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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최고 실세들 방문, ‘1석3조’ 노렸다 104 한겨레
통일부는 이날 오전 9시 긴급 브리핑을 열어 “금일 황병서 북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비서 등 북한측 인사가 인천 아시안게임 폐회식 참석을 위해 우리측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왼쪽부터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한겨레 자료집
남북관계 개선 고강도 의지 표현
황병서 ‘사실상 특사’…박 대통령 만남 목표인듯
국제사회에 유연함 과시, 남북관계 주도 이미지도
북한이 최고위급 대표단을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에 보낸 것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최고강수를 던진 것으로 평가된다. 또 아시안게임 참가 선수 격려라는 내부적 메시지와 함께 남북 관계를 유연하게 이끌고 있다는 대외적 선전 효과도 거둘 것으로 분석된다. 1석3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북쪽 최고위급 인사의 표면적 방남 이유는 북쪽 아시안게임 출선 선수단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날 방남한 최룡해 당 비서는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며, 김양건 비서는 체육지도위원이다. 이들이 북쪽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대신해 선수들을 격려하는 것은, 북쪽 내부적으로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쪽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최고위 대표단의 방남 소식을 이날 오전 신속하게 보도했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북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왼쪽부터),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4일 오전 인천 송도 오크우드호텔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우리측 관계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2014.10.4(인천=연합뉴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북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왼쪽부터),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4일 오전 인천 송도 오크우드호텔에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 등 우리측 관계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2014.10.4(인천=연합뉴스)
이와 더불어 남쪽에 관계 개선의 손을 내민 것이라는 의미도 상당하다. 특히 이번 대표단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위급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매우 크다.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사실상 북쪽 2인자로 군을 대표하고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당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는 오랫동안 대남 정책을 총괄해 왔다. 북쪽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제1비서를 제외하고, 북쪽에서 올 수 있는 최고위급의 방문이다.
특히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은 사실상 김정은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온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결국 이들의 방남 목표는 김정은 제1비서를 대신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김정은이 건강 때문에 잠시 쉬면서 큰 결심을 한 거 같다. 기존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꿀 제안을 하려고 남한에 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제적으로도 중국과 국제사회에 북쪽이 대남관계와 대외관계에 유연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전직 정부 고위관료는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은 별 성과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북쪽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다”며 “오히려 북한이 남북 관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국제 사회에서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만남을 통해 남북은 다양한 얘기를 나눌 것으로 보인다. 남쪽에서도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해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이 청와대를 대표해 북쪽 인사를 만난기로 했다는 점에서 남북 양쪽 정상의 뜻을 교환할 가능성이 높다. 이날이 10·4 남북 공동선언 7주년이라는 점에서, 공동선언 이행과 관련한 얘기를 나눌 수 있고, 대북전단(삐라)과 관련한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다. 남북이 민감하게 대립하고 있는 인권문제에 대해 북쪽이 항의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으로 이번 방남이 청와대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을 거론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과거 2009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으로 구성된 조문 사절단이 왔다간 뒤, 이명박 정부는 북쪽과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만남이 별 성과없이 끝난다면 앞으로 남북 관계 개선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근혜 정권의 집권 2년차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북쪽에서 상당한 성의를 들여 내민 카드가 무산된다면, 앞으로 남북 관계 개선의 기회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현재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대북 압박 기조에서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일 지가 관건이다. 이날 북쪽 대표단이 누구를 만날지, 어떤 얘기를 나눌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재까지 영입, 서북청년단 본격 활동… “미친X는 뭉둥이로”930 미디어오늘
직접 행동 예고 구체적 조직 구성까지…정권연장 광기의 시대 도래했다
“청계천과 광화문 그리고 전국의 미친개들을 때려잡을 제2의 서북청년단의 활동이 절실하게 요망된다. 미친개를 그냥 두면 나라가 개판된다. 서북청년단처럼 몽둥이를 들자.”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배성관 사이버뉴스24 대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배 위원장은 “지금은 종북좌익이 청계천에서, 광화문에서 주도권을 쥐고 깽판과 분탕질을 미친 개처럼 벌이고 있다. 일찍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하셨다”며 직접 행동을 예고했다.
극악무도한 살육을 벌였던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을 당당하게 내건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끔찍한 역사를 재연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치적 반대편에 대한 폭력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의 출현을 단순한 보수 우파 세력의 일탈 행위로 치부하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사실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은 그동안 수구 보수 단체에서 종종 거론돼 왔다. 지난 2005년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착용한 일군의 젊은이들은 ‘자유개척청년단’이란 이름의 단체를 결성했다. 창단식 장소는 경기 파주시 통일공원 ‘육탄십용사충효탑’이었고 행사가 끝난 후 이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당시 자유개척청년단 최대집 대표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과거 서북청년단과 대한청년단 등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는 청년들의 정책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또 우리나라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춰져 있다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아직도 체제와 의식이 성립되지 않았기에 남한을 비롯한 북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짓게 됐다”고 말했다. 자유개척청년단 부대표였던 장기정 씨는 현재 자유청년연합 대표를 맡고 있다. 당시 장 씨는 진보단체의 현수막을 철거해 재물손괴로 벌금형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다. 자유청년연합은 최근 세월호 유족 단식농성장에서 폭식 투쟁을 벌였고, 세월호 유족 대리기사 폭행 사건과 관련해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고발했다.
2014년 서북청년단은 2005년 자유개척청년단의 결성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향후 ‘행동’에 더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배성관 위원장은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을 하겠다”며 “2008년 쇠고기 파동도 종북 빨갱이들이 선동한 것인데, 세월호 유족들도 정당하지 않고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하는 일을 할 경우 자기들이 행동하는 것만큼 우리도 행동하겠다”고 말했다. 배 위원장은 과거 서북청년단의 폭력 행위에 대해 “군인이 전쟁이 일어나서 총을 쏴서 죽이는 게 살인이냐”며 “김구를 서북청년단 안두희가 암살했다고 하는데 김구도 간첩과 놀아나서 이승만 건국에 반대해 우익에서 그런 것이다. 김구 역시 해방공간에서 암살을 많이 했다”고 주장했다.
배 위원장은 제주 4. 3 항쟁 당시 살인 행위에 대해서도 "빨갱이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겠지만 건국 자유주의 입장에서 보면 제거세력이다. 국가를 건국하기 위한 시대상황이었다“고 강변했다.
▲ 9월28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서북청년단재건위원회가 노란리본을 철거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트위터리안 s172212014-09-28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는 조직체계도 구체화하고 있다. 위원회는 손진 대한건국회 회장(94)을 총재로 영입할 계획이다. 손진 회장은 서북청년단 선전부장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서북청년단이 겪은 건국과 6. 25>의 저자라고 위원회는 소개했다.
뉴데일리는 손민 회장의 책을 “해방후 소련군이 들어옴으로써 공산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로 바뀐 북한을 탈출해 38선을 넘어와 대한민국 건국운동의 최전선에서 공산좌익들과 싸우고, 다시 6.25남침 때는 호국의 최전선에서 북한군과 싸우며 생명을 초개같이 버렸던 북한출신 청년들의 이야기”라며 “손진 선생은 대한민국 현대사 교과서의 진실 왜곡과 더불어 서북청년회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에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피맺힌 원한을 품고 사라져간 동지들에게 욕지거리 퍼붓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틀림없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회원들도 극단적인 인사로 구성돼 있다.
재건위원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정함철(40) 씨는 ‘행동하는 양심 실천운동본부’ 대표를 맡고 있는데 강원도에서 진보 단체의 현수막 철거 활동을 벌여왔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선진화시민행동은 서경석 목사가 대표로 있고, 제주 4. 3 항쟁에 대해 “민중봉기가 아닌 5. 10 선거를 막기 위한 좌익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보수 단체 90여개와 함께 ‘제주 4. 3 사건 바로잡기 대책회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또 “제주 4. 3 평화공원에는 남로당 수괴급 폭도와 4 3 폭동의 일급 폭도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공원 내에는 1500여 기의 불량 위패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두고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주목을 받았던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탈북자들을 위한 정착교육원인 ‘희망누리평생교육원’ 인사가 참여한 것도 눈에 띈다. 서북청년단 재건위는 현재 1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00여 명이 참여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들이 상당수 청년단 조직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정함철 대변인은 “탈북자들은 북한 실상을 뼈저리게 알고 남한에 왔는데 배신자라고 하지 않나, 북한을 추종하는 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세월호 배후에 종북세력이 진을 치고 있어 나서지 못해서 그렇지, 주변 여건이 되면 탈북자 뿐만 아니라 서북청년단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일식 교수(연세대 사학과)는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가 광기의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서북청년단의 출현을, 보수 정권의 정치적 선동 구호가 공론의 장으로 나온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과거 김대중, 노무현 집권기에 야당(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이 선전 선동을 통해 북한과의 화해 과정을 비난해왔고, 종북 좌파라는 말이 수구 보수 세력은 물론 국회의원 입에서도 나오는 공공연한 말이 돼버렸다. 지난 대선에서도 종북 좌파라는 말이 사회적 공론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고 지적했다.
뉴라이트 집단의 논리가 정점에 이르면서 서북청년단의 출현을 끌어올렸다는 분석도 있다. 애국을 위해서는 반공을 해야 했고, 어떤 인간적인 가치보다 독재를 찬양하고, 일제 통치 기간도 불가피했다는 논리가 보수 정권 하에서 강화되면서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단적인 단체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집권세력 연장을 위해 반사회적인 구호로 선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활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면서 공적 영역에 자리잡게 만들어놓은 결과”라며 “광기의 확장성을 도와주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했다. 박근혜 정권 이후에도 광기가 강화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출산고령 대책예산 100조 원 어디에 썼나? 930 프레시안
박근혜, 위원회 한번 열지 않은 이유는 '무관심' 아니면 '무대책'?
대통령이 위원장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보건복지부 소속으로 격하됐다가 다시 대통령 직속으로 다시 격상된 뒤 2013년 1월 25일, 당시 임기 한 달 정도 남긴 이명박 대통령이 첫 회의를 주재한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서면으로 한 차례 회의만 했을 뿐이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118조 원의 예산이 배정됐지만, 최근 통계를 보면 예산 낭비에 불과한 대책에 쓰였다는 것을 보여줄 뿐,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한해 출생아 수는 43만6600명으로 전년 48만4600보다 4만8000명이나 감소했다. 합계출산율은 인구를 유지하는 수준인 2.1명보다 거의 1명이 적은 1.19명을 기록했다.
118조 원 중 저출산 예산이 59조4000억원으로 고령화 43조1000억원보다 16조3000억원을 많이 배정한 것을 보면, 고령화 대책보다 출산율 높이기에 더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이지만, 효과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2026년 '노인국가' 시대, 2034년 50세 이상이 절반 넘어
고령화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한국이 '세계 1위, LTE급 속도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인구 7%를 초과하면 '고령화 사회'라고 하고, 14%가 넘으면 고령사회라고 한다. 한국은 지난 2000년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뒤, 이제 3년 뒤인 2017년 고령사회가 된다.
다시 65세 인구가 전체인구의 20%에 도달한 사회는 '초고령사회', '노인국가'라고 한다. 한국은 고령화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달려가는 속도가 단연 1등이 될 전망이다. 불과 26년 걸릴 전망이다. 2026년이면 한국은 '노인국가'가 된다.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 등 선진국들은 고령화사회 진입 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데 80~150년 걸렸다. 일본은 36년 걸렸고, 중국은 3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29일 통계청은 우리 사회의 '고령화'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듯, '준고령자' 개념까지 설정해 새로운 통계를 선보였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고령자로 진입하는 문제를 의식해서 통계청이 이 세대를 중심으로 ‘준고령’ 층을 만 50세에서 64세로 설정을 해서 통계를 만든 것이다.
이 통계에 따르면, 준고령자가 10년 만에 300만명 이상 늘어나 올해 1000만명을 넘어서 전체 인구의 20.8%를 차지하고 있다. 65세 이상 고령자는 638만 명으로 12.7%. 준고령자와 고령자를 모두 합치면 올해 33.5%에 달한다.
준고령자와 65세 이상 고령자는 10년 뒤 전체인구 중 40% 선을 넘게 돼 인구구조의 급속한 노화 현상이 한국 경제성장의 중대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통계청은 준고령자 이상 인구가 2024년 43.4%, 2034년 50.5%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이렇게 되면 이제 65세 이상 노인들을 젊은이들이 부양한다는 개념은 의미를 잃게 된다.
현재 고령층 빈곤율은 OECD 최고수준이다. 고령층 10명 중 8명은 연금을 전혀 못 탔거나 공적·사적연금을 다 합쳐도 수령액이 월 25만 원이 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은 높아졌다. 상대적 빈곤율이란 전체 인구 중 중위소득의 50%를 벌지 못하는 인구 비율로,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인구의 빈곤율은 48.1%였다. 전체 노인의 절반가량이 빈곤층에 속한다는 뜻이다. 전체 연령의 상대적 빈곤율은 2006년 14.3%에서 2013년 14.6%로 소폭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65세 이상 인구의 상대적 빈곤율은 42.8%에서 48.1%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준고령자들의 생존투쟁이 심각한 모양이다. 지난해 기준 60세에서 64세 고용률이 57.2%로 20대의 56.8% 보다 0.4%포인트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계청이 경제활동인구조사를 시작한 1963년 이래 처음이다.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930 푸ㅡ레시안
최근 일부 보수성향 인사들이 반공조직인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소위 '서북청년회 재건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을 내 건 일군의 사람들이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란 리본을 정리하겠다며 행동에 나서면서다. 특히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서북청년단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던 제주 시민사회는 분노하고 있다.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싣는다. <프레시안>
'(전략)......존경하는 동지들! 생각컨대 4․3 궐기 전야의 제주도의 정황은 참으로 가열했던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와 그 국내의 주구들이 기도하는 5․10 매국단선을 100% 수행하기 위한 흉계는 그의 야수적 학살정책을 지도층으로부터 전 인민의 위에 확대시켜 조직적 인민교살 정책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서북계열로 개편된 경찰진과 대청 민족청년 서북청년 등 테러단을 총동원한 기동적 학살정책은 인민을 질식시키고 전도는 이른바 곧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후략)' -<노력인민> 1948년 11월 7일
'(전략).....극좌계열과 합류하여서 총선거 반대운동에 호흡을 같이 하여 전율할 실천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즉 그것이 거(去) 4월 3일에 일어난 소란의 시초이고 그 후 경찰력 우익세력이 완전하지 못함을 기화(奇貨)로 저 조선 팔경의 제일로 손꼽는 한라산을 그들이 근거지로 하여 각처에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기백(幾百)의 동족을 상살(相殺)하게 되었다. 산부대(山部隊) 소위 인민군의 공격 목표는 (A) 경찰관 (B) 대청 및 서청단원 (C) 군정관리 (D) 선거위원 및 입후보자 또는 그들의 가족인데 그 죽이는 방법도 조선식은 아니고 개량식(改良式)이다. 실례로 남원지서 근무 고(高)형사 외 1인을 죽인 것을 보면 가마니를 덮어서 휘발유에 불을 붙임으로써 철저한 화장(火葬)을 한 것이다. 이와 흡사한 방법으로 피살당한 수는 일일이 매거(枚擧)하기 어렵다. 교통은 차단되어 신문 한 장 볼 수 없는 형편이며, 전신주란 전신주는 모두 파괴당하여 외부와의 연락조차 없다(읍을 제외한 구역).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유언비어도 합하여 도민들은 어제 저녁엔 모 부락에서 사람이 몇몇 죽고 방화가 몇 건이고, 그저께 저녁에는 경찰관과 그 가족이 몇 죽고 또 선거위원이 몇 죽고 하는, 한 사람이라도 만나기만 하면 살인 소문과 공포심을 느낄 불안한 화제뿐이다. 연산(年産) 수백만원을 초과하는 치용(稚茸)도 재배는 하였지만 딸 수 없는 형편이며,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신탄(薪炭)은 물론 보리농사까지 안심하여 수확이 될는지 의문이다. 제일 많이 나는 생선까지 못 먹을 형편이었다. 이렇게 된 환경에서 어찌 목침을 높이 하고 안면(安眠)할 수가 있으며, 살아 나아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후략)' -<경향신문> 1948년 7월 18일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은 '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는 1949년 초 어느 자리에서 "서북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 등이 되어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폭동이 난 줄 안다"고 말하였다.
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제주도에 들어왔다. 미군정·이승만 등 집권세력은 '제주도학살'의 최선봉에 서청을 세웠다. 그들은 소련군정에 의해 박해를 받아 월남한 지주세력으로, 그 트라우마에 의해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정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는 우파 민병대였다. 군과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였고 대구노동자파업,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4.3사건에 개입하여 20~40만명 이상의 좌파로 의심되는 민간인과 비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다.
19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함북청년회·황해회청년부·북선청년회·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1946년 2월에 월남한 선우기성(鮮于基聖). 서북청년단 출신 안두희(安斗熙)는 1949년 6월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총살했다.
미군정보보고서에는 "'임시경찰(temporary policemen)’로서 활동하는 그들이 조천면 신흥리 사건현장에 파견돼 게릴라를 쫓아냈다"고 기록, 경찰의 신분을 인정했으며, 때로는 ‘은밀한 모병(the secret induction)’을 통해 그들을 제주도에 파견했다는 내용도 있다. 조병옥은 제주도에서 '4·3'이 발발하자 서청본부에 단원들의 제주급파를 요청한다. 미군정보보고서에서 ‘서청의 지원문제는 몇몇 미군 장교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 서북청년회 본부 옛터-제주시 일도1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북청년회의 조직과 성격
'(전략)..... 5. B-2 정보원에 따르면 서북청년단(Northwest Young Mens Association), 대동청년단(United Young Mens Party), 한국청년총연맹(General Alliance of Young Men), 한국독립청년회(Korean Independence Young Men), 대한독립촉성회 청년단(National Society for the Accele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Youth Corps), 한국인퇴역군인회(Korean Veterans Association)의 대표자들이 11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만났다. 조선민족청년단(Korean National Youth Corps)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표자들은 모든 청년 단체를 ‘대한청년단(Great Korean Youth Association)’으로 통합하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 조직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 (2) 한국을 통일시키는 것 (3) 국가방위를 위한 인적 자원을 제공하는 것 (4) 한국 청년의 정신과 신체를 향상시키는 것/대표자들은 만일 아래와 같은 사항이 준수된다면 대통령에게 200,000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진술했다: (1) 이승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그 단체의 수반이 될 것. 2) 무기가 지급되어야 하고 무기 사용에 있어서 중대급에까지 파견된 미군 장교들이 행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 (3) 다음에 열거하는 장관들을 교체할 것 :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 상공부 장관.......(후략)'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공한(公翰)/1948년 12월 5일/국가보안법 / 국군조직법/발신 : 주한미군사령관/수신 : 미육군성 정보국
'서북청년단 지원자 약 620명이 최근 수도경찰청의 감독 아래 12일 동안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이들은 정규경찰로 임명되어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소요가 발생한 이 지역에서 한달동안의 의무 근무기간이 끝나면 재배치되어 서울로 올라올 계획이다........(중략).....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에 요원으로 제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지난 번 보고(<일일정보보고> No. 1005)를 확인하고 있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12일~1948년 12월 13일 (No. 1011, 1948. 12. 13. 보고)
'12월 20일 서북청년단원 200명이 비밀리에 대전에 있는 경비대에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갓 도착한 제9연대에 배속된 이들은 즉시 군복을 지급 받았다. 이들의 복무는 서북청년단 지도부와 제2여단장 간의 은밀한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논평 : 이들 200명의 비밀입대는 서북청년단원으로 ‘엘리트 중대’를 구성한다는 제2여단의 계획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2월 27일~1948년 12월 28일 (No. 1023, 1948. 12. 28. 보고)
▲ 경찰과 서청단원,군인을 격려하는 이승만.
1947년까지 북한인구의 10%에 이르는 100여만 명이 월남했다. 북한체제에서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우려가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념적 성향은 반공·반북적이었다. 서청의 배후에는 군정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으로부터 나왔다. 서청은 경찰로부터도 자금지원을 받았다. 특히 치안책임자이자 조병옥과 장택상은 서청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승만은 사설단체인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되었다. 단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비대·경찰복장을 하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단원들은 바로 경사나 경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 지서주임 등을 하면서 악명이 높았다.
당시 경찰전문학교는 서울 광화문에 있었다. 거기서 서청단원들이 간단한 면접시험을 봤다. 경찰관이 돼서 취조하려면 최소한 '가나다라'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글자깨나 아는 사람은 경찰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군인 이등병이 되었다.
이때 경찰 합격자가 200명이 되어서 '2백 명 부대'라고 불렀다. 군인으로 된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서울에서 14일 동안 제대로 교육받은 189명은 '제주경찰 9기'가 됐고, 나머지 11명은 '제주경찰 10기'가 됐다.
1948년 12월 20일 대전에서 200명으로 서청 '특별중대'가 편성되었다. '특별중대'는 소대 단위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토벌전을 벌였다. 군번 없이 경비대 복장을 한 특별중대는 주로 성산포 일대에 주둔, 애매한 사람들까지도 '때려잡는 일'을 했다. 1949년 1월 13일 성산포 앞바다에서 28명의 고성리 청년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 무렵 국민학교 교사 6명도 총살됐다.
전국 경찰 중 이북출신은 1953년 19.1%, 1955년 말 24.3%를 차지했다. 특히 간부급의 경우 이북출신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1955년의 경우 총경의 40%, 경감의 30.3%였다. 경찰에서 이북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 것은 서청 출신들이 다수 진출했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목포는 외국인가?......(중략).....기자는 전도민이 학수고대하는 중앙정세를 하루속히 소개할 사명을 띠고 도목(渡木)했었다. 그래서 합동통신사를 방문하고 나의 도목 사유를 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네들(약 30명의 청년)은 나의 신분을 확인한 연후에 옥내로 들어가 아연 손에 손에 목봉을 쥐고 나와 이유를 말하지 않을 뿐더러 놈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나를 불법감금하고 나의 주위를 물샐 틈없이 둘러쌓다. 나는 거기서 비로소 서북청년회 본거지임을 알았고, 합동통신사는 이들 무뢰한에 쫓겨 나간 것을 깨달았다. “제주도는 공산주의 분자의 소굴이다” “너는 취재를 구실로 음모 파괴차 왔다” “좌익에 의한 여운형 선생의 살해” 등 폭언을 토하면서 위협을 주며 심지어는 기자의 신체검사를 하는 등 약 1시간에 긍(亘)한 (테러)단의 언어에 절(絶)할 몰이성적 만행은 입으로는 좌우합작을 표방하면서 도리어 일방적 편당성을 띠고 강인부회(强引附回)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엄숙하여야 할 과도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정확 신속한 보도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처한 바 시국을 명시하고 여론의 대표가 되어 그 구현에 전심함은 물론 경세(經世)의 문필을 가지고 이 사회의 암흑면을 □□ 사회정의를 밝히는 것이 언론인의 사회적 임무인 것이다. 여사(如斯)한 의미에서 언론인이 활약은 이로써 양성되는 민중에 영향이 또한 지대한 것이다. 이러한 차등(此等) 무뢰한의 만행을 보면서도 □안(□岸)의 화재시(火災視)로 묵과하는 당지 경찰당국의 무성의한 태도는 민주경찰를 표방하는 소리로 귀익은 기자로서는 아연 않을 수 없었다. 전 민족 생사기로의 오늘날, 삼천만의 지상과업은 수수(雖誰) 민주건국의 성업(聖業)뿐일 것이다. 강토광복(彊土光復)의 일념뿐일 것이다. 가증! 이러한 추잡한 기현상이 어찌 이 사회에 방임할 수 있을까. 과연 목포는 외국이었는가? 김삼규(金三奎)’ -<제주신보> 1947년 7월 30일
▲ 성산포 서북청년단 숙소.
