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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허수경의 시

by 이성근 2020. 5. 3.



혼자 가는 먼 집

폐병쟁이 내 사내

청년과 함께 이 저녁

마치 꿈꾸는 것처럼

밤 소나기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여기는 그림 속

불취불귀(不醉不歸 )

오래된 동쪽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탈상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공터의 사랑

먹고 싶다

어느날 애인들은

달 빛

입맞춤

스승의 구두

봄날은 간다

우연한 나의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山水

맑은 전등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우리들의 저녁식사

사랑의 不善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몽골리안 텐트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저녁 스며드네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그래 그래 그 잎

물 좀 가져다주어요

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

시간언덕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달이 걸어오는 밤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불을 들여다보다

저녁 스며드네

라일락

목련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우연한 감염

가을의 무늬

돌이킬 수 없었다

흰 호텔 2016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유월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톡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청년과 함께 이 저녁

 

가지에 깃드는 이 저녁

고요한 색시 같은 잎새는 바람이 몸이 됩니다

살금살금, 바람이 짚어내는 저 잎맥도

시간을 견뎌내느라 한 잎새에 여러 그늘을 만드는데

그러나 여러 그늘이 다시 한 잎새 되어

저녁의 그물 위로 순하게 몸을 주네요

나무 아래 멈춰서서 바라보면 어느새 제 속의 그대는

청년이 되어 늙은 마음의 애달픈 물음 속으로

들어와 황혼의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요

한 사람이 한 사랑을 스칠 때

한 사랑이 또, 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진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난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내며

울울한 나무 그늘이 될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그러나 그럴 연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견디어내면서 둘 사이의 고요로만 수수로울 수 없는 것을, 한떨림으로 한세월 버티어내고 버티어낸 한세월이 무장무장 큰 떨림으로 저녁을 부려놓고 갈 때 멀리 집 잃은 개의 짖는 소리조차 마음의 집 뒤란에 머위잎을 자라게 하거늘

 

나 또한 애처로운 저 개를 데리고 한때의 저녁 속으로 당신을 남겨두고 그대, 내 늙음 속으로 슬픈 악수를 청하던 그때를 남겨두고 사라지려 합니다, 청년과 함께 이 저녁 슬금슬금 산책이 오래 아프게 할 이 저녁

 

 

 

마치 꿈꾸는 것처럼-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밤 소나기 - 허수경

 

재실댁은 아파트 파출부 그 집 아재 김또돌 씨는 하수구 치는 일을 했제 야반도주 고향을 베린 지 어언 십여 년 하루떼기 벌이에 이골은 났지만 날이 갈수록 왜 이리 쪼그라만 드는 살림 단칸 월세방에 내외간이 딴이불 거처를 하는데 김또돌 씨 술이라도 한잔 들이키는 날에는 이불 싸가지고 마루에 누웠제 옌장 마누라쟁이라고 암만 고달퍼도 할 일은 해야제 맨날 돌아누우니 살맛이 나 살맛이

쓴 담배만 뻑뻑 빨다 잠이 들었는데 이쿠 소나기야 마루까지 치받고 후둑거리는 소나기 피해 우당탕탕 챙겨 방으로 들어왔는데 소나기 핑계로 들어와 누웠는데

웬일로 재실댁이 먼저 안겨오지 않나 소나기 한번 장하데이 이녁도 장하게 한번 들어오소 김또돌 씨 소나기처럼 황소처럼 달려들었제 임자요 섭했지예 몸이 천근 같으니 내사 우찌 살붙일 정이 나것소

재실댁 마른 가슴 더듬다 잠이 든 김또돌 씨는 빚에 몰려 쫓겨온 고향 짼한 고향 보리밭에 또 한 번 재실댁을 넘어뜨리는 꿈을 꾸었지러 별 숭숭 말짱한데 도시 산동네 하루벌이 부부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출처 : <문학과 사회>, 2009. 여름(통권 86)

 

여기는 그림 속 허수경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여기는 그림 속, 손을 잃어버린 새들이 날고 있다. 검은 부리를 가진 물고기들이 하늘을 향해 늙은 개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개들은 머리만 있고 얼굴은 없다, 지난 오후에 마을을 폭격한 거미 같다. 전갈도 어쩌면 잠자리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세계를 배회할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그림 속, 대나무 숲이 교회 옆에 있는 그림 속이다. 식당에서 내주는 작은 철근 한쪽을 씹어 먹는다. 가끔 내 주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지렁이를 밟으며 옷가게로 들어간다. 나무를 팔고 있는 옷가게는 바다이다.

