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사랑해서- 김승희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김왕노
사랑은 - 이승희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최승자
꽃피는 시절- 이성복
*산수유 꽃 진 자리- 나태주
비가 2 기형도
초경 - 정우영
지상에서의 며칠- 나태주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연인들- 김상미
그리움도 물질이다-양해기
나무가 되어 산다- 김인욱
당신을 다루는 법-유현서
사랑이란 -버지니아 울프
절절-사윤수
연애1 -김용택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김용택
당신의 앞-김용택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더딘 사랑-이정록
네가 올 때까지 -이건청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문은희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이정하
콩나물의 물음표 - 김승희
사랑은 싸우는 것-안도현
내 일기의 주인공이 그대이듯-유미성
그대가 있음으로-박성준
그대와 함께 있으면-류시화
동행-이수동
그리운 나무 -정희성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사랑-박승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행복-조미하
내 안의 그대가 그리운 날-윤보영
詩論, 입맞춤- 이화은
사랑하는 것은-/문정희
사 랑 - 안도현
굴비- 오탁번
바로 당신-홍수희
봄편지- 곽재구
죽도록 사랑해서-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 김승희,『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김왕노
이별이나 상처가 생겼을 때는 백년이 참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쓰린 몸에 감각에 눈물에 스쳐가는 세월이 무심하다 생각했습니다.
백년 산다는 것은
백년의 고통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상처고 아픔이고 슬픔이고 다 벗어버리고
어둠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축복이라 했습니다.
밑둥치 물에 빠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엉거주춤 죽어지내듯 사는 주산지 왕버들 같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부터 백년은 너무 짧다 생각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익히는데도
백년은 갈 거라 하고 손 한 번 잡는데도 백 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주 보고 웃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백년 동안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마음이
꽃피우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랑 속 백년은 참 터무니없이 짧습니다.
사랑 속 천년도 하루 햇살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
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히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같은 기원이 또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쪽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이 세상을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만 같은 한 순간이여.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휩쓸려,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긴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엔듯 실려오는 향취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제 몸이 꿰어 있어서,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인들 그 쪽으로 향하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등 너머에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때그때 감사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기약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일기일회(一期一會)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선천성 그리움 -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병에 꽃아다오
꽃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산수유 꽃 진 자리-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비가 2 기형도
----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히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초경 - 정우영
아직 봄이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저녁나절이었다.
허접한 눈으로 헌 신문 뒤적거리고 있는데,
여든 넘은 어머님이 불쑥 물으신다.
자네는 봄이 뭐라고 생각하나?
봄이요? 해 놓고 답변이 궁색하다.
아지랑이야.
눈부터 뽀얀 아지랑이 속에 빠져들며 어머님 스스로 대꾸했다.
내가 양지뜸에서 나물 뜯고 있던 열세 살 때야. 초록 아지랑이
가 다가와 속삭이더니 나를 살짝 휘감아선 날아가는 거야. 난 어
쩔 줄 몰라 아지랑이 꽉 붙잡고 있었지. 아지랑이는 한참을 날아
산등성이에 나를 내려놓았어. 그러고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초록
저고리를 슬근 벗어 걸어 두는 것인데, 요상도 해라. 그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초록 싹이 돋는 거야. 깜짝 놀란 난 하초를 지렸는
데 초록 물이 배어 나왔어. 초경이야. 그 후로는 이상하게 봄보다
먼저 아지랑이가 찾아와. 그러면 난 어김없이 초경을 앓지.
아지랑이와 어우러진 어머님 목소리 나른하게 멀어지더니
내 허접한 눈에 초록 물 배어든다.
<시와 사상, 2007, 여름호>
지상에서의 며칠-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 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사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연인들- 김상미
내 몸에서 나가지 마
눈썹이 닿고 입술이 닿고
음부 가득 득실거리던 꿈들이 닿았는데
서릿발 같은 인생
겨우 겨우 달랬는데
나가지 마
시커멓게 열려 있는 비존재들.
그 허공 속으로
우린 연인들이야
날마다 새로워지는 마음
금빛 월계관처럼 육체에다 씌우며
몰아, 몰아, 그 뜨거운 파도
그 치열한 외침
인생이 보일 때까지
껴안고 또 껴안아야지
자지러지면 어때
신선한 육체의 광택
바다와 사막을 길어나르듯
땀 흘리며 몸부림치고 매달리면 어때
숨쉬는 육체의 수렁은
깊고도 깊어
나 네게서 떨어지지 않을래
쫙 쫙 쫙 입 벌리는 관능
몸이 몸을 먹는 경이,
경이 속으로
끝도 없이 흘러 흘러갈래
내 몸에서 나가지 마
우린 연인들이야
더러운 신의 놀라운 흔적들이야
땅이고
하늘이야
김상미,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세계사, 1993.