서북청년단의 테러행위
‘지난 2일 제주극장에서 서북선(西北鮮) 출신인 청년들이 모여 상호의 친목을 도모함과 동시에 단결의 힘으로써 자주독립을 찾자고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 결성대회가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동일 당선된 역원은 여좌하다. 위원장 장동춘(張東春)씨, 부위원장 박병준(朴炳俊)씨 외 역원 10명.’ -<제주신보> 1947년 11월 8일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우익 서북청년단 제주도위원장 안철은 지난 주 제주도는 “한국의 작은 모스크바”이며, 자신은 이러한 주장을 방첩대에 입증해 보일 작정이라고 말했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7년 11월24일~1947년 11월 25일 (No. 693, 1947. 11. 25. 보고)
'11월 9일 서북청년단원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 치사했다. 서북청년단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그를 단지 취조할 의도였으며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263호, A-1)'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1월 12일~1948년 11월 13일 (No. 987, 1948. 11. 13. 보고)
'제주도 반란/ 전략적 위치, 빈곤, 전통적 고립 및 건전한 지방행정의 결핍 등으로 인하여 제주도를 해방 후 남로당의 활동중심으로 되기 좋게 만들었던 것이다. 면적 약 120평방 리(哩), 인구 30만의 이 섬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공산주의 용의자들을 체포, 구타한 데 있어서 1948년 4월 반란의 무대로 화하였다. 소요는 전도에 파급되고 정부가 그것을 평정하기 위하여 대부대를 파견한 1949년 초까지 계속하였다. 작전은 1949년 5월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정식발표에 의하면 1만명 이상의 인민이 참가하였다. 근 2,000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정부측의 사상자 수는 알 수 없다. 파괴는 광범위하였다. 촌락마다 소실되고 가옥, 가축, 작물의 손해는 수십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파출소 80개가 공격되어 소실 혹은 손해를 입었다. 관청 15개와 학교 약 20교가 소실 또는 일부 파괴되었다. 경찰이 특별히 공격목표가 된 것 같으며 100명 이상이 살해 또는 부상당하였다.(후략)' -<한성일보> 1949년 9월 24일
▲ 서북청년회의 회원증.
서청단원들은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빰때리기를 강요했다. 세게 때리지 않으면 달려들어 죽도록 팼다. 돈을 모아 가든가, 소를 끌고 가야 그 짓이 끝났다.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다.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백색테러를 노골화하였다.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테러에는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다.
서북청년회가 제주에 등장한 것은, 1947년 3·1시위사건 발생 직후 제2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받은 유해진이 경호원 자격으로 서북청년회원 7명을 데리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본부가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다.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을 선출했다. 서청에게 ‘제주도는 악몽의 섬’이었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
3·1사건 이후 제주경제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을 부양해야 하게 되어 더욱 악화되었다. 경찰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했고 서청은 정기적인 봉급이 없었고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다.
제주4·3 발발 직후 4·3진압요원으로 서북청년회원 500명이, 여수·순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서 12월까지 두 달 사이에 최소 1,000명 이상의 회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의 신분으로 들어와 진압작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서청단장 문봉제(文鳳濟)는 4‧3사건이 나자마자 단원들을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보낸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백색테러단 서청은 '반공을 전매특허로 하는 극우'였다. 조병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지칭했고, 김재능(金在能) 서청제주도지부장은 제주도를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렀다. 빨갱이라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장모와 사위가 성교하게 한 다음 살해했다.
'(전략)....작년 3․1학살사건에 뒤이어 3․22총파업이 있은 뒤 이에 경악 전율한 매국 반동세력은 경찰 사법 등 일체의 권력기관에서 양심적인 사람을 모조리 내쫓고 흡혈귀와 같은 악질도배 서북인들로써 그들의 진용을 정비하여 도민폭압의 토대를 쌓았다. 그놈들은 전 도민 27만 중 8만은 남로당원이라고 말하며 제주도의 청장년은 닥치는대로 무단히 검거 구타하면서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내놓으라고 족쳤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인민들은 아무개 때문에 우리까지 못살겠다고 오히려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원망하기까지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매국 반동세력은 서청원을 매 부락에 10명 내지 20명씩 배치하고 기금을 내라, 담요를 내라, 밥을 내라 하여 인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가축을 함부로 도살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죽도록 두들기고 부수고 하여 실로 그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인민들은 하루도 마음놓고 살 수 없었다. 이제까지 중립이라고 자칭하고 반동이라고 지목되는 사람들까지 원성은 높아졌으며 이래서는 못살겠다는 인식이 깊어졌다. 그러나 인민들의 원한과 분노는 속으로만 곪아 들어갔을 뿐 놈들의 야수와 같은 탄압 밑에 위축되어 궐기할 수는 없었다. (계속)' -<노력인민> 1948년 6월 3일
'(1) 제주도에서 드러난 공산주의자 음모/ 서북청년단 제주도지부는 1948년 10월 31일 제주도에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꾀한 음모를 폭로했다. 이 음모에는 포로들을 석방하고, 이들과 민주애국청년동맹 회원들에게 무기와 탄약을 주기 위해 경찰간부와 고위 관리들을 암살하려 한 계획이 포함돼 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제주도 경찰 11명과 남로당원이 경찰에 체포되어, 쿠데타 음모가 완전히 제거됐다. (2) 제주도의 게릴라 활동/ 이 기간에 게릴라가 지서 3곳과 마을 2곳을 공격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공격으로 경찰 2명, 경비대원 1명, 게릴라대원 50명이 피살됐다. 폭도들은 마을을 공격하는 동안 40여 채의 건물과 주택을 방화하고 파괴했다. 제주도 경찰은 11월 11일 게릴라가 신엄리와 조천리를 공격해 주택 약 110채를 방화했다고 보고했다. 이 공격으로 폭도 80명과 경찰 1명이 숨졌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주간정보요약(G-2 Weekly Summary) 1948년 11월 5일~1948년 11월 12일 (No. 165, 1948. 11. 12. 보고)
'(전략) 귀화한 공산분자가 남녀 합하여 2,800명에 달하였으나 아직도 겁이 나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수효가 몇천명 된다는데 가장 곤란한 것은 여러 촌락이 불에 타서 의지할 곳도 없고 먹고 입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중략) 무식한 남녀들이 공산당 선전에 속은 자도 있고 또는 집이 다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올라간 자도 있었으나 산상에서 살 수도 없고 식물은 더 도적할 수도 없어 형용이 말 아닌 남녀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온 것이 2800여 명인데 이 사람들을 다 넓은 공청에 칸을 나눠서 거처시키며 하루 두 끼씩 밥을 먹이는데 반찬이 없음은 물론이오…(후략)' -<朝鮮中央日報> 1949년 4월 13일
여기에서 '귀화한 공산분자가 2.800명'이라고 했지만 중간에는 '형용이 말 아닌 남녀, 어린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결국 입산자 대부분이 좌우익의 대립과 굶주림, 서청의 만행을 피해 도망간 단순 양민이었지만, 이들을 '폭도·무장대'로 규정하고 무차별 학살했다. 스위니(Austin Sweeney) 신부는 서울의 한 신부에게 “만약 여기가 문명화된 나라라면 광범위하게 ‘제주도를 돕는’ 계획을 당장 실시할 것이다. 주민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으며 평균 하루에 고구마 한 개를 먹고 있다.”고 암담한 상황을 전달하기도 했다.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서청·대청·민보단 등 우익단체원들이 '국가유공자'로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고 있었다. 도민을 학살했던 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연금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던 이들은 수십년간 4·3을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살았다.
제주도 서북청년회 김재능 단장
'초대사장 박경훈(朴景勳)군의 손으로 발간되었던 제주도 유일의 일간지 <제주신보>는 4월 3일 사건으로 작래(昨來) 이래 휴간 중이던 바 진용을 개비(改備)하여 신 사장에 김재능(金在能)군이 취임하여 지난 2월 중순부터 복간하였는데 한국일보 모 군이 4월 1개월을 후원하고 온 후 편집 약체에 곤란을 받고 있다 한다.' -<비판신문> 1949년 5월 30일
김재능(金在能 1916~?)은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키가 6척 거구로 짧은 콧수염에 긴 가죽장화를 신고 팟쇼형 인상이다. 4· 3사건이 거세지자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서청원 다수가 입도하였다. 제주에 배치된 서청단원을 보면, 제주읍 300명, 대정면 40명, 서귀면 70명, 한림면 50명, 성산면 40명, 애월면 40명, 안덕면 40명, 남원면 30명, 구좌면 50면, 중문면 50명, 표선면 30명, 조천면 20명 등 모두 760명이나 되었다.
서청은 김익렬(金益烈)과 김달삼(金達三) 평화회담 직후인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을 유발하였다. 여기에도 서청단원이 동원되었다. 또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이 칠성로의 서청사무실에 붙잡혀와 뭇매를 맞고 피살되었다. 김재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금품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 김영진(金榮珍) 북제주군수도 맞아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1948년 11월 21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동 12월 하순 서북청년단이 제주신보를 강제로 장악했다. 김재능을 발행인으로 하고, 편집국장에는 김묵(金默)이 기용되었다. 이에 앞서 10월 24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李德九)의 명의로 된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이라는 삐라를 제주신문사에서 인쇄하였다. 서청과 경찰의 공조로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과 사장 박경훈(朴景勳), 전무 신두방(申斗玤)을 연행하였다. 사장과 전무는 석방되고 김호진은 처형되었다. 도민들은 계엄군의 제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祿) 대위와 한국전쟁으로 개설된 제주비상계엄령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와 김재능을 삼대 폭한(暴漢)이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김재능을 가장 포악한(暴惡漢)이라고 불렀다. 김재능은 섬을 떠난 후 보복이 두려워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신보 사장 및 서북청년단 본도 위원장이었던 김재능(金在能)씨는 경찰에 피검되어 현재 국 수사과에서 구속 문초중에 있다. 그런데 씨(氏)의 표면적인 죄명은 사기공갈, 상해, 사문서위조 등 단순한 혐의 밑에서 입건수사되어 왔던 것이나 본도 각면(各面) 각리(各里)를 막론하고 30만 도민 거의 전부가 김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인 한 설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씨계통(金氏系統)에 의하여 애매하게 살해되고 상해되며 재산을 강탈되었던 수십명 내지 수백명의 가족들은 지금도 얼른 김씨에 대하여 보복적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왜냐!(후략)' -<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김재능씨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당시의 피해자 전 총무국장 고 김두현씨 가족들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비통한 표정으로써 그러나 당시 김두현씨가 결코 공산주의자였거나 관리로서의 긍지를 잃은 결과 피살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도민들은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말하였으며 고 김두현씨의 가족으로서 현재 본도의 어느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사는 혼란기의 일이니만큼 지금에 와서 어느 개인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으나 어디까지나 김두현씨가 청렴결백한 관리였다는 사실만은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김재능씨 계통에 의해 한때 사지(死地)까지 함입(陷入)되었던 본도 민족진영의 모유지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동씨는 앞서 김재능씨를 치안국장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한다. 즉 작년 가을 동유지가 전 치안국장 이성주(李成珠)씨와 치안국장실에서 면담 중 노크소리와 함께 수배중인 인물 김재능씨가 이성주씨를 만나러 동 실내에 들어왔던 것이며 동 유지를 보자 호연(豪然)하게도 악수를 청하였다 한다.’ -<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대학생 현장 실습? 실제론 대학생 노동 착취! 930 프레시안
평균 시급 1648원, 시키는 일도 단순 업무…"최저임금 위반"
서울의 한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ㄱ(22) 씨. 학교에서 안내한 산학협력 현장 실습생으로 롯데호텔에 들어갔지만, "노동 착취만 당했다"고 했다. 일을 배우리라 기대한 ㄱ 씨는 정작 롯데호텔에서 그릇 닦기, 그릇 치우기, 손님 응대, 비워진 음료 채우기, 식기 정리 등 단순 보조 업무만 했다. 특급 호텔에서 일도 배우고, 취업할 때 가산점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깨졌다. 하루 8시간씩 주 5일 일한 대가로 그가 받은 돈은 한 달에 30만 원에 불과했다.
ㄱ 씨는 "(롯데호텔) 담당자가 '너희 여기서 이런 거 한다고 레시피 알 수 있는 것 아니니 양식, 일식이든 아무데나 가라'고 했다"며 "현장 실습생 제도는 기업이 (학생을) 부려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마음껏 부려먹는 것 같다"고 실망감을 내비쳤다. ㄱ 씨와 같이 일한 아르바이트생 김영 씨는 "실습생도 주방 정리 등 나와 똑같은 단순 보조 업무를 했는데, 나는 '알바'라서 최저임금 이상을 받고, 학생들은 같은 일을 하고 한 달에 30만 원을 받으니 이상했다"고 말했다.
아시안게임 선수촌 식당서 하루 12시간 중노동
또 다른 대학의 조리학과 학생인 ㄴ(19) 씨는 아시안게임 선수촌 식당에서 하루 12시간씩 20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밥도 15분 안에 먹고 오라는 통에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ㄴ 씨는 "하루 12시간씩 휴무 없이 일한 것도 힘들었지만, (업체가) 계속 말을 바꾸는 것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며 "처음엔 (총 실습 시간이) 180시간이었는데, 225시간이라고 말을 바꿨다"고 했다. 실습비는 기본이 50만 원인데, 많으면 70만 원까지 준다고 말로만 들었다. ㄴ 씨는 "(다른 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는 학생에게 현장 실습 선택권이 없었다"며 "학교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데, 일하기 싫어서 휴학한 학생도 있다"고 덧붙였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청년유니온은 30일 국회에서 '청년 노동 증언대회'를 열고 이같은 사례를 발표했다.
주 40시간 일하고 시급 1684원…'위장 실습'
청년윤온이 81개 기업, 25개 대학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현장 실습생은 평균 5.42주씩 주 40.25시간을 일하고 평균 35만1993원을 받았다. 시급으로 따지면 1684원으로 법정 최저임금의 3분의 1가량이었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2012년 전국의 대학 산학협력 현장 실습 파견자가 4만 명 정도 되는데,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한 사람당 60만 원씩 1년에 240억 원의 체불 임금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청년유니온은 "학생들이 실습 평가나 학점, 교수와의 관계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 봐 현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문제제기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그동안 고등학교 2, 3학년 현장 실습생 노동 착취 문제가 제기됐는데, 대학 현장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알바'를 시키고, 교육보다 업무 보조로 변질됐다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의 류하경 변호사는 류 변호사는 "대법원 판례상 계약의 명목과 관계없이 실질적인 근로관계에 있다면, 현장 실습생도 근로자"라며 "이들도 노동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 변호사는 "호텔 조리학과 학생에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설거지를 시키는 일은 '불법 파견, 위장 도급' 논란과 마찬가지로 노동법을 회피하기 위한 '위장 실습'"이라며 "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을 전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민수 위원장은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산업체와 학업을 병행하는 현장 실습생이어도 최저임금을 보장한다"면서 "교육부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롯데호텔 측은 '위장 실습' 논란에 대해 "별도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전했다.
당신의 고용주는 누구인가? 10.1 프레시안
현대차, 기아차 '불법 파견' 판결이 가지는 의미-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1세기 초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문제의 핵심은 '간접 고용'이다. 기간제, 시간제, 근로 빈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쟁점이 '비정규직 문제'라는 타이틀 아래 얽히고설킨 모습을 드러낸 지는 꽤 오래되었다. 간접 고용도 그중에 하나이며, 새롭게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고용주가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채 숨어버린데 따른 고통과 분쟁은 근래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하청 노동자의 현실은 한국 자본주의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핵심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던 중에 들려온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사내 하청에 대한 불법 파견 판결 소식은 한 줄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 업체 소속 노동자 1179명에 이어 기아자동차 사내 하청 노동자 468명도 소송에서 불법 파견 판결을 받아냈다. 현대자동차 불법 파견 문제로 법정 싸움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고, 최병승 씨에 대한 현대자동차 정규직 지위가 인정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지도 4년이 지났다. 이번 사건이 다시 대법원까지 가게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업종의 사내 하청 문제가 모두 법적인 판결을 받게 되기까지 앞으로 갈 길이 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자동차 업계의 불법 파견 판결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진짜 고용주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가? 아니, 진짜 고용주들은 왜 바지사장을 중간에 세우고 자신들은 그 뒤에 숨는 것인가? '간접 고용'이라는 무미건조한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그 회사를 위해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우리 직원이 아니다'라며 선을 긋는 행태를 지칭한다. 이렇게 해서 진짜 고용주가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첫째, 인건비 절감이다. 사내하청 노동자에게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현저하게 낮은 임금을 지불한다. 둘째, 재해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셋째, 일감이 적을 때는 사내 하청 업체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간단히 인원을 축소할 수 있다. 평소에는 고용 기간을 정하지 않은 노동자를 써서 그 숙련 기술을 충분히 이용하면서도, 그 노동자에 대한 책임은 어떤 방식으로도 지지 않는 것이 '간접 고용'이다. 진짜 고용주가 누리는 이 모든 이득은 뒤집어 놓고 보면 노동자에게는 억울한 차별이며 손해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산재가 나도 원청은 나몰라라하며, 항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간접 고용 노동자의 현실이다.
이런 못된 관행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막을 방도는 없는 것인가? '불법 파견'이라는 용어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 노동법은 원칙적으로 간접 고용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적나라하게 말해서 중간착취고 사람장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에서도 사람 빌려주는 장사를 금지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누구든지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영리로 다른 사람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제9조)'고 명시하고 있고, 직업안정법은 노동조합에 의한 근로자 공급 사업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근로자 공급 사업을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간접 고용을 제한할 수 있는 근대 노동법의 근간에는 다른 이에게 노동을 시켜서 이익을 본 자가 이에 상응하는 책임도 져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깔려있다. 요컨대 다른 제3자가 아닌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서로 무엇을 거래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준다. 그리고 국가가 중간에 서서 약속하는 사회보장제도에 들어가게 해 주는데, 일하다가 발생하는 사고로 인한 재해에 대해서는 누구의 과실인지를 묻지 않고 책임져 주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노동자가 약속한 것은 정해진 시간동안 '고용주가 시키는 방법대로'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따옴표 친 '고용주가 시키는 방법대로'라는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노동의 결과물을 납품하기로 약속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드는지는 알 바 없고 아무튼 제대로 된 물건만 받으면 되는 것이 외주 하청이고, 이때 원청의 사업주를 이 물건을 만든 노동자의 고용주라고 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핵심은 누가 노동과정을 통제하는가에 달려있다. 고용주는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사람이고 노동자는 그 지시에 따라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원칙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것이 '파견 노동'이다. 특정 영역에서 피치 못할 경우에 노동자를 빌려 쓰도록 합법화 한 것이 '근로자 파견법'이고 파견 근로자에 대해서 파견을 받은 회사가 업무 지시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경우도 중간착취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 허용 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고, 파견법을 어긴 불법 파견에 대해서는 원청 업체가 해당 근로자를 직접 고용해야하는 의무가 발생한다. 현대나 기아차가 사내에 들어와 있는 하청 업체 직원에게 실질적인 업무 지시를 하고 노동과정을 통제하였다면 실제로는 파견 근로자를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새가 되는데, 이는 제조업 생산직에서는 파견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법을 어긴 것이므로 해당 근로자는 현대나 기아차 정규직 직원이라는 것이다. 현대·기아 자동차 판결에서 작업 지시를 내린 실질적인 주체가 누구인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소위 컨베이어 시스템이라고 하는 흐름 공정 상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그 흐름을 통제하는 사업주의 의사에 따라 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이번 기아차 판결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서비스업에서는 어떨까? SK브로드밴드나 LG유플러스 서비스 기사의 고용주는 누구일까? SK나 LG로고가 찍힌 작업복과 명함을 사용하고, 이 회사들이 다음에 가서 서비스해야할 곳을 정해준다. 서비스를 받은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서비스의 질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계속 고용 여부나 임금에 반영한다. 이렇게 노동과정을 통제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업종에서 누가 진짜 사장인지는 아직 법적으로 확인받지 못하였다. 노동조합이 진짜 사장이 나와서 교섭하라고 요구하면서 농성한 지는 오래되었다.
당신의 고용주는 누구인가? 당신의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이가 고용주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로 제공에 합당한 보호와 보상을 지급할 책임도 당연히 그에게 있다.
김부선, <조선> 기자 문자 공개하며 "조폭이냐?" 929 오마이뉴스
<여성조선> '김부선도 난방비 0원' 기사에 "소설 쓰는 곳인가" 성토
▲ '난방열사' 김부선씨가 자신은 난방비를 안 낸 적이 없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출처- 김부선씨 페이스북) ⓒ 김부선
"조선일보 김OO 기자, 당신은 인격살해부터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치욕스러운 모욕감까지 주셨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방열사'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단단히 화가 났다.
<여성조선>이 지난 28일 보도한 <"난방비 0원인 집 수두룩해" vs. "김부선도 10개월 동안 안 내">라는 제목의 기사가 화근이 됐다. <여성조선>은 이 기사에서 지난 18일 열린 옥수동 J 아파트 주민토론회 당시 취재한 일부 주민들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김부선씨가 이 아파트 난방비 비리를 밝혀졌지만, 김부선씨조차 난방비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에 대해 김부선씨는 이날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일등신문 조선일보! 허위사실 유포로 명예훼손으로 또 소송해야 하나요?"라며 "김부선 난방비 안 낸 적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반박했다.
"계량기 멈춰서 전년도 기준으로 다 냈습니다. 관리실의 실수로 누락한 건 한번 있더군요.
10개월을 난방비 안 냈다구요(?) 헛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기자) 전화 받지 않으니 내게 뭐라고 협박성 문자를 보냈는지... 여성조선은 인터뷰 거절하면 소설 쓰는 곳인가요?"
김씨는 이어 29일 페이스북에 "조선일보 김OO 기자 협박성 문자"라는 제목으로 2건의 글을 게시했다. 김씨가 공개한 김아무개 <여성조선> 기자의 첫 번째 문자에는 "김부선씨가 12월부터 계량기 칩을 빼 난방비가 0으로 나오고 있는데 고의적으로 갈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많더라고요. 일부 주민들 입장이니 김부선 입장을 꼭 들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어진 두 번째 문자에서도 '김부선씨조차 난방비를 안 내고 있다'는 일부 주민들의 발언을 그대로 전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결백하다면 본인의 입장을 말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답을 회피하시는 건가요. 아니다 기다 답을 주세요"라고 압박하는 내용이 나온다.
김부선씨는 2개의 문자를 게시한 후 댓글에서 "일부 주민들 이야기를 사실인양 소설 쓰시는 기자양반, 벌써 열흘이 지났고 그동안 페북, 기자회견을 통해서 '난방비 안 낸 적 없습니다'라고 밝혔는데, 열흘 동안 대체 어디서 무얼하신 건가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경찰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해명하라. 허참. 살다 살다 이런 조폭 같은 기자는 처음입니다"라고 분개했다.
"'인터뷰 응하지 않은 죄로 헛소문 들은 대로 기사 씁니다'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이게 조폭입니까? 기자입니까? 그만큼 드라마에 집중하도록 도와 달라 언론인들에게 호소문까지 썼건만, 결국 기자라는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저는 이분 전화 문자 협박 등등 사생활을 얼마나 침해받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런 사람에게 시달려야 합니까."
김부선씨는 급기야 난방비를 모두 냈다는 내용의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플래카드에는 "김부선 난방비 안 낸 적 없다. 관리소 누락이 한 건 있을 뿐. 영수증 들고 다 까자!! 모이자!(동대표들부터 까자!)"라고 적혀있다.
▲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아파트 난방비 비리와 관련 28일 보도된 <여성조선>의 기사에 대해 "허위사실 유포"라고 분개했다. (김부선씨 페이스북 캡쳐).
앞서 김씨는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언론사 기자분들께"라는 글을 올려 공식적으로 인터뷰 거절을 간곡히 요청한 바 있다.
"대본 외우기도 버거운데 여기저기서 취재 요청이 쇄도하니 많이 힘드네요. 그렇게 하고 싶던 연기를 공중파에서 하게 됐는데 제발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취재나 인터뷰 일체 사절입니다. 긴 시간 파헤쳤던 난방비 문제가 세상에 드러났으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저도 이제 배우로 사랑 받고 살아야지요. 주어진 역할 잘 해 내야죠. 저의 이런 마음 이해해 주시고 취재 요청 거절한다고 언짢아하거나 오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김부선씨의 분노에 누리꾼들은 대부분 공감하는 분위기다. 'Myu***** Kim'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마시구요, 정정보도 꼭! 받아내셔야 합니다, 홧팅"이라는 글로 김부선씨를 응원했고, '나O달'은 "기자가 형사처럼 사실여부 취조권이 있단 뜻인가요?"라며 김아무개 기자를 비판했다.
'Ji**** Park' 역시 "저런 식으로 자극해서 인터뷰하게 하는 거죠, 쓰레기들"이라고 꼬집었고, 'O동기'는 "요즘 기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자꾸 손가락 얘기로 시선을 흩으러 놓는 거죠?"라고 지적했다. 한편 <여성조선>은 29일 오후 해당 기사 하단에 "전년도 기준으로 난방비를 계속 납부했다"는 김부선씨의 반론을 추가 게재했다.
45억 아시아인의 축제? 무관심 속에 막 내릴 처지 10.1 한ㅇ겨레
45억 아시아인의 축제 2014 인천아시안게임의 막이 올랐다.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12년 만에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 한국은 5회 연속 종합 2 위를 지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인천/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평균시청률 5.6%, 설문조사 53% “관심 없다”
전문가들 “세계적 스타 부족”·“운영력 부족”
누가 아시안게임을 ‘45억 아시아인의 축제’라고 했는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이 무관심 속에 막을 내릴 처지에 놓였다. 대회 폐막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는커녕 일부 국민은 폐막식이 언제인지도 알지 못한다. 한국의 금메달 경기조차 중계를 타지 못하기 일쑤고 일부 종목을 제외하고 방송 시청률은 초라하다. 국민들도 선수들의 투혼에 예전만큼 열광하지 않는 분위기다. 금메달리스트가 몇명인지도 헤아리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경제수준이 높지 않던 시절에는 헝그리 정신으로 뭉친 선수들의 투혼을 보면서 국민들이 열광했지만 지금은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세계적 스타가 많지 않은 아시안게임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평했다.