 

여기는 그림 속, 그 바다 안에서 우렁거리는 핵발전소에서 빛으로 엮은 목도리를 하나 사들고 다시 교회로 간다. 교회 옆에 있던 대나무 숲이여, 어쩌면 당신은 옛 당신의 음성을 그렇게 잘 흉내내는가.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거겠지,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태양 안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타는 줄도 모르고 어느 가운데를 건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불취불귀(不醉不歸 )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오래된 동쪽 허수경

 

저편 거칠어지더니

눈 온다

파란빛 회빛으로 변하고

눈 온다

 

거칠다 싶더니

빛 온다

회빛을 밀어내면서 파란빛

다시 듣는다

 

섶섶이 온기가 돋아나오는

그런 시절이었으면 좋겠다,

당신 누운 이부자리가 출렁이는

딱 그런 시절이었으면 좋겠다, 하며

 

어느 해 이곳을 떠날 때

발목 가는 파들을 심어두었건만

뿌리는 발 둘 곳 없어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세상에나, 뿌리들이 발을 내릴 수도 없다니

성기를 땅에다 댈 수도 없었다니

 

저편 거칠어지더니

눈 온다

파란 빛 그렁거리며 회빛

안는다

 

당신, 흔적도 없다

딱이 그러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라면봉다리만 남아있다

당신, 봉다리다

이곳에 쭈그리고 앉아 양은냄비 뚜껑에 그 맛난 것을 올려다 드셨것지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허수경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적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탈상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이름을 받던 잉카의 한 아이였고 너는 인사동 골목의 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워져나오던 황태였고 너는 나에게 멸치를 국제우편 소포로 보내주던 현숙이었지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대답하다 나는 고대 왕무덤에서 나온 토기였다가 그 토기의 입이었다가 텅 빈 세월이었다가 구겨진 음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창녀의 바 창문에 걸린 커튼이었지 은행 금고 안에 든 전쟁이었다가 아프가니스탄 고원에 핀 양기뷔였다가 나는 실향민 수용소의 식당에서 공급해주던 수프였다가 나는 빛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언제나 서 있기만 했던 시였지 그리고 일용 노동자로 눈 덮인 거리를 헤매던 나의 혈육이었지 저 멀리 용산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 소경이었어

 

포도송이였어 그 들판에서 자라던 자줏빛 도라지꽃이었어 그래 아직도 살쾡이였어 도시의 검은 밤에 길을 건너던 산돼지였어 먼 사랑이었고 사랑의 그늘이었지 도시 골목의 어느 카페에서 마시던 유자차였고 그리고 웃으면서 헤어지던 옛 노래였지 나는 너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닫히는 전철문 앞에 서서 먼 구멍으로 들어가던 내가 사랑하던 너는 누구인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을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바다가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

두고 왔네

 

 

 

먹고 싶다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둘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초자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

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달 빛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량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

한 것이 화정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

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

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입맞춤

 

그 양반 생각만 하모 지금도 오만간장이 다 오그라붙제 무정한 양반 아니여

유정한 시절 꽃 분분 가슴살에 꽂힌 바람 된통부를 꽃물 듣는 아린 날 눈뜨면

멀어질새 눈감으면 흩어질새 부러 감은 듯 마는 듯 다소곳 숨죽인 듯 화들짝

불에 데인 듯 떨며 떨며 천지간에 둘도 없이 초승달 떼구름 흰 옷고름 개켜

넣으며 설핏허니 굴참남게로 넘어가면 이년 눈이 뒤집혀 병든 애비 버려두고

꺼짐부리 살림 접어두고 고만 밤도망질 치고 말았제 무정한 양반 대처살이

모질새 애먼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간 뒤 그 밤만 생각하모 불쌍한 울 아버지

