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저자 이범연|레디앙 |2017.12
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 노조 & 노동자
저자 이범연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1년 대학에 들어갔지만 강의실보다는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거리에서 최루가스 마시고 짱돌을 던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노동자가 되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간 지 어언 30년이 되었다.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두 번 구속에 두 번 해고, 수차례 노동조합 간부를 맡으며 숨 가쁘게 살아왔다. 지금은 한국GM 부평공장 도장부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열심히 컨베이어를 타고 있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어떻게 하면 푸르른 청춘을 다 바친 노동운동이 단순한 추억거리가 아닌 세상을 바꾸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면서 흔들리는 나를 다잡기 위한 ‘무모한 도전’
0장. 늙은 노동자의 짧은 ‘자소서’
두 번이 해고와 구속, 회한 많지만 후회는 없어
수줍음 많던 아이, 노동자가 되다
몰래 올린 결혼식
“형, 대학 나와서 왜 공장 일해요?”
아직 나의 열정은 살아 있다
1장. 노동자, 50대에 길을 잃다
방황하는 또 다른 나에게 보내는 편지
“귀족노조에 계시네요.”
“아빠, 그게 얼마 후 내 모습일지 몰라”
어긋남, 그리고 노동운동의 보수화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
관료적 관성에서 벗어나기
낯설게 만들기
2장.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
한국GM 노동조합 경험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꿈을 닫히게 만든 것
대기업 정규직은 보수화되었나?
투기적 욕망, 자본의 덫에 걸리다
정리 해고의 정치경제학 1 : 죽은 자들의 이야기
정리 해고의 정치경제학 2 :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한국GM 사무직 노동자운동
심야 노동 탈출기
시간에 대하여 : 돈과 삶의 부등가 교환
두 개의 삶 : 돈 버는 맛과 노는 맛
회사 인간 : 비어 버린 나의 삶
부러워할 삶의 양식
3장. 대공장 노조는 왜 쇠락했나?
남성 중심?전략 부재?폐쇄적 정파 벗어나 수평적 네트워크로
남성주의 : 권위와 비리의 뿌리
독이 든 선물 : 권력화된 노동조합
시야는 좁아지고 정신은 마비되고
논쟁?소통 사라지고 오로지 선거 승리만
대공장 노조, 단기 경제적 이익에 매몰
노동운동의 ‘공유지’를 넓히자
4장. 균열된 노동, 배제된 노동자
노조 바깥 90%,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 여는 주체
노동운동, 새로운 주체가 등장할 것인가?
배제된 노동자와 새로운 주체 사이
두 개의 균열과 문턱
보이지 않는 가난, 보이지 않는 노동자
‘기업가적 개인’의 파산과 새로운 각성
‘고용 없는 삶’의 가능성
자기 목소리 없이 자기 권리 없다
5장. 미완의 촛불, 노동의 꿈
제2의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기 위해
열린 촛불, 닫힌 촛불
정치 소비자에서 정치 생산자로
시민 또는 깃발 없는 노동자
촛불, 일상에서 타올라야
6장. ‘만남의 조직학’ 개론
엇갈림의 골목길에서 만남의 광장으로
노동조합, 인간 존엄 지켜주는 무기
노동조합의 태생적 한계
두 개의 민주노총이 있다
만남의 조직론
7장. ‘만남의 조직학’ 각론
만남을 통한 새로운 주체 만들기 : 조직화 방식에 대한 제안
가난, 공감과 당당함
일상의 연대 : 소비자인 노동자, 노동자인 소비자
만남의 공간 1 : 지역
만남의 공간 2 : 대학
‘눈먼 두더지’가 절실할 때다
지식, 문화, 예술 노동자와 만남
8장. 물길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활동가론 : 공부 안 하는 진보…생각하는 노동자라야 산다
고민하는 당신, 전태일을 새로 읽자
“소중한 것 먼저 하라”
‘공부 안 하는 진보, 공부만 하는 진보’
가족은 운동의 핵심
‘조합원을 위해서’를 넘어서 : 대중성의 함정
배치 바꾸기
진보진영 혁신, 왜 계속 실패할까?
출판사 서평
내부자 시각으로 대기업노조 문제 드러내다
20대 청춘이 ‘하고 싶은 일’ 대신 ‘해야 될 일’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들어간 후 달달한 낭만, 개인적 성취를 위한 공부 대신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공장 들어가서 기름밥 먹는 걸 선택하는 거라면 더 쉽지 않다.
이 책 저자 이범연은 1962년 태어나 1981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전형적인 386세대다. 하지만 이 책에는 386세대라는 표현이 한 번도 안 나온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청춘들의 통상적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80년대 학번’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현장의 한 후배 노동자가 내게 물었다.
“형은 서울대 나와서 왜 공장 일을 해요?”
입사 후부터 정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야, 서울대는 졸업도 못하고 겨우 3년 다니고, 노동자로 30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그놈의 서울대 타령을 듣고 살아야 하냐?” - 본문 중에서
저자는 마찌꼬바(작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후 대우자동차(현 한국GM)에 입사한 지 어언 30년이 됐다. 두 번 해고되고 두 번 구속됐다. 노동조합 간부 일도 몇 차례 했다. 이제 정년을 몇 년 앞둔 ‘늙은 노동자’가 된 그는 “회한은 많지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세상을 좋게 바꾸는 든든한 진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30년을 살아 온 그가 지금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전망과 많이 다르다. 노동조합은 취업 비리 등 각종 비리에 노출돼 주요 간부들이 해고되고 구속됐고, 단기 경제적 이익 확보에 매몰됐고, 노동자들은 사회의 진보적 발전이라는 노동조합 운동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보수화됐다. 또 정파는 무리한 경쟁에 찌들어서 노조 활동가들은 멀리 길게 보는 방법을 잃어버린 ‘구조적 근시안’이 됐다.
저자는 평론가적 입장이 아니라 ‘내부자’의 시선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정조준한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력의 다른 측면이다. 현 단계 대기업(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 실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다양한 문제점과 문제점이 발생하는 원인을 심층적으로,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와 함께 노조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활동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배제된 노동’을 새로운 주체로 세워야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운동의 혁신과 함께, ‘배제된 노동’과 ‘만남의 조직학’이라는 개념이다. 배제된 노동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면서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범주만으로는 중소기업, 여성, 청년,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모순을 담아내지 못한다. 물론 중소기업 노동자, 여성 노동자, 청년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비정규직과 다를 바 없는 노동조건에서 있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과 모순 못지않게, 남성과 여성,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내국인과 외국인 간의 차별과 모순도 심각하다. - 본문 중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역할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 형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배제된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제안한다.
