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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시인은 모름지기

by 이성근 2020. 5. 5.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백무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노동은 인질로 잡혀갔다

납치범들은 총칼로 인질을 위협하며

흥정을 하는데 써먹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마피아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번씩 빼앗겼다

 

노동법도 빼앗겼다

노동삼권도 빼앗겼다

깃발도 빼앗겼다

함성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몽둥이를 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극렬시위를 하였다

공장 앞에 몰려와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노동자들은 진압에 나섰다

저들의 살상 무기를 막자고

지게차가 나섰다 포크레인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주인인 노동자들은 피흘리며 진압에 나섰다

<출처> 백무산,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가마솥에 대한 성찰 - 복효근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 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에서

삶까지는 멀다

 

 

 

엑스트라- 정해종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 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 관심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 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번, ..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정해종, <내 안의 열대우림>, 생각의나무(2002)

 

 

 

맹지 - 고영조

 

맹지盲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오세영 시인이 우포에서 가르쳐 주었다 경기도 안성 어딘가 만년에 누옥을 앉히겠다고 마련한 곳이 길 없는 땅 맹지라고 맹인이 있으면 맹지도 있다는 뜻이다 눈멀고 귀 먼 청맹과니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길도 마음도 닿을 수 없다면 그게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혜안이 눈부시다 가시덤불 길길이 우거진 저 쪽에 맹지가 있고 마음 굳게 닫힌 저쪽에 그대가 있다 산하도처 길 없는 땅 마음 끊긴 마음들 버려져 있다 눈 먼 마음으로 가는 그 곳에 맹지가 있다 그걸 배웠다.

출처 : 시집 <새로난 길> 2010. 현대시시인선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3- 송경동

 

충남 서산군 대산면 돗곳리

삼성종합화학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를 내고는

서산경찰서 대용감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다시 내 인생 좃돼부렀다고 자포자기

신입식을 거부하자 돌주먹들이 날라왔다

두 번을 끌려 나갔다 오자

전라도 깽깽이놈이 벌떼짓 한다고

간수들이 제일 센 방으로 집어넣어버렸다

죽어라는 소리였다

목이 졸렸던가

두 번 기절하고 깨어보니

온몸 근육들을 자근자근 밟아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잘못했다고 빌어라 했지만

침만 한번 뱉어주었다

피가 흥건한데 아무데도 터진 곳이 없었다

쓰라려보니 음경 끝이 찢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궁금한 건

어떻게 밟아야 거기가 짓이겨 찢어지냐는 것이었다

참 별난 경험도 다 있다라는 생각

서산 조폭들이

땜통님 땜통님 이 새끼 데리고 나가요

이 새끼 미친놈이에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맞다는 생각

난 미쳤다는 생각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나온 청춘에 보내는 송가4- 송경동

 

광양제철소 3기 공사장

배관공으로 쫒아 다니다

잠시 쉴 때였다

10년 된 고물 프레스토를 빼서

폼잡고 다닐 때였다

 

읍내 정다방에 미스 오가 왔다

메마른 시골 읍내에 촉촉한 기운이 돌고

볕이 갑자기 쨍쨍해질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뻔질나게 다방을 드나들고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시켜 먹었다

 

어느 비 오던 날

낙안읍성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사랑고백을 했다

그날 저녁 담장을 넘어

내 품으로 한 마리 고양이처럼

달겨들던 그녀, 열 아홉이었다

 

처음으로 성을 배웠던 시간들

빚이 져서 떠나가던 그녀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어느 발전소 공사현장으로 떠나야 했던 나

아름다웠던 시간만을 기억하자고

깨끗이 돌아섰던 우리

돌아보면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그녀

 

* 2011년 황해문화 겨울호(통권73)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 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라면 여덟 상자- 정춘근

 

경로당에 모여

기억 속에 똬리 틀은 고향 자랑을

국수 타래처럼 풀어내던 노인들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만물 박사 평양 김씨

라면 한 개 풀면 오십 미터라 한 것뿐인데

셈이 빠른 황해도 최씨 노인

휴전선 이십 리는 라면 여덟 상자라

속없이 이야기한 것뿐인데

 

오늘 라면은 매웠나 보네요

노인들 눈자위가 붉은 것을 보면

라면을 그대로 남긴 것을 보면

 

경로당 구석에서는

라면 끓는 검은 솥만

덜컹덜컹 기차 소리를 냅니다.

