’, ‘김치’, 그리고 ‘한류’…. 영어사전에 그다지 많지 않았던 한국어 계통의 외래어 명단에 요즘 하나 더 추가되게 생겼다. 바로 ‘갑질’이다. 인터넷을 보면 예컨대 한국 대학에서 석·박사 공부하면서 ‘교수님’의 아이를 자기 차로 학원에 데려다주는 등 사역에 시달리는 한국인 대학원 동료들의 갑질 피해 사례를 소개하는 외국인의 글들을 볼 수 있다. 영어 아닌 러시아어 인터넷까지 본다면 한국계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면서 맨 먼저 배운 한국어 단어가 바로 “개새끼”라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사람의 글도 읽을 수 있다. 착취·억압에 극심한 인격 모욕, 아니 하위자의 인격 부정까지 포함하는 이런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갑질’이라는 개념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갑질이란 대한민국에서 모든 비대칭적 사회관계에서 다 감지된다. 고래로 국가가 지배해온 사회인지라 갑질 문화도 국가가 이끌어왔다. 노동계에 대한 대한민국의 모든 통치권자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갑질의 전형에 가깝다.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을 가능케 한 촛불항쟁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2015년 11월의 민중총궐기를 계획한 ‘죄’로 박근혜 정권 밑에서 3년형을 받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도 계속 감옥에 갇혀 있으며 사면을 받아 나올 전망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전세계의 노동운동가로부터 수년간 비판받아온 처사지만, 노동계의 위치가 ‘을’로 고정돼 있는 한국에서는 거의 당연지사다. 노동계에 가까우며 좌파민족주의 색채가 있는 정치단체라면, ‘갑, 을, 병, 정, 무, 기’도 아닌 임(壬)이나 계(癸) 정도다. 정치 지도자로서 보수층 표심을 얻을 필요만 생기면 좌파민족주의 계통의 양심수들이 줄줄이 감옥 가고 사면을 꿈꾸기도 어렵다. 징역 9년형을 살고 있는 이석기 전 의원은 국내외 인권단체에 의해 양심수로 지목돼 그 석방운동에 유럽의 종교인·정치인도 가세하고 있지만, 인권변호사 출신(!)의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석방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점만 봐도 좌파민족주의 계열에 대한 국가의 갑질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위에서 국가가 선도하고 있지만, 아래에서 가맹점 주인을 상대로 갑질을 벌이는 ‘미스터피자’ 회장 같은 기업인들이나 알바에게 갑질을 해대는 가맹점 사장들을 흔히 본다. 온 사회가 갑질의 끈으로 묶여 있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나? 왜 국가부터 시작해서 ‘갑’의 위치가 되기만 하면 ‘을’이나 ‘병’, ‘정’들과의 관계를 법이나 양식이 아닌 강자의 편의대로만 구성하는가? 근대사회에서 약자 보호를 위한 이기(利器)가 돼야 할 법은, 왜 대한민국에서 한상균이나 이석기와 같은 양심수들을 양산하는 흉기(凶器)로 둔갑했는가? 왜 형식적 민주화가 시작된 지 거의 30년 가까이 된 시점에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구사대의 폭력에 시달리고, 알바 노동자들이 “임금 떼여도 신고하지 않는 게 공동체 정신”과 같은, 못 믿을 정도의 오만하고 폭력적인 훈계를 법률가(!) 출신의 국회의원으로부터 들어야 하는가? 왜 갑질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만능 코드가 됐는가? 갑질의 뿌리를 이해하자면 한국 근대국가의 역사와 한국 자본의 특징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근대국가는 식민화 이후로부터 외삽성이 강했다. 아래로부터의 합의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폭력으로 만들어진 국가였다. 식민지국가는 비록 국내 지주층이나 일부 상인, 관료층을 성공적으로 포섭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외부의 힘, 즉 일본군의 총칼로 유지됐다. 한데 남한이라는 신생국가의 외삽성은 같은 친미 독재정권 중에서도 특기할 만했다. 사실상 미국의 힘으로 성립된 이승만 정권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돈으로 유지됐다. 1945~61년 미국이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국에 투입한 원조액은 약 31억달러로, 아프리카 전체에 쏟아부은 원조와 맞먹을 정도의 액수였다.
물론 이 원조는 자선은 아니었다. 그 유지비용의 약 58%를 미국이 조달한 이승만 시대의 60만 한국군 대군은 사실상 동북아에서 미군의 보조병력 역할을 했으며 박정희 집권기에 넘어가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총알받이로 이용돼야 됐다. 미군기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정부에 치외법권의 영토다. 그러나 기지와 보조병력을 제공한 대가로 한국 정부는 원조분배권을 독점하여 미국이라는 ‘슈퍼갑’ 그늘 아래에서 일반인뿐만 아니라 자본 위에도 군림하는 ‘갑’이 됐다. 박정희 시절에 원조가 차관 등으로 대체됐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의 힘으로 유지되고 국외자금을 독점적으로 배분하면서 사회 위에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정부의 위상은 그대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초대형 갑질은 당연지사였다. 또 미국 자금이 들어오는 원천적 이유는 반공과 냉전적 대립이었던 만큼 특히 좌파민족주의적 경향의 운동을 분쇄하는 것은 한국 심층국가(Deep State: 국가 특수보안기관들의 총칭)의 존재 이유처럼 되고 말았다.
1980년 말기의 형식적 민주화로 재벌들이 국가만큼이나 그 이상의 갑이 됐다. 그러나 이들 기업이 ‘재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기술혁신도 ‘상재’(商才)도 아니고 바로 국가와의 ‘특수’ 관계와 특혜금융 등이었다. 국가와 유착돼가면서 재벌들도 군사정권의 병영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공장을 군부대처럼 운영하는 등 독재국가와 닮아갔다. 또 하나의 자본축적 원천은 바로 임금착취와, 핵심부(구미권과 일본)에서 유해성 등으로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산업부문들을 한국 기업만의 틈새로 가꾸는 것이었다.
1987년 대투쟁 이후로 민주노조를 갖게 된 직영공장의 정규직들을 더 이상 초과착취할 수 없게 되자 임금착취의 중심은 점차 하도급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등으로 옮겨졌다. 유해성 물질 생산으로 자본축적이 이루어진 가장 대표적인 부문은, 현재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등이 74%의 기록적인 세계적 점유율을 갖고 있는 반도체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 쓰이는 EGE(에틸렌, 글리콜, 에테르) 등 독성물질들이 노동자 건강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가 알려지고 미국의 생산업체들이 노동자 집단소송에 직면하자 반도체 생산의 중심은 한국으로 옮겨지게 됐다. 한국 반도체공장 생산직의 대부분은 무노조 기업에서 일하기에 집단소송의 위험이 훨씬 더 낮을 것이라는 포석이었다. 노조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한상균 위원장 같은 활동가들을 구속시키는 한국 자본과 국가의 갑질에 그런 차원에서 경제적 의미가 상당히 있다. 노조가 아예 없거나 위축돼 있어야 한국 자본의 수익모델이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고급관료와 재벌가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배연합에서 또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바로 법조다. 검사와 판사, 고수익 변호사들은 고급관료나 재벌 대주주 내지 재벌 임원들과 혼맥을 맺고 이웃에서 살고 같이 골프 치러 다니고 아이들을 같은 학교·학원에 보낸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의 손을 빌려 한상균이나 이석기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한국 국가·자본으로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배연합의 너무나 가시적인, 대대적인 갑질은, 수많은 중소기업인이나 심지어 돈이 있는 개인 소비자들에게도 하나의 롤모델이 된다. 삼성 반도체·엘시디(LCD) 직업병 피해자 중 79명이나 사망해도 공장이 별다른 법적 문제 없이 계속 돌아갈 수 있다면, 알바의 임금을 체불하고 대학원생에게 대필을 강요해도 무엇이 무섭겠는가? 큰 도둑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작은 도둑들도 그 흉내를 내게 돼 있다.
외삽성이 강하고 사회 위에서 군림하는 폭력적 국가와 독점기업들의 배타적 지배는 갑질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낳았다. 이 악순환을 끊는 유일한 방법은 약자의 조직화와 갑질에의 집단적 저항이다. 알바 임금 체불이 당연하다는 막말을 해대는 국회의원의 낙선을 보장할 만큼 알바 조직이 위풍당당하다면 헬조선이 그래도 조금 더 살만한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한겨레 17.8.8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다른 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추구권 확장 가능성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동성결혼은커녕 시민결합 등 동성커플의 그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선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을 배제했다. 결국 ‘나중에’는 다시금 ‘나중에’로 남을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아무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리란 것이다.
아홉 사람 중 한 명은 왼손잡이라고 한다. 선택이 아닌 자연의 이치다. 다수인 오른손잡이가 ‘바른(=영어의 right, 프랑스어의 droite) 손’을 가진 사람일 때, 왼손잡이는 ‘틀린’ 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수와 소수의 관계가 서로 ‘다른’ 관계가 아닌 바름/틀림, 정상/비정상의 관계로 치환될 때, 다수는 다수에 속하는 것만으로 바르고 정상적인 자리에 설 수 있으므로 소수로 하여금 틀리고 비정상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작용한다.
소수자를 어두운 곳에 밀어넣고 어둡다고 비난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사회 구성원은 이미 옳고/그름, 정상/비정상으로 자리매김되었으므로 자기성숙의 모색과 실천에서 멀어지게 된다. 선거민주주의 아래 정치는 ‘다수의 횡포’에서 자유롭기 어려운데, 과학과 인권법이 시민사회와 정치에 부단히 발언해야 하는 이유다.
