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의 탄생> 강명관 지음돌베개 펴냄 2009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문학을 현대의 텍스트로 생생히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그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활동했던 여항인들의 역사적 실체와 그들의 문학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 한문학의 연구 지평을 넓힌 역저(『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문화일보)". "풍속사, 사회사, 음악사, 미술사를 포괄하는 방대한 지적 편력을 담아 내고 있다. 정작 문학 텍스트 자체에 논의를 거의 할애하지 않았는데도, 논의 전개 과정에서 그 시대와 함께 문학 텍스트의 의미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한양대 정민)." 등의 호평을 받았다.
광범한 지적 편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풍속사 읽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문학을 쉽게 풀이한 저서들을 다양하게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시대에 지식이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어 유통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어떻게 설치되어 인간의 사유와 행위를 결정하는가, 그리하여 어떤 인간형이 탄생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공부 중이다. 최근작 『열녀의 탄생』과 연계하여, 조선 시대 남성-양반이 그들의 에토스를 만들기 위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의식화했던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성다움, 양반다움으로 남성-양반은 여성, 백성들과 구별 짓고, 우월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면면을 연구할 계획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조선의 뒷골목 풍경』,『근대 계몽기 시가 자료집』,『안쪽과 바깥쪽』,『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농압잡지평석』,『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열녀의 탄생』, 『시비是非를 던지다』,『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1장 문제의 제기
2장 유교의 ‘이상적 여성’ 발명과 구체화의 시작
1절 이상적 여성― 절부와 열녀
2절 이상적 여성의 구체화― 법과 제도
1. 개가의 금지 / 2. 격리와 유폐 / 3. 수절의 장려
3장 여성 의식화 텍스트의 도입, 제작과 보급
1절 『소학』·『삼강행실도』 열녀편·『내훈』의 도입과 제작
1. 유교적 여성관의 원천 『소학』 / 2. 여성의 성적 종속성의 실천─신체 희생과 『삼강행실도』 열녀편 / 3. 여성 일상의 지배―『내훈』
2절 『소학』·『삼강행실도』 열녀편·『내훈』의 인쇄와 보급
1. 『소학』의 보급과 사림 / 2. 『삼강행실도』의 국역·축약본과 보급 / 3. 『내훈』 및 기타 텍스트의 보급 / 4. 임진왜란 이전 각 텍스트의 지방 출판 상황
4장 열녀의 발생과 그 성격의 변화
1절 고려 말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열녀
1. 『조선왕조실록』 등 자료의 종류와 성격 / 2. 조선 전기 ‘절부’와 ‘열녀’의 성격
2절 임진왜란에서의 열녀의 발생
1.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편의 내용과 성격 / 2. 임진왜란의 열녀─죽음의 보편화
3절병자호란과 열녀
1. 병자호란의 성격과 열녀 / 2. 피로被虜 여성─ 오염된 여성에 대한 억압
5장 임병양란 이후의 여성 의식화 텍스트
1절 국가 주도의 여성 의식화 텍스트 제작
1. 임병양란 이후 『삼강행실도』의 재간행 / 2. 여성 일상을 의식화하는 텍스트들
2절 민간에서의 새로운 텍스트들의 등장
1. 민간의 여성 의식화 텍스트의 전통 / 2. 새로운 텍스트의 다양함과 풍부함 / 3. 텍스트의 목적─ 여성의 일상에 대한 통제
3절 문학 텍스트의 활용
1. 의식화 수단으로서의 문학─ 규방가사 / 2. 계녀가와 「복선화음가」 / 3. 규방가사의 유통과 재생산
4절 열녀전 등 전기傳記 텍스트의 대량 창작과 유통
6장 열녀의 탄생
1절 열행과 죽음의 단일화와 그 급격한 증가
2절 열행과 잔혹성의 강화
3절 여성 윤리에서 열 윤리의 최우위성
4절 열행과 죽음, 잔혹성과 텍스트와의 관계
7장 열녀담론에 대한 비판과 한계
8장끝맺음
후기 / 주석 / 부록 / 찾아보기
부록 차례
【부록 1】한漢 유향劉向, 『고열녀전』古列女傳(사고전서본) 목록
【부록 2】명明 해진解縉 등 찬撰,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사고전서본) 목록
【부록 3】이십오사二十五史 소재 열녀전 목록
【부록 4】『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열녀편 목록
【부록 5】『속삼강행실도』 열녀편 목록
【부록 6】『고려사』 권121, 열전 제34, 열녀 목록
【부록 7】『신증동국여지승람』 열녀 자료
【부록 8】『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열녀 자료
【부록 9】『조선왕조실록』 열녀 자료
【부록 10】『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總刊 여성 관계 자료 목록
【부록 11】열녀전 목록
【부록 12】『한국문집총간』 소재 열녀정려기烈女旌閭記등 기타
김홍도 행상과 신윤복 어물장수
김홍도 길쌈
신윤복 청금상련 (聽琴賞蓮) 및 주유청강 (舟遊淸江)
신윤복 미인도(美人圖)
신윤복 춘야밀회 (春夜密會)와 월야밀회
신윤복 표모봉욕(漂母溄辱)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1434년(세종 16)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 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
≪삼강행실도≫는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일련의 조선시대 윤리·도덕 교과서 중 제일 먼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충(忠)·효(孝)·정(貞)의 삼강(三綱)이 조선시대의 사회 전반에 걸친 정신적 기반으로 되어 있던 만큼, 사회·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이 알기 쉽도록 매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임씨단족>, 왜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죽음으로 항거하는 임씨를 기리는 내용.
[삼강행실도] 열녀편
‘악양자처樂羊子妻’...도둑이 들어와 시어머니를 겁탈하려고 위협하면서, 자기를 따르면 시어머니를 놓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겁탈하겠다 하니,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허승처許升妻’...도둑의 강간에 저항하다 살해된다.
‘황보규처皇甫規妻’...동탁이 겁탈하려 하자, 욕을 퍼붓고 살해된다.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후한서]에서 여성-아내만의 관계를 선택하고, 그 관계의 내용을 정절로 채우거나 아니면 가부장적 가문을 위한 여성의 희생(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의 [후한서] 열녀전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여성상은 모두 폐기하였다. 유향의 [고열녀전]의 현명전․ 인지전․ 변통전에 해당하는, 지혜롭거나 사려 깊거나 지적으로 남성에 우월하거나, 통찰력이 있는 여성 또한 채택하지 않았다.
12년 3월24일 성종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동방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다고 소문이 났는데, 근자에는 사족의 부녀 중에도 혹 실행하는 자가 있으니 내 심히 걱정스럽다.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도]의 열녀도烈女圖 약간 질을 인쇄하여 서울의 오부와 제도에 반사하고, 시골 마을의 부녀자가 다 강습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아마도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예조가 보고한 대책은 이렇다. 서울은 종친․재추宰樞, 벌열의 집안은 물론 한미한 가족이라도 모든 가족이 모여 거주하므로 가장이 열녀편을 직접 가르칠 것, 지방은 흩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니 명망 있는 촌로가 교육을 담당할 것이 결정되었다.
중종의 말을 들어 보자.
[삼강행실도]는 다른 책의 예와 다르니 여항의 백성도 모두 알게 하고자 한다.
[삼강행실도]와 그것의 언해본은...조선이라는 유교 국가가 피지배층을 의식화,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이것은 한국 역사 이래 국가가 민중에게 쥐어 준 최초의 책이었다. 이전까지 책은 오로지 지배층의 것이었다. - 강명관, <열녀의 탄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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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금의 쳔 회양부 사이니 긔예 셩일호믈 일타 권금이 밤의 버믜게 자피 니버 나 닐곱 여이 감히 구티 몯거 겨집이 그 허리 안고 디방을 의거코 크게 소니 범이 리고 가다 권금이 즉제 주그니라 졍녀시니라 (동국신속 권10 열녀 1: 8)
◈ 뎡죠이 졍의현 사이라 직원 셕나리 보개 겨집이라 케치난애 그 지아비 죽거 뎡이 나 졈고 식 업고 식이 잇더라 안무 군관이 강간코져 거 뎡이 죽기로 셔고 칼 가져 스스로 목 디고져 니 내 시러곰 얻디 몯니라 늘그매 니도록 가 아니니라 졍녀시니라 (동국신속 권 10 열녀 1: 9)
◈ 안시 평챵군 사이라 뎐의감 판 경덕의 안해라 신우 시절의 예도적기 거기 드러와 안시 뒤동산 디고 가온대 수멋거 도적기 어더 더러이고져 거 졷디 아니니 해 만나다 (동국신속 권 10 열녀 1: 10) *거기 =閶
◈ 니시 셔울 사이니 유 강웅의 안해라 임진왜난의 그 아 식을 거리고 풍덕산곡 의 가 도적을 피더니 도적기 자바 박헙야 을 와 앏셰워 가더니 니시 러뎌 다 환도 치고 주그 여 죵시 변티 아니대 도적기 죽키고 그 아 아오로 해니라 쇼대왕됴애 졍문시니라 (동국신속 권 12 열녀 3: 13)
정복자 칭기즈칸이 섹스에 집착한 이유
- [열녀의 탄생] [전쟁 유전자]는 남성 내면에 웅크린 성에 대한 집착과 폭력성을 다룬 책이다. 나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내 안에 봉인돼 있던 ‘괴물’이 그 실물을 드러낼 것만 같다.