쿵쿵 가래 기침에 엎어지며 끓여 먹을 냄비밥 간장종지가 더 애닯데이 더 목매인데이

 

 

 

스승의 구두

 

구두는 쉴새없이 낡아가고

장대동 중앙시장에는 새 상가가 들어섰다

어깨에 묻어오는 오늘의 피곤이

이십 년은 족히 넘은 스승의 서재에서

먼지로 앉고

스승은 넥타이를 푼다

 

새로 산 책을 넘긴다

스승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고 도시를 다스리는 정

의론과

인권론과 형평론을 안경 너머로 바라본다

눈을 부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스승은 낡아가고

구두는 현관에서 낡아가지만

내일도 장대동 중앙시장

새로 선 상가를 지나

하룻밤새 또 건물을 지은

도시의 길을 밟을 것이다

 

스승은 낡은 구두처럼

새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스승이 낡아가는 것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휠씬은 더 먼저 낡아갈 것인가

 

 

봄날은 간다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우연한 나의

 

내 마을은 우연한 나의 자연

내 말은 우연한 나의 자연

고속도로 위에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새의 살을 들고 가서 누구도 삶지 않았다

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네

살해당한 새만 먹을 수 있네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 안

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구든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강은 꿈이었다

너무 먼 저편

 

탯줄은 강에 띄워 보내고

간간이 강풍에 진저리치며

나는 자랐다

 

내가 자라 강을 건너게 되었을 때

강 저편보다 더 먼 나를

건너온 쪽에 남겨두었다

 

어느 하구 모래톱에 묻힌 나의

배냇기억처럼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모두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밤별에는 집이 없어요

구름 무지개 꽃잎에는 우리의

집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간

집에는 살 수 없는 것

세월이 가슴에 깊은 웅덩이로 엉겨 있듯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불행한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아 불행한 세대가

세월의 깃을 재우는 일조차 다른 것

그래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배고픈 어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땅을 가로질러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함께 노래를 하고 꿈을 꾸

 

아버지 나는 갑니다

모두의 집을 찾아 칼을 들고

눈물 재우며

 

 

山水

 

山水가 날 기댈 데 없이 만드네 저 유정한 山水

저 혼자 무정한 시절을 거느리려고 하는가

 

나 돌아갈 곳 저곳뿐 저곳뿐 생각나면 언제나,

비린 찬 올라오는 아침 밥상처럼 아늑한가

 

저건 처녀의 무릎, 저건 지옥

그야 뭐 다 놓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담담한 수채의 지옥, 그러나 저곳마저 기대지지 못한다

면 나 도시의 뒷골목에서 죽어야 하나

 

죽어 발목에 명찰을 달고 저 山水 속에 버려져야 하는

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생각하며 가버려야 하는가

 

맑은 전등

 

 

바다 마을

집 한 채

 

다리를 오므리고 실파를 다듬는 계집아이

튼 손등에 오그리고 앉은 실파 냄새

 

아이의 손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먼 검바다 뜬 배

닻에 붉은 오징어 다리가 감겼다

힘찬 오징어 다리

 

파뿌리처럼 오그리고 있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여러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 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우리들의 저녁식사

 

토끼를 불러놓고 저녁을 먹었네

아둔한 내가 마련한 찬을 토끼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요리는 토끼고기

 

토끼도 토끼를 먹고 나도 토끼를 먹는다

이건 토끼가 아니야, 토끼고기라니까!

토끼고기를 먹고 있는 토끼는 나와 수준이 똑같다

 

이 세계에 있는 어떤 식사가 그렇지 않을까요

풀을 불러놓고 풀을 먹고

추억을 불러놓고 추억을 같이 먹고

미움을 불러놓고 미움을 같이 먹었더랬지요

 

우리는 언제나 그랬지요

이 세계에 있는 공허한 모든 식사가 그랬지요

 

 

 

사랑의 不善

 

너는 왜 가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묻잖아 약은 먹니 술은 안 마시니 지워진

길도 길이니 얼굴이 아플 때도 있니 너 누구에게 맞았니!

