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7.12 미세먼지 아냐, 오존이었어
미디어오늘 18.7.17 노무현의 후회, 문재인의 선택
18.7.17 한겨레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위하여!
경향 18.8.9 폭염과 숲, 그리고 세금
18.8.14 /한겨레 ‘높으신 분’ 없는 세상을 위하여!
미디어오늘 18.8.15 청와대의 참 이상한 ‘실사구시’
시사인 570호 18. 8.13 문재인 정부가 ‘재벌 독점’ 막으려면
시사인 18. 9.1 572호 혁신성장 위해 진정 필요한 것
18.9.11 한겨레 우리 미래, 약육강식 없는 사회로
시사인 567호 18.10.1 예수 상품’을 파는 이들, 혐오 정치를 멈추라
18.10.16 한겨레 신민족주의 파도, 세계를 삼키다
경향 18.10.22 ‘공유경제’와 플랫폼 협동조합
시사인 579호 18.10.23 촛불 정부, 너마저
시사인 18.11.12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18.11.13 한겨레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경향 18.11.19 ‘방 안의 두 거인’과 한국 경제
경향 18.11.27 보헤미안 랩소디’를 추억하며
경향 18.11.26 갑질에 대하여
경향 18.11.29 환경, 이번 정부에서도 ‘후순위’
경향 18.12.17 수수깡과 진흙
한겨레 18.12.20 아이들이 안쓰럽다
경향 18.12.27 사람이 먼저인 나라
한겨레 18.12.30 동맹의 ‘갑질’
동맹의 ‘갑질’
미국은 독일에 174개, 일본에 113개, 한국에 83개를 비롯해 686개(미 국방부 통계)의 해외기지로 전세계를 그물망처럼 덮고 있다. 데이비드 바인 아메리칸대 교수는 <기지국가>에서 공식 집계에 포함되지 않은 기지를 합하면 미국은 70여개국에 800~1000개의 해외기지를 운영한다고 추정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해외 미군기지가 세번째로 많은 나라다.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은 2만8500명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여러차례 3만2천명이라고 이야기했다.
미국의 요구로 한국이 주한미군의 방위비 분담금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이다. 첫 분담금은 1억5천만달러였지만, 계속 늘어 올해는 9602억원(약 8억6000만달러)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46%를 부담한다고 하지만, 한국 전문가들은 무상으로 제공하는 토지 비용 등을 계산하면 한국이 70~80%를 부담한다고 지적한다. “해외 미 육군 기지 중 최대”인 평택 기지 확장 이전 비용의 92%도 한국이 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더는 세계의 호구가 아니”라며, 연일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 대폭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한-미 협상 대표단이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총액에 대한 이견을 거의 좁혔지만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간 데는 50% 이상의 대폭 인상을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한국을 본보기 삼아 일본, 유럽 국가들의 방위비까지 대폭 올리려 하고 있다. 한국이 분담금 대폭 인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트럼프가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또는 북핵 협상과 연계한 카드를 이용할 것이란 우려도 커졌다.
한국이 이런 ‘갑질’을 단호히 거부해야 할 이유는 여럿이다. 첫째, 트럼프의 압박은 한국의 대폭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일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 시나리오로 트럼프 대통령이 실제로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현실화는 어렵다. 트럼프는 더이상 대규모 해외 군사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고립주의를 외쳐왔고, 대신 비용이 덜 드는 제재나 경제적 압박으로 세계를 통제하려 한다. 반면 해외 군사기지가 미국 패권의 핵심이라고 보는 미국 주류세력은 트럼프가 그 뿌리를 흔드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조처를 취할 것이다. 미군 해외 주둔의 미래는 미국 양대 세력의 격돌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셋째, 미군의 시리아·아프가니스탄 철군과 주한미군은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의 셰일에너지 혁명 이후 중동의 전략적 중요성은 줄었고, 미국은 실익 없는 수렁이 된 시리아·아프간에서 미군을 ‘탈출’시키려 애써왔다. 반면 중국 견제는 미국 세계 전략의 최우선 순위다.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겨냥해 벌이는 ‘항행의 자유’ 작전에 한국이 참여하라는 미국의 요구도 강해지고 있다.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파기 움직임도 중국을 겨냥한다.
이런 전략 구도를 보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절실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다. 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식 셈법을 적용하면 미국은 한국에 더 많은 비용을 내야 할 것이다. 역사의 방향을 본다면, 한국은 주한미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전작권 환수를 착실히 추진하면서, 장기간 계속될 미-중 갈등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을 전략과 실력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트럼프의 부당한 요구에는 반드시 답해야겠다. “우리는 미국의 호구가 아니”라고. / 박민희 통일외교팀장 한겨레 18.12.30
사람이 먼저인 나라
아이들을 위한 세금을 아이들을 위해 쓰라는 당연한 요구에도 소수 기득권을 위해 묵살하는 사회,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작업환경 요구에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반대하는 사회, 부자가 세금을 조금 더 내고 가난한 사람의 소득을 높이면 국민이 못살게 된다고 반대하는 사회, 회계를 조작한 회사를 엄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조작을 옹호하는 사회, 부동산 불로소득에 부여하는 세금을 높이는 게 폭탄이라고 하는 사회, 미세먼지와 화학물질 공포의 개선을 위해 규제를 강화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반대하는 사회,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 탈세의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 중에는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없다는 사회, ‘착한’이란 말로 포장해서 최저임금조차 쥐여주지 않으려는 노동착취를 미화하는 사회, 그래서 피해자만 억울한 사회. 2018년에도 변함없이 우리 사회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묻고 싶다. 대한민국은 사람이 안전해지면 망하는 나라인가? 세금이 본래 목적으로 쓰이면 망하는 나라인가? 부정한 회사를 엄벌하면 망하는 나라인가?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을 높이면 망하는 나라인가? 집값이 수억원 올랐다가 몇천만원 떨어지면 망하는 나라인가? 미세먼지가 줄어 좀 더 깨끗해지면 망하는 나라인가? 범법자가 아니고서는 인재가 없는 나라인가? 가난한 사람이 소득이 늘어나면 망하는 나라인가? 대기업의 부정부패와 재벌의 갑질이 사라지면 망하는 나라인가? 서울 집중이 분산되면 망하는 나라인가? 남녀노소가 평등해지면 망하는 나라인가? 이 수많은 질문에 동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다 평등한,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길 바라는 국민이 대다수임에도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 눈에 뻔히 보이는 파렴치한 손들의 방해로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유엔이 추구하는 환경적으로 건전한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닌 ‘부와 권력의 세습만이 지속가능한’ 계급이 고착화된 사회로 변모해 있다.
2018년은 우리에게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큰 과제를 안겨준 해이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했으면서도 소수 기득권 집단이 보여준 응집된 저항의 힘에 절대다수의 정당한 요구가 잠식당하는 무기력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환경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의 공포를 온 국민이 체험한 해이다. 많이들 잊었겠지만, 이번 여름 더위와 관련한 각종 기록이 경신되면서 온열질환으로만 48명이 숨졌고, 현재진행형인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그러면서도 당장 청년의 목숨값으로 연명하는 저질 화석에너지를 포기하지 못하며, 미세먼지의 주범이라는 디젤의 가격을 오염자 부담원칙에 입각하여 정상화하지도 못한다.
전문가의 압도적 무용론에도 4대강 사업을 추진한 토건세력의 집요함과는 달리 온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유치원 비리근절법조차 통과시키지 못하는 모습은 보다 정의로운, 사람이 먼저인 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정부가 돈과 언론의 권력을 앞세운 수구 금권세력에 밀리는 모양새로 비춰진다. 잠시 숨죽이던 이들은 조금씩 틈을 비집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려 총력을 다하는 상황이 채 임기 절반도 안된 촛불정부에 드리워졌다.
그 어떤 정책이라도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득실이 있기 마련이라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는 없다. 이번 정권에서 대다수 국민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모든 부정부패와 사회문제를 없애고 모두가 잘 사는 대한민국이 되는 마법이 아니다. 그간 기득권이 누린 비정상적 혜택을 줄이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약자들을 위한 민주국가 본연의 정책이 구조적으로 싹을 틔우는 ‘사람이 먼저’인 사회로의 작은 변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미봉책의 표면적 지원이 아닌 ‘구조적’ 변화를 불러올 결실을 볼 수 있을까? 경기침체를 빌미로 한 거대 SOC사업의 부활은 더 큰 불안의 징표로 보인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경향 18.12.27
갑질에 대하여
한국 사회가 꾸준히 생산하는 신조어의 정확한 뜻과 이의 배경을 간혹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대한항공의 조모 전 부사장이 일으킨 이른바 ‘땅콩회항사건’에 이어 최근에는 인터넷 관련 사업으로 성공한 양모 회장의 엽기적인 행동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두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에는 모두 ‘갑질’이라는 신조어가 붙었다. 갑을관계는 내가 서울의 출판사와 계약할 때 출판사와 저자를 각각 갑과 을로 약칭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갑질이라는 단어가 십간(十干)의 첫 자 ‘갑’에 도적질처럼 어떤 행동이 지속될 때 부정적이거나 저속한 뜻을 담은 접미어 ‘질’을 합성한 단어라는 것을 얼마전에 알았다. 그래서 이 단어를 가령 영어나 독일어로 옮기면 가장 가까운 단어가 무엇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중세 프랑스어에서 기원하고 17세기경부터는 영어나 독일어에도 자리 잡은 ‘chicaner’(억지부리며 괴롭히다)라는 단어나 20세기 중엽부터 일반화된 영어의 ‘mobbing’(따돌리며 괴롭히다)이라는 단어가 갑질의 의미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두 단어 모두 사회생활에서 관리나 상관이 특정인을 상대로 심리적인 모욕이나 고통을 지속적으로 가함으로써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유럽연합은 2002년 1월에 손해배상은 물론 가해자의 형사적인 처벌까지도 가능케 하는 ‘모빙방지법’을 회원국이 2010년까지 제정하도록 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갑질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에 땅콩회항사건은 ‘항공안전위반법’으로, 양 회장은 ‘상습폭행죄’로 기소되었다.
물론 이 같은 일탈행위는 과거 노예제나 봉건사회에서는 전혀 문제될 수 없었다. 노예나 농노는 생살여탈권을 쥔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취급되지 않았다. 중세 봉건사회와 절대왕정체제가 해체되고 시민계급이 등장하면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고발하는 문학작품들도 많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디드로의 <숙명주의자 자콥과 그의 주인>이 있다.
특히 디드로의 소설은 철학자 헤겔이 <정신현상학> 속에서 ‘자의식’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다룬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논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논거를 제공했다. 주인이 노예를 자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만일 그가 이를 인정하면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예는 절대적인 존재인 주인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기에 주인과 노예는 상호의존 속에서 자의식을 구성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양 회장이 사무실에서 부하직원을 구타하는 장면을 담은 짧은 동영상을 보았다. 동료가 폭행당하는데도 묵묵히 계속 일하는 여러 직원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갑질이 벌어지는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의 여러 행태를 보면서 나는 주종관계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떠올렸다.
마르크스가 압제에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로 평가했던, 로마시대에 노예의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가 있었다. 우리 역사에는 “장군과 재상이 어찌 타고난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만 만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라고 어찌 뼈빠지게 일만 하고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라고 외치며 사노(私奴)의 봉기를 이끌었던 고려말의 만적(萬積)이 있었다. 노예가 자신의 해방을 위해 억압적 지배구조를 뒤엎으려 한 생사를 건 투쟁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주종관계를 역전시켜 노예가 주인이 되어도 갈등은 그대로 남는다는 비판이 있다. 예를 들면 니체는 노예와 주인을 선과 악의 대칭관계 안에서만 보는 ‘복수심(復讐心)’은 ‘노예의 도덕’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대신에 그는 선악의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초인(超人)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주인의 도덕’을 설파했다. 그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복수심은 침묵, 망각하지 않고 기다리기, 일시적으로 자신을 낮추거나 위선적인 겸손을 수단으로 해서 권력에의 의지를 불태우지만 이는 ‘영혼의 자기독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면서 복수를 준비한 부차(夫差), 그리고 침상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핥으면서 쓴맛을 되씹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는 구천(句踐)의 이야기를 담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성어가 있다. 노예의 도덕을 비판했던 니체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용할 수도 있었던 고사처럼 느껴진다.
끝으로 주인과 노예 사이에 새로운 관계설정을 아예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있다. 주종관계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인간세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비록 불행한 일이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견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이 있다. 베트남전선으로 떠나기 전날 밤, 해병대의 훈련소에서 신병 로렌스는 그에게 갑질을 했던 교관을 사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갑질을 이겨낸 그의 친구 조커는 베트남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전우들과 본국으로 후송되는 차 안에서 그가 불렀던 노래는 그러나 우렁찬 군가가 아니라 어릴 적에 불렀던 ‘미키 마우스 노래’였다. 불행한 의식과 체념, 그리고 이것마저도 잊으려는 안타까운 노력을 보여주었다.
복수심, 선악의 피안에 선 주인의 고상한 도덕 그리고 숙명주의에 기반한 해석과는 달리 주종관계를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동영상 속의 폭력적인 양 회장이나 영화 속의 괴롭히는 교관을 인구의 약 2%를 차지하는 자기과시욕이 강한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로렌스나 동료의 폭행을 외면한 사원들을 인구의 약 3~5%에 속하는 자신감의 결여라는, 또 다른 인격장애자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은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총체적 맥락을 좇는 초점을 흐리게 만든다.
돈과 권력이 사회적으로 인정(認定)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지만 교육과 교양을 포함하는 ‘문화적 자본’, 그리고 사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사회적 자본’을 고려에 넣지 않는 인정논의의 한계는 분명하다. 반세기 동안 압축성장이라는 외길을 달려온 한국 사회가 낳은 무한경쟁은 갑질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벼락부자가 누리는 오만한 성취감, 반대로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무력감과 복수심만을 안겨주었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크다. 이를 극복하려는 엄청난 노력 없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꿈 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일고 있는 갑질을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18.11.26
아이들이 안쓰럽다
우리는 곧잘 우리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 교육이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얻는 게 없”는 것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인데, 민도가 높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교육자여 단결하라! 우리가 얻을 것은 참교육과 참학문이고, 우리가 잃을 것은 거대한 무력감과 패배주의뿐이다.”