문학 지망생을 가르치는 교수 한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학생들은 자기가 직접 겪었거나 주변 사람에게 전해 들은 ‘믿을 수 없는 얘기’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 신춘문예를 비롯한 공모에서 쉽게 뽑히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분명히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상식과 너무 동떨어진 듯한 얘기를 글로 옮겨놓으면 심사위원은 황당무계하다고 느끼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텔레비전의 막장 드라마가 오히려 리얼리즘에 더 충실한지도 모르겠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라이언 긱스를 축구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좋아하게 된 것은 박현욱 작가가 쓴 <아내가 결혼했다>(문이당, 2006년)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이 소설에서 라이언 긱스는 멋있다. 유명한 럭비 선수였던 데니 윌슨은 고작 16세인 소녀 라이네 긱스를 임신시켰는데 그 결과가 바로 라이언 긱스였다. 돈과 인기가 있었던 아버지는 긱스와 그의 어머니보다는 술과 다른 여자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그는 부모가 이혼하자 아버지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택했다. 축구 선수의 필생 꿈인 월드컵에 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긱스는 끝까지 ‘어머니의 나라’ 웨일스 국가대표를 고집했다. 긱스가 잉글랜드 국가 대표가 됐다면 잉글랜드는 지단의 프랑스를 결코 부러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상금이 1억원이나 걸린 제2회 세계 문학상을 거머쥔 이 소설은 지금 와서 보면 현실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작가는 긱스가 아버지의 바람기에 질려 잉글랜드 국적을 버린 듯 썼지만 최근 드러난 긱스의 사생활은 그의 아버지도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이다. 동생의 아내와 그 어머니까지 얽힌 스토리가 그 어떤 막장드라마 못지않게 ‘비현실적’이다.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불륜 리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긱스뿐만 아니라 머리는 제법 벗어졌지만 이제 솜털을 겨우 벗었을까 말까한 웨인 루니, 전형적인 영국 신사처럼 생긴 영국 국가대표팀의 주장 존 테리도 부뚜막에 올라간 것으로 드러나 곤욕을 치렀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전례까지 합쳐 이렇듯 잘나가는 남자들의 여성 편력을 바라보는 보통 남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내 경우만 놓고 보면 솔직히 약간은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배신감이나 실망감, 분노와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감정의 주류는 확실히 불편함, 혹은 거북함이다. 모든 인간 수컷의 내면에, 결국 내 마음 속에 단단히 봉인돼 있는 괴물의 모습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돈이나 권력을 손에 쥐거나, 전쟁과 같은 ‘자유로운’ 상황을 만나면 봉인에서 손쉽게 풀려나 내 안에서도 미친 듯이 날뛸 것만 같은 남성성, 혹은 폭력성의 실물을 본다.
인간 수컷의 내면에 웅크린 폭력성이 제도화되면 어떤 참혹한 결과를 빚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인 강명관 선생이 쓴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년)이다. 많은 분이 근래 나온 인문학 서적 중 최고라고 손꼽는 이 책은 남성의 성에 대한 집착이 연예면 가십거리를 넘어 사회 전체에 어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생생히 알려준다.
강 교수에 따르면 조선의 사대부는 집요하고도 ‘학구적으로’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종속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축첩과 기녀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무한히 확장한 그들은 여성의 머릿속에 한 남자에게만 성을 제공하는 것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일이라고 각인하려고 애썼다. 필요하다면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성현의 말씀도 왜곡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여성의 성을 통제하려 온 힘 기울인 조선 사대부
텔레비전 프로그램 <1박2일> 여배우 편에서 김수미씨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명심보감>의 부행 편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소학> <삼강행실도> <내훈> 따위 조선시대 텍스트들은 여성은 항상 조신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였던 <명심보감> 유의 고려시대 처세책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조선시대 텍스트 가운데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고금의 여성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 열녀 편이 단연 압권인데, 이 책이야말로 조작의 결정판이다. 본래 이 책은 중국의 <열녀전> <고금 열녀전>을 베꼈는데 남자보다 뛰어나고 덕성 높은 여성의 사례는 모두 편집하고 한 남자나 가문을 위해 목숨 바친 사례만 넣었다. 원문은 ‘烈女’가 아니라 여러 여자란 뜻의 ‘列女’일 뿐이다. 중종 때 교서관은 이 <삼강행실도>를 무려 2940질이나 찍어 중앙과 지방에 배포했는데 당시 교서관이 찍어내는 어떤 서적도 300부를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조선의 사림은 이 텍스트의 보급에 거의 광적인 행태를 보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교육의 효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삼강행실도>의 속편 격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정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버린 441명의 여성 사례가 실려 있다. 왜군의 손에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버린 여성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납치됐다가 풀려난 ‘환향녀’ 가운데서도 자살자가 속출했다. 양대 전란이 끝나고 나서 정절을 지키려고 목숨을 끊는 것이 흔한 일이 돼버리자 이번에는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너무나 많은 자살자가 속출해 조정에서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사대부가 심어놓은 이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용을 쓴다.
남성의 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살인이나 전쟁과 같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지 진화론의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한 책이 바로 <전쟁 유전자> (개마고원, 2011년)이다. 영국 출신의 생식의학자이자 가족계획 전문가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말콤 포츠에 따르면 우리는 적을 살해하고 여성을 강간해 더 많은 자손을 낳은 자들의 후손이다.
2003년 여러 나라의 유전학자로 구성된 연구팀에서 중앙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DNA 분석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놀라웠다. 중앙아시아 남성의 8%가 동일한 Y염색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것은 이들이 모두 한 명의 후손이란 뜻이다.
과학자들이 지목한 바로 그 남자는 칭기즈칸이다. 정복자 칭기즈칸은 전쟁과 성을 절묘하게 결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복지의 남성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과시라도 하듯 남의 아내와 딸을 범했다. 현대 과학자들은 오늘날 전 세계 칭기즈칸의 직계 자손이 16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전체 남성 200명 중 1명의 몸속에는 잔인한 정복자의 피가 흐른다는 얘기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든,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지식인이든, 가미카제 참여자든, 자살 폭탄 테러 용의자든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들이 ‘시체가 산을 이룬 전쟁터에서 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희열을 느꼈다’고 머리를 감싸안으며 고백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양손에 살인 무기를 들고 피의 강을 건너온 칭기즈칸과 그 아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남성의 폭력성을 변호하려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인구 증가의 압력을 줄이고 여성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것이 남성 속에 봉인된 괴물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강명관 교수는 자신이 일상에서 내뱉는 언어, 어떤 사태에 대해 갖는 태도가 과연 누구 것인지 살피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진화의 그을음이 됐든, 자본이나 권력이 됐든 ‘나’ 아닌 다른 것에 의해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강 교수의 태도에 나는 동의한다. / 2011년 06월 29일 제197호 시사인 문정우 대기자
<전쟁 유전자>말콤 포츠·토머스 헤이든 지음 개마고원 펴냄
저자 말콤 포츠(Malcolm Potts)는 영국 출신의 생식의학자. 현재 UC 버클리의 가족계획학부 교수로 있다. 1968년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초대 의학부장으로 일했으며, 1972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국제 의료팀을 이끈 이래로 베트남, 캄보디아, 이집트, 아프가니스탄, 가자 지구 등의 분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을 해왔다. 현재 세계은행과 영국, 미국, 캐나다, 이집트 정부의 자문위원으로 있다. 수백 권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Queen Victoria’s Gene』『아담과 이브 이후로: 인간 섹슈얼리티의 진화Ever Since Adam and Eve: The Evolution of Human Sexuality 』 등이 있다.
목차
독자에게
1장 _ 성과 폭력
경쟁
집단 공격
여성
문명의 최상의 상태
2장 _ 자연의 투쟁
진화를 설명하다
유전자의 역할
행동 기질
곰베 강 국립공원
호르몬의 역할
환경의 영향
통섭
3장 _ 잃어버린 고리
무리
집단 공격
외집단
사냥
집단 내 공격
명예와 기사도
진화와 선택
4장 _ 우리 형제들
전쟁의 환희
동지애
살해
리버스와 호플리테스
신병 훈련소
용기
대리전
복수
아동 병사
인구 규모 및 구조의 중요성
다른 동물들에게서 얻는 교훈
보편적인 감정
5장 _ 테러리스트들
테러범은 누구인가?