조직 방식도 과거 공장 중심, 노동자 밀집 지역 중심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서의 지역과 인터넷 같은 사이버상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연봉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과 가난한 수많은 배제된 노동자들이 현실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양한 만남의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현실의 모순과 차별을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여기서 만남은 공간적 차원과 함께 시간적 차원도 함축하고 있다. 기존 노조운동과 미래 노동자들의 공간이 대학 간의 만남도 ‘만남의 조직학’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현장 경험과 고민을 토대로 해 이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대공장 노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 새로운 노동운동 주체로서의 ‘배제된 노동자’들과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한 ‘만남의 조직학’에 대한 내용과 함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태를 분석한 결과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아파트 값이 올라갈 것 같아서 박근혜를 찍는 노동자들, 높은 수준의 연봉이지만 행복하지 못한 노동자들, 돈과 삶의 질의 ‘부등가 교환’ 현장,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자기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지 못한 채, 설령 그런 공간이 있다 하더라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상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회사 동료 노동자들과 술을 마시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세상 참 살기 퍽퍽한데 우리는 대기업 정규직이어서 참 다행이야.”
그때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돈은 받을 만큼 받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그 순간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마도 모두의 머릿속에는 ‘과연 나는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솟아오른 것이리라.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해방’, ‘인간다운 삶’을 외쳐왔던 노동자들의 꿈은 실현되었나? - 본문 중에서
돈 버는 맛도 중요하지만 ‘노는 맛, 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다 ‘이기적’이 되고,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대공장 정규직 중심성을 극복해 ‘진보적’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책에서 내 나름의 멋진 꿈을 꾸었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함께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꿈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본문 중에서
책속으로
내가 잘 아는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실형, 집행유예, 벌금형을 받았고, 회사 인사위원회에서 해고되어 회사를 떠났다. 그 여파로 노동조합 집행부는 총사퇴하고 지부장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내 마음의 뿌리가 흔들렸다.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일하고 활동했던 한국GM 노조가 늙고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전에도 부패는 있었지만 그것은 작은 일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넓고 깊게 퍼져 바로 내 발밑까지 와 있다.
누군가 물었다.
“어디 다니세요?”
“한국GM에 다닙니다.”
“귀족노조네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을 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에는 수구?보수언론과 일부 집단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입에서도 귀족노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벌어지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됐기 때문이리라.
우리 모두는 길을 잃었다. 나는 길을 잃은 또 다른 나, 하지만 길을 찾고자 하는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뜨거웠던 투쟁의 기억들,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을 그저 과거의 것으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또 다른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본문 중에서
그 노동자는 왜 박근혜를 찍었을까?
'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저마다 절실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책장을 뒤질 것이다.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을 접하려고 책을 펴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원한 답, 기발한 발상 같은 것들이 책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잣대들로만 따질 수 없는 책이 있다. 대단한 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 듣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도 않지만 값어치 있는 책이 있다. 이런 저작이 이런 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에 온기를 더하는 책들이 있다.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하 <어언 30년>)이라는 기다란 제목을 단 신간이 바로 그러하다. 저자는 한국GM의 '정규직’ 노동자 이범연. 그냥 노동자라 하면 될 걸 그 앞에 '정규직'을 덧붙이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이 책의 존재 가치의 배경이 된다. 부제가 이 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단체협상에서 여전히 임금 인상 폭에만 관심을 보이는 조합원 정서 때문에 비난 받고 있다. <어언 30년>의 책 표지에 실린 문구처럼, "꿈을 잃고 추락하는 대기업노조, 보수의 길로 나아가나?"라는 물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런 대기업노조들이 속한 민주노총의 이영주 사무총장은 임기가 끝나자마자 박근혜 정권 때 시위 주도를 이유로 구속됐다.
한 쪽에서는 '귀족노조'라 비난받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노조들이 모인 총연맹 간부들이 영화 <1987>의 한 장면마냥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한국 밖 다른 어느 나라의 사회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이런 요상한 형국에 지금 노동운동이 끼어 있다. <어언 30년>은 30년 전 노동자대투쟁에 참여했고 지금은 지탄받는 '대공장 정규직'의 한 사람이 이 복잡한 현실을 진솔히 파고들며 성찰하는 책이다. 내용을 읽어보기 전에 발신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그런 메시지다.
30년 전, 마찌꼬바 경력직보다 못했던 대기업 생산직 임금
저자 이범연은 1989년에 대우자동차에 들어가 이 회사가 한국GM으로 바뀐 지금까지 조립 라인에서 일하고 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나와 노동현장에 투신한다는 생각으로 입사했지만, 이제 와서는 이게 그리 중요한 사연은 아니다. 30년 공장 생활로 단련된 이에게 20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다는 이력은 아련한 추억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범연의 30년 공장 생활이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90년대 내내 해고자로 보냈고 한 차례 복직한 뒤에도 외환위기 직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으로 다시 해고됐다. '어언 30년' 중 10년 이상은 타의로 공장 바깥을 맴돈 해고 노동자 신세였던 것이다.
투사의 삶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누구도 "편하게 살았다"고 치부할 수 없는 생이다. 대우자동차에 입사할 때에도 대기업 노동자가 중소기업 노동자와는 다른 부류라 여기며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노동자가 되고 싶어서 대우자동차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때 상황은 이랬다.
"1987년 이전만 해도 한국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했다. 한국GM의 선배들에게 87년 이전에 받았던 임금 수준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들의 임금 수준은 내가 대우자동차에 입사하기 전에 다니던 마찌꼬바(영세자영업 규모의 제조업체-인용자)의 경력 노동자들보다 낮았다." (<어언 30년> 36쪽)
하지만 1987년, 그 역사적인 해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저자는 단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지탄과 질시를 받는 처지가 됐다. 이범연은 당연히 이런 손가락질에 무턱대고 동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억울하다고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언 30년>에서 2000년대 이후 대기업 노동 현장 풍경을 담담히 돌아보며 아픈 부분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가령 이런 대목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전체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사회복지보다 단체협약을 통해 꾸준히 확대되어 온 기업복지가 더 소중하고 혜택도 크다. (…)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복지 확대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중 많은 것을 기업복지로, 단체협약으로 해결한다. 한국GM의 경우도 단체협약을 통해 자녀들의 대학 학자금을 지원받는다. (…) 그러니 반값 등록금 투쟁은 남의 동네 일일 수밖에 없다." (57쪽)
"나는 몇 번의 선거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 흐름과 진보적인 흐름의 중간에 투기적 욕망에 뿌리를 둔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 흐름이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 오래 전에 같은 [인천] 서구에 사는 조합원들과 술 한 잔 할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집값 때문에 박근혜 찍었어."
"솔직히 나도 박근혜 찍었어."
