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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9.15~20 Now we’re all sons of bitches

by 이성근 201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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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세제'에 주식부자들만 4222억 감세혜택 915 오마이뉴스

[국감자료] 소액투자자 54억만 감세혜택... "부자노믹스 철회해야"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은 취임한 이후 '가계소득 증대 방안'에 주력해왔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야 경기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최 장관은 가계소득을 늘리기 위한 '3대 패키지'로 ▲ 근로소득 증대세제 ▲ 기업소득 환류세제 ▲ 배당소득 증대세제를 내놓았다. 하지만 배당소득 증대세제가 실시될 경우 종합소득 상위 1%에게 최대 4222억 원의 감세 혜택이 돌아간다는 분석이 나왔다(2012년 기준). 반면 주식수 1000주 미만, 보유금액 1000만 원 미만의 개미투자자 320만여 명에게 돌아가는 감세혜택은 54억여 원에 불과했다(2013년 기준).

 

최경환 경제팀이 배당소득 증대세제를 내놓은 직후부터 "부자감세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것이 실시된다면 소액주주의 경우 배당소득세가 현행 14%에서 9%로 5%포인트만 낮아지지만, 재벌 총수 등 대주주들의 경우는 38%에서 25%로 13%포인트나 낮아진다.

 

배당소득 상위 1%, 1인당 평균 3억8200만 감세혜택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2년 종합소득 상위 1%는 4만3529명이었다. 이들이 가져가는 배당소득은 6조2046억 원으로 전체 배당소득 신고액(7조5267억 원)의 82.4%를 차지했다. 1인당 평균 1억4254만 원의 배당소득을 챙긴 것이다. 같은 기간 배당소득 신고자는 4만7828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위 1%는 478명인데, 이들이 가져간 배당소득은 총 2조6845억 원이었다. 이는 전체 배당소득의 36%에 해당하는 규모다. 배당소득 상위 1%의 1인당 평균 배당소득도 무려 56억1607만 원에 이르렀다.

 

또한 2012년을 기준으로 배당세액을 공제받은 주식부자들은 2만9799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위 1%는 297명으로 이들의 1인당 평균 종합소득은 100억8670만 원이나 됐다. 하지만 실효세율은 29.7%에 불과했다. 이는 근로소득 상위 100명의 실효세율인 36.3%보다 6.6% 포인트나 낮다. 배당세액 공제로 1인당 평균 7억3412만 원의 세금을 감면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경환 장관이 추진하는 배당소득 증대세제가 실시될 경우 종합소득 상위 1%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전순옥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세청 자료('종합소득, 배당소득 상위 1% 현황')를 바탕으로 상위 1%의 감세혜택을 분석한 결과 최대 4222억 원의 세금을 감면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종합소득 상위 1%는 배당세액공제를 제외하면 약 34.3%의 소득세(주민세 포함)를 부담하고 있다. 그런데 최경환 경제팀의 정책대로 기업의 고배당이 확대되어 상위 1%의 배당소득 전액이 25%(주민세 포함시 27.5%)의 분리과세를 적용받는다면 이들은 6.8%(34.3%-27.5%)포인트만큼 감세혜택을 받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위 1%는 1인당 평균 1억4254만 원의 배당수익을 올렸다. 배당소득 증대세제가 실시될 경우 1인당 평균 약 970만 원(1억4254만 원×0.068)의 감세혜택을 받는다. 결국 상위 1%인 4만3529명이 받는 감세혜택 규모는 총 4222억 원(970만 원×4만3529명)에 이른다. 특히 배당소득 상위 1%(478명)의 1인당 평균 배당소득이 56억1607만 원이라는 점을 헤아리면 이들은 1인당 평균 약 3억8200만 원(56억1607만 원×0.068)의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다.

 

개미투자자 1인당 1701원 감세혜택 불과

반면 주식수 1000주 미만, 보유금액 1000만 원의 소액투자자(일명 '개미투자자')에게 돌아가는 감세혜택은 아주 미미했다. 한국거래소에서 제출한 '2013년 개인의 보유규모별 주식분포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3년 현재 개인투자자는 502만 명이고, 주식수 1000주 미만, 보유금액 1000만 원 미만인 개미투자자는 320만 명이다. 개미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 총액은 7조6130억 원으로 이는 시가 총액 309조 원의 2.5%에 해당하는 규모다.

 

최근 3년 한국거래소(KRX) 평균 배당수익률 1.3%를 적용할 경우, 개미투자자 320만 명이 얻게 될 배당소득은 약 990억 원(7조6130억 원×0.013)이다. 결국 개미투자자 한 명이 가져갈 수 있는 배당수익은 평균 약 3만928원에 불과하다.

 

최경환 경제팀의 정책대로 배당소득 원천징수세가 14%에서 9%로 인하되면 개미투자자들은 5%포인트(주민세 포함시 5.5%)의 감세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1인당 평균 1701원(3만928원×0.055)이다. 결국 개미투자자 320만 명에게 돌아가는 감세혜택 규모는 54억4320만 원(320만명×1701원)에 그친다. 이는 배당소득 증대세제가 실시될 경우 소득 상위 1%에게만 큰 규모의 감세혜택이 돌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대기업들이 사내유보금을 임금 인상보다는 고배당에 투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배당소득 증대세제는 주식을 많이 가진 고소득층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

 

전순옥 의원은 "상위 1% 부자에게 3억 원이 넘는 감세선물을 안겨주면서 전체의 3분의 2에 이르는 개미투자자에게 돌아가는 감세는 담배값 인상분 2000원도 안된다"라며 "이러한데 어떻게 배당소득에 감세를 추진하는 것이 가계소득증대정책이냐?"라고 지적했다. 전 의원은 "부자에게는 산타크로스, 서민에게는 스쿠루지 아니냐?"라면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부자의 금고를 살찌우는 최경환 장관의 '부자노믹스'를 즉각 철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경환 장관은 최근 '배당소득 증대세제가 재벌만 혜택받는다'는 일부 지적에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만약 그분들(재벌 총수) 소득을 100억 원 올리려면 몇 조원에 해당하는 배당을 늘려야 한다"라며 "그 경우 그분들한테는 100억 원이 돌아가지만 나머지 경제에 몇 조원이 풀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최 장관은 "2008년 이후 법인세를 25%에서 22%로 내렸지만 효과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다"라며 "기업의 소득을 가계 등으로 환류시키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투자, 임금, 배당을 통해 기업의 돈이 가계나 민간 부문에 흘러갈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라고 강조했다

 

독일 간 간호사들은 왜 '박정희 신화'에 도전했나

[프레시안 books] 재독한국여성모임 <독일 이주 여성의 삶, 그 현대사의 기록>정용숙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후연구원 2014.09.05

 

독일은 현재 유럽 최대의 이민국이다. 8000만 인구 중 1600만 명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로 이주했거나 이주자인 부모 또는 조부모를 두고 있으니, 5명 중 1명꼴로 이른바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는 이야기다. 제국주의 시절 해외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며 인종 간 교류를 일찍 시작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단일 인종 국가에 속했다. 그런 독일이 겨우 반세기 만에 이민국으로 변신한 계기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외국인 노동자 고용이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에 건너온 외국인 노동자는 약 700만 명으로, 대부분 유럽인(옛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거나 유럽에서 가까운 나라(터키, 모로코, 튀니지)에서 왔다. 간호사와 광부를 합쳐 2만 명 정도인 한인은 독일연방공화국 이민사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소수다. 그런 이유로 재독 한인들의 이주, 노동, 삶의 역사는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관심 갖는 이가 오래도록 없었다.

 

간호사와 광부들의 독일행이 시작될 때부터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산업 역군'이라는 애국적 이미지를 씌웠다. 누구도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이들을 둘러싼 뜬소문들이 생겨나 퍼져나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차관 담보설'이다. 가난한 대한민국이 서독 정부로부터 상업 차관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급 보증 능력이 없어 쩔쩔매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하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내는 천신만고 끝에 성사시켰다는 눈물겨운 영웅담이다. 이 그럴듯한 이야기는 간호사와 광부들이 이국땅에서 겪어 낸 산전수전 고생담과 만나 상승효과를 일으켰으니, 한편으로는 이들을 '한국 근대화의 숨은 공로자 겸 희생자' 반열에 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독일에 보내 '조국 근대화의 기반을 닦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 독재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조사해 달라는 청원을 재독 한인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넣었고, 해당 위원회는 "광부·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로부터 상업 차관을 성사시켰다는 신청인 및 세간의 주장과 인식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독일에서 들어온 상업 차관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일종으로, 독일의 헤르메스(Hermes) 수출보험공사가 보증을 섰고 독일부흥금융공사(KfW)가 자금을 공여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것이 2008년의 일이지만 차관 담보설이 여전히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개발 독재 정당화하는 오래된 허구, 차관 담보설

간호사와 광부들이 독일로 간 것은 1960년대 당시 독일과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 편에서는 농업 국가로서 남아도는 유휴 인력을 흡수할 산업 시설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다면 국내 실업률 감소, 외화 획득, 인력 해외 진출을 통한 관련 산업 수요 창출과 새로운 고용 파생까지 일석삼조를 노릴 좋은 기회였다. 독일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전후 신속한 경제 재건 결과 전반적인 노동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사양 산업인 탄광업은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지 않고 중장기적 구조조정을 버티기 위해 단기간만 쓸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보건 의료 부문은 성장 산업에 속했다. 1960년대는 독일 사회복지 국가의 확대기로서, 의료·요양·간병·휴양 서비스가 팽창하면서 보건 의료 산업도 급성장했다.

 

인력 수요도 따라서 급증하는데, 정작 공급은 사회보장과 노동 복지 확대로 법정 노동시간이 줄면서 오히려 감소하는 형편이었다. 독일 병원의 간호사란 수도원 수녀들의 빈민 구제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미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주사·투약 등 전문 간호 업무뿐 아니라 간병 및 환자 관리에 필요한 온갖 허드렛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하층계급 여성들의 육체노동 직업이었다.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이 장기간 이어져 조건 좋은 일자리가 널려 있는 상황에서 간호사는 기피 직업이었다. 그런데 독일과 노동자 송출 협약을 맺은 나라들은 자체적으로도 간호 인력이 부족하여 간호사를 보내려 하지 않았으므로 독일 정부는 한국, 인도, 필리핀, 중국 등지로 눈을 돌렸다. 하필 이 지역이었던 이유는 당시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소련의 제3세계 지원에 맞서 아시아 지역에 반공 연대를 만든다는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였고, 특히 한국과 관련하여 서독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는 동독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인 간호사들이 독일로 가게 된 역사적·국제정치적 맥락이다. 그런데 정작 간호사 본인들은 왜 독일로 떠나기로 결심했는가?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사 구술 사료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파독 한인 여성 간호 노동자들의 증언 자료'를 보면 이들은 스스로 원해서 독일에 갔고 자신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한국 간호사들의 독일행은 개인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지, 국가적 필요에 부응하고자 하는 '공적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 개인적 동기에 대해서조차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지녀 온 오해는 '돈 벌러 갔다'는 것이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독일로 간 한인 간호 여성>(산과글, 2012년 펴냄)의 저자인 나혜심(성균관대학교 인문학술원 연구교수)에 의하면 이들의 동기는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제적 동기만을 확대 해석해 경제 개발 시기 한국의 '불쌍한 큰누이 신드롬'에 간호 여성들을 짜 맞추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선 '국가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당시 독일행을 택한 젊은 여성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바라본 방식이 아니었다. 물론 '살림 밑천'이라는 관습적 의무에 부응하고 가족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간 여성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털어놓는 여러 동기 중 일부였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책 <독일 이주 여성의 삶, 그 현대사의 기록>(당대, 2014년 6월 펴냄)에서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독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살아온 삶, 독일행을 결심한 동기, 그 선택의 결과 독일에서 만난 삶의 과정에 대해 당사자들이 직접 한 꼭지씩 써 내려간 이 책에는 연줄과 뒷돈으로 움직이는 한국 사회에 실망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떠난 여성, 딸들을 모자라게 대우하는 불평등으로부터 탈출, 돈을 벌어 대학 공부를 하겠다는 학구열, 선진국에 대한 선망과 동경 등 다양한 비경제적이고도 개인적인 욕망으로 움직인 젊은 여성들이 나온다. 지금처럼 정보 교환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지금으로 치면 태양계 안의 다른 행성 정도로 낯선 곳이었을, 당시 비행기를 타고도 꼬박 이틀이 걸리던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개척하려는 적극적 의지에서 독일행을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개척하고자 독일로 떠난 여성들

이 책을 기획하고 글을 쓴 이들은 재독한국여성모임 회원들이다. 이 모임은 1977∼1978년 '간호사 송환 반대 서명' 운동을 계기로 꾸려져 40돌을 앞두고 있다. 1973년 석유 파동을 시작으로 서구 경제 전체가 장기 불황에 빠져들자 독일 정부는 외국인 간호사를 내보내려 했고 1977년 17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체류 연장을 거부당해 강제 송환되었다. 한인 간호사들은 분노했고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1만 명의 서명을 얻으면 연방의회 안건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들의 요구는 5년 이상 근무한 간호사는 3년짜리 계약에 얽매이지 않는 장기 체류 허가를 주고 7∼8년 일한 후에는 국적 취득 자격을 달라는 것이었다. 간호사들의 태도는 당당했다. "우리는 필요할 때 데려왔다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올 때는 당신들이 불러서 왔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것이고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겠다." 결국 법안이 통과되어 장기 체류 허가와 영주권 취득이 가능해졌다. (관련 기사 : 독일로 간 '아몬드 눈빛의 천사들', 지금 그들은…)

 

한데 뭉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경험은 성취감과 자부심을 주었고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했다. 1978년 재독한국여성모임을 결성하고 함께 공부하며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되고 독일로 오기 전부터 막연하게 느껴 온 여성 의식을 키웠으며 자신들이 독일로 오게 된 배경인 한국 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1970∼1980년대 남한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고, 독일 내 이주민 단체로서 독일 사회의 현안에도 발언하며 1990년대에는 통독 후 극심해진 신나치 인종주의 반대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사안에 따라 독일 내 시민단체(NGO)와 다른 이주민 단체와도 연대 활동을 벌였는데, 1990년대 말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희생자 보상 및 명예 회복을 위해 베를린 일본여성회와 연대하고 있다.

 

활동 과정의 우여곡절이나 개인적 각성 과정, 재독한국여성모임이 해온 일들에 대해서도 저자들은 각자의 느낌, 생각, 평가를 가감 없이 털어놓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의 출발과 핵심은 '여성 이주민으로서 정체성 찾기'였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곳에 가서야 비로소 정체성을 돌아보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간호사들이 이국땅에서 그토록 부여잡고 지키려 애썼던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은 실체가 없었다. 왜냐하면 고국의 사회, 문화, 정서는 계속 변화하지만 이주민들의 고국과 관련된 정서는 그들이 떠난 시점에서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보니 그동안 한국 사회는 급격히 변해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한국은 '골동품상'에나 가야 볼 수 있었다. 내가 자란 땅에서 내가 고립된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은 타국에 살면서 이방인임을 실감하는 것보다 더 나를 혼란시켰다." (58쪽) 이 여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 아니면 독일로 나누는 사고에서 벗어나 어디에 머물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삶 자체가 정체성임을 깨달으며 사슬에서 풀려난 듯 홀가분한 자유로움과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독일병원 취업을 주선했던 독일신부와 파독 간호사들(1962) | 서독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간호사들(1966)>  : 사진출처: 안전행정부 블로그

 

간호원 및 광부 독일파견 ;국가기록원

 

발생배경

광부 파견은 한·독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당시 서독은 전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근무여건이 열악한 3D 업종의 하나인 광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서독은 모자라는 3D 업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가난한 한국에 손을 벌렸고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내용

한국 정부는 1966년에 서독과 특별고용계약을 맺고 간호사로 3천명, 탄광광부로 3천명을 파견하였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원이 7,932명, 간호사가 1만226명이었다고 한다. 광부들의 노동계약은 매 3년마다 교체되었다. 이미 다른 나라 노동자들을 채용하여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야기된 것을 경험한 독일은 독일정착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한국 동포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기한부 노동인력수입계약’을 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독일은 '반정착적 정책'을 애초부터 실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몇몇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3천명의 광부는 계약 원칙대로 3년마다 교체되었다. 즉 3년간의 노동을 마친 동포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만한 수의 광부가 새로이 한국에서 오곤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의 실업상태가 아주 심할 때라 3년 노동을 끝마친 동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보다는 제3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밖에 소수의 동포들이 3년이상 더 계속 체류하였는데 그들은 독일여성과 결혼한 사람들, 광산에서 통역이나 사무원으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3년 노동을 끝내고 그간에 저축한 자기 재정으로 유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간호사들의 형편은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들도 광부노동계약과 같이 3년 기한의 계약으로 되어 있었으나 고용자 측인 독일병원들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반대한 것이다. 즉 한국간호사들은 3년간의 생활을 통해 언어와 병원생활에 익숙하게 됨으로써 병원측에서 기대한 목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국 간호사들과 계약을 연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독일체류는 사실상 무기한으로 허용된 셈이 되었다. 이로써 독일의 외국인 노동력 수입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즉 외국인 노동자의 장기간취업과 동시에 장기간 독일체류라는 원치 않는 현실에 직면하며 스스로의 외국인정책에 일종의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간호사 또는 간호보조원들은 고용자, 병원 또는 양로원이 원한다면 무기한으로 독일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간호사나 간호보조원과 결혼한 광부들은 그들의 부인이 체류하는 동안은 역시 독일에 계속 체류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독일에 장기체류가 가능하게 됨에 따라 독일국적을 얻는 동포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이 나라에 정착하여 실상에 있어 '이민'의 현실을 이루게 되었다

 

역사적의의

파독 광원과 간호사의 수입은 19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종자돈’역할을 했다. 광원과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원은 모두 7932명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탄광에서 일을 하고 연금과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70~90%를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GNP의 2%에 이르렀다. 또한 서독 정부는 이들이 제공할 3년 치 노동력과 그에 따라 확보하게 될 노임을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naver 지식인 IN

독일파견 광부와 간호사 (내공80) rkq**** 질문 17건 질문마감률 66.7% 2013 2.14

re: 독일파견 광부와 간호사 (내공80) 배찌(cc514)

 

1963년에 우리나라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습니다. 말이 파견이지, 오늘날 동남아인들이 우리나라에 일하러 오는 수준이었지요. 당시 우리나라는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발전을 위한 돈을 빌리기 위해 서구 선진국에 구걸(?)을 했었는데요. 우리의 최고 우방인 미국에게 손을 벌렸지만, 당시 미 대통령인 케네디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박대통령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분단국가였던 서독 대통령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는데요. 그 대가로 독일 사람들이 기피했던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기로 합니다.

 

광부는 엄청나게 힘들고 위험하며, 건강에도 큰 무리가 가는 일이었고, 간호사 역시, 시체를 닦거나, 뒤치다꺼리만 하는 가장 하층의 일만 하는 일이었지만, 우리나라보다 돈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우리나라 월급에 약 7배) 그 일도 경쟁률이 10:1이나 되었습니다.

 

결국 높은 경쟁률을 뚫고, 광부 7936명, 간호사 11057명이 뽑혀 독일에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국민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들 월급의 80%~90%를 우리나라로 송금하여, 우리나라 외화벌이에 큰 이익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들이 독일에서 일한 양은 독일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악바리처럼 열심히 했었다고 합니다,

 

그후 1964년 박대통령 내외분이 독일에 방문했는데요. 그곳에서 파견된 광부,간호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불렀고, 박대통령 내외분에게 아버지.어머니라 부르며 펑펑울었다 합니다. 그 모습을 본 박대통령은"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나라가 못살아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외교관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독일인들의 근면성을 배우고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큰 힘을 보태주십시오.. 지금은 못살아도 우리 후손들에게 부강한 나라를 물려줍시다" 라며 그 역시 울먹였다 합니다.

그 모습을 본 독일총리는 한국에 감탄하여 많은 돈을 빌려주었다 하죠..

 

벌써 50년전의 일입니다.(이하 생략)

 

 

 

교사들 "노란 리본 금지? 노란 목걸이·팔찌 차겠다"917 오마이뉴스

교육부 지침에 반발 확산... 교사들 "교육부 지침 무시할 것"

 

▲ 지난 5월 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세월호 참사 대응 각계 원탁회의'가 열리는 가운데 참가자들이 착용할 '노란 리본'이 놓여 있다. ⓒ 권우성

"교육부가 노란 리본을 금지한다고요? 노란 목걸이와 팔찌 등 풀세트를 차고 학교에 갈 겁니다."

 

17일 오후 수화기 너머 광주의 한 중학교 교사 박춘애씨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박씨는 "동료 교사 중에서 교육부가 노란 리본을 달지 말라고 하니까, 달지 않겠다고 하는 교사는 없었다"면서 "교사들은 교육부 지침을 무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교육부가 이렇게 어이없는 공문을 내려 보낼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노란 리본 달기 등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세월호 참사 관련 집중실천활동을 막는 지침을 내린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교육부가 세월호 사고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러한 지침을 내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 16일 시도교육청에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가치판단이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면서 학교 앞 1인 시위, 세월호 관련 공동수업, 중식 단식, 리본 달기 등 4가지 사항을 사실상 금지하겠다는 지침을 내려 보냈다. 리본 달기를 두고 교육부는 '교육활동과 무관하고 정치적 활동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학교 내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수업에 대해서는 사회적 현안에 대한 학생의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경우 실시하는 계기교육 지침에 따라, 학교장의 승인을 거치도록 했다. 또한 시도교육청으로 하여금 공동수업 실시현황을 파악해 교육부에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교육부는 중식 단식에 대해서도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행위에 대해 불허하고 엄중단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학교 앞 1인 시위의 경우, 근무시간이나 학교 내 1인 시위는 불법이라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리본 달기 금지령에 교사 분노 확산"

 

▲ 바람에 휘날리는 노란리본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침몰희생자들의 추모하는 조형물 <못다핀 꽃>에 묶인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이희훈

 

많은 교사들은 교육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수업시간에 종종 학생들과 세월호 사고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는 박춘애씨는 "세월호 사고 이후 세월호는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다, 수업 도중 학생들이 수사권과 기소권에 대해 질문하면 교사로서 설명을 해준다"면서 "이런 수업이 학교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계기 수업인가, 교육부의 지침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씨는 "리본 달기 금지령은 교사들의 분노를 확산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부의 어이없는 지침에, 교사들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세월호 사고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동료 교사들도 이번 공문에 화를 내고 있다, 교사들의 분노가 언제 폭발할 지 모른다"고 말했다.