■ 평균 시청률 5.6% 그쳐 안방에서 열리는 국제 대형 이벤트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청률은 초라한 수준이다. 닐슨코리아 등 시청률 조사회사들의 집계를 보면 개막식 시청률은 24.8%로 지난 광저우 대회(16.5%)에 견줘 늘었으나 1일까지 최고 시청률은 광저우 대회보다 크게 낮았다. 이번 대회 최고 시청률은 지난달 23일 박태환이 동메달을 차지한 남자 수영 자유형 400m 결승으로 26.4%를 찍었다. 광저우대회 때는 박태환이 출전한 1500m 자유형 결승전 시청률이 34.8%였다. 이밖에도 박태환 경기를 비롯해 야구, 축구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기는 시청률이 한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종목 평균 시청률은 5.6%에 그치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의 한 아시안게임 담당자는 “세월호 정국과 민생고에 관심밖으로 밀려난 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지난 광저우 대회 때 수영의 정다래 처럼 대회 초반에 툭 튀어나오는 스타가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면서 전체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28일 인천아시아드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육상 경기를 찾은 시민들. 빈자리가 많이 보인다. 2014.9.28 연합뉴스
■ 폐막식 입장권 절반도 못팔아 대회 개막전부터 ‘그들만의 대회’는 예견됐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개막 전 실시한 인천아시안게임 관심도 설문조사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53%가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반면 ‘관심이 있다’는 이들은 45%에 그쳤다. 2002년 부산대회 때는 65%, 2012년 런던올림픽은 59%가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갤럽 관계자는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대형 국제 스포츠에서 관심도가 50% 밑으로 내려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경기장을 찾는 발길도 뜸하다. 대회 반환점을 훌쩍 넘긴 30일까지 230여억원어치의 입장권이 팔려 당초 목표액의 65.7% 수준에 그치고 있다. 폐막식 입장권은 목표액(100억원)의 절반도 팔리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조직위는 최근 입장권 판매 목표금액을 당초 350억원에서 280억원으로 20% 내려잡았다.
인천아시안게임 대회 기간 내내 타올라야 할 성화가 지난 20일 밤 한때 꺼지는 사태가 빚어졌다. 조직위측은 인천 아시아드주경기장에 점화된 성화가 오후 11시 38분부터 11시 50분까지 약 12분간 꺼져서 성화관리실에 보관 중인 안전램프 불씨로 성화를 다시 점화했다고 밝혔다. 2014.9.21 연합뉴스
■ 스타 없어 흥행 요인 떨어져 무엇보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많이 참가하지 않아 흥행 요소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86년 서울대회 때 처럼 국민소득이 낮았던 때는 ‘라면소녀’ 임춘애(육상)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뭉친 선수들의 투혼에 국민들이 열광했지만 지금은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일부 세계적 스타를 제외하고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안방에서 유럽의 선진 축구리그와 메이저리그 등을 언제든지 볼 수 있는데다 여가문화도 다양해지면서 아시안게임에 대한 관심도가 갈수록 낮아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조직위의 어설픈 대회 운영도 ‘전국민적 무관심’을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개막일인 19일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터지면서 외신으로부터 “한국판 전국체전이냐”는 비아냥마저 터져나왔다. 정윤수 평론가는 “손님을 불러놓고 국내 팬들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조직위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전훈이 만화 -아름다운 합의
텔레비전이 만들어낸 두 국민 10.1 한겨레 [김동춘 칼럼]
종합편성채널의 무분별한 ‘종북’ 주장 방송에 대해 법원이 최근 방송사의 책임도 함께 물었다. ‘채널에이’의 ‘박종진의 쾌도난마’는 지난해 2월 ‘5대 종북 부부’를 다뤘다. 화면 갈무리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을 하면서 조롱하거나 욕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고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들이라고 개탄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극단적인 대립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세월호 그만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지 의심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세월호 문제에 대한 극한적 대립은 한국 사회가 티브이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조·중·동으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종편을 전혀 보지 않지만 식당이나 목욕탕 등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론계나 지식사회에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대단한 논객이 되어 방송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진보/보수의 양 테이블에 나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제를 긴 시간 떠드는 것이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과 구원파의 동향을 거의 생중계하듯이 계속 보도하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걸 보고 왜 종편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유족 공격 담론에 솔깃하게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텅 비고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를 멀리하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텔레비전이 소유주나 광고주의 시청률 압박 요구에 완전히 종속되어 권력에 민감한 의제는 의도적으로 피해가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일종의 상징 폭력 기구라고 보았다.
이번 한국의 종편과 지상파도 ‘참사’를 교통사고로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다음, 정부나 당국의 구조 책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세월호 구조 관련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않고, 농성장의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마이크 한번 들이대지 않은 채, 이들이 마치 자식 죽음을 팔아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스러운 떼잡이인 양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나오자 잘 만났다는 듯이 뉴스의 머리기사로 띄워 종일 틀어댔다. 이런 걸 칼 안 든 폭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직후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이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여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를 반탁·반공 투사로 부활시켰고, 나라를 적대적 대립으로 몰고 갔듯이, 그 악명 높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나타난 지금도 그 상황과 유사하다. 물론 8·15 직후 하나였던 국민이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적대적으로 쪼개진 것은 언론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기사회생을 노리던 친일 정치세력들의 공작 혐의가 있듯이, 국민적 공감에서 출발했던 세월호 여론을 적대적 반반으로 돌려놓은 주체도 사실상은 이미지 조작과 허구적 여론지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 집권세력일 것이다.
가공된 이미지가 ‘여론’이 되고 ‘지지율’이 되어 권력을 재생산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은 온갖 무리수와 편법을 써서 종편 허가를 강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월호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공감대와 합의의 기반 위에 서서 비극적 재난 방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국민들은 폭발 직전의 두 적대 진영으로 쪼개졌고 근본적 대안 마련 작업은 더 멀어졌다. 유신 시절 지식인들이 국내 소식을 알기 위해 외국 신문·잡지를 뒤졌듯이, 21세기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일본의 <후지티브이>를 통해 침몰 직전 세월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언론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호의 한국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공감은커녕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집단이 활개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늘려도 모자랄 판에…복지예산 ‘싹둑’ 잘렸습니다 10.1 한겨레
신생아들. 한겨레 자료 사진
가정양육수당 1135억 삭감
저소득 암환자 지원 50억 삭감
신생아 집중치료 20억 삭감
영유아 건강관리 17억 삭감
내년 복지 관련 예산 비중이 전체 예산 대비 처음으로 30%를 돌파했지만, 연금 등 의무지출 증가분이 복지예산 증가의 대부분을 차지한 탓에,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취약계층과 저출산 관련 복지예산들이 줄줄이 삭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30일 새정치민주연합 김용익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예산안을 보면, ‘저체중 아기’의 치료실 마련을 위한 ‘신생아 집중치료실 지원’ 내년 예산이 86억4000만원으로 올해(107억800만원)보다 20억6800만원 삭감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강원을 제외한 전국에서 신생아 집중치료실이 부족해 아기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저체중 출생아 수가 2만5870명이었고, 치료가 필요한 아이가 2035명이었지만 병상 수가 421개나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예산 삭감으로 내년에는 올해보다 10개 줄어든 40개의 치료실을 지을 수밖에 없다.
연금 등 의무지출 빠르게 증가
저소득·저출산 예산은 줄삭감
‘영유아 사전·예방적 건강관리’ 예산도 내년에 17억4900만원 줄어들었다. 영유아 건강관리는 전국 가구 월평균 소득 150%(3인 642만2000원) 이하 가구에서 미숙아(저체중, 조산)나 선천성으로 이상징후를 보이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의료비를 지원해 장애를 막고 사망을 예방하는 사업이다. 저소득층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암환자 의료비 지원 사업도 내년에 50억원 깎이도록 짜여 있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0~5살 아이가 있는 가구에 대해 10만~20만원까지 지원하는 가정양육수당(장애아 포함)도 1135억5100만원 줄었고,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예산도 18억4500만원 깎였다.
암환자. 한겨레 자료 사진.
이처럼 복지예산이 삭감된 것은 법적 복지의무 지출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음에도, 정부 전체 재정 규모는 크게 늘지 않은 탓이다. 내년에 복지 관련 예산이 9조1000억원 증가했지만, 대부분이 기초연금, 공무원·국민연금 등 정부의 의지와 별 상관없이 이미 법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늘어나는 자연증가분이다. 정부가 빠듯한 재정상황 탓에 의무지출 증가 속도에 맞춰 전체 복지예산 규모를 늘리지 못해, 의무지출 외의 다른 복지 분야에서 예산을 삭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재정 규모를 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총지출이 31.1%(2013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2%에 견줘 크게 낮다. 김용익 의원은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법인세 인상 등 세입을 확충해 전체 재정 규모와 복지예산 규모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돈칼럼] 대통령·여당은 불통, 야당은 한심 10.1 경향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도는 45~50%, 새누리당의 지지도는 40~45%에 달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도는 20%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낮은 응답률 등 여론조사의 한계를 고려하면 박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는 부풀려져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야당의 지지도는 대체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야당의 지지도가 이렇게 낮은 것은 잠재적 야당 지지자들이 실망해서 무당파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야당에 대한 지지도가 낮다고 해서 정부와 여당이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정부와 여당도 잘 알 것이다. 1987년 민주개헌 이후 박근혜 정부처럼 국민과 높은 담을 쌓은 불통정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은 전 정권까지 이어온 각종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약속하고 당선됐다. 국민대통합, 경제민주화, 검찰개혁이 바로 그런 약속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이 내건 약속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통째로 폐기해버렸다. 전 정권에서 있었던 4대강 사업, 해외자원 개발 같은 대형 의혹이 현 정권 들어 새로 생겨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전 정권하의 의혹에 대해 모른 체함으로써 자신은 전 정권과 다를 것이라고 한 무언(無言)의 차별화 약속을 파기했다. 이어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한없이 무능함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 비상 상황에서 아무도 대통령을 만나서 대책을 의논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청와대가 심각한 병적(病的) 상태에 있음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새누리당에 김무성 체제가 청와대의 의도와 무관하게 들어선 것은 그 자체로써 대단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김무성 대표가 이끄는 새누리당은 ‘혁신’을 한다면서 외부 위원을 위촉하는 등 부산하다. 하지만 여당의 혁신은 전 정권이 저지른 4대강 사업, 해외자원 개발 등 각종 난맥상에 대한 자아비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친이계가 장악한 새누리당이 전 정권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반성을 할 리가 없고, 전 정권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친박계는 절멸 단계에 접어들었다. 정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주체 세력이 없는 현 정부의 취약한 모습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야당의 지지도가 높아야 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현 정권 초기부터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불거지는 등 상황은 야당에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 과반수 의석에 기대서 철통방어를 하는 비상식적인 여당 지도부에 대해 야당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물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 환경 역시 야당에 결코 우호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야당의 적은 야당 내부에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당에 유리한 국면이면 ‘귀태(鬼胎)’니 뭐니 하는 돌출성 발언이 터져 나와서 문제의 본질을 집어삼키곤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도 문제지만 자기 골대를 향해 공을 차는 이런 일이 더 큰 문제다.
야당은 20~30대가 왜 자신들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나라 20~30대는 ‘88만원 세대’이니 당연히 야당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하는 데 야당의 문제가 있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보다 나은 교육을 받은 20~30대는 결코 여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야 운동권과 어깨동무하면서 거리에서 투쟁하는 야당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야당이 당연하게 자기들의 지지기반이라고 생각하는 호남 유권자들의 정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야당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20~30대와 호남 유권자들을 조용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잃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월호특별법 문제는 오늘날 야당이 갖고 있는 문제를 잘 보여주었다. 세월호 참사를 조사할 위원회가 공정하고 강력해야 한다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고, 또 별도로 특검을 두자는 발상에 대해 흔쾌히 동의할 법조인과 법학교수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제외하고 그 대신 조사위원회 구성을 야권에 유리하게 한 이완구-박영선 합의안에 대한 야당 내 강경파의 반응은 본능적이고 반사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대안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장외로 나가서 “박근혜 대통령이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것뿐이었는데,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조롱’으로 응대했다. 이런 와중에 대리기사 폭행이란 돌출사태가 일어났으니, 이러다간 세월호 참사가 아예 망각될까 걱정된다. 정부와 여당은 불통이고 야당은 한심하니, 이제는 여야를 대체할 제3의 정치세력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서북청년단 재건위 위원장 “안두희가 김구 처단한 것은 의거” 10.1 경향
서북청년단 재건위 위원장이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원 안두희씨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고 있다. 서북청년단 배성관 재건준비위원장은 지난 30일 ‘일간베스트’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김구는 김일성의 꼭두각시였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또 “김구는 자신의 남북합작 주장에 편을 들지 않는다고 송진우 장덕수씨 등 애국독립투사들도 암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확인되지 않은 주장도 펼쳤다.
배 위원장은 아울러 “노란리본 철거 시도를 한 후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비난과 주목을 받고 있다”며 “종북좌파가 장악하고 있는 언론이고 야당이기에 그러느니 하고 치부하지만 홍어까지 가세하고 있는 꼴을 보니 목불인견”이라며 특정지역을 비하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홍어 한 마리가 준비위 대변인인 정함철씨에게 전화로 살해위협을 했다. 내용인즉 김구선생을 서북청년단원 안두희가 살해했는데 그런 애국자를 살해한 서북청년단을 무슨 낯짝으로 재건하려느냐, 안두희가 맞아 죽듯이 너도 죽고 싶으냐는 식”이라며 김구선생 암살이 의거라는 문제의 발언을 했다. 배씨의 글을 노출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비판의 글들이 이어지 있다. 정의당 서주호 서울시당 사무처장은 1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하면 공권력이 범죄단체 결성 혐의 적용해서 체포 수사해야 정상일 텐데”라고 말했다.
한편 배 위원장은 “안두희씨가 맞아 죽은 것은 종북좌익 정권시대”라며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출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종북좌익’으로 몰기도 했다. 안씨가 사망한 시기는 1996년이다.
애들이건 노인들이건 '빨갱이'라면 죄다 죽여라 10.1 노컷뉴스 임기상
서북청년단, 그 죄를 어찌할까?
◈ 야만의 극치를 달린 '서북청년단'의 시대가 열리다
1946년 5월 서북청년회(또는 서북청년단)의 전신인 평안청년회가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옥을 점거하기 위해 출동하고 있다.
"해방 뒤 38선 이북은 일제 잔재 청산이 있었다/
행정에 필요한/ 일제 하급 공무원은/ 우선 활용했으나/
악질 친일파로 숙청당한 사람들 많고 많았다/
숙청을 피해/ 38선을 넘은 사람들 많았다/
1946년부터 38선은 생사의 경계였다/
넘어와/ 북의 공산당에 이를 갈았다/
남의 현실에 환멸이었다/
혼란/ 굶주림/ 무직/ 올 데 갈 데 없었다/
안되겠다 뭉쳐보자/
평남 청년회/ 평북 청년회/ 함북 청년회/ 함남 청년회/ 황해 청년회 들 통합/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오직 이승만 박사에게 충성을 바쳤다/
나는 선우기성이 아니라/ 이승만 박사의 손가락이다/
오늘도 이승만의 주먹 두 개를 쥔다/
서북청년회 지도자 선우기성/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 쟁취/ 균등사회 건설/ 세계 평화의 건설/
서북청년회 3대 강령/ 오죽이나 이상적이냐/
자주와/ 평등/ 평화가 오죽이나 이상적이냐/
철저한 반공노선/ 회원 6천명/
첫 투쟁은 좌익단체 습격/
백색테러가 시작되었다/ 유혈낭자/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원을 받았다/
미군 첩보보조원으로/
38선도 넘나들었다/
김일성 별장도 습격했다/
선우기성/ 점점 살벌해졌다/
인간보다 비인간이 더 치열했다/
38선 이남이 떨어댔다/
모든 도시들/ 모든 촌락들/
선우기성의 밤뿐 아니라/
뭇 사람들 겁먹은 눈에 다 드러나는/
선우기성의 대낮이 벌벌 떨어댔다"
고은 시인이 쓴 시 '선우기성'이다.
6.25전쟁 중에 일가친척들이 대부분 학살당해 겨우 목숨을 구한 고은 시인에게 서북청년회가 공포의 존재였나보다. 선우기성이란 인물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서북청년단의 창설자이자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인물로 백색테러의 지휘자였다. 서북청년회는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탄압을 받았거나 재산을 뺏기고 남한으로 내려온 이북 5도 출신 청년들이 만든 준군사조직이자 반공단체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주로 친일파나 지주,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로 구성돼 있었다. 고향에서 쫒겨나거나 도망쳐 나온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면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치를 떨었다.
남하한 후 출신지에 따라 각각 평안청년회, 함북청연회, 황해청년회 등을 구성한 뒤 좌익을 쳐부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몰려갔다. 그들은 늘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좌익이 날뛰는 남한의 현실이 늘 불안했다. 남한마저 공산당이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갖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단체로 뭉쳤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YMCA 강당에서 선우기성을 중앙 집행위원장으로 한 '서북청년회(서청)를 창단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북청년단의 창설자이자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선우기성(鮮于基聖)'.
서북청년단에게 은밀하게 접근한 이들이 미군정과 집권을 노리던 이승만, 그리고 반공을 내세우며 친일경찰을 비호하던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었다.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이승만의 보호와 자금 지원을 받게 된 서북청년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이 주로 한 일은 경찰이 할 수 없는 거친 폭력이었다.
독립운동가 김병길 선생은 서청의 만행을 이렇게 회고했다."서북청년단의 만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것들이었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개나 돼지를 마구 잡아먹었고 항의하면 장독대 항아리며 집안 집기들을 마구 부셨다. 어떤 때는 성냥을 확 그어서 초가지붕에 대고 불을 붙여 가옥을 다 불태우기도 했다. 시골 초가라는 게 지붕이 낮아서 손을 뻗으면 닿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도 없었다. 몽둥이를 질질 끌고 몰려다니다가 그냥 아무나 패고 부수고 불을 질렀다. 몽둥이가 없으면 패놓은 장작으로도 마구 사람을 팼다. 장작으로 패면 각이 지고 표족한 옹이와 가지가 있어 살을 푹푹 파고들었다.
서북청년단원들은 사람을 팰 때 옥상으로 끌고 가서 패면 아무도 모른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당시 옥상이 있는 집은 가장 높은 집이었을 것이고 거기서 패면 소리가 하늘로만 올라가게 되고 하늘에는 소리를 반사해줄 것이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도 전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반정부, 반미시위에 가담한 사람이 있는 집안은 서북청년단 만행의 표적이 되었다.
오빠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집의 여동생들은 서북청년단들이 날마다 찾아가서 성폭력을 동반한 온갖 악행을 다 가했다. 어떤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며느리와 자식들을 다 잡아다가 옷을 모두 홀라당 벗겨놓고 할아버지에게 며느리 등을 타고 넘으라는 고문도 가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초주검을 만들었다. 그런 고문을 당한 집안 중에는 대부분 법도를 중시하는 양반가문이었다. 양반가문이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의 도덕관념이 얼마나 높은가? 그런 고문을 당한 집안에서는 목을 매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에 가담하는 이들도 많았다"
◈ 서북청년단의 만행으로 제주도 4.3사태 불이 붙다
제주도민을 몰살한 서북청년단원들.
1948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제주도에서 총파업이 발생하자, 새로 제주도 지사로 부임한 유해진이 경호원으로 서북청년회원 7명을 데리고 왔다.이어 4월 3일 빨치산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서청회원 500명이, 여순사건 직후인 11월과 12월에 최소한 1,000명 이상의 회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 신분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이들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북청년단은 제주도민과 좌익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살인과 폭행, 약탈을 저질렀다. 이들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폭력 때문에 좌익 쪽을 택한 제주도민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서청회원들은 정기적인 봉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늘 빈손이었다. 때문에 공권력을 빙자해 뇌물 수수, 공갈, 사기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신문인 제주신보까지 장악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했다.
이들은 마을을 점령하면 인간으로 해서는 안될 짓을 많이 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뺨 때리기를 강요했다.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여자들을 겁탈하고 나서는 고구마를 쑤셔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다. 장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관계를 갖도록 강요하고 총살시켰다.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테러에는 도끼와 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도 사용했다. 제주도에서 서청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 서북청년회원 안두희와 김성주의 비참한 말로
4.19혁명 이후에야 진상이 드러난 김성주 사건.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남한으로 월남한 후 처음 만난 것은 작은 부락에서 월남민을 심문하던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원에 가입해 김구 암살을 계획하던 이승만의 측근들을 알게 된다. 결국 안두희는 애국시민 박기서에게 맞아 죽지만 그의 배후인물이었던 서북청년단 부단장 김성주의 최후는 더 비참했다.
김성주는 이승만을 추종하다가 돌아선 인물이다. 그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재판이 열리자 서북청년단을 이끌고 안두희가 애국충정의 의사라고 외치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그러던 김성주가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 조종자들을 비난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이승만 귀에 들어갔다. 대노한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김창룡 특무대장이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에는 김성주가 이승만의 정적인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김구 암살의 배후를 공개해 다음번 대통령선거에 이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은 "이런 자는 그냥 살려둘 수 없다"며 처단을 지시했다. 김성주는 헌병사령부에 연행돼 엉뚱하게 국가반란, 대통령 암살 음모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증거부족으로 혐의가 인정되지 않자, 원용덕 헌병사령관이 자기 집 지하실로 끌고가 죽여버렸다. 악당들과 악당의 한판 승부인 셈이다. 서북청년단은 이후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이 만든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가 내분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다.
최근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고 나선 인물들이 이 단체의 추악한 과거의 행적과 주도한 이들의 비참한 최후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 조선을 팔아먹다 930 노컷뉴스 임기상
매국노를 선각자로 가르친 중·고교 교과서
◈ 이인직, 신소설로 포장한 연재소설로 일본을 찬양하다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
우리가 중·고교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혈의 누>라는 작품이 있다. 이인직이라는 인물이 쓴 최초의 신소설이라고 배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7살 난 여주인공 옥련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을 당하지만,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이노우에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 소설이 <만세보>에 연재되기 시작할 때가 1906년 7월 22일이다. 그 네 달 전인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조선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런 시기에 이인직이 '시련에 빠진 여주인공을 일본군이 구출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연재한 의도가 무엇일까? 쉽게 얘기하면 "일본이여~ 빨리 우리를 구출해달라", "일본의 점령은 우리에게 축복이다" 라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학교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이인직이 선각자이고, 최초의 신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다 알아도 그가 이완용과 함께 조선을 팔아먹은 주역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장이 3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총리 이완용은 비서인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몰래 보낸다.
첫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년 8월 4일 밤 11시였다. 조선을 팔아먹는 비밀 협상을 하기 위해서다. 고마쓰는 24년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이때의 일화를 소개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연재물이다.
이 협상에서 이인직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 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운을 뗀 이인직은 은밀하게 이완용이 궁금해하는 사항을 물었다.
나라를 팔아먹는데 따른 댓가였다. 고마쓰는 "병합 후 조선의 원수는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받는다. 내각의 여러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으로서 병합 실행에 기여하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지 않은 자까지도 비위의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 자는 모두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영작을 수여받고 세습 재산도 받게 된다"고 답했다. 귀가 솔깃해진 이인직은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일본 정부의 대체적인 방침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기 때문에 이완용 총리가 걱정하는 정도의 어려운 조건이 아니라고 본다"고 고마워했다. 나라를 팔아먹는 대가로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주겠다고 하자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라고 좋아하고 있다. 이인직의 보고를 받은 이완용은 매국을 결심하고 데라우치를 만난다.
◈ 이완용과 이인직, 작위와 은사금을 댓가로 조선을 팔아먹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맨 왼쪽)과 친일파 고관들. 이완용 옆으로 임선준, 이병무, 송병준이 나란히 앉아 있다.