예상보다 많은 조합원들이 박근혜를 찍었다고 했다." (61~62쪽)
노동자가 평생 일해 집 한 채 갖게 됐다는 게 무슨 허물이겠는가. 도리어 그런 노동자가 많아질수록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학자금 지원도 그렇다. 임금 인상에 그토록 경기를 일으키는 사측이 선심 쓰듯 학자금 지원을 단체협약에 넣어주었을 리 만무하다. 이 또한 1987년 이후 지난한 투쟁의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성취가 더 많은 이들의 성취로 확산되는 길이 막혀 버렸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언제부턴가 사회운동의 본령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회운동은 결코 특정 집단의 실리를 늘리는 일과 무관하지 않고 이를 백안시하지도 않지만, 또한 반드시 이 일을 모든 사회 구성원의 권리 확대와 연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성에 사회운동의 운동됨이 있다.
정규직 노동자가 자가 소유주가 된 게 문제가 아니다. 그와 함께 공공 임대주택이 늘어나고 전월세 인상을 억제해야 했다. 대기업 노동자가 학자금 지원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를 계기로 국가가 운영하는 장학금 제도 또한 늘어나야 했다. 그러나 이런 확산의 통로가 막혔다. 단체협상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 확대되지 못했고, 정치에 개입해 제도를 바꾸는 길 역시 제대로 뚫지 못했다. 그런 통로를 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대기업/정규직/남성/조직 노동자들이 기업별 임금협상의 중력에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어언 30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한 분석이다. 저자는 하나마나한 말로 동료 노동자들을 질타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정신분석가가 된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공허, 허무다. 삶이라 할 바를 도통 찾을 수 없는, 비어 있는 삶이다.
"삶과 돈의 부등가 교환"에 포로가 된 노동자들
계급투쟁은 절반 정도는 누가 누구'에 맞서' 싸우느냐는 문제다. 사회 전체에서든 한 기업 안에서든, 쟁점이 임금 인상이든 제도 개혁이든, 노동이 자본에 도전하고 대립하며 긴장을 놓지 않는다면 분명 계급투쟁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동시대 어느 나라보다 치열하게 임금 인상 투쟁을 벌이던 20세기 말 한국의 노동자들은 한때 전 세계 계급투쟁의 선봉대 대접까지 받았다. 얼굴을 맞댄 자본과의 '적대'라는 점에서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다른 절반이 있다. 그것은 누가 누구'와 함께' 싸우느냐다. '적대'만으로 투쟁의 이야기가 완성될 수는 없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은 '연대'다. 이는 단지 적대자를 제압하기 위해 더 많은 동맹 대상이 필요하다는 문제만은 아니다. 애초에 적대자에 맞서 지키고 키우고 풍성히 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연대'란 수많은 타자들을 내 곁에 더하는 일만이 아니라 이들 타자를 통해 나를 규정하는 일, 끊임없이 새로이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삶이다. 우리 삶을 어느 방향으로 자라나게 하려 하기에 우리는 자본과의 적대를 마다하지 않는가? 모든 민중 집단의 각 세대는 이 물음에 저마다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 어찌 보면 1987년에 태동한 민주노동조합운동이 내놓은 답은 '임금 인상'이라 하겠다. 기업 단위 투쟁을 통한 화폐 소득 증대 말이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얼마 동안은 이게 정말 답이 될 수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비해 노동자들이 받는 몫이 형편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화폐 소득이 시장에서 행사하는 시민권의 기초인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턱없이 제약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임금 인상이 곧바로 인간다운 삶에 어울리는 권리의 쟁취라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 일정 수준에 이르고 나면(가령 '생활임금' 수준을 훌쩍 넘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전체 노동자의 소득이 같은 속도로 늘어나지 않고 특정 집단만 더 빨리 늘어난다면 더욱 그렇다. 이때에도 과연 더 많은 임금의 획득이 자본에 맞서 우리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어언 30년>의 제2장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이 던지는, 묵직하면서도 과녁을 제대로 겨냥한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노동하는 이에게 돈이란 다른 무엇을 하려는 수단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것이고, 언젠가 여가에 쓰려는 것이고, 은퇴 후 불안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나 벌어야 이 모든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면, 어쨌든 더 많이, 지금보다 더 많이 벌수록 좋다. 더 많이 벌려면 여가는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고, 은퇴도 될수록 뒤로, 뒤로 미뤄야 한다. 이범연은 여기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노예가 되는 무서운 악순환을 본다.
"노동자의 현재 삶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즐겁게 사느냐보다는 미래의 불행을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가 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더 노동에 매이게 하고 바로 지금 현재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술 마실 돈이 필요하고, 놀러 갈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더 해야 한다. 여가를 즐기는 것 역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가 된다. 악순환은 계속된다." (99~100쪽)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노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자본을 위한 생산에 투입한다. 자발적으로 더 많은 노동시간을 받아들인다. 법정 노동시간을 줄여도 오히려 잔업, 특근을 늘려서 초과근로수당을 더 챙기려 한다. 이런 노동 경쟁에 나서다 보니 동료의 정리해고나 정규직-비정규직 차별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고 넘어간다. 노동조합 활동도 이런 장시간 노동에 맞춰 더 많은 현금 보상을 따낼 수 있는지 여부로만 평가한다.
돈과 시간의 맞바꿈. 사람의 삶이 결국은 시간의 지속이니 이는 달리 말해 돈과 삶의 맞바꿈이다. 이범연은 이를 "돈과 삶의 질의 부등가 교환"(91쪽)이라 부른다. 탁월한 지적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부등가"라는 점이다. 애초에 돈은 어떤 삶, 우리가 도달하려는 어떤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필요했던 것인데, 이 돈을 벌려고 삶을 통째로 갖다 바치고 있다. 돈은 어느 때가 돼야 충분한 만큼 쌓일지 모르는데, 삶은 확실히 소진되고 있다. 계속 하면 할수록 시간의 주인 쪽이 밑지는 거래다.
이런 악순환에 빠진 노동자에게 지금의 삶은 돈 버는 노동을 떠나서는 별 의미가 없다. 노동 경쟁을 빼면, 텅 비게 된다. "축적, 더 많은 축적"을 외치는 자본가의 욕망 이면이 허무인 것처럼, 더 많은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임금을 좇는 노동자의 삶도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어언 30년>이 충격적으로 증언하듯이 대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도박이 열병처럼 번지게 된다. 자고로 삶의 실체를 상실한 이들이 찾는 마지막 안식이 도박 아니던가.
30여 년 전에 찾은 임금 투쟁이라는 답을 벗어나지 못한 노동조합운동은 이 악순환을 깨기는커녕 부속품 노릇을 하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아직도 자본과 '적대'하는지 모르지만, '연대'해서 만들려고 한 삶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돼버렸다. 저 혼자, 저희들끼리만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지금 노동 현장에 만연한 병의 진짜 원인이 아니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뭔지 종잡지 못했기에 모든 게 흐트러지고 만 것이다.