 

경기 오산시 운산초등학교 교사인 박효진씨는 "교육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발맞춰 정치적으로 세월호 사고 진상규명 목소리를 탄압하기 위해 지침을 내려 보낸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씨는 노란 리본을 달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교사로서 세월호 사고를 잊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리본을 달고 점심을 굶고 있다"면서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된다면서 리본 달기 금지령을 내린 것은 교육부가 오히려 정치적으로 노란 리본을 이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교육부는 전교조 교사가 학생들을 만나 세월호 사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서 "교사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수업이 아니라도 학생들과 의견을 나눌 기회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애도의 가장 큰 부분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만, 몇 달 동안 진상규명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면서 "세월호 사고를 잊지 않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과 연대하겠다"고 전했다.

 

"교사들 교육부 지침 따르지 않을 것"

 

▲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정훈 전교조 위원장이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구속영장청구 규탄 및 전교조 탄압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사전구속영장 청구를 비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기도 부천시의 한 중학교 교사인 이아무개씨는 세월호 사고 이후, 매달 16일 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세월호 사고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이씨는 "최근 학생들과 EBS <지식채널e> 프로그램이나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가 제작한 동영상을 본다"면서 "세월호 사고가 왜 발생했고, 유가족이 뭘 요구하는지 등의 내용에 대해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사고 이후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는 교육에 대한 반성이 컸다"면서 "'미성숙한 학생' 운운하는 교육부는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교육부는 이런 지침을 통해 교육 현장 혼란을 강조하면서 세월호 사고 진상규명을 흐지부지하게 만들려고 하겠지만, 교사들은 교육부 지침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교조는 이미 실천활동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교조는 16일에 낸 성명에서 "생명의 존엄과 안전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천운동을 계속 전개할 것"이라면서 "참사의 아픔을 잊지 않고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운동도 지속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립성향 교원단체인 '좋은교사운동'도 이날 성명을 내고 "(교육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발적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마저 금지할 만큼 정치적인 고려를 앞세우고 있다", "교육부의 이번 공문은 세월호 참사로 슬퍼하고 있는 국민들과 교사들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면서 교육부의 공문 철회를 요구했다.

 

이인호 KBS 이사장 "내 역사관 검증, 결코 용납 못해"918 한국

야권 '사상 검증' 사실상 거부... 이사회 장기 파행 가능성

 

이인호 KBS 이사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인호 KBS 이사장이 야권 추천 이사들이 요구한 역사관 등에 대한 해명을 ‘사상 검증’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답변을 거부해 이사회의 파행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야권 이사들은 이 이사장에게 역사관 등에 대한 공개 답변을 요구하며 17일 열린 임시이사회에 불참했다. 김주언 이규환 조준상 최영묵 등 야권 이사 4인은 앞서 12일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 출신인 이 이사장에게 친일문제 등 근현대사와 KBS의 독립성, KBS 이사회 운영 등과 관련한 11개항을 질의하고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공개 요구했다. 이들은 또 이 이사장이 17일 이사회 전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야권 이사들에 따르면 이 이사장은 15일 보낸 답변서에서 “국민의 방송은 정파적 이해관계에 구애 받지 않고 공공성과 공정성을 극대화하는 일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면서도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에서 동료들 간에 서면으로 된 집단 질의를 통해 역사관이나 가치관을 검증하려 한다는 것은 형식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절대로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야권 이사들이 요구한 11개 질문에 대한 구체적 답변은 하지 않은 채 17일 이사회에서 구두로 답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야권 이사들은 “공개 질의는 신연좌제도 아니고 사상 검증도 아니다”며 “이사장으로 호선 되는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고 국민이 우려와 의문을 갖고 있어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이날 2차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이들은 “이 이사장이 공개방송을 통해서라도 공개적,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이사장은 이날 취임 후 첫 이사회에서 “내가 왜곡된 역사관을 가졌다는 건 오해”라며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문제도 있었지만 공도 많은 분들”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방송법 개정에 따른 이사회 회의 공개건 등은 야당 이사들이 참여하면 논의하기로 했다. 이 이사장은 5일 야당 이사들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임시 이사회에서 여당 추천 이사들에 의해 호선됐다

 

세월호 유족들, 朴대통령 '세월호 본색'에 격앙 916프레시안

"무한책임 면제 됐다고 착각하나?"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대해 강한 비판과 유감의 입장을 밝혔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면담 요청을 사실상 거부하면서 '순수한 유가족', '외부 세력'을 운운한 것(☞관련기사 보기 : 朴대통령, '세월호 발톱' 드러냈다)에 대한 강한 실망감의 표출이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가족대책위)는 16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과 국회는 우리 유가족들의 진정한 바람을 아직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족대책위는 "진상조사위에 특별검사를 두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실질적으로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내어놓고 유가족과 국민들을 설득해 달라고 무수히 요청해 왔으나, 여당은 물론 대통령까지 이런 바람은 외면한 채 전혀 설득력이 없는 2차 야합안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박 대통령이 여야 원내대표 간의 2차 합의안을 "마지막 결단"으로 규정한 데 대한 지적이다.

 

가족대책위는 그러면서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이 세비를 반납하라는 대통령의 말씀에서 대통령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하시는가? 유가족, 국민들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린 대통령은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들은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던 대통령의 말씀을 믿고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의 답을 기다린 지 26일째"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들은 "2차 야합안이 마지막 결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 동안 진행해 온 국회와 가족대책위 사이의 논의를 무시하고 '2차 합의안으로 끝을 내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대통령께서 특정 정당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면서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의 편만 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朴 "세월호法 통과시키고 민생 돌아봐야" vs 유가족 "민생 핵심은 안전과 생명"

박 대통령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여야의 합의안을 하루속히 통과시키고 국민 전체의 민생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한 데 대해 가족대책위는 "진정 국민 전체의 민생을 챙기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제대로 된 특별법, 유가족과 국민들의 뜻을 온전히 반영한 특별법 제정에 힘을 보태시라. 민생의 핵심은 안전과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가족대책위는 "나와 내 가족의 목숨도 지켜주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도대체 어느 국민이 행복할 수 있겠나"라며 "성역 없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안전한 사회 건설, 이를 위한 유례 없는 특별법의 제정만이 희생자들의 뜻을 헛되이하지 않고 우리 유가족들의 여한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가족대책위는 "저희는 지난 세 차례 여당과의 면담을 통해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수 없는 이유가 청와대에 대한 공세가 두렵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은 바 있다"며 "대통령과 여당은 거짓 이유를 앞세워 진상규명을 회피하지 말고 국민 앞에 솔직해지시기 바란다"고 꼬집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순수한 유가족', '외부 세력'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데 대해 대책위는 "사법체계, 외부세력 운운하면서 우리 유가족과 국민들의 정당한 외침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국정조사시 자료도 거의 제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 민간인과 말단 공무원 몇몇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 및 결과를 내세우며 마치 제대로 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해 선전하고 있다. 결국 '국가 개조'는 허울 좋은 구호에 불과했던 것인가?"라고 따져물었다.

   

이들은 "오늘 정말 오랜만에 내놓은 말씀 중에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10명의 실종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며 "겨우 4개월여 만에 '무한한 책임'이 면제되었다고 착각하시는 것 아니냐"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16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특별법 관련 국무회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진상규명 이뤄지기 전에는 배상·보상 문제 논의 응할 수 없어"

 한편 이들은 박 대통령이 각료들에게 "하루빨리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유가족 피해보상 처리를 위한 논의에 시급히 나서 달라"고 지시한 데 대해서도 반감을 나타냈다. 이들은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과 성역 없는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배·보상 논의에 응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힌다"고 천명했다.  이들은 "특별법 논의가 제자리이고 진상규명은 제대로 출발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과 대통령이 거듭 배·보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돈으로 세월호 참사를 덮어버리고 우리 유가족·피해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라고 의심어린 태도를 보였다.

 

朴 대통령, "자유총연맹 나라 위한 일에 지속적으로 나서달라" 917경향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대표적인 관변 보수단체로 알려진 한국자유총연맹에 “앞으로도 나라를 위한 일에 지속적으로 나서달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서울 장충동 자유총연맹 야외강당에서 열린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영상 축하메시지를 보내 “사회 곳곳의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혁신을 이루는 데에도 적극 동참해주시기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은 메시지에서 “지난 60년간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면서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오신 150만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 “다음 세대를 위한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일에도 앞장서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자유총연맹은 반공 안보활동 중심의 체제 수호운동으로 출발해서 시대 변화에 맞춰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에 기여하는 국민 운동단체로 활발히 활동해 왔다”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길러주고 함께 활동해 나가는 젊고 역동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어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상] 천안함 TOD 반파직후 ‘미상의 점(물체)’ 존재 확인 917미디어오늘

동영상 입수, 함미-함수 사이에 있다 조류 거슬러 올라가…사고와 관련성 주목

천안함이 두동강 난 이후 함수와 함미 사이에 정체불명의 ‘제3의 점(물체)’이 TOD(열상감시장치) 화면상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천안함이 반파된 직후 촬영된 TOD 동영상

 

 

 

이에 따라 이 물체의 정체가 천안함에서 떨어져 나온 부품이나 장비의 일종인지, 천안함과 무관한 다른 무엇이었는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안함 TOD 동영상은 국방부가 당시 사고직후 영상은 없다고 했다가 뒤늦게 존재사실이 밝혀지는 등 공개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다. 이 영상은 천안함 국정조사특위 위원과 일부 언론사, 검찰, 법정 등에 제출됐으나 일반에 전면적으로 공개한 적은 없었다.

 

TOD 상에 등장한 이 미상의 점은 조류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면 한동안 함수 주변에 남아있다가 화면상에서 사라졌다. 이 물체의 실체에 대해 당시 TOD를 운용하던 초병은 모른다고 진술했다.

 

16일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천안함 사고 전후로 백령도 초소에서 촬영된 TOD 동영상을 보면, 백령도 연화리 서방 2.5km 지점(추정)에서 TOD에 적힌 시각으로 2010년 3월 26일 21시22분40초부터 천안함이 두동강 난 장면이 등장한다. TOD시각은 실제시각 보다 1분40초 늦다고 국방부가 발표했다.

 

이 영상에는 왼쪽에 함미가 보이다 곧 완전히 침몰(21시23분40초)하고, 오른쪽에는 함수가 떠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함수와 함미 사이에 작은 ‘검은 점’(물체)이 수면 위로 보인다. 이 TOD의 경우 열이 감지되면 검은 색으로 나타난다. 함수와 함미가 모두 좌측으로 조류에 떠내려가고 있는데도 유독 이 물체는 함수 쪽으로 조류를 거슬러 이동하는가 하면, 함수가 한참 멀어져도 조류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떠 있다.

 

특히 이 물체가 TOD 시각 21시23분23초쯤부터 함수쪽 방향으로 가까이 ‘이동’하면서 함수는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해 약 3분 뒤인 21시25분53초쯤엔 180도 돌아간 것으로 영상에 잡힌다. 21시26분대부터는 함수가 계속 화면의 왼쪽으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데 반해 이 물체는 조류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 비슷한 자리에 머물러있다. 이에 따라 이 물체와 함수는 계속 멀어지는 것이 영상에 나타난다. 이 물체는 TOD 시각으로 21시31분 정도까지 화면상에 보이다 사라진다.

이와 관련해 당시 TOD 동영상 촬영을 했던 백령도 초병 이재홍씨(당시 일병)는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유남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에 대한 천안함 명예훼손 공판에 출석해 이 검은 점(물체)의 실체에 대해 “당시엔 몰랐다”며 “지금 처음 봤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영상을 보면,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초병이 멀어져가고 있는 검은 점(물체)을 계속 화면에 넣기 위해 초점을 이동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과거 천안함에서 떨어져나간 부유물 또는 부속품의 일부라고 밝힌 적이 있다.

 

신상철 대표는 16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화면을 보면, 조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흐르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함수가 떠내려가는데, 미상의 점(물체)은 그 반대로 이동하는 것이 발견된다”며 “자세히 보면 그 점이 함수 뒤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함수가 시계방향으로 갑자기 돌아가는 모습도 잡힌다”고 분석했다.  신 대표는 “그 점과 관련성이 있는 무언가가 함수와 물리적 접촉이 있었던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며 “혹시라도 이것이 천안함을 반파시킨 잠수함의 일부가 드러난 영상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TOD 첫도착한 고속정 2척 왜 함수를 지나쳤나 919미디어오늘

[동영상 분석-2] 가장 먼저 도착 3척중 1척만 근접…“이해 안 돼” VS “구조지원 역할분담”

 

천안함 사고직후 현장에 가장먼저 도착한 해군 고속정 참수리호 3척 중 2척이 침몰해가는 함수를 그냥 지나쳐 간 모습이 TOD(열상감시장치) 동영상에 잡힌 것으로 확인됐다.

 

천안함 사고직후 출동한 해군 고속정 한 척이 함수를 지나치는 모습. 사진=TOD 동영상 캡처

 

천안함 생존장병 58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57명은 해군 고속정이 아닌 해경 501함과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되는 등 현장에 가장 빨리 온 고속정은 실질적인 구조를 하지 못했다. 당시 군은 파도가 높기 때문에 고속정을 통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문제는 고속정 3척 중 2척은 천안함 함수 부근에 도착해놓고도 왜 그냥 함수를 지나쳤는지에 있다.

 

19일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천안함 사고직후 TOD 동영상(21시59분까지의 영상)을 보면, TOD시각으로 2010년 3월 26일 21시56분3초에 함수가 떠있는 왼편으로 고속정 1척이 등장한다. 이 고속정은 ‘천안함 백서’에 따르면 고속정 제235편대의 ‘참수리 322’로 보인다. 이 참수리호가 천안함 함수 40~50m 지점까지 근접한 상태에서 정지했다. 뒤이어 또다른 고속정 참수리호 한 척이 등장해 TOD 시각으로 21시56분28초부터 영상에 잡힌다. 그러다 이 두 번째 참수리호는 함수 옆을 그냥 지나쳐 21시57분12초에 TOD 화면에서 사라진다.

 

세 번째 고속정 참수리호는 21시57분18초에 화면 왼쪽에서 등장했다가 마찬가지로 함수 옆을 지나쳐 21시58분8초에 TOD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함수 왼편(화면상) 근접거리에 있던 참수리 322호로 추정 첫 번째 고속정은 21시57분44초쯤부터 우측으로 90도로 방향을 돌렸다가 세 번째 참수리호가 사라지자 함수 뒤쪽(화면상)으로 돌아들어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다 21시59분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는 상태에서 영상이 종료됐다.

 

국방부가 펴낸 천안함 백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제2함대사령부의 출동 지시를 받은 고속정 제235편대(참수리-322, 339, 359)와 제233편대(참수리-323, 352)는 즉시 출항해 21시58분과 22:10에 각각 현장에 도착했다”며 “참수리-322정에서는 천안함 함수 부분을 3인치 홋줄로 묶었으며 천안함 작전관이 22:20 고속정의 인명구조 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참수리-322정으로 뛰어넘던 중 바다로 추락해 참수리-322정에 의해 구조됐다”고 기술했다.

     

천안함 백서는 “이에 고속정에 의한 인명구조가 제한된다고 판단하여 해양경찰로 하여금 인명구조를 하도록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참수리 322과 함께 가장 먼저 투입된 참수리 339와 359의 활동 내역은 기재돼 있지 않다.  이를 두고 천안함 민군합조단 민간위원 출신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19일 오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천안함을 구조하러 온 고속정이라고 보기에는 함수를 두고 그냥 지나친 것이 좀 이상하다”며 “더구나 속도도 줄이지 않고 지나간 것이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뭔가 다른 일을 하려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해석했다.

 

신 대표의 변호인인 이강훈 변호사는 이날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더 많은 정보가 없으면 저 장면 만으로는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해군2함대사령부 정훈공보실장을 했던 김태호 국방부 대변인실 총괄장교(중령)는 화면에 나오지 않았을 뿐 역할 분담을 통해 정상적인 구조임무를 벌였다고 밝혔다.

 

김태호 중령은 1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아무리 참수리호라 해도 500톤이 넘는 큰 선박이며 흘수가 깊은 군함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침수중인 함수에 가까이 갔다가는 되레 부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애초부터 군함 자체가 구조를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3척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너울이 생기는 등 구조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중령은 “침수위험을 고려해 다른 형태의 지원을 위해 배 근처에 가는 경우도 있고, 먼거리에서 유실돼 나오는 사람을 구하는 등의 역할 분담을 한 것”이라며 “구조작전의 위치를 배정받기 위해 멀리 떨어진 것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상의 점’ 또는 다른 임무수행 가능성에 대해 김 중령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며 “내가 (의혹을 제기한 신상철 대표 등을) 고발한 당사자로서 당시 구조자들의 모든 임무와 모든 배의 상태를 다 확인했다. 제2의 구조목표를 세워놓았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반박했다.

 

국방부가 펴낸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서의 함수 구조도. 사진=천안함 백서

 

 

퇴로 끊고 투항 요구”…여권서도 ‘대통령이 걸림돌’ 불만918한겨레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당 지도부가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서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동안 김무성 대표와 이완구 원내대표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박근혜 대통령의 16일 국무회의 강경 발언을 두고 여권 내부에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회 정상화를 위해선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 재협상을 통해 해법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인데, 대통령이 갑작스레 나서 협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향후 여당의 협상 여지를 틀어막고 교착 정국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날 청와대 회동에서 법안 처리 ‘지침’을 받은 새누리당 지도부는 17일 일제히 박 대통령의 강경 기조에 보조를 맞추며 야당 압박에 나섰다. 하지만 당내 비주류 의원들 사이에선 “박 대통령이 대치 정국의 걸림돌로 등장했다”는 불만과 비난이 터져 나왔다. 공개적인 포문은 비주류 맏형 격인 이재오 의원이 열었다. 이 의원은 이날 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출구를 열어주는 정치를 해야지, 출구를 있는 대로 탁탁 틀어막아 버리면 결국 그 책임은 정부·여당에 돌아간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협상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와 서로 간의 양보를 통해 하나의 결실을 이뤄내는 것인데, 청와대부터 당까지 일사불란하게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성토했다. ‘특별검사추천위원회의 여당 몫 추천위원을 야당과 유가족의 동의를 받아 추천한다’는 내용의 세월호 특별법 여야 2차 합의안에 대해 “마지막 결단”이라며 추가협상 불가 방침을 분명히 한 박 대통령과 이에 맞장구를 친 당 지도부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한 초선 의원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세월호 참사 책임은 정부와 국가에 있는데 모든 책임을 국회로 돌리는 게 말이 되느냐”며 “물론 야당도 문제지만, 대통령이 나서서 저러는 건 세월호 정국을 더욱 꼬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의원들 사이에선 “사태를 풀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여야 협상을 퇴보하게 할 것”이라는 등의 말이 나왔다.

 

청와대 내부적으로도 박 대통령의 강경 기조가 적절치 않았다는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 “화끈하긴 한데, 얻는 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청와대 안팎에선 “야당과 유족의 투항을 요구한 것”, “상대의 퇴로를 끊어버렸으니 결국 말라 죽으라는 것”이라는 평가들이 나왔다. 세월호 교착 국면을 답답해하는 대통령 지지층의 갈증을 해소해줬을지 몰라도, 너무나 강경한 입장을 감정을 섞어 그대로 표출해 세월호 협상에도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향후 국정운영에도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강경한 발언은 이전에 박 대통령이 국민들과 유족들에게 했던 ‘약속’들에 대한 진실성 여부도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박 대통령의 약점으로 꼽히는 소통 능력이나 포용력 부족이 부각되면서, 앞으로 야당과의 관계는 물론 박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했던 ‘국민대통합’도 힘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청와대의 한 실무자급 참모는 “(유족들을) 끝까지 보듬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듯한데, 차갑고 냉정하게만 비칠 것 같다”며 “이번 참사 수습 과정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들과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여권의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이 저렇게 세게 나가면, 유가족이든 야당이든 저쪽도 더 결속하게 되고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정국이 더 꼬이고, 격한 대치 국면이 해를 넘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야당 강경파는 박 대통령 발언에 대해 ‘선전포고’, ‘계엄선포’라는 단어를 써가며 맞대응을 예고하고 나섰다. 유승희·이종걸·우원식 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22명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발언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막는 당사자가 대통령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천명했다”며 “우리는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과 함께 모든 것을 걸고 결연히 투쟁해 나갈 것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강남 마크힐스 58평 65억 ‘최고가’ 917 한겨레

2011년 이후 거래된 전국의 아파트 가운데 가장 비싼 아파트는 서울 강남구의 마크힐스 58평으로 가격이 65억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3.3㎡당 가격이 1억원을 넘는 수준이다.

 

17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이노근 의원(새누리당)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4년 1월에 거래된 서울 강남구 청담동 마크힐스 2단지의 전용 면적 193㎡(58평)형 아파트 가격은 65억원, 3.3㎡당 1억1122만원이었다. 2011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거래된 아파트 가운데 3.3㎡당 1억원을 넘긴 아파트는 이곳이 유일했다.

 

마크힐스는 2010년 메가마크라는 건설업체가 지은 최고급 아파트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며, 두 동, 38채의 소규모 단지다. 연예인과 부유층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포털사이트 ‘다음’의 부동산 사이트에 나와 있는 193㎡ 한 채의 매매 가격은 39억원, 전세 2채는 각각 27억원, 30억원이었다.

 

가격이 두번째로 높았던 아파트는 지난 3월 거래된 서울 강남구 상지리츠빌 카일룸2로, 전용 면적 244㎡(74평)형이 57억원, 3.3㎡당 7699만원이었다. 거래 가격 3위는 2012년 4월 거래된 서울 성동구 갤러리아포레 전용 면적 271㎡(82평)형 아파트로 55억원이었으며, 3.3㎡당 6685만원이었다. 이밖에 거래 가격 4~10위 아파트는 서울 강남구 4채, 서울 성동구 2채, 서울 용산구 1채로, 43억8000만~52억원 사이였다.