두 손을 바른손과 왼손으로 구분한 인류사에서 소수에 속하기 때문에 차별과 배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사회에 따라 적게는 4%, 많게는 12%(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이 열려 있는 유럽에서 소개된 수치)까지 비율이 나오는 성소수자들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이라는 시민의 당연한 권리를 획득하기까지는 실로 지난하고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인권법의 진전과 과학의 발전이 시민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주어 이룬 변화다. 21세기는 성소수자들에게 해방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아무리 부정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며 이미 지구촌 곳곳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아일랜드는 가톨릭 전통이 강한 나라인데, 인도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오 버라드커가 서른여덟살에 중도우파 정권의 총리가 되었는데 그는 성소수자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에는 과학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소수자들이 그렇게 태어난 존재임을, 그래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도 과학이 역할을 할 수 있다.(나로선 과학의 힘을 꼭 빌려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성애자인 나에게 동성애를 강요한다고 가정할 때 그 불가능성을 성소수자의 자리에서 역지사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튼 과학자의 압도적 다수(97%)가 진화론에 찬성하는데도 일반인의 21%만이 지지하는(대니얼 A. 벨의 <차이나 모델>) 미국도 2015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지난 5월24일 대만 헌법재판소는 동성간 결혼 금지를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함으로써 28살 청년 시절부터 59살이 되기까지 31년 동안 동성결혼권을 위해 싸워온 치자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만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대만 의회에 2년 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도록 민법 수정을 요구했고 만약 2년 내 수정하지 않을 경우 동성결혼을 유효로 하는 등재를 법원이 직접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치자웨이의 변호사는 “재판관들도 시대 분위기에 민감했으며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재판관들은 결정문에서 이 부당성에 관해 특히 강조했다”며 이 재판에 임한 헌법재판관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권을 갖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법은 개인의 결혼권과 평등권을 옹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 동성결혼권은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다. 가장 앞선 톨레랑스의 나라답게 네덜란드가 가장 앞서 2001년에 동성결혼권을 법제화한 뒤 벨기에, 스페인, 캐나다, 프랑스 등이 뒤를 이었고, 신앙인들에게서 종교세를 걷는 독일도 지난 6월30일 유럽연합 국가로는 열두번째로 동성결혼권을 합법화했다. 독일 의회는 단 40분 만에 찬성 393표, 반대 226표로 동성결혼권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사민당, 녹색당, 좌파당이 당론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고, 보수연합인 기민당-기사당은 자유표결에 따라 304명 중 7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법안 의결과 관련하여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특출한 정치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법안 상정에 앞장선 그는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독일 헌법 조문을 빙자하여 반대표를 던졌는데 동성커플의 입양권에는 찬성한다는 모순된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 동성커플은 2001년부터 ‘삶의 동반’ 계약에 따라 ‘시민결합’권이 이미 있으므로 동성커플의 입양권에 찬성한다는 것은 동성결혼권에 찬성한다는 것과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이 시민결합 형태의 동거권에 머물지 않고 결혼권을 획득하여 아이를 기르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입양권을 갖기까지 “부-모-자식”의 가족구성을 통해서만 아이를 잘 기를 수 있다는 기존의 사회통념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에 관한 학자들의 결론은 명료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이 아니라 사랑을 받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이제 국내로 시선을 돌려보자. 나 같은 관심자의 눈에 띈 것은 문재인 정권의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2012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 개신교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도 동성애, 동성혼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했던 김진표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따르면, 그 이유가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긴 2016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신년하례회에서 “남성 동성애자 간의 성접촉이 에이즈의 주 매개체”라고 주장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말했던 이혜훈씨가 자유한국당도 아닌, 합리적 보수를 표방한 ‘바른정당’의 대표로 있는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본디 소란스러운 것이며 사회적 갈등이 공론의 장에서 표출, 토론되고 조정되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차별을 금지하는 것, 이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아닌가.
남들은 차별을 넘어 다른 토론을 하고 있다. 가령 남성커플에게 자기(들)의 정자로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가질 권리를 갖게 할 것인가. 이때 프랑스처럼 대리모를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법화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이나 캐나다, 그리스, 미국의 몇몇 주처럼 대가나 보상을 전제로 쌍방 간에 자유롭게 계약한 경우 합법으로 인정할 것인가. 또 여성커플이나 독신여성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권리를 갖게 할 것인가. 이때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뿌리를 알고자 할 때 정자 제공자의 신분을 알려주어야 할 것인가. 또 점점 늦어지는 결혼 연령 등의 이유로 아이를 갖기 어렵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젊은 여성에게 미리 난자를 냉동 보관할 권리를 갖게 할 것인가. 또 이 모든 경우에 비용을 공공의료보험으로 충당할 것인가 등….
이처럼 다른 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추구권 확장 가능성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동성결혼은커녕 시민결합 등 동성커플의 그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선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을 배제했다. 결국 ‘나중에’는 다시금 ‘나중에’로 남을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그 나중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며 아무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리란 것이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17.7.27
최저임금 타령
헌법 제32조 제1항 제2문은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 최저임금법은 “저임금근로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여 (…)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라고 법 제정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최저임금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이다.
2018년 최저임금이 2017년의 6470원에 견줘 16.4% 올랐다. 최저임금의 소득효과는 확실하다. 사회적 합의를 우리가 지킨다면 최저임금 적용 대상 노동자 약 200만명의 임금이 시간당 총 21억6000만원 오를 테니 말이다. 8시간 노동, 한 달이면 4000억원에 이른다.
경제성장률의 5배가 넘는 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경제원론에 나오는 수요공급 법칙에 따르면 고용이 대폭 줄어 오히려 노동자들의 수입이 줄어들 것 같기도 하다(노동공급의 가격탄력성). 아니나 다를까,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을 우려하는 분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렇게 많은 경제학자들과 기업 단체들이 진작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위했다면 현재는 중소기업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능히 짐작된 일, 2004년 주 5일제 근무가 시작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촛불의 주역 중 하나였던 유학파 40대 지식인들이 자못 날카롭게 예의 수급법칙을 변주해서 SNS상의 관심을 모으더니 급기야 박근혜·최순실 청문회에서 직설로 세상을 후련하게 했던 민주당의 이론가도 이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과연 최저임금의 정책 효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한국에서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효과에 관해 연구한 논문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체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 세계의 연구를 모아 놔도 압도적으로 많은 논문은 고용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첫째, 편의점이나 커피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들이 최저임금 16.4% 올랐으니 경제학의 노동공급곡선을 따라 돈 더 벌려고 노동시간을 늘릴까? 그 반대로 등록금과 월세를 더 적은 시간에 확보할 수 있으니 노동시간을 줄여서 남는 시간에 공부를 더 할까? 이들은 임금이 대폭 오르면 노동시간을 줄여서 다른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둘째, 분명 영세 자영업자들은 확실히 고민에 빠질 텐데 혹시 영업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대응하고 싶지는 않을까? 한국의 24시간 영업은 경제학 논리로는 성립할 수 없다. 심야시간에 해장국 몇 그릇, 잡화 몇 개를 더 팔아야 아르바이트 학생의 월급을 주고도 수익을 올릴 수 있을까? 분명 손해일 텐데도 그런 행동을 한다면 필시 자유로운 선택을 한 게 아니다. 이런 반경제적 일을 원하는 사람은 오직 하루의 전체 매출액에 따라 자신의 이익이 결정되는 집단일 테다. 맞다. 프랜차이저, 즉 갑들이 바로 그들이다.
셋째, 짐짓 거시경제를 걱정하지 마시라. 영업시간을 8시간으로 줄인다고 소비재 판매가 3분의 1로 줄지는 않는다. 줄어든다 해도 소폭일 것이다. 개인과 사회 모두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경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면 그건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는 증거다. 나 혼자 영업시간을 줄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때문에 바로 국가, 아니 시민이 국가의 이름으로 개입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이 최우선의 정책이라면 영업시간 단축은 이를 보완할 또 하나의 정책이다. 후자는 그저 편의점주 등 프랜차이지와 제조업 분야 하청업체, 한마디로 을들의 단결권만 보장해도 해결될 일이다.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는 데는 확실히 불편해질 것이다. 규칙적으로 제 시간에 먹고, 또 사면 그만이다. 서로를 고려하는 사회규범이 확립되면 굳이 매년 최저임금을 발표하지 않아도 된다. 음식점 매상은 오히려 늘어날지도 모른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여유가 조금 생긴 분들이야말로 영세자영업의 단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과 2006년에 최저임금이 이번과 비슷하게 16.8%, 13.1% 올랐는데 그 다음 몇 해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최저임금 인상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분배 이전에, 시장에서 임금 몫이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 중에 최저임금을 첫 번째로 꼽지 않는 학자도 없다. 정부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은 내수의 증가가 생산과 투자를 촉발하는 첫 단계일 뿐이다. 예컨대 녹색 인프라를 구축하는 대대적 투자계획 없이 소비촉진만으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다./ 정태인 |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경향 17.7.24
문재인 정부의 케인스주의를 환영한다
실업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와 혁신을 통한 자본주의 발전을 말한 슘페터의 주장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재정정책 때문이다.
은 해 태어난 케인스와 슘페터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경제학자였지만 관심사는 크게 달랐다. 케인스는 실업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에 주목한 반면, 슘페터는 혁신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연구했다. 대공황 시기의 대세는 역시 케인스여서 슘페터가 가르치던 하버드 대학 학생들은 그의 책은 읽지 않고 케인스를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케인스에게 반감이 많았던 것일까. 슘페터는 케인스의 경제학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케인스는 자식이 없어서 경제철학이 단기적’이라고 쓰기도 했다.
시대를 뛰어넘어 이들의 이름이 한국에서 회자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불러낸 이는 물론 케인스다. 새 정부는 케인스주의를 따라 재정지출을 매년 경상 GDP 성장률보다 높은 7%씩 늘리겠다고 선언했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추경을 추진하고 있다. 소득 주도 성장은 더욱 진보적인 포스트케인스주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전 정부들은 정부 부채 비율이 낮고 불경기인데도 재정정책에는 소극적이었다. 심각한 불평등이 성장에도 나쁘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부의 선명한 케인스주의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일각에서는 ‘창조적 파괴’ 및 ‘기업가의 역할’을 강조한 슘페터를 불러내어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케인스주의 수요관리나 소득 주도 성장보다 ‘공급 측면’의 혁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혁신의 중요성을 부정할 이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기업의 자유만 강조하거나 규제 완화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에는 주의해야 한다. 아이폰 기술의 대부분이 미국 정부 지원 연구개발 활동에서 나왔듯이 혁신에서 ‘기업가적 국가’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신(新)슘페터주의자들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정부가 효과적인 국가적 혁신체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임금 상승과 분배의 개선이 수요를 증가시키고 투자를 자극해 생산성도 높일 수 있으니, 소득 주도 성장 자체가 혁신의 중요한 기반이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기득권을 혁파하고 지대 추구 대신 기업가의 혁신에 보상하는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케인스를 불러낸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보수적인 거시경제학에 밀려 주류의 자리에서 물러났던 케인스주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에서 귀환하고 있다. 2012년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럽의 긴축정책에 문제가 많았다고 인정하고 재정 확장을 지지했다. 미국 트럼프 정부조차 적극적 재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비판도 존재한다. 보수파는 하이에크를 따라 재정 긴축과 규제 완화 등의 구조개혁을 주장하고, 일부 급진 좌파는 마르크스를 빌려 케인스주의가 이윤율과 투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케인스주의자들은 경기부양 없는 구조개혁이 오히려 경기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연구들은 재정정책, 특히 공공투자가 경제성장에 효과적이며 높은 정부 부채 비율이 성장률을 떨어뜨린다는 증거도 없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최근 생산성 상승이 정체하고 있는 것도 수요 부진으로 인한 투자의 부족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제시된다. 이렇게 총수요와 총공급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거시경제학의 새로운 깨달음이다. 실제로 심각한 불황이 장기적으로 공급 측면에도 영향을 미쳐서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리는 ‘이력효과’가 확인되고 있다.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공공부문 개혁 이뤄져야 성공 가능해
이러한 거시경제학의 대전환을 고려하면 한국에서도 케인스주의는 올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성공을 위해 부동산 가격의 안정과 공공부문의 개혁 등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경기변동과 장기적 성장의 핵심인 투자를 촉진하고 관리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현대의 케인스주의에서는 간과되었지만, 케인스는 정부가 투자를 직접 계획하고 투자의 사회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정부가 구조조정과 산업정책의 큰 그림을 그려내고 신기술 부문을 포함해 생산적 투자를 촉진하는 것은 혁신을 추동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20세기의 케인스와 슘페터는 이론적 지향은 다르지만 화폐와 투자에 대한 관점은 비슷했고, 두 사람 모두 당시의 낡은 경제학을 넘어서기 위해 힘썼다. 21세기 한국에는 케인스의 통찰을 실천하며 슘페터의 혜안도 잊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512호 17.7.14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대한민국의 저주, 군사주의!