 

그래서 돌아본다 조용필이나 고르며 일테면 나는 물고기

비늘 많은 물고기 가시 많은 물고기 가거도에 가면 멸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

로 들어온다 에이 바보같이 에이,

마음의 두께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다

 

약은 먹니 그래그래 너는 아가리의 심연을 아니

근데 왜 바보같이 맞기만 했을까

몸의 마음이 너를 때렸니 가기 위해

돌아오기 위해?

허랑허랑......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몽골리안 텐트

 

 

숨 죽여 기다린다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

 

겹겹한 산에

물 흐른다

 

그 안에 한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

 

 

不醉不歸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빈 얼굴을 지민 노인들만 지나다니는 길옆에 그 극장이 있었다.

수건을 쓴 처녀들이 소리없이 극장 옆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녀들은 가슴에 달을 달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

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

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그 얼굴은 너무나 낡아 나무는 그만 얼굴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해 나무들이 그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도시

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꼭 그 극장 같았다.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매일 매일 무대에 올리던 그 극장,

살해된 자가 매일 매일 그렇게 다시 살해되던 그 극장, 그 숲에서 아이

들이 자지러지게 노는 것을 보았다. 물병에 붉은 햇빛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이 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처녀들은 슬금슬금 잠에

서 깨어나서는 머리수건을 벗었다. 처녀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서 살해

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못에 연분홍 푸른 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 빛이거나 누런 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이들이 걸어 다니던 거

걸어 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려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 다니며 갈 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2003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사)

 

 

저녁 스며드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

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 들이

는 듯 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 슬근 저

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

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

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

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간곡한 기계가 있었다

우린 그 기계 앞에 서 있았다

기계는 온 힘으로 우리를 찍었다

시계탑 앞에 서있는 너를 동물원에 앉아있는 나를

돼지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종사촌과 나를 찍었다

머리칼을 잘라 팔던 날

우연히 지나가던 사진사가 날 찍었다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나에게로 왔다

시집 -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2001년 창작과비평사)

 

그래 그래 그 잎

 

그 잎 여릴 적, 우리 만나 잎 따서 삶아 밥해주던 할머니집에 앉아 여린 잎에 하얀 밥 싸 먹으며 벙그러지는 입술 오무리며 깔깔거리다가 어머 어머 할머니 설겆이 많겠네, 어쩌나, 그때 그 잎 여려 할머니의 아가 같은 손힘으로도 뚝 뚝 꺾이는 것을,

 

그 잎 커다랗게 자라 그늘 만들고 그늘 아래 비 그으며 수박 오이가 익는 것 들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며 할머니가 떠 오는 설거지물에 마치 오랜 시간 씻듯 양은 밥주발 씻으며 할머니가 잎 옆에 달린 꽃 머리에 꽂으며 벙그렇게 웃는 것 보며 그래, 그래 저 잎 더 무성해져서

 

산 덮고 그 산, 잎그늘 아래 축축한 땅의 수줍은 곳 열어 버섯 돋아오르면 그때 또 할머니가 지어주는 버섯밥 먹자, 좋겠네, 저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그늘 될 때까지 붙어 있다가 그래 그래 할머니 머리에 꽂힌 저 붉은 꽃 좀 봐, 무슨 열대 섬 사는 아씨 같은 할머니 좀 봐, 그때까지 설거지 물에 담긴 양은 주발 새로운 시간처럼 씻으며, 그래 그래, 저 잎

 

 

그래 그래 그 이파리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그 이파리 아가 적, 우리 보굴랑 이파리 따 삼군 밥 더머기던 할매 저방에 앉아 아가잎에 흰 밥 싸 무그며 벙그러지는 입술랑 오무리메 깔깔대메 어마시야 할매 설것방 많이나 되것네, 어쩔꼬, 그녘 그 잎 아가여서 할매 아그머치한 손뚝심으로 뚝 뚝 건기는 거슬,

 

그 이파리 커당게 자라 그늘 맹글고 그늘 비님 그브며 수박 오이 등거는 거 들을 때꺼지 기다리제, 하며 할매 떠오는 설것당물 오랜 시월 씨그듯 양은 밥주발 씨그며 할매 잎 곁에 달린 꽃 머리에 접히며 벙그럽세 웃는 거 볼 새 그래, 그래 저 이파리 무덩허덩허정해져