 

2011년 이후 전국에서 거래된 아파트 가운데 가격이 10억원을 넘은 경우는 모두 9955건이었으며, 서울이 8840건으로 전체의 88.8%를 차지했다. 특히 서울의 강남구(3247건), 서초구(2177건), 송파구(1326건) 등 이른바 강남 3구는 모두 6750건으로 전국의 67.8%, 서울의 76.4%를 차지했다. 서울 밖의 지역은 1115건(11.2%)이었다. 경기가 628건으로 가장 많았고, 부산 355건, 대구 57건, 인천 46건, 대전 19건, 울산 6건, 광주 2건, 경남 1건 등이었다. 강원, 충북, 충남, 전북, 경북, 제주, 세종에선 10억원 이상 아파트 거래가 한 건도 없었다. 이 기간 전국에서 거래된 최저가 아파트는 전남 고흥군의 뉴코아아파트 22.7㎡형으로 450만원이었고, 충북 증평군의 미혼여성근로자 임대아파트 38㎡형은 581만원, 강원 동해시 대원아파트 22.2㎡형은 600만원이었다.

 

박영선, 탈당설에서 복귀까지 숨가빴던 ‘막전막후’ 917 한겨레

 

 

사흘간의 칩거를 끝낸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자 원내대표가 17일 오후 탈당 의사를 철회하고 당무 복귀를 선언하려고 국회 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상처로 얼룩진 귀환이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탈당설을 흘리며 칩거해 있던 사흘 동안 당 안팎에선 박 원내대표를 말리려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김원기·권노갑 고문 등 원로들도 전화를 걸어 타일렀고, 의원 100여명은 ”이유를 알면서도 속아주는 셈 치고” 박 원내대표의 거취를 묻는 설문조사에 응했다. 나가겠다는 쪽이나, 돌아오라는 쪽이나 서로에게 민망한 ‘출구전략’이었다.

 

박 원내대표가 평소 가까웠던 기자에게 탈당 뜻을 전한 지난 14일 밤부터 당직자들로부터 복귀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16일 밤까지, 사흘동안 당은 박 원내대표로 인해 롤러코스터를 탔다. 탈당설이 나온 이튿날인 15일, 박 원내대표의 원내대표직·비상대책위원장 즉시 동반 퇴진을 외쳤던 이들은 “협박정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비교적 온건했던 의원들조차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날 오후 중도성향 그룹인 ‘민주당 집권을 위한 모임’(민집모)은 전수조사를 통해 의원들의 뜻을 묻자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의원들의 뜻을 다시 묻겠다는 뜻이 박 원내대표 쪽으로 전달됐고, 이후 박 원내대표와 당직자들간에 설문조사 문항을 조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일각에선 의원총회를 소집해 의견을 묻자는 안이 나왔으나 박 원내대표가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박 원내대표는 더이상 의총에서 의원들의 공개적인 비난을 듣는데 지친 것 같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성안 작업이 진행되던 16일 낮, “탈당 결심이 누그러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설문조사 결과 비대위원장은 내려놓되 원내대표는 세월호 특별법 문제를 수습한 뒤 물러나라는 의견이 다수로 나왔다. 몇시간 뒤 당직자들의 입에서 “박 원내대표가 탈당하지 않는다고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원로들과 동료들의 요청으로 복귀한 모양새를 갖췄지만, 박 원내대표 본인도 실제 탈당을 할 경우 사실상 ‘정치적 자해’에 가까운 엄청난 위험부담을 짊어지게 된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당직자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김한길 대표 등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할 때 박 원내대표는 탈당하는 동료들에게 무척 분노했었다. 10년 동안 정치를 하면서 탈당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와 친한 한 중진은 “박 원내대표의 일부 측근들이 ‘지금 탈당하면 따라나올 사람이 있다. 나홀로 탈당이 아니라 분당이 되는거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박 원내대표가 탈당하면 현재 새정치연합은 130석에서 129석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전했다.

 

결국 박 원내대표는 동료들의 거센 비판에 맞서 탈당 카드라는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간신히 ‘명예 제대’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지난 몇달동안 그에게 쏠렸던 기대감은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도, 혁신 비대위원회 구성도 실패했다. 그리고 신뢰도 잃었다.

 

손가락 자르고 눈에 멀미약… 극단적 ‘軍 기피’ 917문화일보

병역법 위반 42% 급증… ‘인생 낭비’ 사고방식 문제

병역 의무를 회피하다 적발되는 사례가 5년 새 40% 이상 증가하는 등 젊은 세대의 군 기피 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한 수법은 날이 갈수록 극단적이면서도 지능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정보 교류 수단 발달로 병역 면제 수법이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17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2013년 대학교 휴학생 김모(23) 씨는 인천 중구 한 공원에서 미리 구입한 작두를 이용해 자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결핵 판정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학업이 늦어진 김 씨는 군 입대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생각에 손가락과 병역 의무를 맞바꾸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3년 전 불의의 사고로 이미 손가락 하나가 절단된 김 씨에게 손가락 한 개가 더 없으면 신체등위 4급 판정을 받아 현역 입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큰 유혹이었다. 그러나 김 씨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고의로 신체를 훼손한 혐의(병역법 위반)로 재판에 넘겨졌고, 인천지법은 지난 7월 김 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시적으로 체중을 늘리는 등 신체 부위를 비정상적으로 조작하는 꼼수도 많다. 지난 6월 병무청에 적발된 보디빌더 이모(20) 씨는 6개월 동안 70㎏인 체중을 115㎏으로 늘려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매일 1만㎉ 이상의 음식과 헬스보충제를 섭취하는 생활을 6개월간 지속하다 신체검사가 끝난 뒤 다시 5개월 만에 45㎏을 줄여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는 게 병무청의 설명이다.

 

눈에 멀미약을 바르는 황당한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하려 한 남성도 있다. 지난 2010년 3월 이모(28) 씨는 멀미예방약에 포함된 약물을 자신의 눈에 발라 동공에 이상이 생겼다는 이유로 보충역 판정을 받으려다 적발돼 울산지법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군 복무가 인생의 낭비로 여겨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군사평론가인 하정열 한국안보통일연구원장은 “경쟁사회의 극단에서 피로도가 정점에 달한 현재 젊은 세대에게 후진적 문화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군대는 피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며 “온라인을 통해 병역을 기피하는 다양한 수법이 개발되고 공유되면서 이 같은 풍조가 더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뿌리 깊은 적폐, 감옥보다 못한 군대? 917프레시안

[좋은나라 이슈페이퍼]<47> 군대, 어떻게 바꿀 것인가-최강욱 변호사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13일 전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병영문화혁신위원 등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그동안 쌓여온 뿌리 깊은 적폐를 국가혁신과 국방혁신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장병 개개인의 인권이 보장되고 인격이 존중 받을 때 병사의 마음에서 자부심과 능동성이 생겨나고, 군도 하나로 뭉쳐서 강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무엇보다 병영문화 혁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진정한 의지와 실천이 따르는지에 있다. ‘뿌리 깊은 적폐’를 일소하려면 그 적폐의 원인을 살펴 그 적폐가 기득권세력의 어두운 뿌리와 관련된 것이라 해도 과감히 척결해낼 의지를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통령, 국방장관, 참모총장이 앞을 다퉈가며 개선방안을 약속하는 와중에도 군내 가혹행위 소식은 끊이질 않는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었다는 나라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나라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록 군의 인권수준은 늘 바닥이다. 대체 왜 그럴까?

 

분명 병영생활을 하는 우리 군인의 현실은 교도소 재소자의 그것만도 못하다. 적어도 오늘 우리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이 새로 들어온 신입 수형자를 상대로 ‘기강’을 잡기위해 가혹행위를 했다거나, 일방적인 폭행을 당해 누군가가 죽어갔다는 소식은 없다. 교도관들이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재소자들을 착취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하고 권한을 남용하여 부조리한 일을 획책한다는 소식도 줄었다. 하물며 교도관끼리 업무상의 불만 때문에 상급자가 하급자를 구타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또 재소자가 아픈데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 사망한다거나, 아픈 사람을 병원으로 보내는 게 늦어 재소자가 죽어갔다는 소식도 없다. 부당한 수형생활을 못 견뎌 재소자가 자살했다는 소식도 잦아든 지 오래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아직도 이런 일이 속출한다. 누구나 알고 있던 부조리와 비리가 여전하다. 도무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질 않고, 당국이 제시하는 대책이란 것도 고장 난 레코드처럼 같은 얘기의 반복일 뿐이다. 하물며 진짜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정말 적폐도 이런 적폐가 없다.

 

교도소의 상황, 재소자 인권의 문제는 오랜 시간 우리 사회의 치부로 남아있던 숙제였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교도소와 병영의 구조가,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위가 흡사한 것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적다. 그렇다면 대체 교도소와 군은 뭐가 달랐기에 오늘날 이런 차이를 보일까? 결정적 차이는 투명성의 확보와 독립성을 가진 기구에 의한 감시와 정화가 가능한지의 여부에 있다.

 

교도소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상황에 대한 상시적 감시를 받는다. 또한 교도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찌되었든 독립된 수사기관인 경찰, 검찰에서 수사가 이루어져 사법부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점도 재소자들의 인권의식 향상과 더불어 부조리의 근원을 차단하는 중요한 결과에 기여했다. 교도관들 또한 폐쇄성을 탈피하고 스스로 인권의식을 가다듬으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모든 일은 법과 제도의 변경을 통해 시작되고, 발전하고, 정착된 것이다. 물론 현재의 교도소와 행형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고, 완전무결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적어도 군내의 병영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잔혹한 인권침해와 어이없는 인명 손실의 문제는 많이 해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발생하는 군의 전근대적 악습 또한 투명성의 제고를 통한 민주적 감시의 강화, 그리고 독립된 외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의 감시 및 조사와 처벌을 통해 상당 부분 나아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민주사회, 제대로 된 군대의 조건

유대인 학살로 대표되는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독일군은 패전 이후 완전히 해산되었다가 치열한 사회적 토론을 거쳐 다시 편성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주목한 것이 군인의 인권 보장을 명확히 하는 제도였다. 전시에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단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전범 국가들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보다 인간적인 무력의 사용이라는 주제 아래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군대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토론과 노력이 이어졌다. 이것이 '전쟁법'이라는 새로운 국제규범의 형태로 자리 잡았음은 물론, 군사법제도의 개선 외에도 지휘권의 합법성을 담보하기 위한 군사옴부즈만(‘국방감독관’으로 번역하기도 함 ; Wehrbeauftragter) 등 각종 제도의 정비에 따른 많은 성과가 분단을 경험한 독일과 대만 등을 포함한 각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바야흐로 인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가장 대표적 집단이었던 전쟁수행 조직으로서의 군대가, 현대사회에 와서는 인권을 가장 보호하고 중시하는 입헌적 국가기관의 하나로 변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선진 민주국가의 보편적 추세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군대 내의 인권문제는 단순히 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전제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된 나라의 선진적 징표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군대를 도외시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군대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대는 어떠한 집단보다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국민의 삶에 '군사문화'를 이식하기도 했다. 한편,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깨끗이 걷어내지 못한 일본군대의 구습과 폐해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병영생활에 어둡고 음습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물며 군부엘리트들과 군 출신 정치인 등이 한동안 우리 사회의 강력한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동안 군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위험부담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고 군부 엘리트들의 사회참여 또한 민간 엘리트에 못지않은 능력과 식견을 겸비하여야만 가능해진 지금에도 군과 군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미약하다. 단지 간간이 언론을 통해 정해지던 군내의 인권유린(논산 훈련소 인분 사건(1), 소위 '멸치 장군'(2) 사건 등)을 고발하는 소식과, 잊어버릴 만하면 터지는 총기난사사건, 진료권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젊은 병사들의 이야기(2005. 11. 노충국 씨 사망사건 등) 등을 통해서만 순간적 관심과 비판이 끓어올랐을 뿐 그 본질에 대한 천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 군은 계속된 사고로 국민으로부터 완전한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인터넷 게시판에는 입대를 앞둔 이들과 그 가족의 불안과 불신, 군대에 대한 원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지속해서 수없이 제기되었음에도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

 

군대가 지켜야 하는 것

헌법상 보장된 군인의 기본적 인권은 당연히 구체화하여 법치국가에 부합하는 군인 인권보장 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군은 국방을 위한 무력을 가지는 집단으로서 헌법적 원리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 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법에 의한 지배가 보장되는 정치적 공동체를 수호하는 데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라고 한다. 군대가 수호해야 하는 것이 민주적 기본질서라면 군대 자신도 민주적 기본질서에 부합되게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부하의 인권과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며 모범을 보이는 지휘관상을 구현하여야 한다. 지휘관 스스로 군사훈련의 목표와 규율이 궁극적 목적인 헌정질서의 수호와 정의구현에 있다는 신념을 지녀야 하며,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명령에 대하여는 자신 있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상하를 막론하고 군인 스스로 동료의 인권을 존중하고, 전투 시에도 적과 포로를 국제인도법에 따라 처우할 줄 아는 군대야말로 시민의 벗이 되고 자랑스러운 국민의 군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무시될 경우 군인은 결국 상관의 명령이면 무엇이든지 복종하는 노예나 기계가 되어 국가가 공인하는 폭력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현대사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여러 가지 어두운 사건들은 그러한 점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이제는 이러한 과거의 잘못을 떨쳐버리고 민주질서를 수호하고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군대의 모습을 구현하고 확립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인권과 지휘권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인권을 보장하는 지휘권의 행사만이 헌법상 용인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군 사법제도가 온존되는 한 군인 인권보장의 최소한을 지키려는 노력은 금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우리가 그렇게 갈구하던 민주화의 실체가 결국 정치적 의사표현과 의견형성의 자유 및 국민을 위한 사법 구현에 있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 군대가 보여주는 현실은 아직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민주화 시대를 가르는 표징인 ‘군사독재’ 시절의 적폐에 대하여 우리는 단 한 번도 근본적 성찰과 제도적 개혁을 이룬 바 없다.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면 군인은 마땅히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 인권을 향유하는 존재임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 또한, 상명하복을 강조하며 집단적 임무수행을 한다는 점에서 인권을 보장하는 부대환경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민주국가의 당위로서, 독일의 경우 ‘내적 지도의 원리’라고 표현되나 좀 더 구체화하여 ‘민주적․시민적 지휘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인의 자유와 권리는 법률로 창설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따라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폐지를 포함한 군사법제도의 개혁과 군인인권법의 제정은 필수적이며, 국가배상 및 국가유공자 제도 또한 헌법적 차원에서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인권이 살아 숨 쉬는 군대야말로 진정한 국민의 군대인 것이며, 그때 우리 국민들은 군에 복무하는 것을 진정한 자랑과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군 사법제도의 역사와 현실

지휘관의 제왕적 지위를 보장하며 군내 각종 사고의 진실을 은폐하는 주범으로 부각되고 있는 우리 군사법원법의 역사를 보면, 관할관의 권한이 점점 축소되는 것과 함께 심판관의 역할도 축소되는 쪽으로 개정되어 왔다. 한마디로 일반 형사재판에 가까운 쪽으로 천천히 변해왔던 것이다. 애초 지휘관 사법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합의부를 구성하는 3인 가운데 2인이 일반장교인 심판관이었다. 이러한 구성이 변호사의 자격을 가진 군판사를 과반수로 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 불과 1994년의 일이다. 결국 군사법원법의 역사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지휘관(관할관)은 강제수사 여부를 사실상 결정하고 자신의 부하를 재판부에 포함시켜 재판의 성립에 관여한 다음 확인조치권을 통해 이미 선고된 판결의 내용까지 변경시킬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3)

   

이러한 과정에서 사법권의 독립 내지 인권보호를 위한 감시자로서의 사법의 역할은 형해화 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군사법제도의 정당성은 물론이고 군에 대한 근본적 불신의 원인으로 자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군 사법제도의 개혁은 시대적 요청이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이다. 특히 인권보장에 적합한 사법제도의 구축, 최고법원을 정점으로 한 사법체계의 통일성 확보라는 헌법상의 요청은 군의 특수성이나 군사법체계의 특수성이라는 논리보다 우월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국제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군대를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된 특수사회로 보는 시각은 후퇴하고 있으며, 인권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국제 인권기준의 강화, 프라이버시 기준의 강화에 발맞추어 군 사법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는 것이다.(4)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파견 군대를 위해 설립된 군사법원은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따라 존재 여부가 다르다. 한국과 같이 '헌법'에 군사법원의 설립근거를 두었지만 독일은 군사법원을 두지 않고 있다. 대만의 경우에도 군사법원을 폐지했다. 반면에 전 세계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는 군사법원이 가장 발달해 있다. 비교법적 관점에서 각국의 군 사법제도를 검토해보면 군 지휘관에게 사법권까지 부여하는 전통적인 군 사법 운용방식이 급격하게 와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 적어도 우리와 같은 지휘관 군림의 군사재판 제도를 가진 나라는 없다. 지휘권의 행사에 사법권의 행사가 당연히 포함된다는 인식은 이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고, 유지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현대전을 수행하는 군대는 과거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만큼, 그러한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인식 또한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군대의 사명은 영토를 기준으로 한 물리적 개념으로서의 국가뿐만 아니라, 국가의 기본질서인 헌법과 헌법이 표방하는 가치를 지켜내는 것까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재 우리 군사재판의 85%를 차지하는 것은 일반 형사범이며, 군형법상의 특수범죄라는 것도 군무이탈, 상관 폭행 등 본질에서 일반 형사범의 행위태양과 다를 바가 없다. 도무지 90개에 육박하는 군사법원이 별도로 존재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헌법과 군대, 군사법제도

과거 우리 군은 헌법의 규율을 받는 국가기관의 하나로 인식되고 운용된 것이 아니라, 헌법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특수조직의 하나로 치부되어 온 경향이 있다. 군 스스로도 시민사회의 감시자 역할을 자임하며 스스로 헌법과 법률을 무력화하거나 자신에게 편리한 쪽으로만 활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군은 사회의 민주화와 합리적 발전과정을 따라가지 못한 채 홀로 고립되어 정상적이고 단계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군사정권이 종식된 지금은 개혁을 요구받고도 전혀 논리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실질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군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고 그것을 해소하려는 노력에 대한 냉소 또한 여전하다. 지휘관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니 모든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감당해보려다 결국 무너지는 과정에서 갖은 무리수를 두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며, 구성원들의 사기 또한 나날이 저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군에 헌법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군의 미래도 없고 우리나라의 미래도 없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헌법이 바라보고 구현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군의 모습을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성찰할 때에 온 것이다.

 

군 지휘관들 가운데에는 사법권을 지휘권의 한 내용으로 포함시킬 때 군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지휘권의 개념을 초법적인 것으로 전제하며 부하들의 위치를 항상 지휘관의 관리와 보호 하에 두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나아가 지휘권을 행사하는 지휘관의 무오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반박에 대하여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헌법은 분명 군사법원을 사법기관으로 인식하며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행정기관장인 지휘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의 어느 행정기관장도 사법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대통령의 통수권 아래에 있는 군 지휘관들이 사법권을 보유한다는 것은 너무도 극명한 모순이다. 현상이 이러하였고 그것이 우리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사법의 역할에서 매우 동떨어진 것이라면, 이제는 그것을 과감히 버려야만 한다. 언필칭 ‘국민과 함께하는 튼튼한 국방’을 외치면서 ‘가고 싶은 군대, 보내고 싶은 군대’를 만들려는 것을 국방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면 그간의 전근대적인 군사법원 운영은 이제 중단되어야만 한다.

 

이제 그 누구도 특권을 보유한 채 성역 속에 안주할 수 없다는 준엄한 시대정신에 순응하여야 한다. 지휘관 사법을 고수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아 군의 바람직한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며, 국민의 신뢰를 저해하는 독소임을 깨달아야 할 때가 왔다. 군 사법제도를 개혁하였거나 개혁하고자 하는 나라들이 군 사법제도의 설계에서 관심을 갖는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 사법제도를 사법부의 한 부분으로 통합함으로써 최고법원을 정점으로 한 ‘사법체계의 통일성 확보’라는 헌법적 요청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 사법 개혁을 통해 군인의 인권보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6) 양자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거나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를 한마디로 줄이면 ‘군사 영역에서의 입헌주의 관철’이 되며 군 사법제도의 개혁은 이러한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재삼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관할관 제도와 심판관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될 것이며 나아가 군사법원의 폐지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최강욱이 2007. 11. 한국형사정책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홍익대법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홍익법학』제9권 제3호 (2008. 10.)에 게재한 논문인 “지휘관 사법의 폐해와 그 폐지론 ; 관할관, 심판관 제도를 중심으로”에서 일부 내용을 요약·수정하였음.

   

참고문헌

김석철, 『군사법경찰관과 군검찰관의 직무상 지휘체계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송영길, 『군사법원 제도개선 방안』, 2000년 송영길 의원 국정감사 정책자료집, 2000

이계수, 『군사안보법 연구』,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7

김경환, "현행 군사법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개선방안", 참여연대 토론회 토론문, 2002

 

(1) 화장실 청소상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훈련병들에게 손으로 인분을 찍어 입 속에 넣게 하였다는 사건, 2005. 1.10. 발생.

(2) 장군이 멸치상자를 잘못 보관했다는 등의 이유로 2004. 9.부터 공관 당번병인 김아무개 상병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 폭행하고 2005. 4. (김 상병에게) 근신 10일의 징계를 내린 뒤 취사병으로 보직을 변경한 것을 이유로 징계를 받은 사건,

(3) 관할관 및 심판관과 관련한 군사법원법의 규정을 보면, 군사법원의 행정사무는 법관이 아닌 관할관(管轄官)이 관장하며(제8조), 관할관은 국방부장관 또는 군사법원이 설치되는 부대와 지역의 사령관, 장 또는 책임지휘관이 된다(제7조). 군판사는 각 군 참모총장 또는 국방부장관이 임명한다(제23조). 군사법원은 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재판관은 관할관이 지정하며(제25조), 군판사와 심판관으로 한다(제22조). 심판관은 장교 중에서 관할관 또는 군 참모총장이 임명한다(제24조). 보통군사법원은 군판사 2명과 심판관 1명이 재판관이 되고, 약식절차에서는 군판사 1명이 재판관이 된다(제26조). 고등군사법원은 군판사 3명이 재판관이 되는데, 관할관이 지정한 사건의 경우에는 심판관 2명이 추가된다(제27조). 군사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관할관이 확인조치를 하여야 한다. 관할관은 무죄, 면소(免訴), 공소기각(公訴棄却), 형의 면제, 형의 선고유예 또는 형의 집행유예의 판결을 제외한 판결을 확인하여야 하며, 「형법」 제51조 각 호의 사항을 참작하여 형이 과중하다고 인정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제379조).