테러의 등장
자살 살해
갱단
‘테러와의 전쟁’이 있을 수 있을까
테러에 대한 대응
6장_ 여성과 전쟁
양성 간의 대결
보노보
전선에 선 여성들
성과 전쟁
아마존 여전사들은 정말 존재했는가
자녀의수
해법을 찾아나가다
7장_ 습격에서 전투로
화석 증거
고고학적 증거
인류학적 증거
야노마모족
반격
끊어지지 않는사슬
8장_ 전쟁과 국가
농업과 산업
독재자와 민주주의
허세와 실책
징병과 강압
애국심
노예제와 인종차별
전쟁의 대가
전쟁의 효용
성전
차례
9장_ 전쟁과 기술
투석기 검 철조망
대칭적 전쟁
제약 없는 전쟁
비대칭적 전쟁
기계와 인간
전쟁과 질병
전쟁의 고통
10장_ 전쟁과 법
‘정당한’ 전쟁
민간인과 전투원
전쟁범죄
부수적 피해
화해와 재건
초국가적 힘
양가성과 진보
11장_ 악
타락
‘정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도덕적 시민’
휴이넘과 야후가 지배하는 세상
“누가 과연 자기 심장 한쪽을 기꺼이 잘라내려 하겠는가”
12장_ 전쟁의 미래
독가스
핵무기
세균전
파멸을제조하다
자원을 얻기 위한 전투
교훈
13장_ 여성과 평화
여성을 통제하는 남성
생식의 자유를 위한 투쟁
핵심질문
가족계획 폭력 국가안보
교회와 국가
평화를 추구하는 여성들
피임약은 칼보다 강하다
14장_ 21세기의 석기시대 행동
9ㆍ11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스라엘과 레바논
다르푸르
근원적 전략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수단”
외교
언론매체 교육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규모에 대한 감각
“나의 신은 그의 신보다 위대하다”
결론을 유추해보다
15장_ 최상의 문명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노예제
여성
생식적 자율권
정책
칼날
인위적 정직
참고문헌
역자후기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여성 지위가 올라가면 전쟁 위험은 내려간다
흔히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68년에 불과하다는 연구도 있을 만큼, 우리 인간은 전쟁을 한시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마치 ‘전쟁 유전자’가 있는 것만 같다. 사회학은 한동안 인간의 본성은 본래 평화적이라고 가정해왔으며, 전쟁의 원인을 환경적인 것에서만 찾았다. 그에 따르면 호전적인 문화가 사람들을 더 호전적이게 만들고 따라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이은 과학적 발견으로 이는 오류임이 드러났고, 인간은 누구나 내부에 상대를 파괴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가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에 기반해 전쟁과 테러를 막으려 한다면 우리의 희망은 실현되기 힘들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본성을 이해하고 행동에 나설 때만 우리는 본성을 극복하고 최상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전쟁 유전자』는 전쟁과 인간의 폭력 본성의 진화를 설명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전쟁과 테러가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그러한 목적에 다가서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전쟁을 구성하는 기본적 행동 요소가 인간 본성에 실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앞서 제시한 증거를 보면, 징병 및 신병 훈련의 역사에서 보듯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전투원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정한 환경에 처한다면, 남성은 대부분 테러 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을 나누는 경계는 모든 인간의 심장을 가로지른다”는 솔제니친의 성찰은 세비야 선언의 그 어느 문구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훨씬 더 제대로 포착해내고 있다. 습격과 전쟁은 비정상적인 일탈 행위가 아니다. 뿌리 깊은 행동 기질이 필연적으로 발현된 것일 뿐이다. 전쟁의 토대를 이루는 다양한 충동은 보편적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충동이 반드시 보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책 중에서, 447쪽
싸우고, 죽이고, 강간하는 남성의 본능을 멈춰라
이 책의 분석과 설명은 사실 인간 전체보다는 남성의 폭력성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자발적으로 뭉쳐서 상대를 잔혹하게 공격하려고 하는 기질은 거의 젊은 남성에게서만 나타난다. 여성들 역시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긴 하지만 열정적으로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거의가 남성이며 여성은 남성보다 덜 공격적이다. 1990년대 텍사스 대학 연구팀이 미국, 러시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루마니아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양국 간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 혹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죽일 권리가 있다”와 같은 문장에 여학생들은 일관되게 남학생보다 낮은 비율로 동의했다고 한다.
저자들은 상대에 대한 집단공격이 남성들, 특히 젊은 남성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이러한 양성 간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받아들이기 불편할지 모를 이야기겠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는 상대 집단의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강간하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기회가 늘어나고 이런 남성의 유전자는 유전자 풀에서 늘어난다. 반대로 패배자의 유전자는 사라진다. 반면 여성은 집단공격을 통해 상대를 제거한다 해서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칭기즈칸의 사례는 이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2003년 각국의 유전학자로 구성된 한 연구팀이 중앙아시아인을 대상으로 DNA 분석을 실시했는데, 놀랍게도 중앙아시아 남성의 8퍼센트가 사실상 동일한 Y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Y 염색체는 부계로만 전해지므로 이는 이들이 모두 사실상 동일한 한 명의 후손임을 의미한다. 연구팀은 이 한 명의 남성이 800년 전 몽골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수많은 나라를 정복한 칭기즈칸이 그 유력한 후보라고 추정했다. 현재 칭기즈칸의 후손은 전 세계적으로 16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남성이 전쟁을 통해 얼마나 대단한 진화적 이익을 거둘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다.
우리의 진화 역사에서 전쟁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본 것은 젊은 남성들이었다. 남성 집단의 입장에서는 상대 부족을 죽이고 여성을 약탈하면, 더 많은 자원과 함께 성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고 이는 곧 진화에서의 승리로 이어진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호전적 성향은 점차 강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피임약은 칼보다 강하다. 전쟁을 막는 여성의 힘
저자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 규모, 특히 젊은 남성들의 인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젊은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보다 과격하고, 무모하며, 도전적이고, 변혁적이다. 저자들이 말하듯, “혁명가, 천재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최고의 운동선수, 가장 용맹한 군인, 가장 용감한 등산가, 가장 창의적인 음악가도 젊은 남성들이지만, 가장 악랄한 갱단의 일원과 거의 모든 자살 테러 분자 역시 젊은 남성들”이다. 인구통계학상으로 봤을 때는 젊은 남성 비율이 높은 나라가 상대적으로 더 불안정하다고 한다. 물론 인구만이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며, 통치 체제, 경제, 인종 갈등 등 여러 요소가 사회의 안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모든 흡연자가 암으로 사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흡연자 중 다수가 암으로 사망하듯, 젊은 층 비율이 높은 국가라고 해서 무조건 전쟁을 일으키거나 테러 분자를 양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저자들의 견해이며, 이를 보여주는 다양한 역사와 현실 사례를 이 책에서 소개한다. 실제로 오늘날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미래의 가능성이 봉쇄된 제3세계의 젊은이들은 테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안전과 평화를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가족계획을 통해 인구 증가를 억제하고, 정치 사회적 권력을 여성들에게 더 많이 부여하는 것이다. 인구 구조의 안정은 사회의 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며, 여성이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는 분쟁 상황에서 덜 군사적인 방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하는 나라는 인구 구조가 안정적이고 여성의 권한이 강한 경향이 있으며, 그 반대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저자들이 인구 문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가 실제로 조절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와 다르게 인구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변화와 적은 노력만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 올바르고 정확한 피임을 교육하고 안전한 낙태를 보장하는 것만으로도 인구 문제는 해결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하는 생식적 자율권을 여성에게 주는 것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보다 그 나라의 가족계획과 제도 변화를 돕는 것이 테러를 막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피임약은 칼보다 강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자율권을 확립하고 가족계획의 선택권을 부여하려는 노력만으로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질 것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좀 더 평등해지고 자녀 출산을 조절할 권한을 지니게 되지 않는 한, 분쟁과 테러의 다른 많은 요인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책 중에서, 430쪽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하여
작년 11월 연평도가 포격을 받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을 때 사람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첫째로 불안과 공포가 부풀었으며, 그 후 즉각 반격의 의지가 샘솟았다. 평소에는 더없이 얌전하고 부드럽던 사람들도 피가 끓는 감정을 느끼며 분노했고, 보복을 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단 한 가지 사례만이 아니다. 천안함 침몰 때도 사람들은 ‘적’을 찾아 보복하려는 강한 감정을 느꼈으며, 대표적으로 9?11 테러 사건은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찬성하게 만들고,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 한결같이 적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함께 복수하려는 심정을 품게 되고, 그런 감정은 쉽게 전쟁이나 테러로 이어진다. 씨족 집단 간에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며 진화해온 우리 인간들은 외부의 공격에 과도하게 반응하고 적으로 인식한 상대에게는 극단적으로 잔혹해진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이성적 판단을 상실하고 증오의 감정에 몸을 맡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1500만 명이 죽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5000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그 이후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했으며,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석기 시대식’ 감정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더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문명의 해결책을 택하기보다 모두에게 엄청난 손해와 비극을 안겨줄 폭력적 방식을 택하곤 한다. 20세기의 끔찍한 전쟁을 겪고 난 21세기에도 ‘석기 시대식 행동’은 멈출 줄을 모르고 있다. 핵무기와 생물학적 무기 등 발달한 대량살상병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어느 때보다 인간의 폭력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먼 미래에 아마도 아프리카 지역 삼림 두세 곳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침팬지가 멸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암컷들은 계속 자식들을 키울 것이고, 수컷들은 지위를 두고 경쟁하며 이따금씩 출격해 이웃을 죽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 후손들에게, 그 마지막 순간에 석기 시대 행동에 대한 이해와 억제가 없었더라면, 바로 그 똑같은 충동으로 인해 인류가 얼마나 자멸할 뻔했는지 경각심을 일깨우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다.-496쪽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강명관저 휴머니스트 2012.