클리나멘이 되자, 튀어오르는 원자가 되자
<어언 30년>은 비판만 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여전히 노동운동에 애정을 보내며 변화 가능성과 방향을 진지하게 타진한다. 그의 첫 번째 주문은 "관성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너무 빤한 충고로 들리는가.
그래서인지 이범연은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처음 제시하고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가 재발견한 '클리나멘' 개념을 동원한다. 세상을 원자의 운동으로 바라본 루크레티우스는 항상 정해진 경로로 움직이던 원자들 사이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아주 작은 어긋남이 변화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중력이나 관성에서 벗어나는 작은 어긋남에 그가 붙인 이름이 '클리나멘'이다.
이범연은 노동운동의 현 상황에 답답해하는 이들이 현실만 탓할 게 아니라, 누군가 큰 그림을 던져주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다들 '클리나멘'이 되자고 촉구한다. 하나하나로만 보면 미미한 각도 차이 정도로 보일 움직임들이 모여 변화의 큰 흐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변화는 원래 그렇게만 만들어지는 법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어언 30년>의 저자처럼 노동 현장에 투신하던 이들이 그런 클리나멘이었다. 이제 또 다시 그렇게 주어진 경로에서 튀어 나오는 원자들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지만, <어언 30년>에는 우리 주위 어디에서 어긋남이 시작되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풍부히 담겨 있다. 지금 당장 다른 삶을 키워갈 무대로 '지역'을 강조하고, '대학'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30년을 돌아 다시 한 번 기꺼이 클리나멘이 되려는 이의 조언이니 믿음이 더 가고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1년 전 우리가 들었던 촛불마냥 이 책은 확실히 세상의 온도를 조금은 더 뜨겁게 해준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 프레시안 서평 18.1.3
늙은 노동자의 짧은 자소서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① Redian 17. 12.5
한국GM 도장부 생활 30년, 노동자 이범연이 펴낸 새 책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도서출판 레디앙)은 자서전도 회고록도 아니다. 짧은 자기소개와 되돌아본 자기 삶의 궤적도 담겨 있지만 부제(‘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 노조 & 노동자)가 말해 주는 것처럼 ‘지금-여기의 노동운동’이 책을 꿰뚫는 문제의식이다.
과거에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비리가 터져 나오는 권력화된 노동조합,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면서 박근혜를 찍는 조합원들, 노동운동과 우리 사회의 장기적 발전 전망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파들의 권력 투쟁 등 지금 당장의 대기업 노조 현실 진단과 대안을 모색한 책이다.
‘배제된 노동’과 정규직 노동운동과 만나는 방법을 고민하고, 현실 속에서 실천이 가능한 수준의 방안을 제안한다. ‘만남의 조직학’이라는 흥미로운 조직론과 함께, 고액 연봉을 받고 철야가 없어졌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대기업 정규직의 현실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레디앙에서는 이범연 씨의 신간 내용 중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공유할 만한 내용을 저자와 출판사 측의 동의를 얻어 발췌해서 몇 차례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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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 많던 아이, 노동자가 되다
나는 1962년생 범띠다. 내 띠동갑, 두 바퀴 띠동갑 젊은 동생들과 한국GM 부평공장에서 생산라인을 타고 있다. 89년에 입사해서 30년 가까이 이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20대 들어와서 50줄을 넘어섰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전 한국GM 노동조합 상근 간부로 있을 때 한 젊은 후배 노조 간부에게 1987년 노동자 투쟁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박종철을 몰랐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박종철을 모를 수 있느냐며 놀라기도, 놀리기도 했지만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경험이지만 후배에게는 3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다. 부모님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너무나 생생한 경험이지만 나에게는 안 가르쳐주면 모를 역사적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젊은 후배와의 대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겪었던 사건들 하나하나가 이제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뭘 했나 하는 회한을 느끼다가도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 삶이 많은 사건과 당대 역사에 작지만 궤적을 남기며 그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을 깨우친다.
사람들을 만나면 수줍어하고 말이 별로 없던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고2 때 박정희가 죽었다. 그때 그 아이 반의 반장은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그 아이는 불안하면서도 야릇한 흥분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방학 때 한강다리에서 총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며, 전두환이 실세라는 이야기를 소식이 빠른 친구에게 듣곤 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대학생 형이 있었던지 했겠지. 고등학교 3학년 봄에 ‘광주사태’, ‘폭도’,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붙은 신문 머리기사 제목을 보고 광주항쟁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계엄령이 떨어지고 자유롭게 기르던 머리는 선생님들의 바리깡질에 무참히 밀려 나가고, 누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느니, 문신이나 목걸이를 하면 군인들이 끌고 간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그 아이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입학 후 처음에는 들뜬 마음에 미팅도 나가고 이리저리 어울려 술도 마셨다. 하지만 당시 대학은 감시와 처벌의 감옥처럼 숨 막히는 곳이었다. 경찰은 수시로 가방을 뒤지고, 학교 안에는 가발 쓴 사복경찰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학교 선배들이 시위 주동을 하다가 잡혀가고, 도서관에서 투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생이 된 그 아이는 하루하루 분노를 키워 갔고, 독재정권을 끝장내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고 다짐하면서 운동권 학생이 됐다. 연극반 활동도 하고, 비합법 서클에도 가입하고, 사회비판적인 서적으로 세미나도 하고, 집회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강제 징집돼 군대도 끌려갔다.
제대 후 복학은 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돼야 하고, 의식화된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있는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을 일깨우고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를 위해서 학생에서 노동자로 소위 ‘존재 이전’ 하는 것이 운동의 정도처럼 되어 있었다. 교회에서 노동자 야학을 하던 그 아이는 어느 시점에선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가 1986년. 워낙 신원조회가 심해서 큰 공장에는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독산동, 안양 공단의 ‘마찌꼬바’(작은 공장)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87년 6월 시민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맞는다. 그 아이는 노동자가 된 것이다.