(4) 이계수, 『군사안보법 연구』,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7, 249면.

(5) 이계수, 앞의 책, 256~258면.

(6) 이계수, 앞의 책, 258면.

 

김부선, ‘벗는 여배우’에서 ‘난방비 투사’가 된 사연919 경향

 

배우 김부선 / 사진 박미향 기자

시작은 1983년이었다. 대입 재수를 하겠다며 상경했다가 패션모델로 활동하게 된 스물한살의 제주도 아가씨는, “모델 역할이니 연기를 못해도 된다”는 감독의 말에 속아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가 된다. 여기까지도 이미 스펙터클한데, 같은 해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평범했던 처녀는 졸지에 대중의 관심사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고개를 푹 숙이거나 옷깃을 잔뜩 세워 얼굴을 감추는 여느 연예인들과는 달리, 그는 경찰서 앞에서 자신의 얼굴에 클로즈업을 들이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라 말하는 세상에서, 이상하리만치 고개를 든 여배우 김부선의 행보는 그렇게 시작됐다.

 

<대마를 위한 변명>의 저자 유현은 2004년 김부선을 옹호하는 글에서 그를 ‘불굴의 대마적 여배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참 얄궂게도, 벌금형으로 풀려난 이 ‘대마적 배우’의 다음 작품은 ‘말을 사랑하는(愛馬) 여인’이라는 뜻의 제목으론 심의를 통과할 수 없자 한 자만 살짝 비틀어 ‘대마를 사랑하는(愛麻) 여인’으로 심의를 통과한 <애마부인> 3편(1985)이었다. 김부선은 안소영과 오수비의 뒤를 이으며 뭇 남성들의 꿈의 여인인 ‘애마’가 되었고, 몇 편의 성인멜로물에 더 출연하며 스타덤에 올렸다. 허나 그도 오래가진 않았다. 1986년 여름, 청와대 파티에 초대받은 김부선은 “내가 기생이냐”며 초대를 거절했고, 얼마 뒤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본인은 “재벌가의 파티에는 몇 차례 갔는데 청와대를 안 갔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에게 밉보인 탓에 보복성 밀고를 당한 것이라 생각한다”지만, 세상은 이른바 ‘벗는’ 여배우의 상습적인 마약 복용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심지어 신문조차 ‘육체를 앞세운 여배우’, ‘무절제한 사생활’ 운운하며 비아냥에 일조했다.

 

“소위 벗기는 영화 붐에 편승, 84년 데뷔한 김부선양은 그동안의 출연작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여자가 남자를 쏘았다>, <애마부인3>, <토요일은 밤이 없다>를 보더라도 정통 연기자라기보다 육체를 앞세운 여배우. (중략) 결국 ‘김양은 무절제한 사생활과 함께 뜬구름을 쫓는 쾌락에 몸을 내던진 결과’라고 연예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1986년 10월23일, <경향신문> 김양삼 기자. ‘연예계 또 독버섯 쇼크 마약 왜 상습 복용하나’ 중)

 

본인은 “어처구니없이 외로웠다. 섹시한 건 연기일 뿐인데 그걸 강요하는 분위기가 싫었”으나, 세상은 작품의 이미지로만 그를 판단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말 타는 것 외에는 뭐 하나 연기다운 연기를 하지 못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성인영화만 찍던 그였고, 밤에는 <애마부인> 심야 상영을 즐기다가도 낮에는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하며 밤에 봤던 여배우들을 멸시하던 시대였으니까. ‘마약 하고 집단 혼음이라도 한 것 아니냐’는 비웃음을 들으며, 김부선은 1986년 처음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꿀 이들을 만난다. 건대 사태로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같은 교도소를 쓰게 된 것이다.

 

학생들 앞에서 김부선은 부끄러웠다고 한다. 자신은 재벌가의 파티에서 필로폰을 투약하는 동안, 누군가는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겐 생경했던 것이다. 첫 경찰 출두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청와대의 부름에 기분이 나쁘다며 ‘등청’을 거부했다는 일화만 봐도 김부선은 원래도 쉽게 수그리는 이는 아니었다. 여기에 사회를 비판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시야가 더해지면서, 자신이 옳다 믿는 사안에 있어선 좀처럼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오늘날의 김부선이 완성됐다. 과장 같은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단칸방에 살던 시절 수배 중이던 학생을 3개월간 숨겨주었다거나, 여성주의 운동권 영화에 무료로 출연했던 일화는 훗날 보여지는 ‘액티비스트’ 김부선의 면모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른바 ‘벗는 여배우’의

마약복용에 조소를 날렸지만

그는 옳다 믿는 일에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대마초 비범죄화’ 투쟁에 나서고

‘최진실법’ 등에도 목소리를 냈다

‘난방비 비리’로 대중이 보낸 지지는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에게 보내는

조금 늦은 감사인사일지 모른다

 

연기 서적을 읽고 독학해가며 견딘 오랜 단역 생활 끝에, 김부선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로 다시 대중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의 팬을 자처한 유하 감독이, 주인공 현수(권상우)의 첫 경험을 앗아가다시피 하는 떡볶이집 여주인 역할에 김부선을 캐스팅한 것이다. 감독은 김부선이 몸풀기 차원으로 임한 첫 테이크에 오케이 사인을 냈고, 배우 본인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그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은 전율했다. 인터뷰가 쇄도했고, 점차 과거의 성인영화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 역할들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선덩어리 상류층 귀부인을 연기한 문화방송(MBC) <불새>(2004), 전도연의 우체국 동료 직원을 연기한 <인어공주>(2004), 정우성의 철없는 엄마 역할로 출연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까지, 배우로의 재기는 순탄해 보였다. 같은 해 다시 대마초 투약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랜 무명 끝에 간신히 은막으로 복귀하려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배우라면 보통 어떤 선택을 내릴까? 어떻게든 기회를 다시 잡아보기 위해 납작 엎드리지 않을까? 놀랍게도 김부선은 선처를 요구하는 대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제청 신청을 제기하는 쪽을 택한다. 이미 세계보건기구와 수많은 학자들이 ‘대마보다 담배나 술이 더 위험하다’고 증언해 왔지만, 아무도 김부선처럼 소리 높여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하진 않았던 시절이었다. ‘죄를 지었으니 네 죄를 알라’는 세상에 대고 ‘이건 죄가 아니다’라고 맞받아치는 초유의 여배우. 그의 투쟁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한국마약범죄학회 학술이사 문성호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1976년 이후 근 30년 만에 처음으로 공론화의 포문을 연 것이 김부선이라며 감사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수많은 대중문화 인사들의 지지 속에 시작한 대마초 비범죄화 투쟁은 결국 위헌법률심판 기각과 헌법소원 기각으로 끝나고 만다. 이쯤 되면 지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투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김부선은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와 한-미 자유무역 협정 체결 반대 투쟁에 동참했고, 혼자 딸을 키우면서도 호적엔 양모로 올라가 있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을 되새기며 ‘최진실법’ 제정 촉구 투쟁에 나섰다. 제주 4·3 사건 때 첫 남편과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는 어머니의 아픔을 생각하며 4·3 위원회 폐지 반대에 앞장섰으며, 고 장자연씨 사건으로 연예계 성상납이 이슈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겪었던 일화들을 이야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래도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배우를 선뜻 쓰기는 어려웠던 걸까. 2007년 <황진이>를 마지막으로 그의 장편 상업영화 출연작은 7년 가까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늘 입버릇처럼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 연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김부선은, 그럼에도 자신이 보기에 정의롭지 못하다 싶은 사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싶은 사안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혔다. 왜 그렇게 싸움을 멈추지 않느냐며 자신을 비난하는 세상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일을 내 일처럼 도왔을 뿐인데, 그런 내가 생업인 연기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로 사회의 암적인 존재냐”고 반문하면서.(문화방송 <놀러와>, 2011)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념과 생활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잠시 고민하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곤 한다. 그리고 그게 세상 사는 법이라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요구하곤 한다. 목소리 높이지 말라고, 나라고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문화평론가 허지웅의 지적처럼, 한국의 현대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은 건 많은 경우 “꼴사납게 자기 면 깎아가며” 시민의 권리를 지켜준 “드센 사람들”이다. 그러니 최근 아파트 난방비 비리 문제를 밝히려다 동네 주민과 시비가 붙어 뉴스에 오르내린 김부선에게 대중이 보내는 지지는, 어쩌면 온통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질린 사람들이 보내는 조금 늦은 감사 인사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원하는 배우의 삶을 위해서라면 한번쯤 눈을 감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꾸준히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에게 보내는 인사말이다.-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한국에 온 피케티] “韓 소득 불평등, 日보다 가팔라… 해법은 누진적 부유세”920국민

‘피케티 신드롬’ 주인공이 보는 한국

 

큰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선 젊은 경제학자는 구김이 많이 간 면바지에 수수한 재킷 차림이었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43) 파리경제대 교수가 19일 방한했다. 그는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세계지식포럼 사전행사로 마련된 ‘1%대 99% 대토론회’에 참석, 전 세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저서를 소개하고 국내외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피케티 열풍’을 방증하듯 많은 청중이 자리를 메웠다. 피케티는 “경쟁과 세계화의 논리에 동의한다”면서도 “자본주의의 의미는 결국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다”고 말했다.

 

◇“한국, 일본·유럽보다 불평등 심화 속도 심각”=피케티는 자신의 작업이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과거를 설명하는 것”이라며 역사적 교훈을 통해 불평등 극복 방안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방대한 통계를 토대로 지난 3세기에 걸친 20여개국의 부와 소득 집중 원인을 따졌다. 결론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웃돌기 때문에 부의 집중이 가속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의 속도보다 빨라 부익부빈익빈이 이뤄졌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피케티는 임금 분야에서도 불평등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유럽, 일본 상장사의 임원들에게 부여되는 고액 보수체계와 상장사의 실적을 분석했다”며 “임금 1000만 달러가 임금 100만 달러보다 좋은 성과로 이어지는지 살펴봤지만 충분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불평등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불필요하다”고 요약했다. 그는 양극화 해법으로 가파른 ‘누진적 부유세’와 글로벌 자본세를 제안했다. 한국의 소득분배 현실에 대해서는 “미국보다 빠르지는 않지만 일본과 유럽보다는 빨리 소득 불평등이 상승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우리 상황에 적용 못할 연구”=피케티에 대한 국내외 경제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찮았다. 포문은 레이거노믹스에 참여하기도 한 우파 경제학계의 거두 로런스 코틀리코프 미국 보스턴대 교수가 열었다. 그는 “부유층이 세습으로 불평등이 상승한다는 가정이 있겠지만 극단적”이라고 논박했다.

 

국내 학자들은 피케티의 연구가 우리나라 상황에 꼭 연결시키기 어려운 과격한 주장임을 강조했다. 최근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물러난 조원동 중앙대 석좌교수는 “2000년대까지 한국에서 자본수익률은 경제성장률보다 낮게 나타났다. 최근에는 자본수익률이 높아졌지만 확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며 반박했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재벌기업들이 파손됐고 부동산 가격이 하락했다. 이론대로라면 자본소득이 감소해야 마땅한데 불평등은 심화됐다”며 피케티의 이론을 선진국보다 자본주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피케티는 “한국은 최상위계층의 한계세율이 크게 감소했고, 개발도상국이긴 하지만 부유한 개도국”이라며 재반박했다.

 

피케티 일문일답

토마 피케티 교수는 국내에서 ‘21세기 자본’ 한국어판이 출간되기 전에 영문판을 구해다 읽는 등 열풍이 일고 있는데 대해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19일 기자회견에서 한국경제 상황을 잘 모른다며 겸손해 하면서도 소신 있는 제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소득격차 문제를 어떻게 보나.

“한국은 수십년간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지만 영원히 5%대 성장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고성장이 불가능하다면 소득과 부의 불평등 문제를 우려하게 될 것이다. 기업의 과도한 잉여금에 과세를 하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교육 투자로 효과적인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말한 포용적 교육 제도가 무상교육을 포함하는 개념인가.

“소수 엘리트가 아닌 모든 이에게 교육 기회를 줘야 한다. 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사교육비 지출이 상당히 높다. 정부가 이 부분을 투자하면 경제성장에도 기여할 것이다.”

 

-오늘 한국의 보수주의 학자들이 강하게 비판했다.

“100%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책은 아니다. 독자들이 스스로 결론을 짓도록 장려하고 있다.”

 

MB는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이다[초록發光] 핵발전소 비리와 MB 919 프레시안

이강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박근혜 정부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특히, '저탄소 녹색 성장'으로 치장했지만, 사실상 '고탄소 회색 성장'으로 결판난 4대강 정비 사업과 핵 발전 확대 정책의 후유증은 현재형일 뿐만 아니라, 상당 기간 한국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핵 발전 정책에서 이명박 정부 집권 5년 전과 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핵 발전 산업이 이전 정부에 비해 2배로 증가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원자력산업회의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명박 정부 이전 시기에 핵 발전 산업체의 연간 매출은 12.8조 원 규모였는데, 2008년 이후 급증하여 2012년 현재 21.4조 원으로 급상승했다.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을 제외한 원자력 공급 산업체의 매출은 연간 2.5조 원에서 5.3조 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 원자력 산업 분야별 매출액 구성도. 2012년 현재, 매출 1000억 원 이상은 건설업의 현대건설, 삼성물산, 제조업의 두산중공업, 설계업의 한국전력기술, 서비스업의 한국전력KPS 등 9개였다. ⓒ원자력산업회의

 

결론적으로 MB의 저탄소 녹색 성장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현대건설, 삼성물산, 두산중공업, 그리고 핵 발전 관련 공공 기관이었다. 이렇듯 핵 발전 산업계에 엄청난 이득을 안긴 MB의 에너지 정책을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여러 정황상 이명박 전 대통령 본인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장면 1 : 내가 17년 동안 해봐서 아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95년 펴낸 자서전 <신화는 없다>(김영사 펴냄)에서 현대건설 회장 시절인 1988년 한국전력 국정감사 증인으로 참석해 증언을 내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특수성에서부터, 현대건설이 처음 고리 1, 2호기 건설 때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하청 업체로 참여해 오늘날 원자력 발전소 설비 일체를 건설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업체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간추려 설명했다."

 

실제, 당시의 국회 회의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발언한 것으로 나와 있다.

"17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한국의 원자력기술의 자립화라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장면 2 : 정치 자금을 안 준 건 영광 3, 4호기 건설이 처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참석한 한국전력에 대한 국정 감사는 5공화국의 대표적인 비리사건으로 알려진 영광 3, 4호기 주계약(컨버전스 엔지니어링) 및 건설 계약(현대건설) 특혜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현대건설은 1987년 4월 총공사비 3조3230억 원(당시 가격 44억 달러)의 영광 3, 4호기의 토건 및 기전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체결했다. 이는 당시 단일 공사 기준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당시 건설 공사의 수주가 덤핑 가격으로 이루어지는 관행 속에서 예정가의 90%가 넘는 좋은 가격으로 공사를 땄으니, 관례에 따라 정치 자금으로도 상당한 액수가 쓰였을 것이라는 것이 한간의 소문이었고, 그래서인지 이 문제에 대한 신문이나 국회에서의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자서전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 대목을 이렇게 기술했다.

"영광 3, 4호기 원자력 발전소 공사는 현대건설에 낙찰됐다.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겠지만, 정부에서 발주하는 거대 공사를 수주하면서 정치 자금이 단 한 푼도 지출되지 않은 공사이기도 했다."

 

영광 3, 4호기 수의계약에 따른 정치 자금 제공을 부인하고 있는데, 이 해명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전의 핵발전소 공사에서는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고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참고로 과거 핵발전소의 경우 커미션은 원자로와 터빈 발전기가 계약금의 3%, 설계 기술 용역이 5%, 토건이 10%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 검찰 수사 결과, 월성 2, 4호기의 에이전트가 당시 한국전력 사장에게 2억 원을 줬고, 한국전력 사장의 알선 커미션이 726만 달러였다(<한국원자력창업사>(박익수 지음, 과학문화사 펴냄). 소문대로 영광 3, 4호기 건설의 커미션이 수주액 44억 달러의 10%라면, 더구나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핵발전소 납품 비리는 스케일 면에서 조족지혈이라 할 수 있겠다.

 

#장면 3 :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엿장수 마음대로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6년의 3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20년까지 신규로 핵발전소 2기, 석탄 3기, LNG 10기 등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발표된 2008년의 4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22년까지 신규로 핵발전소 60기, 석탄 5기, LNG 1기를 짓기로 했다.

 

또,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핵발전소 관련 각종 인·허가 과정이 대폭 단축됨으로써, 미래와 현재의 핵 발전 산업의 국내 시장을 급속히, 그리고 양적으로 확대를 유도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전 정부에 비해 연간 핵 발전 매출이 급속히 증가하고, 미래의 핵발전소 건설 프로세스를 확정, 추진하였다.

 

2년 주기로 수립하는 전력수급기본계획 계획 기간도 2년 연장되는데, 그 때마다 핵발전소를 최소 2기 이상 신설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미래의 신규 핵발전소 시장을 안정적으로 창출하는 한편, 상업 운전 중인 핵발전소의 수가 늘어날수록 유지·관리 등을 명목으로 커지는 현재 핵 발전 산업 시장의 팽창을 도모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보다 더 안정적이며, 지속 가능한, 황금알을 낳는 시장이 있을까?

 

이러한 핵 발전 정책 드라이브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서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박근혜 정부는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통해, 2035년까지 핵 발전 설비 비중을 29%로 한다고 밝혔다. 이는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8년의 제1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2030년까지 핵 발전 설비 비중을 41%로 설정한 것보다 낮아졌다는 착시를 불러 온다.

 

그러나 이는 현재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인 핵발전소 이외에 7기가와트 규모를 추가로 짓겠다는 방침이고, 현재 건설 중인 5기와 계획 중인 6기 외에도 최소 5기에서 7기를 추가로 증설한다는 의미이다. 즉, 현재 상업운전 중인 23기의 핵발전소가 2035년에는 40기 안팎으로 늘어난다는 의미이다.

 

조만간 발표할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핵 발전 정책이 연장선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핵 발전 정책이 주는 시사점은 핵 발전 정책의 결정권자들과 수혜자들의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이며, 감시받지 않는 관계를 주목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 원자력문화재단을 위시한 원자력 업계의 광고 공세와 언론과의 공생 관계, 원자력 정책과 정치 후원금을 둘러싼 정치인과 이들 기업의 관계, 연구개발(R&D)과 원자력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사람들과의 관계, 퇴직 관료의 재취업과 그들의 역할 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의 중요성도 시사한다.

 

이를 통해, 폐쇄적이고 베일에 싸여 있던 원자력 정책 결정 과정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 정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에너지 체계를 위한 출발일 것이다.

 

우리 모두 김부선이 되자 국가 기본의 재구축을 위하여 <20>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탐욕과 혼돈의 패거리 작당

   

“가장 나쁜 놈이 가장 꼭대기에 올라간다”는 하이에크의 말은 야당 내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관철되어 왔다. 국회의원은 우리 사회에서 입신양명, 최고의 출세 목표가 되었고, 야당은 그 지름길이요 통로였다. 야당에 줄을 댄 모든 사람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원 자리와 그 떡고물에 승부를 걸었다. 대리기사에게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호령했던 어떤 의원나리처럼, ‘완장’ 차고 한번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고자 한 그 천박성과 탐욕, 바로 그것이 오늘의 절망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기원이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패거리, 작당(作黨)의 혼돈이었다.

 

본래 ‘정당’이라는 말의 영어 단어는 ‘party’이다. 그런데 사실 ‘당(黨)’이라는 한자어는 예로부터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실제로 <논어>에도 “君子, 群而不黨(군자 군이부당)”이라 하였다. 즉, “군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무리를 이뤄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사서집주(四書集注)>에서 ‘당(黨)’에 대하여 “相助匿非曰黨(상조닉비왈당)”, 즉, “서로 잘못을 감추는 것을 黨(당)이라 한다”라 해석하고 있다. <설문(說文)>에는 “黨, 不鮮也(당, 부선야)”라고 풀이되어 있다. ‘당(黨)’이란 ‘흐릿하여 선명하지 못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듯 ‘당(黨)’이라는 글자는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함께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공(公)’은 실종되고 오로지 ‘사적(私的) 이익’과 패거리 ‘당(黨)’의 탐욕만 존재하는 곳. 참으로 “입으로는 온갖 감언이설 미사여구 늘어놓으면서 실제로는 멸공봉사(滅公奉私), 패거리를 지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누가 뭐라 하든 끈질기고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우리의 정당 모습을 촌철살인 그대로 표현해주는 기가 막힌 조어(造語)가 아닐 수 없다.

 

야당, 차세대로 마지막 승부해야

무려 500만 명의 국민 서명을 받은 세월호 특별법이 한낱 휴지조각으로 되어버린 것은 이 땅의 대의 제도 자체에 대한 철저한 파산 선고이다. 모든 것이 장군을 잘못 세운 국민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불통의 끝을 보여준 정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국회가 가장 문제이고, 야당이 특히 문제이다.

다만 지금의 야당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구 체제 안에 새로운 세력이 태동하는 성장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계속 봉합하고 임기응변 임시변통으로 위기를 타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연명 치료에 불과할 뿐 종국에는 강제로 비극적으로 퇴장 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 ‘계파 내에서만’ 원로급인 분들이 지휘, 관리하는 ‘식물 야당’을 살리려면, 차세대로 대폭 연령을 낮춰 예를 들어 우원식 의원이나 안희정 지사 등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새로운 얼굴을 내세워 한 판 승부를 해보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

만약 그러고도 또 실패한다면 깨끗이 당을 깨고 각자도생하는 것이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유일하게 남은 명예로운 길이다.