 

 

산메 더푸고 그 산메 잎그늘 메에 처처한 따의 수지븐 데 열어 버섯제기 도다오르메 그녘 또 할매 지어데 주는 버섯제기밥 먹자야 좋것네, 그 잎 아가 적 만나 무덩허덩해져 산메그늘 될 녘까지 어깨 두다가 그래 그래 할매 머리 녘 접한 저 불근 꽃 녘 좀 볼거나 어디 열대 섬 사는 아그 같은 할매 좀 보아, 그때꺼지 설것방 물 담긴 양은 주발 신상신시처럼 씨그며 그래 그래 저 이파리

 

 

물 좀 가져다주어요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쓴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

 

기름이 알맞게 붙은 소고기를 사오면서 해가 지는 골목길을 지나 어느 사제의 딸이 당도하는 흰 부엌

 

나는 눈먼 사제의 딸, 이렇게 죽인 소를 사지요. 잘 다져서 볶지요. 고춧가루 마늘에다 은밀한 산그늘에서 가지고 온 고사리를 넣고 끓이지요. 세계를 국솥에 두고

 

끓이지요. 먼 나라에서 온 악기장이들을 불러다놓고 끓이지요. 햇빛에 달빛에 별빛에 바람 오는 자리들을 깊숙이 세계의 한켠에다 집어 두지요.

 

끓고 있는 붉은 국을 좀 보아요. 저 매운 세계를 좀 보아요. 저 흰 부엌을 지키는 눈먼 사제의 딸을 좀 보아요. 저 찰랑거리는 사제의 딸을 납치해가는 거머리총판을 든 귀먼 용을 좀 보아요. 세계가 화덕에서 검게 졸아드는 것도 모르고먹먼지 속으로 기어이 들어가는 저 용들을 좀 보아요. 흰 부엌에서 끓고 있는 아픈 국을 좀 보아요

 

시간언덕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그 바닥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바닥을 모눈종이에 그려 넣는다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의 비씨 2000년경,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 한 삼십 센티 정도 밑으로 내려가자, 다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소뼈, 진흙개, 바퀴, 이번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곡식알도 나온다, 비씨 2100년경의 무너진 담이 나온다 담 높이는 이십 센티, 다시 밑으로 밑으로 합쳐서 일 미터를 더 판다 체로 흙을 쳐서 흙 안에 든 토기 파편까지 다 건져낸다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 내가 서 있는 곳은 비씨 2500, 압둘라가 아침밥을 먹으러 간 사이 난, 참치 캔을 딴다, 누군가 이 참치 캔을 한 오백 년 뒤에 발굴하면 이 뒤엉킨 시간의 순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시간언덕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낯선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퍼런 큰 새를 타고 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폭탄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나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은 기름이 솟아났다, 검은 기름 속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이 끈적거리면서 나타나 오래전에 헐린 집에 대해서 물었다, 그때마다, 그 강변에 꽃이 피었다, 붉거나 흰 꽃들이었다, 바람이 불면 꽃이 지고, 꽃 진 자리에서 열매가 돋아났다, 돋아난 열매는 우는 여자의 눈동자 모양을 하고 있다, 열매를 먹으면 갑자기 마음속에 쟁여둔 슬픔으로 가는 마음이 사라졌다, 자지러지게 웃고 싶어서 강변으로 나가서 그렇게 웃었다, 아이들의 주머니 속에 든 폭탄이 터져 아이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는 여자의 눈동자 같은 열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달이 걸어오는 밤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못에 연분홍 푸른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가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빛이거나 누런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아들이 걸어다니던 거

걸어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러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며 갈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불을 들여다보다

 

불을 먼 별 눈먼 별

들여다보듯 그렇게 들여다보다

저 고요 나는 어쩔 것인가

노을 속으로 끌려가는

새떼 바라보듯 그렇게 들여다보다

저 아우성 나는 어쩔 것인가

불속에서 마치 새 숲을 차린 듯

제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양떼의 발목인 듯

하얗게 숨을 죽여가는 저 나무들 나는 어쩔 것인가

몸에 남은 물의 기억을 다 태우는 당신과

당신 물의 기억이 다 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나는 어쩔 것인가

 

저녁 스며드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라일락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목련

 

뭐 해요?