국방이 흔히 ‘의무’가 될 수는 있어도 남의 침략 전쟁에 가는 것까지 국제 인권법상 ‘의무’일 리가 없다. 한데 국내에서는 이 끔찍한 국가 폭력을 통상적으로 ‘나라의 부름’이라고 일컫고 당연시한다. 사실, 식민주의적 침략을 저지른 과거도 없는 아시아 국가치고 대한민국의 해외파병 빈도는 꽤나 높다.
탈군사화야말로 국정의 핵심과제로 부상해야 한다. 탈군사화를 이루자면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군복 입고 해병대 훈련을 받는 초등학교 꼬마들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다는 점과, 대한민국이 미군 무기상들에게 건네는 돈의 절반이라도 남북 경협에 썼다면 이미 남북평화공존의 시대에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인지해야 한다.
나는 이번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추념사를 듣고 일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심지어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문 대통령 본인은, 베트남 파병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세대의 일원이다. 문 대통령 본인이 잘 알듯이, 베트남에 파병됐던 군인들에게는 “나라의 부름에 응답”하는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징병되어 침략 전쟁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사실, 그 파병의 강제성이야말로 그들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만들기도 했다. 침략의 주범국인 미국도 당시에 징병제를 운영했지만, 거기에서는 그나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인정되기는 했다. 병역거부가 불허되면 캐나다로 망명 가서 난민지위를 얻을 수라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 재벌의 이득을 위해서 미국의 침략에 끌려가야 했던 한국 청년들에게는 그런 선택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그러나 “폭염과 정글 속에서” 이루어졌던 학살과 성범죄를 살짝 빼고, 노동자의 임금을 맨날 체불하면서 전쟁 폭리를 누렸던 재벌들의 치부를 ‘조국경제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판적 역사의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자국민을 남의 침략에 강제로 보내 돈을 벌었다는 것이 과연 자랑스럽기만 한 당연지사로 언급될 수 있는가?
문 대통령의 역사인식, 혹은 역사인식다운 역사인식의 부재는 한국 사회 전체의 한 가지 문제와 직결돼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자신의 신념·의사와 무관하게 남자라면 누구나 무조건 가야 하는 커다란 규모의 징병제 군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이 요구만 하면 이 군대는 언제 어디든 해외로 파병될 자세가 돼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된다. 외부자 입장에서 본다면, 베트남 파병 시절에 한국 젊은이들이 거절할 권리도 없이 미국이 벌이는 침략의 현장에 끌려가 거기에서 그 제국이 ‘적’으로 규정한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자신들의 몸도 총탄에 노출시켜야 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엄청난 규모의 인권침해로 보일 것이다.
국방이 흔히 ‘의무’가 될 수는 있어도 남의 침략 전쟁에 가는 것까지 국제 인권법상 ‘의무’일 리가 없다. 한데 국내에서는 이 끔찍한 국가 폭력을 통상적으로 ‘나라의 부름’이라고 일컫고 당연시한다. 사실, 식민주의적 침략을 저지른 과거가 없는 아시아 국가치고 대한민국의 해외파병 빈도는 꽤나 높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만 해도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등에 파병했다. 미국이 침략하거나 미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곳으로 한국군이 가는 것은 과연 당연한 것인가? 그런데 한국의 자유주의자들도 한국군의 대외활동을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
군사주의가 이토록 내면화된 현실적인 원인은, 한국이 그만큼 장기적으로 군사화돼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민 1천명당 현역 군인의 수는, 이미 반세기 넘게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한국(14명)이 최근에 그런 전쟁을 치른 아르메니아(16명)에 가깝다.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돼 있는 이스라엘(25명)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계 19위 정도는 된다. 참고로, 지금 자국 영토에서 쿠르드 민병대와 싸우는 한편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하고 있는 터키(8명)보다도 한국에서의 인구 1천명당 현역 군인 수는 거의 2배나 높다. 물론 이처럼 군인의 수가 많을 수 있는 것은, 병사들이 받는 돈이 ‘월급’이라기보다는 속칭 ‘열정페이’에 더 가까워 ‘공짜 인력’과 마찬가지로 마구 징병하여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의 계획대로 내년 병장 월급이 40만원까지 올라도 이는 최저임금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한데 병사에게 돌아가는 몫은 비교적 적어도, 무기수입 등의 관계로 한국은 세계 굴지의 군사예산을 운영한다. 한국의 국민총생산은 독일의 절반도 안 되지만, 세계 10위나 되는 한국의 군사예산은 세계 9위인 독일 군사예산의 90%나 된다. 2017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의 2.4%나 차지하는 한국 군사예산의 국내 경제상의 상대적 비중은 세계적인 군사 패권주의의 본산인 미국(3.2%)보다야 낮지만, 어느 유럽 국가나 일본·중국·인도보다 높다. 참고로, 한국에서 늘 “위협”으로 거론되는 북한의 국민총생산액(한국 돈으로 약 25조원 추정)은, 현재 예상되는 한국의 내년 국방예산(43조원 정도)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숫자다. 만약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누가 누구를 위협하는 것일까?
군사화는 무엇보다 막대한 국부 유출을 의미한다. 박근혜의 실정이 한창이었던 2014년, 한국은 “세계 최대의 무기수입국”이 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해에 주로 미국 무기 생산자들에게 유출된 한국 아줌마, 아저씨들의 혈세는 무려 9조원에 이른다. 일례로 예컨대 2017년 청년 일자리 예산은 불과 2조7천억원이었다. 구직 포기자와 가족에 얹혀사는 청년들까지 포함해서 실질적인 청년실업률이 30% 가까이에 달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청년 일자리 예산보다 3배 이상 되는 돈을 미국의 “죽음의 상인”들에게 건네주는 게 너무나 큰 사치(?)가 아닌가? 한데 예산이 축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다수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대통령의 연설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통념’상으로 강제로 징집된 군인들을 외국의 침략 전쟁에 보내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은 국가 폭력이나 인권침해보다는 ‘조국경제 부흥’의 원천이나 ‘애국’으로 인식된다. 그런 인식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몇 년 전의 익사 사고로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각종 ‘해병대 극기훈련 캠프’는 지금도 전국에서 성업 중이다. 2002~13년 기간만 해도 이런 캠프를 거쳐 간 초중고생은 무려 100만명이나 된다. 그런 캠프에서 배울 수 있는 ‘인생 철학’은 과연 어떤 것인가? 군대는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다, 윗사람의 명령을 가장 정확하고 가장 빨리 수행한 사람은 성공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낙오된다, 복종과 자신에 대한 강제는 살길이고 항명은 반역과 낙오다 등등의 처세가 아닌가.
거기에다가 텔레비전에서 군복을 입고 행복하게 미소 짓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자꾸 보고, 또 극우부터 온건 좌파까지 모든 대선후보들이 하나같이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운 모습을 보다 보면, 평균적 대한민국 사람은 징병제 군대를 당연지사로 받아들이게 되고 “조국경제 부흥”을 위한 해외 침략 동참과 전시 폭리 행각을 ‘자랑스러운 과거’로 받아들인다. 물론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군사예산은 복지예산의 억제를 의미하여 우리 선남선녀 대부분의 경제적·계급적 이해와 사실상 충돌된다. 한데 군사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개인은 과연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바로 이해하기가 쉬울까?
우리가 행복해지자면 ‘안보’보다 탈군사화야말로 국정의 핵심과제로 부상해야 한다. 탈군사화를 이루자면 한국 사회는 먼저 몇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 군복 입고 해병대 훈련을 받는 초등학교 꼬마들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볼 수 있다는 점과,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의 내면화는 개인과 사회를 황폐화시킨다는 점, 그리고 대한민국이 미군 무기상들에게 건네는 돈의 절반이라도 남북 경협에 썼다면 우리가 이미 남북평화공존의 시대에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인지해야 한다. ‘안보위기’?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의 원인들은 복잡하지만, 한국의 군사주의적 행보도 그 원인 중 하나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북 상호 군축과 군대·군비 축소 등 평화의 길로 우리부터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군사주의의 저주를 풀고 나라다운 나라, 강제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군사력이 아닌 평화력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다!/ 한겨레 17.6.3
지연된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2017년 정권교체는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사필귀정이자, 5년 전 했어야 할 심판의 지연이다. 예외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개혁의 큰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난 뒤 그 승리를 명실상부하게 체화한 ‘국민의 정부’는 10년이 지난 1997년에야 들어섰다. 1987년 대선에서 6월 항쟁의 열기를 이어받은 김대중(평화민주당)·김영삼(통일민주당) 후보가 받은 득표율을 합치면 쿠데타 세력인 노태우(민주정의당) 후보보다 많았다. 하지만 야권 분열로 그해 선거에 패배했다. 10년 뒤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면서 지연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2017년 정권교체 역시 한국 역사에서 반복되는 ‘지연’ 현상의 하나다. 2012년 대선 전까지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 4대강 사업, 신문방송 겸영 허용 등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업을 추진해 민심과 이반된 상태였다. 국민 대다수가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강행하는 행정부 수반은 웬만한 정치적 후진국이 아니면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외 선진국 중에서 거의 유일한 대통령중심제 국가인 한국에서나 가능했던 현상이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50% 미만으로 떨어지면 조기 총선으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재기의 기회를 구걸한다.