 

모두 김부선이 되자

프랑스에서는 공익단체가 기소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국가와 사회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활동이 일상화되어 있다.

민주주의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부터 시작하여 시민 스스로 사회의 정상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결국 민주주의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고발자가 되어야 한다.

 

몇 년 전 한 지인이 진보 진영에서 상당히 알려진 한 인사에게 필자 얘기를 하자 그 인사는 “그 친구는 조직 내 분란을 일으켰다고 알고 있다”고 일언지하에 비판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DJ, 노무현, 김근태는 그 당시 정치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던가? 과연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진보와 개혁 그리고 민주가 성취될 수 있다는 말인지…. 그리고 민주 진영은 지금 왜 정부에 순종하지 않고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가?

 

마치 방미 씨께서 김부선에게 “조용히 지내라”고 점잖은 척 충고한 것과 똑같은 논리다. 진리는 그리고 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 모름지기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실천되어야 한다. 자기의 삶터와 일터라는 가까운 곳에서는 전혀 실천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 방관, 동조하면서 오로지 멀리 열매와 자리만 추구했기 때문에 오늘의 총체적인 난장판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초래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조용히 있지 않은’ 그리고 ‘가만히 있지 않은’ 김부선이 훨씬 많아져야 한다. 우리 모두 김부선이 되어야 한다. 그간 시민운동 또한 이른바 시민정치를 표방하면서 결국 야당의 2중대화하고 소수의 명망가만 ‘출세’시켰다. 그리고 정작 시민들에게 권리 주기에 앞서 자신들의 권리와 권력만 추구하는 결과를 빚지 않았는지. 먼저 내 안에 존재하는 출세욕 그리고 권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도무지 한 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은 절체절명의 현실, 그러나 출로가 꽉 막힌 바로 혼돈의 그곳에서 종국에는 빅뱅의 폭발이 발생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은 시작된다.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끝에 비로소 희망이 이어진다.

 

"1달러 회사를 1조원에 사서 900억에 팔다니" 920 노컷뉴스 cbs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4년 9월 19일 (금) 오후 7시 3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 정관용> ‘1조 원 주고 산 캐나다 정유시설을 900억 원에 판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또 석유공사의 부실투자 등등을 지적하셨던 분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완주 의원, 나와 계시죠?

◆ 박완주> 네, 안녕하세요? 박완주입니다.

 

◇ 정관용> 이번에 팔기로 한 회사 이름이 노스아틀랜틱 리파이닝, 맞죠?

◆ 박완주> 네, 맞습니다.

 

◇ 정관용> 어떤 회사예요?

◆ 박완주> 일명 ‘날(NARL)’이라고 하는데요, 약칭으로요. 정제 회사입니다. 이 회사가 하베스트 회사의 자회사인데요. 주로 석유를 정제해서 휘발유나 경유나 증유 만드는,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SK나 현대같은 정유회사고요. 또 직접 주유소도 운영하고 있고 그다음에 원유나 이런 제품들을 저장해 놓은 시설을 갖춘 회사가 이번에 매각한 ‘날’ 회사입니다.

 

◇ 정관용> 이게 그런데 왜 1년에 1,000억 원씩이나 계속 적자가 나는 거예요?

◆ 박완주> 이미 그 ‘날’이라는 공장은 섬에 있어서 입지 조건이 참 안 좋고요. 이게 설립된 지가 1971년도에 설립됐기 때문에 장비도 훨씬 노후가 됐고 애초에는 우리 석유공사에서도 인수할 의향은 없었던 겁니다. 심지어는 캐나다 국영 석유회사, 패트로캐나다도 1986년도에 이것을 단 1달러에 판 회사예요.

 

◇ 정관용> 하!

◆ 박완주> 그만큼 경쟁력이 없는 회사이고 노후한 회사인 것은 그 당시 우리 석유공사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 정관용> 알고 있는데 그걸 1조 원이나 주고 샀어요?

◆ 박완주>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마도 저희가 작년 국정감사에서도 지적했는데, MB 정부 들어와서 해외자원 확보가 국정과제이고 하다 보니 애초에는 석유나 가스를 생산하던 하베스트에너지회사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이 ‘날’회사까지 끼워 넣기를 했던 겁니다.

 

◇ 정관용> 끼워 팔기를 했다?

◆ 박완주> 네, 끼워 팔기를 해서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정부와 석유공사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경영권 프리미엄이라고 해서 약 4,000억 원 정도를 더 웃돈을 주고서 사는 경우 그래서 애초보다는 처음 제안액보다 무려 2조 원 정도를 더 올려서 이 회사를 샀던 것입니다.

 

◇ 정관용> 그럼 하베스트에너지랑 이 ‘날’이라는 회사까지 다 합해서는 총 얼마를 주고 산 겁니까?

◆ 박완주> 총 4조 5000억 원이죠. 4조 5000억 원 중에 1조 원이 ‘날’이라고 하는 정유회사를 포함하게 됐던 겁니다.

 

◇ 정관용> 그런데 이게 1달러 정도밖에 가치가 없는 부실덩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1조 원 어치의 값을 쳐줬다는 것은 그래도 하베스트에너지 전체를 인수하게 되면 그래도 이득이 생길 것처럼 그렇게 판단했던 겁니까, 어떤 겁니까?

◆ 박완주> 결과적으로는 그런 판단을 할 수는 있는데, 사실은 저는 그런 경영적 판단보다는 해외의 자원, 석유 확보 이런 부분의 잘못된 MB정부의 정책으로 인해서 마지못해서 샀던 거죠. 이미 1달러의 가치도 없었고요, 우선 대한민국 정제 기술이 세계 1위입니다.

 

◇ 정관용> 그렇죠, 그렇죠.

◆ 박완주> 우리나라 수출의 1위가 석유제품인데, 이번 과정에서도 나오겠지만 대한민국 유수의 정유회사들인 SK나 GS나 현대오일뱅크한테 인수 의향을 물어봤을 때 거부를 했거든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이거는 명백하게 경제의 논리만 있었던 게 아니고 자원의 논리, 즉 외적인 요인에 의해 작동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국민들이 보기에는...

 

◇ 정관용> 그럼요, 네.

◆ 박완주> 이게 말도 안 돼요, 한두 푼도 아니고 1조 원씩이나 되는 것을 그야말로 국민 혈세를 갖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이건 정말 무한책임을 물어야 되는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자원외교의 뭔가 실적 쌓기 용으로 그냥 샀다, 이런 말씀이시잖아요?

◆ 박완주> 네. 이게 아주 대표적으로 전형적인 실패한 사례인 거죠.

 

◇ 정관용> 그러니까 이 ‘날’이라는 회사 자체로는 일 년에 한 1,000억 원씩 적자라고 하셨는데.

◆ 박완주> 네.

 

◇ 정관용> 하베스트에너지 전체로 봐서는 어떻습니까? 거기는 흑자가 나나요?

◆ 박완주> 이미 2009년도에 매입을 했기 때문에 사실은 하베스트에너지가 인수한 개발 유망성에 대해서는 아직은 비관적이지는 않은데요. 최근 3, 4년 동안 이 분야에 대해서서 ‘날’이 워낙 적자를 봤기 때문에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번에 아마 매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 하베스트에너지 쪽도 석유 매장량이 애초 추정했던 것보다 대단히 적다, 이런 보도도 있었지 않습니까?

◆ 박완주> 글쎄요, 그거는 뭐... 사실은 그 매장량 하고 생산,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생산하는 경우도 있고 탐사도 해야 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100% 산 것이 다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은 사실은 아닌데, 어쨌든 현재에서는 이 개발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알겠고요. 당시에 석유공사 사장은 강영원 사장, 전 사장인데 이 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 박완주> 저는 그 당시에 의원을 안 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 MB 정부 시절에 대거 민간출신 CEO들을 많이 채용을 했는데, 당시 대우인터내셔널 대표이사를 지냈던 그런 전문 경영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아하, 그래서 산 다음부터 매년 1,000억 원씩 적자가 이제 바로바로 보고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 박완주> 네.

 

◇ 정관용> 그러면 그 당시 경영진이나 이런 사람들한테 무슨 문책이 있었습니까?

◆ 박완주> 하...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조적으로 공기업에 있어서 ‘꼬리 자르기’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당시 강영원 사장은 사표를 냈고요. 그리고 징계 받은 사람은 실제로 딱 한 명, 실무업무 담당자 한 분이 감봉 1개월 처분을 받고 끝냈다는 것이 지난해 국감에서 밝혀졌습니다.

 

◇ 정관용> 아하, 그래요?

◆ 박완주> 그런데 이렇게 1조 원의 국세를, 혈세를 낭비했는데 이게 저는 구조적으로 이런 결정을 하는 곳이 한 업무 담당자가 업체 현황을 잘 몰라서 이랬느냐?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거는 명백하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무한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리고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 석유공사를 지도 감독하는 주관, 정부부처잖아요? 그 당시 장관이 누구십니까? 지금 경제부총리하시는 최경환 장관님이셨죠.

 

◇ 정관용> 아, 그래요?

◆ 박완주> 그리고 강영원 사장은 누가 추천하고 했겠습니까? 이거는 바로 정부와 청와대에서 이렇게 내정을 했던 건데, 마치 유체이탈 화법으로 나는 모르고 최종 책임은 실무자들한테 떠넘기기식, 이거는 저는 옳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혹시 무슨 그 뒷돈, 리베이트 같은 게 오갔다 뭐 이런 의심 같은 것은 없습니까?

◆ 박완주> 현재는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결과를 좀 봐야 되기는 하겠지만 상식적으로 애초에 계획했던 금액보다 2조 원 가까이 그리고 단 하루 만에 이 문제투성이인 ‘날’을 인수할 수 있는 곳이 여러 유관 전문기관에서 경제성 평가, 매릴린치 경제성 평가보고서를 만드는데도 단 5일 만에 만들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이걸 인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국책 사업을 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여기에 관여했던 부분에 있어서 국민들 눈높이와 상식으로 봐서는 우리 방금 사회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의혹도 심정적으로 갖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 정관용> 지금 감사원 감사가 진행 중입니까?

◆ 박완주> 네?

 

◇ 정관용> 거기서 제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박완주> 저는 이 정도 피해를 줬으면서 정말로 이런 식으로 무한책임을 지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면요. 정책의 안정성을 위하여 공무원들의 책임을 무한까지 물을 수는 없지만 정치적, 이렇게 추진하고 점검하지 않고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정말 청문회에서 불러서 자원외교 전체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 정관용> 네. 이명박 전 대통령 청문회 필요하다, 이 말씀이죠?

◆ 박완주>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얼마 전에 한신대의 경제학과 고기영 교수가 자원외교 실적을 쭉 정리를 해 봤더니 총 43조 원이나 들였었는데 별 결실이 없다, 이런 분석을 했거든요.

◆ 박완주> 네, 네.

 

◇ 정관용> 지금 이번에 1조 원 샀다가 900억 원에 팔은 정도일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또 다른 부실덩어리라서 또 팔아야 할 이런 것들이 또 여러 개 있는 거 아닐까요?

◆ 박완주> 네, 그렇습니다. 지난해 국감에서도 여러 동료 의원님들이 지적했는데요. 우선 석유공사는 이 ‘날’건이 제일 크기는 하지만 가스공사도 사실은 캐나다 엔카나 사의 혼리버와 웨스트컷뱅크 광구 손실액이 이미 7,112억 원에 달하고 있어요.

 

◇ 정관용> ...

◆ 박완주> 투자액의 75% 벌써 다 날려 보냈습니다. 광물자원공사에서는 많은 의원님이 지적했던 멕시코 볼레오 구리광산에서도 무려 1조 7400억 원 손실 봤어요.

 

◇ 정관용> 네.

◆ 박완주> 그래서 지난해에 감사원에서도 해외자원개발 및 도입실태 감사를 실시했는데, 이렇게 국민 혈세 더 낭비하는 사례가 없도록 이제는 좀 정리할 필요가 있고, 투자라는 것이 리스크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반드시 성공할 수는 없지만 일면 뭐 가스공사에서도 미얀마 광구라든지 이런 부분에서는 경제성 있는 것들도 발굴했기 때문에.

 

◇ 정관용>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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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주> 네, 이런 것을 정말로 내실 있게 잘 판단해서.

 

◇ 정관용> 옥석을 가려서, 옥석을 가려야 되겠죠?

◆ 박완주> 그렇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아이고, 그런데 뭐 손실액이 그냥 걸핏하면 조 단위가 넘는군요?

◆ 박완주> 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 정관용> 어쨌든 꼭 일단 진실이 제대로 좀 드러날 수 있게끔 박완주 의원님, 계속 좀 추궁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중앙일보의 이상한 여론조사 919 미디어오늘

서민증세·세수증대에서 ‘복지증세’, 일베-광화문 양비론 질문…“큰 문제 없지만, 고약한 느낌

중앙일보가 19일자 지면에서 각종 사회현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담뱃값 인상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일간 베스트’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인 일, 정부의 주민세·자동차세 인상 방침과 공무원 연금 개혁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문항이 다소 의아하다. 담뱃값 인상과 관련해 중앙일보는 정부가 담뱃값을 올리려는 배경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선택할 수 있는 답변이 ‘복지 증세를 위한 조치’와 ‘국민 건강증진을 위한 것’ 뿐이다. 결과는 ‘복지 증세’가 65%, ‘건강 증진’이 34%로 나타났다.

 

담뱃값 인상은 법인세 감면 등 부자감세로 부족해진 세수를, 서민의 호주머니 속에서 메우려 하는 ‘서민 증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본질이 서민들에 대한 ‘세수 확대’인 셈인데 중앙일보는 담뱃값 인상을 ‘복지 증세’라고 표현했다.

 

모노리서치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건강’과 ‘세수확대’를 응답보기로 제시했다. 결과는 세수확대가 39.4%, 국민건강 33.2%, 두 가지가 비슷한 비중이라는 의견이 23%였다.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담뱃값 인상이 복지에 사용될 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복지 증세’라는 단어가 ‘세수 확대’ 나아가 ‘서민 증세’라는 본질을 가리고 있다.

 

▲ 중앙일보 9월 19일자. 10면.

 

또 다른 여론조사 문항도 이상하다. 극우 성향의 사이트 일간 베스트 회원 중 일부가 벌인 광화문 폭식투쟁에 대해 3가지 선택지가 제시됐다. ‘유족들의 지나친 요구에 대한 당연한 반발’, ‘유족들에게 상처 주는 행동으로 중단해야’와 함께 양비론 격인 ‘폭식투쟁엔 반대하지만 단식투쟁도 끝내야’란 보기가 있다.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유족들을 비판하는 쪽이 10.4%, 일베의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는 쪽이 30.4%, 양비론적 시선이 56.2%로 나왔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단식투쟁을 끝내야 한다’는 보기를 다른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를 지지하지만 단식투쟁이란 방식은 적절치 않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반대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반대의견 중에는 ‘폭식투쟁에 반대하지만 단식투쟁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유족들에게 상처 주는 행동으로 당장 중단돼야 한다’는 의견보다 우세했다”고 해석했다. 일베의 폭식투쟁 문제를 양비론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한 연구원은 “‘세수증대’라고 표현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길 수 있는데 복지 증세라고 했을 때, 이를 다소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한 스탭 더 나간 것이지만 문항자체에 문제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이 연구원은 일베 관련 여론조사의 경우 “우리 업체에서도 그런 질문을 설계한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A도 싫고 B도 싫다는 응답에 몰릴 수밖에 없고,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은 다층적인 이슈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봤다”며 “결과를 왜곡시킬 수는 없다고 보지만 고약한 느낌은 든다”고 말했다.

 

한국 일베의 ‘위험한 미래’는 일본의 재특회 919 경향

일본 언론인 야스다, 한국 사회에 경고… 최근 ‘광화문 피자 폭식’에 올 것이 왔다 생각… 외면하지 말고 “나쁘다”라고 분명히 얘기해야

 

“‘일베(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의 약칭) 회원들이 이번에는 피자를 먹었습니다만, 언젠가는 그 피자를 다른 사람들을 향해 집어던질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행동이 보다 과격해질 수 있다는 얘기죠. 한국 사회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대응해야 합니다. 외면하거나 피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분명히 얘기해야만 합니다.”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사진)는 일베의 ‘위험한 미래’는 일본의 ‘재특회(在特會·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가 재일 한국인 등을 향해 보여온 그동안의 행동을 통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일베도 재특회처럼 거리로 뛰쳐나와 거친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의 생각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의미다. 재특회는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일본에서 부당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여온 우익 계열 단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배외(排外)주의자들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추적해 온 프리랜서 언론인인 그는 재특회의 움직임을 다룬 저서 <인터넷과 애국, 재특회의 어둠을 좇아서>를 통해 일본 사회에 ‘넷우익’(인터넷상의 우익세력)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바 있다.

 

 

■ 넷우익 방치 땐 과격해져 거리로 나와

야스다는 지난 1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경향신문 도쿄지국에서 인터뷰를 통해 “일베의 요즘 모습을 보면 한발 앞서 비슷한 길을 걸어온 재특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야스다는 지난 6일 일베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벌인 ‘폭식 퍼포먼스’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일부 일베 회원 등이 세월호 유가족 등이 단식농성을 벌이는 현장 인근에서 피자·치킨 등을 나눠 먹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접한 뒤 그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동안 천착해온 재특회 문제를 바탕으로 일베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넷우익 문제를 짚어보겠다는 의지를 밝힌 그는 재특회와 같은 넷우익을 방치해 결국은 커다란 문제를 부른 일본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특회가 처음 생겨난 2006년 무렵 인터넷에는 ‘재일한국인을 죽이자’, ‘한국인을 쫓아내자’ 등 과격한 구호들이 난무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인터넷에 모여 그들만이 즐길 수 있는 조직을 만든 뒤 과격한 발언을 주고받은 거죠. 인터넷 게시판은 물론 동영상 사이트까지 동원해 위험하고 과격한 발언을 쏟아냈지만 일본 사회는 그들을 ‘일부의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하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극히 일부의 극단적인 차별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이 인터넷 안에서 제멋대로 소란을 떨고 있을 뿐, 밖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면서 세상은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야스다는 재특회가 처음 거리로 쏟아져나왔을 때, 일본 사회가 받은 큰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그들의 행동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아무리 소란을 떨더라도 실제 생활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죠. 인터넷에서 벌어지던 일이 실생활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서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회원들이 욱일기 등을 들고 혐한시위를 벌이자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인종 차별주의 반대’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맞불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 | 연합뉴스

 

■ 언론은 극단적 행동 벌어진 뒤에야 관심

그는 재특회와 같은 넷우익이 성장하게 된 데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면서, 한동안 이 문제를 외면해온 자신도 크게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넷우익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것은 언론이었습니다. 신문, 잡지, TV 등 그 어떤 매체도 그들의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이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일탈’이라면서 방치하는 동안 인터넷 안에서 그 규모가 점점 커졌고, 한국이나 재일한국인들을 비판하는 다양한 책까지 내는 등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올 징조가 강하게 나타났는데도 모든 언론들이 남의 일처럼 취급한 거죠. 일부의 극단적인 사람들이 레일에서 벗어나 폭주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서 누구도 취재하지 않았고, 마주앉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재특회 출범 초기 야스다 자신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신문과 잡지의 기자나 편집자들에게 넷우익의 문제를 제대로 취재해 보도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그때 편집자나 기자들은 ‘기사를 쓰면 쓸수록 그들(넷우익)을 인정해주는 꼴이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무시해야 한다. 매스 미디어가 무시하면 언젠가는 저런 조직은 작아질 것이고 결국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부끄럽지만 나도 그들의 논리에 휩쓸리면서 당시에는 문제를 외면했다”고 고백했다.

 

■ 회원 아니라도 ‘동조자’ 점점 늘어 문제

결국 일본 사회와 언론은 문제가 곪아서 터진 뒤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2009년 이후 재특회 회원들이 일본 내 조선학교에 가서 재일한국인·조선인을 배척하는 가두방송을 하고,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나 오사카(大阪)의 쓰루하시(鶴橋) 등 재일한국인이 많이 있는 곳에서 시위를 하는 등 넷우익들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자 언론들이 뒤늦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회와 언론이 사전에 관심을 갖고 제대로 비판함으로써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었다면 아마도 그런 극단적인 행동은 없었거나 최소한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스다는 “나 스스로도 이런 뒤늦은 반성을 통해 재특회에 대한 본격적인 추적 취재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야스다는 앞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넷우익의 문제는 재특회 또는 일베의 회원은 아니지만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요즘 재특회가 ‘이상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 가입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재특회도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이른바 ‘자이니치(在日·재일 한국인을 줄여서 이르는 일본어)는 역시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른바 배외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배외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저변이 자꾸만 넓어지고 있다는 얘기죠. 아마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겁니다.”

 

야스다는 일베의 정치단체화 가능성과 관련, “일베에서 바로 정치인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일베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들을 근거로 해서 정치활동을 하려는 극우 성향의 정치가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한국사회는 인식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의 자민당이나 일본유신회 등의 일부 우익정치인들이 이미 그런 활동에 들어간 점을 그 예로 들었다.

 

극우성향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들과 자유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지난 6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월호특별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장 근처에서 ‘폭식투쟁’을 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고 교보문고 앞 인도로 이동하고 있다. | 뉴시스

 

■ 일베 표적, 외국인 이주자로 옮겨갈 것

그는 ‘광화문 폭식’과 같은 일베의 퍼포먼스는 앞으로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과격한 퍼포먼스의 대상은 점차 외국인에게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퍼포먼스는 결국 매스컴 등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퍼포먼스라는 것은 그 속성상 더 심해지고, 더 화려해져야만 주목을 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심한 슬로건을 내세우는 등 점점 격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북한이나 이른바 ‘빨갱이’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일베가 지금의 운동에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 오면 결국 표적을 외국인, 한국에 와서 사는 이민자들로 바꾸게 될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인 국제화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야스다는 “재특회·일베와 같은 넷우익의 가장 큰 특징은 격한 구호 이외에 제대로 된 논리가 없다는 것과 어린 중학생에서부터 나이가 지긋한 어른까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거기에 참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방치하면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넷우익의 규모가 커지고, 그들이 사회로 쏟아져나온 뒤에는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데 많은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든다”면서 “한국은 재특회의 폐해를 먼저 경험한 일본의 예를 통해 넷우익에 미리 관심을 갖고 대응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1년 반 재특회 취재해 책 펴내며 이름 알려… 외국인·노동 분야 관심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49)는 일본의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한동안 각종 사건과 노동문제를 주로 취재해 오던 그는 요즘 일본 내 외국인 차별, 혐오범죄 문제를 대상으로 취재와 집필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2012년 4월 <인터넷과 애국, 재특회의 어둠을 좇아서>를 출간하면서 일본 국내외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이 책은 지난해 5월 <거리로 나온 넷우익>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됐다.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흔히 ‘재특회(在特會)’로 일컬어지는 넷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인터넷에서 주로 진행되던 극우 담론을 거리로 옮겨온 사람들을 파헤친 책이다.