목차
책머리에
서장. 고려-회화로 보는 고려 여성의 얼굴
초상화 두 점으로 남은 고려시대 여성
1장. 조선 전기-유교의 이름 아래 가려지는 여성들
1. 유폐되는 여인들 : 유교적 가부장제와 조선 여성의 형상
2. 점차 사라져가는 여인의 얼굴 : 초상화 봉안 풍습의 쇠퇴
3. 미인도는 왜 남겨두었을까? : 도덕적 매뉴얼과 미인도의 미학
4. 가부장적 미덕을 강요하다 : 설교의 수단으로 그려진 여성 그림
5. 숨기지 못한 남성 욕망의 흔적들 : 계회도에 그려진 계집종과 기녀
2장. 조선 후기-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진 여성의 세속
1. 본격화하는 가부장제 : 여성 형상에 변화를 가져온 요인들
2. 절개를 위해 신체를 희생하다 :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열녀 형상
3. 효 권하는 사회 : 양로연도와 경수연도
4. 잘난 남자의 부록으로 그려지다 : 회혼례도와 평생도
5. 국가와 가족의 경제를 떠받치는 손 : 경직도와 속화에 표현된 여성의 노동
6. 여자를 엿보고 여자 때문에 싸우고 : 가부장제의 성적 욕망과 여성 형상
3장. 길들여지지 않는 여성주체
1. 열녀와 절개의 이면 : 가부장제에 대한 적응과 반발
2. 절로 향하는 여자들 : 신앙적 주체로서의 여성
3. 쾌락은 감금되지 않는다 : 쾌락적 주체로서의 여성 형상
맺음말 ‘주체’로서의 조선 여성
출판사 서평
신윤복의 〈미인도〉를 일컬어 우리는 한국의 전통미라고 부른다. 그녀의 단아한 미소는 그 자체로 ‘한국 고유의 미’에 대한 자부심을 선사한다. 그러나 ‘누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가?’라고 묻는다면 〈미인도〉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달라져야 한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고문 속 숨겨진 역사의 장면들을 발굴해내는 고전 텍스트 해석의 혁명가 강명관 교수. 그가 이번에는 조선시대 여성의 시각적 이미지에 주목하여, 이 그림들에 제작 주체인 남성의 욕망과 의도가 투사되고 있음을 밝힌다. 이 책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는 여성을 종속되는 존재로 얽매고자 했던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그림을 통해 사대부 남성의 이율배반적인 욕망을 관철시키려 했는지, 그 은밀한 역사의 기록을 추적한다.
왜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 여성상의 진실을 복원하려 하는가?
화가가 만들어내는 여성의 이미지는 그것이 제작되는 시간과 공간 등 여러 조건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그림 속에서 묘사되는 대상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정치·경제적 맥락과 권력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남성으로만 구성된 화원이라는 예술 조직과 일부 민가의 남성들에 의해 시각적 이미지가 제작되었던 조선시대라면, 그림 속 여성의 형상은 그 제작 주체인 남성의 욕망과 의도가 온전히 투영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저자는 조선시대 그림 속의 여성 형상에 주목하여 그를 통해 당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조건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150여 점의 그림 속에서 여성이라는 대상 위에 베일처럼 드리우고 있는 사대부 남성의 시선과 욕망들을 읽어내고, 그것을 걷어냈을 때 마치 풍경처럼 숨어 있던 조선 여성의 진짜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남성-양반은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부장제를 진리로 믿었다. 유교적 가부장제는 여성은 남성의 이익을 위해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존재라 주장하고, 거기에 맞는 여성의 성역할을 제작하여 여성의 대뇌에 주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상당 부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여성상’은 바로 유교적 가부장제의 결과물인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조선시대 회화와 소수의 판화를 제재로 삼아, 남성-양반의 진리로 믿었던 유교적 가부장제에 의해 여성의 시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던가를 밝히고자 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
포토몽타주로 재구성한 조선 여성의 얼굴, 그리고 일상
저자는 조선시대 여성을 그린 모든 그림에는 당대 남성의 욕망과 여성에 대한 인식이 묻어 있으며, 사회를 지배하는 의식과 무의식이 그러한 그림을 제작하는 추동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과 시선, 인식의 역사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각종 연회 그림, 다양한 미인도, 《삼강행실도》 판화 등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시대와 그 저변의 권력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텍스트 역할을 한다. 이에 저자는 기록되지 않았던 조선 여성의 역사를 그림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읽어내고 다시 써 내려간다. 그림들을 모아 오리고 다시 붙이듯, 포토몽타주 방식을 통해 그림 속에 갇혀 있던 여성의 진짜 얼굴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사대부의 시선 아래, 여성이라는 ‘풍경’
이 책의 1장에서는 조선 전기, 남성-양반 사대부에 의해 유교적 가부장제로 구체화된 성리학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회화의 여성 형상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살핀다. 유교적 가부장제는 여성을 속박된 존재로서, 오직 가정 안에서 가사노동과 육아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전기 여성관이 가장 투철하게 적용된 그림 《삼강행실도》 열녀도 속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와 생명을 스스로 버린다. 잔혹하게도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스스로 내재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양로연도는 경로 관념 안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그려내는데, 어머니 혹은 성적 종속물로 분열되어 있는 당대 여성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사대부 남성의 시선에 가두어진 여성들
2장에서는 조선 후기 그림 속에서 변화한 여성 형상을 논한다. 17세기를 거쳐 유교적 가부장제가 정착되면서 그림 속 여성의 삶은 더욱 고단해진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속 열녀도는 전란 속 죽음을 통해 절개를 지킨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가부장제의 성적 종속을 스스로 주체화한 여성이 대거 출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경로잔치를 기록한 경수연도에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도에도 여성은 남성의 생애에 부기된 존재로서 마치 장식이나 풍경처럼 남성의 주변부에 머문다. 그러나 유교적 엄숙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자신의 성적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남성의 시선은 조선 후기에 행상, 주모, 무당, 기녀 등 주변부 여성들을 제재로 삼은 속화를 통해 은밀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남성-양반의 이율배반적인 욕망은 미인도라는 미적 표현물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기방(妓房)이라는 공간을 통해 기녀의 예능노동이 더욱 활발하게 소비되고, 이에 따라 화폭의 전면에 중심 제재로 여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선 여성, 화폭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옮겨 가다
그러나 저자는 그림 속에 갇힌 여성들이 늘 종속적이고 억압당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3장에서 다루는 다양한 회화들, 특히 조선 후기 속화들을 살펴보면 유교적 가부장제는 자신이 원하는 여성상을 일거에 완벽하게 만들어내지는 못했음이 드러난다. 유교적 가부장제는 여성에게서 사유와 행위의 주체성을 박탈해 나갔고, 그러한 공작은 매우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에 여성은 순응하는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반발하거나 저항하기도 했다. 그림 속에 투영된 당대의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그들의 ‘여성성’을 만들어나갔지만, 이는 여성이라는 주체와 지속적으로 길항(拮抗)하는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결론이다. 치열한 싸움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조선시대 회화에 또다시 반영되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여성주체’는 조선 후기 급속히 퍼져나간 춘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여성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주체였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서 ‘쾌락으로서의 성’을 박탈하려 했지만, 춘화 속 여성은 그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성적 주체였다. 유교 이데올로기라는 강력한 지배체제조차도 인간으로서 자연히 지니게 되는 성적 욕망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책속으로
양(梁)나라 여자 고행이 남편이 죽은 뒤 개가하지 않자 양나라 왕이 정식으로 폐백을 보내며 첩으로 들이려 했다. 이에 고행은 일부종사의 의리를 말하며 자기 코를 잘라버린다.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으로 인해 개가를 강요받으니 제 스스로 개가의 근거가 되는 아름다운 몸의 일부를 아예 없앤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이처럼 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스스로 자기 신체 일부 또는 전체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지켜내야 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 희생을 통해 성적 종속성을 관철해야만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역설한 것이다. ---pp. 82~83.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가부장제 윤리로 인해 조선 후기에도 양로연은 계속 설행되었다. 하지만 양로연을 그린 그림인 양로연도에서 여성 형상이 온전히 살아남았던 것은 아니다. …… 이 세 점의 그림은 모두 양로연을 그린 것이지만 여성 노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 각 그림마다 양로연을 베푸는 내력이 길게 붙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여성 노인을 초청했다는 언급은 없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이라고는 그저 춤을 추기 위해 동원된, 전각 안의 기녀들뿐이다. 한 가지, 여성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는 있다. 환아정에서 양로연을 열었을 때 참여하지 못하는 사족 여성들에게 주육 등을 보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성을 배려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곧 애초 여성을 연회에 초청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 전기의 양로연도와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여성 사족 역시 연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양로연이라는 공식 연회를 즐기는 주체가 오직 남성으로만 제한된 것이다. 여성이 연회에서 사라진 것, 그리하여 양로연도에서도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유교적 가부장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가 천천히 저락해갔음을 보여준다. ---pp. 151, 155.