민의(民意)에 반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2012년 정권교체의 분위기는 숙성되어 있었다. 당시 유력한 야권 주자가 2명이나 나온 것도 정권교체 분위기를 반영했다. 당시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을 합치면 박근혜 후보를 쉽게 누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른바 “뻘짓만 안 하면 정권교체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야권의 분위기였다. 2012년 선거에서도 집권 여당에 대한 분노는 분출구를 찾지 못했다.
2년 뒤 분노는 더욱 커졌다. 바로 세월호 참사의 비극이 정부 여당의 무능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세월호 참사 두 달 뒤 실시된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정치적 심판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새누리당의 선거 구호가 “한번만 살려주십시오”였겠는가. 그러나 심판은 내려지지 않았다.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하며 국민의 비애는 깊어갔다. 2016년 10월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누적되어온 심판의 에너지가 분출했다. 2017년 정권교체는 경제도 문화도 침체 일로를 걸어온 진짜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사필귀정이자, 5년 전 했어야 할 심판의 지연이다.
ⓒ연합뉴스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태호 최고위원이 재보궐 선거 승리를 축하하며 김무성 대표를 업어주자 최고위원들과 지도부가 환호하며 박수치고 있다. 2015.4.30.
심판은 생각보다 긴 시간차를 두고 온다. 10년, 20년이 걸릴 수도 있고 미얀마처럼 1988년 88항쟁의 호기를 놓치면(1990년 총선 결과를 군부가 부정), 한참 지난 후에야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심판은 반드시 온다. 정치적 사건의 효과는 항상 누적되기 때문이다. 저질 제품을 팔던 기업도 당장 고급 제품을 팔기 시작하면 곧바로 손님들이 돌아오지만, 국민은 잘못된 정책을 폈던 사람이나 집단을 기억하며 단죄하고 싶어 한다. 중요한 점은 혁명이 지연되는 긴 시간에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저마다의 서사를 갖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러닝타임’이 무한대인 하나의 영화이지만 그 줄거리의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세대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폭압의 시간을 견뎌내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러닝타임’이 무한대인 하나의 영화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역사는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역사에만 매몰되면, 우리는 일종의 ‘예외주의’라는 함정에 빠진다. 예외적인 정치사에 따라 예외적인 제도를 갖춰야 한다며 보편 가치들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은 이 같은 예외주의를 자주 이용했다. 예를 들면 분단 상황을 언급하며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 조항을 정당화했다. 대한민국이 천연자원 하나 없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한다며 재벌 중심 경제정책을 정당화했다. 또 분단 상황에 대응하고 국가 주도 경제발전의 신화를 이어 나간다며 대통령중심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예외주의 주장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어떤 변화를 추구하든 그 과정도 중요하다. 과정이 가치에 어긋나면 그 변화는 오래갈 수 없다. 어긋난 가치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외주의에 빠지지 않는, 그래서 이쪽저쪽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발걸음을 새 정부에 기대한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사인 506호 17.5.30
철학을 가진 정부를!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깨어 있는 시민만이 정부를 긴장시키고 민주주의 역진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반민주적 정치집단이 등장하지 않도록 시민들의 감시는 계속되어야 한다.
촛불로 밝힌 시민의식이 대통령 탄핵으로 마감되었다.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 국정 농단이 무혈의 시민혁명으로 귀결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국정 수행의 수준과 행태가 부끄러울 정도였지만 시민 민주주의의 강화라는 점에서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동안 불통과 무능 정치로 인해 본 손해는 계산할 수도 없다. 특히 외교적 소외와 그로 인한 국제적 고립감은 국가 생존의 위기까지 느끼게 하는 상황이다. 북한 선제공격론 등 대한민국의 운명이 강대국의 손에 맡겨진 상황에서 대선 후보자들이 주장하는 공약은 공허하고 한가하게도 느껴진다.
현재 정국 상황으로는 정권교체가 거의 분명할 듯하다. 그렇다면 정권교체와 새 대통령의 선출로 새로운 한국 사회가 세워질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과반에 미달하는 국회 의석수 때문에 정책적 연합 등이 불가피하다. 40석에 불과한 국민의당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의석 상황은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법안을 통해 관철되기 매우 어렵게 할 것이다. 정책적 연합이 불가피하고 대통령의 고집 대신 야당과의 소통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이유이다. 소통은 여론 수렴 외에도 다양한 대안적 선택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정책의 전문성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대통령 주변 인물이 같은 생각을 가진 맹목적 충성파로만 구성될 경우 정치를 망치는 예를 박근혜 정권에서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적폐 청산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 허송세월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무엇이 청산해야 할 적폐이고 우리 사회가 당면한 위기이며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중요한 일인지를 판별하는 혜안과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현재 대통령 후보들이 최우선으로 꼽는 정책은 경제 살리기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경제 최우선주의가 과연 우리 삶을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OECD 35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10위대이지만 행복지수 순위는 33위다. 자살률은 1위이며 출산율은 최하위다. 경제 우선주의가 낳은 사회지표로서 자랑할 것이 없다. 원래 목표 설정 자체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경제발전이 아니라 국가주의적 사고에 젖은 성장 제일주의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국가나 대기업이 잘되면 사회 구성원도 행복해질 것이라는 사고가 빚은 결과다. 경제성장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대통령 후보나 참모들이 그러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후보들은 사회가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경제와 안보만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경제가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고, 안보를 위해 외교와 국방정책 그리고 남북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겠다고 주장하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무조건적 경제 우선주의는 구태 정치의 반복일 뿐
외교·안보 정책과 남북관계, 복지, 환경과 같은 핵심적 정책에서 새로운 정치 지향점을 제시해야 한다. 무조건적 경제 우선주의는 구태 정치의 반복이고 ‘헬조선’이라는 자조는 계속될 것이다. 모든 문제를 돈과 연결해서 판단하는 물질 제일주의가 낳은 현상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적폐이다. 성공 제일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병리현상을 지난 수십 년간 보아왔다. 이제는 인간 중심의 사고, 다음 세대가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도 생각하는 철학을 가진 정치를 하여야 한다.
새 대통령은 물질 가치를 앞세우는 속물 정치인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최우선에 두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로 정부를 구성하여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활성화와 기후변화에 대비한다는 미명 아래 환경 파괴와 토건 중심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다가 강산을 오염시키고 떠났다. 박근혜 정부는 자신의 불통과 비선 실세 중심의 폐쇄적 정치를 하다가 파면당했다. 반면교사로 삼을 현재의 역사이다.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깨어 있는 시민만이 정부를 긴장시키고 민주주의의 역진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는 반민주적 정치집단이 등장하지 않도록 시민들의 감시가 앞으로도 필요한 이유이다.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 시사인 500호 17.4.20
적폐 대 통합? ‘장미대선’의 독가시
2017년 적폐청산은 특정 후보의 공약일 수 없다
적폐청산 대 국민통합. 이른바 ‘장미대선’의 대립점이다. 적폐청산은 나라를 분열로 이끄는 ‘종북 좌파’의 주장이라는 극단적 선동부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라 하는 말’이라는 ‘학문적 주장’까지 곰비임비 나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법적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면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적폐청산을 가장 강조해온 후보마저 ‘외연 확장’이 필요하다는 참모들의 권고를 받아 ‘자제’에 들어갔다. 물론, 선거진영의 고충을 모르지 않는다. 촛불을 매도한 세력의 ‘전략적지지’로 선거판의 경계선이 흐려진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어떤 ‘언어’를 쓰는가는 현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좌우할 수 있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적폐’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이고, ‘청산’은 ‘어떤 일이나 부정적인 요소 따위를 마무리 함’을 이른다. 무슨 종북이나 좌파 언어가 아니다.
두루 알다시피 이명박을 이은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대한민국은 크게 망가졌다. 본란을 통해 대통령 박근혜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로 민생경제는 위기를 맞았고, 민주주의는 후퇴했으며, 남북관계는 파탄을 맞았다.
▲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대전·충남 합동연설회에서 웃음을 보이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나라가 망가질 때 그 현실을 진단하고 대책을 촉구해야 할 민주주의의 중요한 제도가 바로 언론, 저널리즘이다. 하지만 그 일을 해야 마땅한 두 공영방송 KBS와 MBC를 보라. KBS이사장 이인호는 박근혜에게 부닐며 ‘비뚤어진 역사관’을 바로세워야한다고 부르댔던 교수다. 제 조부의 명백한 친일행위에 성찰은커녕 ‘내 조부가 친일파라면 일제시대 모든 중산층이 친일파’라는 해괴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MBC 이사장 고영주는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사뭇 당당하게 몰아세울 정도로 ‘지적 용기’가 충만하다. 이인호와 고영주 따위가 대한민국의 두 공영방송을 지금까지 아무 부끄럼 없이 맡고 있는 것은 촛불에 대한 조롱이전에 국가의 품격 문제다. 물론, 공영방송만이 아니다. SBS 출신들이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홍보수석’을 릴레이 경기하듯 맡아온 사실도 짚을 필요가 있다. 과연 그들이 온전한 언론으로 존재해왔던가? 아니다. 언론기관 자체가 적폐의 주요 축이었다.
기실 언론계만이 아니다. 학문적 깊이가 천박한 교수들이 박근혜에게 ‘발탁’되어 행정부와 입법부는 물론, 국책연구기관 곳곳에 포진해왔다. 뒤늦게 대학에 몸담고 보니 언론계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학계도 썩어가고 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 해결은 진보세력만의 요구일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하려면 반드시 구현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렇다. 2017년 오늘, 적폐청산은 특정 후보의 공약일 수 없다. 적폐청산을 통한 새로운 통합이 촛불민중의 준엄한 요구다.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은 대립점이 아니다. 국민통합의 선행과제가 적폐청산이다. 적폐청산 없는 국민통합은 맹목이고, 국민통합 없는 적폐청산은 공허하다.
바로 그 점에서 5월 대선을 ‘장미 대선’으로 불러대는 언론의 언어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오월은 장미를 만끽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유럽에서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들이 당선자에게 장미를 건네는 관습이 있지만, 그 또한 한국의 정치현실 또는 정서와 맞지 않다. 장미대선이라는 정치 언어는 19대 대선의 역사적 성격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시대적 과제를 몽롱케 하는 ‘독가시’다. 보수나 진보의 시각차이로 볼 문제가 아니다. 대선을 본디 예정된 2017년 12월이 아니라 5월에 치르는 까닭만 짚어도 답은 자명하다.