지난 12월10일치 한겨레 <세상읽기> 난에 실린 김누리 교수의 ‘한국의 교육자여 단결하라!’ 칼럼의 결론 부분이다. 그는 “더 이상 무책임한 국가, 비열한 사회에 대학정책, 교육정책을 내맡길 수 없”으며, “한국의 교육/대학 문제를 풀 유일한 방법은 교육자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라며 “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 초·중등 학교, 대학교의 교사, 교수, 강사와 연구소의 연구원이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래로부터의 교육혁명’을 이끌 ‘한국교육연구노조’ 건설을 모든 교육자, 연구자에게 제안했다.
나는 앞으로 조직되기를 바라는 ‘한국교육연구노조’의 노조원 자격 여부를 떠나 김 교수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자 이 글을 쓴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있는 반인권, 반시민, 반노동의 교육 현실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의 68세대는 “우리 후손들에게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물려줄 수 없다!”며 70대 나이에 ‘노란 조끼’를 입고 거리에 나섰는데, 감히 말하건대 그들보다 더 절박한 심정이다. 노무현 정권 때에는 그래도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화’ 등 대학서열을 완화, 철폐하기 위한 모색과 토론, 실천운동이 펼쳐졌다. 오늘 교육개혁의 가능성은 문재인 대통령의 교육공약이 실종되면서 멀어졌다. 촛불정권에 걸었던 기대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교육운동계는 과거에 비해 더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이는 김 교수의 제안에 별 반향이 없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호소하듯, 교육자들이 교육개혁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고 되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삼천지교’의 ‘맹자 어머니’ 같은 학부모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자식이 학교에 다니면서 인간성을 확장하고 인간의 염치를 알며 올바른 인격, 더불어 사는 연대의식을 형성하는지에 관심을 갖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자식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에 관해서는 별 관심 없고 등급과 석차로 표시되는 성적에만 관심이 있다. 자식세대가 장래를 설계하기가 더 어려운 헬조선의 ‘엔(N)포세대’가 된다는 불안의식이 부모세대를 압도하는 탓이 크다 할지라도, 민주공화국의 공교육 이념이 우리 사회에 정립되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참된 교육자라면 자유, 평등, 평화, 연대, 공공성 등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가치 형성을 기대할 수 없고 다만 석차와 등급을 매기기 위한 학교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지지율에만 관심을 갖는 대중추수 정치인들한테서 교육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민적 자유와 행복추구권 신장을 위한 차별금지법 입법 요구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집권세력은 시민사회의 거듭된 전교조 법외노조화 직권취소 요구도 계속 외면하고 있다. 어려운 학교현장에서 참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온 교사들마저 부정한다면 누구와 함께 참교육 실현을 도모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이 안쓰럽다. 특히 석차와 등급 경쟁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무척 안쓰러운 것은 학습에 지친 그들에게서 불법파견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한겨레21>은 자해 행위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초중등 학생이 적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수월성 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대다수 학생은 자긍심, 자존감을 갖기 어렵고, 잉여적 존재로 취급받기 쉽다. 학교생활이 행복할 리 없다. 1등급은 2등급 이하를 차별하고 2등급은 그 이하 등급을 깔보고 9등급 남학생은 여학생을 혐오한다. 이런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난민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인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왜일까? 공자님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각급 학교 곳곳에 붙어 있다는 글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 바로 우리 모습 아닌가! ‘배움’과 ‘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 ‘배움’이 모든 학생이 같은 내용(이론, 용어, 연대, 인명 등 객관적 사실)을 숙지하는 것이라면, ‘생각하기’는 배움의 토대 위에서 각자 ‘나’가 사유하는 것이다. 공자님의 가르침은 “배움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는” 우리 교육이 ‘나’ 없는 전체주의 교육임을 일깨워준다. ‘조반’(창조적 반란)이나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 교육에 배움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는 것은 서열화된 대학에 조응하려고 학문을 왜곡한 데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을 줄 세워야 하는데 ‘생각하기’로는 줄 세울 수 없어서 ‘배움’으로 마감한 것이다. ‘배움’으로 마감하니 ‘나’가 없다. ‘나’가 없으니 자긍심, 자존감을 가질 수 없고, 나의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으니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그야말로 연목구어다. 또 ‘나’가 없으니 비판의식이나 계급의식 형성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곧잘 우리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 교육이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유는 곧 언어이고 언어는 곧 사유다. ‘생각하기’는 언어로, 즉 글쓰기와 말하기(토론)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우리 학교와 교실에서 학생들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거의 없다. 곧 ‘생각하기’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얻는 게 없”는 것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인데, 민도가 높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철학 공부를 한다는 점은 프랑스인들에게 은근한 자긍심의 원천이다. 매년 6월 중순에 치르는 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 중에 철학 시험문제는 많은 언론매체가 소개한다. 수험생들은 계열별로 주어지는 3개의 논제 중 하나를 선택하여 4시간 동안 논술하게 되어 있다. 필수과목인데다 가중치도 높아 인문계의 경우 프랑스어가 5학점인데 철학은 7학점이다. 최근에 출제된 논제들을 보면 “모든 진리는 확정적인가?” “예술에 무감각할 수 있나?” “욕망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징표인가?” “부당한 일을 겪어야만 무엇이 정당한지 알 수 있나?” “알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예술 작품은 꼭 아름다워야 하나?” 등이 있다. 잠시나마 이 논제들 중 하나를 선택해 4시간 동안 뭐라고 쓸 것인지 짚어보면 좋겠다. <르몽드> 인터뷰에 응했던 한 학생은 7장을 썼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이 논제들을 던져본 적이 있는데,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에게 지우는 학습노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앞에 공자님 말씀을 들어 “얻는 게 없다”고 했는데, 지배세력에겐 이로운 부수적 효과가 적어도 두가지 있다.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으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비판의식과 계급의식은 형성하지 않은 채 등급과 석차로 서열을 규정함에 따라 머리 좋거나 경제력 있는 부모를 둔 학벌 엘리트집단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그 둘이다. 총총한 눈빛의 아이들 앞에서, 참된 교육자라면 이와 같은 교육 현실을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김누리 교수의 제안에 호응 있기 바란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겨레 18.12.20
수수깡과 진흙
20여년 전, 제도란 볼트와 너트로 구성된 강철 구조물이 아니라 진흙으로 연결한 수수깡 같은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이 비유는 더 상세해졌다. 법률과 물질적 인센티브로 구성된 공식 제도는 수수깡이고 사회규범과 같은 비공식 제도는 진흙이다. 말랑했던 진흙이 바삭하게 마르듯 규범이나 관습이 반복되면 움직일 여지 없이 점점 굳는다. 결국 수수깡-진흙 구조물은 작은 충격에도 부서지기 쉬워진다. 맹커 올슨이 논증한 것처럼 지배집단의 자기 이익 추구가 제도화하고 사회도 이를 용인하게 되면 국가는 딱딱해져서 내부의 압력이든, 외부의 충격이든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또는 급격하게 쇠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상태일까? 우리 사회의 지배집단이라면 누가 뭐래도 재벌-고급관료-보수언론의 삼각동맹이다. 이들이 하청기업을 마른 수건 비틀 듯 한껏 짜낸 결과는 제조업의 생산성 위기로 이어졌고 바짝 말라붙은 공간에는 혁신기업이 나타날 틈이 없다. 성장률은 나날이 떨어지고 지배집단의 지대 독점은 단 20년 만에 한국의 불평등을 세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가 이룬 참으로 장한 성취인데도, 그 어떤 반성도 없다.
이 구조의 정점에 있는 더 한심한 세력이 그들에게 항상 면죄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범은 물론 법도 무시하는 이들이 그래도 건재한 건 수많은 조력자가 있는 탓이다. 부동산과 학벌은 한국 계층 상승의 좁다란 오솔길이다. 웬만한 이들은 온 힘을 다해서 어떻게든 양대 자산을 부풀리려 한다. 아뿔싸, 두 자산을 둘러싼 경쟁은 죄수의 딜레마이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하고(뒤처진다는 공포), 남들이 안 해도 내가 한다면(앞서 가려는 탐욕)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남들이 사교육을 시키건 안 시키건 나는 사교육에 매진할 것이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기득권자들의 승리 확률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경쟁이 빚어내는 사교육과 부동산 가격 상승이 그 메커니즘이다. 돈 많은 집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집 있는 사람들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노력할수록 보통 사람이 이길 확률은 낮아진다. 그러나 안 할 수도 없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배신, 즉 사교육과 부동산 투자는 강한 우월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리도 손쉽게 세상을 지배하는 방법이 어디에 또 있을까? 양반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특권을 폐지하려는 게 아니라 상민들도 돈 모아 양반 족보를 사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구한말과 무엇이 다를까? 양대 자산은 점점 더 큰 규모로 세습된다.
뻔한 부자들뿐 아니라 정치인, 관료, 그리고 웬만한 언론인과 학자 등 지식인까지 40대를 넘어서면 거의 모두 소득 상위 10%에 들어간다. 자산으로 치면 더 높은 순위로 올라갈 것이다. 이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양대 자산의 투기를 선도하면서 사적소유는 불가침이며 단지 효율성을 높이는(높은 가격을 치르려는 사람에게 소유권이 돌아가야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경제학은 가르친다) 시장거래일 뿐이라고 옹호한다.
민주주의는 이런 불평등 메커니즘을 시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다. 게임 구조상 거의 100% 질 게 뻔한 ‘루저’들도 승리할 수 있도록, 적어도 패배의 확률이 낮아지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정치다. 하지만 2008년 총선에서 거대 양당의 현수막은 똑같은 글씨로 채워졌다. 첫째는 뉴타운, 둘째는 특목고였는데 종부세나 사교육에 대한 태도를 보면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상층에 속하는 이들이 놀랍게도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겨 스스로를 위한 정책을 세운다. 머릿수도 많고 목소리는 더욱 큰 베이비붐 세대가 이들을 뒷받침한다.
상위 10%를 부모로 두지 못한 90%의 젊은이들이 절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들은 ‘노오력’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자기 안의 능력도 같이 버린다. 아니 발견조차 하지 못한다. 자신이 겪은 상실감과 무력감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이를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한다. 출산율 저하의 근본 원인은 불평등이다.
아마티야 센은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일에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이며, 자유의 확대가 곧 발전이라고 갈파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국은 저성장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마이너스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내부에 회복탄력성을 지니지 못한 사회는 붕괴한다. 촛불 대부분은 대통령만 교체되면 이 답답한 구조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직 3년 넘게 남았고 정책은 얼마든지 있다. 진흙에 약간이라도 물기를 더해 움치고 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선거제도부터 바꿔야 한다. 젊은이와 소수자의 이해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참 소박해진 내 새해 희망이다. 경향 /정태인 | 독립연구자·경제학 18.12.17
환경, 이번 정부에서도 ‘후순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즈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획기적으로 바뀔 것이라 기대했다.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컸다. 기회가 돼 우리나라의 심각한 자연환경 훼손 문제 개선을 위해 그간 쌓인 적폐 중 꼭 청산해야 할 한 가지를 주문한 바 있다. 개발자가 작성하는 환경영향평가서를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작성토록 바꾸자는 것이었다. 언뜻 당연해 보이는데 아직까지 우리 법에는 개발할 사람이 예정지의 자연환경을 조사하고 평가토록 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내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골프장이나 관광단지를 조성하려 산과 들을 매입했는데, 그곳이 보전을 통한 공익적 가치가 개발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국민 모두를 위해 보전되어야만 하는 곳이라면 개발당사자는 어떠한 행동을 취할까? 국익을 위해, 나보다는 국민을 위해 희생한다? 그런 일은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며 초등학생에게나 감동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외부정보에 눈을 뜨고 사회적 기준에 의한 가치판단이 시작될 나이가 되면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정의’보다는 부정한 행위가 훨씬 거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접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과 법을 집행할 판사들조차도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극히 일부에 의해 벌어지는 일탈로 전체를 깎아내리면 안된다며, 자극적인 언론의 문제를 탓하기에는 국민이 느끼는 불신의 골은 이미 너무 깊다. 국민은 이런 적폐를 청산하자고 하는데 청산의 시동도 제대로 걸지 않은 지금, 기득권층은 드러나지도 않은 사회문제 해결에 딴지를 걸며 피로사회를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다.
새 정부에 대한 많은 기대 속에 내심 환경영향평가법의 빠른 개정을 바라왔다. 늘 후순위인 환경문제는 역시나 이번 정부에서도 후순위였으며, 그나마 일부 개정된 환경영향평가법은 알맹이를 쏙 뺀개정안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자연환경관리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 자연보전 가치의 인식증진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이 문제를 정부는 왜 해결하지 않는가.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정부도 개발업체와 마찬가지로 보전보다는 개발에 앞장서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부 주도의 개발사업이 환경영향평가에 의해 무산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리라. 4대강의 졸속 환경영향평가, 사드기지, 최근 문제가 불거진 흑산도 공항이 그렇다. 수많은 정부 주도 개발사업은 토건세력과 정부의 암묵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에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업의 빠른 진행에만 관심을 가지며 공익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이번 개정된 환경영향평가법 시행령에 ‘거짓·부실 검토 전문위원회’를 두어 공정성을 강화하겠다고 하지만 공무원이 다수가 될 위원회에서 정부의 개발사업을 거짓으로 평가할 리는 만무하다. 정부위원이 과반수인 각종 위원회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정부의 입맛대로 진행되는 과정을 이미 보아오지 않았던가?
일례로 지난 오색케이블카의 환경영향평가 조사자료는, 조사자가 산을 순간 이동하지 않는 이상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조사결과가 자료로 제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부를 포함한 정부관계자들은 절대 영향평가서가 ‘거짓’은 아니라는 옹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조사원본 제출요구를 사업자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를 감시해야 할 환경부 고위관계자는 설마 조사결과를 ‘거짓’으로 작성했겠느냐면서 사업자인 지자체와 조사업체를 두둔하기에 바빴다. 지자체의 일도 이러한데 중앙정부 주도의 개발사업은 어떨지 뻔하다.