없는 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

,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

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 여적 그러고 있어요

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

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

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

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 해요?

,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비는 오고

광장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여자 거지

루마니아에서 왔네

아침에 나와 다섯 시간 동안 구걸을 하다가

그녀는 번 돈을 들고 조직의 대장에게 간다

대장은 여자에게 돈을 받고

여자의 아들을 돌려주네

동전을 주려다 나는 멈칫하네

그녀를 감시하는 대장의 눈길이 여자의 어깨에 있어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나치에게 부모를 잃고

오스트리아를 거쳐 파리로 갔다가

마침내 파리에서 자살한 시인을

아느냐고 나는 물어볼 수가 없었네

내가 멈칫하자 여자는 나를 향해서 욕을 하기 시작하네

비는 오고

나는 여자의 욕설을 맞네

여자의 욕을 알아들을 수 없네

루마니아어로 하는 욕은 비만큼 낯설어

칠십 년 전 이 광장에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만큼 낯설어

그 와중에 죽은 시인을 떠올리는 나도 낯설어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낯선 역사적인 존재들

비는 오고

우리는 젖고 욕도 젖고

 

 

우연한 감염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

,라고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앞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돌이킬 수 없었다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흐느끼면서

혼자 떠나 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누런 아이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 가수가 물었다, , 때문인가요?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마침내 터미널에서

불가능과 비슷한 온도를 가진

우동 국물을 넘겼다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

 

흰 호텔 2016

 

12층 호텔이 숲 옆에 있었다 숲 안에는 거대한 무대가 있고 오늘 저녁엔 유명한 가수가 공연을 한다고 했다 일 층부터 삼 층까지는 난민들의 집이고 사 층부터가 호텔인데 나는 팔 층에 방을 얻었다

 

밤에 누군가의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처음엔 울음인 줄 알았는데 욕설이었다가 그러다가 죽은 가수가 먼 고향을 그리워하다 체념하는 노래 같았다 이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으며 흐린 태양도 닦았다

 

지난해 겨울 난민 청년들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칼부림을 했고 지나가는 여자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총을 들고 도심을 누비며 사람들을 쏘았던 남자아이는 총에 맞아 죽었다 이렇게 미쳐가도 되나요 장미는 피고 있었다 더 이상 피지 못할 잎 사이로도 꽃이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주위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며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간 동료에 대해서 말했다 사람들의 잠 속으로 지난해 죽었던 장미 그늘이 들어왔다

 

전갈 붉은 전갈 사막 누런 사막 전갈같이 기어다니는 검은 전쟁 누군가 총을 쏘면 하늘에서는 투명한 폭탄이 이 모든 풍경을 집어삼켰는데

 

난민 아이들은 오전에 독일어를 배우러 갔다가 돌아와 호텔 앞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흰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호텔은 흰 벽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흰 벽 한 칸을 얻어 잠을 자다가 뜨지도 지지도 않은 태양을 본 것이다


 

허수경(許秀卿 1964~ 2018103)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독일로 가 현재 뮌스터대학 고대 동방문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2018103일 위암으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1987실천문학땡볕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21세기 전망' 동인이다. 2001년 제14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서(실천문학, 1988)

-뼈를 세우고 살점을 키워준 고향 진주와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1988, 허수경 시인이 25세 되던 해 실천문학을 통해 발간한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있으랴>에 수록된 한 편의 시 폐병쟁이 내 사내’. 당시 이 시를 읽은 문인들이 기겁을 하였다고 ....소설가 송기원 씨는 벼락맞을 상상이지만 나는 앳되고 풋내나는 단발머리 그녀를 앞에 놓고,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의 어느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를 떠올렸다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사랑은 나를 회전시킬까, 나는 사랑을 회전시킬 수 있을까, 회전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나는 이제 떨쳐 떠나려 한다.