 

 

 

늑대- 도종환

 

너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편안한 먹이를 찾아

먹이를 주는 사람들 찾아

많은 늑대가 개의 무리 속으로 떠나가는데

너는 왜 아직 산골짝 바위틈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불타는 눈빛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번개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가던

날카로운 빛으로 맹수들을 쏘아보며

들짐승의 살 물어뜯으며

너는 왜 아직도 그 눈빛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

여름날의 천둥과 비바람

한겨울 설한풍 피할 안식처가

사람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는데

왜 바람 부는 들판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서 늑대를 본다

인사동 지나다 충무로 지나다 늑대를 본다

늑대의 눈빛을 하고 바람부는 도시의 변두리를

홀로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본다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외로운 정신들을.

 

 

겁나게와 잉 사이-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출처 : 황해문화, 2009년 봄호(통권63)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서투른 배우- 최영미

 

술 마시고

내게 등을 보인 남자.

취기를 토해내는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봄날이 길어지며 희망이 피어오르고

 

연인이었던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엉키고 풀어졌다,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얼어붙은 원룸에서 햄버거와 입 맞추며

나는 무너졌다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너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

우리 영혼의 지도 위에 그려진 슬픈 궤적.

 

무모한 비행으로 스스로를 탕진하고

해발 2만 미터의 상공에서 눈을 가린 채

나는 폭발했다

흔들리는 가면 뒤에서만

우는 삐에로.

 

추억의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들이 부활해

야구경기를 보며, 글자판을 두드린다.

너는 이미 나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만

지금 너의 밤은 다른 별이 밝히겠지만

 

 

 

나를 모셨던 어머니- 공광규

 

늙은 어머니를 따라 늙어가는 나도

잘 익은 수박 한 통 들고

법성암 부처님께 절하러 간 적이 있다

납작 납작 절하는 어머니 모습이

부처님보다는 바닥을 더 잘 모시는 보살이었다

평생 땅을 모시고 산 습관이었으리라

절을 마치고 구경삼아 경내를 한 바퀴 도는데

법당 연등과 작은 부처님 앞에는 내 이름이 붙어 있고

절 마당 석탑 기단에도

내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오랫동안 어머니가 다니며 시주하던 절인데

어머니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평생 나를 아름다운 연등으로

작은 부처님으로

높은 석탑으로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바람의 경전-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내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확 밀어버리는 것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에미도 없이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탕진하고도 한 자도 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無醫村의 노래- 문충성(文忠誠)

 

 

바다가 휘몰아오는 어둠이 바람 속에 바람이

어둠 속을 걸어 오는 아이가 빛을 찾아

미닫이 새로 얼굴 내밀고 호롱불 곁으로

비집어드는 마을, 불치의 병든 아이들이 모여

산다, 東西南北 아이야 어디를 가나

끝이 없는 시작은 장만이 되는 것, 맨발에

빠져든다, 겨울의 깊이 그 차가운

깊이 속 아이들은 한 줌의 무게를 찾아

빈 손을 들고 바다로 떠나간다

그렇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삼백 예순 날

아이들의 발걸음은 바다 끝에서 칭얼칭얼

열려 죽음을 살려내는 자맥질 속 숨 가빠라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숨 가빠라

누더기를 벗지 못한 채 누더기 속에 바람을

키우며 떠났지만 떠난 자리로 자꾸만

떠나가고 있다, 깨어진 사발에 구겨진

꿈을 담고 꿈속에 일렁이는 바닷길을

절뚝절뚝 달려가고 있다

 

 

 

안개 속 풍경 -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 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우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꽃모종을 하면서-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뻐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운수 좋은 날-오탁번

 

노약자석엔 빈 자리가 없어

그냥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 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내 앞 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꽃힌 피어싱을 한

꼭 옛 이응 같은 도토리 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린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 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을 한 오늘은

참말, 운수 좋은 날!

 

 

 

달래강- 최두석

 

임진강이 굽어 흐르다 만나는 휴전선, 그 달개비꽃 흐드러진 십 리 거리에서 부모 없이 과년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다.

오누이는 몇 마디씩 고구마 넝쿨을 잘라서 강 건너 밭에 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고스란히 다 맞고 바라본 누이의 베옷. 새삼스레 솟아 보이는 누이의 가슴 언저리. 숨막히는 오빠는 누이에게 먼저 집에 가라 하고 집에 간 누이는 저녁 짓고 해어스름에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 나섰다. 덤불숲 헤매다 반달이 지고 점점점 검게 소리쳐 흐르는 강물, 그 곁에 누워, 오빠는 죽어 있었다. 자신의 남근을 돌로 찍은 채.