제3자가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한다면 가장 많은 제동이 걸릴 사업들은 눈앞의 표를 위한 공약에서 시작되는 정부의 대규모 토건사업들이 아닐까?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경향 18.11.29
보헤미안 랩소디’를 추억하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작지 않은 화제다. 팝송을 즐겨 듣던 한 사람으로 영국 밴드 ‘퀸(Queen)’과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팝송의 전성시대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였다. 내가 팝송을 듣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였다. 중학생이 돼서 매일 심야 라디오방송을 듣고, 잡지 ‘월간팝송’을 읽고, 빌보드 차트를 눈여겨보곤 했다.
여기서 팝송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 때문이다. 예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에 따르면, 예술과 사회는 분리되지 않는다. 하우저는 내재적 방법과 예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기성 이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예술 역시 지식의 한 형태라면, 어떤 지식도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론틀을 제시하고, 사회 속의 예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돌아보면, 전후 자본주의가 ‘황금 시대’를 끝낸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복지국가의 위기(1970년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공고화(1980년대), 정보자본주의의 부상과 금융자본 세계화의 절정(1990년대)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 2008년 금융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국이 이어졌고, 이후 최근까지 불안과 분노를 수반한 포스트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고 있다.
하우저의 이론틀을 응용해 말하면, 1970년대의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 1980년대의 퀸과 U2, 1990년대의 라디오헤드와 스매싱 펌킨스, 2000년대에 들어온 다음엔 에미넴이 시대적 변동에 대한 음악적 반응이었다. 이들의 노래에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선 자아정체성의 대응이 담겨 있었다. 내 경우를 돌아봐도,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Time)’, U2의 ‘위드 오어 위드아웃 유(With or Without You)’, 라디오헤드의 ‘크립(Creep)’, 에미넴의 ‘루즈 유어셀프(Lose Yourself)’를 즐겨 들으며 살아왔다.
1970년대 중반 ‘보헤미안 랩소디’로 내 삶에 걸어 들어온 퀸의 노래들은 1990년대 초반 ‘더 쇼 머스트 고 온(The Show Must Go on)’까지 작지 않은 듣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런 팝송이 내게 가장 멀어졌던 시기는 1980년대였다. 핑크 플로이드나 퀸보다는 김민기, 정태춘, 민중가요를 더 많이 좋아했고, 더 열심히 불렀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프랑스 아날학파가 주조한 개념인 망탈리테다. 망탈리테란 특정한 시대에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사고방식 및 생활방식, 다시 말해 집합적 무의식 또는 심성을 뜻한다. 이론적으로 망탈리테는 수백 년에 걸친 장기지속의 역사에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사회변동의 속도가 빠른 사회에선 세대에 따른 망탈리테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세대적으로 접근하면,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선 산업화세대의 망탈리테, 민주화세대의 망탈리테, 그리고 청년세대의 망탈리테가 존재해 왔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내게 소환한 것은 민주화세대의 망탈리테다.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가 부른 ‘그날이 오면’과 퀸이 부른 ‘보헤미안 랩소디’는 나를 포함한 민주화세대의 긴장하고 갈등하는 망탈리테를 구성하는 한 요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날이 오면’이 구조적 차원의 해방에 대한 열망을 반영하고 있었다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에 대한 희구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86세대’로 대변되는 민주화세대가 모두 팝송을 즐겨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청년세대 또한 작지 않게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하여, 음악이 좋으면 즐기면 그만이지 사회학자 아니랄까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나를 탓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민주화시대를 돌아보며 재발견하는 망탈리테의 실체다. 민주화시대의 심층의식은 욕망과 이성,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경계에서 배양됐고, 그 긴장하고 갈등하는 양상을 집합적 무의식으로 내면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심층의식 역시 시간의 풍화를 견디지는 못할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하듯, “누구든 알 수 있어.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지식사회는 이제 민주화세대의 망탈리테와 민주화시대의 심층의식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를 시도할 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놓아두고 무엇을 간직한 채 우리 사회와 문화는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본 한 사회학자의 소회를 적어둔다./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경향 18.11.27
‘방 안의 두 거인’과 한국 경제
서울공항에 내린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5박6일간의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목표를 꽤 만족할 만큼 달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14, 15, 17일 연이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 펜스 미국 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평화 문제가 속도는 몰라도(이 점에 관해서도 시진핑 주석과 “한반도 문제 해결의 시점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해결 방향과 한국의 역할까지 공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해외 순방은 우리나라 안보와 경제의 앞날이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APEC 정상회의 사상 최초로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한 것은 불길한 징조다. 2014년 호기롭게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 건설을 공동선언한 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뉴기니 총리 말마따나 “방 안의 두 거인”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사사건건 맞섰다. 시진핑 주석은 “(미국이) 스스로 문을 닫는 것은 세계를 잃을 뿐 아니라 종국에는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고 펜스 부통령은 중국의 기술이전 강요, 지적재산권 침해, 미래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중국이 그들의 방식을 바꾸기 전까지 미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미국은 파푸아뉴기니에 미군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중국은 도로 건설에 대한 지원을 발표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맞부딪친 것이다.
경제학자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에 관해서는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학파를 막론하고 다자주의적 해결, 국제제도의 규범에 의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예컨대 최근 앤 쿠르거 교수(존스 홉킨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철강 관세를 부과했지만, 국방산업은 전체 철강소비는 3%에 불과하며, 중국 수입 철강은 단 2%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25% 관세 부과는 어디서 생산되든 미국 내 자동차 1대당 가격을 1400달러에서 7000달러 올릴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래도 수긍할 만한 “기술이전 강요” 혐의에 대해서도 다니엘 그로스 유럽정책연구센터 소장은 과거 중국 정부가 그 대가로 지대 인하, 면세, 값싼 대출 등을 제공한 것을 고려하면 미국 기업이 밑질 게 없는 장사였으며 이제 특혜가 라이선스 계약으로 바뀔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진국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중국의 중장기 계획(중국제조 2025 등)도 과거 일본의 산업정책과 다를 바 없으며 미국 또한 국방예산으로 반도체, 인터넷 등 현재의 IT 산업을 키운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닥다리 걷어차기”(장하준)인 셈이다.
미국의 거대한 무역적자가 중국에 대한 압력으로 해결되리라고 믿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국민계정에서 무역적자(흑자)는 저축부족(과잉)의 결과일 뿐이다. 직관적으로 얘기해서 미국의 소비와 투자 등 지출이 국내 저축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적자는 자본수지에서 외국자금의 유입으로 보전된다. 중국 등 흑자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매입이 대표적이다. 독일이나 일본, 한국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미국의 적자를 보전하므로, 부동산과 금융 버블에 의존하는 미국 경제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중국에 대한 압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현재의 미국 통상압력은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일환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세계를 침체에 빠뜨린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중국은 그동안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내수주도형 경제로 신속하게 이행했다. 중국의 무역흑자는 GDP의 1%대로 줄었고, 국공유기업과 지방정부의 부채는 더욱 부풀어 올랐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중국의 해외투자 역시 빠르게 진전되어 직접투자도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연간 수여되는 중국의 과학기술 분야 석사 이상 학위는 미국과 유럽을 합친 수치를 넘어섰다.
서방언론은 지난 20여년간 두가지 오보를 줄기차게 쏟아냈고 한국 언론은 받아쓰기 바빴다. 중국위기론과 북한붕괴론이 그것이다. 문 대통령의 이번 해외 순방이 순조롭게 결실을 맺는다면 후자는 이제 해외 언론의 단골 메뉴에서 빠질 것이다. 하지만 중국위기론은 오히려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천문학적 규모의 해외보유액과 중국공산당의 일관되고 신속한 대응이 그동안 위기를 봉합해 왔는데 차이메리카(중국의 수출주도성장과 미국의 부채주도성장 간 결합)의 해체와 국제정치적 혼란은 앞으로 중국이 이러한 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봐도 미국의 금리 인상과 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혼란에 선제 대응하여 중국 정부가 긴축으로 전환하면 한국은 심각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안보뿐 아니라 경제 쪽에서도 국제 환경의 변화를 면밀히 검토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대안의 제시로 이 지역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경향 18.11.19 정태인 | 독립연구자·경제학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언젠가 하나의 한반도 공동체를 같이 이룰 상대인 북한이나 인구이동, 교역, 교육 차원에서 대단히 가까운 베트남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한국인들은 교양상 구미권에 대해 철저히 배운다. 배우는 정도도 아니고 거의 내면화한다고 봐야 한다.
예컨대 북한과의 통일을 ‘북한의 자원과 저임금 인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한국 복제판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나는 대학 수업에서 북한사 관련 강좌를 하나 가르친다. 그와 함께 한국 사회정치사 강의도 하고 있어서 가끔 남한과의 비교 차원에서 북한의 역사적 역정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년간 강의하다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 강의에는 남한 교환학생이나 유학생들도 꽤나 많이 찾아와 수강한다. 그들 중에서 북한이 1950년대 말부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천해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조선왕조의 주요 군주들, 아니면 20세기의 주요 미국 대통령들에 대해서 알 만큼 아는, 교양이 풍부한 우수 학생들이, 북한사에 대해서만은 거의 북맹(北盲,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 북한사의 긍정적인 부분들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안 나오고 언론에서도 잘 다루지 않아 그렇게 된 일면도 분명히 있다. 한데 독재 시절과 달리 북한 관련 정보가 국가적으로 더 이상 철저히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한글이 아니면 영문으로라도 원하기만 하면 북한 복지체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정보 통제나 제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관심의 축, 그리고 한국에서의 앎의 지형이다.
한국인 대다수가 북맹이 된 이유를 굳이 찾자면 레드 콤플렉스나 언론들에 의한 여태까지의 북한 악마화 등에 있을 것이다. 한데 한국에서 잘 모르는 것이 꼭 북한만도 아니다. 사실 한국의 보편적인 대외적인 앎의 지형에는 어떤 커다란 이율배반이 내재돼 있다. 한국은 분명히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위치한다. 아시아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먹여살린다는 수출의 대부분 역시 아시아로 향한다. 금년 같으면 전체 수출액의 약 60%는 아시아로의 수출이다. 그것뿐인가? 지금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약 12만명의 외국인 유학생 중에서 유럽과 북미 출신들은 약 1만명에 불과하고 게다가 그 상당수는 한국 동포 출신들이다. 나머지의 대다수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베트남, 몽골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다. 유학생뿐인가? 전체 국내 체류 외국인들의 대다수는 외국 국적의 해외 동포들을 포함한 아시아 출신들이며(중국 46.7%, 베트남 7.8%, 타이 7% 등등) 유럽과 북미 출신들은 10%도 안 된다. 말하자면 인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의 ‘몸’은 당연히 아시아에 있다. 한데 ‘머리’는 완전히 따로 논다. 언젠가 하나의 한반도 공동체를 같이 이룰 상대인 북한이나 인구이동, 교역, 교육 차원에서 대단히 가까운 베트남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한국인들은 교양상 구미권에 대해 철저히 배운다. 배우는 정도도 아니고 거의 내면화한다고 봐야 한다.
그 내면화 과정의 중심에는 당연히 교육이 있다. 한국은 세계와의 무역으로 먹고살지만, 한국 학교에서 세계사는 필수가 아닌 선택 과목이다. 그런데 소수만이 선택하는 그 세계사 공부 내용도, 따지고 보면 구미 역사 이외에는 주로 중국 등 일부의 동아시아사만 포함된다.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은 한국으로서는 대미교역보다 비중이 더 크지만,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 이상은 없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성지(聖地)가 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부 인접 지역의 역사 이외에는 세계사를 거의 안 배우는 것만이 문제일까? 북한사는 그나마 한국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아주 부실하게라도 언급되지만, 한국의 평균적인 고졸이 예컨대 북한 문학이나 영화 등을 배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에는 북한 이외에 숙명적으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중국이겠지만, 세계사 수업에서 중국사를 약간 배울 수는 있어도 중국 근현대 문학은 학교의 어느 과목에도 속해 있지 않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러시아만 해도 웬만한 교양인이 충분히 알 만한 중국 문호 바진(巴金, 1904~2005)의 <가>(家, 1933) 같은 역작들을, 한국에서는 중국학 전공자들 말고는 직업 작가들조차도 잘 모른다. 한데 데이비드 샐린저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모르는 한국 독서인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 서적 시장에서 팔리는 책의 약 4분의 1은 번역서지만, 그중의 4할은 번역원서가 영어다. 중국 책의 번역출판은 4%쯤 되고, 동남아 서적의 번역출판은 1%도 안 된다. 학교 교육도 출판시장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극도로 유럽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뿌리내리도록 열심히 같이 노력한다.
학교나 출판시장에 못지않게 언론들도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의 유포에 한몫을 한다.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만든 한국의 학교 교육도 ‘우물 안 개구리’들을 키우지만, 언론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한국 주요 일간지들의 국제면 비중은 6~10% 정도이며 주요 방송사들의 국제뉴스 비중은 10~14%뿐이다. 한국의 중앙 일간지들의 해외특파원 수는 전체적으로 80명을 넘지 못해 100여명의 특파원을 가진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 하나에 못 미치지만, 그들 중의 대다수는 미국과 유럽에 상주해 있으며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에만 몰려 있다.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언론들은, 이상하게도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에 대한 보도를 영어권 주류 언론에 의존해서 한다. 영미권 통신사나 언론의 기사를 번역한 것 이외에는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등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 투자나 한류의 확산 등 자국 중심의 소식들만 보인다.
보도 행태로만 보면 한국에 아시아는 경제적 이용물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충분히 주고도 남는다. 반대로 구미권으로부터의 보도들은 현지의 문학, 연예, 사상 동향까지 포함한다. 한국 교양인이라면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푸코나 데리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데 예컨대 중국의 신좌파 사상을 대표하는 추이즈위안(崔之元)의 책 몇 종이 한국어로 번역출판됐다 해도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극소수의 전공자들뿐이다. 한국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철저한 내면화의 결과로 구미권은 ‘보편’이 돼도 나머지 세계는 그야말로 전문가들만 관심을 갖는 ‘특수’에 속한다.
무비판적 서구 추종의 결과들은 매우 심각하다. 구미가 ‘보편’이 되어 버린 만큼 한국에 맞지도 않고 그다지 긍정적인 효과도 없는 담론들도 구미의 ‘새로운 진리’라면 당장에 국내에서도 유행을 탄다.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민생이 희생되는 한국 사회에는 차라리 ‘자유시장’의 결점과 재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 신좌파들의 경제 구상이 더 적절하겠지만, 한국 대학의 경제학과들은 정통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메워져 있다. 미국 대학의 유행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학교가 여전히 커다란 병영을 방불케 하고 많은 직장들에서는 여전히 노조를 조직하려는 노동자들이 살인적 탄압을 받는 등 배움터와 일터의 기초적 민주화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지만, 한동안 상당수의 한국 지식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의 정치’나 ‘탈주’ ‘유목주의’ 등을 핵심 화두로 삼았다.