신윤복의〈미인도〉가 전신(傳神)의 경지, 곧 그림으로 그려진 그 사람의 얼과 마음을 보는 사람도 느끼도록 하는 수준에 이른 것은 신윤복의 빼어난 천품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관찰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앞서 간단히 살폈던 〈연당의 여인〉에서도 신윤복은 여인의 일상적 삶의 한 장면을 놓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그의 다른 작품인 〈기다림〉 등에서도 신윤복은 여인의 심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드러낸다. 바로 이런 섬세한 관찰력이 〈미인도〉의 높은 완성도를 가능케 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 그런데 여성을 특화하는 것,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을 특화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미인도의 감상자는 대개 남성이다. 따라서 그것은 여전히 남성적 욕망의 대상이고, 이는 곧 성욕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욕의 미적 표현이다. 신윤복을 비롯한 다양한 미인도의 작자들 역시 가부장제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뜻이다.---pp. 265.
춘화의 제재인 ‘성관계’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이니, 여성이 등장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주목할 것은 춘화의 성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등한 관계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춘화에서 여성은 이 관계에서 성적 대상이 아니라 성적 욕망의 주체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 〈열락(悅樂)〉의 여자는 모로 누워 있다. 그 뒤에서 남자가 오른손으로 여자의 몸을 괴고 왼손은 여자 뒤쪽에 손을 넣고 있다. 여자의 좁고 짧은 저고리는 둥글고 큰 젖가슴을 윗부분만 겨우 가린다. 여자의 배를 보니, 앞으로 볼록 튀어나와 있다. 임신 중인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임신 중일 때도 성욕을 억누를 수 없다. 하여, 노랗게 봄꽃이 핀 날 아내와 정사를 벌인다. 치마끈은 풀렸고 여자의 성기가 약간 보인다. 주목할 것은 여자의 표정이다. 가는 눈썹, 감은 눈, 꼭 다문 작은 입술이 여자가 지금 성의 열락에 잠겼음을 나타낸다. 여자는 쾌락에 잠겨 있는 중이다. …… 신윤복의 〈열락〉은 바로 여성이 누리는 쾌락의 한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여성은 구비적 상태에서가 아닌 한 성적 열락을 경험하지 못하는, 성적 열락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춘화는 여성이 성적 열락의 주체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pp.340~344
조선 여성의 일생 저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글항아리 |2010.
엮은이: 규장각한국학연구원-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 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목차
제1부 조선 여성의 재발견
1장 사라진 목소리를찾아서
- 조선 여성의 삶, 다시 보고 다시 읽기 | 박무영·연세대 국문과 교수
2장 화가와 현모, 그 불편한 동거
- 신사임당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이숙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3장 고통을 발판 삼아 피어난 지성
- 조선 여성 지성인들의 계보 | 이혜순·이화여대 국문과 명예교수
4장 숨은 일꾼, 조선 여성들의 노동 현장
- 베 짜기에서 삯바느질, 이자놀이에서 출장요리까지 | 김경미·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5장 사랑 타령일랑 집어치워라
- 기생의 삶, 그 냉혹한 현실 | 정병설·서울대 국문과 교수
6장 금하고자 하나 금할 수 없었다
- 여성을 통제한 결과로 나타난 아이러니 | 정지영·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제2부 조선 여성, 그 삶의 현장
7장 여성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나
- 상식과 다른 조선의 혼인과 제사 규칙 | 김미영·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8장 여학교는 없었다, 그러나 교육은 중요했다
- 가문의 영광을 비추는 거울 만들기 | 한희숙·숙명여대 사학과 교수
9장 규중을 지배한 유일한 문자
- 번역소설에서 게임북까지, 여성의 문자생활과 한글 | 이종묵·서울대 국문과 교수
10장 믿음의 힘으로 유교적 획일화에 맞서다
- 조선 여성의 신앙생활: 불교를 중심으로 | 조은수·서울대 철학과 교수
11장 조선 여성들의 로맨스
- 문학 속의 사랑과 규범: 밀회에서 열녀의 탄생까지 | 서지영·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2장 조선 여성 예술가의 탄생
- 시와 노래로 승화된 영혼 | 송지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3장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여성들의 놀이
- 깨가 쏟아지는 규중의 취미생활 | 조혜란·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판사 서평
“우리는 조선시대 여성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 안다 하여도 그것이 과연 실상에 부합하는 앎인가?”
역사, 그 절반은 여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기록의 역사나 기억의 역사에서는 그 몫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은 단군신화의 웅녀처럼 ‘참을 인忍’ 하나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고구려 신화 속의 유화 부인처럼 자식을 성공시킨 어머니를 꿈꾸며, 백제 사람 도미의 아내처럼 일편단심 남편을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알다시피 조선시대 여성에 관한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은 남성들에 의해 구성되고 전달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내처럼 나를 돕는 존재거나 기녀처럼 내 사랑의 판타지를 투사할 존재거나, ‘공식적인’ 조선 여성에는 남성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기록 밖으로 밀려나 기억 저 편에 존재했던 여성들, 그 일상을 새로운 상상으로 일구어낸다. 남성들의 유흥에 동원된 기녀에서 최고 지성의 저술가에 이르기까지, 생존과 생활의 노동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보통 여성에서 화가·음악가로 예술의 경지를 개척한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유교적인 가족 의례를 주체적으로 실천한 여성에서 그 가족 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한 불교승에 이르기까지…… 저자들은 이 다양한 여성들이 가졌을 법한 아픔과 고통, 그녀들이 누렸을 법한 기쁨과 성취감에 주목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하되 일한 티 내기 없기. 절로 산으로 떼 지어 몰려다니며 놀기 없기. 기쁘거나 슬프거나 섭섭하거나 노여워도 겉으로 내색하기 없기. 두 번 이상 시집가기 없기. 알아도 아는 척하기 없기. 있어도 없는 듯 자기 주장하기 없기. 할 말 많아도 말하기 없기. 질투하기 없기. 책 펴놓고 공부하기 없기…… 조선의 아버지들은 딸들에게 이러한 주문을 했다. 양반집 마님의 행장이나 선비 집 아내의 제문 등에는 이렇게 살다 간 여성을 기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 텍스트가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하지 말라!’든가 ‘하기 없기!’라는 금지 용법은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언설이다. 실제로 밥 짓고 베 짜는 일 모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여자들이 많다는 세태가 고발되기도 하고, 돈 좀 모은 여자들의 기세등등한 태도와 그에 눌린 남자들의 각성이 촉구되기도 했다. 또 왕의 조정에서는 ‘꽃이 피었네’ ‘부처가 오셨네’ 하면서 강으로 산으로 몰려다니는 여자들로 골치를 앓기도 했다. 이처럼 자기 욕망과 이해에 충실하여 남자들을 긴장시킨 부류의 여성들도 있었다. 여성의 행위를 금지하는 언설과 여성의 세태를 우려하는 담론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사실(혹은 진실)이 하나가 아님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조선 사회 여성들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할 때, 복수성·다양성의 개념은 의미 있는 매개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놀고 싶은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규방이라는 곳은 여성 유폐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여성만의 독자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한 패의 여성들은 외출과 노출, 놀이의 금제禁制에 반항하듯 규방 밖에서 보란 듯 놀이를 즐겼다. 그녀들은 광대를 앞세워 흥을 돋우며 시끌벅적하게 거리를 활보했고, 구경거리가 떴다 하면 몸종을 앞세운 사족 여성들이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갔다. 규방 밖의 놀이가 체제 대항적인 의미를 지녔다면, 규방 안의 놀이는 체제 순응적이거나 체제를 비껴간 형태의 놀이였다. 규방 안의 여성들은 티 내지 않고 깨가 쏟아지도록 소곤소곤 노는 방식이었다. 어디 우리가 상상이나 했던가?
이 여성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로맨스 없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성 문사文士들에 의하면 기생은 사랑을 먹고 사는 ‘특별한’ 존재이다. 하지만 기생의 입장에서 본 기생의 진실은 사랑을 팔고 사는 직업인에 가깝다. 그녀들은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업상의 의무로 남성 손님의 취향과 요구를 반영한 사랑노래를 주로 불렀다. 기생이란 동경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전근대를 살다간 힘없는 민중의 한 부류일 뿐이다. 또 기생을 통해 성애와 신분 상승 사이에서 갈등했던 조선 양반의 이중적 모습을 읽어내기도 했다.
규중을 지배한 유일한 문자, 한글
조선시대에 한글은 여성의 문자였다. 여성들은 한글 세계에서 놀아야지 한문세계로 넘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편지를 보낼 때 발신자나 수신자 중 어느 한쪽이라도 여성일 경우 모두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되었다. 여성들은 한문을 알아도 한글을 써야 하고,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자 해도 한글로 된 책을 읽어야 하는 언어적인 차별을 당해야만 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교양을 위하여 수많은 책들이 한글 전용으로 번역되었다. 50책이 넘는 『조야회통朝野會通』 『조야기문朝野奇聞』 『조야첨재朝野簽載』 『정사기람正史紀覽』 등의 역사서를 비롯해 한시선, 한문소설 등이 하나씩 한글로 옮겨졌다. 왕실 여성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중국 여행기인 한글본 연행록도 궁중으로 들어왔다.