가수 신해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의 원고를 쓰는 일로 밥을 벌어 진주의 가족도 부양하고 지상에 없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을 갚아나가던 시인이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내고 갑자기 독일로 떠났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 2001)

-몸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으로 나는 다양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낯선 종교와 정치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나라는 한사람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한국인이라는 나와 나라는 나, 그 사이에 섬처럼 떠돌아다니던 시간들. 그러나 시를 쓰는 나는 한국어라는 바다에서만 머물고 있었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05)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4> 시인 허수경

 

좌절된 시간 불러내 새 운명 열어주고 싶다

 

서울 떠나온지 10년 세월. 아직도 꿈엔

내가 지나온 고국의 시간, 사람들이 나타난다.

소멸돼버린 시간 80년대그 어둠 함께 이기던

젊디젊은 벗들은 내 안에 살아있다.

그리고 속에 신화가 된다

오월이 지나갈 무렵 내가 사는 집의 뜨락에 모란이 피기 시작했다. 모란이 피는 것을 보면서 나는 벌써 모란이 지는 것을 노래하던 김영랑의 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월이 되고 그 찬란하던 모란이 지기 시작하면서 김영랑의 오후와 나의 오후는 시간의 경계를 지우면서 하나가 되었다.

 

떨어지는 꽃 앞에서 나는 오랜 전에 이 지상을 떠난 시인을 이국에서 보내는 내 오후로 불러 낸 것이다. 김영랑의 시를 배우던 무렵, 나는 그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다만 김영랑의 시만이 아름다웠다.

 

그 시를 어우르고 있던 슬픔의 빛은 김영랑이라는 시인의 개인사를 어떤 신화로 올려놓고 있다. 그 슬픔은 어떤 깊이를 하고 있기에 시간을 지우며 시인의 오월과 뜨락과 꽃, 아득한 빛에 가물거리는 그 시대를 신화로 만드는가.

 

신화의 세계라는 것은 사실은 과장된 초인간적 공간이다. 신화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금기하거나 꿈꾸거나 하는 것을 아우른다. 신화의 세계에는 인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타협이 없다.

 

초인간적 신화의 공간은 인간의 시간이 좌절되는 순간 피어 오른다. 신화의 시간은 좌절된 인간의 시간을 보듬어서 어루만진다. 그리고 다른 운명의 길을 보여준다. 그 운명의 길을 갈 수 있는 인간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마친 인간이다.

 

1970년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무렵, 내가 자라던 내 고향 진주는 세상의 바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긴급조치 바람, 공단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 세계정치를 뒤덮고 있던 냉전바람 등의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막아내고 있었다. 고향은 아직 나의 어머니였다.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하던 민방위 훈련이나 반공 수업,중학생이 되면서 견뎌내야 했던 교련수업이니 행군이니 하는 것들은 귀찮은 의무였을 뿐, 아무런 정치적 외피를 입지 않고 내 언저리를 어정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고향의 강변에는 대나무들이 검푸른 울을 만들었고 작은 야산에서는 복숭아니 능금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이었던 작은 농대에서는 해마다 가을축제를 열어, 그 축제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좋은 찹쌀로 만든 커다란 떡이나 축산학과에서 기르던 소를 잡아 나눈 질 좋은 고기를 들고 오시기도 했다. 태풍이 와서 잔뜩 기다리던 추석상을 휩쓸어 가도, 홍수가 나서 근처 보통학교 강당으로 피난을 가도, 아직 나의 존재는 즐거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80년대였다. 나는 고향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이인 내 존재는 우산 없이 검은 비를 맞는 것 같았다. 벗들은 감금되고 이곳 저곳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나가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누군가가 입을 막았다.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잡으면 내 머리에서 사는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내 펜을 잡았다. 고향의 산동네에서 있던 벗의 자취방에 갑자기 경찰들이 찾아오고 (그 해도 복숭아와 능금은 그렇게 탐스럽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벗들은 패가 갈렸다 (작은 농대는 종합대학이 되어 있었고 작은 농대 시절에 열던 축제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귀가 시간을 단속했다. 불온한 책을 읽고 학습하는 학생조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잠시 끌려가서 취조를 받던 그 무렵 내 속에서 뛰어다니던 즐거운 존재는 나를 떠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여의도라는 작은 섬에 있는 큰 회사에서 밥을 벌기 시작했다. 큰 회사에서 밥을 버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나는 밥을 벌어야 했으므로 터벅터벅 그곳으로 가서 엎드려 일을 하고 작은 지하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밥을 버는 시간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서울이라는 곳에는 큰 강이 있었는데 (내 고향에도 강이 있다. 많은 고대 유적지들이 강가에 있는 것처럼. 언뜻언뜻 고대유적지에서 말라 비틀어진 옛 강줄기를 더듬을 때마다 강가에 자리잡은 고향과 서울이 생각난다). 그 강가에 서서 큰 회사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 회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부나비 같은 꿈에 매달린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막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코미디언도 있었고(그는 출연료보다 열 배는 비싼 정장을 입었다), 가녀린 옷을 입고 스튜디오 앞에서 피곤한 얼굴로 출연을 기다리던 어린 아가씨도 있었고(그녀의 매니저는 이제 막 나온 CD를 들고 이곳 저곳 스튜디오를 기웃거렸다), 회사 앞에는 학교를 빼먹고 잘 생긴 가수를 보기 위해 밤을 새우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나운서를 사랑하던 중년의 여인은 매일 저녁뉴스가 끝나는 시간이면 회사 앞에 서서 아나운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그 여인의 아이들의 저녁밥은 누가 차려줄까 하고 나는 늘 생각했다).