4분의 1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신음하고 3분의 1이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기본적 직장 안정성이나 사회적 권리들도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욕망의 정치보다는 임금착취나 노동배제의 정치학이 사실 훨씬 더 시급한 연구 대상이 돼야 하는데, 계급론적 접근이 더 이상 구미지역에서 유행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외면을 당해왔다. 서구가 최종의 진리를 상징하는 반면, 한국보다 더 가난한 아시아 나라들은 너무나 쉽게 이미 서구화된 한국이 ‘개발’해 주어야 하거나 경제적으로 이용해도 되는 단순한 대상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예컨대 북한과의 통일을 ‘북한의 자원과 저임금 인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한국 복제판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서구중심주의는 우리 앎의 지형을 심각하게 왜곡시켜 왔다. 한국이 북한과 평등한 통일을 이루고 아시아 이주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되자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급선무다. 18.11.13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불평등과 긴축이 경제에 나쁘다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지금의 세계경제는 위기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나.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도 10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세계경제는 위기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불평등과 자산 버블을 배경으로, 규제완화가 부추긴 금융시장의 폭주로 인한 것이었다. 위기 직후 정부와 중앙은행은 양적완화와 재정 투입으로 급한 불을 끄고 체제의 붕괴를 면했다. 또한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조명받았다.
지금의 세계경제는 얼마나 변했고 위기 이전과 얼마나 달라졌나. 선진국만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민간 부문의 부채비율은 낮아졌지만 정부 부문의 그것이 크게 높아져 경제 전체의 부채비율은 GDP의 약 380%로 위기 전후 별다른 변화가 없다. 많은 이들은 정부 부채의 급증을 우려하지만,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오히려 금융 부문의 부채비율이 2009년 GDP의 약 130%에서 2018년 현재 110%로 약간 줄어들었을 뿐이고, 이들에 대한 규제도 크게 강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계속 높아져온 불평등은 위기 이후 경제회복과 함께 다시금 높아졌다. 미국에서 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약 20%에서 위기 직후 하락했다가 2016년은 위기 이전보다 조금 높아졌고, 하위 50%의 비중은 약 14%에서 13%로 더 낮아졌다. 위기와 반성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에 맞서는 경제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었다.
한편 금융위기와 불황으로 명백히 드러난 불평등 심화는 자유민주주의의 약화를 낳았다. 소외된 저학력 백인 노동자층의 엘리트 정치에 대한 반발이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극우 포퓰리즘 현상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금기가 그랬듯이 민주정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적절히 규제할 때 체제의 안정과 높은 성장이 가능하지만, 이제는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이다.
경제학자와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도 위기를 일으킨 자유시장과 불황을 심화시킨 긴축의 문제를 인식하고 확장적 재정정책 등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긴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위기가 이후 경제사상을 완전히 변화시킨 데 비해 지금 커다란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마틴 울프 칼럼니스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사고가 지배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역시 기득권 권력이 사상과 정책의 근본 전환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옛것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오랜 위기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미국 시골을 여행하고 자신이 몰랐던 현실을 알게 되었다는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이야기처럼 엘리트들의 반성도 나타나고 있다. 중하위층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고 그들을 정치에서 소외시켜 포퓰리즘을 가져온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 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 내부에서도 급진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의 반성이 새로운 변화로 이어질지,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몰락을 넘어 좌파 정치가 성공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연합뉴스 10월10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부동산 불평등 해소를 위한 '보유세 강화 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촛불로 대표되는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었고, 새 정부도 불평등을 개선하고 총수요를 진작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불평등과 긴축이 경제에 나쁘다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상의 긴축재정을 시행했고, 논란 속에서 원래의 지향은 동력을 잃어가는 듯 보인다. 돈과 힘을 가진 기득권의 강고함은 서구보다 한국에서 더 강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 멈춰서는 안 된다. 역사와 세계를 돌아보는 넓은 시각과 긴 호흡이 한국인에게 필요하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18.11.12
촛불 정부, 너마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가 급속히 벌어지고 노동소득 간의 격차도 틈을 벌린다. 정책의 혁신이 필요하다.
한국 경제는 절망적이다. 특히 젊은이에게 그렇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한 1996년의 20대와 올해 3만 달러에 이를 지금의 20대 중 어느 쪽이 더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을까?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자라고 대답했다.
먼저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격차가 급속히 벌어지고 있다. 이 격차는 통계적으로 생산성 증가율과 실질임금 증가율의 차이로 표현되는데 2005년에서 2012년까지 한국은 이 지표의 악화에서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한다(출처:IMF). 2010년 세금 기준으로 한국의 상위 10%는 순자산의 66%를 가지고 있고, 하위 50%의 소유는 고작 1.7%이다. 이 자산의 80%가량은 부동산인데 요즘 또다시 가격이 치솟고 있다. 현재의 중위소득자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매월 200만원을 저금한다 해도 서울의 중위 아파트를 사려면 400개월, 즉 30년 넘게 걸린다.
집값이 급등하던 2005년 봄, 나는 부동산 대책의 청와대 실무 책임자였고 종부세 실효세율을 2018년 1%에 이르도록 하는 계획을 법으로 만들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0.2%로 오히려 급락한 이 세율은 현 정부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0.02% 찔끔 올랐을 뿐이다. 아이들의 희망 직업이 임대업자라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노동소득 간의 격차도 틈을 벌리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기업이 하청단가를 정확히 ‘후려칠’ 수 있다면 하청기업의 생산성 증가분은 대기업으로 이전된다. 노동조합이 없는 비정규직은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공유경제’라는 미명으로 노동력을 시간당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이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대기업과 공무원, 전문직을 합해도 일자리의 20%에 불과하니 대학 졸업장과 함께, 1000만원 단위의 학비 부채를 떠안은 50%의 젊은이들은 갈 곳이 없다.
2014년 발간된 <21세기 자본>의 피케티 지표는 자산 분배와 소득 분배가 지난 300년 동안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세 번째 공식, 즉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면 불평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고 ‘세습 자본주의’라는 역설이 성립된다는 사실은 그중에서도 백미다.
피케티는 자산 가격의 급등에만 주목해서 국제자산세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그것이 더 효과적이려면 시장 자체의 분배를 개선해서 성장률을 올릴 수 있다는 포스트케인지언의 정책과 동시에 시행되어야 한다. 또 이 두 이론은 경제적 약자들의 힘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 즉 노동조합의 강화·확대나 하청업자들의 공동교섭권, 자영업자들의 세력화를 지지한다. 얼추 세력 균형이 맞춰져야 안정적인 ‘균형가격’과 경제성장, 나아가 기술혁신도 이룰 수 있다. 뉴딜의 핵심은 노동조합을 강화한 와그너법이었다.
불평등 야기하는 원인을 체계화해 정책 확인하고 실행해야
모든 정책은 정치, 즉 세력 간의 힘겨루기를 통해서 입안되고 실행된다. 이를 감안하여 정책의 강도와 순서도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최저임금을 두고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기재부)는 사사건건 대립했고 우습게도 소득주도 성장은 청와대가 맡고 혁신 성장은 기재부가 맡는 식으로 타협했다. 불행하게도 종부세 등 자산 쪽 정책에서는 청와대와 기재부, 민주당까지 완전히 삼위일체였다. 기재부는 재정특위를 이용해서 종부세를 대폭 올릴 의지가 없다는 신호를 보냈고, 서울시장은 여의도와 용산 개발을 예고했으며, 당 대표는 그린벨트를 풀어서라도 공급을 늘리겠다고, 즉 부동산 경기를 일으키겠다고 확인했다.
대통령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재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원인을 체계화해서 각 부 장관이 해야 할 정책을 확인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청와대는 이들 정책 실행을 모니터해서 충돌을 조율하고 정치적 역관계를 고려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세력화와 시민의 지지는 이 모든 과정을 뒷받침한다. 촛불이 만든 정부마저 실패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필시 대혼란이다./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시사인 579호 18.10.23
‘공유경제’와 플랫폼 협동조합
지난 21일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기자간담회에서 ‘카카오 카풀’ 논란과 관련해 “(택시업계의) 반발은 이해하지만, 공유경제 패러다임을 거스를 수는 없다”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공유경제는 대단히 중요한 정책과제”라고 말했다. 홍 대표가 확신하는 공유경제 패러다임이란 도대체 뭘까? 우선 공유경제 하면 연상할 수 있는 오스트롬이나 벵클러의 코먼스(commons)와는 무관하다. 우버나 에어비앤비로 대표되는 ‘공유경제’는 일반적인 경제재화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중 상당히 고가이면서 실제로 사용시간은 짧고(자동차의 평균 이용 시간은 5%에 불과하다), 동시에 이용하지 않는 기간이 상당히 고정적인 재화가 그 대상이다.
약 10년 전부터 각광받은 새로운 ‘공유경제’는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기술혁신에 기초한 것이며 ‘4차 기술혁명’의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이웃 사람끼리는 출퇴근 카풀을 할 수 있지만 옆 건물의 다른 회사에 다닌다면 옆집 사람이라도 그러기 쉽지 않다. 그런 정보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은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이른바 거래비용, 특히 탐색비용을 줄여주고, 회원으로 등록할 때 기입해야 하는 각종 정보는 비대칭성의 문제도 일부 해결해 줄 수 있다. 더욱이 사용 후기나 센서 기술을 적절히 이용하면 평판에 의한 참여자 평가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앱을 제공하여 각종 정보를 모아서 성업 중인 곳이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눈덩이 효과 또는 네트워크 효과를 지닌다. 정보가 빨리 쌓이는 선도기업들은 독점이익을 누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 플랫폼에 등록된 각종 정보를 이용한 가격 차별화(예컨대 자동차 종류와 연식, 그리고 운전자의 경력, 성별, 인종에 따른 가격 차별화)로 소비자 잉여 대부분을 흡수할 수 있다. 공유의 이미지와 달리 사람과 사람(P2P) 간 대화는 없다. 오직 플랫폼에 내장된 미지의 알고리즘이 가격을 정한다. 물론 프로그래머는 우버나 에어비앤비가 최대 이익을 누리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버나 에어비앤비는 가격의 20~30%를 플랫폼 사용료로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모든 고정 자본과 정보를 일반 시민이 제공하는데도 그 이익은 플랫폼이 독점한다.
이들 기업은 기존 업체가 준수해야 하는 규제로부터도 자유롭다. 자기 자동차로 우버파트너(기사)를 하는 경우 사실상 개인면허를 딴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자격은 기계가 부여한 것이다. 미국에서 이들 파트너는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독립계약자)라서 노동법이나 사회복지 관련법이 보장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사실상 이 사업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플랫폼은 사회보험료를 낼 필요도 없고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며 각종 의무를 지지 않는 것은 물론 사고가 나도 책임이 없고 미비한 법규를 활용하여 탈세도 한다. 필경 소형차의 상대적 운행 비율이 늘어날 테니 생태 쪽의 이익도 의심스럽다.
우버파트너와 같은 노동자가 늘어나면 동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마저 프래카리아트(precariat, 극히 불안정한 임시 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다. 아예 태스크래빗처럼 사람의 능력과 시간을 토막내 활용하는 초단기 노동력 플랫폼도 있다. 이른바 ‘기그경제(gig economy)’ 속에서 노동자들은 시간당으로 마당 잔디를 깎고 난 뒤, 일주일치 설거지를 하며 이케아의 가구조립을 한 뒤, 밤에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일부를 만들기도 한다.
플랫폼 기술은 이렇게 이용되도록 결정되어 있는 걸까? 예컨대 원거리 출퇴근자를 위해 동네 사람들의 집과 회사, 출퇴근 시간을 알려주는 앱을 개발해서 이용자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하면 이 사업은 ‘공유경제’가 내건 모든 장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사실상 대리운전자인 우버파트너들은 나름의 협동조합을 구성할 수 있고, 기존 택시업체도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나아가서 코레일과 지역 렌터카 협동조합이 공동사업을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강릉까지는 기차로, 역에서부터 렌터카를 예약할 수 있다면 자가용 운전은 대폭 줄어들 것이고 편하고 싸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필요한 것은 적절한 앱과 사람들의 자발적 네트워크다. 요컨대 플랫폼 기술은 협동과 연대의 방식으로도, 시장만능의 방식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서울은 글로벌 공유도시 네트워크에 협동조합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 ‘플랫폼 경제를 위한 도시연합(Cities Alliance for Platform Economy)’이 그것이다. 이렇듯 전 세계적 규모의, 위로부터의 대안도 구상해야겠지만 지역공동체와 소비자협동조합(생협)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각종 플랫폼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각 지역을 네트워크로 묶어 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플랫폼 협동조합’이야말로 ‘공유’의 원래 의미에 값하는 진정한 대안이며 우리 시대의 경제민주화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킬 것이다./ 정태인 | 독립연구자·경제학/ 경향 18.10.22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신민족주의 파도, 세계를 삼키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극우들이 12%(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부터 37%(폴란드의 ‘법과 정의당’)까지 약 10~30%대의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지분을 안정적으로 갖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폴란드부터 일본까지 신민족주의의 파도가 전세계를 삼키게 된 것일까?
신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친자본 정책이다. 한데 ‘민족단결’, 즉 극우세력의 기반 다지기 차원에서는 ‘우리 민족/국민’에 한정해서 각종 포퓰리스트적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취직 시장에서의 경쟁자로 오인될 수 있는 이민자와 피난민 등과 함께, 대중적 편견의 대상이 되어온 각종 소수자들이 탄압을 받게 된다.
지난 8월에 세계철학대회 참석차 잠깐 중국 베이징에 들른 적이 있었다. 얼핏 보면 각국에서 온 참석자보다 경찰들이 더 많아 보여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등록접수처 바로 뒤에 걸린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라는 커다란 표어였다.