1910년 8월 16일 노론의 영수 이완용은 통감 저택을 방문해 데라우치를 만났다. 나라를 팔아넘기는 거대한 협상이 불과 30분만에 끝났다. 중요한 사안은 이미 이인직과 고마쓰 사이에 다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이런 악질 친일파 이인직을 해방 이후 우리 국사와 국어 교과서는 선각자로, <혈의 누>를 '자주 독립· 신교육 사상'이 담긴 신소설의 효시로 가르쳐 왔다. 이런 파렴치한 교과서 집필을 주도한 인물들은 누구일까? 일제 하에서 식민사관을 개발하고 해방 후 이를 보급한 이병도와 신석호와 같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사학자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박정희 처단하지 않으면 광화문 일대가 피바다로 변한다" 9.11 노컷뉴스 임기상
부산과 마산의 민중항쟁,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다
◈ 10월유신 선포 7주년 기념 만찬을 망가뜨린 부산 시위
유신이 선포된 지 7년만에 부산과 마산에 대규모 민중항쟁이 발생해 군이 출동했다. 이 시위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사살하는 태풍을 불러 일으킨다. (사진=국무총리실 제공)
1979년 10월 17일 저녁 6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선포 7주년을 자축하는 만찬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 이하 정부 여당의 실력자들이 모두 모여 흥청망청 놀고 있었다. 위키 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가수 현인, 백설희, 김정구가 무대에 나와 KBS 전속악단의 반주 속에 '신라의 달밤' 등 흘러간 옛노래를 불렀다.
같은 시간에 부산 도심에는 연 이틀째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길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유신철폐'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전날 밤에는 파출소 11곳과 언론기관 한 곳이 불에 탔고, 17일에는 경남도청, 중부세무서, 경찰서 두 곳, 파출소 10 곳, 언론기관 세 곳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한편 청와대 만찬장에는 유정회 대변인 정재호가 대통령을 칭송하는 아부성 인사를 한 뒤 '삼각지 로타리에…', '나그네 설움', 묘하게도 '바보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쯤 박정희 주변에 찬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라는 짜증 섞인 소리가 들려 나왔다. 분위기가 스산해지자 노래자랑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다들 끼리끼리 청와대 밖으로 흩어졌다. 유신정권은 서둘러 10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부산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의 곤봉에 얻어맞는 동안에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 나갔다. 부산이 숨을 죽인 18일 오전 경남대학생과 마산대학생 수천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도심으로 진출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마산도 어둠이 깔리자 시민항쟁으로 번졌다. 마산 시위는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여당인 공화당의 당사가 부서졌고, 시내 여러 곳의 파출소가 습격당했다. 곳곳에서 박정희 사진이 떼어내져 짓밟혔다. 결국 유신정권은 20일 새벽 0시를 기해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이제 불길은 어디로 향할 지 아무도 몰랐다. 시민들의 비조직적인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 부산에 나타난 유신정권의 2인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군법회의장에서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그의 거사가 대한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인 10월 18일 새벽 2시 부산의 계엄사령부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들어섰다. 그는 박찬극 부산지역계엄사령관에게 박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했다.
"데모의 징후가 여러 타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시켜라"
김재규의 부산 출장은 그와 박정희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최고 정보책임자인 김재규가 보고 듣고 판단한 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갈랐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온 김재규는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부마사태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책 불신,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입니다.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내려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을 시키겠느냐?"고 강변했다. 배석한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재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차지철(맨 왼쪽)이 바라보는 가운데 박정희가 김계원 경호실장(왼쪽에서 두번째)에게 막걸리를 따라주고 있다. (사진=청와대출입사진기자단 제공)
10월 24일 신민당 황낙주 원내총무를 만난 자리에서 김재규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김재규는 육사 2기 동기생으로 박정희를 만난 이래 그와 친형제처럼 지내 박정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미 부산에서 4.19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는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유일한 방법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것 밖에 없었다.
◈ 김재규와 부하들, 전광석화 같이 유신의 심장 '박정희'를 제거하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에서 김재규가 밧줄에 묶인 채 권총을 들고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비서실장. (사진=보도사진연감 '80 제공)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55분, 청와대 인근에 있는 궁정동 안가. 이 곳은 박정희가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여자들과 즐기기 위해 마련한 장소인데, 대통령 경호실 차장도 그런 곳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비밀에 싸인 곳이었다. 온돌방 등받이가 있는 노란색 방석에 대통령이 앉아 있고, 그 좌우에는 가수 심 양과 모델 신 양이 앉아 있었다. 맞은 편의 왼쪽에는 김재규가, 오른쪽에는 김계원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김재규 사이인 식탁 옆자리에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자리했다. 김재규가 갑자기 김계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형님~ 각하를 똑똑히 모시십시오“
그리고는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자식~"하면서 권총을 쐈다. 이어 일어나면서 대통령에게 한 발을 쏘았다. 첫 총탄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다. 두 번째 탄환은 대통령의 가슴을 관통했다. 차지철은 "경호원~ 경호원~"하고 외치며 화장실로 도망갔다.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버리고 도주한 것이다. 김재규는 달아나는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발사되지 않자, 밖에 있던 의전과장 박선호의 총을 뺏아들고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차지철 배에 한 발을 쏜 다음 여자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대통령의 뒷머리에 다시 한 발을 쏘았다.
철통같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유신체제'의 주인공과 경호 책임자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김재규의 총이 불을 뿜은 시각에 식당 현관 앞의 대기실에서는 박선호가 경호원 안재송과 정인형을 사살했다. 같은 시각 주방에서는 경호원 김용섭과 박상범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여흥을 즐기기 위해 궁정동 안가를 방문한 대통령과 경호실장, 경호원 4명이 전원 총알세례를 받았다. 역사상 가장 짧고 가장 완벽했던 '쿠데타'였다.
◈ 후회없이 떠난 김재규와 부하들, 대한민국 정치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다
10.26 재판정에서 김재규(오른쪽 흰옷 입은 인물)가 부하인 박선호(왼쪽 포승줄에 묶인 인물)중앙정보부 의전과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11권 제공)
김재규와 그 부하들은 전광석화와 같이 대통령을 사살했지만 결국 체포돼 모두 처형됐다. 그러나 부하들은 김재규 부장의 충격적인 명령을 받고도 일사분란하게 명령을 이행했다. 재판정에서도, 처형장에서도 조금도 상관인 김재규를 원망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났다. 부하들을 인솔해 거사를 지휘한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장님은 모든 것을 뿌리치고 민주회복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졌다. 김부장이 각하께 전화로 보고할 때 옆에서 가끔 들었는데, 분명히 욕먹을 일인데도 국민의 입장에서 속이지 않고 보고하는 것을 몇 번 보고 느꼈다" 그는 또 김재규의 행동이 "사심이나 욕심보다 신념에 의한 행동"이라며,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피고인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던 박흥주는 "평소 부장의 인격이나 판단을 믿었고, 당시는 그것이 가장 적절한 지시인 것을 알고 순응했다"고 말했다. 이들 모두 당당한 태도를 보일 수 있던 것은 당시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거사 때문에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많은 정치범이 석방된데다 '민주회복'의 함성이 메아리 치던 '서울의 봄'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결정적 원인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 문제였다.
10·26사건 후 법정진술을 위해 육군본부에 도착한 모델 신재순씨. (사진=보도사진연감 '80 제공)
박정희의 지칠줄 모르는 엽색행각 때문에 김재규와 연회장소인 궁정동 안가를 관리하는 부하들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김재규는 상고이유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통령이 유락장소를 찾아오는 빈도는 적어도 월 10회 정도이고, 상대하는 여자는 주로 TV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에 종사하는 처녀들로 그 수는 적어도 200명이 넘었다. 어떤 경우에는 임신까지 시켜서 임신중절로 욕을 본 여성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군병원의 현역 간호장교들과의 사이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박선호 의전과장도 수없이 찾아오는 대통령에게 여자를 붙여주는 '채홍사' 역할에 환멸을 느껴 여러 번 사표를 냈다고 한다.
김재규 부하들 입장에서 나라 일을 제치고 밤낮으로 여색과 술에 젖은 대통령과 국가를 위해 건강을 해쳐가면서 일하는 김재규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래서 그들은 부장의 명이 떨어지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통령 일행에게 총을 난사한 것이다. 김재규의 거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전두환이 유신체제와 같은 '천황제 국가'를 이어 받고도 끝내 단임으로 끝낸 배경에는 '10.26'의 망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거사로 인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이나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 같은 종신집권은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 버렸다.
"소련의 공군지원 없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라고?" 9.4 노컷뉴스 임기상
중공군, 소련의 측면 지원 없이 압록강을 건너다
◈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주년에 축전 대신 참전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다
1950년 10월 5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팽덕회(서있는 인물)가 한반도 출병을 주장하고 있다. (사진=중국 군사박물관 제공)
1950년 10월 1일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에게 친서를 보냈다. 뜯어보니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주년을 축하한다는 축전이 아니라 다급하게 중공군의 참전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38선이 위험하다. 우리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다. 조선 땅에 들어와 작전을 펴달라"고 애걸했다. 같은 날 동해안에 있는 국군 제3사단의 23연대가 38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날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에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속개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은 "조선의 형세가 이토록 엄중한 때에 이제 출병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출병 시각과 누구를 사령관으로 삼을 것인가가 문제"라고 말했다. 사실상 한국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미 해군 전함 미주리함이 1951년 함흥 해역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있다. 해·공군이 없는 인민군과 중공군은 속절없이 당해야 했다. (사진=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제공)
그러나 이들 중국 수뇌부의 결정은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10월 4일~5일 열린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대부분의 정치국원들은 "신중국이 수립된 지 얼마 안된 만큼 국내건설에 몰두해야 하고, 또 적은 강대한 미국인 만큼 대외전쟁은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참전할 지원군 사령관으로 내정돼 급거 소환된 팽덕회 장군의 격렬한 주장이 분위기를 바꿨다. 그는 "적이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 막대한 위협이 된다"며, "패할 경우 기껏해야 해방전쟁의 승리를 몇 년 늦춘 셈으로 치자"고 역설했다. 결국 중국 지도자들은 북조선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모택동은 "3일 낮밤에 걸쳐 방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사색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중공군 참전의 주역인 팽덕회(왼쪽)와 모택동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은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10월 15일 압록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이같은 결정을 통보하면서 비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은래와 임표가 스탈린이 머물고 있는 흑해 연안의 휴양지 소치로 출발한다고 통보했다. 주은래의 비밀 업무란 미군과의 전쟁에서 꼭 필요한 무기 제공과 공군을 동원한 지원을 약속받기 위한 것이었다.
◈ 스탈린, 중공군에 대한 공군 지원을 사실상 거절하다
1950년 2월 스탈린과 모택동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은래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이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이날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패퇴를 거듭하자 3가지 일을 동시에 벌인다. 한편으로는 북한에 있는 소련 군사고문단 등 모든 소련인들에게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김일성에게는 강력히 맞서 싸우라고 종용했다. 동시에 중국 정부에 계속 전문을 보내 한국전쟁에 참전하라고 강권했다. 소련이 참전해서 북한을 도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참모들이 북한에게 뭔가 지원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건의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답했다.
"김일성이 패배한다고 해도 우리 군대를 참전시키지 않을 것이오. (망하더라도) 내버려두시오. 이제 미국이 극동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게 합시다" 그리고는 "김일성 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부근에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중국에 통보했다. 전쟁을 벌이도록 충동질 해놓고도 북한이 위기에 처하자 곤경 속에 버려두겠다는 계산이다. 만일 모택동의 최종적인 참전결정이 없었으면 스탈린은 1950년 가을 김일성을 버렸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던 날 천안문 광장을 행진하는 인민해방군 대공포부대. 이들은 모두 압록강을 건너 미군기에게 대공포를 발사한다.
1950년 10월 11일 스탈린을 만나러 흑해 연안에 있는 스탈린의 별장으로 간 주은래로부터 모택동에게 급전이 왔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소련 공군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당분간 출동할 수 없으며, 따라서 중국과 소련 모두 잠시 병력을 출동하지 않고, 김일성에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하라고 요구한다"는 요지였다. 중소 간의 회담이 결렬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공산주의 국가들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번 회담은 시종 중국의 참전을 강력하게 종용하는 스탈린과 소련 공군의 지원을 확약받으려는 주은래 사이에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계속됐다.
둘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자.
"우리 소련 공군은 출동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면 국경이 애매해집니다. 자칫 우리와 미국간에 충돌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스탈린)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소련 조종사들이 중국지원군의 복장을 하고 참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공권의 문제나 소미간의 군사충돌도 피할 수 있습니다" (임표)
"하지만 조종사가 포로로 잡힐 경우 그의 몸에 걸쳐진 중국 인민지원군 복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들의 이번 모스크바 방문은 한국전쟁 참전 유보를 통보하기 위해서입니까?" (스탈린)
"그렇습니다. 소련 공군의 측면 지원이 없다면 우리는 출병을 보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은래)
"그렇다면 좋습니다.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 통보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울러 동북지구 통화에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권할 수도 있겠지요" (스탈린)
이념이고 나발이고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엿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충격에 빠졌다. 한반도에서 중공군이 전투를 벌일 때 소련 공군의 엄호 제공을 기대했는데, 스탈린이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10월 1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결론은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즉각 지원군을 출동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당시 모택동은 '피를 말리는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에게 단 한번 찾아온 통일의 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압록강을 건너가는 자칭 '중국인민지원군'. 해·공군과 중포도 없이 유엔군의 현대식 화력에 맞선다.
같은 날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으로부터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저항을 계속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국 동지들은 군사 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중국과 소련으로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 모든 병력과 군사장비를 갖고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낙담에 빠진 김일성과 박헌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때 전혀 다른 내용의 전문이 스탈린으로부터 날아왔다. "중국군 참전에 관한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중국 동지들을 만나 중국군 참전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상의해라. 중국군에게 필요한 무기는 소련이 제공한다"김일성은 지옥에서 천당을 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일이 지난 25일 첫 전투에 돌입했다.
◈ 감격한 스탈린, 소련 공군과 막대한 전쟁물자를 중국에게 보내주다
북한으로 출격하고 있는 미군 함정과 전투기. 곧 소련 미그기와의 공중전에 휘말린다.
중국이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 북조선을 구하겠다며 전격 참전을 결정하자,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모든 의심을 버렸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 곧바로 소련 공군이 중공군의 후방과 보급로를 엄호하라고 지시했다. 단동에 기지를 둔 소련 공군의 미그-15기가 11월 1일 북한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11월 8일부터 미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에 돌입했다. 소련 비행기는 중국 공군기의 색칠을 하고, 조종사는 중국군 복장을 했으며,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받았다. 작전 범위도 평양-원산 라인, 즉 북위 39도선 이남으로 적기를 추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 기간에 7만 2,000명에 달하는 소련 공군이 비밀리에 참전했다. 소련 공군이 참전하고 지원군이 유엔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흐뭇해하던 모택동에게 비보가 날아왔다. 그의 큰 아들 모안영이 11월 25일 미군기의 지원군 사령부 폭격 때 전사했다는 것이다.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모택동과 그의 첫째 아들 모안영. 그의 시신은 북한에 묻혔다.
모안영의 참전을 결정한 것은 모택동이었다. 주변에서 그의 참전을 만류할 때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안영은 모택동의 아들이다. 그가 죽음이 무서워 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군들 가겠는가?" 모안영은 참전 후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비서 겸 러시아어 번역, 사령부 작전처 참모를 지냈다. 그의 사망 보고를 받은 주은래는 차마 모택동에게 알리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후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모택동은 담배 2대를 피우고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그 놈은 모택동 아들이니까…"
그러나 모택동은 울지 않았다. 모택동의 지시로 모안영의 시신은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국인 묘지에 다른 중공군과 함께 묻혔다.
포로가 된 중공군. 이들 가운데 1만 4천여 명이 중국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건너간다.
중국은 형제국가인 북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지만 그 댓가는 컸다. 중공군 21만 명이 죽거나 실종됐으며, 38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중국이 정치적으로 패배당한 것은 중국군 포로 가운데 1만 4,227명이 중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간 것이었다. 특이하게 12명이 중국이나 대만행 모두 거부하고 제3국행(인도행)을 택했다.
한반도에서 포성이 멎은 지 40년 가까이 된 1992년, 중국의 실력자 등소평이 외교부에 지시를 내렸다.
"대한민국의 노태우 정부와 협상해서 우리와 수교하는 방안을 추진하라"
"북조선은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둬라. 우리에게 실익이 없다"
국가 관계란 이렇게 비정한 것이고, 영원한 적, 영원한 아군은 없는 것이다.
남조선을 침략해도 좋다…그러나 소련군은 참전 안한다" 9.2 노컷 뉴스 임기상
스탈린, 북한과 중국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떠밀다
◈ 중국의 공산화, 한반도를 뒤흔들다
장개석을 대만으로 쫒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모택동.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밀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웃한 중국대륙에 같은 공산주의 국가가 생긴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자칫 유고의 티토처럼 독립노선으로 갈 경우 공산주의권의 분열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중국 내전 기간에도 장개석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왔다. 중국공산군이 양자강을 넘어 최후의 공격을 시도할 때는 강을 넘지 말라고 저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중국이 양자강을 경계로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나눠 있기를 원했다. 그래야 2개의 중국을 상대로 소련이 최대한 이권을 챙겨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무시하고 양자강을 도하해 4달만에 중국을 통일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날에 인민해방군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군하고 있다.
스탈린이 가장 뼈아프게 생각한 것은 미국과 장개석 정부의 동의를 얻어 확보한 만주의 이권…장춘철도와 여순항. 대련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반면 북한의 지도부에게 중국의 공산화는 엄청난 호재였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에게는 재앙에 가까왔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같은 생각을 품었다. "중국혁명이 성공했으니 다음은 우리 차례다" 김일성은 재빨리 스티코프 주북한 소련대사를 찾아가 "스탈린과 만나 남조선 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이승만 군대에 공격을 개시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전했다.그때까지 스탈린은 김일성의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막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도를 바꿨다. 그는 전문을 보냈다."남조선을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김일성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와 회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북조선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뛸 듯이 기뻐하며 "1950년 3월 30일 평양을 떠나 4월 8일 모스크바에 도착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한편, 남한의 이승만은 불안한 시선으로 중국대륙의 공산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우리 뒤에는 세계 최강국 미국이 있으니… 설마 우리 대한민국을 버리지는 않을거야"
◈ 김일성과 박헌영, 모스크바와 북경을 돌며 전쟁 허가를 받다
1949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해 성명서를 읽고 있는 김일성.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6.25침공을 같이 추진한 부수상 박헌영이다.
우선 중국에게 다시 뺏긴 대련과 여순항 대신 인천과 부산항 같은 부동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화에 따라 북한 인민군이 패퇴할 경우 중공군을 구원병으로 대신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미군과 중공군이 격돌할 경우 중국은 미국과의 대결을 계속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소련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김일성은 자신만만하게 4가지 이유를 들어 승리를 확신했다.
1.북조선이 3일 안에 군사적 승리를 쟁취한다.
2.남한에서 20여만 명의 남조선 공산당원이 봉기를 일으킨다.
3.남조선에 있는 유격대가 인민군의 작전을 지원한다.
4.미국은 이에 대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스탈린은 흡족한 마음으로 동의하면서 교묘하게 조건을 달았다. "남침계획을 동의하지만 그 이전에 모택동과 이 문제를 협의하라" 스탈린은 김일성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다시 한번 토를 달았다. "만약 당신이 미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면 나는 전혀 도울 수 없소. 반드시 모택동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요청하시오" 스탈린은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자신은 뒤로 빠지고 중국이 나서서 책임을 지는 것, 즉 중공군이 직접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도록 등을 떠밀 생각이었다.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6,25 전쟁을 일으킨 주역들. 왼쪽부터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사진=전쟁기념관 제공)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과 박헌영은 한달 후인 5월 14일 북경으로 달려가 모택동을 만난 자리에서 "남침 계획을 스탈린 동지가 동의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신중한 성격의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김일성의 얘기가 맞냐고 확인을 구했다. 스탈린은 답신을 통해 "모스크바는 조선인들의 통일 방안에 동의했다"며, "이 문제는 반드시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슬쩍 발을 뺐다.
모택동은 고민에 빠졌다. 갓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완전히 파괴된 경제 복구, 사회 통합, 토지개혁, 대만 해방, 잔존한 국민당 세력의 소탕, 티벳 점령 등 현안이 산적했다. 이 가운데 가장 급한 경제복구와 대만 해방을 위해서는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다. 모택동은 대만 해방을 먼저 이루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내심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의도를 읽고 결국 전쟁 발발에 동의했다. 더구나 북조선은 중국의 국공내란 때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소련에 이어 중국의 동의를 얻은 김일성과 박헌영은 의기양양하게 귀국한 후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북한에 쏟아져 들어오는 소련제 무기와 팔로군 출신 조선인들
남침의 선봉이 될 인민군 탱크부대. 소련제 T-34 중탱크로 구성된 기갑부대로 소련 군사고문들의 지휘 아래 조직되었다.
모택동은 1949년 여름에 조선인 2개사단을 북한에 보낸 데 이어 1950년 4월에 나머지 1개 사단도 조선에 귀국시켰다. 3개 사단 약 37,000 명의 조선인 군대는 인민군의 최상층에서부터 소대장에 이르기까지 전력의 핵으로 자리잡는다. 이들 대부분 서울을 점령하는 부대에 편입돼 20여 년에 걸친 중국 내전의 전쟁 경험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 소련은 김일성 일행이 모스크바를 다녀간 직후인 1950년 4월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와 군사장비를 해로와 육로를 통해 북한에 보냈다. 이 물자는 공짜로 주는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김일성의 3월 9일자 무기구입 요청 공문을 보면, 무기의 대금으로 총 1억 3,805만 루불에 해당하는 금 9톤, 모나츠 1만 5,000톤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말년의 스탈린. 한국전쟁을 뒤에서 조종하면서도 일체 무대에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쟁은 북한과 중국이 떠맡는 대신 소련은 뒤에서 무기나 팔아먹겠다는 계산이 엿보인다. 1950년 6월 12일 슈티코프 대사는 38도선 10~15km 지역으로 인민군이 병력을 이동한다고 보고했다. 이어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계획을 모스크바에 알렸다.
'작전은 6월 25일 이른 새벽에 시작됨. 1단계 작전은 옹진반도에서 국지전 형태로 시작한 뒤 주공격선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 감.'
'2단계 작전은 서울과 한강을 작전함. 동시에 동부전선에서 춘천과 강릉을 해방. 이에 따라 남조선군 주력은 서울 일원에서 포위당해 궤멸됨.'
'3단계 작전에서는 여타 지역 해방, 적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주요 인구밀집 지역과 항구를 점령함.'
전쟁이 터지자 스탈린은 북한에 파견된 고문단 3,000여 명을 대부분 철수시켰다. 혹시 포로가 되어 소련의 전쟁 개입을 비난받게 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소련군 고문단의 지휘 아래 공격을 개시했던 한 인민군 장교의 회고를 들어보자.
"군단지휘부가 38도선을 넘어 지촌리로 들어가자 소련군 고문단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은 공격이 계획대로 개시되고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한 뒤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후방으로 돌아갔다"
◈ 전쟁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한 미군
한국전쟁의 미국 측 주역인 맥아더 장군(왼쪽)과 트루먼 대통령
인민군이 남침하자 미국과 유엔은 긴박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닷새만에 남한에 대한 원조 제공과 참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6월 29일 해질 무렵에는 B-26 경폭격기 18대가 평양비행장을 폭격해 지상과 공중에서 26대의 북한 전투기를 파괴했다. 같은 날 도쿄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전황 파악차 한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자신의 전용기가 수원에 착륙하는 동안 간이활주로 한쪽 끝을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어 한강 남쪽에서 서울을 바라본 뒤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다음날 오전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2개 사단 투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6.25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택동이 전쟁이 시작된 직후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으니 인천 후방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김일성에게 조언한 것이다. 당시 승리에 심취해 있던 북한 수뇌부는 이 충고를 묵살했다.
회의에 입장하는 김일성(맨 오른쪽)과 박헌영(그 왼쪽). 패전에 몰리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그러면 합심해서 돌아다니며 전쟁 승인을 받았던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이 개입한 후 어떻게 되었나? 인천상륙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놓였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숨을 돌린 1950년 11월 7일 소련대사관에서 10월혁명 기념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룡은 이렇게 회상했다. "김일성은 술이 들어가자 박헌영에게 '여보~ 박헌영이~ 당신이 말한 그 빨치산은 다 어디에 갔는가?'하고 힐난하며 '당신이 스탈린한테 어떻게 보고했는가? 우리가 넘어가면 막 일어난다고 당신이 그런 얘기 안 했나?'하고 시비를 걸었다.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그러니까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야~ 이 자식아~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난 남조선 정세는 모른다. 남로당이 거기 있고 거기에서 공작하고 보내는 것에 대해 어째서 보고를 그렇게 했는가?" 김일성은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벽에 던져 박살냈다" 박길룡은 둘의 관계가 "이때 이미 영 틀어졌다"고 진술했다. 외세를 빌려 같은 민족에게 총질을 하다가 나라와 국민만 절단을 내고 쫒겨다니는 무모한 공산주의자들의 맨 살을 보는 것 같다.
누구는 103만원 누구는 공짜, 천차만별 대학입학금 어디 사용되는지도 몰라103 국민
누구는 안 내고, 누구는 103만원 내야한다?”