김호연재의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등 여성들이 남긴 시집을 보면 오직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다. 한시 원문조차 한글로만 표기되고 어려운 단어만 간혹 한글로 간략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남성조차 여성과 함께 한시를 향유하고자 할 때는 한문보다 한글을 우선시했다. 한글로 번역된 여성의 시집에는 원문이 잘못 필사되거나 음이 잘못 표기된 경우가 상당수 발견된다는 점을 볼 때, 한글로 된 문집을 읽는 이들이 한문 원문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한시를 우리말로 한번 읊조리고 다시 그 풀이를 읊조리는 방식으로 향유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시의 한글 번역본을 읽으면서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점 한시가 대중적인 장르가 되면서 한시 짓는 일에 가담하는 여성이 많아졌다. 또 한시를 활용해 퍼즐을 즐기는 놀이책도 많이 등장했다. 『규방미담』은 여성이 놀이로서 한시를 즐길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오락서다. 『규방미담』에는 「귀문도龜文圖」와 「직금도織金圖」와 같은 선기도璇璣圖를 여러 종 삽입하고 있다. 빙글빙글 돌려서 읽는다 하여 선기도라고 한다.
글 잘 쓰거나 학문 잘하는 게 수치였던 시대, 문필을 날렸던 여성들
김운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18세기의 대문호 김창협의 딸이다. 대학자인 아버지와 삼촌들로부터 ‘학자’로 대접받던 이 여성은 아버지에게 자기 묘지명을 지어달라 부탁한다. “달리 이름을 후세에 남길 방법이 없는 여성의 몸이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아버지의 묘지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나은 일일 것”이라면서 말이다. 기록의 주체로 활동하는 일과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때로 자기 이름 남기기에 대한 욕망은 이토록 처절했다.
강정일당과 임윤지당 같은 인물도 이름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둘 다 조선의 여성 성리학자로 꼽을 만한데, 강정일당은 “아무리 여성이라도 무슨 일인가 이룰 수 있다면 성인聖人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남편에게 주장한다. 그녀는 남편의 ‘엄한’ 스승 노릇을 하며 학자로서의 삶을 살다 갔다.
하지만 ‘천재’ 여성들이 이름 드러내길 좋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알려질까 두려워하고 위협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남들이 집안을 비난할까 의식했기 때문이다. 서영수합이 그런 경우로, 그녀는 저 유명한 홍석주·홍길주·홍현주 삼형제의 어머니였다. 시재가 남달라 종종 시를 지었고, 자식들이 편집·인쇄해서 책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는 시를 짓게 된 것이 “남편의 강요에 의해서였고, 시를 짓게 되더라도 입으로 읊어 응했을 뿐 붓을 들어 기록하는 일은 절대로 하려 하지 않았다”고 밝혀놓았다. 여성의 문필이 금기시되던 당시 당당히 내놓는 것은 부덕不德이었기에 감춘 것이다.
한편 선조대의 이옥봉이란 여성은 빼어난 글 솜씨 때문에 결국 남편에게 버림받고 만다. 이옥봉은 16세기 후반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나 워낙 뛰어난 재주로 부친을 여러 차례 놀라게 했다. 이옥봉은 서얼 처지의 신분을 인식하고 자기에겐 제대로 된 혼처가 없을 것을 알아 남명 조식의 제자인 조원이란 인물의 소실로 들어갈 것을 자청했다. 이옥봉이 그의 소실을 자청한 이유는 조원의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원 정도라면 자신의 시재詩才를 충분히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남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다. 그런 남편이었기에 이옥봉은 조원을 많이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 아낙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누명을 벗겨줄 소장訴狀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이옥봉은 시 한 수를 써서 소장 대신 제출했고, 이를 본 현감은 누명임을 알고 그 아낙의 남편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은 뒤 조원은 시로써 송사를 해결하려 했으니, 다음에는 조정의 일까지 간섭하지 않겠냐는 이유로 그녀를 버렸다.
송시열과 그 제자들이 5만원권의 신사임당을 만들었다
16세기 노론계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조선이란 나라의 기틀을 다잡은 인물로 추앙받곤 한다. 하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여성에겐 경직된 사회 그 자체였고, 그가 만든 이데올로기는 후대까지 뿌리 깊게 지배한다. 이 책에선 그 희생자의 대표적인 예로 신사임당을 꼽는다.
중국에서 명성을 떨쳤던 소세양이란 시인이 신사임당 그림에 시를 집어넣은 것만 봐도 당대 사임당의 그림 솜씨가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꽃다운 그 마음 신과 함께 열렸나니, 묘한 생각 맑은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사임당 그림에 대한 소세양의 시).” 조선전기의 정사룡이나 이이의 스승으로 알려진 어숙권 역시 화가 사임당의 능력을 인정하고 부각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사임당 그림에 대한 평가가 정통 유학파를 자처했던 송시열과 같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점이다.
송시열의 반격, 혹은 ‘신사임당 만들기’ 프로젝트는 곧 조선 사대부사회를 지배한다. 송시열 역시 사임당 그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임당의 그림이 완전한 전문가의 솜씨여서 여자의 작품 같지가 않다고 했다. 글이든 그림이든 여자의 것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여자의 본래 임무를 방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시열은 소세양 등의 시에서 “묘한 자취” 등의 표현을 문제삼으며 부인의 그림에 외간남자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을 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송시열의 언급 이후 사임당은 송시열의 문인인 18세기 노론 계열의 인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담론화되었다. 그녀의 그림에 대해 언급한 이들은 김진규(1709), 신정하(1711), 송상기(1713) 등이다.
김진규는 최초로 사임당의 그림을 『시경』의 「초충」과 연결지었다. “고대 성모聖母들의 가르침을 잇고 있으니 여사女士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임당의 그림들은 『시경』 및 고대 성인들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진실’이 만들어졌다. 송상기는 더 나아간다. “부인의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지금껏 이야기하는 이들이 부녀 중의 으뜸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하물며 율곡 선생을 아들로 둔 것임에랴.” 이것은 해석하면 “율곡이 없으면 곧 신사임당도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 김창흡, 조귀명, 신경 등 사임당 그림에 대한 담론의 생산과 유통은 율곡을 추숭한 노론 계열 학인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징검다리를 밟아가듯 하나하나 증거를 제시하며 복원하고 있다. 신사임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효녀와 열녀? “평생 시집식구 속물근성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백
『자경편自警篇』을 저술하기도 했던 사대부 부인인 김호연재가 아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 여성의 속마음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평생 나 홀로 속물스런 구석 없어, 너희 댁과는 기쁘지 못한 일이 많았다 / 눈썹을 낮추고 조심하여 수고를 감내했으나, 부지중 창자 속에 불길이 솟곤 했다.” 즉 평생 시집식구 속물근성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조선 여성의 고백인 것이다. 사실 김호연재보다는 밀가루 반죽 덜어내듯이 허벅지를 베어내 병석의 남편에게 먹이고, 남의 손이 닿은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손목을 자르는 열녀 이야기가 우리에겐 더 친숙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실린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 허련의 「채씨 효행도」라는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유의 그림이 숱하게 그려졌다. 이 책에 실린 그림(31쪽)은 허련 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것인데, 거기에 증손자가 쓴 제題를 보면 이런 그림이 조선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혹자가 물었다. ‘효열이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인가?’ … 가장이나 읍지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오랜 세월 전해져 사라지지 않을 터인데, 어찌 다시 그림으로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부인네들과 어린 아들을 위해서이니 집안의 정치는 언제나 부인네들과 아이들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의 부인들과 아이들이 아침저녁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보며 아무개 고모가 몸소 부엌일을 하고 자신으로 대신해줄 것을 하늘에 기도하고 가진 재물을 다 내주고 남편의 죽음을 뒤따랐다고 되뇌며 안타까움과 격앙을 보여 사람의 선한 감정을 자극시켜준다면 이 그림이 갖는 의미를 어찌 간과할 수 있겠는가.” 즉 조선의 남성 화가들이 효행도를 그렸던 이유는 여성들에게 그런 실천의 지침을 마련해주기 이한 것이었다.
여성이 할 일을 지침으로 남겼던 여러 학자들 가운데 이덕무의 『여사서언해』는 조선의 보편적인 남성의 사고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대목을 보자. “일하지 않는 편안함은 몸에 상처를 입히는 예리한 칼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 칼날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심청전』에 나오는 곽씨 부인은 남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삯바느질에 빨래, 염색, 출장요리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손톱 발톱 잦아지게 품을 팔아서 돈을 모은다. 그리고 돈을 모은 뒤에는 ‘이자놀이’를 해서 돈을 불려 제사를 모시고 남편을 먹이고 입힌다.
가끔은 이런 데 대한 불만을 품은 여성의 탄식이 터져나오곤 했다. 가령 「여자탄식가」라는 글에선 너무 힘들었던 삶을 토로한 여성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가는 허리 부러지고 열 손가락 다 파여서 (…) / 여자몸이 죄가 되어 유구무언 말 못하고 / 구곡간장 타는 불을 속치부만 하자 하니 / 사사이 생각하니 그 아니 분할손가.”