그 ‘핵심 가치관’은 열두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맨 처음 항목은 다름 아닌 부강(富强)이었다. 사회주의를 개인적 신념으로 삼고 살아온 나로서는 내 눈을 믿기가 힘들었다. 비록 ‘사회주의 핵심 가치’로서의 ‘부강’을 중국이 공식적으로 ‘prosperity’, 즉 ‘번영’이라고 영역한다 해도, 사실 ‘부강’이란 제국주의 시대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준말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부강’을 강조한 것은 수차례의 대외 침략을 감행한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일본 정부나, 일본을 벤치마킹해서 중국을 개혁하고자 했고 구한말의 조선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던 량치차오(양계초, 1873~1929) 같은 사상가들이었다. 한데 량치차오는 중국에 사회주의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그저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의 ‘부강’을 열망했을 뿐이다. 그런 역사적 맥락을 가진 ‘부강’은 과연 언제부터 ‘사회주의 핵심 가치’로 둔갑했을까?
100년 전의 망령들이 부활하는 것은 중국뿐일까? 며칠 전에 일본의 신임 문부상인 시바야마 마사히코가 1890년에 메이지 정부가 반포한 교육칙어(?育勅語)에 대해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동포를 소중히 여기는 등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현대적으로 재구성해서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장관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교육칙어의 일부분을 현대화해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아베 내각의 결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도 학교에서 외워야 했던 교육칙어의 내용에 대해서 시바야마 장관은 거짓말을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교육칙어의 텍스트에서 ‘동포’같이 수평적인 관계를 함의하는 단어들은 안 보이고, 오로지 ‘신민’(臣民)들이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그 신민들이 유사시에 “의용(義勇)을 다하여 봉공(奉公)함으로써 천양무궁(天?無窮)한 황운(皇運)을 지켜야 한다”, 즉 몸을 내던져 천황의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부강’과 ‘사회주의’가 서로 무관하듯이, 근대 민주주의와 몸을 내던져 ‘황운을 지키라’고 훈화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도대체 한반도의 서쪽과 동쪽에서는 지금 어떤 사상적인 변화의 움직임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는 만주국 고위급 관료로서 군국 일본의 중국 침략에 앞장섰던 반면,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제창하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1913~2002)은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투사였고, 국가의 ‘부강’보다 ‘민생’을 더 중시한 나머지 마오쩌둥으로부터 여러 차례 박해를 받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지도자 개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는 세계 각국에서 감지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전체의 하나의 경향이다. 신민족주의는 과연 동아시아만을 강타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체제에서 서로 위치가 판이하게 다른 핵심부 미국과 준주변부 러시아, 터키 등지에서 ‘강력한 지도자’들이 ‘우리 대국의 부활’을 외치면서 기염을 토한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스웨덴에서마저도 이민자들을 더이상 절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극우 ‘스웨덴 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17% 이상의 득표 결과를 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니, 놀랄 일도 사실 없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극우들이 12%(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부터 37%(폴란드의 ‘법과 정의당’)까지 약 10~30%대의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지분을 안정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폴란드부터 일본까지 신민족주의의 파도가 전세계를 삼키게 된 것일까?
역시 놀랄 일도 없다. 극우들이 극성을 부렸던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대대적인 위기가 민족주의 광풍을 가져오는 것이다. 전후 호황이 끝난 지 이미 40여년이 지났고, 그때 만들어진 이래로 근근이 그 근간이라도 이어왔던 복지체계는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개악들과 2008년 공황 이후의 긴축정책 등에 의해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나마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고속성장은 이미 6%대로 한풀 꺾였고, 부실한 복지망에도 불구하고 한때 노동자들에게 ‘종신고용’의 단꿈을 안겨주었던 일본은 이제 비정규직 비율이 약 37%나 된다. 차세대 노동자들이 고용불안과 저임금, 그리고 높은 주거비용에 맞닥뜨려 사회 진출에 큰 고통을 느끼지만, 자본가들도 세계 시장의 포화와 이윤율 저하로 고심한다. 사실, 노동자이자 세입자이기도 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주거비 인상의 근본적 이유 중 하나는 이윤 마진이 떨어진 제조업 대신에 부자들의 돈이 대거 부동산 투기에 몰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이 고장날 때마다 대중들은 자연스럽게 급진화된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나 영국의 제러미 코빈의 인기 상승이나, 한국의 20대 사이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들은 바로 이 경향을 대변한다. 그러나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좌파적 대중 동원 못지않게 극우적 대중 동원의 그림자도 짙어져간다. 좌파는 1936~38년의 프랑스 인민전선처럼 재분배의 활성화와 일부 생산시설의 사회화를 제시하지만, 극우들 역시 193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민족 국가’와 ‘민족 경제’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아직도(!) 1930년대 후반과 달리 여러 극우 정권이 세계 규모의 침략 전쟁을 발발시키지 않은 것은 그나마 약간의 위안이 되는 차이가 존재할 뿐인데, 불행히 이것도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1930년대 파시스트들처럼 신민족주의자들이 자본에도 노동에도 당근을 던진다. 물론 자본에 던지는 당근은 가장 크다. 기업세 인하나 양적 완화, 대대적인 기간시설 확충 프로젝트부터 트럼프가 이제 노골적으로 시도하는 보호무역으로의 귀환까지, 자본은 공격적·경쟁적인 성장주의 의제의 수혜자가 된다. 언론에 대한 통제 강화 등 각종 권위주의적 시책으로 오명을 얻은 신민족주의의 대표 격인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는 누진세율 대신 빈부와 상관없는 15%의 일률 과세를 도입해 부자들의 세금을 크게 깎아주기도 했다. 사실, 전형적 신권위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은 다 10~13%의 비교적 낮은 일률 과세율로 신흥부유층의 자본 축적을 열심히 돕는다. 이와 함께 총자본에 도움이 되는 것은 군수기업들을 지원하는 경향적인 군비 인상이다. 지난 20년 동안 계속 커져온 세계의 군비는, 지금 이미 냉전 말기의 수준을 상회한다.
고전적인 파시즘처럼 신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친자본 정책이다. 한데 ‘민족 단결’, 즉 극우세력의 기반 다지기 차원에서는 ‘우리 민족/국민’에 한정해서 각종 포퓰리스트적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취직 시장에서의 경쟁자로 오인될 수 있는 이민자와 피난민 등과 함께 여태까지 대중적 편견의 대상이 되어온 각종 소수자들이 탄압을 받게 된다. 배외주의적 ‘국민동원’과 군사주의적 대결 등으로, 다수의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하거나 떨어지는 상황에서 피지배층의 민심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피지배층이 이와 같은 국가주의적 선동에 넘어가는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저지하지 못한 좌파 내지 중도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이 부분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약 문재인 정권의 사회경제정책이 실패하면 국내 대중의 민심도 얼마든지 다시 우향우할 수 있다. 평화정책 못지않게 민간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재벌개혁, 부유층에 대한 세율 인상과 복지 지출의 대폭 강화에 당장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18.10.16
예수 상품’을 파는 이들, 혐오 정치를 멈추라
일부 개신교인들이 성소수자·난민 혐오 정치에 가담하고 있다. 이들은 혐오 행위가 예수 정신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난 8월2일 청와대 앞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개신교 목사들은 손가락 혈서로 “NAP 절대 반대”라고 쓴 문구를 각기 한 글자씩 들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의 목사들 뒤에는 동원된 신도들이 포진했다. 국무회의에서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안(NAP)’이 통과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시위였다. 이들은 스스로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단체들의 목사이다. 정부가 NAP를 실행하면 순교할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8월7일 국무회의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자, 성평등 지향이 “동성애를 옹호”하기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뿐인가. 개신교 정신으로 설립되었다는 한 대학에서,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강연자를 초청한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한 신학대학은 학생들이 성소수자 포용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징계했다. 그 신학대학은 동성애 옹호의 흔적이 있으면 입학이나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충남의 개신교 단체들은 9월12일 ‘인권조례를 제정하면 동성애자·난민이 몰려올 것’이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충남도의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퀴어문화축제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폭력적 방해자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예수 따르는 이들’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표명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혐오 정치에 가담하는 행위 자체가 예수 정신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사유 없음의 종교’는 이렇게 왜곡되고 폭력적일 수 있다. 혐오 정치를 예수 믿음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에게서, 예수는 단지 종교적 상품일 뿐이다. 교회들은 예수 상품을 만들고 구원을 파는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 상품은 교회라는 기업의 유지를 위해서 오용되며 예수는 혐오주의자로 소비된다.
혐오 정치는 예수의 이름으로 종교 기업가들에 의해 구성되고 확산되고 신성화되고 있다. 교회 세습, 성소수자 혐오, 타 종교 혐오, 여성 혐오, 난민 혐오들로 이어지는 한국 교회의 파괴적 사회 개입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 예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혐오 정치를 전염병처럼 확산시키고 있다. 개신교에 대한 냉소적 표현으로 등장한 ‘개독교’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이다. 개는 적어도 노골적인 혐오를 조직적으로 행사하지 않는다.
ⓒ연합뉴스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효자동 청와대 입구에서 동성애 동성혼 개헌 반대 국민연합 주최로 열린 집회에 참석한 목회자들이 '국가인권정책(NAP) 기본계획' 규탄 및 폐지를 주장하며 혈서를 쓴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작 예수는 성서 그 어느 곳에서도 종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화된 종교나 교리들이 인간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면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수의 주요 행적과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 개별 인간들이 이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는 육체적·정신적 배고픔, 의미에의 목마름, 다층적 아픔, 헐벗음, 소외된 주변인 등에 대한 책임과 환대가 바로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사랑이 바로 신에 대한 사랑과 같음을 가르친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 확장 위해 순교를 호명한다면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종교가 아닌 타자에 대한 사랑·환대·책임성에 관한 것뿐이다. 그래서 존 카푸토는 “종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Religion is for lovers)”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 예수가 정작 무엇을 하라고 했는지는 관심 없다.
타자에 대한 절대적 포용과 사랑을 가르쳤던 예수가 현장에 있었다면 통탄했을 일이다. 혈서를 쓰며 순교까지 각오하는 그 비장한 결의를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 확장을 위한 열정으로 돌리면서 순교를 호명한다면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이제 신과 예수를 호명하며 혐오 정치를 신성화하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차라리 예수의 이름을 떼어버리고, 노골적 혐오 집단으로 등장하는 것이 정직하다. 예수는 모든 종류의 혐오와 차별을 넘어서는 절대적 포용과 환대를 상징하는 이름이며, 혐오 정치는 인류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시사인 567호 18.10.1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리 미래, 약육강식 없는 사회로
유일한 장기적 해결책은, 독일이 이미 시행하는 것처럼 대대적인 이민 수용이다. 대한민국은 현재의 노르웨이·스웨덴처럼 외국계 인구가 총인구의 17~18%를 구성하는 이민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존립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고 봐야 한다.
국제곡물가가 급등할 경우 대한민국이 받을 타격은 ‘오일쇼크’ 이상일지 모른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몇십년 후 다시 부딪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농업지원 강화와 새로운 기후조건 적합 품종의 개발과 보급에 나서야 한다.
1949년 12월16일. 눈 덮인 엄동의 소련 모스크바로 중국의 새 지도자인 마오쩌둥(이하 마오)이 기차를 타고 왔다. 그로서는 불안했을 법한 소련 방문이었다. 그는 외국어를 못했으며 그때까지 외국에 나가본 일도 없었다. 게다가 신중국이 건국된 지 두 달 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중-소 관계는 그 성질상 당시로서는 평등할 리가 없었다. 제2차 대전의 승전국이며 핵보유국인 소련은 거의 30년 동안이나 중국 공산당의 후원자 역할을 해온 반면, 마오의 새 나라는 아직 그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농업국가였다. 마오가 소련의 스탈린에게 요청해야 할 사항들은 소련 부대의 뤼순 철수부터 무기와 차관 제공까지 태산 같았다. 마오로서는 얼마든지 위축될 만한 상황이었다.
한데 그는 위축되긴커녕 스탈린이 놀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소련이 홀대하려 할 때마다 이를 큰소리로 꾸짖는가 하면, 스탈린과의 첫 대면에서 소련 공산당이 중국 혁명 문제를 둘러싸고 범한 오류들을 과감하게 지적해 스탈린으로부터 사과 발언을 얻어냈다. 그리고 새로운 중-소 조약을 협상했을 때에는 사사건건 따져가면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지키려 했다.
이런 당당함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마오는 정치인이면서 철학가였고, 중국의 과거에 정통한 만큼 미래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다. 그는 소련이나 미국의 강성함이 역사의 ‘법칙’이라기보다는 ‘예외’에 가깝다는 것을 역사 공부를 통해 너무나 잘 알았다. 한나라 시절부터 제1차 아편전쟁까지 중국이 유라시아 세계의 경제·문화적 중심이었다는 것도, 서세동점의 시기가 언젠가 끝나고 이런 상태가 회복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은 힘이 모자라도, 그는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면서 스탈린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맞짱을 뜰 수 있었다. 1949년 당시와는 완전히 역전된 오늘날 중-러 관계를 보면 마오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정치나 정책은, 적어도 수십년 정도의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고려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장기적인 미래비전을 가진 사회야말로 숫자놀이에 불과한 ‘성장’이 아닌 질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하면서 정책의 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어떤 부분부터 중시해야 할 것인가?