하여 흐르는 강물에 눈물 씻으며 누이가 뇌었다는 말,

"차라리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그래....."

 

 

 

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충남당진여자 - 장정일

 

어디에 갔을까 충남 당진여자

나를 범하고 나를 버린 여자

스물 세 해째 방어한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 당진여자 나는 너를 미워해야겠네

발전소 같은 정열로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그녀를 나는 미워하지 못하겠네

충남 당진여자 나의 소원은 처음 잔 여자와 결혼하는 것

평생 나의 소원은 처음 안은 여자와 평생 동안 사는 것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처음 입술 비빈 여자와 공들여 아이를 낳고

처음 입술 비빈 여자가 내 팔뚝에 안겨 주는 첫딸 이름을

지어 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 동안의 나의 소원

그러나 너는 달아나 버렸지 나는 질 나쁜 여자예요

택시를 타고 달아나 버렸지 나를 찾지 마세요

노란 택시를 타고 사라져 버렸지 빨개진 눈으로

뒤꽁무늬에 달린 택시 번호라도 외워 둘 걸 그랬다

어디에 숨었니 충남 당진여자 내가 나누어 준 타액 한 점을

작은 입술에 묻힌 채 어디에 즐거워 웃음짓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이 누울 자리는 필요없다고

후후 웃던 충남 당진여자 어린 시절엔

발전소 근처 동네에 살았다고 깔깔대던 충남당진 여자

그래서일까 꿈속에 나타나는 당진 화력 발전소

화력기 속에 무섭게 타오르는 석탄처럼 까만

여자 얼굴 충남 당진여자 얼굴 그 얼굴같이

둥근 전등 아래 나는 서 있다 후회로 우뚝섰다

사실은 내가 바랐던 것 그녀가 달아나 주길 내심으로 원했던 것

충남 당진여자 희미한 선술집 전등 아래

파리똥이 주근깨처럼 들러붙은 전등 아래 서있다

그러면 네가 버린 게 아니고 내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내심으로 서로를 버린 건가 경우는 왜 그렇고

1960년산 우리세대의 인연은 어찌 이 모양일까

만리장성을 쌓은 충남 당진여자와의 사랑은

지저분한 한편 시가 되어 사람들의 심심거리로 떠돌고

천지간에 떠돌다가 소문은 어느 날 당진여자 솜털 보송한

귀에도 들어가서 그 당진여자 피식 웃고

다시 소문은 미래의 내 약혼녀 귀에도 들어가

그 여자 예뻤어요 어땠어요 나지막이 물어오면

사랑이여 나는 그만 아득해질 것이다 충남 당진여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시인은 모름지기- 김남주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지상의 방 한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김남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 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그 집 앞 -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 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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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실비아 플라스

 

이젠 안돼요, 더 이상은

안될 거예요. 검은 구두

전 그걸 삼십 년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어요.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 한 번 쉬지도 재채기조차 못하며.

 

아빠, 전 아빠를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래볼 새도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요

대리석처럼 무겁고, 으로 가득찬 푸대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와

아름다운 노오쎄트 앞바다로

 

강남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의 처럼 커다란

잿빛 발가락을 하나 가진 무시무시한 彫像

전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드리곤 했답니다.

, 아빠.

 

전쟁, 전쟁, 전쟁의

롤러로 납작하게 밀린

폴란드의 도시에서, 독일어로

하지만 그런 이름의 도시는 흔하더군요.

제 폴란드 친구는

 

그런 도시가 일이십 개는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전 아빠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뿌리를 내렸는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결코 아빠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혀가 턱에 붙어버렸거든요.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 , , ,

전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독일 사람은 죄다 아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독일어를 음탕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유태인처럼 칙칙폭폭 실어가는

기관차, 기관차.

유태인처럼 다카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전 유태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전 유태인인지도 모르겠어요.

 

티롤의 눈, 비엔나의 맑은 맥주는

아주 순수한 것도, 진짜도 아니에요.

제 집시의 선조 할머니와 저의 섬뜩한 운명

그리고 저의 타로 가드 한 벌, 타로 가드 한 벌로 봐서

전 조금은 유태인일 거예요.

 

전 언제나 아빠를 두려워했어요.

아빠의 독일 空軍, 아빠의 딱딱한 말투.

그리고 아빠의 말쑥한 콧수염

또 아리안족의 밝은 하늘색 눈.