19대 대선은 ‘촛불 대선’이다. 촛불이 시작할 때 ‘세계사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칼럼을 썼지만, ‘촛불혁명’이 갈 길은 아직 멀다. 현 단계에선 촛불의 요구와 가장 근접한 후보가 당선돼야 순리이고, 당선 뒤에는 그가 촛불의 뜻을 구현해나가도록 견인해가야 옳다. ‘사드 배치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결정할 일’이라는 미국 정부의 논평이 더없이 모멸스러운 날 쓴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6.4.18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군함외교, 142년 만에 돌아오다
만에 하나 평양에 델리나 베이징처럼 미 대사관과 미 기업들의 지점들이 생기고 투자가 이루어지고 평양 지도층의 자녀들이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되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은 과연 여전히 ‘북폭’의 대상으로 거론될까? 물론 아닐 것이다.
‘북한 위협’의 유령을 이용하면서 한국을 영구적으로 그 손아귀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 당국자들의 망상일 뿐이다. 결국 사드 같은, 한국인에게 해만 되는 미국의 불장난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미국과 거리를 두고 지역안보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요즘 러시아에 있는 가족한테서 자주 연락을 받는다. 한반도가 군사적 위기에 휩싸여 있는데, 당신과 인연이 있는 한국인들이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걱정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뉴스’가 있다. 미국의 칼빈슨 핵 항공모함 전단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원동지역이 한반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기도 한 러시아의 공론장이나 미디어 공간을 가차없이 강타했다. 러시아 국회 상원의 국방안보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의 북폭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언급을 하고, 러시아 공군이 전투대비태세를 갖추었다는 뉴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한반도’는 절로 인구에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국내에서는 덜 체감될지 모르지만, 한반도 바깥에서는 시리아와 함께 한반도는 세계적 안보 긴장의 또 하나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로 비치고 있다.
미국은 핵 항공모함을 한반도에 재배치하는 이유로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내세운다. 특히 자주 거론하는 것은, 북한이 몇년 만에 미국 본토까지 타격이 가능하고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단계에 다다랐을 가능성이다. 미국 주류 매체의 선전대로 북한을 바로 악마의 왕국쯤으로 보는 사람들이야 이런 가능성을 위협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사고하기만 하면 그런 가능성 자체는 꼭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중국이 현재 둥펑-41호라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해서, 중국 연안에 바로 핵 항공모함을 보내 ‘선제공격’ 등을 들먹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중국이 그런 미사일을 보유한다고 해서 지구를 파괴시킬 대미 핵전쟁을 먼저 시작할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 극우들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인도가 지금 개발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인 아그니-6호의 사정거리는 1만2천 킬로미터 정도 될 계획인데, 인도를 서방세계에서 그 누구도 “위협”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이나 인도가 외교, 무역, 투자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다고 해도 미국 극우들도 이를 ‘선제공격’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북한을 - 비록 북한이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국은 아니더라도 -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도대체 왜 불가능할까? 만에 하나 평양에 델리나 베이징처럼 미 대사관과 미 기업들의 지점들이 생기고 투자가 이루어지고 평양 지도층의 자녀들이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되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은 과연 여전히 ‘북폭’의 대상으로 거론될까? 물론 아닐 것이다.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장이라도 대응해야 할 ‘위협’으로는 분명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매우 상식적인 질문을 해보자. 미국이 왜 하필이면 대북 수교와 전반적 관계 정상화를 이렇게도 기피하는가? 인도·파키스탄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면서 왜 북한에만 하필이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선 핵 포기’를 강요하여 교섭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대북 관계 정상화 대신에 상당한 비용부터 드는 전쟁 연습이나 항공모함 파견을 굳이 하는 속셈은 무엇인가?
속셈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가장 뻔한 것은, 사실상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즉 일본과 남한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권역에서 미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일 및 주한 미군 기지의 존속, 그리고 더 포괄적으로는 지속적 군비 증가를 위한 하나의 구실로 ‘북한 위협’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억눌러 동북아에서의 패권을 고수하기 위해 군대를 계속 주둔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북한 위협”을 들먹이는 것이 훨씬 더 외교적인 방법일 것이다. 우선 미국 유권자 설득에도 훨씬 더 유효하다. 솔직히 “일본과 남한이라는 미국 군사보호령들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까놓고 이야기하면 “왜 굳이 미국 납세자의 돈으로 미국 본토와 인연도 없는 동북아에서 패권주의 놀음을 벌여야 하느냐”고 하는 고립주의적인 반발은 반드시 온다. 한데 미국인의 의식 속에서 이미 극도로 악마화돼 있고, 공공연하게 ‘미국의 적 1호’로 인정되는 북한의 ‘미 본토 타격 가능 미사일 위협’을 거론하면 그 어떤 고립주의자도 반발하기 힘들 것이다. 미국의 주류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만 세상 소식을 접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이, ‘정신 나간 폭군 김정은’이 곧 미국 본토를 타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정도로 언론들의 악마화 전략은 잘 먹혀들어간다.
그런데 ‘북한 위협’이라는 카드는 단순히 미군 기지 존속과 펜타곤 예산 증액만 겨냥하는 것도 아닐 듯하다. 중국도 미국의 견제 대상이지만, 미국 극우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 중국 편으로 넘어갈지 모를” 한국 국민들도 사실 견제의 대상에 포함된다. 항공모함 한반도 파견의 타이밍은 대단히 절묘하다. ‘태양절’(김일성의 탄생일, 4월15일)에 있을지도 모를 어떤 무기 시험에 맞추어져 있다고 하지만, 바로 한국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보려는 시늉을 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요구에 넘어가 친미 일변도라는 본색을 드러낸 박근혜가 시민에 의해서 쫓겨난 직후이기도 하다. 물론 백악관은 핵 항공모함 파견과 한국 내부 사정 사이의 그 어떤 관계도 언급한 바 없다. 그런데 미국의 여러 극우 매체들은 박근혜 탄핵 인용을 전후해서 “친중국 좌파가 이 틈을 타서 한국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했다. 물론 그 당시 가장 유망해 보였던 대선주자인 문재인은 결코 ‘좌파’가 아니었다. 한데 그는 한때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중국 견제’에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 극우들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안겨준 것 같다.
하지만 항공모함 파견을 포함한 미국 쪽의 위협적 분위기 조성은 곧바로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다른 후보 안철수는 이미 2월부터 사드 배치에 찬성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안철수에게 추격당하기 시작한 문재인마저도 ‘안보’ 코드에 자신의 입장을 맞추어 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그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그가 “북한이 핵 도발을 계속하면 사드 배치를 강행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의 대북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 군함 파견이 이루어지고, 더 강도 높은 대북 도발인 남한에서의 미국 핵무기 재배치까지 언급되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는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문재인도 사실상 사드 배치에 찬성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 위협 분위기 조성은 결국 중국이 아닌 한국까지 견제한 셈이다. 상당수 유권자들의 ‘안보심리’를 자극하여 가장 유망한 대선 후보 두 명에게 안보 보수주의 경쟁을 시킨 것이다. 이제 한때 ‘좌파’로 지목됐던 문재인은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통령,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남북간 대화 가능성까지 희생시키면서 미국에 충성서약을 한다. 결국 그가 이렇게 해서 견제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군함외교는 제국주의의 동의어다. 일제의 조선 침략도 1875년 군함인 운요호(운양호) 침입으로 시작됐다. 그때부터 142년이나 지났지만, 군함을 앞세운 외세의 한반도 내정 개입은 계속되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지금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이 인구에 회자되지만, 사실 시리아에 대한 미사일 공격부터 핵 항공모함 파견까지의 여러 행동으로 한반도 ‘안보 바람’을 불게 만든 미국의 행동이야말로 결과적으로 한국 대선에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데 ‘북한 위협’의 유령을 이용하면서 한국을 영구적으로 그 손아귀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 당국자들의 망상일 뿐이다. 결국 사드 같은, 한국인에게 해만 되는 미국의 불장난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미국과 거리를 두고 지역안보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한겨레 17.4.18
촛불의 힘에만 기대어 개혁할 수 있을까?
2004년 탄핵이 기각된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여대야소라 개혁의 적기였다. 하지만 1년여 뒤 재벌·관료·보수 언론이 좋아할 ‘신자유주의 대개혁’의 길을 갔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10일 오전 11시21분 사무실 안팎에서 “와!” 함성이 솟구쳤다. 만에 하나를 걱정하던 나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뛸 듯한 기쁨은 없었다. “이제부터 정말 시작”이라는 다짐도, 어쩌면 내 스스로를 윽박지르는 것뿐이라는 예단 때문이었을까? 아니, 내 우울은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다.
지난해 11월이 되면서 나는 2004년 촛불 얘기를 꺼냈다. 나이 지긋한 분이라면 누구나 1987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얘기를 한다. 물론 5월에 접어들면 접전 양상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2007년 대선보다 훨씬 큰 차이로 야권 후보가 이길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2004년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가 기각된 날, 그가 차에서 내려 청와대 본관으로 걸어 들어오던 그 장면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동북아 비서관’이었다. “이제 개혁 한번 해보재이!” 지금도 쟁쟁한 그 목소리.
대통령 인기는 치솟았고 국회도 여대야소였으니 개혁의 적기였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뒤 대통령은 느닷없이 대연정을 들고 나와 좌절한 뒤, 그해 가을 한·미 FTA를 결심했다. 재벌, 관료, 보수 언론이 모두 찬성할 만한 ‘신자유주의 대개혁’이라고나 할까?
2005년 경주 공동선언과 그해 9월19일의 베이징 공동성명으로 한껏 고조됐던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는, 참여정부가 미국의 대중국 군사적 포위망(전략적 유연성)과 경제적 포위망(한·미 FTA)에 전격 합류함으로써 산산조각이 났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진행된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로 ‘무능하다’고 찍힌 민주파는 정권을 잃었고 뒤이은 9년여의 보수파 집권 결과는 참담, 또 참담하다.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때 평화통일도 가능한 게 아닌가, 꿈을 꾼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동북아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그래도 4~5%를 유지하던 성장률은 올해 2%에 턱걸이하기도 힘들다. 중국은 사드 배치 때문에 경제 보복을 하고, 미국은 한국의 무역흑자를 빌미로 경제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 경제 위기와 안보 위기가 겹쳤고, 그 강도는 현대사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다.
2009년 4월30일 검찰에 소환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
또다시 촛불이 “이제 개혁 한번 해보재이” 상황을 만들었지만 유력 대선 후보들은, 심지어 진보 후보까지도 모든 문제의 원인인 사드를 입에 올리려 하지 않고 트럼프의 압력에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대개혁’을 촉발한 인사를 캠프에 영입하고 내친김에 박근혜의 ‘줄푸세’ 창안자와 악수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한 비전도 배포도 없는 분들이 오로지 촛불의 힘에 기대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입으로는 개혁을 외치지만 참여정부가 그랬듯이 좌절과 좌절을 거듭하면, 기득권이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한 후보는 아예 처음부터 재벌과 관료, 보수 언론이 제시하는 길로 가겠다고 선언한 마당이다.