떼 지어 몰려다닌 여성들, 불사와 음사
조선은 나라를 세우면서 규방 여성에 대해 길을 나다니는 것, 얼굴을 내놓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일을 급속히 추진했다. 원래 조선 초기의 양반 여성들은 평교자를 타고 다녔다. 사방이 트인 가마였다. 하지만 곧 3품 이상의 정실부인은 평교자를 탈 수 없도록 규정했다. 가마의 사면을 부축하는 종들과 옷깃을 스치고 어깨를 비비게 되어, 흉허물 없이 가까워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평교자를 금하는 논의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즉 태종 때 3품 이상의 정처가 아닌 경우는 평교자 대신 말을 타도록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여성에게 의도치 않게 자유로움을 준 것이다. 더욱이 다른 한편에서는 걸어다니는 여성들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 평교자를 타지 말라는 조치가 내려오자 사대부의 아내나 사족의 딸들은 길을 걸어다녔다. 이는 평교자를 타지 말라고 했지 걸어 다니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 여성의 입장에선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국가에서 ‘천한 사람들, 특히 남성’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 오히려 스스로 길을 활보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조선 여성의 자유로움은 불교 행사와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태종 4년부터 부녀자의 절 출입을 엄금하는 조처가 내려진다. 하지만 부녀자가 사찰에 출입하는 일은 조선시대 내내 완전히 차단되지 못했다. 세종 16년에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가 수리를 위한 불회를 열어 사대부의 아내, 여승, 부녀자들이 서로 구경하고자 몰려들어 또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때 3명의 중이 무애희無??를 시작하자 부녀자들이 시주라면서 옷을 벗어주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에 대해 왕은 대부분 “부녀자들이 사리를 모르고 그랬다”는 식으로 처벌을 피했다. 불가피할 경우라도 곤장 형벌을 내린 뒤 속전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 곧, 유교라는 질서와 규범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문명화된 징표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불교를 믿으며 불교식 제사를 지내고, 불교 행사를 만들고 참여했다. 실록에는 여성에 대한 규제 조항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벌어진 숱한 논의가 담겨 있다. 이는 곧 그 규제가 쉽게 관철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기녀’와 ‘규수’에 가려진 노동하는 여성들
조선시대 여성 관련 자료에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것은 노동하는 여성들이고, 어떤 경우에는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었다. 노비들을 거느린 양반 여성에서부터 가난한 선비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쌈, 바느질, 염색, 이자놀이, 출장요리, 농사일 등 안 하는 게 없었다. 그래도 먹고살기는 쉽지 않았다. 남편들이 돈을 벌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춘택金春澤(1670~1717)은 제주도에 귀양 가서 해녀를 만나 문답을 나눈 뒤에 이를 「잠녀설潛女說」이라는 글로 남겼다. 해녀는 전복 따는 일의 어려움을 묻는 김춘택에게 전복 따는 일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전복을 사는 일이 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해녀는 전복을 따서 세금으로 공납하고, 부족한 공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전복을 사들여야 하는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한다. 부패한 공납제도의 폐해를 짊어진 것도 ‘적어도 절반은’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생계부양자’이며, 나아가 국가경제의 근간을 생산하는 노동 주체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가려지고 평가절하되어왔다.
규중에서도 깨가 쏟아지게 노는 방법
시모임이나 노래 감상 등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대표적 놀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양과 취미를 바탕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고, 투호처럼 던지는 놀이는 일정한 수준의 운동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학습 없이 방 안에서 그냥 할 수 있는 규방의 놀이 문화도 있었다. <규문수지여행도閨門須知旅行圖>나 <종정도從政圖>라는 놀이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둘은 마치 윷놀이와 같이 방식으로 진행하는 놀이이다. <규문수지여행도>는 인현왕후의 유품이 남아 있는데, 이 놀이판에는 당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덕성의 종류, 본받을 만한 여성의 이름과 닮지 말아야 하는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부정적 이름으로는 정난정(鄭蘭貞, ?~?)이 있다. 그녀는 윤원형(尹元衡, ?~1565)의 첩이었다가 본처를 쫓아내고 스스로 정실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인현왕후 본인도 장희빈(?~1701)에 의해 폐비가 되었다가 훗날 다시 왕비로 복귀했던 여성임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정난정 이름 위에 놓였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하다. <종정도>는 벼슬의 높고 낮음을 응용하여 만든 놀이로, 부녀자 및 남자 아이들의 놀이였다.
박제가의 방에 13살짜리 기생을 넣어준 박지원- 이것이 기생의 현실
“무정할손 저 낭군아 홍안박명 어이 하리 / 속절없다 이별이야 남은 간장 다 녹는다 / 언제나 우리 낭군 다시 만나 이생 인연 이어볼까”
이 시는 미국 버클리대학에 소장된 『염요艶謠』라는 책에 나오는 시다. 노랫말만 보면 애끓는 한 여인의 정한이 가득하다. 헌데 이 작품이 쓰여진 곳은 규중의 깊은 곳이 아니다. 당시 서울에서 온 관리들의 이별 잔치에 공주 기생들이 대거 불려갔다. 관리들은 기생을 모아놓고 백일장을 벌였는데, 이별을 주제로 하여 시조 가사를 짓게 하고는, 선비들의 과거시험처럼 기생 작품에 등수까지 매겼다. 위의 인용은 최우등으로 뽑힌 기생 형산옥의 가사의 뒷부분이다. 과연 이런 상황을 알고도 시에 몰입할 수 있을까. <사랑 타령일랑 집어치워라> 편을 집필한 정병설 교수는 “황진이의 시조도 이런 백일장에서 지은 시조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불린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 감정을 내밀히 드러낸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빼어난 말솜씨를 과시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어떤 시조가? 바로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다가”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조를 두고 한 말이다. 정 교수는 기생은 결코 사랑만 찾는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조선후기 서울 기방의 풍속을 보면 처음 손님 앞에 나온 기생들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여성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을 여러 남자에게 보이게 했는데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반복해서 시켰다. 손목 한번 잡혀도 정절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는 조선사회에서 이는 “스스로를 짐승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심지어 연암 박지원조차 안의 현감으로 있는 자신을 찾아온 벗 박제가에게 열세 살짜리 기생을 데리고 자게 했다.
안채 접근금지와 안방물림의 전통
조선시대 남녀 역할 구분은 주거 공간의 분리라는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전통 가옥에서의 사랑채와 안채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 가옥에서는 가장이 거처하는 사랑채와 주부의 영역인 안채를 중심으로 남녀 주거 공간을 분리하여 일상적 왕래를 엄격히 통제했다. 심지어 남편조차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대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 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곤 했다. 그런가 하면 사랑채를 방문한 외부 방문객이 안채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중문 앞에 ‘내외담’을 설치해두기도 했다.
여성전용 공간으로서 안채의 핵심은 ‘안방’이다. 그리고 안방의 주인은 주부권을 보유하고 있는 안주인, 이른바 ‘안방마님’이다. 그러나 기혼 여성이 안방을 차지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지역에 따라 두 가지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시어머니가 숨을 거두고 나서 안방을 물려받는 것이고, 둘째는 며느리가 아들을 낳은 후 물려주는 경우다. 전자는 ‘사후양도형’이라고 하여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후자는 영남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른바 ‘안방물림’이다.
‘안방물림’을 하기 위해서는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단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데, 이후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시어머니로부터 주부권을 물려받게 된다. 이로써 며느리는 안살림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보유한 주부로서의 확고한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안상현 외 17인 경기문화재단
실학자들의 여성관
새로운 학문 경향으로서의 실학은 조선 후기 지식 풍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실학자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고 여성의 지적 활동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지지했다. 기본적으로 실학자들도 유학자라는 태생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작은 변화가 서서히 일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에 대해 다른 견해를 피력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여성들도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신윤복의 <이부탐춘>.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과부(소복을 입은 여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조선 개국 후 개혁가들은 고려 사회와 다른 새로운 풍속을 만들기 위해 부심했다. 신유학을 신봉한 개혁가들은 풍속이야말로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원천적인 에너지라 여겼다. 그래서 삼강(충·효·열)의 확립에 눈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여성 규범도 강화했다.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남자가 땅이라 할 수 있는 여자에 군림하며, 이 보편성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낮은 존재인 여성의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욕망 가운데 성(性)은 철저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미 중국 고대로부터 음란한 여성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논리가 공공연히 설득력을 얻었다. 조선 왕조도 이러한 논리에서 힘을 얻어 ‘정’(貞 : 정조 또는 정절)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각인시켜 나갔다.
세종의 명으로 직제학 설순을 비롯한 학자들이 지은『삼강행실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를 위해 여성들이 힘써야 할 행동거지를 책자로 만들어 보급했다. 대표적으로 세종은 1434년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 · 효자 · 열녀 330명의 사례를 모아 『삼강행실도』를 펴냈다. 오늘날 헌법에 해당하는 위상을 가진『경국대전』(1485년 시행)에는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해 여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권장 조항이 들어 있다.