몰래 올린 결혼식
나는 87년 6월 서울 거리에서 연일 시위에 참여하고 파업하는 공장에 열심히 지원 투쟁을 다니기는 했지만 87년 7~9월 노동자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때는 공장에 없었다. 그리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씁쓸하게 바라보면서 문래동 마찌꼬바에 들어갔다. 선반과 밀링을 배우면서 일당 4,000원짜리 견습공이 됐다.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기술 하나 정도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던 형은 일당 1만 원 이상을 받았는데 중학교 졸업 후부터 이 바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나는 대우자동차에 취업하게 됐다. 그동안 노동자 몇 십 명 정도 일하는 작은 공장밖에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대공장인 대우자동차에 들어가는 것은 간절한 꿈이었다. 여러 명이 함께 준비해서 88년도 하반기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에 지원했는데 나만 합격했다. 경쟁률이 6:1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의 운이 내 인생의 경로를 정해 준 셈이다.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쁘면서도 두렵고 겁도 났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아니 그 사실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6개월의 직업훈련 과정을 마치고 89년 3월에 대우자동차 도장부에 입사했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 하지만 주변 동료들에 비해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대우자동차는 86년, 87년 월드카 르망 공장을 지으면서 20대 초중반의 젊은 노동자들을 대거 뽑았다. 내가 입사했을 때 공장에는 20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젊은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의 새파란 청년들이 지금은 고스란히 50대 중후반이 되어 정년 후에 무엇을 할 건지 서로에게 묻고 있다.
대열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 91년 투쟁 당시의 사진
가끔 공장에서 뜨겁게 보낸 청년 노동자 시절 사진을 본다. 위 사진을 볼 때마다 나도, 동료들도 참 젊었었구나 하면서 감회에 젖곤 한다. 그때만 해도 공장 내 동료들 간의 관계는 정말 끈끈했다. 주야 맞교대 노동에 힘들어 하긴 했지만, 거의 매일 술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틈나는 대로 여기저기 많이도 놀러 다녔다.
그 즈음 나는 인천 지역 해고 노동자였던 아내와 만났다. 자취방이 가까워서 일이 끝나면 아내 집에 놀러가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리고 학생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에게는 알리지도 못하고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직장 동료들에게는 결혼식은 안올리고 동거한다고 둘러쳤다. 그 당시에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당시 공장 안은 대결과 투쟁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툭하면 공장 라인은 끊어지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공청회가 열렸고 회사 임원과 관리자들은 공청회에 끌려 나와 홍역을 치르곤 했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노동자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특히 민주노조가 들어선 대공장 노동조합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우자동차에서도 위원장을 비롯해서 노동조합 집행 간부와 대의원, 그리고 많은 활동가들이 구속되고 해고됐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경찰 병력이 투입돼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되면서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노동조합이 무너지면서 조합원들의 당당함과 패기도 함께 무너졌다. 분노와 투쟁 분위기로 가득 찼던 공장은 불안감으로 위축된 아주 딴판의 공간이 돼 있었다.
노동조합이 무력화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보궐선거가 치러져 새로운 노동조합 집행부가 구성됐고 나는 조직실장을 맡았다. 하지만 몇 개월 되지 않아서 구속됐다. 소위 ‘위장 취업’이 구속 사유였다. 대우자동차 입사 때 대학 다닌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와 주민등록증 초본 등을 고쳤는데, 이에 대해 공문서 및 사문서 위조라는 죄목을 걸었다. 나와 또 다른 서울대 출신 3명이 함께 구속됐다. 그때가 대략 1992년 5월경이다. 경찰은 뭔가 조직 사건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한 지역 신문이 이 사건 관련 기사에서 ‘사노맹인 듯’이라고 썼다. 경찰의 보도 자료를 그대로 베꼈다. 그 신문에는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 동기 친목 모임을 마치 비밀 조직인 것처럼 보도했고, 나의 직업훈련원 동기들은 모두 회사 관리자들에게 불려가 심문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구속될 당시 아내는 첫째 아이를 임신해 만삭이었다. 내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에 아내는 출산했고, 아내의 후배가 경찰서로 찾아와 출산 사실을 나에게 알려왔다.
“형부, 딸이래요.”
그리고 회사는 구치소로 해고통지서를 보내왔다.
이때부터 기나긴 해고 노동자의 삶이 시작됐다. 구속된 지 6개월 만에 석방돼 ‘대우자동차 해고자 원직복직투쟁위원회’ 일원이 됐다. 30여 명의 해고자들이 있었다. 이때부터 97년 복직될 때까지 5년여 기간이 나에겐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당연히 생계 문제였다. 대우자동차 해고자들에게는 노동조합에서 생계비가 지급이 되었지만,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제외됐다.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뭔가 다른 목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는 불신과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던 일부 대의원들의 반대와 회사의 방해 공작 때문에 대의원대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해고자들이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로 하나둘 복직됐지만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항상 ‘추후 논의한다’는 문구만을 남긴 채 복직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과외도 하고, 광고지도 붙이고 다니는 등 생계비를 벌면서 복직 투쟁도 하고, 현장 조직 사업도 해야 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점점 흐려지고 노동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가 주기적으로 몰려오곤 했다. 더구나 이 시기는 공장으로 들어갔던 소위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와 그동안의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가 아닌가? 하지만 공장의 동료들, 그리고 씩씩하게 활동하면서 성장해 가는 젊은 후배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힘을 내곤 했다. 이 기간 동안 생계를 꾸리는 데 아내가 많은 고생을 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고난의 기간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형, 대학 나와서 왜 공장 일해요?”
여기서 잠깐 대학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얼마 전 술자리에서 현장의 한 후배 노동자가 내게 물었다.
“형은 서울대 나와서 왜 공장 일을 해요?”
그 좋은 대학 나와서 왜 공장에 들어왔니, 목적이 뭐니, 부모님이 마음 아팠겠다, 등등.
입사 후부터 정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야, 서울대는 졸업도 못하고 겨우 3년 다니고, 노동자로 30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그놈의 서울대 타령을 듣고 살아야 하냐?”
나는 공장의 동료들이 나를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보다는 평범한 친한 동료 노동자로 바라보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아마도 30년 가까이 나와 함께한 동료들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서울대도 별 거 아니구만…….’ 그렇다. 정말 별 거 아니다. 물론 나는 한국GM 내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서 서울대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안다. 학벌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특권화된 영역, 온갖 권력과 특혜를 누리고 사는 집단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특권화된 서울대’ 문제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과제 가운데 하나로 볼 것이다. 나는 서울대 폐지론자다.