 

최근 들어 재특회와 너무나도 비슷하다고 느껴진다는 한국의 일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야스다는 일단 관심을 가진 문제에 대해서는 끝을 보고야 마는, 끈질긴 취재와 집필로 유명하다. <인터넷과 애국, 재특회의 어둠을 좇아서>의 집필을 위해 그가 취재에 들인 시간은 1년6개월에 이른다. 그는 취재 기간에 재특회 관계자는 물론 재특회와 반대 입장에 있는 다른 단체 등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았지만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취재 및 집필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사회를 지켜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의 이런 노력과 열정은 지난해 ‘일본 저널리스트상’, ‘고단샤(講談社) 논픽션상’ 등 각종 상으로 평가를 받았다.일본의 진보성향 신문인 마이니치(每日)신문의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01년부터 프리랜서로 독립한 그는 노동문제와 관련해서도 많은 기사를 쓰고 책을 냈다.일본 내 외국인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차별 등을 심층적으로 다룬 <르포, 차별과 빈곤의 외국인노동자> <외국인 연수생 살인사건> 등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선거법 무죄’ 선고에 탄식하던 기자들 918 시사인

‘원세훈 재판’은 1년 넘게 진행됐다. <시사IN>은 재판 내내 참석해 증언 내용을 기록하며 ‘법정 중계’를 해왔다. 법정 중계를 담당했던 기자들이 선고 직후 한자리에 모였다. 길었던 1심 재판을 두고 할 말이 많았다. 1년 넘게 ‘원판(원세훈·김용판)’ 법정 중계를 담당했던 기자들이 다시 모였다. 지난 2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선고 이후 7개월 만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선고가 난 9월11일 이뤄진 이번 방담도 취재기자들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처리했다. 닉네임은 김하영씨 등 국정원 직원이 ‘오늘의 유머’(오유) 사이트 등에서 쓴 아이디에서 따왔다.

 

추천내놔라잉(추천):원세훈 전 원장 선고 날 현장 분위기는 김용판 전 청장 선고 때와 비슷했다. 선고 후 자신을 호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법정을 황급히 빠져나가다 기자들과 뒤엉켰다.

 

ⓒ시사IN 이명익  원세훈 전 원장(가운데)은 선고 직후 호위하는 사람들과 황급히 법정을 빠져나가다 기자들과 뒤엉켰다.

 

선동반대(선동):원 전 원장 때가 더 심했다. 통상 피고인은 기자들이 대기하는 프레스 라인에 와서 선고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데, 원 전 원장은 정해진 문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원 전 원장 옆에 서 있는 ‘어깨’들, 정말 짧은 머리에 덩치가 산만 한 조폭 인상이었는데, 이들이 너무 심하게 기자들을 밀쳤다. 법원 경위까지 넘어졌다. 기자들의 항의를 받고 상황을 정리해보려던 이동명 변호사가 원 전 원장에게 다가가자, ‘당신 뭐냐’며 큰소리를 쳐서 이 변호사가 머쓱해 물러나기도 했다.

 

추천:누구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 김 전 청장 때는 사복경찰이 호위를 했다. 이동명 변호사 말이 자기들도 모르는 보수 단체 사람들이라고 하던데, 보수 단체에서 왔느냐 국정원이냐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선동:그 사람들이 하도 밀어대니까 기자들도 소속사 불문하고 ‘곤조’가 돌았다. 카메라 기자들이 원 전 원장을 코너에 몰아넣은 다음, 사실상 감금 취재를 했다(웃음). 마이크 7~8개를 들고 있던 여자 풀(기자 대표) 기자를 밀어버리자, 나중엔 남자 풀 기자가 원 전 원장 목 뒤로 팔을 걸어 마이크를 들이댔다. ‘어깨’와 함께 인상적인 사람이 원 전 원장의 부인이었다. 매번 재판에 나왔는데, 집행유예 선고를 받자 웃음이 만면에 돌더라. 그러면서 원 전 원장이 감금 취재를 당하고 있는데도 변호사에게 “우리 차 어디 있어요?” 묻더니 차 타러 가더라.

 

ⓒ연합뉴스  이범균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해 ‘선거법 무죄, 국정원법 유죄.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추천:법정에 들어갈 때 1층 검색대에서 몸수색까지 했다. 법원 취재를 수년 다녔어도 몸수색은 처음 당했다. 들어갈 때부터 깐깐하게 하는 걸 보면서 ‘무죄인가’ 싶더라. 무죄에 항의하는 방청객을 미리 점검하는 건가 싶어서.

 

응답없음1997(응칠):나는 재판부가 증거를 다 날리는 식으로 무죄를 낼 줄 알았다. 지난해 말 한창 증거 능력 문제를 가지고 검찰과 변호인이 씨름할 때, 검찰이 밀리는 분위기였다. 결국 핵심 증거였던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으니까.

 

선동:법조 기자들도 줄타기 판결은 예상했다. 이범균 부장판사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무죄를 주었으니, 원 전 원장에게는 유죄를 주는 ‘줄타기’를 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선거법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아킬레스건이라서 이걸 어떻게 판단할지 기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국정원법 위반 부분 판결을 먼저 읽었는데, 워낙 센 워딩(표현)이 나와서 선거법까지 유죄가 나나 싶었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 부분을 읽을 때 몇몇 법조 기자들은 탄식을 하더라. 양형 사유까지 원세훈 전 원장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걸 보고, 법조 기자들은 ‘짜맞추기’ ‘자판기’ 판결이라는 반응이었다.

 

반대는비수(비수):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 국정원 직원에 대한 환상 아닌 환상이 깨졌다. 정보요원이라면 뭔가 날카롭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상상하지 않나. 그런데 웬걸, 증인으로 나오는 국정원 직원마다 레퍼토리가 똑같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어찌나 하던지, 그런 기억력으로 어떻게 나라 안보를 책임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거의 이메일도 안 쓰고, 트위터가 뭔지도 잘 모르고, 자신이 근무한 기간도 명확하게 모르고, 자기 아이디조차 기억이 안 나는 요원들이었다. 이범균 부장판사도 지적할 정도였다.

 

응칠:게다가 증언할 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재판부의 지적을 받은 사람도 꽤 되었다. 현직 국정원 직원이 증인으로 나오다 보니, 법정에는 재판석과 방청석 사이에 가림막이 늘 등장했다. 그 가림막 때문인지 더 목소리가 안 들려서 재판 내용을 노트북에 받아 적을 때 힘들었다.

 

비수:반복되는 기억상실증에 개미 목소리를 듣다 보면 졸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웃음). 그중에서도 스스로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고 인정했던 안보5팀(트위터 담당) 김 아무개 직원은 아직도 안 잊힌다. “30여 년 공직 생활을 했지만 검사님만 보면 사지가 떨려서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고, 트위터를 했던 장소도 잘 기억이 안 난다면서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유랑자처럼 그냥 아무 데나 돌아다녔다”라고 했다(웃음).

 

추천:그와 대비되었던 증인은 안보3팀(커뮤니티 담당) 김하영 직원이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차게 증언했다. 댓글 사건의 당사자라 경찰, 검찰 수사부터 국정조사까지 받으며 여러 차례 관련 진술을 해봐서 그런지 굉장히 노련했다. 원 전 원장을 변론한 이동명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지금까지 나온 증인 중에 제일 똑똑하다”라며 김씨를 칭찬할 정도였다.

 

비수:국정원 직원의 증언 중에는 ‘말 말 말’ 감도 여럿이었다. 안보3팀 5파트장 이 아무개씨는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있냐는 검사의 질문에 “(여자 연예인) 엉덩이 나온 사진 이런 거 보면 관심 있고”라고 대답했다. ‘오늘의 유머’ 연예 게시판에서 한 찬성·반대 클릭에 대한 물음이었는데, 저런 발언을 했다. 취재하던 여기자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동:‘오유’ 하니 이호철 증인도 생각난다. 오유 운영자인 이씨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밝혀낸 숨은 주인공이다. 사건 초기 국정원은 정치 관여 댓글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오유에서 활동한 흔적이 나오니 오유가 종북 사이트라고 공격했다. 거기에 열받은 이씨가 김하영 직원이 쓴 글을 다 찾아서 언론사에 제보했고 검경 수사에도 협조했다. 재판 때도 변호사가 오유가 편향된 거 아니냐는 질문을 하자, 이씨는 “일베에서 그렇게 말한다”라며 일갈한 적도 있다(웃음). 이씨는 대학 때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특정 정당에 가입하지도 않은 평범한 시민이다. 처음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국정원 직원 같다며 신경을 썼고, 배달도 안 시킨 생수가 집으로 오기도 했다며 힘들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사를 적극 도왔다.

 

추천:증인도 많았고 기억에 남는 장면도 많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재판이 길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타자 실력은 향상된 것 같다(웃음). 원래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부에서는 노트북 사용이 안 된다. 재판장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데, 재판이 열리기 전 기자단이 허락을 받아내 조금이나마 재판 취재가 수월했다. 노트북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아마 법정 중계가 불가능했을 거다.

 

 

ⓒ서혜주 그림 현직 국정원 직원이 증인으로 나오다 보니 법정에는 가림막이 늘 등장했다. 그 가림막 너머에서 증인들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말했다.

 

응칠:검찰이 1차 공소장을 변경하며 추가 기소한 트윗 5만5600여 건이 증거로 제출되면서, 변호인이 그걸 엑셀 파일로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종이에 인쇄된 채로 증거를 주니 일일이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형철 부팀장이 엑셀 파일이 첨삭되거나 변경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주기 힘들다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엑셀 파일을 확보해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이 언론에 언급되고 있다”라는 말을 덧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속으로 좀 웃었다. 우리 기사(<시사IN> 제320호 ‘박근혜 실언할 때마다, 조직적 방어 트윗’)를 가리킨 거 같은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웃음). 박 부팀장이 안심해도 되는 게, 검찰 어디서도 엑셀 파일이 유출된 적은 없다. <시사IN>도 국회 법사위원에게 제공된 프린트물 5만5600여 건을 입수했고, 그것을 일일이 엑셀에 입력했다. 완전 노가다였다. 최대한 빨리 해야 분석할 수 있다고 쪼는 팀장 덕에 아르바이트생 40명과 함께 이틀 만에 해냈다(나중에 팀장은 일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털어놓았다). 들어간 알바 비용만 400여만 원이니, 꽤 비싼 기사인 셈이다(웃음). 알바에 동원된 상당수는 엑셀에 쳐서 넣어야 할 양에도 지치지만, 그 너저분한 비하 발언을 보고 있으니 더 피곤하다고 했다. 입력 아르바이트한 사람 중에는 이후에 기자가 된 사람도 있다.

 

선동:언론의 법조 취재라는 게, 주로 검찰 기소 단계에 맞춰져 있다. 검찰이 누구를 수사하고 있고 기소할 거라는 소식 하나하나가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이슈가 되지만, 정작 재판 과정은 제대로 보도가 안 된다. 전체 사실이 100이라면, 검찰 단계에서는 10~20밖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지는 나머지 사실에 대해서는 그동안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정원 재판의 지면 중계를 기획했고, 이 실험이 의미 있었다고 자평한다. 국정원 직원들의 발언이 어떻게 바뀌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날것 그대로의 법정 발언을 가져와서 보여주면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했다. 법정 내부 사진 촬영이 되지 않아서 서혜주 작가가 매번 법정에 들어가 내부 스케치를 했다.

 

응칠:그런 자료 덕분에 디지털 프로젝트 페이지 ‘응답하라 7452(http://nis7452.sisainlive.com/)’ 페이지도 만들었다. 오픈 첫날은 사이트가 다운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국정원 댓글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은 언제나 찾아주시면 된다. 아직 2심, 3심이 남아 있다.

 

 

 

그들은 어떻게 무죄를 만들었나

1년3개월여 만에 내려진 1심 선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웃었다. “1심 판결은 수사 방해, 검찰총장 찍어내기, 수사팀 공중분해, 짜깁기 판결 등 무죄 만들기 흐름이 총체적으로 진행된 결과다.” 한 검찰 관계자의 말이다.“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이가 부러졌다는 판결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1심 선고 직후, 수사 상황을 잘 아는 검찰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개입을 했지만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판결을 압축한 평가다.

 

2013년 6월14일 검찰 특별수사팀이 원세훈 전 원장을 기소하며 시작된 1심 재판의 선고가 1년3개월여 만에 내려졌다. 검찰 특별수사팀은 형식적으로는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지만, 내용적으로는 완패했다. 항소심과 대법원 등 상급심이 남아 있지만, 검찰 수뇌부는 벌써부터 몸을 사리고 있다. 판결 뒤 으레 나오는 ‘즉각 항소하겠다’는 브리핑 대신, ‘판결문을 정밀 검토하고 항소 여부를 판단하겠다’라며 말을 아꼈다.

 

그만큼 원세훈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는 검찰마저 부담스러운,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과 연결된 ‘뇌관’이다. 1997년 안기부 북풍공작 사건 이후 15년 만에 드러나는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인데, 1997년 북풍공작 사건은 수사 당시 정권을 쥔 김대중 정부가 피해자였지만, 2012년 댓글공작 사건은 박근혜 정부가 수혜자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선거법 혐의에 대한 ‘뇌관’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보통 ‘윗선’의 이런 작업은 보이지 않는 손이 은밀하게 작용하는데, 이번 사건은 맨얼굴을 드러냈다.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는 검찰 관계자는 “1심 판결은 수사 방해, 검찰총장 찍어내기, 수사팀 공중분해, 짜깁기 판결 등 무죄 만들기 흐름이 총체적으로 진행된 결과다”라고 말했다.

 

증거 배척된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

검찰 특별수사팀이 원세훈 재판에서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직감한 것은 지난 6월30일 재판부가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의 증거능력을 배척하면서다.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 소속 김 아무개 직원의 이메일에 첨부된 이 파일은,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의 ‘X파일’이었다. 대선·정치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를 마친 후 취재진을 피해 법원을 나서던 중 인터뷰를 요구하는 기자들과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특별수사팀은 국정원 직원들이 포털 사이트 게시 글을 대량 삭제해 애를 먹었다. 겨우 찾아낸 것이 게시글 1977개와 1711회에 이르는 찬반 클릭이었다. 수사팀이 내심 쥐고 있던 회심의 카드가 바로 트위터였다. 특별수사팀은 수사 초기부터 트위터 계정 추적에 나섰다. 지난해 5월 빅데이터 업체로부터 임의제출 받은 트위터 정보를 활용하며 강제수사에 나섰고 10월10일 안보5팀(트위터팀) 김 아무개 직원이 자기 메일에 첨부한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을 확보했다. 이 파일에는 트위터 팀 소속 국정원 직원들의 이름 앞 두 글자와 269개 트위터 계정, 비밀번호, 활동 일시, 장소 등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 검찰이 5개월 동안 찾아 헤맨 결정적인 물증이었다.

 

이처럼 트위터 여론조작 수사의 출발점이었던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을 재판부는 막판에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이 파일에 담긴 트위터 계정을 ‘진술 증거’로 보았다. 김 아무개 직원이 본인이 작성했다고 인정하는 진술을 해야 인정되는 증거로 본 것이다. 자기 계정 메일로 자신한테 쓴 메일에 첨부된 파일이지만, 재판부는 본인이 썼다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며 그 문서에 담긴 기초 계정 269개뿐 아니라, 여기서 파생된 계정을 모두 증거에서 배척했다.

 

대신 재판부는 법정에 나온 국정원 직원들이 자기들이 사용한 계정이라고 인정한 175개 트위터 계정과, 이 계정에 담긴 11만3621회 트위터 내용만 증거로 채택했다. 검찰 관계자는 “그때 아마 윤석열 팀장이 법정에 있었다면, 현장에서 재판장과 변호인의 논리를 반박하며 세게 붙었을 것이다. 당시 수사팀처럼 논리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혜주 그림   9월11일 오후 1시간가량 판결문을 들은 원세훈 전 원장은 재판장의 선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혜주 그림   통상 선고 재판에 공판 검사만 나오는데, 이날은 박형철·김성훈·이복현 검사도 검사석에 앉아 판결을 들었다

 

실제로 윤석열 팀장이 배제된 당시 수사팀은 법정에서 별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7월13일 결심공판에서야 검찰 특별수사팀은 “(증거 배제는) 법리상 수긍할 수 없다. 이미 증거 조작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증거 판단을 번복하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시큐리티 텍스트 파일을 김 아무개 직원이 아닌 제3자가 작성했을 가능성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작성자를 특정할 수 없었던 성매매 고객 정보 기록이 담긴 디지털 문서를 직접 증거로 본 대법원 판례와 상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버스가 떠난 뒤였다.

 

재판부는 증거 채택뿐 아니라 법리와 양형 판단에서 들쑥날쑥한 잣대를 들이대 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다는 비판을 샀다. 재판부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한 공모 관계를 지적할 때는 ‘정치개입으로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 강조 말씀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재판부는 “국정 홍보를 강조하며 반복 지시한 점에 비추어보더라도 (정치개입 금지) 발언은 일탈행위(정치개입)를 방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로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일종의 알리바이로 본 셈이다. 그런데 선거법 위반 혐의를 다투면서는 “선거 종료 시까지 불필요하게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주기 바람(2012년 11월23일)” 등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서 알리바이용으로 본 발언을, 선거개입을 하지 말라는 논거로 받아들여 무죄판결을 내렸다.

 

반면 ‘원장님 지시 강조 말씀’ 가운데, “이제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종북 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가지고 어떻게든 정권을 잡으라 그러고(2012년 2월17일)” 등 대선을 염두에 둔 발언에 대해서는, 대선 후보자의 당선이나 낙선을 바라는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발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검찰 관계자는 “2012년 2월 트위터팀을 만들 것을 지시했고, 그 뒤 트위터팀이 안철수·문재인 후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트위터를 대량으로 올렸다. 원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이것이 가장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선거운동이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서혜주 그림  윤석열 수사팀장(위 사진에서 서 있는 이)은 수사 도중 직무에서 배제되었다.

 

게다가 재판부는 무엇보다 ‘비정규직 상여금 10만원 지급반대, 은행장 16억 연봉 찬성, 원조 딱지, 다운계약서, 논문표절, 군복무 위수지역 이탈, 또 뭐가 나오려나 찰스, 진실이란 어린애들 모아놓고 야부리 깔 때만 적용되는 찰스의 진실’ 등 그나마 증거로 인정한 트위터 11만여 건에 대해 선거법 위반 혐의를 판단하지 않았다. 원 전 원장의 지시가 없었다는 점만 들어 무죄판결을 내려버렸다.

 

선거법은 무죄로 판단했더라도 정치개입이 입증된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한 양형도 봐주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범균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이 건설업자로부터 1억7000여만 원을 받은 혐의와 관련한 1심 재판도 맡아 징역 2년을 선고한 장본인이다. 이 부장판사는 이번에 ‘국민의 건전한 정치적 의사표현에 대해 국가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를 반대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라고 판단하면서도 정작 형량은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개인 비리 사건과 국정원 심리전단 70여 명이 동원된 정치개입 사건의 경중을 따져보았을 때, 이 부장판사의 저울추는 민주주의 훼손을 더 가볍게 본 셈이다.

 

그래서 법조계에서는 이 판결을 두고 청와대 눈치보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지난해 재판 진행 중에 박 대통령이 1심 결과를 지켜보자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았느냐. 재판을 맡은 판사라면 당연히 부담이 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박 대통령은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의 회담에서 “1심 판결이 나오면 모를까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사과하는 건 맞지 않다”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법조계에서는 선고 가이드라인 제시라는 말이 돌았다. 게다가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은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라고 사석에서 공공연히 말하고 다녀 법조 기자들 사이에 알려질 정도였다. 이때 무죄 소신을 밝힌 서울중앙지법원장이 박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임명한 황찬현 현 감사원장이다.

 

이렇게 사법부에 대해서는 일종의 가이드라인과 인사 발탁이라는 당근을 제시한 청와대가, 특별수사팀에 대해서는 채찍을 동원했다.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가 그것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고용복지수석실, 교육문화수석실 등이 동원되어 채 전 총장의 혼외자로 지목된 채 아무개군의 개인정보를 확인했다.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 수사를 맡은 검찰은 이들 대부분을 정상적인 감찰 활동에 해당한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배후는 밝히지 못한 채, 조오영 전 청와대 행정관과 조이제 전 서울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 송 아무개 국정원 정보관만 불구속 기소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곽상도 전 민정수석과 함께 찍어내기의 장본인으로 거론되었던 이중희 민정 비서관은 지난 8월 인사에서 주요 보직으로 꼽히는 부산지검 2차장으로 발령이 났다.

 

ⓒ시사IN 이명익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초기부터 국정원 댓글 공작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혔다.