대학마다 입학금이 천차만별이다. 금액산정 근거도 불분명하고 용도도 공개되지 않는다. 대학 신입생들이 입학 시 내는 입학금이 대학 별로 큰 차이를 나타냈다.
새정치민주연합 윤관석 의원은 “올해 사립대학별 입학전형료 내역을 확인한 결과 입학금이 최고 103만원(고려대)에서 최저 15만원(영산선학대)으로 차이가 7배 이상 난다”고 말했다. 그는 “국공립대도 최고 40만원(인천대), 최저 2만원(경남과학기술대)으로 20배의 차이를 보였는데 아예 입학금을 걷지 않는 대학들도 있는 등 기준과 용도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교육부가 윤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195개 학교 중 입학금이 100만원 이상인 학교는 고려대, 한국외대 2개교다. 90만원에서 100만원 미만은 홍익대와 연세대 등 28개교(14%), 70만원 이상 100만원 미만인 대학은 국민대와 명지대 등 61개교(31%), 50만원 이상 70만원 미만은 울산대와 포항공대 등 50개교(26%)인 것으로 나타났다. 입학금이 50만원 미만이거나 받지 않는 대학은 광주대, 목포가톨릭대 등 15개교와 40개 국공립대학으로 확인됐다.
윤 의원은 “100만원이 넘는 대학들은 그렇지 않은 학교와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입학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그 내역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육부 훈령에도 ‘입학금은 학생 입학시 전액 징수한다’고만 명시되어 있을 뿐 입학금의 정의와 징수 사유, 산정 기준 등 법적 근거가 불투명하다”며 “입학이 절실한 학생과 학부모들로서는 고액의 입학금 납부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인들 “3차 야합 철회 안 하면 시민불복종 선언”102 미디어오늘
시민사회·해외 교포들도 “여야 합의 청와대 개입은 역사적 범죄”…“박근혜 지침에 협력 ‘참담’”
지난달 30일 유가족의 의사를 배제한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3차 합의안에 대해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를 비롯한 기독교 단체와 해외 한인 단체까지 반대 목소리를 내며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와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감리교정의평화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민주쟁취기독교행동(기독교행동)’은 2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여야가 이번 3차 합의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정치권에 대한 시민의 불복종 선언 운동까지 벌이겠다고 밝혔다.
기독교행동은 “9·30 3차 합의안은 지난 1·2차 야합안의 전철에 따라 유가족을 배제하고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염원을 무시하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청원에 동참한 500만 국민의 뜻을 짓밟는 안”이라며 “온통 애매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구절들로 채워져 있고 중요한 내용은 추후에 논의하기로 미루며 책임 있는 내용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번 여야 합의안을 파기하고 유가족들이 원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만약 여야 정치권이 3차 야합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시민이 더 이상 신임할 수 없는 정치권에 위임한 권력을 회수하고 시민의 불복종 선언 운동을 광범하게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날 오전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전국 대표자회의를 한 후 연 기자회견에서 “지난달 30일 여야 합의사항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내용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할 아무런 방안을 담고 있지 않다”며 “오히려 특별법 제정 요구에 담겼던 가족과 국민의 바람에 역행하고 있는 이번 특별법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민주쟁취기독교행동은 2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3차 합의를 규탄하며 철회를 촉구했다. 사진=강성원 기자
국민대책회의는 이번 여야 합의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축소하려는 청와대의 개입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눈물을 흘리며 최종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더니, 9월에는 스스로 ‘삼권분립’에 위배하는 특별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면서 “조사위원회의 권한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특검 선정에 주도권을 가지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은 청와대의 태도는 역사적 범죄와 같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를 배제한 채 합의안을 타결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서도 국민대책회의는 “새누리당은 입법은 국회 고유 권한이라며 줄곧 가족과의 협의를 거부하면서 가족들이 제안한 수사권과 기소권 보장 방안에 반대만 일삼았다”며 “새정치연합은 가족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된 특별법이 통과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세 차례의 합의에 이르는 동안 번번이 가족들을 배반했다”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했던 미주 지역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거리시위 등을 펼치고 있는 한인 교포 모임 ‘사람사는 세상을 위한 미주희망연대’도 지난 1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번 3차 합의는 박근혜 정권의 지침에 충실히 협력하고 유가족과 국민의 뜻을 기만한 2차 협상에 이은 또 다른 야합”이라고 규탄했다. 미주희망연대는 “더욱 참담한 것은 가장 중요한 조사 대상자인 정부와 청와대가 특검 임명의 주체가 된다는 점”이라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한 가닥 희망마저 저버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합의”라고 덧붙였다.
23년전 노랫말에도 “민주인사와 기자는 믿지마라” 102 미디어오늘
[데스크칼럼] 세월호 특별법 협상 유족 뜻 못지킨 야당이 새겨들어야 할 정태춘·박은옥과 안치환의 노래들
세월호특별법 합의안이 세차례나 유가족의 뜻과 배치된 결과로 나온 연유를 두고 대한민국 정통 야당이자 제1야당을 자부해온 새정치민주연합의 이른바 ‘야합’, ‘굴복’이라는 성토의 목소리가 많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여당의 몽니 못지않게 박근혜 정부 2년과 이명박 정부 5년 간 충분히 경험해온 야당에겐 현실적인 힘의 한계, 기울어진 운동장 탓만을 하기엔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 규명이 갖는 의미는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정치연합을 비롯한 이른바 제도권 야당에 대해 ‘무능하다’는 질타를 넘어 배신과 원망에 이른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도 “야당 판 참사”라는 개탄까지 나왔다. 이런 상처는 집권세력에게보다 더 크게 느끼고 있다.
야당과 민주 재야 인사들에 대한 이런 배신감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민주화운동 직후에도 이렇게 믿었던 인물들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당한 쓰라림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당시를 은유적이면서도 역설적인 어법으로 표현한 노랫말이 여럿 있다.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지금까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고 있는 새정치연합의 선택을 보면서 이런 노랫말 속의 구절이 연상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가수 정태춘씨가 부인 박은옥씨와 함께 1991년 내놓은 앨범(‘아 대한민국’) 속 타이틀곡 ‘아 대한민국’(노래제작은 1990년 10월) 속 노랫말이다. 작사가인 정태춘씨는 당시 대한민국을 “양심과 정의가 넘쳐 흐르는 땅”으로 규정했다. 그는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 대신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우리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라는 이어진 구절은 전체 노랫말 듣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진실을 담고 있다.
1993년에 정씨가 내놓은 음반(‘92년 장마 종로에서’) 타이틀곡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노랫말은 군부독재의 폭압에 마지막 희망을 가졌던 ‘시민 군중’과 ‘기자’에 대한 절망이 그려져있다.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이어 정씨는 이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도 접고 절망도 하지 말자고 당부한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정태춘 박은옥 6집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
이밖에도 민중가수와 대중가수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안치환씨의 초창기 노랫말은 더욱 야당, 재야, 지식인의 위선을 질타하는 구절을 담았다. 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인 1993년 안씨가 내놓은 3집 앨범(‘자유’)의 자유는 애초 1987년 발표된 고 김남주 시인의 ‘자유’(시집 <나의 칼 나의 피>)가 그 원가사이다.
안씨는 ‘자유’에서 “만인을 위해 일하거나 싸울 때, 몸부림칠 때”, “땀흘려 일하고 피흘려 싸울 때” 만이 자유를 얻는 길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안씨는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했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워~~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결국 겉으로만 목소리를 높일 뿐 속으로는 잇속만 챙기는 민주인사들의 위선을 꼬집고자 하는 내용이다. 안씨는 2년 뒤인 1995년 내놓은 4집 앨범(‘내가 만일’) 수록곡 ‘수풀을 헤치며’(안치환 작사·곡)에서는 당시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허탈함, 달콤한 현실에 안주한 이들을 질타했다.
안씨는 “수풀을 헤치며 물길을 건너 아무도 가려하지 않던 이 길을 왔는데 아무도 없네 보이질 않네”라면서 “울며 웃고 마시고 취해서 떠드는 사람들속에 그댄 없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이들에 대해 “어디서 무엇을 하면 자신의 안위를 즐기는가”라고 반문했다.
당시 1987년 대투쟁 이후 민주진영의 대선 패배에 이은 총선 승리(여소야대) 국면에서 발생한 노태우·김종필·김영삼의 1990년 ‘3당 합당’ 이른바 ‘야합’은 민주화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1991년 강경대 열사 구타 치사사건까지 벌어져 군부정권 막바지 반정부투쟁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편파왜곡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시민을 버린 기자들에 절망했다. 또한 이듬해(1992년) 말 처음으로 집권한 문민정부인 YS 정권에 대한 기대감으로 적잖은 민주인사들이 정권에 투항했다. 잇단 배신과 절망이 쏟아져나오던 때였다.
안치환 4집 '내가만일'
2014년 10월에 벌어지고 있는 새정치연합을 비롯한 야권의 모습은 단지 무기력하다는 것을 넘어 20여 년 전 시민들에 큰 생채기를 줬던 동지의 배신을 노래한 구절을 연상케한다. 1990년대 초반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노래단 ‘조국과 청춘’과 ‘노래마을’에서 활동해온 민중가수 손병휘씨는 1일 저녁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세월호 특별법 합의를 한 새정치연합을 보면서, 시민사회의 수준이 독일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것이 우리의 수준으로 과거 전대협 때 그많던 잘난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반문했다.
손씨는 “지금은 정치인, 학생사회, 기자사회에서도 인물이 없다”며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가 후졌다”고 지적했다. 손시는 “과거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할 사람들과 집단이 역사에 대해 겸허하지 못하다”며 “역사 앞에 겸손해야 결정적일 때 이런 선택을 안한다”고 지적했다.
원세훈은 무죄인데, 나는 왜 유죄인가요? 929 한겨레21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선거운동을 했다.”
영남대 사회학과 강사였던 유소희(47)씨는 공직선거법 제85조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 원장에게 적용됐던 바로 그 법 조항이다. 원 전 원장을 ‘무죄’로 판결했던 법원은 유씨에게 ‘유죄’라고 선고했다.
<한겨레>만 활용했다고 다그친 검찰
프랑스 파리5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유씨는 2008년부터 영남대에서 사회학 강의를 맡았다. ‘성과 사회’와 ‘현대 대중문화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이었다. 수업을 하다보니 학생들의 상식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특히 역사 분야에서 그랬다. 유씨는 “사회학은 정치·사회·경제와 관련이 깊은데 학생들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2010년부터 <한겨레> 기사나 칼럼을 발췌해 수업시간에 나눠준 이유다. 책·영화·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읽을거리였다. 그 기사들은 한국 근대사의 정치권력과 문화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 데 유용했다.
영남대 사회학과 강사였던 유소희씨는 2012년 2학기 교양과목 ‘현대 대중문화의 이해’에서 〈한겨레〉와 〈한겨레21〉의 기사와 칼럼을 수업 보조자료로 나눠줬다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심·2심에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유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2년 2학기에도 그랬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영국에 저항하며 아홉 번 감옥에 갔던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을 소개한 ‘아버지의 편지’(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칼럼)나 리더가 가져야 할 사과의 원칙을 설명하는 ‘원칙주의자를 위한 사과의 원칙’(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칼럼) 등을 발췌해 나눠줬다. 최연혁 스웨덴 쇠데르퇴른대학 교수의 ‘국민의 뇌리에 남을 정치인의 조건’이란 칼럼도 있었다. 그는 23년간 총리직을 수행한 타게 엘란데르 스웨덴 총리를 성공한 정치인으로 소개하며 한국 대통령도 20년 이후 대한민국 방향을 제시하라고 제언했다. 다큐멘터리영화 <유신의 추억-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를 소개하거나 정수장학회와 MBC의 ‘커넥션’을 파헤친 <한겨레21> 표지이야기를 다룬 광고도 포함됐다.
선거법 수사는 학생의 신고로 시작됐다. 대구경찰청 수사보고를 보면, 영남대 학생(27살)이 2012년 11월2일 111콜센터로 신고한다. ‘현대 대중문화의 이해’ 특강자로 나선 백청욱 목사(대구 새민족교회)가 “불순 강의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또 유씨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자를 비판하는 신문 기사를 나눠준다고 했다. 유씨는 신문 기사 배포는 몇 년간 계속해왔다고 설명했지만 검찰은 시점과 매체를 문제 삼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박근혜 후보에 비판적인 ‘<한겨레>’만 골라냈다고 다그쳤다. 유씨는 “영문도 모르고 수사를 받았다”고 했다.
검사: <한겨레> 외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다른 신문사 기사 내용을 발췌·편집·복사해 학생들에게 배부한 사실이 있나.
유소희: <한겨레>를 구독한다.
검사: 박근혜 후보에 관련해 우호적인 기사를 배부한 사실이 있나.
유소희: 수업 보조자료다. 그 내용이 (박근혜 후보에게) 우호적이냐 비판적이냐 기준이 아니었다.
검사: 그 기준은 무엇인가.
유소희: 영화나 인물 등 학생들이 잘 모를 새로운 내용이 소개돼 있으면 발췌했다.
검사: 특정 후보를 비난하는 신문기사를 학생들에게 나눠준 행위를 반성할 생각이 없나.
유소희: 특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나눠준 게 아니다. 사회경제적 지식을 학생들과 공유하는 차원에서 배부한 것이다.
박근혜에 유리한 것 없으니 선거운동?
유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충분히 설명하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데 경찰과 검찰이 이해하지 못하니까 황당했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유씨가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하지 말라거나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일부 학생들의 부정적인 평가를 찾아내 몰아세웠다. “교수님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좌편향된 말과 자료가 많았다.” “신문 자료에 어느 일방의 대선 후보만을 비판하는 자료를 많이 나눠줬다. 이는 특정 후보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게 만들어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성향이 수업시간에 보여졌다.” 검찰은 결국 선거법 위반 혐의로 유씨를 기소했다. 구인호 변호사는 “언제부터 학생들의 강의평가를 듣고 교수를 처벌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구씨 등 변호사 19명이 선임계를 내고 공익 변론에 나섰다.
하지만 대구지법(2013년 12월)과 대구고법(2013년 3월)은 ‘유죄’(벌금 100만원)로 판결했다. “단순한 의견 개진이나 지지·반대의 의사표시라고 볼 수 없다. 수강생들에게 박근혜(후보자)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줘 낙선을 도모한다는 목적 의지를 수반한 능동적·계획적 행위로서 선거운동에 해당함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특히 나눠준 기사 중에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것이 없고 다른 후보(야권 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선거운동이라고 못박았다. <한겨레> 기사와 칼럼이 졸지에 ‘선거홍보물’로, 그 기사를 읽은 독자 유씨는 ‘선거운동원’으로 전락했다.
구인호 변호사는 “유씨는 언론기관도, 정치평론가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선거관리위원도 아니다. 사회학자인 유씨가 강의시간에 대선 후보를 골고루 비판할 법적 의무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신성욱 변호사는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에서 한참 벗어난다”고 비판했다. 특히 유씨는 2012년 2학기 강의 때 10차례 정도 수업자료를 배포했는데 항소심 판결문은 그중 3개만 언급했다. 선거나 박근혜 후보와 관련 없는 나머지 자료는 애써 외면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진다. 선거법을 이토록 엄격히 적용하는 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는 어떻게 무죄판결을 내렸을까. 법원의 판단 근거를 보자. 첫째,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사이버 정치활동을 계속적·반복적으로 해왔는데 (대통령) 선거 시기가 됐다고 해서 당연히 선거운동이 된다고 볼 수 없다. 둘째, 원세훈 전 원장이 특정 후보자를 지지 또는 반대하라고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셋째, ‘선고 또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는 있지만 목적성·능동성·계획성을 갖춘 ‘선거운동’으로 인정하긴 어렵다.
이러한 기준이라면 유씨도 무죄일 수밖에 없다. 첫째, 매 학기에 기사를 발췌해 나눠줬는데 그 활동이 (대통령) 선거 시기라고 하여 당연히 선거운동이라 볼 수 없다. 둘째, 유씨가 특정 후보자를 찍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사실이 없다. 셋째, 처음부터 선거운동을 할 목적이나 특정 후보를 낙선시키려는 계획이 없었다. 무엇보다 국정원의 정치활동은 불법이지만 유씨의 정치적 의견 표명은 합법이다. 그가 현 정권에 비판적이었다고 해서 형사처벌을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강단으로 돌아가기 위한 험난한 길
유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헌법소원도 냈다. ‘벌금 100만원’을 두고 호들갑이라고 혹자는 말할 수도 있다. 유씨는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10년 넘게 유학생활을 하며 교단에 서는 꿈을 꾸었다. 뒤늦게 강단에 섰고 영남대는 모교라서 애착이 남달랐다. 그 후배가 ‘불순 강의’로 신고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다. 지금은 강단에 설 수 없는 처지고,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무죄로) 결단하면 돌아갈 수 있을지….” 말을 맺지 못한 채 유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통령 모독’ 검찰 대책회의에 카톡 간부 참석 102 한겨레
이석우 다음카카오 대표 “오라는데 안 갈 수 없어” 시인
‘사이버 망명’ 가속화할 듯…텔레그램 가입자 10배 증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모독’ 발언을 한 뒤, 검찰이 허위사실 유포사범 엄정수사 및 상시 모니터링 방안을 찾기 위해 연 범정부 유관기관 대책회의에 주요 포털업체들과 함께 카카오(지금은 다음카카오) 간부도 참석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이 네이버와 다음 같은 포털 뿐만 아니라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인 ‘카카오톡’까지 검열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게 드러난 셈이다. 카카오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모바일 메신저이고, 카카오는 카카오톡 서비스 사업자다.
이석우 다음카카오 공동대표는 1일 다음카카오 출범식 뒤 ‘검찰 대책회의에 카카오 간부도 참석했다는 얘기가 시민단체 쪽에서 나오고 있는데 사실이냐?’는 <한겨레> 질문에 “검찰이 오라는데 안갈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음카카오는 어느 나라에서건 국가의 정당한 법 집행에 대해서는 따른다는 방침이다. 국가기관이 법 집행을 할 때 국내 업체와 외국 업체를 차별 없이 대우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인권운동사랑방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오전 기자간담회를 열어 경찰이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카카오톡을 압수수색해 3000명의 개인정보를 사찰했다고 주장하며, 검찰의 유관기관 대책회의에 카카오의 간부가 참석했다고 밝혔다.
이에 검찰의 검열에 대한 카카오톡 이용자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카카오톡 이용자들의 ‘사이버 망명’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줄 잇는 ‘사이버 망명’으로 독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의 국내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카카오톡이 울상을 짓고 있다. 텔레그램은 러시아의 백만장자 형제가 개발해 독일에서 서비스중인 모바일 메신저로, 문자를 주고받는 과정까지 모두 암호화해 보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일 국회 새정치민주연합 장병완 의원이 내놓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지난달 19일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신설하고 인터넷 공간 검열 강화를 뼈대로 한 사이버 검열 계획을 발표한 뒤부터 텔레그램 다운로드 순위가 급등했다. 애플 앱스토어에서 100위권 밑이던 텔레그램의 다운로드 순위가 검찰 발표 이후 사흘만에 45위로 뛰올랐고, 24일 이후에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유지하던 카카오톡까지 제쳤다. 검찰 발표 이후 일주일 사이에 텔레그램의 국내 하루 이용자가 2만명에서 25만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내 글도 감시?…‘메신저 사찰’ 공포 커진다
‘온라인 감시 강화’ 파문 확산
카카오톡 탈퇴 ‘망명객’ 급증
독일 ‘텔레그램’ 이용자 10배로
박대통령 ‘모독’ 발언 직후 회사쪽 검찰회의 참석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 모독’ 발언 이후 강화되고 있는 검찰의 온라인상 명예훼손에 대한 엄벌 방침이 국내 모바일 메신저 업체를 서리 맞은 꼴로 만들고 있다. 줄 잇는 ‘메신저 망명’으로 독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의 국내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국내 최대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이 울상을 짓고 있다. 관련 업계와 이용자들 사이에서 텔레그램이 한국 검찰을 만나면 “생큐!”라고 인사할 거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급기야 다음카카오가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다음카카오는 이용자들의 불안을 덜기 위해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은 내용의 보관기간을 이달 중에 2~3일로 줄이기로 했다. 지금은 출장이나 여행 등으로 카톡 대화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는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읽지 않은 대화 내용을 5~7일간 서버에 저장해주고 있다. 다음카카오는 “한번 삭제된 대화 내용은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장병완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내놓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지난달 19일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신설하고 인터넷 공간 검열 강화를 뼈대로 한 사이버 검열 계획을 발표한 뒤부터 앱스토어에서 텔레그램 다운로드 순위가 급등하고 있다. 애플 앱스토어(소셜 카테고리)에서 100위권을 밑돌던 텔레그램 앱의 다운로드 순위가 검찰의 사이버 검열 계획 발표 뒤 이틀 만에 8위로 뛰어올랐고, 24일 이후에는 1위 자리를 지켜오던 카카오톡까지 제쳤다. 장 의원은 “랭키닷컴의 집계를 보면, 검찰의 사이버 검열 계획 발표 이후 일주일 사이에 텔레그램의 국내 하루 이용자가 2만명에서 25만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텔레그램은 러시아의 부자 형제가 개발해 독일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바일 메신저다.
관련 업계에선 검찰이 인터넷 공간에 대한 검열 강화를 위해 범정부 유관기관 대책회의를 하면서 주요 포털과 함께 카카오(지금은 다음카카오)의 간부까지 불러 모바일 메신저 이용자들의 국외 이탈을 가속화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대책회의에는 네이버, 다음, 에스케이(SK)컴즈(네이트) 관계자도 참석했다. 이석우 다음카카오 대표는 “검찰이 오라는데 안 갈 수 없는 것 아니냐. 사업에 큰 영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사업을 하면서 국가의 정당한 법 집행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텔레그램 상황은 과장되고 잘못 알려진 측면도 있다”고 불끄기에 급급해하는 모습이다. 설상가상으로 ‘6·10 청와대 세월호 만민공동회’ 주최자의 카톡 이용 내역이 경찰에 제공된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전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인터넷 공간에 대한 국가기관의 검열이 강화될 때마다 국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이메일로 옮겨가는 ‘사이버 망명’ 사태가 일어났다. 전자우편에 대한 정보·수사기관의 압수수색과 감청 사례가 늘자, 정치인과 시민단체 활동가 및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구글의 ‘지메일’ 이용이 급증한 게 대표적이다. 카카오톡 같은 모바일 메신저는 ‘프라이버시’와 ‘사적 공간’ 측면에서 게시판과 이메일보다도 민감하다. 집중 감시 대상으로 꼽히는 것만으로도 위축될 수 있다.
실제로 카카오톡을 이용하다 정보수집 및 수사 목적으로 압수수색을 당하는 경우, 최근 3달 안에 언제 누구와 어떤 형태로 카톡을 주고받았는지와 함께 최근 읽지 않은 7일치 대화 내용까지 넘어간다. 다음카카오가 관련 규정에 따라 카톡으로 주고받은 내용은 최대 7일까지, 카톡 이용 내역은 3달까지 보관하기 때문이다. 이때 카톡을 주고받은 상대의 개인정보까지 넘어간다.
황성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른 행위는 제한을 받은 만큼만 위축되거나 줄어든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0.001%의 제한에 100% 이상의 위축이 일어난다. 남이 제한받는 모습만 봐도 쫄아든다(위축된다). 그래서 헌법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특별대접하고, 법원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보장 폭을 넓히는 쪽으로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논란이 되자 검찰이 뒤늦게 “카카오톡은 들여다보지 않는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용자들의 불신은 이미 높아진 상태다. 이용자들끼리 ‘메신저 망명’을 부추기는 모습까지 나타나고 있다.
장병완 의원은 “국내 기업이 법을 준수한다는 이유로 ‘사이버 망명’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검찰과 법원 모두 조심스러운 자세와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 같은 역차별 제도로 국내 동영상 플랫폼 시장을 위축시켜 유튜브 같은 해외 기업들이 국내 시장을 잠식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정권의 정치적 의도 때문에 국내 정보통신(ICT) 산업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에볼라, '엉망 방역망' 뚫고 마침내 미국 상륙 102 프레시안
사우디, 전세계 성지순례자 몰려드는 하지에 전전긍긍
미국인들에게 '미국 멸망'의 한 시나리오처럼 여겨지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마침내 미국에 상륙했다. 치료제와 백신도 없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상륙, 게다가 미국의 에볼라 방역체계가 예상 외로 허술하다는 사실까지 드러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1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40대 중반 남성 토머스 에릭 던컨이 에볼라 감염자로 전날 확진됐다. 미국 내에서 에볼라 감염자로 확진된 첫 사례다. 그동안 2명의 미국인 감염자는 외국에서 이미 확진돼 치료를 위해 미국 본토로 후송된 케이스다. 문제는 던컨이 에볼라 바이러스 창궐 지역인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이후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는데, 이 병원에서는 던컨이 "라이베리아에서 온 환자"인 줄 알면서도 "낮은 단계의 전염병"으로 진단하고 항생제 처방만 하고 돌려보냈다는 점이다.