전라북도 정읍시에 위치한 언양 김씨 삼강 정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이와 함께 국가에서는 열녀를 발굴하고 기리기 위해 각종 혜택을 주었다. 열녀의 집이나 그 마을 앞에 붉은 문(정려)을 세워 영예를 드높여 주었다. 또 열녀의 집이나 후손에게 쌀이나 옷감 등 각종 물품으로 포상하거나 무거운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노비이면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파격적인 조치도 시행했다.
국가의 조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종은 양반 여성이 재가하면 그 아들과 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즉, 다시 혼인한 여성의 아들과 손자는 문과 · 무과, 생원진사시 같은 과거시험 응시를 금지하고 관직에도 임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벼슬길을 막은 것이었다. 이제 여성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재혼하지 못하고 수절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열녀, 가장 추앙받는 여성상
이수광의 『지봉유설』
그렇다면 실학자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이수광(1563~1628)은 서울 낙산 아래에 살면서 『지봉유설』(1634년 출간)을 지었다. 이 책은 총 182항목 3,435개 조목으로 구성되었으며 조목별로 내용의 출처를 달았다. 그래서 이 책은 실학의 학풍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천.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로 불리면서,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인조는 이들을 홍제천에서 목욕시켰다고 한다. <출처: 연합뉴스 제공>
이수광은 이 책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 사람보다 뛰어난 점 네 가지를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로 부인의 절개를 꼽았다.「열녀」라는 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나섰다가 물에 빠져 자결한 여성을 소개했다. 이 부인은 뱃사공이 손을 끌어당겨 배에 태우자 손이 더럽혀졌다고 비관해서 죽었다. 이수광은 이 일을 장하다고 칭찬하면서, 전쟁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여성들이 왜적과 명 군사들에게 치욕을 당하는 바람에 정절을 잘 지켜온 풍속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고 탄식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실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이다. ‘성호학파’를 형성할 만큼 후대 학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각종 사회 개혁안을 내놓은 이익은 “여자는 안에 위치해야 올바르고 남자는 밖에 위치해야 올바르다.”고 보았다. 또 “부인은 아침저녁으로 춥고 더움에 따라 가족을 공양하고 제사와 손님을 받드는 일이 있으니, 어느 겨를에 책을 읽겠는가?” 하면서 여성의 책 읽기를 경계했다.
이익은 이수광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으로 신분이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켜 재가하지 않는 일을 소개했다. 또 권씨라는 여성이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신랑이 죽자 그 신랑을 따라 굶어죽은 일에 감동을 받아 국가에 정려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익은 이 글에서 권씨의 결심과 행위가 어질다고 칭찬했다.
충남 예산 추사고택에 있는 화순옹주 홍문.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 할머니이다. 남편 김한신이 죽자 음식을 끊고 14일 후에 죽었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다. <출처: 문화재청 –공공누리>
순암 안정복(1712~1791)도 열녀의 길을 강조한 학자였다. 안정복은 이익의 수제자로 경학과 역사학에 주력했다. 안정복은 여성의 절개나 지조에도 등급의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위급한 상황을 당해 목숨을 버려 정조를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봉양해야 할 시부모가 계시고 보살펴야 할 자녀가 있는데도 남편을 따라 죽은 여성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한 여성으로 높게 평가했다.
변화의 움직임, 자결에 대한 비판
이처럼 여러 실학자들은 여성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두 차례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어느 시점부터 조선의 여성들은 남편이 죽은 뒤에 재혼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열(烈, 절개)’이 보편화되면서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다른 '열’을 보여 주기 위해 남편을 따라 죽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남편을 잃은 여성도 살 권리가 있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1737~1805)은 <열녀 함양 박씨전>이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에서 박지원은 왜 과부가 된 여성들이 기꺼이 남편을 따라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아니면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는지를 묻는다. 친정 부모가 과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재가하라고 핍박하는 것도 아니요, 자손이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닌데도 왜 그런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이 과부가 되면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이 이미 온 나라의 풍속이 되는 바람에 옛날에 칭송 받던 열녀들이 오늘날 도처에 있는 과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재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남다른 절개를 보일 길이 없어 목숨을 버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박지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과부이지만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욕망을 긍정했다. 엽전을 굴리며 외롭고 쓸쓸하던 기나긴 밤을 참아낸 어느 노모의 수절담을 소개한 것이다.
경남 함양군에 위치한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정려.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열녀 함양 박씨전>의 주인공인 밀양 박씨의 정려비다. <출처: 문화재청 – 공공누리>
이어서 박지원은 이 열녀전의 주인공 박씨가 함양으로 혼인해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뒤에 약을 먹고 자결한 전말을 소개했다. 박지원은 박씨의 행위를 열녀라고 찬탄하면서도 그 여성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렸다. “생각하면 박씨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았으랴!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오래토록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될 터이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정치적으로 실세한 남인에 속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익의 학맥을 잇는 성호학파에 속했다. 정약용은 <열부론>에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연로한 시부모와 어린 자녀를 위해 “마땅히 그 슬픔을 견디며 그 삶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귀중한 목숨을 의로운 상황이 아닌데도 버린다면 쓸데없는 죽음이라고 주장했다.
김홍집이 주도한 갑오개혁은 대표적으로 과부의 재가를 공식으로 허용했고, 이는 남녀 및 부부의 권리가 같음을 의미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되면 이와 유사한 시각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의병장 기우만(1846~1916)은 <효열부 신씨 정려기>, <송씨 효열 정려기> 등에서 이 여성들이 남편 사후에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마음을 접고 남편 대신에 시부모와 자식들을 봉양한 것은 바른 도리에 맞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마지막 거유로 불린 김택영(1850~1927)도 <절부에 관한 설>에서 따라 죽는 것은 한순간의 고통이지만 죽지 않는 것은 일생을 마칠 때까지의 고통이라면서, 의리상 죽지 않은 여성이야말로 절부라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송씨라는 여성이 시부모를 섬기기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접고 효성으로 모신 사례를 소개했다.
정약용이 <열부론>에서 지적했듯이 남편의 죽음은 부인뿐만 아니라 위로 시부모로부터 아래로 자녀까지 온 가족의 불행이었다. 이 불행 속에서 며느리이자 어머니인 여성마저 죽는다면 시부모나 자녀는 더 큰 불행에 직면해야 한다. 가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여성의 존재가 부각되던 시대, 이것이 그 시대에 며느리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살아남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였다.
변화의 길목에 선 여성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는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것만으로는 ‘열’을 보여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여성들이 그 길로 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열녀의 길을 옹호할 때에 또는 죽음으로써 열을 실천하는 행위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을 때에 여성들이 먼저 변하고 있었다.
자기록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02년(순조 2) 경상도 안동에서 고을 수령을 지낸 사람의 며느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동으로 시집온 이 여성은 일찍 청상과부가 되어 자녀가 없는 상태였다. 당시 지역 사회에서는 호랑이에 물려갔다고 소문이 났다. 하지만 곧 밝혀진 사실은 그 여성이 가출해서 간 곳을 모르는 상태였다(『노상추일기』1802년 8월 11일). 이 양반집 여성은 수절도 거부하고 남편을 따라 죽지도 않은 채,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다.
18세기 말 서울에 사는 양반 여성 풍양 조씨(1772~1815)는 남편이 죽은 후 죽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혼인한 지 6년 만에 동갑내기 남편이 스무 살의 나이로 병을 앓다 죽었다. 풍양 조씨는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설득으로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후 어린 시절부터 남편이 사고로 병을 앓다가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자기록(긔록)』으로 남겼다.
이 글은 열녀가 되지 못한 여성의 자기 고백서로서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열녀가 되지 못한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풍양 조씨는 남편을 따라 죽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시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을 보존하기 위해 양자를 얻어 제사를 맡기고 팔자 사나운 여생이나마 살기로 맘먹었다.
“내 생목숨을 끊어 여러 곳에 불효를 하는 것과 참담한 정경을 생각하니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모진 목숨을 기꺼이 받아들일지언정 다시 양가 부모님에게 참혹한 슬픔을 더하랴 하여 금석같이 굳게 정한 마음을 문득 고쳐 스스로 살기를 정했다.”
- 『자기록』
강원도 원주에서 매년 열리는 ‘임윤지당 얼 선양 헌다례’. 임윤지당(1721~1793)은 여성 성리학자로 학문 탐구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 공부하려는 여성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출처: 연합뉴스 제공>
위 사례들처럼 여성들 중에는 가족과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지 않고 본인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여성도 있었다. 또 죽고자 하나 죽지 않는 것이 가족의 슬픔을 덜어주고 효를 실천하는 일이라 여겨 살아남은 여성들도 많았다. 이 사례들은 조선 후기 여성의 삶과 선택에 대해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변화를 사회 변화의 단초로 볼 것인지, 찻잔 속의 태풍으로 판단할 것인지는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
참고문헌조성을, 「조선시대 사상에 나타난 여성관:실학의 여성관-이익,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20, 2003
강명관, 「순암 안정복의 여성관」, 『한국실학연구』8, 한국실학학회, 2004
이숙인, 『정절의 역사』, 푸른역사, 2014
풍양조씨 지음, 김경미 역주, 『자기록:여자, 글로 말하다』, 나의 시간, 2014
You Cheating Heart - Jerry Lee Lew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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