11년 전보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훨씬 더 절실해졌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현실화된 지금, ‘동북아 균형자’는 더욱 절실하다. 아니, 이제 미국과 중국에 동시 압력을 받는 모든 나라가 ‘동아시아 균형 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당장 트럼프의 환율 압력에 대해서도 동아시아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외교안보 쪽에서도 동아시아에서 맞붙고 있는 미·중 군사대결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공동대응, 궁극적으로 안보 공동체가 절실하다. 미국의 동북아 개입에 빌미를 계속 제공하는 북핵 문제 역시 동아시아가 힘을 모아야 할 일이다.
좌절과 좌절을 거듭하면, 기득권이 원하는 길로 간다
때마침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중단해 배 위에 둘둘 말린 그물 꼴이 되었으니 한동안 경제적 포위망을 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드 배치가 대중국 군사적 포위망의 신호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실 사드에 관한 협상의 여지는 넓고 그 결과로 우리가 얻을 것도 무궁무진하다. 이미 현실이 된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들고 나오는 건 국제정치의 기초도 모르는 바보의 헛소리이고, 더구나 한·미 동맹 운운하는 건 얼마나 역사적 지각이 없는지 증명할 뿐이다.
2004년 촛불의 교훈은 ‘개혁적’ 대통령이라도 힘들고 지치면 오히려 개혁 대상의 편을 들 수 있고, 그 후유증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고통스러운 원인과 대책을 끝없이 광장에서 소리쳐야 한다. 그럴 때만 어리숙한 지도자도 역사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시사인 497호 17.3.31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북한의 눈으로 남한을 한번 보자!
대부분의 한국인들 같으면, 세계에 고정된 중심이 있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다. 물론 중국이 아닌 미국이 바로 그 중심이고, 미국의 문물제도를 대체로 복제해놓은 한국은 그 중심에 꽤나 가까운 것으로 의식되기도 한다. 북한은 “비록 같은 민족이긴 하지만”, 이 중심으로부터 한참 벗어난, 18세기로 치면 ‘이적’(夷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은 청제국을 탈중심화시켰지만, 과연 한국에서 미제국을 탈중심화시켜 세상을 보는 것은 오늘날 어느 정도 보편적인가? 한국의 주류는 북한 숙청의 잔혹성에 비판을 퍼붓지만,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빈라덴과 그 가솔을 죽인 미군 부대가 김정은까지 죽이겠다는 말에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개항기의 사회·경제·정치적인 변화를 근대의 시발점으로 삼곤 하지만, 지성사 차원에서의 엄청난 변화는 대략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다. 바로 그때 근대적 지식체계를 처음으로 접한 조선인들은, 이 세계에 고정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한나라 시절에 한사군과 한반도의 준(準)국가들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을 때부터 중국은 세계의 고정된 중심축으로 여겨지곤 했지만, 18세기 중반의 실학은 이 오랜 전통에 종지부를 찍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홍대용(1731~83)의 유명한 <의산문답>(1766)에는 그가 북경에서 지구의와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세계지도를 본 소감이 나오지 않는가? 땅덩이는 둥글기 때문에 지구 위의 정계(正界)와 도계(倒界)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홍대용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서양인에게는 서양인이 정계, 즉 중심이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중심이지만, 그건 그저 하나의 주관적인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이와 같은 탈중심, 자기와 타자의 상대화가 가능해지고 나서야 개인이나 나라 차원에서의 주체성 확립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근대적 ‘중심의 상대화’야 18세기에 접어들어 가능해졌지만, 상대성 원리 자체는 동아시아 철학 속에서 수천년 동안 발전해 왔다. 불교도 자아와 타자를 연기론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는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주체를 상대화하지만, 유교나 도교에도 상대주의적 요소들은 강하다. <맹자>의 ‘진심’ 편에도 공자에 대해 “동산에 올라가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가 천하가 작다고 했다”고 나오지 않는가? 고향 노나라의 동산에 올라간 견지에서는 노나라가 작아 보이지만 천하의 태산에 올라가면 천하 전체가 작아 보인다. 결국 이 ‘견지’야말로 의식을 결정짓는 것이다. 도가 사상 같으면 이 상대성 논리를 더욱더 심화시켰다. 이미 우리가 평소에 쓰는 언어의 일부분이 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표현은, 사실 <장자> ‘추수’ 편에 나오는 개구리와 자라의 대화에서 따온 것이다. 우물 안의 즐거움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개구리는, 자라의 바다 이야기를 듣고서야, 즉 자신이 선 견지를 한번 남의 시선을 통해 상대화·객관화하고 나서야 비로소 객관적인 진실에 약간이라도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 우리도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해보기 위해 우리 자신들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타자인 북한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도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대부분의 한국인들 같으면, 홍대용이 비판했던 18세기의 고루한 선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세계에 고정된 중심이 있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다. 물론 중국이 아닌 미국이 바로 그 중심이고, 미국의 문물제도를 대체로 복제해놓은 한국은 그 중심에 꽤나 가까운 것으로 의식되기도 한다. 이와 동시에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북한은 “비록 같은 민족이긴 하지만”, 이 중심으로부터 한참 벗어난, 18세기로 치면 ‘이적’(夷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데, 이와 같은 중심과 주변의 구상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일 뿐 그 어떤 객관적인 실체도 아니라는 걸, 타자의 시각을 의식하면서 깨닫는 것은 중요할 듯하다.
한국 매체들은 보통 북한의 그 어떤 군사와 유관한 움직임들에 대해서도 ‘도발’이라고 규정짓곤 한다. 예를 들어 2012년의 광명성 3호 2호기 발사를 한국에서는 ‘도발’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물론 그것보다 3년 전에 한국이 나로호를 최초로 발사하려고 했을 때 이에 대한 <한국방송>(KBS) 보도의 타이틀은 “꿈과 도전의 기록, 대한민국 우주발사체 나로”였다. 우리가 하면 꿈과 도전이고, 저들이 하면 도발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같은 논리지만, 남한 측에서 별생각도 없이 하는 행동에 대한 북한 측의 시선이 어떨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약 1년 전부터 한국 보수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김정은 제거 특수부대”, “북한 지도부 참수 작전”에 대한 보도를 했다. 요즘 같은 경우에는 “유사시 김정은 제거 임무를 맡을” 한·미 특수부대들이 함께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린다. 물론 그 어떤 보수언론도 이와 같은 소식에 토를 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유엔에 가입해 있는 주권국가의 원수를 죽이는 준비를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침략 행위를 금지한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모든 회원국은 그 국제 관계에 있어서 다른 국가의…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무력의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간다”)에 전면 위반되며 사실상 ‘국가적 테러리즘’을 방불케 하지만, 우리에게 “내가 하면 로맨스”의 원칙은 철두철미하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북측에서 특수부대를 창설하여 유사시에 남한 3부 요인을 죽일 준비를 하겠다고 대서특필했다면, 남한의 예상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 ‘도발’이라는 말이 또다시 모든 매체 지면들을 도배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한이나 미국 측의 행동에 대한 북한 시각을 한번 상상해보자.
남한 언론들은, 장성택 등 일부 권력층에 대한 숙청들을 두고 대개 ‘폭군’ 김정은의 ‘잔혹성’을 소리 높여 규탄한다. 필부든 공경대부든 누구를 사형하든 간에 사형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잔혹행위임에 틀림없다. 물론 굳이 장성택 등 북한 권력층에 대한 사형을 비판하자면, 한국인들에게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되는 미국이야말로 매년 수십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 국가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데 한번 “중화 대 이적” 같은 공간적 서열화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객관의 시도를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모습도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2013년 9월 임진강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를 했던 한 한국인 남성이 한국군에 의해 사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코미디와 같은 재판을 해서 누군가를 숙청한 것도 잔혹행위임에 틀림없지만, 아예 재판 절차도 없이 탈주 시도를 한 사람을 이와 같은 식으로 죽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동네 언덕에 올라가는 데에만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노나라가 세상의 전부로 보일 수 있듯이, 북한을 ‘이적·악마’로 보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북한으로 넘어가려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당연지사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정은을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동지”라고 부르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장성택의 제거를 당연시하는 것을 과연 탓할 수가 있겠는가?
이 글을 읽고 나를 “친북파”로 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친남”할 일도 “친북”할 일도 내 평생에 없다고 본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민중들의 행복일 뿐이다. 나는 남한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편협한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비판적이듯, 어떤 면에서는 18~19세기의 위정척사 사상가들의 소중화론을 방불케 하는 북한의 지나친 자국 중심적인 시각에도 비판적이다. 그 어떤 편협함도 평화 만들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될 것이다.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필히 “나”의 주관성을 넘어 “나”와 “타자”를 아우르고 결국 만나게 하는 자기 상대화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 나는 그래서 홍대용의 선구적인 중국 상대화야말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기처럼 익숙해진 미국 중심주의를 상대화하고 북한과 우리를 평등하게 관찰해야 평화를 만들기에 훨씬 더 적합한 견지에 설 수 있을 것이다.
홍대용은 청제국을 탈중심화시켰지만, 과연 한국에서 미제국을 탈중심화시켜 세상을 보는 것은 오늘날 어느 정도 보편적인가? 한국의 주류는 북한 숙청의 잔혹성에 비판을 퍼붓지만,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빈라덴과 그 가솔을 죽인 미군 부대가 김정은까지 죽이겠다는 말에 아무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세계의 중심 제국”의 폭력은 우리에게는 “불륜”이 아닌 “로맨스”일 뿐인데, 과연 그런 시각을 가지고 한반도의 중생들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킬 수 있을까/ 한겨레 17.3.21
다음 대통령의 최우선 공약
불붙은 공약전쟁. 한 언론사의 기획연재 표제다. 박근혜 파면으로 대선국면에 들어가면서 예비후보들의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무릇 공약은 선거에 나선 정치인이 표를 달라며 내건 약속이다. 대선에서 한 약속은 더 무겁다. 물론, 그 무거움을 내놓고 조롱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겠나.” 기자들 앞에서 이명박이 언죽번죽 뱉은 말이다.
박근혜를 보면 차라리 이명박은 정직했다.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집권했지만 집권 뒤에 ‘안면 몰수’했다. 박근혜가 대기업 회장들을 불러 국민 세금으로 호화오찬을 즐기거나 으밀아밀 재단을 궁리하고 있을 때, 벼랑에 몰린 민중들의 집회를 겨냥해 살천스레 ‘법질서 수호’를 부르댈 때, 대한민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은 깊은 고통에 잠겨야 했다.