'라이베리아에서 온 환자'인데, 병원에서 돌려보내
던컨은 지난달 15일 라이베리라 수도 몬로비아에서 에볼라 환자의 병원 이송을 돕다가 감염된 것으로 알려졌다. 던컨은 9월 20일 미국으로 들어와 9월 26일 처음으로 댈러스 보건장로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 측은 던컨을 격리 수용해 증상을 정밀 검진하지 않고 돌려보냈고, 던컨은 9월 28일 증상 악화로 응급차에 실려 와 병원에서 격리 치료를 받고 있다. 당시 던컨은 집 부근 밖에서 심한 구토물을 쏟아낼 정도로 심각했다.
미 보건당국은 던컨이 입원하기 전까지 접촉한 사람을 최대 20명으로 파악하고 이들의 전염 여부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던컨의 친구 또는 가족 중 한 명이 에볼라 감염 의심환자로 분류돼 충격을 주고 있다.
보건당국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공기나 물로 전염되지 않고 오로지 감염 환자의 체액이나 피부를 통해 퍼진다고 강조했으나, 던컨이 거리에서 구토까지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환자가 발열, 고통, 출혈, 구토, 설사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2차 감염이 가능해진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는 1일(현지시간) 에볼라 바이러스가 확산하는 서아프리카 5개에서만 지난달 28일 현재 감염자는 7178명, 사망자는 3338명이라고 발표했다. 그 중에서 특히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3개국의 감염자 수는 7157명, 사망자 수는 3330명이며, 에볼라 확산이 진정되는 나이지리아와 세네갈은 지난달 22일 발표 때와 같은 총 21명 감염에 8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가별로 보면 라이베리아가 3696명 감염에 1998명 사망으로 가장 많고 기니가 1157명 감염에 710명 사망, 시에라리온은 2304명 감염에 622명 사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나이지리아는 감염 20명에 8명 사망했고, 세네갈은 감염자 1명으로 지난번 발표와 동일했다.
미국에 에볼라 감염 확진 환자가 발생한 이후, 이제 중동 지역에서 에볼라 확산 가능성에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성지순례 하지(hajj)가 2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6일까지 닷새간의 일정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사우디 당국은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기니 등 서아프리카 에볼라 발병국 출신 순례자에 대해 비자 발급 중단 방침을 밝히는 등 에볼라 발병 위험을 원천 봉쇄하는 데 힘쓰고 있으나, 전세계에서 약 300만 무슬림이 성지순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여들 것으로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불안감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우디에선 지난 8월 에볼라 환자 1명이 사망했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직영 아빠와 하청 아들, 서글픈 도시 창원 10.07ㅣ주간경향 1095호
정규직 삼촌과 계약직 조카가 함께 일한다. 직영과 하청은 하늘과 땅이다. 정규직 일자리가 없는 부자도시 창원의 슬픈 자화상이다.
시내버스가 창원대로를 달린다. 현대위아 네거리, 공단으로 향하는 출근길 발걸음이 분주하다. LG전자, S&T중공업, 대원강업이 이어진다. 1974년 만들어진 창원국가산업단지. 5층짜리 사택의 낡은 담벼락이 공단의 40년 나이테다. 부산포금(현 PK밸브)을 시작으로 금성사(LG전자), 기아기공(현대위아), 효성중공업이 차례로 들어와 현재 1877개사 7만9867명이 일하고 있다. 버스가 공단을 지나 상남동으로 향한다. 한화 꿈에그린을 비롯해 초고층 아파트들이 곳곳에서 위용을 뽐낸다. 강남 다음으로 집값이 비싼 도시. 5억짜리 34평 아파트에 살 수 있는 노동자들이 울산만큼이나 많은 동네가 창원이다.
아침 8시40분, 상남동 노동복지회관 4층 회의실에 야간일을 마친 40여명의 아저씨들이 모여 김밥을 먹는다. 전날 피엔에스알미늄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김태희가 광고하는 회사다. “저도 누군가 해주길 바랐습니다. 누군가 앞장서면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인간적으로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조지회장으로 선출된 홍희균씨의 목소리가 떨린다. 남들보다 27년 늦게 태어난 노조. 지회장은 “아, 우리도 할 수 있구나. 왜 진작 못했을까”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석 달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띄운 노조에 120명 중 100명이 가입했다. 회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에서 노조를 만드는 일은 독립운동에 가깝다. “헌법에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어요. 우리는 평생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임금을 계산하는 법도, 노조를 만드는 법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금속노조 문상환 부장의 얘기에 노동자들이 귀를 쫑긋 기울인다.
금속노조 현대로템지회 파업현장. | 박점규
27년 늦게 태어난 노조
창원병원 사거리를 지나 다시 공단으로 향한다. 19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1997년 정리해고제 도입을 막기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때 가두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울산과 함께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렸던 마산과 창원, 노동정치 1번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변압기를 만드는 효성중공업 노조사무실이 분주하다. 임금협상 기간이다. 월급을 2만4000원 올려주겠다는 회사 제시안에 조합원들 분노가 ‘빵’ 터졌다. 지난해에도 적자라고 해서 노조가 양보했는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10년간 8000억원대의 탈세와 횡령, 배임 등 기업 비리를 저질렀다는 뉴스가 떴다. 노조 교섭 속보에 적힌 구호가 ‘효성동지 굶주려도 경영진은 호화천국’이다.
30대 초반 젊은 노조 간부들이 활기에 넘친다. 지인의 소개로 하청업체 창일전기에 들어왔다가 2008년 정규직이 된 심영보 홍보부장은 1980년생이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인 2007년부터 신규채용을 해서 신입사원이 많이 늘었다. 조합원 800명 중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반반이다. 다른 회사들처럼 효성도 정규직을 줄여나갔다. 그런데 대형 불량사고가 터지고, 기술전수가 안 되면서 직영을 뽑기 시작했다.
하지만 효성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 3700명 중 정규직은 1000명뿐이다. 사내하청이 2300명, 계약직이 400명이다. 직영 아버지와 하청 아들, 정규직 삼촌과 계약직 조카가 함께 일한다. 직영과 하청은 하늘과 땅이다. 30대 초반이지만 주야간 일하면 연봉 5000만원은 받을 수 있다. 심 부장은 “재수 좋으면 정직원이 된다는 얘기가 들리니까 일용직이라도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다”며 “사람들이 노동조건이 열악한 하청업체를 기피하니까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얍삽하게 홍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장 순회를 마치고 나온 조장열 수석부지회장은 아버지 세대다. “50대 조합원들이 자신이 그만둘 테니 아들을 넣어달라고 합니다. 노조에서 회사에 요구하면 될 수도 있지만 잘못된 요구를 할 수는 없죠.” 회사의 막내 김병준 문화체육부장은 노동자 대투쟁과 나이가 같은 1987년생이다. 마산상고 야구부 1번타자 출신인 그는 아버지 사업 실패로 운동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공장 가서 뭐할래” 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자기도 좀 넣어주면 안 되냐고 말한다. 정규직 일자리가 없는 부자도시 창원의 슬픈 자화상이다.
노조의 안내로 안전모를 쓰고 현장을 둘러본다. 대형변압기 정전판을 만드는 공정에서 정규직 6명과 계약직 5명이 함께 일한다. 변압기 마지막 공정으로 옮긴다. 한 변압기에 4~5명씩 4개조가 조립을 한다. 정규직과 계약직이 섞여 있다. 조립된 변압기는 실험실을 거쳐 해체 공정으로 이동한 후 납품한다. 하청업체 담당이다. 불법파견을 피한답시고 분리해 놓았는데 조립과 해체 공정 거리가 불과 5m다. 지난주 법원은 “연속된 업무를 수행함에 따라 그 작업 결과가 혼합되어 누구의 작업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구별이 곤란하다”며 현대차의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이 변압기는 직영과 하청, 누구의 작업 결과일까?
점심시간, 식당 줄이 유난히 길다. 몇 년째 식당 증축을 요구했는데 “공장에 일하러 오지 밥 먹으러 오냐”는 것이 회사 고위층의 대답이다. 밥에 쥐똥이 섞여 나와 식판을 집어던지며 싸우던 시절이 옛날 일만은 아니다. 업체마다 다른 색색의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긴 줄을 기다려 밥을 먹는다. 직영은 카드를 찍고, 하청은 식권을 낸다. 하청의 설움을 먹는다.
피엔에스알미늄 노조설명회. | 박점규
변압기 조립은 직영, 해체는 하청
국내 최대 베어링용 쇠구슬 생산업체 KBR. 주차장 천막에서 점심 설거지가 한창이다. 그늘막에서 노동자들이 담소를 나눈다. 회사는 지난 5월 10일 ‘과도한 임금인상과 보수를 위한 기계 출고에 대한 불법적인 파업’을 이유로 직장을 폐쇄했다. 14년차인 주형환 사무장의 연봉은 잔업을 100시간씩 해서 3800만원이다. 기본급이 최저임금보다 500원 많다. 한화기계 창원 2공장이었던 회사가 2004년 한화그룹 비자금 사태와 대한생명 인수로 지금 경영진에게 팔렸다. 마산고와 고대를 나와 부동산업으로 돈을 번 이종철 회장 일가는 매년 5억원가량을 챙겼고, 2년 동안 20억원을 배당금으로 가져갔다. “어제 교섭을 했는데 근로감독관이 있는 자리에서 ‘2년이고 3년이고 가자. 없는 니네가 얼마나 버티겠냐’고 말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저는 ‘2년 가지고 되겠나, 한 5년 가자’고 답했죠.” 박태인 지회장이 울분을 토해낸다. 회사가 밀양에 만들어놓은 삼경오토텍을 다녀왔는데 대부분의 생산공정이 사내하청이었다. 임금협상 때마다 외주화를 협박하더니 노동자들 몰래 밀양에 비정규직 공장을 만들어놓고 기계를 빼돌리려는 속셈이었다. 노조를 없애고 창원의 명당자리를 팔아 돈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명문학교병’ ‘땅투기병’ ‘노조혐오증’이라는 3대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이들의 그릇된 아들 사랑은 극진하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모든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법원 판결은 무시하고, 감정가의 3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으로 한전 땅을 사서 아들에게 물려준다.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줬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노조는 자동차의 품질에 심각한 우려를 제기한다. 회사가 밀양에서 만든 미승인 볼을 KBR에서 제작한 것처럼 속여 베어링회사와 자동차 부품공장에 납품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박스갈이’다. 품질이 떨어지는 볼로 인해 자동차의 품질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다. 국민의 생명보다 이윤이 먼저인 나라, 대한민국 전체가 세월호다.
전차, 전동차, KTX를 만드는 현대로템. 방문절차가 까다롭다. 창원공단에서 최고로 치는 회사의 지난해 평균 연봉이 8600만원이었다. 24개 업체 627명의 하청노동자가 일한다. 아버지가 퇴직하는 조건으로 아들을 채용해달라는 조합원들의 요구로 2009년부터 3년 동안 37명의 아버지가 나가고 아들이 들어왔다. 명문대 법대를 중퇴하고 아버지 대신 들어와 용접일을 하는 아들도 있고, 아들을 위해 퇴직 후 하청업체로 들어와 일하는 아버지도 있다. 이상호 교육부장은 “5년 일찍 퇴직하면 어림잡아 5억 이상 손해를 보는 건데, 자식이 하청업체에서 거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양보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들이 조합활동 앞장서지 마라, 중간에 서라, 휩쓸려 지나가라,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라며 나쁜 것만 가르쳐 지난해부터 대체채용이 중단됐다. 현대차·기아차노조도 장기근속자 자녀 가산점을 요구했다.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고, 신규채용을 늘리도록 요구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일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하는 대기업 늙은 노동자들. 그릇된 자식 사랑은 사용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용자는 기업 세습, 노동자는 고용 세습
현대로템 노조회의실이 철야농성장으로 바뀌었다. 통상임금 정상화와 노동시간 단축이 주된 요구다. 잔업까지 하루 10시간 근무를 9시간으로 줄이자는 것. 노조 상근자 모두가 10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날도 2시간 파업을 하고 1200명이 집회에 나왔다. 집회 3회 이상 불참자 실명 공개 등 노동조합의 단결을 해치는 행위는 징계한다. 창원공단에서 조직력이 가장 좋은 노조다.
이상호 교육부장은 만 59세다. 58세 정년에 촉탁직 1년, 계약직 1년이니까 내년 말이면 영원히 회사를 떠난다. 1985년 3월 25일 입사해 꼭 30년을 일했다. 나가기 전에 주변 정리도 하고 쉬고 싶기도 했지만 지회장의 간청에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다. 1988년 노조활동으로 감옥에 간 동료 면회도 가고, 파업하는 노조 지원도 가자며 ‘동지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부서마다 생기면서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는 빨갱이로 몰렸고, 목장갑을 가지고 나갔다는 이유로 해고됐다가 2년 만에 복직됐다. 회사 창립일 체육대회 때 정몽구 앞으로 200명을 끌고 가서 시위를 벌인 일, 해고 기간 슈퍼마켓을 하면 평생 먹고 살 거라며 회사가 건넨 돈을 뿌리친 일, 어용노조와 회사가 마창노련 탈퇴 찬반투표를 벌이는 날 홍보물을 만들다 2층에서 뛰어내려 도망간 일, 출근하면서 그 홍보물을 앞 사람에게 건네고 빈 가방을 들고 들어와 투표 직전에 뿌려 탈퇴를 막은 일을 들려준다. 30년 인생을 바친 민주노조. 그의 얼굴이 빛난다. 아름다운 황혼이다.
상남동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금속노조 사무실에 두산중공업 해고자 강웅표 문화체육부장이 일하고 있다. 1982년 9월 한국중공업에 입사해 1985년 노조를 만들려다 해고되고 구속되고, 복직하고, 1998년 민영화를 막으려다 구속되고, 2003년 구조조정을 막으려다 해고되고 구속됐다. 같은 해고자인 김창근 전 위원장은 정년이 지났고, 그는 4년 남았다. 노조는 명예퇴직을 거론하고 있지만 ‘복직 없이 정년퇴직 없다’는 게 두산중공업 해고자 4인방의 마음이다. 금속노조에서 가장 나이 많은 부장인 그는 문화패를 만들어 수요일마다 세월호 촛불공연을 하고, 밀양 동화전마을 연대의 밤도 열며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늙은 부장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젊은 노조 간부들도 열심히 하려고 한다”며 해맑게 웃는다. 멋있는 황혼이다.
정병산 등산로 입구의 식당. 민주노총이 불매운동을 하는 생탁 대신 금정산성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킨다. “삼성전자서비스 젊은 친구들이 노동조합이 따낸 것도 없는데 좋은 게 뭐냐고 하니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다’는 거야. 또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거야.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노동사회교육원 김정호 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두산모트롤에서 퇴직하고 초등학생에게 비폭력 대화 교육을 하고 있는 최은석 선배는 앞으로 노조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감교육을 해보겠다고 말한다. 직영 아빠와 하청 아들의 도시, 우울한 창원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짙은 여운을 남긴 서울행 마지막 열차가 창원공단을 떠난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떠돌이 박사들’의 한숨, 과학도시 대전 9.2 주간경향 1091호
연구원들에게 노동조합은 용기가 필요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직장을 구하려면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찍히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떠돌이 비정규직 박사’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대전 월드컵경기장이 고즈넉하다. 경기장으로 향한 길, 나무마다 달린 노란 리본과 떼지 않은 환영 현수막이 나부낀다. 육교 위에 올라 경기장을 본다. 그는 이곳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건넨 노란 리본을 달고, 팽목항 2000리를 다녀온 십자가를 받았다. 그는 말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
그가 남긴 말을 되뇌며 걷는다. 월드컵경기장 전철역. 역무원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청하며 교황을 봤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흔든다. 교황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역무원들. 그런데 그들은 대전도시철도공사의 정규직 역무원이 아니다. 대전지하철 22개 역 중 20곳이 민간위탁 역이다. 비정규직역 비율이 91%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비정규직 역무원. 지방정부가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 대전의 자랑 대덕연구개발특구로 향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해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원들이 모여 있다. 대전은 물론 전국에서 가장 많은 박사들이 가입한 전국공공연구노조 사무실. 연구단지 4거리에서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돌아온 이광오 사무처장이 보고서를 한 보따리 내민다. “연구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이에요. 스펙도 좋고 유학파도 많아요. 지금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때쯤이면 쫓겨납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 박점규
가장 많은 박사, 전국공공연구노조
2013년 10월 공공연구노조가 발표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 연구기관 비정규직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원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45.3%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연구원은 5036명(37.7%)으로 2008년에 비해 38%나 늘었다. 연수과정에 있는 노동자를 포함하면 절반에 이른다. 비정규직 연구원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 대비 58~61%다. 근속연수는 정규직은 12년인데 비정규직은 24.3개월이다. 떠돌이 박사와 날품팔이 연구원들로 과학한국과 노벨상을 꿈꾼다.
지난달 취임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비정규직을 놔두고 내수를 활성화하기는 어렵다. 국민행복시대를 위해서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중구조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상시 지속적인 연구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7월 29일 정부 고위관계자 입에서 나온 숫자는 400명이었다. 과학기술계는 200명으로 5036명 중 3.9%만이 정규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처장은 “지금까지 속아왔으면서도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박사와 투쟁조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대덕밸리를 가로질러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지난다. 연구원 정문에 있던 천막이 치워졌다. 지난 1월 10일 연구원과 공공연구노조는 불법파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웠던 28명을 직접 고용하기로 했다. 합의 내용은 부족하지만 싸우면 세상은 달라진다.
“김박은 어디 갔어?” 대덕단지 끝자락에 있는 국가수리과학연구소 2층 식당. 식판을 든 10여명의 연구원들이 김종호 박사를 찾는다. 보통 사람은 골치가 지끈거리는 수학·물리학을 전공한 박사들이다. 어린 시절 똑똑하다고 칭찬받으며 에디슨과 노벨상을 꿈꾸던 영재들이었다.
노동조합 사무실. 노사 교섭 결렬에 따라 총회를 준비하고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연구소의 현실을 알리느라 바쁘다. 투쟁조끼를 입고 있는 최연택 지부장도 수학박사다. 그가 건넨 명함에 가상생태계모델연구개발팀 연구원이라고 적혀 있다. 거대과학계산, 특수암호 알고리즘, 미래 인터넷 네트워크, 수리적 뇌기능 판독, 공학해석 수치프로그램 등 부르기도 어려운 연구과제들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을 팀을 구성해 연구하는 프로젝트다.
그런데 석·박사들은 연구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대한수학회의 추천으로 2012년 9월 부임한 김동수 소장은 직원들과의 첫 간담회에서 계약 만료 6개월 전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40여명의 연구원들을 해고하고 연구 예산을 반으로 삭감했다. 연구는 멀리하고 수학캠프와 수학자대회 등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규정을 바꿔 연구소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냥 때려치우고 이민 가려고 했어요. 근데 어느 분이 주인의식 얘기를 하더라고요. 계약직이지만 내 연구소라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연구소를 바꿔놓아야 다음 사람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앞에 나서게 됐죠.” 최연택 박사가 노조 일에 나선 이유다.
대덕단지 내 대한이연 공장에서 한 조합원이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링을 보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 박점규
정부만 바라보는 비정규직 박사들
정규직이 먼저 나서 노조를 만들었고,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가입해 함께 싸웠다. 지난해 9월 3일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계약기간 만료만으로 해고할 수 없도록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최연택 지부장을 비롯해 6명을 해고했다. 최근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로 판정 났지만 복직시키지 않고 있다. 노조는 ‘국가수리과학연구소(NIMS)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공문을 만들어 국제수학연맹에 보냈다. 소장과 연구소 관리자들이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수학자대회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에게 노동조합은 용기가 필요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직장을 구하려면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찍히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도교수를 통해 노조 탈퇴나 소송 취하를 요구하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떠돌이 비정규직 박사’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얼마 전 이곳을 떠난 한 연구원은 전자통신연구원의 비정규직 박사로 일하고 있다. “길들여진 독수리처럼 대부분이 고개 숙이고 살고 있어요. 저희는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행복하죠.” 최 지부장은 다른 연구원을 찾아다니며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나서고 정규직 노조가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라는 교황의 말처럼.
신탄진으로 향하는 버스가 갑천 다리를 건너자 굴뚝이 보인다. 대덕산업단지다. 왼편에 자동차 부품회사 한라비스테온공조 대전공장이 보인다. 평택공장을 포함해 2000명의 정규직 노동자가 일한다. 지난해 직원 평균 연봉은 8819만원이었다. 올해 임금교섭에서는 상여금 600%와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급여가 더 많아진다. 대전에서 제일 좋은 회사다. 노동조합의 힘은 멀리 울산공장에는 미치지 못했다. 울산공장은 사내하청 노동자만 모여서 일하는 ‘비정규직 공장’이다.
빗방울이 흩날린다. 신탄진역을 지나 대덕단지 끝자락에 있는 대한이연 공장을 찾았다. 쉬는 시간, 노동조합 사무실이 북적인다. 정년이 지나 70세까지 일하는 3명의 청소노동자는 촉탁직이지만 생산라인은 물론 식당, 경비직원까지 243명 모두 정규직이다. 매년 7만~8만원가량 임금을 올려 주야 맞교대를 하는 노동자의 연봉은 6000만원 안팎이다. 300명 미만의 중소사업장이지만 안정된 일터다.
연구 전념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노조 신현수 사무장과 함께 공장을 둘러본다. 한 조합원이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링을 보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노조 대의원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조합원을 안내하자 환하게 웃는다. 정규직이 휴가로 비운 자리에 1개월 계약직으로 들어와 일하다가 정규직이 됐다. 지금은 단기계약직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정규직으로 뽑았다가 정년퇴직자 자리로 옮기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3년 동안 20여명이 새로 입사했다. 신 사무장은 힘 있는 노동조합이지만 안주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과 함께 학습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이연을 나와 이명박씨 사돈기업, 대전의 최대 사업장 한국타이어로 향한다. 1년 6개월 동안 15명의 노동자가 집단 사망해 노동계가 2008년 ‘최악의 살인 기업’으로 선정한 회사다. 2012년 매출액이 2조3000억에서 지난해 7조로 급증했지만 정규직은 제자리걸음이다. 사내하청 노동자가 1837명이나 된다. 대전에서 가장 큰 회사지만 지난해 정규직 연봉은 6000만원으로 대한이연 수준이다.
1993년 입사해 20년 동안 일하면서 산업재해와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고,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운 노동자. 생활한복이 잘 어울리는 ‘한국타이어 민주노조 희망연대’ 정승기 의장이 환한 얼굴로 맞는다. 2010년 3월 해고됐다가 대법원에서 이겨 작년 7월 복직했지만, 한 달 만에 다시 해고당한 노동자. 하지만 그는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서류봉투에서 비밀 문건을 꺼낸다. 노조활동과 사내하청에 관한 자료들이다. 그를 신뢰하는 현장의 제보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건네줬다. ‘대전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한국타이어지만 진실은 가라앉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제대로만 역할을 했어도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것이고, 노동조건도 이렇게 악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올해에는 한국타이어 안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휘날릴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간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온 민주노총 박종갑 국장과 함께 시청으로 향한다. 대전에만 콜센터 노동자가 1만5000명에 이른단다. 대전에 몰려 있는 물류회사와 우편집중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밤샘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 철도고객센터의 콜센터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했다. 노동운동이 정파싸움에 매몰되지 않고, 노동조합이 공장 밖으로 눈을 돌려 이 노동자들을 조직했으면 하는 게 박 국장의 바람이다.
시청 앞 주차장, 트럭 위에 세워진 천막농성장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한 노동운동가가 잡아온 참돔 매운탕과 구이로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대전지회 송민영 총무가 한 상을 차렸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전액관리제를 위반하고 있는 대전시내 76개 택시회사를 처벌하라며 싸우고 있는 181일차 농성이다. 민주노총 간부였던 조훈 국장을 10년 만에 택시노동자로 만났다. 대한이연에서 식당·경비노동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롯데백화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던 민주노총 엄연섭 전 본부장이 일을 마치고 천막을 찾았다. 사람 냄새 가득한 천막의 밤이 깊어간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첨단 구로공단의 굴뚝시대 근로조건 819 주간경향 1089호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들은 주당 45.6시간을 일하고 월 평균 196만5000원을 받았다. 전국 평균보다 3시간 더 일하고 22만원 적게 받는다.