 

90년대 초반 나는 서울을 떠났다. 독일이라는 낯선 나라의 학생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 세월 동안 낯선 나라 대학에서 낯선 나라 말로 강의를 듣고, 리포트를 쓰면서 지냈다. 꿈으로 내가 지나온 자리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 곳들. 내가 자라고 어른이 되면서 지나왔던 자리들과 사람들이 꿈 속에서는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고향의 과수밭의 능금나무에는 권총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내가 능금을 따기 위해서 그 과수밭에 들어섰을 때 권총들은 나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일어나 보면 꿈이었다. 그때 창원으로 갔던 벗들도 꿈에 나타났다.

 

우리가 자주 갔던 막걸리집이었다. 그 집에서 벗들은 아직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벌써 십년째 그 자리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던 거리도 꿈 속에 나타나곤 했다. 시위대가 앉아있던 자리 위에 커다란 독수리가 빙빙거리고 있었다.

 

마치 병아리를 채어가려는 솔개처럼. 누군가 독수리를 향해 빈병을 집어 던졌다. 빈 병 속에서 커다란 컴퓨터게임이 액정처럼 흘러나왔다. 게임은 시위대를 집어 삼켰다.

 

꿈에서 깨어나면 혼자 기숙사 방이었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컴퓨터를 켰다. 무언가 쓰고 싶었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고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줄도 쓸 수가 없어 멍하니 깜박이는 커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삼십대를 지나오면서 자신이 지닌 가치의 순결만을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게 되고 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되면서 서서히 역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잊을 수 있는, 혹은 잊어버릴 수 없는 당대의 역사에서부터 인간이 문자라는 것을 발명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있게 된 그 오랜 역사까지 들여다보는 행운을 가지면서 나는 정작 많은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문학을 시작할 무렵 나는 아주 할 말이 많았다. 그런데 시인이 된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어가는 요즈음 나는 할말이 없다. 이미 지나와서 없어진 시간들이 내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인가. 물리적인 흐름에서는 이미 소멸되어 버린 시간들이 내 안에서는 아직 살아 남아 부비적거리고 있다.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 오래된 시간들은 내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된다. 그 순간이면 나도 덩달아 정말 그 시간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다시 일으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하고 싶었다. 70년대의 즐거운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그 젊디 젊은 벗들은 지금 왜 이 지상에 없는가, 그 때 출연료보다 열 배는 비싼 정장을 입고 여의도를 어슬렁거리던 그 코미디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에게 나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게 하고 싶다. 내가 쓰는 글이라는 공간 속에서 나는 그들의 작은 시간들을 신화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좌절된 인간의 시간들을 불러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이다. ‘문학을 하는 이유와 내가 서로 불화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한국일보 2003/06/18

 

Corry Brokken-Alou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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