96년 노동조합 정기대의원 대회에서 나를 포함해서 3명의 학생 출신 해고자 생계비 지급이 결정됐다. 나는 이 순간이 복직 결정 때보다 더 기뻤던 것 같다. 이제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활동하고 복직 투쟁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생계를 위해 노동운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게 다시 시작하라고 권유했다. 나 때문에 아내가 하고자 했던 활동을 못하게 된 것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아내는 여성노동자회 활동을 꾸준히 했고, 지금은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이때는 첫째 때와는 달리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고 아내가 회복될 때까지 곁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97년 노동조합 단체협약 요구안에 3명의 학생 출신 해고자를 포함한 4명의 해고자 복직 요구가 포함됐다. 복직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4명의 해고자들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지금은 단식 투쟁이 드물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조금은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합원들은 밥 몇 끼만 굶으면 죽는 것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대략 22일 정도 단식농성을 하다 협상이 타결돼 단식을 풀었는데, 조합원들은 처음에는 몰래 밥을 먹는 게 아닌지 의심을 하다가 살이 빠지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로 하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농성 투쟁이 전행되면서 조합원들의 뜨거운 지지가 이어졌다. 중식 시간이면 각 부서별로 지지 방문을 오고, 지지 성금도 보내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한 젊은 조합원이 A4용지에 해고자들의 복직을 지지하는 글을 손으로 직접 쓰고 복사해서 식당에서 배포한 일이었다.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 가족들과 함께
위 사진은 지금도 안방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나를 복직시켜 준 조합원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투쟁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해고자들을 가급적 늦게 현장으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회사는 대우 계열사에서 2년간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노사 합의 사항으로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있는 계열사에 2년 동안 양복을 입고 출퇴근했다.
이때 IMF 사태가 터졌다. 나는 그해 겨울 출퇴근 때마다 서울역 지하도를 가득 메웠던 노숙자들과 마주쳤다. 수많은 노동자들에게는 가장 추운 겨울이었지만 나는 가장 따뜻한 봄날을 살고 있었다. 상당히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계열사 2년 근무를 마치고 1999년 공장으로 돌아왔다. 쫓겨난 지 7년 만의 현장 복귀다. 그런데 복귀한 현장은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으로 어수선했다. 곧이어 대우자동차의 해외 매각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 노동조합은 해외 매각 반대로 입장을 정리하고 투쟁을 전개했다. 파업도 하고 조립 사거리에 농성장이 꾸려졌다. 나도 개인 텐트를 짊어지고 농성에 합류했다. 이때 다시 해고됐다.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나는 분노보다는 짜증의 감정이 확 올라왔다.
‘7년 만에 복귀해서 이제 제대로 현장에 뿌리박은 노동운동을 시작하리라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있었는데 단 몇 개월 만에 다시 해고자가 되다니.’
그리고 대우자동차 1,750명의 정리 해고가 이어졌고 노동조합은 정리 해고에 맞서서 공장 점거 농성을 했다. 대규모 공권력 투입이 이어졌다. 나는 이 과정에서 또 다시 구속됐다. 업무방해니 뭐니 하는 몇 가지 죄목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구속되어 있던 학익동 인천구치소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장 동료들과 연대투쟁에 함께 한 노동자, 학생들이 들어왔다. 대우자동차 정리 해고 투쟁으로 구속된 노동자, 학생 수는 공식적 집계로 118명에 이른다.
다시 6개월여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노동조합이 정리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던 산곡동 성당이었다. 정리 해고자들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투쟁하던 중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해외 매각 반대 투쟁 과정에서 해고됐던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의 징계 해고자들이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복직 판정을 받은 거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나서 노동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바뀌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후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방노동위원회의 복직 판정을 뒤집어서 나는 다시 해고자가 되었다. 아무튼 일시적이긴 하지만 갑자기 해고자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나는 노동조합 정책실장이 돼 정리 해고자 복직 협상을 실무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집행부 임기가 끝나는 2002년 9월까지 근 1년간 한쪽에서는 정리 해고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또 한쪽에서는 피 말리는 복직 협상이 진행됐고, 나는 복직 합의, 복직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정리 해고자들의 절망과 분노, 원망을 집중적으로 받아내야 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1년이었지만 어쨌든 정리 해고자 복직이라는 결과를 끌어냈기 때문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집행부 임기는 끝났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졌다.
아직 나의 열정은 살아 있
2003년 초 지금 일하고 있는 도장부서로 복직했다. 해고되어 떠나야만 했던 바로 그 자리로 1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돌아온 그 현장은 정리 해고라는 커다란 상처를 입고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조합원들은 회사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집회도 참석하려 하지 않아서 노동조합 집회는 항상 썰렁했고, 노동조합이 파업 지침을 내리더라도 일부만 빠져나올 뿐 생산 라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만 돌아갔다.
나는 무너져 버린 현장 조직력을 되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했다. 정리 해고의 상처가 차츰 아물어 가고 현장의 조직력도 조금씩 되살아나고 노동조합의 활동력도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나의 가슴 속에서 대공장 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회의와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활동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한국GM에 들어온 비정규직 활동가들을 만났다. 이들 중에는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고 이후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활동가들도 여럿 있었다.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공장 안,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에만 코 박고 살아온 나에게 이들과의 만남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주도적으로 정규직 활동가들을 모아서 ‘비정규직 연대 실천단’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회사에 맞서서 비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열심히 투쟁했다. 노동조합을 공장 안에 뿌리내리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다수의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해고되어 거리로 쫓겨났지만 이들은 지속적으로 투쟁을 이어 갔고, 나는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나름 최선을 다해 왔다.
또한 공장 밖의 투쟁에도 열심히 연대하려고 애썼다.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으로 가고, 동료들과 함께 밀양에도 가고, 각종 집회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나의 활동과 삶에서 또 다른 분기점을 만든 것은 철학과 인문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매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단순 컨베이어 작업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또 뭔가를 메모하고, 일하면서 글 몇 자라도 읽으려고 애를 썼다. 어찌 보면 나는 지독한 활자 중독증 환자이고, 이 병이 나를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 아트앤스터디 같은 온라인 인문학 강좌, 다중지성의 정원, 수유너머 같은 배움의 공간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계속했다.
그 후에 두 번 노동조합 상임집행 간부로 활동했다. 한 번은 정책실장으로, 또 한 번은 지도고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내가 입사 때부터 일하던 도장부에서 열심히 컨베이어 라인을 타고 있다. 2003년 이전 10년간은 주로 해고 노동자로 불리며 해고와 구속과 복직을 반복하던 거리의 노동자로 활동했다면, 2003년 이후 지금까지는 커다란 풍파 없이 공장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정년을 몇 년 남기지 않은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컨베이어 라인을 열심히 타면서 지금 느끼는 일상의 평온함이 과연 좋은 것인지, 이 과정에서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과거를 열심히 되짚고 있다. 그리고 이 나이에 내가 노동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공장에 처음 들어올 때의 젊은 열정과 의지를 꺼뜨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뭔가 크게 이룬 것도 없고, 지금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도 많은 삶이지만 나이 들어 추해지지 않고, 작은 불씨일망정 여전히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기를…….(계속) By 이범연/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노동자, 50대에 길을 잃다 방황하는 또 다른 나에게의 편지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② Redian 17.12.12
“귀족노조에 계시네요.”
누군가 물었다.
“입사가 언제예요?”
“1989년입니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언 30년’이네요.”
또 다른 누군가 물었다.