객관적 통계가 뒷받침한다. 박근혜 집권 4년 동안 소득 1분위, 하위 20%의 월평균 노동소득은 1.8% 줄어들었다. 반면에 소득 5분위, 상위 20%의 소득은 12.1%나 늘어났다. 금액으로 따지면 차이는 더 크다. 2016년 청년실업률은 통계조사가 시작된 1999년 이래 최고인 9.8%다. 실제 청년들이 겪는 체감실업률은 22.5%에 이른다. 그렇다고 성장률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낮아 3%를 밑돌았다. ‘국민행복 시대’를 내건 박근혜의 집권 내내 ‘행복’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소득이 두 자리 숫자로 늘어난 상위 20%일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가 이미 전 정권이 된 지금, 톺아보면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공약을 온전히 지킨 사람은 없었다. 이명박의 ‘국민 성공시대’는 새삼 말할 나위 없이 국민 환멸만 남겼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만일 국민과의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는 지금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경제체제’에 살고 있어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대통령 김대중은 대중경제를 구현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 노무현도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틋한 정서와 별개로 공약 이행을 냉철하게 평가해야 옳다. ‘분배를 통한 성장’이라는 획기적 공약, 임기 중에 적어도 ‘노사간 힘의 균형’은 이루겠다는 약속 모두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음 대통령을 맡겠다고 나선 예비후보들의 ‘불붙은 공약’도 이제는 차분하게 살펴야 옳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현 가능성과 의지다.
2017년 3월14일 현재 여론조사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문재인의 공약은 이미 넘친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싱크탱크에서 두툼한 정책들을 망라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궁금한 것은 방대한 공약자료집이 아니다. ‘나라다운 나라’를 실제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료들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를 경험하며 실망한 사람들, 특히 호남의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지닌 유권자들이나 진보적인 민중들에게 특히 그렇다. 그들의 깨끗한 열정을 담아내지 않아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략 또는 전술 차원에서 대처할 문제가 아니다. 실제 그렇게 이길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촛불을 든 민중의 절실한 소망을 구현해내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미완의 혁명’을 씁쓸하게 추억하고 기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래서다. 최우선 공약은 ‘공약 이행’에 두어야 한다. 딱히 문재인만이 아니다. 다음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는 모든 예비후보들에게 권한다. 청와대 비서실에 ‘공약실천 수석’을 약속하라. 그 일에 ‘수석비서관’까지 둬야 할 이유는 명쾌하다. 단순히 점검하는 일이 아니라 왜, 어디서, 누가 공약이행을 가로막고 있는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헛된 공약으로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세월만 낭비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일본의 변화는 우리에게 조금의 방심이나 안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저항이 있어도 반드시 공약을 지키겠다는 옹골찬 의지가 뚝뚝 묻어나는 대통령을 만들 때다. 촛불의 다음 과제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6.3.16
이것은 보수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진짜 정통’이라고, 바른정당은 ‘보수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광장에는 태극기를 든 ‘박근혜 보수’가 있다. 하지만 ‘진짜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탄핵 국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수들 간의 전쟁이 참으로 이채롭다. 자유한국당으로 개명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우리가 ‘보수의 진짜 적통’이라고 주장하며 “보수 이념과 가치에 뜻을 같이하는 모든 사람과 세력은 자유한국당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라고 설파한다. 반면 바른정당 측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계파 패권과 불통, 독선과 오만, 비선 정치로 일관하다가 결국 탄핵 소추라는 국가적 불행을 초래했다”라고 지적하며, 자신들이 ‘보수의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한다. 정작 광장의 박사모 등 ‘태극기 집회’에 나선 이들은 ‘박근혜 보수’를 구호로 내걸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정통 보수, 바른정당의 개혁 보수, 그리고 광장의 ‘박근혜 보수’. 이 때 아닌 ‘보수 전쟁’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면모는 진짜 보수, 보수주의와는 너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말 그대로 기존 질서, 제도, 전통, 관습을 보존하려는 가치 정향을 의미한다. 유럽의 중세 교권, 19세기 왕정체제, 그리고 사회의 기존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던 정치사회적 움직임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세기 이후 서구의 보수는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적 요구에 부단히 적응하는 진화론적 행태를 보여왔다. 서구 보수주의가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반동과 구분되어야 한다.
보편적 보수는 기존 질서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법치주의, 전통과 순응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자유시장과 사유재산의 보존도 보수의 핵심 가치다. 경제·사회적 부조리를 가족주의와 따뜻한 온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그 특징 중 하나다. 자유시장에 대한 강조는 자연히 작은 정부와 재정 보수주의로 이어진다. 보편적 보수는 애국주의를 중요시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바로 여기서 나오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는 관용과 통합을 전제로 한 공동체 애국주의다.
보수의 가치와 이념은 나라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어왔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 평가는 정통 보수, 개혁 보수, 광장 보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광장에서 표출된 한국 보수의 공통된 민낯은 ‘진짜 보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연합뉴스 2일 서울 여의도에서 태극기행동본부 주최로 열린 대통령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삭발식을 마치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2017.3.2
법치를 강조해야 할 광장 보수의 함성은 ‘군이여 일어나라’ ‘계엄령만이 답이다’ ‘특검을 해체하라’로 나타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이들은 검찰과 법원까지도 인정한 법적 증거를 부인하고 그와 관련된 가짜 뉴스를 무차별 배포한다. 아예 법 절차에 의한 탄핵 과정 자체도 부인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도 좋다는 궤변까지 내던지고 있다.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고 약탈과 지대 추구에 익숙해진 기득권 세력들을 옹호하기에 바쁜 광장의 보수, 이건 진짜 보수가 아니다.
‘그래 봐야 보수 정권은 끝장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이승만·박정희의 옛 공적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것 역시 참된 보수의 면모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나라와 동일시하여 그를 구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걸로 착각하고 국가 안보를 정권 안보로 환치시키는 이들의 애국주의는 오히려 반애국적 행보로 보인다. 시각이 다른 이들을 종북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며 대형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의 애국심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애국은 어느 누구의 독점물도 아니다. 애국의 지름길은 국민적 합의와 통합이다. 이 규범을 깨고 분열 선동에 앞장서는 이들은 망국의 좀비와 다를 바 없다. ‘보수가 서야 나라가 산다’고? 이런 보수가 서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 걱정된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시사인 493호 17.3.2
살아 있는 죽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실패들, 딜레마 때문에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 한가운데서, 우리는 자기 고유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행복하세요.” 가수 김광석이 공연 마지막에 노래를 들려주면서 항상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 행복하고 싶지 않은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뜻 내세울 답을 찾는 것이 점점 어려운 세계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도처에 산재한 문제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 시점에,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 일상의 삶과 참으로 동떨어진 사치스러운 말로 들린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 지순한 웃음을 가져오는 그 행복감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살아야 한다면, 이 살아감의 의미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행복한 나날들(Happy Days)>에는 위니(Winnie)라는 이름의 50대 여성이 등장한다. 1막에서 위니는 허리까지 모래에 묻혀 있는 모습이다. 하반신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래도 위니는 양치질을 하고, 핸드백을 소제하고, 남편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끊임없이 독백을 한다. 2막에서 위니는 이제 턱까지 모래에 잠긴다. 그녀는 더 이상 머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혼자서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모든 관계들은 깨어지고,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될 거야’라는 공허한 독백뿐이다.
이 희곡은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의 모습, 스스로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인간의 모습, 그럼으로써 육체는 살아 있지만 사실상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인간, 즉 조르조 아감벤의 “살아 있는 죽은 자(living dead)”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니는 자신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모래에 턱이 묻힐 때까지도, 자신이 아무런 변화를 이룰 수 없는 무력한, 부자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위니는 사실상 우리의 모습을 아프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지순한 행복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모래’는 무엇일까.
획일화된 삶의 방식과 사유 방식을 요구하는 다양한 제도들은 우리의 일상적 공간을 지배하면서, 각자가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개별성을 묻어버린다. 한 사회가 만들어낸 정형화된 삶을 따라 사는 것만이 ‘확실한 안전성의 삶’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굳건히 믿게 한다. 이러한 획일화된 가치체계는 정치·경제·교육·예술과 같은 공적 공간만이 아니라, 가정이나 여타의 친밀성의 관계 등 사적 공간들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정형화된 제도적 삶에 대한 무비판적 맹신은 우리로부터 모든 물음표를 제거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모래’의 기능을 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가치를 종교화한 다양한 종교들은 그 현상 유지와 권력 확장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구원과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생명성을 억누르는 ‘모래’들을 퍼붓는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모래’들은 그 모래가 턱까지 차올라서 모든 자유가 차단되는 것과 같은 처절한 부자유의 삶, 지순한 행복감이 부재한 삶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삶의 문제와 치열하게 씨름하며 ‘살아 있음’의 희열을
‘살아 있음’이란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다. 획일적이고 제도적인 삶이 강요되는 세계 한가운데에서도, 개별인들이 자신에게 지순한 웃음을 웃게 하고, 살아 있음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틈새 공간’들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치열하게 씨름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이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제거되어야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짐과 실패들, 그리고 문제와 딜레마들 때문에 행복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환경 속에 처해 있든지 인간에게 ‘문제없는 삶’이란 없다. 이러한 다층적 문제들이 제거되어서가 아니라 그 문제들 한가운데서, 생명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 각자는 자기 고유의 ‘행복한 나날들’을 만들어가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죽은 자’로서의 삶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사실상 매일 크고 작은 행동과 방향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선택들의 연속이기도 하다. 냉소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무수한 삶의 문제들 한가운데서 자유와 행복의 삶을 창출하기 위한 치열한 씨름을 하며 살 것인가. 이 문제 많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기만의 ‘행복한 나날들’을 창출하는 그 자유를 확장하고자 씨름하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지순한 웃음을 가져오는 행복의 순간들과 조우하게 되지 않을까.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시사인 492호 17.2.24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리에게 없는 것, 정치적 선택의 자유
“우리가 다수의 아시아 대륙 국가들에 비해 더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표면적으로 일당 정치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실질적인 정치적 다양성이나 역동성을 과소평가하는 문제다. 둘째는 한국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제로 유권자들에게 제공하는 정치적 선택 ‘폭’의 문제다.
우리는 민주화에 긍지를 지니지만, 민주화된 한국에서 현실적인 정치적 선택의 폭은 초강경 보수부터 딱 온건 보수까지다. 오로지 극소수 대기업의 사익만을 챙겨주는 재벌공화국의 기본구조를 본질적으로 바꾸려는 정치인이 주류 정치 무대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이 시스템은, 과연 민주주의 맞는가?