 

청와대와 법무부가 이렇게 ‘아군 적군’을 구분하는 ‘시그널 인사’를 하면서, 뇌관 제거 작업은 속도를 냈다. <조선일보>의 채 총장 혼외자 의혹 보도 이후 처음 열린 재판 때 윤석열 팀장은 재판정에 나오지 않았다. 총장 찍어내기는 수사팀에게도 충격파였고 부담이었다. 특수부 검사와 공안 검사를 묶어서 한 팀을 만든 게 바로 채동욱 총장이었고, 채 총장은 국정원 수사에 있어서만은 수사팀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런 바람막이가 사라지면서, 특별수사팀은 외풍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청와대와 함께 또 다른 외풍의 진원지는 법무부였다. 1심 판결 결과만 보면 국정원 댓글 작업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최초 의견이 확인된 것이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만들어진’ 판결이나 다름없다. 법무부와 검찰 수뇌부는 인사를 통해 특별수사팀을 공중분해시켰다. 청와대나 법무부가 검찰을 컨트롤하는 유력한 도구는 인사다. 지난 1월 박형철 부팀장을 대전 고검, 윤석열 전 팀장은 대구 고검 등 한직으로 발령냈다. 평검사인 단성한 검사도 대구지검으로, 김성훈 검사는 광주지검으로 인사를 냈다. 이복현 검사만 서울중앙지검에 남았다.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공소 유지를 담당하게 하는 일종의 힘빼기 인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반면 특별수사팀을 압박하는 지휘계통에 있었던 이진한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는 대구서부지청장으로 전보되어 유일하게 문책성 인사를 피했다.

 

외압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검찰 특별수사팀도 공소 유지에 정교하지 못했다. 수사팀은 공소장을 세 번이나 변경했다. 지난해 10월 1차 공소장 변경은 윤석열 팀장이 총대를 메고 돌파하면서 5만5689건에 달하는 트위터 혐의를 추가했다. 검찰이 주도권을 잡았다. 또 11월 그룹 활동을 추가해 121만 건으로 늘린 2차 공소장 변경도 수사팀 검사들이 사표까지 걸고 버틴 끝에 관철시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3차 공소장 변경은 변호인의 역공에 말린 검찰이 방어적으로 트위터 수를 78만 건으로 축소하며 변경했다.

 

여기에는 국정원 대응팀과 검찰 디지털 수사관의 물밑싸움에서 검찰 수사팀이 밀린 원인도 있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어떻게든 사이버 여론조작 의혹을 산 트위터 숫자를 줄이기 위해 국정원 안에서 대응팀을 꾸렸다.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수십만 건의 트위터 계정에 대해 일일이 검증에 들어갔고 그 결과물이 변호인을 거쳐 재판부에 제출되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국정원 직원이 쓰지 않은 트위터 계정이 확인되었고, 이범균 부장판사는 “하나가 허물어지면 전체 모든 계정이 허물어질 수 있다”라며 수차 경고를 하기도 했다.

 

ⓒ시사IN 조남진  2013년 9월16일 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와의 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 공작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는 ‘선고 가이드라인 제시’라는 말이 돌았다.

 

법원 내부의 공개 비판 “법치가 무너졌다”

이 같은 국정원의 공세적인 대응 중심에는 남재준 전 원장이 있었다. 지난해 10월17일 안보5팀(트위터팀) 직원 3명이 수사팀에 붙잡혔다. 남 원장이 진술 거부를 지시했지만 이 가운데 2명이 비교적 상세한 진술을 했다. 이 얘기를 들은 남 원장은 정보기관 직원답지 않다며 분개했다. 그 때문인지, 재판 초기 법정에 나온 안보3팀 소속 직원들은 말을 바꾸는 등 해명 진술이라도 했지만, 안보5팀 트위터 소속 국정원 직원들은 안면몰수 증언으로 일관했다. 진실을 다투는 법정에서도 이들은 ‘진술을 거부하겠다’가 아니라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력이 원래 나쁘다’ 등의 김빼기 증언으로 일관한 것이다. 재판부가 “자기가 근무한 부서도 모르느냐”며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장판사는 그런 이들의 진술을 일부 채택해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의 근거로 삼았다.

 

이번 판결을 두고 검찰이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부터 공개 비판이 나왔다. 동료 판사들의 판결문에 대해서는 일체 평가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김동진 부장판사가 1심 선고 다음 날 “법치가 무너졌다”라는 글을 내부 통신망에 올린 것이다. 판결문을 정독했다는 그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어설픈 영웅주의자들 광장을 욕보이다 917 시사저널

일간 베스트’는 하루 동안 추천을 많이 받은 사진을 따로 모아둔 갤러리 이름이었다. 일베에 자신의 글이나 사진이 오르면 어설픈 영웅 심리가 생긴다. 이를 잊지 못해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이 올라왔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타인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변질됐다. 상식에 반하는 언행이 계속되자 일베를 청소년 유해 사이트로 지정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일부 과격한 일베 회원은 검찰에 기소되는 일도 생겼다. 일베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사회 지도층은 말을 섞기 싫다며 애써 일베를 외면한다. 일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커지고 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9월6일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약칭 일베) 회원 100여 명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들이 단식농성을 벌이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피자·치킨·라면·도시락·햄버거 등을 먹고 노래를 불렀다. 일부는 단식농성장을 오가며 음식을 먹고 농성자들이 보란 듯 인증 사진도 찍었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이 오프라인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베 회원들은 “공원에서 음식을 먹는 게 무슨 잘못이냐”며 “광화문광장을 시민에게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9월6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일베 회원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다. ⓒ 오마이뉴스

 

취지야 어떻든 자식을 잃고 극한의 슬픔에 빠진 유족들의 단식농성장 앞에서 ‘폭식 행사’를 벌인 행위는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현장에는 추석을 맞아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추석상이 차려져 있었다. 일부 일베 회원과 시민들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져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현장을 지켜본 직장인 주 아무개씨(38)는 “민주사회에서 자기주장을 자유롭게 펼칠 권리가 있지만, 그로 인해 타인이 받게 될 상처를 헤아리지 않는 점은 문제”라며 “정도가 지나치면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사회적 공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일반인 가운데는 일베 회원을 벌레(일베충)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부 성 아무개씨(50)는 “광화문광장을 시민에게 돌려달라는데, 세월호 유족도 시민이고 광장에서 농성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단식농성장 앞에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벌레만도 못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일베의 뿌리는 디지털 사진 동호회 성격의 인터넷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다. 1999년 개설된 이 사이트는 댓글이나 조회 수가 많은 사진을 ‘일간 베스트’라는 게시판에 따로 모았다. 회원들은 자신의 사진이 일간 베스트에 꼽히면 자부심을 느꼈다.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사진과 글이 게시되기 시작했고, 디시인사이드는 운영 규칙에 어긋난다며 부적절한 사진과 글을 삭제했다. 이에 반발한 일부 회원이 2010년 따로 떨어져나가 만든 사이트가 지금의 일베다.

 

“재미만 추구하는 삼류 커뮤니티 불과”

일베는 2012년 대선을 분기점으로 보수 성향을 드러내면서 회원 수 100만명에 이르는 대형 사이트로 탈바꿈했다. 일각에서는 일베를 보수단체로 정의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한 심리학 교수는 일베를 “비하, 지역감정, 여성 혐오, 냉소, 재미만 추구하는 삼류 커뮤니티에 불과하다”며 “아무 생각 없이 욕설과 주장을 배설하는 곳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일베 게시글에는 존칭어가 없다. 이 사이트의 공지사항에는 “일베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인 회원 간 반말 문화는 인터넷 공간에서 사회적 지위나 성별, 나이를 떠나서 편하게 의견을 게재하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사회적 이슈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의견을 게재하는 데 프레임이 만들어져 있다면 자율성은 그만큼 침해를 받게 될 것은 당연하다”는 반말 사용 이유가 설명돼 있다.

 

민주사회에는 표현의 자유가 있으나 그것이 타인에게 모욕적이고 심지어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수준이라면 사회적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일베의 일부 게시글은 단순 재미 수준을 넘어 이념 갈등, 욕설, 여성 비하, 지역감정 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예컨대 무책임하고 이성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진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년’이라는 말은 여성 혐오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김치는 한국의 전통음식이고, 여기에 여성을 낮춰 부르는 ‘년’을 붙임으로써 모든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호남 지역 사람을 홍어로 비하하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거나 특정 인물을 폄하하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알라(노무현과 코알라의 합성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슨상님, 박원순 서울시장을 원숭이에 빗대 박원숭이라고 희화한다. 일베 회원의 단어 패턴을 분석한 일베리포트(2011년 7월~2013년 5월)에 따르면, 가장 많이 사용된 주제어는 씨X, 존X 같은 욕설(5417개)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폄훼해 희생자와 가족들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20대 일베 회원 2명이 지난 7월10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참배한 후 사죄하고 있다. ⓒ 5·18기념재단

 

‘유해 사이트 지정’ 서명운동 잇따라

반말·욕설 등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글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 ‘일간 베스트’에 자신의 글이 오르면 우쭐하는 자아도취 이른바 ‘어설픈 영웅 심리’에 빠진다. 그러나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살인 현장 사진’ 파문이다. 올해 6월 ‘긴급속보 사람이 죽어 있다’는 제목의 사진이 일베에 올랐다. 가정집으로 보이는 곳에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쓰러져 있고 그 여성의 머리 주변에는 빨간색 액체가 흘렀고 깨진 화분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이 사진은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일부 네티즌의 신고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기까지 했다.

 

최근 일베를 청소년 유해 사이트로 차단해달라는 서명운동이 잇따르고 있다. 2012년 길을 가던 초등학생을 때리고 일베 만세를 외친 남성이 동영상을 일베에 올려 물의를 빚었다.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일베를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진행되기도 했다. 지난해 전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씨의 자살 소식에 일부 일베 회원은 유가족에 대한 악성 댓글을 달아 물의를 빚었다. 울랄라세션 소속의 가수 임윤택씨가 위암으로 사망하자 그를 조롱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때도 일베를 유해 사이트로 지정해달라는 서명운동이 다시 진행됐다.

 

일부 게시물에 도를 넘는 측면이 있고, 관련 신고가 꾸준히 들어오지만 커뮤니티 성격의 사이트인 데다 관리자가 수시로 부적절한 게시물을 삭제한다는 이유로 방심위는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자 법에 호소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국면이다. 올 7월 일베 회원 2명은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반성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매도하고, 당시 계엄군에 의해 살해돼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이 부패하는 남새를 홍어 삭힌 냄새와 비슷하다며 조롱한 것과 관련해 검찰이 일부 일베 회원을 기소한 직후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는 일부 네티즌을 ‘노 전 대통령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과 식사했다’는 허위 사실 및 사진을 유포한 혐의로 고소했다. 온라인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병언 회장이 삼계탕을 먹고 있는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해당 사진이 빠르게 유포됐다. 공개된 사진 속 인물은 유 전 회장이 아닌 참여정부 당시 경제보좌관을 지낸 조윤제 서강대 교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창원지검은 해당 사건을 배당받아 경찰에 수사 지휘를 내렸고 경찰은 해당 사진이 일베에서 유포된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일부 일베 회원은 언론을 통해 “(글이나 사진이) 반(半)장난이고 표현의 자유이므로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상식에 반하는 글에 공감하고 이를 더 자극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집단 무의식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일부의 극단적인 행동은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강한 배타적 성향을 보이고, 그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무책임하며, 생각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과잉행동을 보이는 것”이라며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동정심이나 공감 능력을 상실해 타인의 시선에 대해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행동 유형과 유사한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경우에는 반복적으로 범법행위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으며,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입힐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관심 따위에는 무감각한 성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반사회적 행위 묵인해선 안 돼”

상황이 심각해지자 한 네티즌은 올해 2월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재를 요청했다. 그는 국제청원운동 사이트(avaaz.org)에 청원서를 올리고 일반인의 서명을 받고 있다. 이 네티즌은 청원 이유를 밝힌 글에서 “각종 사이버 테러와 전체주의, 독재 찬양, 역사 왜곡, 고인 모독, 여성 비하, 차별 조장, 지역감정 조장, 범죄 모의, 선거 개입, 정치 선동 등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고 있는 사이트가 유머 사이트로 포장돼 아이들도 아무 인증 같은 절차 없이 접속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며 “이는 곧 성인들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이를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반사회적 행위이므로 사회적으로 묵인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폐쇄 혹은 성인 인증 같은 실명 인증을 통해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베가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지만, 실생활에서 자신이 일베 회원임을 밝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연히 일베 회원으로 밝혀진 유명인 등은 손가락질을 받는다. 일베 회원이 일상에서 ‘일밍아웃’(일베+커밍아웃)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글의 내용과 활동이 전반적으로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국민의 정서에 크게 어긋난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베 스스로 성숙한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일부 일베 회원은 타인을 향해 일방적인 비난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로 2012년 한 인터넷 매체 기자는 일베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일베 회원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한동안 집 주변에서까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했고 협박성 전화에 시달렸다. 현재도 일베 회원들을 상대로 200건이 넘는 고소를 진행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사회가 일베의 주장에 무관심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민이 특정 단체의 주장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관심을 가지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느낀다. 일부 언론도 특정 사이트에 올라온 가십성 글을 마치 중요한 문제인 양 부풀려 보도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사회학자·심리학자·정신과학자·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까지 침묵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이들은 일베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길 꺼린다. 어떤 말을 하든 일베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지식인은 목소리를 내고 지적해서 사회적 갈등 문제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장의 맛’이 식탁을 점령하다 9.3 시사저널

식료품 대량 생산 시대…설탕·조미료·라면 시장 전쟁

한국 사회의 산업화는 식생활에도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설탕 대중화는 한국인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고려 명종 때 이인로의 <파안집>에 처음 등장하는 설탕은 상류층의 약용 또는 기호식품으로 귀한 약재와 같았다. 1920년 평양에 제당공장이 생겼지만 생산이 미미해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고 설탕을 생산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식자재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보내주던 ‘악수표’ 밀가루도 우리 식생활을 바꿨다. 값싼 밀가루의 공급은 라면의 대량 생산으로 이어졌다. 1963년 삼양식품의 전중윤은 5만 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明星食品)의 라면 제조 기술과 기계를 도입해 서울 하월곡동에 공장을 차리고 국산 ‘삼양라면’을 생산했다. 가격은 100g짜리 라면 한 봉지에 10원. 당시 커피 한 잔에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으니 저렴한 간식 같은 주식이었다. 하지만 밥과 국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입맛을 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처음 나온 라면은 이름 탓에 무슨 ‘섬유’나 ‘실’로 오해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1965년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덕택에 라면은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대중적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1966년 연 240만개가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개로, 수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300배에 이르는 경이로운 성장세를 보였다.

 

값싼 밀가루 공급으로 라면 대량 생산

당시 정부는 절대 부족한 식량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 운동’을 벌였다. 1969년 1월부터는 △모든 식당에서는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섞어 밥을 지어야 하며 △모든 식당은 매주 수·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을 원료로 하는 음식을 판매하지 못하며 △관공서·국영기업체 구내식당은 쌀로 만든 음식을 일절 판매할 수 없도록 강제했다. 말은 혼·분식 ‘장려’였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의 도시락까지 검사해 성적에 반영하는 ‘강제’였다.

 

라면업계의 후발 주자인 ‘롯데라면’은 롯데공업이 1965년 서울 대방동에 공장을 세우고 출시한 첫 제품이었다. 이후 1968년 강부자를 모델로 ‘왈순마’를, 1970년 닭고기 육수에서 유지를 사용하는 ‘소고기라면’을 출시했다. 1975년 ‘농심라면’을 내놓고 1978년 회사 이름을 아예 ‘농심’으로 바꿨다.

 

삼양과 농심의 라면 전쟁은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시각문화를 제시한다. 삼양에 밀리던 농심은 1970년 소고기라면을 출시하면서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내세워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 이복식이 이미지나 동작을 상황에 연결시켜 그린 구봉서·곽규석의 일러스트 시리즈가 지면광고를 통해 시선을 끈다. 그간 김용환·홍성찬·안보선 등에 의해 삽화에 지나지 않던 일러스트가 에어브러시라는 도구와 이복식의 손을 통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인, 그러면서 인물의 특징을 빼어나게 뽑아낸 그림을 만들어내 시각적 충격을 준 것이다. 특히 소구 계층의 폭이 넓은 대중적인 캐릭터로 탄생했다. 이는 시각문화의 변화인 동시에 한국 일러스트의 전환점이자 미학을 완성시킨 사건으로 캐릭터가 하나의 인격체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물먹는 하마’ 등의 캐릭터로 부동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라면 봉지=붉은색’이라는 공식을 지키고 있다. 붉은색의 힘이다. 농심이 삼양을 꺾은 결정적인 수훈갑인 신라면은 삼양라면의 주황색보다 더 빨간 색이었다.

 

‘미원’과 ‘미풍’의 조미료 혈전

라면 전쟁보다 더 격한 전쟁을 치른 게 ‘미원’과 ‘미풍’으로 대표되는 조미료다. MSG(글루타민산나트륨) 조미료의 대명사가 된 미원은 1956년 신선로를 상표로 등록한 동아화성공업(주)이 처음 만들어냈다. 이후 미왕산업으로 1960년 발효 조미료를 생산하다 1962년 미원(주)과 합병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품 아지노모토로 입맛이 길들여졌기에 광복 이후 합성 조미료 제조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후 선발 주자 미원이 조미료 시장을 선점하자 원형산업이 생산하던 ‘미풍’을 1963년 삼성의 제일제당이 인수·합병해 국자 모양의 로고와 함께 ‘아지노모도 미풍’을 내놓았다. 1964년 ‘여인표 미풍’으로 바꾸고 1965년 ‘백설표 조미료 미풍’을 출시했다. 1967년 미풍을 제일제당이 합병하고 1968년 ‘국자표 미풍’을 출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면에 미원은 초지일관 붉은색 신선로를 상표로 내세우며 조미료 시장을 평정한다. 삼성이 시도해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품목이라고 할 정도로 미원은 승승장구했고, 이들의 대대적인 판촉 활동으로 대한민국 음식은 MSG 맛으로 통일되고 골목 안 곳곳에는 붉은색 신선로 속에 한자로 ‘미원’과 예의 붉은 국자 그림의 ‘미풍’을 알리는 철제 광고판이 골목 풍경의 일부가 됐다. 이는 ‘신선로=한국 음식’이라는 전형성이 확립되는 데 일조했다.

 

제일제당은 절치부심한 끝에 1975년 천연 재료와 고향의 맛을 강조한 ‘다시다’를 출시하는 한편, 1977년에는 ‘아이미’를 시장에 내놓으며 대반격을 시도한다. 제일제당은 자기네 제품명을 딴 우리나라 최초의 브랜드 캐릭터 인형을 제작하며 제품보다 비싼 털 스웨터를 사은품으로 제공하고 요리 강습 주부교실 등을 열었다. 또 이복식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강력한 시각적 무기로 동원했다. 그가 그린 맛의 천사 아이미 캐릭터로 한태원은 포스터를 만들어 그해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클리오 국제광고제 인쇄 부문에서 한국 최초로 상을 받는다. 이런 마케팅 공세에도 ‘빨간 신선로’ 미원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노인이 되면 과거는 털고 ‘졸병’이 돼야 해” 917 시사저널

‘100세 시대’의 신(新)인류 도시 노인 20명 심층 인터뷰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평균수명이 100세에 육박하는 신(新)인류를 뜻한다. 2009년 유엔이 발표한 ‘세계 인구 고령화’ 보고서에 등장하며 화제를 모은 용어다. 의학의 발달, 삶의 질 개선 등으로 인간이 장수(長壽)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모 헌드레드 대다수는 도시에서 산다. 2012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80%대를 넘어 90%에 육박하고 있다. 귀농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도시에서 살다 도시에서 죽는 것이 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로 굳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실버 세대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보고 자란 전통사회 노인의 모습이 ‘참고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환경 속에서 새로운 노년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탄생한 베이비붐 세대, 근면한 노동으로 조국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었던 이들 세대는 나이가 들어서도 고단하다.

 

9월11일 한 노인이 서울 동자동 골목을 걷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통계 보고서의 숫자가 전해주지 못하는 우리 시대 노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취재진은 서울에서 노인과 접촉할 수 있는 대표적 장소를 선정해 각 공간에서 만난 노인 20여 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실시했다. 노인문화의 중심지인 종로3가 일대, 지하철 전동차 경로석, 실버 노동 현장, 아파트 노인정 및 노인복지센터, 서울역 인근 영세 쪽방촌 등에서 만난 노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에 대해 물었다. 각 인터뷰는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 넘게 진행됐다. 서로 처한 조건과 환경이 다른 노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도시 노인으로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절대 자식에게 짐이 돼선 안 돼” 강박관념

도시인은 외롭다. 쪼개지고 쪼개져 원자화된 ‘개인’으로 산다. 도시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외롭다. 전통사회에서처럼 마을 공동체나 대가족이 그들의 노후를 보살피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핵가족이 기본 단위인 도시에서, 노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다른 ‘핵가족’을 구성해 독립해버리는 자녀들과의 관계는 과거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 자녀를 기르고 가정을 보살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쓸쓸한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이 들면 남는 건 아내밖에 없더라. 아들이 둘 있지만 연락도 뜸하고 자기들 살기에 바쁘다.”(설완종씨·65), “애들하고 지지고 볶고 살 때가 제일 좋았던 거야. 나이 먹으면 하나씩 다 떨어져 나간다고. 시집·장가가면서 곁을 다 떠났어. 이렇게 늙어서 돌아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어. 삶이 뭔가 싶은 거지. 나이 먹어보니 그런 게 참 처연하다.”(정행승씨·81)

 

자녀와 함께 살거나 경제적 부양을 받고 있는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 공동체의 ‘어르신’, 누군가의 ‘부모’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늙은 개인’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시사저널 취재진이 만난 상당수의 노인은 그들이 사회에서 취해야 할 포지션이 자신이 보고 자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노인의 삶은 정말 많이 다르다. 예전에는 아파도 견디고,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참아가며 자녀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남겨주려 하지 않았나. 지금은 아니다. 주변을 보면 나 자신이 먼저 건강하고 행복한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스스로 잘 살아야 자식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최춘염씨·여·68), “절대 자식들에게 짐이 돼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정도다. 요즘은 수명이 길어서 80~90세까지 산다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자녀들한테 기대야 하지 않겠나. 지금부터 기대기 시작하면 아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원수 같겠나.”(진윤자씨·여·66)

 

늙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젊은 시절 자신의 손으로 일으켜 세운 이 도시가 늙은 자신에게 결코 상냥하지 않다는 사실을. 길게는 10~20년 이상 지속될 여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상시적으로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요즘 노인들에게는 4고(苦)가 있다. 경제적 고통, 건강으로부터 오는 고통,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 무료함으로 인한 고통이다.” 한 인터뷰 대상자가 도시 노인들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압축해서 설명했다. 생계 대책, 건강관리, 인간관계, 활동(노동 및 여가) 등이 노후의 행복 여부를 판가름하는 핵심 요소라는 뜻이다.