“어디 다니세요?”
“한국GM에 다닙니다.”
“귀족노조네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을 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에는 수구·보수언론과 일부 집단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입에서도 귀족노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벌어지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됐기 때문이리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열심히 달려왔다. 그들도 귀족노조 소리나 들으려고, 단지 임금만 올리려고 그렇게 열심히 조직하고 투쟁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용·임금·권리를 챙기기 위해 쏟은 힘과 열정에 비해 전체 노동자들의 그것을 위해서 쏟은 힘과 열정은 얼마나 될까? 우리 것만 챙기면서 그저 자기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우리만 달랑 앞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우리가 손을 잡아주지 못해서 뒤에 쳐진 수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에서 앞서가는 우리를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한 비난에 대해 억울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한다고 본다. 수구·보수언론이나 일부 집단의 상투적인 비난은 단호하게 맞서든지 그냥 웃으며 흘려들으면 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 특히 가난한 노동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뼈아픈 반성을 요구하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은 민주노총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민주노총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을 대변하는, 귀족노조의 대변자라고 몰아세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과 높은 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 공무원 노동자, 교원 노동자가 민주노총의 주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인상 등 저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고 있고, 민주노총 조합원 중 상당수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 자체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항변은 된다.
하지만 1995년 11월 11일, 노동자들의 희망을 안고 출범했던 민주노총이 22년이 지난 지금 가난한 다수의 노동자들을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민주노총을 비판해야 하고, 그것도 뿌리에서부터 제대로 비판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민주노총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민주노총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길을 잃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의 장래,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장래가 불투명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그냥 그저 현상 유지는 될 수도 있다.
절망감은 바로 현상 유지라는 단어에서 온다. 그것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민주노총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통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것만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볼 때의 절망감이다.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통과 함께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내가 어찌하다 정규직이 되어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있고, 세상을 보다 평등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책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노동조합도 없고, 하루하루의 삶을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흙수저 N포세대인 가난한 노동자들 속에 희망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이들이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진정 세상은 바뀌기 시작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서도 희망을 찾기로 했다. 중요한 건 여전히 사람이다.
전국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민주노조를 세우고, 자본에 맞서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이들의 마음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다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앞이 잘 안 보인다. 우리 모두는 길을 잃었다. 나는 길을 잃은 또 다른 나, 하지만 길을 찾고자 하는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뜨거웠던 투쟁의 기억들,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을 그저 과거의 것으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또 다른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여전히 올곧게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있고,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신경림의 시구처럼, 힘겨운 노동을 끝내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착하디 착한 공장의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모순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고 할 일은 넘친다. 87년부터 줄기차게 외쳐왔던 ‘인간답게 살아보자’, ‘노동해방’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제안한다. 이 시대 넘쳐나는 ‘해야 할 일’을 함께 찾고 함께 실천하자고.
“아빠, 그게 얼마 후 내 모습일지 몰라”
헬조선.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지옥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혼자 속으로 또는 서로에게 ‘우리는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다행’은 누군가의 ‘불행’과 연결돼 있으며, 불행한 이들의 수가 너무 많다.
내가 2015~16년에 한국GM 노동조합 상집 간부로 일할 때 정규직 지부와 비정규직 지회가 공동으로 비정규직 실태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받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중소기업이나 다른 곳의 비정규직보다는 낫다는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말이다.
추운 겨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난방 실태를 조사하면서 한국GM 안에는 두 부류의 노동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추우면 춥다고 말할 수 있는 노동자와 아무리 추워도 춥다고 말할 수 없는 노동자. 동일한 작업을 하는 정규직 공정의 실내 온도는 15~19도인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 쓰러져 가는 천막에서 겨우 바람만 막은 채 0도의 추위에서 일하고 있었다. 추위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름이면 40도의 찜통더위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땀에 젖은 몸을 씻을 샤워장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작업환경 실태 조사 활동을 함께 한 비정규직 지회의 간부는 이렇게 한탄한다. “내가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을 한 지 15년이 되었는데 활동을 헛한 것 같아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니.”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지만 1차 비정규직 노동자인 그는 자신들보다 더 열악한 2, 3차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그냥 지나쳐 온 거다. 그렇다. 문제화되지 않은 문제는 없는 것이 된다. 매일 지나치면서도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엄청난 문제들이 보인다.
한국GM 정규직 지부와 비정규직 지회는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GM 측에 난방 대책을 요구했고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난방 기구의 추가 비치와 간이휴게실 설치 등의 미봉책에 그쳤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GM의 2차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봉 3,0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대학 다니는 아이를 포함해서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에 잔업, 특근을 최대한하고, 상여금을 합쳐야 간신히 3,000만 원을 넘길 수 있다. 내가 저 돈으로 우리 가정을 꾸려가야 한다고 상상을 해보았다. 마음이 아득해졌다. 정규직인 내 연봉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결혼식 하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친구가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부 싸움을 대판 했단다. 이유를 들어보니 결혼할 때까지 이 친구가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야기를 안 한 것이다. 부인이 느끼는 배신감이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친구가 느꼈던 수치심은 어땠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인에게마저도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한다. 일은 정규직과 똑같이 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게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다. 이후 이 친구는 다행히 정규직으로 발탁 채용이 되었지만 한국GM에는 아직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런 수모를 겪으며 살아간다.
잊히지 않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약간은 말이 많고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계셨다. 공장이 주간만 돌아가다 생산 물량이 늘어나면서 주야간 교대 작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야간 정상근무는 새벽 5시 30분 종료, 30분 식사, 2시간 잔업 후 아침 8시 퇴근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이분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직장이 멀어 새벽에 출근해야 한다. 아주머니는 관리자에게 사정했다.
“저, 야간 때만 잔업 빠지면 안 돼요? 아이를 챙겨 주려면 일찍 들어가야 해서요.”
관리자에게서 돌아온 대답.
“그러려면 그만둬! 여기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쌔고 쌨어!”
그 다음날부터 그 아주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야! 그 뚱뚱하고 말 많은 아줌마 짤렸대.”
비정규직 지회의 한 조합원이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좀 나은 편이예요. 공장 밖에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취준생인 큰딸에게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태를 이야기해 주었다. 내 말을 들은 큰딸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한다.
“아빠, 그게 얼마 후 내 모습일지도 몰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단한 삶에 청년들의 절망이 겹쳐진다. ‘노동운동이 절실한 곳, 조직과 투쟁이 절실한 곳은 바로 여기다’라고 생각했다. 한국GM 정규직 노조는 조합원 1만4,000명의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지만, 부평공장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은 두 자리 수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동조합이 절실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지만 그들에게는 노조가 없다. 한국 사회 1,900만 노동자 중에서 조직률 10%로 190만여 명만이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렇다면 조직되지 못한 90%의 노동자, 1700만 명의 노동자는 과연 누구인가?