여름휴가 절정기, 서울의 주요 도로가 한산하다. 서울지하철 1호선과 7호선 환승역인 가산디지털단지역의 출근시간, 지각을 피하려는 노동자들의 몸싸움이 치열하다. 20~30대 젊은 노동자들이 이어폰을 꽂은 채 웃음기 없는 얼굴로 걸음을 재촉한다. 3공단으로 향하는 7번 출구. 기륭전자 김소연 전 분회장이 1992년 가리봉역에 내려 서성이던 곳이다. 전봇대에 구인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시절, 두리번거리던 그는 봉고차에 태워져 갑을전자라는 회사에 내렸고, 이후 기륭전자까지 22년을 구로공단에서 보냈다. 20년의 시간, 바뀐 건 역 이름만이 아니다. 국가산업단지 1호 구로공단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공장 굴뚝은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뀌었다. 허름한 백반집은 세련된 레스토랑으로, 푸른빛 작업복은 캐주얼 복장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도 달라졌을까?
수출의 다리에서 본 2공단 4거리 | 박점규
20년 전 굴뚝 있던 자리엔 첨단건물이
건너편 2공단도 출근하는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권고사직 노동조건 후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상담받고 버티면 ‘끝’ 싸인하기 전 꼭 상담하세요” 공단 입구에 걸린 현수막이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시선을 끈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권고사직이 횡행한다는 얘기다.
2공단을 둘러본다. 1990년대 구로공단의 대표적인 민주노조 사업장 한국KDK가 있던 자리에 15층 백상스타타워가 들어서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유명한 대우어패럴, 효성물산이 있던 자리는 마리오아울렛, W몰, 현대아울렛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이 1990년대까지 한국을 뒤흔들던 노동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1895일 투쟁, 94일 단식, 고공농성, 정규직화 합의, 합의 파기, 야반도주…. 여느 대기업보다 유명한 기륭전자가 있던 공사장 앞에 선다. 사장은 땅과 건물을 팔아먹고 날아버렸고, ‘가산동 지식산업센터 신축공사’ 현장은 3년째 멈춰서 있다. 기륭은 구로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다.
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 사무실. 구자현 지회장의 손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 구조고도화사업계획서’가 들려 있다. 그가 공단의 역사와 변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1990년대 구로공단 노조 조직률은 25%였다.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월급이 오르면 공단을 넘어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이 정권을 흔들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7년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을 추진했다.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공장 이전에 따른 보상에만 관심이 있었다. 구로공단 사장님들은 땅을 팔아 떼돈을 벌었다. 공장이 헐리고 첨단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첨단화 계획’에 따라 생산에서 판매까지 하나의 법인에서 하던 일들이 여러 개로 쪼개지고 나눠졌다. 분사화, 외주화, 소사장제, 하청화가 최첨단으로 이뤄졌다. 15년이 흘렀고, 노조 조직률은 전국 최하위인 2%로 떨어졌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4년 현재 1만1911개 회사에 16만2032명이 일한다. 한 업체당 13.6명이다. 지난 4월 15일 국가산업단지 지정 50돌 기념 토론회에서 발표된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환경 실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 노동자들은 주당 45.6시간을 일하고 월 평균 196만5000원을 받았다. 전국 평균보다 3시간 더 일하고 22만원 적게 받는다. 저임금 노동자의 24.4%는 주당 6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첨단 구로공단에서 하청의 하청으로 일하는 ‘IT 노가다’들에게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겉모습은 첨단시대이지만 노동환경은 굴뚝시대인 구로공단에서 ‘서울남부지역 노동자 권리찾기사업단 노동자의 미래’는 지난 3년 동안 ‘무료노동 이제 그만’과 ‘노동법을 지켜라’ 등 많은 사업을 벌이며 변화의 토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수출의 다리를 건넌다. 왼편 현대택배 자리는 수영장이었다. 50년 전 구로공단을 세울 때 근로자아파트, 근로자복지센터, 운동장, 수영장을 같이 만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지금 호텔, 쇼핑센터, 택배회사가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마저 팔아먹었다.
노조 사라진 공단, 병원 못 가는 노동자
3공단 끝자락 일회용 의료기기를 만드는 한국메티칼샤프라이. 구로공단에서 45년을 지켜온 회사다. 쉬는 시간, 방진복을 입은 여성노동자들이 줄지어 노조사무실을 들른다. 촉탁직과 청소노동자 4명을 뺀 156명이 모두 정규직이다. 월급은 조금 적지만 상여금도 있고 휴가도 많고 안정되어 있어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없다. 90년대 가장 열악했던 공장이 지금 가장 나은 사업장이 됐다. 노조가 소중한 이유다. 정영희 지회장은 가까이에 있는 기아차노조 때문에 속상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기아는 지역 연대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회의에도 잘 안 나온다. 최근에는 정리해고 사업장 코오롱 불매운동을 하는데, 전 조합원과 가족들까지 코오롱 운동복을 단체 구매했다. 오죽했으면 기아차 불매운동을 하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기아는 주간 2교대 하니까 시간도 많고 조합비도 짱짱하잖아요. 노조 간부들이 지역에 나와서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정 지회장의 간절한 바람이다.
571번 버스가 3공단을 거쳐 디지털단지 5거리, 가리봉시장, 구로시장을 지난다. 구로한의원 김태식 원장은 1999년부터 15년 동안 공단 노동자를 만났다. 쪽방 주인과 병원 환자는 노동자에서 중국교포와 독거노인들로 바뀌었다. 기아차와 기륭전자를 비롯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가끔 한의원을 찾지만 산업재해로 한방 진료를 받는 노동자는 별로 없다. 노동조합이 사라진 공단,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하는 ‘첨단’ 노동자들이다.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최규석의 만화 ‘송곳’에 나오는 남부노동상담센터에 문재훈 소장과 금천교육네트워크 최석희 대표, 기륭전자 김소연 전 분회장이 모였다. 20~30년 청춘을 구로에서 보낸 이들이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50년 50인의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 <구로공단에서 G밸리로>를 건넨다.
인명진 목사를 시작으로 손학규 김문수 심상정 원희룡 박영선 박원순 등 ‘잘 나가는’ 49명이다. 책 서문에는 “특정되지 않은 마지막 50번째 인물”이라고 쓰여 있지만 주인공은 기륭전자 김소연이다. 운동을 팔아먹고 떠난 김문수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아 거부했기 때문에 비어 있다. 20년 공단의 이야기가 오간다. 어느덧 퇴근시간, 기륭전자분회 사무실 근처 식당. 공단의 어느 인쇄회사 노동자가 반가운 얼굴로 부당해고 판정을 받은 지방노동위원회 결정문을 문재훈 소장에게 건넨다. 돈 때문에 노무사를 구하지 못해 문 소장이 사건을 맡았다. 최석희 대표는 “문 소장님이 노무사보다 승률이 높다”며 너스레를 떤다. 최 대표는 2009년 평택역 기무사 민간인 사찰 피해에 대한 국가 배상금 일부를, 얼마 전 해산한 한국음향노조는 남은 조합비를 쌍용차에 건넸다. 쌍용차와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구로공단의 연대는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다.
박점규의 노동여지도]세월호를 빼닮은 노동재난구역 안산 923 주간경향 1093호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 지원센터가 지난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노동자 623명 중 파견업체 소속이 37.9%, 용역업체 소속이 36.9%였다. 응답자 중 75%가 간접고용 노동자다.도심과 아파트 단지를 돌고 들판을 가로지른 버스가 바닷물을 막아 만든 시화공단에 이른다. 1995년 안산시 신길동과 시흥시 정왕동 일대에 조성된 공업단지다. 추석 연휴가 끝난 첫 출근길,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다.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최저임금을 받는 파견, 하청노동자예요. 사람을 채용할 때 파견업체로부터 공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1만개가 넘는 업체의 평균 인원이 11명이니까 정규직이라고 해도 비정규직과 별 차이가 없죠.” 2001년부터 이곳에서 활동해온 시화노동정책연구소 공계진 이사장이 공단을 안내한다.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은 파견이 금지되어 있지만 임시·간헐적 업무는 3개월을 사용하고, 한 번 연장할 수 있다. 불법파견, 무허가 파견이 허다하다. 상시 업무에 하청업체를 돌려가며 파견하기, 6개월 뒤 쉬었다 다시 파견하기 등 법의 허점을 이용한 ‘변종 사람장사’가 기승을 부린다.
안산시 인력회사들 | 박점규
대한민국 파견노동 1번지, 인간경매 단지로 불리는 공단 입구. ‘생산직 인력파견 자동차부품 전자 ??인력’ 간판들이 지천에 깔렸다. 고용노동부가 시화공고 앞에 걸어놓은 ‘구인구직 알선 및 지원사업’ 현수막을 비웃는다.
출근시간 파견업체 차량이 ‘나래비’를 서는 시화공고에서 정왕우체국까지 걸으며 숫자를 헤아린다. 50m 거리에 집을 사고파는 부동산이 6개, 사람을 사고파는 인력회사가 19개다. 좋은사람들, 나이스, 신화, 월드…. ‘사람장사’하는 회사 이름이다. 하기야 ‘묻지마 살인’의 원인이었던 일본의 최대 인력 파견업체 이름도 ‘굳윌’(Good Will)이었다.
건너편 원룸단지로 향한다. 3층짜리 주택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한 층에 5개씩 15개의 쪽방이 들어 있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30만원. 가난한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의 거처다. 원룸에 적당한 값싼 가구와 가전제품 재활용업체도 즐비하다. 원룸단지 쪽방에서 살아가는 1개월, 3개월짜리 파견노동자들 때문에 인력회사, 부동산, 재활용업체가 호황을 누리는 괴기한 풍경이다.
인력회사·부동산이 호황, 괴이한 풍경
한국산업단지공단의 ‘2013년 12월 국가산업단지 동향’에 따르면 반월공단은 7060개 업체 17만7624명이, 시화공단은 1만157개 업체 11만2558명이 일하고 있다. 안산시 비정규직노동자 지원센터가 지난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노동자 623명 중 파견업체 소속이 37.9%, 용역업체 소속이 36.9%였다. 응답자 중 75%가 간접고용 노동자다.
공단 대로를 달린다. 작은 공장들이 이어진다. 대길통상, 금창공업 등 노조 결성을 시도했던 사업장을 지나친다. 노동운동의 불모지에서 주요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고 주변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1만개가 넘는 회사 중에 민주노총 소속은 인지컨트롤스와 파카한일유압 단 둘이다. 그마저도 복수노조를 통한 탄압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공 이사장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를 지역 차원에서 묶어내 노조로 들여보내는 일종의 ‘합작’ 운동이 필요하다”며 “민주노총이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사업을 하다보니까 30만명이 넘는 반월, 시화공단을 조직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점심시간, 파카한일유압 권오진 노조분회장이 공장 밖으로 나온다. 현대중공업, 두산인프라코아에 굴착기용 유압밸브를 납품하는 회사다. 잘 나가던 한일유압을 인수한 파카는 매출이 급감했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했다. 치열하게 싸웠지만 200명이 넘었던 노동자가 62명으로 줄었고, 복수노조가 만들어지면서 금속노조 조합원은 5명 남았다. 권 분회장은 노조를 깨기 위해 경기도가 갖은 혜택을 준 화성 장안공단에 파카코리아를 만들어 물량을 빼돌리고, 아예 공장을 없애려고 한다고 말한다. 최근에도 기업노조 조합원 10여명이 협박에 못 이겨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공단 어디에도 좋은 일자리는 없다. 파카에서 노조를 만들고 싸워서 오른 임금은 공단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외국인 투자기업과 싸우는 것이 힘겹지만 민주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입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며 19살부터 시화공단에서 살아온 그가 입을 앙다문 채 공장으로 돌아간다.
시화공단을 떠난 버스가 10분 만에 도착한 안산역 주차장 끝에 컨테이너 사무실 세 동이 있다. 건설노조 사무실이자 건설노동자들의 쉼터다. 출근투쟁과 산업안전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푸름미래 해고노동자들이 담소를 나눈다. 간척지 매립과 공단 조성, 낙후한 공단 리모델링, 도시재생까지 건설노동자의 일자리가 많은 안산과 시흥의 건설노조 토목건축 조합원은 300여명이다. 이주노동자들도 노조에 받아들여 100여명 정도 있다. 건설노조가 회사와 협상을 해서 조합원의 일당을 높이고, 노동시간은 줄였다. 현장에 들어갈 조합원 수도 교섭으로 따낸다. 건설일용 노동자 무료 취업알선과 건설기능학교도 열고 있다. 김호중 사무국장은 “처음에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컸지만 노조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며 함께 싸워야 한다고 해서 많이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안산시 촛불집회 | 박점규
공단 어디에도 없는 좋은 일자리
그는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건물을 지으러 갔던 단원구 원시동의 영풍전자 생산라인이 소사장제 방식으로 전부 비정규직이라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영풍그룹 계열사들도 비슷하다. 김 국장은 “우리는 일용직인 건설현장을 안정된 일자리,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현장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우리 사회가 모든 노동자를 건설노동자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다”며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공장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산역 2층에서 건너편 건물을 내려다본다. 건물마다 인력회사가 빠짐없이 들어서 있다. 출퇴근시간이면 이곳도 버스와 봉고들이 공단의 원청회사로 파견노동자를 실어 나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반월공단에서 7년 동안 파견노동자로 일했던 한 청년을 만났다. 벼룩시장을 보고 전화를 했더니 파견업체였다. 바로 다음날 출근하라고 했다. 6개월만 참으면 정규직이 된다고 했다. 주방용 가전제품을 만드는 파세코, 코알라 빵을 만드는 서울식품, 프린터를 만드는 롯데캐논을 떠돌아다녔다. 파견노동자의 3대 공통점은 장시간 노동, 월급 120만원, 고용불안이었다. 젊은 청춘들이 왔다가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면 그 자리는 또 다른 파견노동자가 채웠다. 민방위훈련처럼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에 대비해 불법파견을 숨기는 모의훈련을 하는 곳도 있단다.
파견회사가 얼마를 떼어가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하루 일당 7만8000원 중 파견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5만원. 인력회사에서 36%를 가져간다. 하루에 100명을 보내면 280만원, 한 달에 최소한 7000만원을 벌어들인다는 계산이다. 실장 둘, 경리직원 한 명을 고용한 파견회사가 끝없이 늘어나는 이유다. 2013년 안산시에 등록된 파견업체만 320여개, 무허가를 합하면 500여개에 달한다. “10%도 아니고 40% 가까이를 떼어간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러니까 안산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면 술집 삐끼처럼 인력회사 직원이 나와서 일하러 안 가냐고 묻는다니까요.”
안산의 끔찍한 파견 현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파견업체들이 모여 도급으로 전환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단다. 대기업들은 전국적 파견업체를 통해 생산라인은 도급, 비생산라인은 파견으로 정비한다. 파견회사 전성시대, 사람장사 합법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안산은 특별노동재난구역이다.
파견회사 전성시대, 사람장사 합법시대
경기금속지역지회 정현철 수석부지회장은 “고용노동부가 지금까지 방치해놓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고 변명한다”며 “불법파견 자료를 수집해 노동부에 진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응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신고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불법파견 민·관 공동감시단 구성과 안산 지역에 대한 특별근로감독도 요구할 계획이다.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민주노총 안산시지부 김영호 지부장이 스타렉스 차량에 물건을 싣느라 분주하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될 단원구 고잔동 촛불집회 물품이 차량 한 가득이다. 그는 자동차부품업체 에스제이엠 지회장이다. 이명박 정권이 쌍용차 살인진압에서 자신감을 얻은 후 2010년부터 민주노총의 핵심사업장을 깨기 위한 ‘노조 초토화 전쟁’이 진행됐다. 자본과 창조컨설팅이 기획하고, 경찰이 비호한 전쟁이었다. 직장폐쇄→용역깡패 투입→지도부 구속→복수노조 설립→민주노조 무력화로 이어지는 전투는 2010년 2월 경주 발레오만도를 시작으로 대구, 구미, 충청을 거치며 북상했다. 민주노조는 변변한 전투조차 치르지 못하고 패배했고, 2012년 7월 안산의 중심 에스제이엠까지 쳐들어왔다. 마지막 보루, 김영호가 이끄는 안산전투에서 조합원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민주노조를 지켜냈고, ‘노조 초토화 전쟁’을 멈추게 했다. 노조는 지난 8월 18일 불법 직장폐쇄에 따른 임금청구소송마저 승소했고, 추석 직전 회사가 상고를 포기해 21억원을 받게 됐다. 조합원 투표에서 통과되면 이 금액의 50%를 지역 노동기금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에스제이엠은 생산라인 354명 모두 정규직이다. 누군가 세월호 현수막을 떼어갔다는 소식에 지회 조합원들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었고, 이날 간부들이 온종일 시내를 다니며 현수막을 걸었다.
“세월호 가족들이 처음에는 거리를 두셨는데 지금은 민주노총이 제일 믿을 만하다며 의지를 많이 해요. 노동자들도 열심히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있어요.” 김영호 지부장은 지금 세월호 전투를 이끌고 있다. 봉고차가 단원고등학교를 지나 고잔동 주택가 놀이터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세월호 생존자 대책위 장동원 대표가 반갑게 맞는다. 그는 의료기기를 만드는 신흥에서 일한다.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 대부분이 반월과 시화공단의 노동자이거나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서민들이다. 한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세 명이 자식을 잃었는데 모두 하청노동자다. “살아온 아이들도 안전하지 못해요. 자판기에 깔린 친구를 두고 온 아이, 친구의 손을 놓친 아이, 누군가 발목을 잡았는데 뿌리치고 온 아이들이 지금도 울고 있어요.” 그의 눈이 젖어든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경이 촬영한 미공개 동영상이 상영된다. 장 대표가 일본 방송국에서 구해왔다. 누군가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계속 소리치는데 해경은 구하러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나온 사람들만 건진다. 어선이 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배가 가라앉는다. 또다시 울음과 탄식과 분노가 터져나온다.
하청과 파견이라는 암세포가 도려낼 수 없을 정도까지 퍼진 공단은 규제완화라는 암세포가 번져 침몰한 세월호를 빼닮았다. 노동자와 시민이 촛불을 든다. 안전한 대한민국, 안정된 일터를 만드는 촛불이 안산의 어둠을 밝힌다.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929 시사인
‘일베 논문’을 쓴 연구자와 데이터 기반 컨설팅 업체의 도움을 받아 일베의 모습을 입체 조명했다. 두드러진 일베 코드는 ‘무임승차’와 ‘아버지’였다. 요란하고 반사회적인 표현 양식은 사이트 특성에서 비롯됐다.
장면 하나. 9월6일 토요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단식농성장 앞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 베스트 저장소(일베)’ 회원들이 대거 모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을 조롱하는 ‘폭식투쟁’을 하고, ‘일베 인증’ 손동작(손가락으로 ‘ㅇㅂ’을 그린다)을 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일베 회원들은 이날을 ‘906 광화문대첩’이라 부르며 자축했다.
이날 그들이 보여준 것은 루저 감수성이 아니었다. 그날의 정서는 분명 자부심과 흥분이었다. 일베 사이트는 광화문대첩의 무용담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장면 둘.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일베를 두고 페이스북에 연일 곤혹스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9월12일에는 “투쟁 방식을 상식적이고 건전한 방식으로 바꾸십시오. 그러면 저도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일베가 보여주는 형식과 내용을 갈라치기하고, 형식의 극단성을 분리수거하면서 내용을 살려가자는 의미다.
ⓒ시사IN 김동인 9월13일 ‘세월호 특별법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여성의 나체 사진을 스마트폰에 띄운 채 춤을 추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인형은 일베 마스코트 ‘베츙’이다.
장면 셋. 올해 8월에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일베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학준씨는 연구를 위해 일베 회원들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첫째로 굉장히 착하다. ‘키보드 워리어’라서 현실에서 주눅이 든 것도 아니고, 할 말 다 하면서도 아주 예의 바른 청년들이 줄줄이 나오더라. 둘째로, 다들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한다.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이야기가 많다. 전반적으로 삶의 태도가 참 순응적이다.”
소수자 혐오, 정의, 자부심, 내용과 형식의 괴리, 그리고 순응주의. 일베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한데 모아놓고 보면 종잡을 수가 없다. <시사IN>은 일베 연구자 김학준씨와 데이터 기반 전략컨설팅 회사 트리움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일베의 모습을 입체 조명했다.
첫 번째 질문은 여론에 충격을 준 ‘광화문대첩’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루저·지질이로 간주되던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이토록 강력한 자부심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무임승차론 앞세운 ‘일베식 정의 구현’
가장 먼저 깨져나가는 통념이 있다. 일베가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만 넘쳐나는, 맥락도 일관성도 없는 쓰레기통이라는 통념이다. 분석 결과 일베는 나름의 예측 가능한 논리 체계와 정의 관념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은 그들이 공유하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논리를 따라가보자.
아래 <그림 1>은 일베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논리 체계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 축에는 일베의 ‘주적들’이 있다. 크게 보아 셋이다. 여성, 진보·개혁 진영, 그리고 호남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파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이다.
일베가 보기에, 여성·진보·호남이 공유하는 특징은 ‘권리와 의무의 불일치’다.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는 과도하게 요구한다. 여성은 데이트 비용을 내지 않고 남자를 등쳐먹고, 진보는 제 능력으로 성공하는 대신 국가에 떼를 쓰고, 호남은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뒤통수를 친다.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북한도 남한의 지원은 받아먹고 남한에 대한 의무는 다하지 않는 존재다.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성공해온 역사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베의 눈에 이들은 2등 시민이다.
국가 건설의 주역은 남성·산업화세력·영남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었다. 즉, ‘기여한 만큼 받았다’. 그런데 여성·진보·호남이 비주류의 권리를 내세워, 기여한 것보다 더 큰 보상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여성·진보·호남이 동원하는 전략이 ‘이중잣대’와 ‘떼쓰기’다. 소수파를 비합리적 세력으로 낙인찍는 일베의 무기다. 일베는 “자기들이 하는 박근혜 조롱은 풍자이고 우리가 하는 노무현 조롱은 패륜인가?”라고 되묻는다. “능력만 있다면 살 만한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집회·시위는 능력 없는 이들의 떼쓰기로 간주된다.
여성과 진보와 호남은 떼를 써서 과도한 보상을 받는 세력이다. 이제 2등 시민이 특권층으로 변신했다. 의무 없이 권리를 챙기는 ‘무임승차’다. 반면 병역과 납세 의무를 다하고 성실하게 체제의 요구를 따르는 1등 시민은, 돌연 부당하게 권리를 빼앗긴 희생자가 되었다. 일베의 사고체계에서, 자신들의 혐오와 조롱은 소수자 혐오가 아니라 무임승차 혐오다.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치는 무임승차를 징벌한다는 ‘강력한 당위’를 공유한다. 이는 일베 이용자들이 사회의 지탄에도 아랑곳 않고 광화문광장에 나설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로 확인해보자. 세월호 유가족은 일베가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 아니다. 이들이 가족을 잃는 과정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다. 어마어마한 감정이입과 공감의 에너지가 있다. 하지만 일베는 세월호 유가족을 상대로도 전선 뒤집기를 시도한다.
그러려면 먼저 ‘특권’, 즉 과도한 보상이라 딱지 붙일 거리가 필요하다. 유가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베는 대학 특례입학과 보상금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한다. 이제 공격할 과녁인 ‘특권’이 생겼다. 이 구도에서 유가족은 ‘교통사고를 가지고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무임승차자’가 된다. 비교 대상으로 일베는 천안함 유가족을 불러낸다. 이들이야말로 ‘자격이 있는 희생자’이면서도 세월호 유가족보다 훨씬 적은 보상을 받은 피해자다. 군인 보상체계와 민간인 보상체계가 다르다는 사실만 무시하면(보통은 이런 중요한 차이를 무시하면 안 된다) ‘세월호 유가족의 무임승차’와 ‘천안함 유가족의 희생’이라는 스토리가 완성된다.
일베에게 이 구도는 이미 익숙하다. 일베가 끈질기게 공격 대상으로 삼는 5·18을 다루는 방식이 정확히 이렇다. 일베는 5·18 희생자 유가족이 ‘국가 보상으로 호의호식한다’고 주장하면서, 반대편에 ‘폐지를 줍는 한국전쟁 희생자 유가족’을 배치했다. 이제 5·18 유가족도 무임승차 딱지가 붙는다. ‘일베식 정의 구현’의 핵심은, 소수자가 국가로부터 받는 보호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들을 무임승차자로 낙인찍는 과정이다. 무임승차자라는 규정이 일단 한번 먹혀들면, 이는 일베의 영향력을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일베 코드가 보수를 유혹하는 이유
금융권에서 일하다 퇴직한 50대 남성 최 아무개씨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찍었다. 인터넷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 그는 일베를 들어가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세월호 유가족이 화제에 오르면 정확히 일베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특례입학이며 보상금이며 하는 건 좀 과한 거 아닌가? 단식하는 유민 아빠라는 그 사람은 이혼하고 양육비도 제대로 안 줬다더만.” 평범한 장년층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 깔려 있는 핵심 코드는 자격 없는 이들이 받는 과도한 보상, 즉 무임승차 코드다.