국내인들과 이야기할 때 자주 듣게 되는 주장이 하나 있다.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은 대부분의 아시아 대륙 나라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북한 등이 사실상의 일당 독재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다당제 의회 정치와 평화적 정권 교체, 공정 선거 등이 가능하다는 것이 국내인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근거 없는 자긍심은 아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이당치국(以黨治國), 즉 실력주의적 방식으로 선발, 배치된 영도 정당의 관료들이 제도적으로 통치하는 ‘대중 독재’에 비해, 훨씬 더 마피아 지배에 가까웠던 군부정치를 청산한 것은 당연히 한국 현대사의 자랑이다. 단, 이 자랑을 출발점으로 삼아 “우리가 다수의 아시아 대륙 국가들에 비해 더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표면적으로 일당 정치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실질적인 정치적 다양성이나 역동성을 과소평가하는 문제다. 사실, 일당 체제의 유일 영도 정당 내에서 표출되는 계파 간 정치적 견해차는,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에서의 여야 사이의 차이 이상일 수 있다. 단, 이 계파 간 갈등은, 재벌의 정치자금을 기반으로 하는 유세 기간 동안의 ‘표심 잡기 전쟁’이 아니라, 관료 사회 내부에서의 세력 확대 방식 등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다르다. 같은 당이라 해도, 정파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중국 보시라이나 북한 장성택의 운명을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숙청으로 귀결되는 정치 경쟁의 방식은 전혀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자들로부터의 정치자금 지원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한국의 금권정치도 민주주의 이상에 근접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하나는, 한국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제로 유권자들에게 제공하는 정치적 선택 ‘폭’의 문제다. 겉으로 보기에 비민주적인 ‘대륙국가’라도, 속에서는 관료 정파 사이의 의견차가 대단히 클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일부 전문가의 추측에 의하면 장성택은 수령주의적 유일지도체제보다 집단지도체제를 더 선호했던 인물이다. 1인 지도가 수십년간 이어져온 사회에서 이는 가히 혁명적 발상이라 하겠다. 수십년 동안 재벌 본위의 경제체제를 유지해온 남한으로 치면, 재벌 해체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과연 남한에서 선거제 민주주의 틀 안에서 정치 경쟁의 권리를 보장받은 야당이 어디까지 혁명적 발상을 들고나올 수 있을까?
3년 전에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고 정당 등록을 취소시키는 폭거를 감행했다. 그때 보수 언론들은 통진당을 마치 혁명정당쯤으로 묘사했다. 한데 실제로 통진당의 강령을 보면, 혁명은커녕 구미권이나 일본의 온건 (우파) 사민주의 정당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사회주의’ 같은 금칙어(?)들은, 통진당의 강령 전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생산수단 소유 문제에 있어서, 통진당은 수출형 재벌 본위의 경제체제 해체, 내수형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체제 수립을 요구하면서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 기간산업 및 사회 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 구조를 다원화(…)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을 뿐이다. 재벌 기업들을 공유화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기껏해야 개발주의 시절에 국유였던 국가기간산업의 민영화 중지를 요구하는 데 그쳤다. 서구 사회로 치면 이 정도는 ‘중도 좌파’가 될까 말까 하는 수위다. 한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정도의 온건한 좌파도 정치 경쟁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현재로서 한국 의회에서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소수 당파(6석)는 정의당이다. 강제 해산을 당한 통진당이 온건 중도 좌파에 해당한다면, 그나마 의회 정치 참여를 허가받은 정의당은 그것보다 약간 더 보수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 강령을 보면 “필수적인 식량·에너지·문화·교육·복지·의료·안전은 물론 전파와 정보통신망 등 공공의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만 맡기지 않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공공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정하게 분배할 것”이라는 부분은 통진당과 대동소이하지만, 재벌 본위의 경제모델을 본격적으로 손보겠다는 이야기까지는 없다(단, 재벌 세습을 방지하고 그 구조를 개혁하겠다고 한다). 비정규직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겠다는 말까지는 통진당의 강령과 마찬가지로 나오지만, 통진당의 “무상의료”와 달리 정의당은 “무상의료에 가까운” 의료시스템만을 약속한다. 정의당의 현실적인 모델 격인 독일 등 서구 복지 국가에서 이미 널리 실행되는 노동자의 기업경영 참여는 아예 언급도 없다. 상당히 보수적 성격의 사민주의로 분류될 만한 강령을 가진 정당이, 대한민국의 의회 정치에서는 ‘급진 좌파’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그 정도로 현실정치의 무대에서 허용되는 선택의 폭이 매우 좁은 것이다.
총선에서 7% 정도의 득표율을 과시한 정의당은 비록 의회 정당이지만, 의회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한국에서 여태까지 주류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인은 오로지 두 부류, 즉 강경(내지 초강경) 보수와 자유주의 색깔의 온건 보수다. 박근혜 극우정권이 파산함에 따라서 현재 정치적 경쟁의 중심에는 각종 온건 보수 지향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서게 됐다. 그들이 정당하게도 사익 패거리에 불과했던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폭정을 비판하고 있지만, 과연 정책이라는 핵심적 측면에서 저들과 강경 보수 사이의 차이는 그렇게까지 큰 것인가?
가장 집권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같은 경우는, 4대 재벌 개혁이나 복지 확대를 이야기하긴 한다. 그런데 그가 대표적 경제 공약으로 내세우는 부분(전자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노동이사제 등)의 다수는, 이미 법률 개정안으로 발의돼 있는, 일찍이 당론으로 채택된 것들이다.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상향하겠다는 이야기나 아동·청년 수당을 도입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 정도 가지고는 산업화된 국가들 중에 최악의 노인 빈곤 문제나 이미 남유럽 정도로 심각해진 청년 실업 내지 불완전고용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문재인은 일종의 ‘사회적 자유주의’를 내세우고 ‘복지’를 자주 언급하지만, 과연 그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려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가 예컨대 법인세율 인상에 상당히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법인세율(22%)은 미국(40%)이나 일본(30%)보다 훨씬 낮은데도 말이다. 문재인은 상시 고용의 경우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자고 하지만, 기업에 허가하는 비정규직 고용의 범위를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승민같이 좀더 보수적인 잠재적 대권 주자들도 한다.
문재인을 보면 과연 한국에서 현실적인 정치적 선택의 폭을 이루는 온건 자유주의자와 강경 보수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있는가를 의심하게 된다. 물론 문재인보다 약간 더 대담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유주의자들도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 같은 경우는 법인세를 일본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겠다고 말한다. 그 자체로는 물론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오로지 대주주들의 단기 이익을 목표로 삼는, 전체 고용의 5%도 담당하지 못하는 10대 재벌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의 무려 80% 이상을 독점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상황을 이 정도의 개혁으로 과연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민주화에 긍지를 지니지만, 민주화된 한국에서 현실적인 정치적 선택의 폭은 초강경 보수부터 딱 온건 보수까지다. 오로지 극소수 대기업의 사익만을 챙겨주는 재벌공화국의 기본구조를 본질적으로 바꾸려는 정치인이 주류 정치 무대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이 시스템은, 과연 민주주의 맞는가? 몇 개의 대기업이 민주주의를 가장하면서 사실상 영구적으로 한 나라를 통치하는 모델이 왜 하필이면 유일 정당 통치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겨레 17.2.21
성장에 목매지 말자
우리나라에서도 ‘탈성장’ 논의가 본격화할 수 있을까. 작년 세밑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한 북콘서트 주제가 탈성장이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들었던 생각이다. 사실 성장이라는 약물을 주입하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성장 중독사회에 대한 비판은 우리 주변에서도 차고 넘친다. 처방으로 제시된 탈성장도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 아니다. 1970년대에는 지금보다 탈성장 담론이 훨씬 더 유행했다.
그래도 최근 출판계가 탈성장에 기울이고 있는 관심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경기 침체 속에서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성장론이 주목받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소득주도성장, 동반성장, 포용성장, 내생성장, 공정성장, 복지성장, 국민성장. 성장주의의 폐해를 의식한 이른바 ‘다른’ 성장론들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대세를 이룬 지 오래다. 성장은 더 나은 삶을 담보해주는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공감대는 적어도 과거에 비해서는 꽤 넓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성장지상주의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경기도지사를 지낸 한 여당 정치인은 “친기업 아닌 것은 다 말장난”이라며 새로운 성장론들을 싸잡아 폄훼했다. 야권의 한 국회의원은 최근 대권주자들이 내놓고 있는 성장담론들은 “성장하지 말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라며, “한국적 민주주의가 독재하자는 이야기였듯이 수식어가 붙는 성장론은 다 가짜”라고 딱지를 붙였다.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성장담론의 불패신화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수식어가 붙는 성장론은 가짜가 아니라 죄다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 성장론은 성장론일 뿐이다.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경제성장률에 대한 집착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성장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성장주의와 정상적인 성장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무제한적인 성장 또는 성장을 위한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아닌 ‘선택적 성장’이라면, 다시 말해서 산업문명이 파괴했던 자연을 치유하고 빈부격차를 줄이는 ‘질적 성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재생에너지와 유기농업의 ‘성장’이 탈성장 사회의 주춧돌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탈성장을 성장의 산술적인 역, 즉 마이너스 경제성장률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원래 탈성장이라는 용어는 성장과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자는 취지에서 나온 정치슬로건이었다 한다.
오늘날 탈성장은 녹색당조차 입에 올리길 꺼리는 개념이다.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고, 해석을 둘러싸고 극좌에서 극우까지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런 점으로 보면 박정희 체제의 핵심이 성장지상주의에 있다 하더라도 이번 대선에 나선 주자들에게 탈성장 주장까지 바라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래도 시대정신의 교체를 주장하는 대선주자라면 두 가지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째, 몇퍼센트 성장률과 몇만달러 소득 목표에 목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과거와 같은 성장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저성장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솔직하게 국민 앞에 고백해야 한다. 성장주의는 이미 삶의 질을 망가뜨릴 정도로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확신과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둘째, GDP 외에 삶의 질과 만족도를 반영할 수 있는 국가 지표를 국정 운영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통계청이 작성한 ‘국민 삶의 질 지표’가 있으니 새 지표를 만들 필요도 없다. 책상 서랍에 갇혀 있는 것을 꺼내기만 하면 된다. 대선주자들의 ‘다른’ 성장론이 성장주의의 변종인지 탈성장의 씨앗인지는 이 두 가지 제안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경향 17.1.12
Welcome To My World (Anita Kerr Singers)(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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