 

‘제2의 인생’을 비교적 순탄하게 열어젖힌 이부터 만나보자. 김선태씨(71)는 2006년 초등학교 교장 직에서 은퇴한 이후 문화재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을 거쳐 지금은 경복궁에서 일한다. 김씨는 퇴직하기 3년 전부터 은퇴 이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달 330만원씩 교직원 연금을 받는 김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철저히 고민하고 준비한 덕에 자신의 사회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전문 영역을 찾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김씨처럼 은퇴 이전에 노후의 삶을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9월11일 서울 낙원동의 한 이발소. 20년째 요금을 올리지않고 노인들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대학 동기라는 인연으로 함께 다니니 좋다”

“1950~60년대에는 중학교도 가지 못했던 사람이 70~80%는 될 것이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열심히 일하며 ‘몸뚱이’ 하나로 살아온 노인이 많다. 나름대로 배웠다는 사람도 별로 갈 곳이 없는 마당에 그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다수의 실버 세대에게 김씨처럼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씨는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고 사회 경력도 차별화되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배경은 노후의 삶을 개척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일하는 노인들끼리는 군대 갔을 때랑 똑같다는 얘기를 한다. 사회에서 했던 것은 잊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격증이 100개 있어도 내가 하고자 하는 직종과 관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기업이든 어디든 과거에 잘나갔단 얘기는 이력서에 안 적는 것이 더 좋다. 노인이 되어 일하려면 지난 과거는 털고 ‘졸병’이 돼야 한다.”

 

도시 노인들에게는 인간관계 역시 주체적으로 개척해야 할 대상이다. 의지를 갖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집 안에 고립되기 때문이다. 도시 노인들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뒷방 노인’으로 주저앉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외로움을 타고 인간관계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진다.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 드니 마음에 공허함이 항상 밀려와. 자식들이 조금만 뭐라 해도 마음에 상처가 되고. 그러니까 늙으면 외로운 거야. 나이 들어봐야 알아. 우리도 젊었을 땐 몰랐어.” 서울 반포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오정자씨(여·66)의 말이다. 그에게 도시에서 늙는다는 것은 “인간은 다 외롭고 쓸쓸하고 결국 다 혼자”임을 깨닫는 일이었다. “지난번엔 어떤 할아버지가 옆에 오더니 ‘여기 앉아도 되느냐’고 묻더라. 여든 살 잡수셨는데 혼자 산 지 8년 됐다고. 아주 정정하셔. 그렇게 괜히 말 붙이는 거다. 외로우니까. 그분은 주변 문화센터 다니면서 다른 할머니들하고도 많이 만나고 그러는 것 같았다.”

 

도시 노인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직장 동료나 학창 시절 친구 등과의 친목회·동창회를 활용하는 경우, 아파트 노인정이나 교회·성당 등 거주지 주변에서 새로운 이웃을 만나는 경우, 서울 종로 일대와 같은 실버문화 중심지를 찾는 경우 등이다.

 

최춘염씨(여·68)는 매주 월요일 대학 동기들과 만난다. 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만나 몸을 움직이며 친교를 쌓는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산, 걷기 코스 등을 찾는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이 신체적·정신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에 무료 탑승이 가능한 전철을 이용한다. 취재진과 만난 9월2일에는 경춘선을 이용해 춘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들 직장에 있을 때는 안 만나다 퇴직하고 시간이 나니 이렇게 만나게 되더라. 사실 친목회 안에 대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대학 동기라는 인연 때문인지 함께 다니니 참 편하고 좋더라.” 최씨는 젊은 시절부터의 지인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찻집을 찾아 시간을 보내는 일도 즐긴다. 그림 감상을 좋아해 전시장을 찾기도 하는 등 노후의 여가를 잘 활용하는 축에 속한다.

 

최씨의 경우와 달리 과거의 인연이 껄끄러운 노인들도 상당수다. 친목회나 동창회에 나가려면 상당 액수의 회비가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노인들에게는 부담스럽다. 이른바 ‘성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옛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일을 꺼리게 만들기도 한다. “나와 여건이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이면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나보다 낫다 싶으면 잘 안 보게 된다. 내가 찾아가면 마치 자신에게 기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가질까 봐서다. 상대가 그런 생각을 안 하더라도 내가 그런 자격지심을 갖는다.”(김차균씨·67) 특히 남성 노인들의 경우 중·장년에 개인 사업을 하다 실패하면서 주변 친구들과 연락이 모두 끊기게 됐다는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서울 종로 일대는 매력적인 놀이터이자 사교의 장이다. 영화관·식당·술집·다방·이발소 등에서 노인에게 특화된 저렴한 가격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 요소다. 이곳을 찾는 노인들은 왜 이곳에 왔는지, 방문 목적을 서로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서로가 같은 처지임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 뒤편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주변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던 홍 아무개씨(73)는 “사는 재미랄까, 그런 게 없다. 인생의 목표가 있고 그걸 성취하는 게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는데. 그러니 지금은 사람 목숨이 아니다.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것이다. 그나마 여기 나와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살아가는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다.

 

많은 노인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전철을 타고 여가 활동을 즐긴다. ⓒ 시사저널 구윤성

 

상당수 노인들 “내 노후는 불행하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의 노인은 불안하다.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4고’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잿빛 도시 속에서, 노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을 직접 기획하고 설계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취재진이 만난 노인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노후에 대해 “불행하다”고 말했다. “그냥 죽지 못해 산다. 칠십 넘어가면 돈 없는 사람 대다수는 아마 나처럼 죽지 못해 살 것이다.”(오경운씨·78), “젊었을 땐 좋았지. 여유 있게 살진 못했지만 그때는 암만 해도 좋았어. 그 이후론 사는 게 서글프기만 했어. 사는 게 참 외로워. 죽고 싶어 죽겠어.”(정동순씨·여·80), “과거에 좀 더 잘할걸 하는 생각에 후회감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 그냥 사는 거다. 스스로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생각하며 그냥 사는 거야.”(홍 아무개씨)

 

젊었을 때만 해도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개념이 희박했기에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늙음을 맞이하게 된 노인이 많다. 지금 노인 세대들에게서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체념의 정서가 짙게 나타나는 이유다. 돈, 인간관계, 건강, 그리고 노동·여가.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당신은 평생 이 ‘네 마리 토끼’를 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유청년연합의 청년을 만나고 싶었다 .09.22 한겨레21 제1028호]

[이슈추적] 광화문광장에서 ‘치맥파티’ 열겠다며 일베를 초대하는 그들…

 

지난 9월1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자유청년연합 등 보수단체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 반대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지난 9월6일 저녁, 한가위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이 오랜만에 인파로 북적였다. 대부분 젊은 남성으로 구성된 이들이 광장에 주저앉아 피자와 치킨을 ‘욱여넣는’ 모습을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한 시민들이 멈춰서서 지켜보았다. 이날의 만찬은 정상 범주에서의 식사가 아니라 작정한 ‘폭식’이므로, 분명 이는 ‘먹는’ 풍경이 아니라 ‘욱여넣는’ 풍경이었다. 피자를 나눠먹은 이들은 다 같이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광장 내 세월호 농성장에서는 그들의 평범한 이웃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보수단체들의 총집결장으로

이 기괴한 행사를 도시락 나들이라 부르건, 폭식투쟁이라 부르건, 이를 주도한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들은 이날의 경험을 ‘서울 수복’이라고 기념한다. 인터넷상에서 일베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눈길을 끈 뒤 ‘시간의 문제일 뿐 행동하는 일베가 곧 거리로 나올 것’이란 전망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이르다. ‘일게이’(일베 이용자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표현)들은 왜 하필 지금 모니터 밖으로 걸어나왔을까. “기존 일베의 방식이 유희적인 흐름 속에 있었다면, 세월호 특별법 논란이라는 정치적 국면을 맞이하면서 극우·보수와 결합해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경우 문화평론가의 설명이다.

 

일베가 광화문광장으로 나오기 전 세종로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폄훼하는 보수단체의 총집결장이 된 터다. 이미 일베를 위한 생태계가 조성돼 있었다는 얘기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반대 서명운동을 위한 천막을 설치한 동아일보 사옥 앞에선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세월호 선동세력 지옥으로”를 외치며 특별법 제정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보수 대학생 단체인 자유대학생연합(자대련)은 주말마다 특별법 제정 반대 서명을 받고 있으며, 일베보다 앞서 지난 8월28일 ‘폭식투쟁’을 선언했다. 지난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며 연세대 총학생회가 시국선언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며 연세대 재학생이 만든 단체로, 현재 48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정작 이 단체는 폭식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상훈 자대련 대표는 “단식 중이던 김영오씨가 단식을 끝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피자나 치킨을 먹는 것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거리로 나선 일베의 유희적 행동들이 정치·사회 국면에 실질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에 있을 테다. 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은 “9·6은 현대 정치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추어올렸다. “젊은 청년들이 나라를 걱정하여 광장에 나타났다는 것은 야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집회를 젊은 청년들이 역선택한 대전략의 변화”라는 것이다. 미래세력 없는 우파의 구원투수가 될 것이라는 꿈같은 희망이 섞여 있다. 일베식 대전략의 변화가 민심의 변화까지 실어왔을까.

 

떠들썩한 시간이 지나고 지난 9월11일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세월호 특별법 반대를 위한 농성장을 찾았다. 일베와 함께 폭식투쟁을 진행했고, 9월13일 다시 광화문광장에서 ‘치맥파티’를 열겠다며 일베를 초대하고 있는 자유청년연합의 청년들을 만나고 싶었다. 변희재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대표와 대여섯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과연 나라를 걱정하는 청년도 2명 눈에 띄었다. “주관단체 회원이시냐”고 묻자 “우리는 순수한 자원봉사자”라고 손사래를 쳤다. <한겨레21> 기자라고 소개하자 그들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자유청년연합 회원은 그냥 아저씨들”

2011년 결성된 자유청년연합은 ‘보수를 지향하는 청년단체’라고 스스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단체의 성격을 보면 청년단체라고도, 보수단체라고도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대표를 맡고 있는 장기정(40)씨는 10년 전인 2004년 결성된 자유개척청년단 부대표를 맡아 광화문에서 인공기 화형식을 주도하는 등 이미 10여 년을 보수단체에서 활동해왔다. 18대 대선 당시엔 야권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당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북한의 요청에 따라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정부의 승인 없이 제공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지난해엔 전북 군산 수송동성당에서 ‘연평도 포격’ 관련 발언을 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신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이 단체가 주력해온 사업 중 하나는 (공산주의) 독립유공자 서훈 박탈 요구 및 법률 개정 촉구 서명운동이다. 다른 보수단체의 회원은 “자유청년연합엔 청년이 없다. 그냥 아저씨들이다. 대표는 보수라기보단 극우 성향에 가깝다”고 말했다.

 

대신 30여 분을 기다리자 한 젊은 여성이 멈춰서서 서명에 참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젊은 분들이 참여하신다”며 ‘자원봉사자’들이 반색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망한다”며 특별법 반대 서명을 위해 멈춰서는 이들은 주로 50~60대로 보였다.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대학생 정아영(24·가명)씨가 말했다. “(세월호 특별법 관련 소식이) 국민을 계속 우울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잖아요. 광화문광장을 시민들이 쓰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도 답답하고요.” 특별법의 내용에 대해 그는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피곤하니 얼른 잊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서명을 받던 중년의 ‘자원봉사자’가 정씨에게 한마디를 거들어 알려준다. “세월호 농성장에 가면 유가족은 한 명도 없답니다. 내가 가보지는 않았는데 듣자니 그렇답니다.” 그는 서명을 권유하며 그 말이 비기라도 되는 듯 거듭했다. 농성장에서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를 조금 전에 확인하고 온 터였다. 그가 덧붙였다. “세월호 사고는 교통사고나 같은데 (희생자 가족들이) 세모그룹에 가서 항의시위 한 번 안 했잖습니까. 그 책임을 왜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습니까. 이 나라가 언제까지 고통 속에 살아야 합니까.”

 

‘동원’과 ‘자원봉사’ 경계에서

봉사자가 내민 명함엔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현대 정치운동사에 한 획을 그을 ‘청년 우파’를 찾아나선 광화문에서 만난 이는 ‘동원’과 ‘자원봉사’의 경계를 부지런히 오가는 중년의 보수단체 간부였다. 다가오는 주말 “두 번째 치맥파티에 나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일베에선 “두 번 하면 재미없다”는 반대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에선 ‘김일성 개새끼 못하면 종북’ 푯말을 붙이고 쿵작거리는 뽕짝 리듬 속에 중년의 아스팔트 우파들이 하염없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부싸움과 자본 9.22 제1028호 한겨레21]

[노 땡큐!]

정규직 아내/정규직 남편, 정규직 아내/비정규직 남편, 비정규직 아내/정규직 남편, 비정규직 아내/비정규직 남편.’ 나열한 4가지 맞벌이 부부 조합은 우리 사회에 모두 존재한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이 30~40%에 달하고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 비정규직 비율보다 2배 가까이 높다는 통계로 판단컨대 ‘비정규직 아내/정규직 남편’ 조합이 가장 많지 않을까 싶다.

 

“여보, 당신은 고용주가 아니라 노동자야”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몇 년 전 같은 동네에 살던 세 가족이 모였다. 이웃이었을 땐 2주에 한 번꼴로 함께 밥을 먹곤 했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보니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날 모처럼 모였다. 밥을 먹고 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연찮게 비정규직이 화제가 됐다. 내가 진보정당 당원인 걸 다들 알고 있었던지라 당의 입장은 뭐냐고 물었다. ‘비정규직 철폐’가 당론이라고 말했다. 가연이 아빠가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고 고용주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너무도 단호해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노동시장 유연화(labour market flexibility)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해고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임시직과 계약직을 양산했다. 자본은 하청·용역 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고 동일노동을 하는데도 임금과 대우를 차별했다. 자본에 날개를 달아준 이런 착취 구조를 합법화한 것이 ‘비정규직보호법’이다”라는 내 말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중간에 내 옆지기가 말려 논쟁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묵묵히 지켜보던 옆지기들이 말문을 열었다. 가연이 엄마는 은행에서 일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처지였다. 동료들 대부분이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차별받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경영 악화의 책임을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떠넘긴 은행의 행태에 분노했다. 학교에서 사무보조로 일하는 상철이 엄마가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는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는 희대의 악법이라고 덧붙였다. 옆지기들과 가연이 아빠의 논쟁이 1시간 이상 계속됐다. 가연이 엄마의 마지막 말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자기 옆지기도 납득시키지 못하는 그런 주장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것보다 더 허무한 일이야. 눈 뜨고 주변을 살펴. 구름 위로 걷지 말고 발을 땅에 딛고 걸으란 말이야. 여보, 당신은 고용주가 아니라 노동자야.”

 

노동자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린 오늘날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보다 ‘처지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더 현실적인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비정규직 비율이 늘었다. 맞벌이 부부 중 ‘비정규직 아내/비정규직 남편’ 조합 비율도 당연히 그만큼 늘었을 것이다. 이에 반비례해 비정규직 대우를 둘러싼 맞벌이 부부의 말다툼은 줄지 않았을까? 처지가 같아졌으니 말이다. 자본에 고맙다고 해야 할지?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

“Now we’re all sons of bitches”(이제 우리 모두는 개새끼들이다). 1945년 7월16일 인류 최초로 핵폭탄 실험이 있었다. 핵폭탄 개발에 참여한 한 과학자가 자신들이 악마의 무기를 만들었음을 깨닫고 내뱉은 말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을 만든 이들에게는 “Now we’re all sons of bitches”를 들려주고, 처지가 달라 아웅다웅하고 있는 맞벌이 부부에게는 “노동차별로 부부싸움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결별하자”를 함께 외치자고 말하고 싶다. -이은탁 ‘데모당’ 당수

 

유승민은 여권 히든카드’, 안희정은 정치 아이돌여야 대권주자 22인 한줄평 화제

 

거리의 인문학자최준영씨(48)가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이 글은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급속히 유포되고 있다. 보좌관들 사이에선 촌철살인의 한줄평을 두고 대권주자들의 실제 캐릭터와 일치율을 따져보는 검증작업이 진행중이다.

 

최씨는 차기 대선에서 기대되는 대권주자로 여당에선 유승민 의원과 원희룡 제주지사를, 야당에선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김부겸 전 의원을 꼽았다.

 

그는 유승민 의원에 대해 과연 김무성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호기심이 생긴다고 운을 뗐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처럼 친박반박을 오가다간 최대치가 당대표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소장파로 분류되는 원희룡 지사는 여권의 안희정 버전이라고 하면서도 3선 국회의원이 낙향한 셈이어서 정치적 승부수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야권후보들에 대해선 1야당 최대 계파의 수장이지만 정치력은 최악인 사람”(문재인 의원), “안철수 현상으로 대표된 새정치의 열망을 전유하려다 몰락을 자초한 사람”(안철수 의원)이라고 혹평했다.

 

야당의 한 보좌관은 문 의원은 중앙대 이상돈 명예교수를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리더십 한계가 드러났다좋은 사람과 좋은 정치인은 너무 다르다는 점에서 최씨의 분석에 의견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특별법 협상과 비대위원장 인선 책임을 지고 퇴진 위기에 처한 새정치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다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국회의원으 박영선은 당할 자가 없다옛날에 ‘3영선이라고 해서 김영선·송영선·박영선이 있었는대 그 중 단연 박영선이 으뜸이라고 치켜세웠다. 정동영 상임고문은 ‘486 그룹을 대변하는 이인영 의원과 대비하면서 진보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현실 정치인 중 가장 진보적인 행보를 걷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보좌관들 사이에선 그의 한줄평을 패러디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한 보좌관은 정세균 상임고문에 대해 호남 출신 중 수도권 선거에 도전한 사람 있어? 노력에 비해 성적이 안오르는 노량진 공무원 수험생이라고 했다. 김두관 전 경남지사는 어찌 이장하다가 장관되니 관운이 좋은가? 조상 묘를 잘 썼나?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삐삐 같은 사람이라고 촌평했다.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가의 길에 들어선 최씨는 2005년부터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열어왔다. 그는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결핍을 즐겨라’, ‘유쾌한 420자 인문학’,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등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최씨의 한줄평이 실린 인터넷 사이트(http://www.newsnomo.kr)는 수원지역 대안미디어 너머에서 운영중이다.

 

<잠재적 대권주자 22인에 대한 짧은 품인록’>

 

여권 잠룡 11.

-김무성 : 훤칠한 외모와 호방한 성격, 든든한 집안배경과 재력까지 갖춘 사람. 그러나 빈곤한 철학에서 나오는 천박한 언변으로 입만 열면 경쟁력이 깎이는 사람. 

-김문수 : 서민적 이미지와 성실한 품성. 드물게도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행보를 보였으나 진보에선 배신자, 보수에선 여전히 미심쩍은 사람. 

-정몽준 : 축구협회장 시절 구축한 인맥 덕분인지 외교적 수완이 좋은 사람. 지나친 눌변에 재벌 출신 특유의 아집과 독선으로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사람. 

-반기문 : 뼛속까지 관료인 사람. 역대 최약체의 UN사무총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귀국 후엔 대한적십자사 총재 정도를 하면 어울릴 사람. 

-원희룡 : 남경필과 함께 당내 소장파의 한 축을 형성, 친숙하고 참신한 이미지를 구축함. 큰 선거의 경험이 없어 아직 단단한 스토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 

-김태호 : 그야말로 덩칫값 못하는 사람. 자기관리가 안 되는 영원한 아마추어. 

-남경필 : 소장파의 상징으로 승승장구. ‘수신제가에 실패해 치국대신 치명상을 입었으니, ‘평천하보다는 평정심찾기에 골몰해야 할 사람. 

-이완구 : 이름만큼이나 의뭉스러운 사람. 

-이인제 : 최다 당적변경과 최다 대권도전의 2관왕을 노리는 사람. 이쯤 되면 정치철새를 넘어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 

-유승민 : 여권의 기대주, 아직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여권의 히든카드. 

-오세훈 : 자기연민의 정치인이자 세기말적 낭만과 데카당스의 아이콘. 조직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정치로 주변을 당혹스럽게 하는 개인플레이의 대명사.

 

야권 잠룡 11.

-박원순 : ‘박원순을 넘어서야 박원순의 가능성이 열린다! 시민운동가와 행정가를 넘어 정치인 박원순으로 거듭나야 할 숙제를 안은 사람. 

-손학규 : ‘저녁이 있는 삶을 외치다가 우선 자신부터 저녁이 있는 삶을 살기로 한 사람. 

-문재인 : 1야당 최대 계파의 수장이지만 정치력은 최악인 사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최고의 정치인 사람. 권력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권력을 잡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  

-안철수 : ‘안철수 현상으로 대표된 새정치의 열망을 전유하려다 몰락을 자초한 사람. 

-김부겸 : 손학규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노무현의 길을 갈 것인가? 새로운 모멘텀이 필요한 사람. 

-안희정 : 영민한 정치 아이돌이자 차분한 품성을 가진 사람, 아직은 자기 정치를 시작하지 않은 원석. 

-정동영 : 진보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현실정치인 중 가장 진보적인 행보를 걷는 사람. 꺼지지 않은 휴화산. 

정세균 : 관리형 리더 혹은 전형적인 바지사장 스타일. 대권은 바지사장을 뽑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두관 : 스토리는 좋은데 스토리텔링이 안 되는 사람. 그동안 줄곧 자기 스토리를 까먹는 마이너스의 정치를 해온 사람. 

-박영선 : 국회의원으로선 최고, 리더로서는 2% 부족한 사람. 절치부심, 다시금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상품가치가 큰 사람. 

-유시민 : ‘싸가지 없는 진보의 원조. 정당 파괴자. 좋은 머리에 출중한 언변과 뛰어난 글발을 갖췄으나 가슴(감성)이 메말랐다는 평을 듣는 사람.

 

 

 

 

 

노래출처: 광주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