일베에 들어가본 적도 없는 50대 중도층에까지 일베 논리가 침투했다고 해석한다면 영향력을 한참 과대평가하는 꼴이다. 그보다는 무임승차 혐오라는 코드가 일베와 상관없이 폭넓은 공감대를 얻는 힘이 있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중도층으로서는 감정 소모가 꽤 큰 세월호 감정이입에서 벗어나고 싶던 차에 마침맞은 탈출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팀별 과제에 기여는 하지 않고 학점은 똑같이 받겠다는 대학생, 유리지갑 월급쟁이를 비웃는 고소득 전문직 탈세자, 자기 경조사는 악착같이 알리다가 남의 경조사는 외면하는 친구, 부하 직원의 기획안에 제 이름을 써서 올리는 상사…. 사람은 무임승차를 보면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화를 낸다.
한국에서만 먹히는 정서도 아니다. 1976년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4년 후에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임승차 스토리를 들고 나온다. 가짜 신원 수십 개를 만들어 복지 혜택을 싹쓸이해 캐딜락을 타고 다닌다는 한 흑인 여성을 레이건은 ‘복지 여왕’이라 야유했다. 복지 여왕의 무임승차 스토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감세 공약은 레이건을 재선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훗날 복지 여왕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확인됐다. 레이건은 얄궂게도 이 복지 여왕을 ‘흑인’ ‘여성’으로 설정해, 소수자에 무임승차 낙인을 찍는 일베 특유의 기술을 40여 년 전에 보여주었다.
무임승차 혐오 코드가 세계 어디서나 강력한 이유는 인간 본연의 도덕 감정과 정의감에 기반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책 <바른 마음>에서, “무임승차자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 강력한 소망”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주장했다.
하이트가 보기에 무임승차 징계는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다. 무임승차를 방치하면 공동체를 위해 협력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사회 구조가 위태로워진다(무임승차자 한두 명이 생기면 억울한 마음에 다들 손을 놓아버리는 팀별 과제처럼).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피해를 볼 때뿐만 아니라 별 상관이 없는 경우에도, 무임승차를 보면 분노를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하이트의 주장이다. 무임승차 혐오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분노’인 셈이다.
사회의 보호를 받는 약자는 손쉽게 무임승차자로 간주되곤 한다. 이때 보수는 “기여한 만큼 받아야 한다”라며 무임승차 징계 의지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진보는 약자에 감정이입하면서 무임승차가 아니라는 태도를 보인다. 둘 다 인간 본연의 도덕 감정이다. 일베에서 출발한 논의가 무임승차 혐오 코드를 거쳐서, 도덕·정의·공평이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던 키워드에 도착했다. 일베가 진정 위력을 발휘하는 장면은, “기여한 만큼 받아야 한다” “무임승차를 징계해야 사회가 유지된다”라는 보수적이지만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 감정을 정확히 건드릴 때다(‘무임승차’를 보는 보수의 눈 기사 참조).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일베의 반사회적인 표현 형식과 나름의 일관성을 갖춘 논리 체계를 분리수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전자가 갖는 위험성을 두려워하면서도 후자에 매력을 느꼈다. 일베는 무임승차 혐오라는 매력적인 무기를 쉴 틈 없이 생산해내는 아까운 군수공장이다. 하지만 이런 ‘분리수거 기획’이 일베를 구원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유를 알려면 다음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왜 일베 이용자들은 그리도 요란하고 반사회적인 표현 양식을 선택해서 나름 중도층에 어필할 만한 내용조차 갉아먹을까.
폭발적 진화 메커니즘이 일베의 뿌리
일베를 연구한 석사논문의 저자 김학준은 그 자신이 ‘인터넷 죽돌이’ 출신이다. 디시인사이드가 그의 ‘본진’이었고, 일베 역시 일반에 주목받기 한참 전부터 들락거렸다. 김학준은 2011년 6월부터 2014년 2월까지의 ‘일간베스트 게시물’ 33만 개와 ‘정치게시판 일간베스트’ 10만 개를 수집해 분석했다. 실제 일베 이용자 10명을 상대로 A4 300장 분량의 심층 인터뷰도 병행했다. 그는 일베 회원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베 방언’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그가 보는 일베는 첫째, 인터넷 유머 사이트다. 이것은 일베가 인터넷 하위문화의 전통적인 유머 코드를 승계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일베는 큰 사이트다. 동시 접속자가 2만명을 넘나드는 초대형 커뮤니티다. 셋째, 일베의 시스템은 경쟁 압력이 아주 크다. 짧은 시간에 추천을 많이 받아야 일간베스트 게시물이 되고, 활동량과 일간베스트 게시물이 많으면 레벨이 올라가는 구조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조합되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결과가 나온다(위 <그림 2>). 먼저 인터넷 하위문화의 전통적인 유머 코드인 이른바 ‘지역 드립’이 일베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한다. 일베는 ‘7시 멀티’(시계 방향에 빗대 호남을 이르는 말), ‘여권’ ‘비자’(광주 여행자에게 외국 입국이나 다름없다며), ‘홍밍아웃’(호남 출신임을 고백하는 것), ‘홍들홍들’(조롱당하고 분노하는 호남 사람) 따위 ‘지역 드립’을 끝도 없이 쏟아낸다.
‘노알라’는 원래 노무현 대통령을 신처럼 신봉한다며 조롱하던 말이었다(노무현+알라). 이 말이 노 전 대통령 얼굴을 코알라에 합성한 이미지로 ‘진화’하고, 이는 다시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육성을 섞어 만든 리믹스 곡 만들기 경쟁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이라는 놀이 코드를 누가 더 재미있게 갖고 노는가’라는 게임에 뛰어든 경쟁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김학준이 일베 이용자들에게 노알라 합성사진을 거론하며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었을 때, 대다수는 “그냥 웃기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개그 코드다. “노잼(재미가 없다)”이라는 반응은 있었지만 노무현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그 이미지가 일베 밖의 대중에게 얼마나 혐오스럽게 비치는지에 대한 감각도 거의 없었다.
ⓒ인터네 커무니티 갈무리 노무현 전 대통령과 코알라를 합성한 이미지(위)는 대표적 일베 코드다. 여러 일베 이용자들은 이 이미지에 대해 유머라고 반응했다.
일간베스트 게시물이 되려면 더 새롭고, 자극적이고, 의표를 찔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위험한 외줄타기를 벌이는 사용자도 나온다. 아기가 쓰는 젖병 공장에서 “여자 젖이 그리우면 빤다”라며 ‘일베 인증’을 한다거나, 심지어 5·18 희생자의 관 사진을 올리고 ‘홍어 택배’라며 낄낄댄다. 폭발적인 경쟁이 낳은 극단적 결과물이 돌연 현실 세계와 만날 때, 현실은 그 패륜과 반사회성에 아연실색한다. 반대로 일베는 현실 세계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한다. 일베의 눈으로 보면, 현실 세계는 유머 사이트 일베의 정체성인 ‘드립 문화’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놀이판에 끼어들어 훈수를 둔다. 일베 용어로 ‘씹선비’다.
유머 사이트, 유입 인구, 경쟁 압력이라는 삼박자가 갖춰지는 순간 폭발적인 진화가 일어났다. 표현의 반사회성과 극단성은 일베의 구조에 내재한 속성에 가깝다. 보수 일각의 기대처럼 그것만 따로 걷어낼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일베의 진화 메커니즘은 유머 코드만 극단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다. 무임승차 혐오라는 날카로운 칼도 결국은 이 폭발적 진화 메커니즘이 극한까지 벼려냈다. ‘진지 빨고 쓴 글’이 일간베스트 게시물이 되려면, 보수와 중도가 공유하는 무임승차 혐오를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자극해야 한다. 경쟁은 무임승차 혐오의 ‘명중률’을 끊임없이 끌어올린다. 폭발적 진화 메커니즘이 없다면 일베가 예전만큼의 담론 생산 능력을 보여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극단성(반사회적 표현)과 전형성(보수 본연의 도덕 감정). 이것은 일베의 두 얼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한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다.
9월13일자 한 일간베스트 게시물에서는 일베의 표현 양식이 대중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문제로 논쟁이 붙었다. 한 댓글은 일베의 딜레마를 일베의 언어로 표현해냈다. “진짜로 일베가 클린클리닐베가 돼서 보수층들 쌓이면 막강한데 클린해지면 노잼에 발전 불가.”
“권위주의 산업화의 아들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베 사고체계 최초의 가정, ‘소수자를 특권층으로 뒤집는 가치 전도’를 일단 그렇다 치고 논의를 끌어왔다. 그 가정을 받아들였을 때 일베가 어떤 논리를 따라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재구성했다. 이제는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 차례다. 일베의 청년들은 왜 소수자를 특권층으로 뒤집는 가치 전도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을까. 이들은 왜 소수자에 감정이입하는 길 대신 혐오를 택했을까. 트리움의 도움을 받아 일베 이용자 담론 지도(아래 <그림 3>)를 그려보았다.
“‘아버지-서울’ 축이 압도적이네요.” 트리움 김도훈 대표의 말이다. 담론 지도는 ‘아버지-서울’ 축이 경부고속도로처럼 중심축을 이뤘다. “이 친구들한테 재밌는 게, 아버지의 삶을 거의 그대로 내면화합니다. 젊은 때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에는 반항도 하기 마련인데 그런 게 없어요.” 그럼 서울은 뭘까? “상세 분석을 보면, 경상도에서(담론 지도에서는 '대구') 어렵게 자란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서 나름 자리를 잡습니다. 인터뷰를 한 친구들이 그 서사를 자랑스러워하고 닮고 싶어해요.”
좋은(‘김치녀’가 아닌) ‘여자친구’를 만나 ‘서울’에 자리 잡고 ‘가족’을 이루는 꿈. 인터뷰를 한 일베 이용자들 대부분이 바라는 미래상이었다. 인터넷에서는 극단적 여성 혐오를 쏟아내고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는 폭식투쟁을 하던 그 일베가 맞나 싶은 평범함. 김학준은 논문에서 “평범함이 유토피아가 되는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아버지 세대의 ‘평범한 성공 서사’가 이제는 특별해져버린 시대에, 인터뷰에 나섰던 일베 이용자들은 ‘평범함’을 쟁취하려 발버둥친다. 고통스럽다고 도와달라고 외칠 수는 없다. 그건 무임승차다.
“센 놈에 붙어라.” 김도훈 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권위주의 산업화 시대의 한국 사회를 버텨내고 살아온 아버지라면, 아마도 몸으로 느낀 생존전략일 겁니다. 강자에 저항했다면 ‘힘들게 시작해서 서울에 자리 잡는’ 성공을 거둘 확률은 꽤 떨어졌겠죠. 아버지 세대가 체득한 생존전략을 아들이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일베가 무엇인지 정의하라고 한다면 제 가설은 그겁니다. 권위주의 산업화 시대 생존자의 아들이 아버지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돌아왔습니다.”
‘센 놈에 붙어라’ 전략에서 소수자에 손을 내밀고 연대하는 것은 금기다. ‘국가-아버지’에 대한 순응은 소수자 혐오의 동력이 된다. 김 대표의 가설이 옳다면, 소수자 혐오가 먼저다. 무임승차 혐오는 정당화를 위해 뒤늦게 덧붙는다. 이렇게 해서 일베는 지독한 ‘구조맹’이 된다. 여성의 유리천장도 호남의 지역차별도 일베의 눈에는 구조적 불리함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 부족이 된다. 사회 구조 차원의 유불리를 인정하지 않으니, 소수자에게 주는 지원은 권리가 아니라 무임승차다. ‘구조맹’의 항의는 국가를 향하는 법이 없다. 김학준은 논문의 결론을 “일베 이용자는 근대 한국 체제가 가장 성공적으로 산출해낸 통치 대상이다”라고 내렸다. 국가는, 오직 국가만이 지나치게 성공을 거두었다.
무임승차’를 보는 보수의 눈
한국의 진보가 은밀히 공유하는 오래된 가정이 있다. 보수의 지지자는 탐욕 또는 무지, 두 가지 키워드면 얼추 설명된다는 믿음이다.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부자는 탐욕, 가난한 사람은 무지. 다른 논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진보와는 다른 보수의 도덕 감정이라는 개념을 일단 받아들이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길이 열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복지 문제다. 한국에서 시도된 보편복지 기획은 대체로 ‘무임승차 혐오’의 벽을 넘지 못했다(보편복지의 가장 성공한 모델로 여겨지는 무상급식 또한 보편복지에 대한 동의라기보다 ‘애들 밥’에 대한 공감이 더 강했다는 의견이 있다). 보편 대 선별 논쟁이 벌어지면 중도층은 선별복지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고등학생들이 카카오톡 단체 채팅 창을 통해 일베를 논하고 있다.
진보 엘리트는 이를 탐욕과 무지로 해석해왔지만, 보수는 물론이고 중도 역시 보편복지가 불러올지 모를 무임승차가 판치는 세상에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이런 나름의 도덕적 정의감을 탐욕이나 무지로 몰아가는 진보의 ‘혼자 잘난 척’에 염증을 느끼기도 한다. 2012년 대선에서 야권의 복지 기획을 거의 다 가져간 박근혜 후보는, 유독 보편복지 깃발만은 야권에 남겨두고 선별복지를 내세웠다.
복지를 의무 없는 권리로 볼 게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가 상징적으로라도 작동하도록 해야 무임승차 혐오를 피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를테면 실업급여는 복지정책치고는 어느 나라에서나 비교적 인기가 좋다. 실업자가 적극적 구직활동이나 재취업 교육을 받아야만 실업급여를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의 무임승차 혐오를 덜 자극한다.
박원순 시장 공약 사업 위해 숲 개발 제한 대거 풀었다 101 시사저널
서울시, 이화여대 등 20여 대학 주변 숲 등급 완화…기숙사 공사 본격화하며 주민 반발 확산
서울시가 박원순 시장의 공약 사업인 대학생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서울 주요 대학에 주변 숲 개발을 허용해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각 대학이 서울시가 풀어준 개발 제한 지역에 기숙사를 지을 경우 대규모 도심 녹지가 사라지게 돼 박원순 시장의 책임론이 불거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나마 서울시의 녹지지구가 부족한 터에 공약 사업 이행을 위해 대규모로 개발을 허용한 게 적절했는지를 두고 비판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의 정책에 따라 서울 대학가에는 기숙사 신축 바람이 한창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1년 취임 초부터 기숙사 신규보급 정책에 역점을 두고 이를 추진했다. 2012년 6월 ‘희망서울 대학생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시작한 이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 내 건축물을 새로 지을 때 인허가 기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신축 계획에서 대학의 재량권도 확대했다. 그 결과 현재 서울 시내 20개 대학에 총 6720실(1만5969명) 규모의 ‘기숙사 건립 세부시설 조성 계획 결정’이 완료된 상황이다.
9월12일 서울 북아현동 이화여대 기숙사 신축공사 현장.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으나 수목이 벌목되면서 황량하게 변해버렸다. ⓒ 시사저널 임준선
막 첫 삽을 뜨는 대학부터 이미 공사가 상당히 진행된 대학까지, 기숙사 신축 사업은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그런데 기숙사 착공을 본격화하는 대학이 늘어날수록 잡음도 커지고 있다. 현재 주요 대학가 인근 주민들은 서울시의 기숙사 보급 정책이 환경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개발 사업 뒤에서 도심 녹지가 대량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연희동 연세대 기숙사 신축공사 현장. 원래 비오톱 1등급지였으나 등급이 하향돼 건물 신축이 가능해졌다. ⓒ 시사저널 최준필
여의도 40% 면적 개발 제한 일거에 풀려
논란의 중심에는 ‘비오톱(Biotope)’이 있다. 비오톱은 그리스어로 생물을 뜻하는 ‘Bio’와 장소를 뜻하는 ‘Topos’의 합성어다. 특정 동식물이 하나의 생활 공동체를 이루는 소규모 서식지를 말한다. 도시 지역의 생태가 악화되면서 생물군집이 줄어들게 되자 남은 개체를 보존 및 복원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다. 비오톱은 크게 두 가지 평가로 구성된다. 유형평가와 개별평가다. 유형평가는 대상지 전체에 대해 절대적으로 보전이 필요한 비오톱 유형 1등급부터 부분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5등급까지로 나누고, 개별평가는 보전 및 복원 필요 여부에 따라 3등급으로 분류한다. 유형평가가 ‘전체’ 혹은 ‘일부’ 등 보호 범위에 대한 것이라면, 개별평가는 ‘특별’ 혹은 ‘한정’ 등 보호 가치에 대한 평가다.
서울시는 조례를 통해 유형 및 개별 평가가 모두 1등급인 ‘비오톱 1등급지’에 대한 개발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즉 대상지 ‘전체’가 ‘특별’히 보호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비오톱 지대에는 건물 신축이 불가능하다. ‘희망서울 대학생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서도 비오톱은 환경성 검토와 관련한 중요한 지표로 거론된다. ‘비오톱 2등급 이하로 보존 가치가 낮은 녹지 부지에 대해 도시계획위원회 자문을 받아 기숙사 건축 부지 용도로 지정 활용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서울시가 올해 2월 발표한 ‘대학 세부시설 조성 계획 수립·운영 기준’에도 ‘비오톱 1등급지, 공원으로 지정된 대학 내 임야’는 개발이 불가능한 ‘녹지 보존 구역’으로 명시돼 있다.
이렇듯 개발이 불가능한 비오톱 1등급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만 기숙사 신축을 허용한다는 것이 서울시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2013년 5월, 서울 소재 대학 주변 비오톱의 등급이 대대적으로 하향 조정되는 일이 발생했다. 덕분에 비오톱 규정에 발목을 잡혔던 상당수 대학이 기숙사 신축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최근 이화여대는 학교 인근 북아현숲 3만149㎡ 내 수목 1100여 그루를 베어냈다. 재학생 2344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기숙사를 짓기 위해서다. 해당 부지는 비오톱 1만9967㎡가 포함돼 있어 원래 건물 신축이 허가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비오톱 등급 하향으로 건물 신축이 가능하게 됐고, 그로부터 넉 달 뒤인 지난해 9월 서울시로부터 사업 승인을 얻어냈다. 지난 7월22일 기공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주변 일대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아침에 울창하던 삼림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이화여대가 마련해 열린 주민설명회에 참석한 한 주민은 “기숙사 건축 착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주민들은 형질 변경조차 하기가 어려운데 자연경관지구 안에 5층짜리 거대한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연세대와 광운대는 비오톱 등급이 조정되고 한 달이 지난 2013년 6월, 서울시 제10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기숙사 신축 계획안을 승인받았다. 연세대의 경우 유가공실습장 뒤편 연면적 4만648㎡의 부지에 5층 높이의 기숙사 4개동이 들어설 예정이다. 광운대도 노원구 월계동 500-40번지 일대에 84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상 7층, 연면적 2만630㎡, 총 425실 규모의 기숙사 2개동을 새로 짓는 중이다. 2013년 5월 이전만 해도 모두 비오톱 1등급지로 개발 행위가 불가능했던 곳이다. 학교 인근 개운산 일대의 비오톱 등급이 완화된 고려대 역시 지난 9월2일 기숙사 신축 방침을 발표했다. 건물 6동에 550실, 총 1100명을 수용하는 규모다.
“학교법인 토지라도 그곳 생태는 공공의 것”
시사저널이 2013년 5월 당시 발표된 ‘서울특별시 고시 제2013-136호’ 내용을 전수 분석한 결과, 원래 1등급이었던 467필지 총 1.17㎢의 비오톱 등급이 하향 조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여의도(2.9㎢)의 약 40%에 해당하는 땅의 개발 제한이 일거에 풀린 셈이다. 비오톱 등급이 1등급으로 상향 조정된 곳은 145개 필지 0.41㎢로, 하향 조정된 면적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등급 변경 면적이 넓은 땅을 중심으로 세부 분석을 해보니, 비오톱 등급이 하향 조정된 곳은 상대적으로 대학 캠퍼스 안팎이 많았다. 상향 조정된 곳은 캠퍼스와 다소 거리가 있는 산, 언덕, 임야 지대 등인 경우가 많았다. 즉 대학 측이 개발에 착수하기 수월한 캠퍼스 인근 땅을 중심으로 비오톱 등급이 하향되는 추세가 두드러졌다.
서울시 비오톱 지도는 2000년에 처음 마련됐다. 5년 단위로 서울 전체 지역을 대상으로 재평가가 이뤄진다. 지난 2005년과 2010년 한 차례씩 등급 조정이 있었다. 2010년 조사 결과가 나오고 3년도 지나지 않아 비정기 조사가 시행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 통해 대학 주변 비오톱 등급이 대규모로, 그것도 대학의 개발 사업 추진에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된 과정을 두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대학 측에 개발 허가를 부여하기 위해 ‘짜맞추기 식’ 실태조사가 실시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오랫동안 비오톱 1등급지로 있던 대학가 주변 숲이 어느 순간 대대적으로 등급이 하향 조정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 측과 갈등을 빚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비오톱 등급을 조정한 배경을 명백히 밝히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측은 “기존 조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생태환경조사 용역비가 상당히 적은 수준이기 때문에 (5년 단위의) 전체 조사에 오류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일반 시민들의 경우에도 민원을 통해 등급이 조정되는 경우가 분기당 수십 건꼴로 있다”는 것이다. 일선 대학들이 기숙사 신축 부지와 관련해 비오톱 등급 조정 민원을 자주 제기해왔고, 이에 서울시가 외부 전문 기관에 의뢰한 ‘서울 소재 대학 생태현황 실태조사’ 연구용역 결과를 반영해 오류를 교정했다는 입장이다.
해당 연구용역을 수행한 ‘생태환경연구소’ 측의 오충현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교수는 “비오톱 지역이라 해도 도로·공원·학교 등 도시계획상 개발 당위성이 클 경우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물론 비오톱 1등급 지역에 해당하거나 자연환경 훼손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경우에는 환경 영향성 평가 등을 통해 일부 제한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밝혔다. 이번에 1등급에서 하향 조정된 비오톱의 경우 개발 제한이 필요할 정도로 보전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평가에서 해당 비오톱 지대에 1등급을 부여했던 전문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봉호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는 지난 2000년 처음으로 ‘비오톱 지도’가 제작되었을 때 사업을 총괄한 인물로, 이후 5년 단위의 재평가 작업에도 참여했다. 한 교수는 “조사 당시 여건의 한계로 일부 오류가 포함돼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평가자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같은 비오톱의 등급 판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도 함께 밝혔다. “현장에는 다양한 생태환경 요소가 섞여 있는데 연구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나 연구용역을 수행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보전’보다 ‘개발’을 중시했을 경우, 이것이 등급 판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한 교수는 과거 서울의 일부 대학에서 비오톱 등급 조정 민원을 제기했을 때 녹지 보전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았던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비록 학교법인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곳의 생태는 엄연히 공공의 것이다. 지금 일선 대학들에는 이를 최대한 보존하며 신중히 개발을 해나가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기숙사 신축으로 인해 녹지를 잃게 될 해당 주민 입장에서는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으로 판단된다.” 대학들이 녹지가 갖는 공공성의 가치를 고려해 신중히 개발을 추진하기보다는, 캠퍼스 확장을 통한 사익 추구만을 앞세우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는 것이다.
서울의 도심 녹지 환경은 그리 양호한 편이 아니다.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서울의 녹지 비율은 30.2%로 전국 광역시 중 가장 낮다. 상위 3개 광역시인 울산(69.8%), 대구(61.1%), 대전(58.8%) 등과 비교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다. 이혜진 서울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현재 서울시의 생태 보전 여건은 상당히 열악한 실정이다. 녹지 보전 및 확대의 거점이 돼야 할 비오톱이 여러 다른 가치들에 밀려 보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및 연세대 인근인 서울 대신동의 한 주민은 “서울시와 주요 대학들이 무분별한 개발 사업에 열을 올리면서 주변 녹지를 훼손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 크다. 비오톱 관련 의혹을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박원순 시장의 핵심 사업이라는 이유로 비오톱 등급을 의도적으로 하향 조정했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반응이었다.
지난 7월22일 이화여대 기숙사 기공식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기념 시삽을 하고 있다. ⓒ 이화여대
서울 녹지 비율 30.2%, 전국 대도시 중 꼴찌
치솟는 주거비용으로 고통받는 청년들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있다. 문제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대학의 재산권과 주민의 환경권 등이 충돌하며 지역 갈등으로 번진다는 데 있다. 고려대 인근 주민들은 ‘개운산 사랑 성북구민연합회’라는 단체를 결성해 행동에 나섰다. 서울을 대표하는 대학가인 신촌 일대 주민들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서대문구 소재 주요 대학들 앞에서 연일 항의집회를 이어나가고 있다. 9월17일 집회 현장에서 만난 신촌 지역 주민 임천재씨(43)는 “기숙사가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대학 내 쇼핑몰 건설, 잇따른 기숙사 신축까지 주민들과 충분한 소통 없이 진행되고 있는 점이 문제다. 서울시와 각 대학들이 인근 상권과 주거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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