기갑부대원, 기갑부대원, , 아빠

 

이 아니라, 너무 검은색이어서

어떤 하늘도 삐걱거리며 뚫고 들어올 수 없는 十字章()

어떤 여자든 파시스트를 숭배한답니다.

얼굴을 짓밟은 장화, 이 짐승

아빠 같은 짐승의 야수 같은 마음을.

 

아빠, 제가 가진 사진 속에선

黑板 앞에 서 계시는군요.

발 대신 턱이 갈라져 있지만

그렇다고 악마가 아닌 건 아니에요. 아니,

내 예쁜 빠알간 심장을 둘로 쪼개버린

 

새까만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에요.

그들이 아빠를 묻었을 때 전 열 살이었어요.

스무 살 땐 죽어서

아빠께 돌아가려고, 돌아가려고, 돌아가 보려고 했어요.

전 뼈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침낭에서 끌어내

떨어지지 않게 아교로 붙여버렸어요.

그리고 나니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어요.

전 아빠를 본받기 시작했어요.

고문대와 나사못을 사랑하고

 

'나의 투쟁'의 표정을 지닌 검은 옷의 남자를.

그리고 저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빠, 이제 겨우 끝났어요.

검은 전화기가 뿌리째 뽑혀져

목소리가 기어나오질 못하는군요.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자기가 아빠라고 하며, 내 피를

일년 동안 빨아마신 흡혈귀,

아니, 사실은 칠년이지만요.

아빠, 이젠 누우셔도 돼요.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켄트 M. 키스(Kent M. Keith, 1949~ )

 

 

사람들은 때로 분별이 없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은

이기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거짓 친구와 진정한 적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오늘 행한 좋은 일은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의 솔직함과 정직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정직하라.

 

가장 위대한 이상을 품은 가장 위대한 사람도

가장 악랄한 소인배에 의해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꿈을 품어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워라.

 

당신이 몇 년에 걸쳐 공들여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루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룩하라.

 

사람들은 진정으로 도움을 원하지만

막상 도움을 주어도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라.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내주어도

세상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바람에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번역:권정생)

 

 

 

둘 곱하기 둘-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

 

동지여, 감방에서

그 방까지

몇 걸음 걸리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오.

 

스무 걸음이라면

화장실로 그대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오.

마흔다섯 걸음이라면

운동하라고

그대를 데리고 나가는 건 절대 아니라오.

 

여든 걸음을 세고 나서

장님처럼 고꾸라지듯이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면

, 여든 걸음이 넘는다면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오직 한 군데가 있을 뿐이오

그들이 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이제는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오

 

평화통일론을 펼쳤던 죽산 조봉암은"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고 했다.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직후 곧바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 세대- 체자레 파베세

 

지금은 도로가 펼쳐진 초원에 소년 하나

와서 놀곤 했어. 초원에는 맨발로

즐겁게 뛰노는 개구쟁이들이 있었지.

그들과 풀밭에서 맨발이 되는 건 즐거운 일.

멀리 불빛이 켜지던 어느 날 저녁 도시에서는

총소리가 메아리쳤고, 바람결에 무서운 난리 소리가

간간이 실려 왔었어. 모두들 침묵했어.

언덕 기슭에선 바람결에 실려 온 불빛들이

점점이 흩어졌지. 밤이 깊어지자

모든 건 빛을 잃었고, 졸리움 속에

신선한 바람만이 남아 있었어.

 

(내일 아침 소년들은 또다시 돌아다니고

아무도 난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감옥 안에는

말없는 노동자들이 있고, 누군가는 이미 죽었다.

길거리엔 핏자국들이 얼룩져 있다.

멀리 도시는 태양과 함께 잠이 깨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소년들은 초원의 어둠을 생각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어. 여자들마저

아무 말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어.

소년들은 이따금 계집애들이 놀러 오던

초원의 어둠을 생각하고 있었어. 어둠 속에서 계집애들을

울리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어. 장난꾸러기들이었지.

도시는 낮에는 즐거웠어. 저녁이 되면 말없이

멀리 불빛들을 바라보며 난리 소리를 들었어.

 

지금도 도로가 만나는 초원으로 소년들은

놀러 가곤 하지. 밤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을 지나가면 풀 냄새가 난다. 감옥 안에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때처럼 여자들은

아이들을 낳고 아무 말 하지 않는다.

 

 

 


Barbara Hendricks -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1983)

Negro Spirituals (feat. piano: Dmitri Alexeev)(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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