첫째, 나라의 근간은 인민이다. 이미 출산율이 1.0에도 못 미치는 초저출산 사회가 된 한국의 인구는, 유엔의 예측에 따르면 2100년에는 3870만7천명으로 감소할 것이다. 그때는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93살이 되어 고령 인구에 대한 돌봄 노동이야말로 가장 큰 사회적 과제로 부상할 것이다. 과감한 대학 평준화와 무상화로 막대한 사교육비를 줄여 육아 부담을 덜어준다면 출산율은 이와 같은 교육체계를 갖춘 독일 수준(1.5 정도)으로 오를지도 모른다.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구의 자연재생산은 어차피 불가능할 것이다. 유일한 장기적 해결책은, 독일이 이미 시행하는 것처럼 대대적인 이민 수용이다. 대한민국은 현재의 노르웨이·스웨덴처럼 외국계 인구가 총인구의 17~18%를 구성하는 이민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존립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민사회로 가는 것은 ‘다문화’ 같은, 내용 없는 구호만으로는 안 된다. 일단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여 다른 이민사회들과 같은 정상적인 노동이민제를 채택해야 할 것이다. 즉, 대한민국으로 오는 노동자들이 이 사회에 기여하는 만큼 멀지 않은 미래에 영주권과 국적을 얻어 정착할 수 있다는 비전이 있어야 진정한 ‘다문화’의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구호를 넘어 진짜 ‘다문화’로 가자면 이민자들의 출신 사회와 본래 문화에 대한 수용과 존중의 태도부터 가져야 한다. 학교에서부터 표준어와 함께 연변 말의 대강을 잠깐이나마 가르치고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역사와 문학을 가르쳐야 각종 마찰·갈등 방지와 상호존중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인민들에게는 먹을거리부터 필요하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산업화된 나라들 중에서는 제일 낮은 축에 속한다. 현재로서는 50% 정도지만, 쌀만 제외하면 수입 의존은 절대적이다.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보리, 밀, 옥수수, 콩 등)의 평균 자급률은 13%밖에 안 된다. 사실 국제곡물가가 급등할 경우 대한민국이 받을 타격은 ‘오일쇼크’ 이상일지 모른다. 문제는 장기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지금 한반도의 평균기온은 섭씨 12.3도지만, 전지구적 온난화에 따라 2050년에 이르면 3.2도가 더 올라 15.5도 정도가 될 전망이다. 폭염, 가뭄, 폭우가 잦아질 새로운 상황에 대한 한국 농업의 대응은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 전체 논(98만4천㏊) 중 10년 빈도의 가뭄에 견딜 수 있는 논은 53%에 불과하다. 한데 국제적으로도 농지의 상당 부분은 사막화되고 있어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 기댈 곡물시장에서 곡물가는 앙등할 것이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몇십년 후 다시 부딪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농업지원 강화와 새로운 기후조건 적합 품종의 개발과 보급에 나서야 한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인구 과밀의 좁은 반도의 기후가 아열대화되는 상황에서 우리도 아주 힘든 상황을 겪을지 모른다.
셋째, 나라의 존재 이유는 인민의 행복이고 인민 행복의 근간은 심신의 건강이다. 한데 지금 대한민국은 구조적인 병리사회의 한 사례다. 올해 명목상 1인당 국민총생산은 유럽연합(3만3천달러)에 가까운 3만달러지만, 각자의 삶의 질은 그 어느 산업화된 사회보다 훨씬 열악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한국형 자본주의 모델이 불안정과 과잉 경쟁, 그리고 여전한 장시간·고강도 노동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만큼 평균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짧은 나라, 즉 직장 불안정성이 강한 나라는 산업화된 세계에서 찾기 힘들다. 한국 직장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 일자리에서 3년을 버티지 못하며, 평균 근속연수는 4.5년에 불과하다. 직장에 있더라도 업적 경쟁에 더해 충성 경쟁까지 살인적이고, 거기에다가 많은 업종에서는 여전히 1970년대 못지않은 초장시간 노동이 지배적이다. 과로사로 인정받는 경우만 해마다 300명이 넘는다. 여전히 경쟁, 스트레스, 과로가 한국인을 죽이고 병들게 한다.
한국형 신자유주의는 저출산의 주된 요인 중 하나이며 한국인에게는 지구온난화 이상의 재앙이다. 이 지옥적 시스템을 뜯어고치려면 단순히 소득주도 성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학 평준화와 재분배 장치 강화만으로도 부족하며, 민간부문 비정규직 고용 사유 제한과 모든 노동자들의 경영참여권 획득은 필수적이다. 그래야 불안·경쟁·스트레스의 분위기를 협동과 연대의 분위기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미래 행복의 전제조건 중 하나는 바로 생존이다. 이민사회로의 이행도, 수출이 아닌 식량 자급화와 같은 기초적 과제에의 집중도 바로 생존 보장의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제조건은 이윤 극대화와 경쟁논리와의 완전한 작별이다. 이윤을 바라는 투자자들이 아닌, 안정되고 쾌적한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들이 일터의 주인이 되어야 이 전제조건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주류 매체들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운운하지만, 미래의 진정한 문제는 ‘성장’이 아닌 각자의 삶의 질과 행복이다. 밟히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밟아야 하며 늘 불안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회에서 행복이란 없다. 약육강식·각자도생이 없는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이야말로 백년대계가 되고 ‘개혁’이 될 수 있다. 18.9.11
혁신성장 위해 진정 필요한 것
여름 들어 정부의 경제정책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혁신과 생산성을 높이려면 먼저 최근 한국 기업의 투자가 둔화되었는지, 그 요인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여름 들어 정부의 경제정책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에서 혁신성장으로의 이 전환에서 주역은 기업이며 수단은 역시 규제 완화다. 경제 성과가 급한 정부의 고민도 이해하고, 정부와 기업이 소통하는 것이 문제 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투자를 위해 정부가 재벌에 기대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과거와 비슷하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최근 크게 늘어난 재벌의 사내유보금 일부를 투자로 돌리려는 방안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라는 관측도 제시된다. 그러나 먼저, 최근 한국 기업의 투자가 둔화되었는지, 그 요인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나아가 진정으로 혁신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한국 경제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2016년 -1%를 기록한 후 2017년에는 14.6%로 아주 높았다. 하지만 2018년 2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3.9%로 급락했다. 30대 재벌그룹의 투자는 2016년에는 약 18.1% 감소했다가 2017년에 36.3% 증가했으며 올해 상반기에도 크게 늘어났다.
기업의 투자는 기본적으로 매출과 수익성에 반응하기 마련인데, 자동차·조선 등 주력산업의 경쟁력 둔화를 배경으로 매출과 수익성이 약해지고 있다고 지적된다. 실제로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오랫동안 하락해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이며, 한국은행에 따르면 제조업 전체의 매출액 증가율도 2013년 이후 뚝 떨어져 2014년에서 2016년까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약 10%나 늘어났고, 둔화되던 수익성도 꽤 높아졌다.
문제는 삼성전자와 같은 극소수 핵심 대기업을 제외한 여러 대기업들의 매출액, 수익성 그리고 투자가 오랫동안 정체되어왔다는 점이다. 결국 기업의 투자는 지난해 매우 활발했으나 최근 급속히 둔화되고, 대기업들 내부에서도 수익과 투자에서 집중과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규제를 푸는 것만이 과연 능사일까.
규제 완화가 생산성 상승과 혁신을 자극할지도 의문이다. 생산성 상승이 성장의 핵심이며 2010년 이후 한국 경제의 생산성 상승이 둔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얼마 전 한국개발연구원이 낸 보고서는 기업집단에 속한 재벌기업의 기업 간 자원배분 효율성이 낮은 것이 주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생산성 상승의 원천은 독점의 억제와 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제조업 생산과정 내부의 혁신과 선순환하는 산업 생태계의 확립도 중요할 것이다.
신산업이 중요하다지만 정작 승차 공유 서비스 사업의 규제 완화는 이해 집단의 반발에 직면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최근 급속히 추진 중인 인터넷 은행의 ‘은산 분리’ 규제 완화는 논리적으로 근거가 미약하다. 은산 분리를 유지하면서도 인터넷 은행은 발전할 수 있다. 페이 기술이나 핀테크는 은산 분리의 규제 완화와 별 관련이 없으며 고용 효과도 미미하다. 반대로 은산 분리 규제 완화로 인한 위험은 엄청나게 클 수 있다. 어떤 규제 완화가 경제에 도움이 될지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규제만 푼다고 투자와 혁신이 절로 따라올까
신기술과 관련된 혁신의 지름길도 단지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에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다. <혁신경제에서 자본주의 하기>라는 책을 쓴 윌리엄 제인웨이는 혁신의 촉진에 정부 역할이 핵심적이라고 강조한다. 총수요가 부족하면 민간의 투자와 신기술 도입이 정체되는 반면, 민간 부문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슘페터가 말한 혁신의 노력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적극적으로 수요를 관리하고 모험투자를 자극하며 기초연구 개발을 과감하게 지원하는 것이다. 여러 선진국의 경험에서 보듯 기회의 불평등을 낮추고 사회복지와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혁신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규제만 푼다고 투자와 혁신이 절로 따라온다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이해를 반영한 것 아닐까. 정부는 혁신성장을 위해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자문해봐야 한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18. 9.1 572호
문재인 정부가 ‘재벌 독점’ 막으려면
독점은 중소기업과 소비자로부터 부를 착취하는 한편, 소비와 생산도 줄여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을 축소시킨다. 최저임금법만큼 독점규제법이 중요하다.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은 주로 ‘공정거래법’이라고 불리지만 그 연원을 따져보면 ‘독점규제법’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시장경제에서 독점은 공정과 불공정을 따지기 이전에 중소기업과 소비자로부터 부를 착취하는 한편, 소비와 생산도 축소시켜 결국 사회 전체의 효용을 축소시킨다는 것이 미시경제학의 변함없는 결론이다.
장하준 교수는 “자본에도 국적이 있다”라고 말한다. 미국·영국 등은 보호무역으로 이득을 취한 자국의 성장사를 은폐하고, 근래 들어서는 ‘자유무역과 비교우위가 국내 경제를 발전시킨다’고 후발국에게 강요해왔다. 장하준은 선진국의 이런 행태를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비판했다. 이 논리를 바탕으로 외국 기업의 시장 침투에 맞서 국내 재벌 해체에 반대하는 것이 장 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독점규제법은 외국 기업의 시장 침투를 규제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국내 기업 간의 경쟁, 그리고 기업과 소비자 간 경쟁을 위한 법이다. ‘경쟁’은 결과적으로 영업의 자유와 소비자 후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김상조의 공정거래위원회도 재벌 해체 또는 재벌의 지배구조, 즉 ‘내부적 규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다. 재벌이 외부, 즉 시장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를 살펴야 한다. 최저임금법만큼 소득분배에서 중요한 것은 독점규제법이다. 대기업의 시장지배력 남용이 중소기업을 도태시키거나 압박하면서 산업별로 2~3개 대기업의 종사자만 안정적일 뿐이다. ‘국가경제’라는 구호에 속아서도 안 된다. 양승태의 ‘재판 거래’ 내부 문건을 보면 국가경제를 위해 선고했다며 ‘키코 사건’에서 은행 측이 승소한 판결을 대(對)청와대 홍보용으로 열거한다. 외화를 건실히 벌던 중소기업 수백 개를 파산시켜야 하는 국가경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특정 산업을 육성하자거나 재벌을 해체하지 말자는 것과 재벌의 시장지배력 남용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문재인 정부가 재벌의 폐해를 막고자 한다면 수직계열화 전쟁에서 벌어지는 중소기업 고사를 막아야 한다. 재벌은 자금력으로 1개의 시장(예를 들어 극장)에서 점유율을 높이면 이를 바탕으로 이웃 시장(예를 들어 영화 투자배급)도 장악하기를 반복해왔다. 이 와중에 비계열사들은 하나둘씩 고사해버렸다. 이른바 대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 거래 거절, 배타적 거래 등으로 비계열사들이 차별받기 때문인데 이것만 잘 감시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재벌들은 차별적 취급을 안 해도 비계열사들을 고사시킬 수 있다. 지금 영화시장이 그렇다. CGV가 지난 5년간 누적 영업이익 3000억원을 올리는 동안 계열사 CJ E&M은 같은 기간 누적 영업이익이 -200억원이다. 영화배급사인 CJ E&M이 일부러 자신에게 불리하도록 CGV와 계약하면서 발생한 결과다. 다른 극장·배급 복합체들도 마찬가지다. 비계열사 배급사들은 롯데, 메가박스, CGV 3사가 스크린의 97%를 점유한 상황에서 이들의 스크린에 의지해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똑같이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할 수밖에 없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한 번도 빼어든 적 없는 칼날
공정거래위원회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제재에 대해 법원은 ‘몰아주기’의 정도가 현저하지 않다며 기업 측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위 행위는 독점규제법상 이윤 압착(또는 약탈적 가격 책정)으로 제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공정위는 한 번도 빼어든 적이 없는 칼날이다. 이뿐만 아니다. 최근 이동통신사들이 직접 또는 계열사를 통해 만든 콘텐츠(SKT는 11번가, KT는 지니 등) 이용에 대해 이통사 고객들에게 과금하지 않는 이른바 ‘자사 콘텐츠 제로레이팅’도 문제가 있다. 기업은 비계열사 콘텐츠도 똑같이 제로레이팅을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동통신 3사가 시장을 100% 점유한 상황에서 자사 콘텐츠 제로레이팅을 시작한다면 콘텐츠 사업자 전반에 미칠 영향이 크다. 통신 대기업은 ‘제로레이팅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모든 콘텐츠 사업자들에게 ‘공평하게’ 제시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정부의 경쟁 정책이 훨씬 더 세련되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사인 570호 18. 8.13
청와대의 참 이상한 ‘실사구시’
“중요한 것은 무슨 원칙이나 주의가 아니라 국민 삶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늘다는 실사구시 정신이다.”
언론에 보도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나는 그 ‘관계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특정 개인보다 청와대의 전반적 기조가 중요해서다. ‘실사구시’가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이 과거의 틀을 벗어나기는커녕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행정적 탄압을 받고 있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모르쇠를 놓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발언이라면, 분명히 경고한다. 문재인 정부의 미래는 어둡다.
물론, 문재인 정부에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촉구하는 지식인 300여 명의 공동선언을 놓고 송호근 서울대 교수처럼 “현실을 무시한 고루한 선비들”이라며 자신이 미쳐버릴 정도라고 깐죽대는 윤똑똑이도 있다. 재벌신문에 오래 기고해온 송호근은 제 멋에 겨운 그 칼럼에서도 “재벌 개혁?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근절과 거버넌스 개조는 환영할 일인데, 온갖 규제로 목을 옥죄면 미래 대응적 투자가 가능할까?”라고 주장했다. 저야말로 ‘사민주의’를 아는 대가인 듯 우쭐대지만 결국 재벌 두남두기의 ‘교언영색 대가’일 따름이다. 딴은 삼성의 ‘장충기 문자’ 명단에도 오른 그를 청와대 비서실은 올해 초 ‘공부’를 하겠다며 초청해 ‘강의’도 들었다.
명토박아둔다. 그나마 300여 명의 지식인들이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촉구한 내용은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무슨 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무릇 ‘실사구시’라는 말은 목표가 확고할 때 쓰는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 문재인 정부의 목표가 흔들린다는데 있다. 복지정책의 획기적 확대나 노사 사이의 힘의 균형에 문제의식이 절절해 보이지 않는다. 정책 목표와 정책 의지가 치열할 때 비로소 실사구시라는 말이 제 이름에 값할 수 있다.