한국지엠 창원 비정규직 지회의 1일 고용노동부 창원지청 앞 총고용보장, 특별근로감독 촉구 집회(사진=한국지엠 창원 비정규직지회)
어긋남, 그리고 노동운동의 보수화
내가 오래전 노동자로 살겠다며 공장에 들어갔을 때, 나를 잘 알던 지인들이 처음에는 미안해하고 격려도 하고 지원도 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힘들지?”
몇 년 후 수많았던 위장 취업자들이 썰물처럼 공장을 빠져나가던 시기 그들은 나를 보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그리고 또 수년이 흘렀다. 그들은 말했다.
“너 살만 하지?”
이제 그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내게 던지며 이렇게 말한다.
“넌 좋겠다. 연봉도 높고, 정년도 있고……”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어떠한 어려움과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어찌하다 보니 나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50대 중년이 돼 있었다. 대우자동차 들어와서 해고 두 번, 구속 두 번, 속된 말로 신세 조질 만한 상황인데 조지기는커녕 잘 먹고 잘 산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와 고스란히 맞닿아 있을 것이다.
87년 이전만 해도 한국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했다. 한국GM의 선배들에게 87년 이전에 받았던 임금 수준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들의 임금 수준은 내가 대우자동차에 입사하기 전에 다니던 마찌꼬바의 경력 노동자들보다 낮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함께 싸웠다. 대기업 노동자 임금이 오르면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도 올랐다.
이때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연대도 열심히 했다. 대우자동차 젊은 노동자들은 지역 중소기업 노조 파업 때 구사대에 맞서 파업 사수대로 공장을 지켜 주었고, 지역 노동자들은 대우자동차가 파업을 하면 열심히 지지하고 응원해 주었다. 대우자동차 선배 노동자들 가운데 인천 지역 투쟁 사업장 여성 노동자들과 결혼한 사례가 꽤 있다. 당시 활발했던 연대 투쟁의 증거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도 공평했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이 공안정국을 선포한 이래 정권과 자본은 대기업,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모든 노동자들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서 폭력 집단 구사대가 등장했고, 대규모 경찰력 투입이 빈발했다. 헬기가 뜨고, 수천에서 만여 명에 이르는 경찰을 동원해서 파업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당시는 또 해고와 구속의 시대였다. 감옥은 노동자들로 가득 찼고 거리에는 해고자들이 넘쳐났다. 나도 1992년에 위장 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해고됐다. 당시 대우자동차에만 대략 40~50명의 해고자들이 있었고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1,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전투적이고 영웅적인 투쟁의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단결된 투쟁으로 정권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분쇄했다. 노동자들은 전노협을,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전국의 노동자들은 대기업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노동해방으로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될 것으로 믿었다. 당시엔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임금이 오르긴 했지만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지불 능력이 있는 대우자동차 같은 수출 중심 대기업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주변에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소기업들, 그리고 노동집약적인 소비재 중심의 대기업들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외국인 노동자들로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고용 기반이 무너져 내렸다.
옛날에는 부평 대우자동차 주변에 공장들이 참 많았다. 지금 서문 건너편에는 동양철관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임금 인상 투쟁 시기가 되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과 동양철관 노동자들은 서로 함성을 지르며 응원하곤 했다. 이제 그 회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남문 건너편에 있던 전남방직 기숙사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우리를 향해 손도 흔들어 주곤 했는데 그 자리에도 아파트가 들어섰다.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 많은 중견 기업들도 문을 닫거나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함께 만들어 내고 전노협, 민주노총을 함께 만들었던 노동자들이 어디론가 흩어지고, 노동조합도 간판을 내리기 시작했다.
더 잘 싸워서 노동조합이 유지되고 더 못 싸워서 노동조합이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단지 지불 능력이 있는 수출 대기업에 다닌다는 것과 해외 이전과 구조조정이라는 자본의 칼날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차이일 뿐이다. 공장이 문을 닫는데 노동조합을 지켜낼 재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IMF 구제금융 사태와 정리 해고 국면을 겪으면서 그 어긋남은 결정적 현상이 됐다.
이전에는 임금이 많이 오르고 적게 오르는 정도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노동자 내부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는 구조 문제가 되었다. 주변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어 우리 곁을 떠났지만 전체 노동자들의 수는 오히려 늘었다. 그들은 서비스, 정보산업의 노동자로,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어긋남이다.
첫 번째 어긋남은 힘이 절실한 곳에는 힘이 없고, 힘이 있는 곳의 힘은 그것이 절실한 곳에 쓰이지 못하는 현실이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조합이 절실한 가난한 다수 노동자들은 쉽게 조직되기 힘들다. 조직 활동가를 비롯한 역사적으로 축적된 힘과 활동 경험이 부족하다. 반면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는 조직력, 자금력, 투쟁 경험, 활동가 등 축적된 힘과 경험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힘들이 자신들만의 이해를 위해서 사용되고,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
둘째로 가장 고통 받는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지향해야 한다는 노동운동의 당위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를 중심으로 맴돌고 있는 노동운동 현실 사이 어긋남이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투쟁과 미조직 노동자 조직 사업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투쟁과 사업을 배치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힘이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투쟁과 사업이 힘 있게 진행되지 못한다. 그래서 구호와 목소리는 시끄럽고 크지만 실제로 동원되는 힘과 성과는 작다. 구호와 실제의 어긋남이다.
셋째로 수적으로 다수이면서 고통과 분노를 품고 있는 잠재적인 주체와 실제로 조직되어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적인 조직 주체 간의 어긋남이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수적으로 다수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사회 현실 때문에 가장 고통 받고 있고,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픈 욕망이 크다. 따라서 사회의 근본 변화를 열망하는 혁명적 잠재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직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불만과 욕망이 일관되고 지속적인 힘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반면에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이미 획득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성이 강해지고 있다. 또한 자신의 힘을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향성도 심해지고 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함께 손을 맞잡고 싸웠던 노동자, 노동조합이 옆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에 둔감했다. 주변이 허물어져 가고 몇몇 대기업들만이 섬처럼 살아남은 거다. 우리가 앞에 보이는 정권과 자본과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 운동은 우리 주변과 발밑을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와 산업구조 전반과 노동자 계급의 구성, 고용 관행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그 결과 어긋남과 균열의 모습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조직되어 있는 안과 조직되지 못한 밖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안은 이념과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밖은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긋남 때문이다. 어긋남은 나를 포함해서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은 수많은 활동가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빼앗고 혼란과 고통에 빠지게 만든다. 이 ‘어긋남의 현실’을 우리가 정면에서 직시해야 할 때다
Winter Dreams - Band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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