거들먹거리는 ‘교언영색의 먹물들’과 달리 학자의 본분에 충실한 전문가들이 강조해왔듯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지출 비중에서 대한민국은 OECD 34개국 가운데 32위(32.35%)다. OECD 평균(40.55%)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신자유주의 종주국 미국도 37.8%이다.
그 말은 문재인 정부에 사회경제 정책 확대를 촉구하는 선언이 무슨 ‘주의’에서 비롯한 ‘원칙’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구나 한국 경제는 사회복지를 늘릴 조건도 갖추고 있다. 조세부담률이 20% 수준으로 OECD 평균 25%에 크게 떨어진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에서 최근 내놓은 세법개정안은 외려 감세로 귀결되었다. 대체 어쩌자는 셈인가. 정치인 문재인을 무조건 지지한다고 대통령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세련된 보수논객’을 초청해 청와대가 학습할 때도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세부담 의제만 나오면 ‘세금 폭탄’이나 ‘기업 죽이기’ 따위로 여론을 몰아치는 재벌신문과 그 신문에 기고하며 틈날 때마다 진보세력을 비난하는 ‘사이비 사민주의자’들로 대한민국의 여론 지형은 크게 뒤틀려 있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나눠 아이를 낳으면 자녀수당, 보육비에 이어 대학 졸업할 때까지 교육비를 모두 챙겨주고, 1년에 휴가를 6주나 가고, 해고되더라도 실업 수당이 나와 생존권에 위협을 받지 않는 사회는 무슨 꿈나라가 아니다. 인구가 적은 북유럽국가만도 아니다. 보수당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독일도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복지’를 이야기하면 대뜸 ‘포퓰리즘’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언제나 기득권을 대변해온 언론인과 교수들 ‘덕분’이다. 노동운동을 마녀 사냥해 온 저들은 늘 ‘국가 경쟁력’을 들먹인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노사공동경영제도를 도입한 독일의 제조업과 경제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튼튼하다.
간곡히 거듭 촉구한다. 설령 패하더라도 제발 제대로 싸워 보기 바란다. ‘촛불정부’의 참 이상한 ‘실사구시’로는 “국민 삶을 개선”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년을 맞아 쓴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8.8.15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높으신 분’ 없는 세상을 위하여!
체면’에 해당하는 표현이야 노르웨이어에도 있다. 한데 구미권 언어에서 ‘자존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체면은, 한국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위자의 저자세가 상위자의 ‘체면 유지’를 담보해야 하고, 상위자의 ‘체면’이 하위자의 자존감을 깡그리 밟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청산의 실패를 단순히 ‘과거 탓’으로 돌리기가 힘들다. 권위주의의 온존과 지속은 결국 현실적 권력집중과 비민주성을 반영할 뿐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노르웨이 총리와 달리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은 대통령이 쥐고 있는 엄청난 권력이다.
노르웨이에서 한국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나 혼자다. 그렇다 보니 나한테 주변에서 자꾸 ‘한국문화 해석’(?) 요청들이 들어온다. 한국을 이런저런 사연으로 접하게 된 동료나 아는 사람들이 뭔가 이해 못 할 상황에 부딪히면 나에게 와서 묻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온 문의를 사례로 들겠다. 한 노르웨이 대학에 한국의 어떤 대학에서 시찰단이 찾아왔다. 시찰단이 머물고 간 뒤에 그 영접 의무를 맡은 교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나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학생들과 교수로 구성된 그 시찰단에서는 왜 모든 실무를 학생들이 다 도맡아 하고 교수는 부동자세로 앉아 별다른 표정 없이 설명을 듣고 학생들에게 명령만 그때그때 하는가? 영어를 더듬더듬하는 듯한 그 교수는 왜 학생들 앞에서 노르웨이 측과의 영어 대화를 거의 기피하는가? 왜 노르웨이 측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도 교수가 아닌 학생이나 조교들이 다 대신 맡는 것인가?
‘체면’에 해당하는 표현이야 노르웨이어에도 있다. 한데 구미권 언어에서 ‘자존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체면은, 한국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위자의 저자세가 상위자의 ‘체면 유지’를 담보해야 하고, 상위자의 ‘체면’이 하위자의 자존감을 깡그리 밟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자세로 ‘폼을 잡고 앉아 있는’ 상위자 주위에서 하위자들이 하인처럼 모든 일을 도맡아야 보스의 ‘체면’이 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직적인 노동분담은 당연히 어느 나라의 조직생활에나 다 있다.
북유럽이라 해도 교원과 직원, 학생이 맡아서 하는 일은 각각 다르다. 차이라면 한국의 ‘조직문화’에서는 상위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하위자들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정하지도 못한 노동분담은 더 나아가서 인신지배와 같은 형태를 띤다. 학생들을 거느리고 국외 시찰에 나선 한국 ‘교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농장주가 농노들을 데리고 다니는 광경이 아니냐고 의아해한다. 이렇게 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는가?
(내 학생들도 한국 신문 자료 등을 인터넷으로 보다가 가끔 나에게 그 문화적 맥락을 해석해달라고 질문하곤 한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이 어느 날 저녁 어느 곳의 한 호프집에서 시민들과 만났다’는 등의 뉴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대통령과 시민’이라는 어법부터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대통령도 결국 일개 시민이 아니냐고 나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를 뽑은 유권자들을 만나서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게 왜 뉴스거리가 되느냐는 것이 제일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총리나 장관 등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거나 어느 지역 내지 현장을 방문하여 주민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뉴스도 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 자리에서 모종의 특별한 발언이라도 나오면 그때 뉴스에 오를까 말까 한다. 한국에서 고위관료, 특히 대통령이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사람으로 간주되어 일반인과 평등하게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미 동아시아 역사를 어느 정도 배운 학생들은 이런 ‘민생투어’ 같은 관습이 고대와 중세의 군주 순행(巡幸) 의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 일면에서 그렇기도 하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북한의 ‘현지지도’와 같은 정치적 행위의 패턴도 전통시대 군주의 순행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데 우리도 보통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시하는 이와 같은 일상 속의 권위의식·권위주의는 단순히 과거의 유습만은 아니다. 과거는 현재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긴 하지만, 과거의 결정력은 전혀 절대적이지 않다. 오늘날 왕족이나 내각 각료가 자전거를 당연하게 타고 다니는, 평등의식이 철저한 덴마크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는 귀족은 그 농노에게 체벌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경우까지 적지 않게 나타나곤 했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모든 북유럽 국가는 불평등이 당연시됐던 봉건제라는 역사적 유산을 안고 있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청산에 있어서의 실패를 단순히 ‘과거 탓’으로 돌리기가 힘들 것이다.
권위주의의 온존과 지속은 결국 현실적 권력집중과 비민주성을 반영할 뿐이다. 한국 대통령이 노르웨이 총리와 달리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은 대통령이 쥐고 있는 엄청난 권력이다. 신권(臣權)이 왕권(王權)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임금보다 오늘날 대통령의 권한이 어떤 면에서 더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중앙부처 장차관, 공공기관 기관장·감사 등)만 해도 3천~4천개 정도 된다. 국립박물관 관장까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광경을, 북유럽에서라면 아예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공기관이지만 전문기관인 만큼 기관장 인사를 전문가들로 구성된 인사위원회가 처리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한데 한국에서는 전문성보다 ‘정치적 판단’, 즉 통치권자의 권력행사가 앞선다.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검찰, 법원, 주요 방송국 등)까지 포함하면 1만개 이상 될 것이니 온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제왕적 권력이라 하겠다. 대통령 자리에 박근혜같이 무능하고 범죄성이 강한 사람이 들어가기만 하면 사실 상당 부분의 국가 기능이 거의 마비될 정도로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이 지나치다. 이와 같은 정도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과연 ‘시민’의 한명으로 간주하여 평등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정규직 교수들의 권력 남용에 대해 최근에 이야기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학부생이라면 요즘 대학에서 차라리 ‘고객’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굳이 개별 교수에게 인신지배까지 받을 이유는 보통 그다지 없다. 한데 임시직 취직도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요즘 청년실업 보편화의 시대에는 학생들 간의 성적 경쟁이 치열할 때가 있고 북유럽과 달리 대부분 한국 대학은 상대평가를 실시한다. 동시에 북유럽과 달리 보통 익명평가와 같은, 평가의 객관성을 보장하는 방식도 아니고 외부 시험관이 같이 채점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성적이라는 무기를 휘둘러 학생의 장차 취업 가능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갑’에게 학생들이 ‘깍듯이’ 대할 것은 충분히 예상된다. 그리고 학부생이 ‘고객’이라면 요즘 대학원생은 교수의 ‘노예’에 가깝다. 아마도 국내 갑을 관계 중에서 가장 심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다. 여기에서도 군사부일체 따위의 낡은 관념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민주성이 태부족한 이 사회의 현실이다.
권력은 현재 인류 문명의 필요악이다. 이상적으로 무권력, 무계급 사회로 이동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고 서열화시키는 권력이라는 독소는 불가피하게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은 권력의 분산과 권력에 대한 민주적 견제다. 만약 노르웨이처럼 한국에서도 학과부터 대학 전체까지 학교의 각급 운영위원회나 이사회에 비정규직과 학생들의 대표도 참석한다면 ‘교수님’들의 권력을 어느 정도 견제하여 봉건 영주의 행진을 방불케 하는 국외 시찰들을 과거 이야기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대기업의 경영에 노동자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천인공노할 각종 불법, 갑질들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치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사회의 민주화와 각종 사회적 관계들의 평등화다. ‘높으신 분’들의 군림이 없고 각자 직분은 달라도 ‘신분 차이’처럼 돼버린 경직된 위계성이 없는 나라야말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18.8.14 /한겨레
폭염과 숲, 그리고 세금
올여름 한반도에 불어닥친 유례없는 폭염은 많은 서민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상 최악의 폭염’이 올해만 유독 불거진 이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최근 5년 동안 매년 한반도 사상 최고기온이 경신되고 있고 최악의 더위는 여름철 늘 있는 대책 없는 단골뉴스가 되는 등 고착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 이러한 기온 상승은 기후학자들이 우려하는 예측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폭염은 여름철 며칠만 피하면 괜찮은 것이 아닌 다수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여름 내내 지속되는 자연재해가 된 것이다.
재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쏟아내는 대응은 임기응변의 세금 투입 일색으로, 주변 전체를 생각한다면 폭염을 더욱 심화시키는 대책들이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며, 근본적 대책을 위한 논의는 사실상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정부는 이 더위가 지나면 내년 여름까지 잊히기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기실 전 지구적 기온 상승으로 인한 폭염에 정부가 내놓는 대안이 당장 살기 힘든 국민들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이 재난의 원인을 지구적 산업화에 따른 온난화라 치부해 버리면 우리가 할 일은 거의 없으며 순순히 더 길어지고 더 세지는 여름철 재앙을 앞으로도 이렇게 무방비로 견디는 것만 남게 된다. 한반도 기온 상승이 지구 평균에 비추어 두 배 이상 빠른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도 문제를 대외적 요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당장 원전을 더 가동시켜 전기를 싸게 쓰자는 대책을 일부 기득권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원전이 광범위한 해수면의 온도 상승 유발원임을 고려한다면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으로 대안이 될 수 없다. 더위에 지친 서민에게 전기료 절감과 같은 달콤한 대책으로 비치지는 못하겠지만, 한반도 기온 상승의 속도 완화를 위한 중장기적인 대책을 절실히 논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 논의는 우리나라가 왜 다른 나라에 비해 급격히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지구적 기온 상승의 원인은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온실가스의 과도한 배출이다. 이 근본 원인에 대한 대책은 첫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며, 둘째는 배출된 온실가스를 더 흡수하는 것이다. 물론 간단해 보이는 이 대책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재난상황에서 무조건 더위를 참으며 에너지를 절약하라는 말이나, 일반화된 소비 행태의 급진적 전환 요구는 대책이 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대책의 시작은 기온 상승을 유발하는 화석에너지원 및 원전의 빠른 전환과 함께 온실가스 흡수량을 높이기 위한 방안 마련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온실가스 흡수를 위한 대안은 숲의 면적과 기능을 확대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목은 탄소를 흡수할 뿐만 아니라 아스팔트에 물을 뿌리는 효과와 동일하게 수분을 증발시켜 대기 온도를 직접적으로 낮추는 이중 효과가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녹지정책은 ‘탄소흡수원 확충’을 위한다는 최우선 명분과는 달리 탄소 흡수 기능을 훼손하는 데 지속적으로 세금을 투입해 왔다. 숲가꾸기 사업이 그것인데, 최근 10년간 약 2조2000억원의 세금을 투입한 사업의 대부분은 간벌과 가지치기로 숲의 탄소저장 총량과 연간 탄소흡수량을 줄이는 데 사용되었다. 아울러 지금의 기온 상승 추세가 지속되면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소나무가 살아갈 수 없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겨울철 온도 상승이 주된 원인인 소나무재선충병 방재를 명목으로 온도를 낮출 수 있는 참나무와 낙엽활엽수 숲으로의 안정적 전환을 방해하는 데 쏟은 세금이 1조1000억원에 달한다.
폭염의 대책은 세금을 투입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각 분야에서 폭염을 가중시키는 데 들이는 세금을 줄이는 것이 훨씬 쉽고 높은 효과를 보이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경향 18.8.9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위하여!
한반도의 1950년과 예멘의 2018년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을 1950년의 소련이라고 생각하고, ‘합법 정부 지원’을 명분으로 해서 예멘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1950년의 미국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난민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약자들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세계화는 한국 민중의 이해관계에 궁극적으로 합치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추구하자면 한국 민중은 일단 지금 난민들을 둘러싼 대중적인 히스테리부터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들을 어느 시골 성당에서 만났다. 제주도의 남쪽, 모슬포 근처였다. 나는 학회 참석차 제주를 찾았고 그들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여 제주로 왔다. 고국 예멘에서 지구의 반쪽을 돌아 드디어 제주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친형이 후티 반군에 총살을 당하고 나서 부랴부랴 망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를 포함하여, 내가 만난 예멘 난민 6명은 다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왔다. 교통이 마비되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매일같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폭격기들이 도시와 마을들을 무차별 폭격하는 상황에서 가족들과 함께 피란길에 오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가족들과의 연락이 이제는 그들에게는 정신적 생명줄이 되어 버린 듯, 인터넷이 안되는 곳에서 그들은 엄청나게 불안해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화제는 자연스럽게 현 예멘 상황으로 옮아갔다. 내가 만난 난민들의 기본 입장은 ‘중립’이었다. 수니파 이슬람 신도이며 남부 출신인 그들은, 북부 시아파를 기반으로 하는 후티 반군에 대한 반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한데 ‘합법 정부를 지원한다’는 핑계를 대고 예멘 사태에 군사적으로 간섭한 사우디와 미국에 대해서도 그들의 입장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우디 공군의 융단폭격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져 가는 상황에서 매우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그들 중에서는 남예멘 시절, 즉 1990년 이전의 ‘현존 사회주의’ 지향적 국가 주도의 개발 시대에 대한 향수를 품은 이들도 있었지만, 일단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기본적 질서의 회복, 의회 민주주의 발전은 그들의 가장 큰 희망으로 보였다. 외세들이 조종하는 대리전이 되어 버린 내전이 종식될 때까지 외국에서 머물다가 그다음에 꼭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들은 말했다. 당분간 망명의 목적은, 내전의 어느 쪽에도 징병이나 정치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또 다른 모습들을 떠올렸다. 바로 1950년 6·25가 터졌을 때 망명을 떠나 난민이 되어야 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세계적인 한국사 전문가로 성장한 이 땅 제주 출신인 강재언(1926~2017)의 얼굴도 빼놓을 수 없다. 강 선생님은 1950년 동해를 건너가 ‘재일조선인’이 되어 그다음 남은 평생을 분단된 조국이 아닌 일본에서 보냈다. 그는 한 기고에서 자신의 도일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나는 서울에서 내 고향 제주도의 4·3 사건과 그 후의 학살극을 알고 있었다. 당시 25세의 나는 도저히 이승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 총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강 선생님은 그때만 해도 이념적으로 북한 쪽에 더 가까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고향 제주를 시체 더미로 만든 학살자 이승만을 위해 싸울 생각은 더욱더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강 선생님은 그렇게 해서 68년 전에 일본에서 난민이 되었다. 그런데 국제 대리전이 되고 만 한국의 내전에 참전하고 싶지 않아 외국에 가서 난민이 된 것은 과연 강 선생님뿐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6·25의 비극은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을 국제 난민으로 만들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잘 알려진 사례는 바로 1975년에 스톡홀름대에서 스칸디나비아 최초의 일본학 전임교수가 된 저명한 언어학자 조승복(1922~2012)이다. 간도에서 태어난 조선 지성인 조승복은, 6·25가 터졌을 때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강재언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단순한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조승복이었지만, 강재언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족상잔의 현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립’을 택한 그의 반전평화 활동은 미국에서 추방으로 이어졌지만, 스웨덴의 진보사회는 그에게 학습과 연구, 교수의 길을 열어주었다. 별세할 때까지 남북 사이의 엄격한 ‘중립’을 지켜온 조승복은 남쪽도 북쪽도 방문하는 등 분단된 조국과 호흡을 같이했지만, 분단이 지속되는 바람에 통일된 조국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그의 의지는 실천될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면 전쟁이 종식되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지금 믿고 있는 제주의 예멘 난민들은, 과연 그들의 희망대로 평화를 되찾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난민들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반도의 1950년과 예멘의 2018년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나는 계속 지울 수가 없었다. 후티 반군을 지원하는 이란을 1950년의 소련이라고 생각하고, ‘합법 정부 지원’을 명분으로 해서 예멘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사우디를 1950년의 미국이라고 생각한다면 68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대리전과 오늘날 예멘의 대리전은 정말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예멘이나 한반도는 지역적 요충지이며, 양쪽은 똑같이 열강의 식민주의와 인접 강대국의 간섭에 시달려 왔다. 심지어 68년 전에 한반도의 미군에 무기를 공급했던 일부 미국 업체들은, 오늘에 와서도 예멘의 사우디군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계속해서 그 배를 살찌우고 있다. 동병상련의 염을 충분히 가져볼 수 있는 상황인데, 과연 이렇게도 많은 한국인들이 예멘 난민들에 대해 극히 비이성적이며 비인도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서구 같으면 특히 중동권 난민에 대한 거부 반응은 많은 경우 유럽의 해묵은 기독교적 이슬람 혐오증에 기인한다. 제국주의 침략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형태로 이데올로기화된 이 혐오증은, 지금도 구미권 극우 정객들에 의해서 쉽게 동원, 이용된다. 한국의 경우도 구미권 본위의 세계관을 지닌 친구미 엘리트들이 여태까지 다수에게 강요해온 이슬람이나 중동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문제된 예멘만 해도 인류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이지만, 과연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에서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전통을 매우 독특하게 융합시킨 고대 예멘의 힘야르 왕국(기원전 2세기말~기원후 6세기말)에 대한 언급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1839년부터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그러나 가열찬 항영투쟁의 끝에 1967년에 독립한 남예멘의 독립운동사나 1990년까지 이어졌던 남북 예멘 분단과 대립의 비극에 대해 같은 분단국인 한국의 교육체계는 과연 학습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을 전달해 왔는가. ‘세계화’, ‘세계화’라고 하지만 실은 한국의 교육이나 미디어 속의 ‘세계’는 구미권과 동아시아권으로 국한되어 있다. 한국은 구미권이나 일본과 달리 제국주의적 역사를 갖고 있지 않아도 한국의 주류적 학지(學知)는 제국주의 열강의 표준적 앎의 체계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에서 ‘세계화’는 과거의 ‘반공’을 대체한 새로운 ‘국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시야를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세계’ 전체로 넓힌다는 거야 꼭 나쁠 건 없지만, 문제는 한국 국가와 자본이 주도해온 세계화의 형태다.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득이 되는 ‘세계화’만을 원한다. 수출 시장과 원료 공급처의 확보, 한류 등을 통한 특히 아시아에서의 문화적 헤게모니 쟁취, 그리고 영어 구사력이나 구미권 학위 등을 통한 한국 상류층의 문화자본의 지속적 축적 등은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화’의 전부다.
이와 반대로 난민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약자들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세계화는 한국 민중의 이해관계에 궁극적으로 합치될 것이다. 한국의 약자들도 밖에 나가면 그런 국제연대의 덕을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추구하자면 한국 민중은 일단 지금 난민들을 둘러싼 대중적인 히스테리부터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민중을 위한 세계화는 바로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난민으로 만든 해외 형제자매에 대한 연대와 배려에서부터 시작된다! 18.7.17 한겨레
노무현의 후회, 문재인의 선택
누구나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 나라 경제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오천만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라는 엄중한 책임감이 문득 문득 엄습할 터다. 게다가 언론이 끈질기게 ‘경제 위기’를 들먹이고 그 원인이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있다고 몰아치면 흔들리게 마련이다. 선한 대통령일수록 짐의 무게는 더 큰 법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책으로 국가 경제를 실험하지 말라는 ‘협박’이 정치 모리배들 아닌 대학 교수의 입을 빌려 나올 때는 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찬찬히 짚을 필요가 있다. 경제 위기를 부르대는 언론과 그 언론에 기웃거리는 교수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 조선’ 자조까지 나올 만큼 ‘나라답지 못한 나라’를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그 나라를 ‘나라다운 나라’로 바꾸려는 모든 움직임에 지난 수십여 년 내내 ‘색깔’을 칠하거나 ‘포퓰리즘’ 딱지를 살천스레 붙여왔다. 그들 언론인과 교수들이 옹호해온 경제 정책이 바로 오늘날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 노동시간 최장, 청년실업, 부익부빈익빈’을 낳은 주범임은 무슨 보수와 진보의 가치문제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지식 권력’을 형성하고 있는 고위 언론인들과 ‘보수’를 자임하는 교수들 대다수는 수많은 젊은 세대가 절망하고 대다수 민중이 고통 받던 그 시기 내내 호의호식해왔다. ‘경제 위기’라고 아우성대지만 그 언론과 그 교수들의 경제생활은 전혀 위기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 성장률이 저조하다고 비난해대던 지식 권력은 참여정부와 견줄 수 없을 만큼 낮던 박근혜 정부의 성장률 앞에선 모르쇠를 놓는 ‘신공’마저 보였다.
바로 그래서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 공약을 집요하게 흔드는 저들의 공격 앞에 더 당당하고 더 치열하기를 촉구한다.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다. 당장 고 노무현의 비극을 떠올려보라. 고인은 대통령 퇴임 직후에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잘못했던 거는 오히려 예산 딱 가져오면 색연필 들고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 하고 위로 쫙 그어버리고, ‘경제지출 쫙 끌어내려. 여기에 맞추어서 숫자 맞추어서 갖고 와.’ 대통령이면 그 정도로 나가야 되는데, 뭐 누구는 몇 % 어디는 몇 % 깎고 어느 부처는 몇 % 깎고 어느 부처는 몇 % 올리고 사회복지 지출 뭐 몇 % 올라가고 앞으로 몇 10년 뒤에는 어떻고 20년 뒤에는… 이리 간 거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거 뭐 그럴 거 없이 색연필 들고 쫙 그어 버렸으면 되는 건데…. ‘무슨 소리야 이거,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 내년까지 40%, 후 내년까지 50% 올려.’ 쫙 그려 버려야 되는데, 앉아 가지고 ‘이거 몇 % 올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 가지고….”
어떤가. 솔직히 성찰하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노무현 정신’ 아닐까. 저 토로야말로 민주당이 뼈저리게 익혀야 할 교훈 아닐까. 아니, 더 정직하게 쓰자. 저 ‘대통령 노무현’의 피투성이 후회야말로 지금 현직 대통령 문재인이 심장에 새겨야 할 ‘유언’아닐까.
곧장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짚어보자. 최저임금만으로 소득주도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은 사람이 해왔다. 복지의 획기적 확대가 절실하다는 권고도 많다. 그럼에도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지금 좌우하는 사람들이 개혁적이긴 하지만 사회복지를 절실하고 절박하게 주창해온 이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은 청와대 비서실이나 민주당에만 있지 않다. 아니, 민주당 밖에 더 많다. 가령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섬세한 정책 제안을 내놓은 사회운동가나 학자도 많다. 단적으로 묻고 싶다. 왜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가.
고 노무현도 대통령 재직 때 ‘인사 폭’을 넓히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성심을 다해 돕고자 한 이들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도 적잖았다. 하지만 ‘김병준’을 너무 오래 아꼈다. 굳이 과거를 꺼내는 까닭을 오해 없도록 다시 분명히 쓴다. 노무현의 후회, 문재인의 결단.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8.7.17
미세먼지 아냐, 오존이었어
미세먼지 공포로 대기질에 대한 언론과 국민의 관심도는 매우 높아졌는데,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오히려 미세먼지 농도는 1990년 이후 최근까지 점진적 개선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연일 계속되는 것은 2013년 이후 개선이 답보상태를 보인 시기와 맞물려 호흡기 질환 사망자 증가율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시점은 이미 손쉬운 해결에서는 한참 벗어난, 자신 또는 주변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가 대부분이다. 대기오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호흡기계통 질환 사망률은 미세먼지가 크게 좋아지던 시절인 1990년 이후에도 지속적 증가를 보였으며 2010년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 폐렴에 의한 사망자는 1990년 전체 사망자의 6%에서 2010년에는 15%로 증가하였는데 이후 2015년에는 29%로 껑충 뛰었고 전체 호흡기 질환 사망자는 50%를 넘어섰다. 사망자 두 명 중 한 명이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하니 미세먼지가 좋아졌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수치와는 달리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졌는데, 이유는 모든 대기오염 문제를 대표하는 단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미세먼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세먼지의 감소를 고려하면 최근 급격한 호흡기 질환 증가의 주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간 동안 감소된 미세먼지와는 달리 대표적 호흡기 질환 물질인 오존농도는 서울시 기준으로 두 배가 증가했다. 도심 오존은 질소산화물이 자외선과 결합하여 생성되기 때문에 다량의 질소산화물을 발생시키는 화석에너지 사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미세먼지와는 달리 오존이나 질소산화물은 가스상 물질로 마스크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 대처할 수도 없다.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화석에너지 저감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이며 이 중 시급히 개정해야 하는 것이 자동차 관련 과세문제이다. 오존농도 상승과 디젤차량의 증가, 호흡기 질환 사망자의 증가 추이가 매우 높은 관계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소상공인을 위해 트럭의 연료인 경유에 낮은 세금을 부과한다. 이것이 유가상승과 클린디젤이라는 세계적 사기와 맞물려 2010년 전체 차량의 36%이던 디젤차량이 2017년에는 42%를 훌쩍 넘어섰다. 심지어 다른 나라와 달리 디젤게이트 발생 이후에도 증가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디젤차량의 급격한 증가는 고급 승용차와 레저를 위한 SUV차량이 주도해 유류세 정책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부자나 일반인의 세금혜택 수단으로 전락되었다. 정유사와 자동차회사들은 디젤의 미세먼지 배출량이 휘발유와 별 차이가 없다고 홍보한다. 이는 모든 대기오염을 ‘미세먼지’라는 말로 인식하는 데에서 발생한 호도인데, 미세먼지 배출량 차이가 많지 않다고 하여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이 같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디젤차량의 질소산화물 배출량은 휘발유의 무려 10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도심의 급격한 오존농도 증가와 관련된다. 같은 디젤차량으로 대체될 노후경유차 조기폐차보조금이나 허울뿐인 저감장치에 보조금을 줄 상황이 아님은 물론 환경개선부담금을 폐지할 상황도 아니다.
대책은 휘발유와 동등하게 유류세를 부과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최악의 대기오염국가에서 오염을 감내하면서 이들 차량에 세금혜택을 줄 이유는 없다. 디젤에 부과하는 세금을 당장 올리지 못한다면 최소한 차종을 구분하여 승용차에 할인해주는 세금은 환급받아야만 할 것이다. 평균 주행거리를 감안하면 차량 1대당 연간 30만~50만원 정도가 된다. 만성적 대기오염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 국민들도 개인의 작은 이익을 위한 선택이 모두의 불행으로 돌아옴을 인식하고 에너지 절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경향 7.12
Houses of The Holy (Led Zeppelin)(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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