그리움도 물질이다-양해기
그리움도 물질이다
눈, 비가 오면
눈, 비도 그리움과 몸을 섞는다
사람 몸에 그리움이 묻으면
곧바로 피부가 타들어간다
가슴이 타들어가고 몸이 타들어가고
뇌가 타들어가고
마음과 생각이 타기 시작한다
그리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화학 물질이다
바닥에 있던 그리움은
물기 많은 가을 낙엽에 실려
비를 타고 날아오른다
그리움이 묻으면 씻어낼 수가 없다
그리움이 묻으면
우리는 그저 술 마시며 아파하며 울다가
그리움이 다른 곳으로 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몸에 묻은 그리움은
사람의 깊은 기억 속에 잠복한다
눈, 비 오는 날이면
그리움은 추억의 밧줄을 붙잡고 슬슬 기어오른다
나무가 되어 산다- 김인욱
나무는 전생에 그리움으로만 살다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땅속 깊이 파고드는 뿌리는 처절하다
수만 개의 푸른 잎사귀들 손짓하며
하늘 끝 뻗어 올린 가지는 또 그토록 간절하다
나무는 갈 길을 잃고 제자리에 박혀
울고 있다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의 치명적 오류다
나무는 한 번도 제 갈 길을 놓아 본 적이 없다
그 애절한 손가락들은 죽을 때까지 하늘을 열망한다
그대 떠나고,
나는 나무가 되어 산다
하늘을 향해
수천수만의 가지 뻗어 올리며
억만의 잎사귀로 바람의 노래 부르며
나무가 되어 산다
멀리 피어 있는 그대여
언젠가 그대도
내 그리움의 가지에 걸려 울 날이 있을 게다
바람 부는 어느 날
서럽게 나를 울 날이 있을 게다
어제는
네 눈썹 같은 그믐달이
하늘까지 뻗어나간 내 손가락에 걸리어
새벽까지 울다 갔다.
당신을 다루는 법-유현서
-열쇠와 자물쇠
난 꿈꿔요 당신의 몸속에서 유영하는 꿈을,
아무 때나 받아주지 않기에 속이 타요 하루에 딱 두 번,
출근할 때와 늦게 귀가하는 밤
스스럼없이 줘요
당신에게 들어갈 땐 절대로 급하게 굴면 안돼요 당신 몸이 열릴 수 있도
록 아주 부드럽고 매끄럽게 살살 노크해야 해요 서두르면 반드시 탈이나요
너무 긴장해 나를 받아주질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아주 부드럽고 매끄
러운 윤활제가 필요해요
또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네요 혼자가 아니에요. 저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길 원하나 봐요
왜 이리 뜨거워지죠 숨이 가빠오네요 철커덕, 당신이 열리네요
사랑이란 -버지니아 울프
사랑이란 생각이다
사랑이란 기다림이다
사랑이란, 기쁨
사랑이란, 슬픔
사랑이란, 벌
사랑이란, 고통이다
홀로 있기에 가슴 저려오는 고독
사랑은 고통을 즐긴다
그대의 머릿결
그대의 눈
그대의 손
그대의 미소는
누군가의 마음을 불태워 온몸을 흔들게 한다
꿈을 꾸듯 생각에 빠지고 그대들은
그대들의 육체에
영혼에
삶에 그대들의 목숨까지 바친다
그리고 둘이 다시 하나될때
아, 그대들은 한쌍의 새처럼 노래한다 .
절절-사윤수
대비사 돌확에 약수가 얼었다
파란 바가지 하나 엎어져
약수와 꽝꽝 얼어붙었다
북풍이 밤 세워 예불 드릴 때
물과 바가지는 서로에게 파고들었겠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꽉 잡고 놓지 않았겠지
엎어져 붙었다는 건
오지 말아야할 길을 왔다는 뜻, 그러나
부처가 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이 결빙의 묵언수행을
지난밤이라 부른다
내가 잃어버린 지난밤들은
어디로 가서 철 지난 외투가 되었을까
돌확이 넘치도록 부어오른 얼음장이
돌아갈 수 없는 길의 발등을 닮았다
봄이여, 한 백 년 쯤 늦게 오시라
차갑고도 뜨거운 화두에 거꾸로 맺힌 저 대웅전
파란 바가지 한 채의 동안거가
절절 깊다
고요가 가슴이라면 미어터지는 중이다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김용택
살아온 날들이 지나갑니다
아! 산다는 것 사는 일이 참 꿈만 같지요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
내가 내 편이 아닐 때에도 당신은 내 편이었지요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서 기다려도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애1 -김용택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강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지면 나는 날마다 산에게로 걸어간다
해가 질 때, 나무와 산과 강에게로 걸어가는 일은
아름답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당신의 앞-김용택
이 세상에 당신이 있어
내가 행복한 것처럼
당신에게 나도
행복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내 아무리 돌아서도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당신이 아무리 돌아서도
나는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어느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더딘 사랑-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네가 올 때까지 -이건청
밤깊고
안개 짙은 날엔
내가 등대가 되마.
넘어져 피나면
안되지.
안개 속에서 키 세우고
암초 위에 서마.
네가 올 때까지
밤새
무적을 울리는
등대가 되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문은희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이라면
그 중 하나는
나 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이라면
그 중 하나는
나 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뿐 이라도
그는 바로 나 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까닭일 겁니다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이정하
창가사이로 촉촉한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같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려주며 이마에 입맞춤하는
이른 아침같은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모카 향기 가득한 커피 잔에
살포시 녹아가는 설탕같이 부드러운 미소로 하루시작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분히 흩어지는 벗꽃들 사이로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쳐가는 봄바람같이
마음 가득 설레이는 자취로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마른 포도밭에 떨어지는 봄비 같은 간절함으로
내 기도 속에 떨구어지는 눈물 속에 숨겨진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삶 속에서 영원히 사랑으로 남을..
어제와 오늘..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내일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콩나물의 물음표 - 김승희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 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 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 내밀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 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사랑은 싸우는 것-안도현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위위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 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 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 것을
내 일기의 주인공이 그대이듯-유미성
그대를 만난 이후로
더 이상 내 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닙니다
그대를 만난 이후로
내 일기의 주인공은
그대가 되었습니다
하루동안 일어났던
나의 중요한 일들보다는
그대와의 짧은 통화가
내 일기의 더욱 중요한 소재가 되어 줍니다
하루 종일 몸이 아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날에도
밤이 되면 숨쉬기 보다
더한 의무감으로
그대 이름을 일기장에 빽빽하게 적습니다
내 일기의 주인공이 그대이듯
내 인생의 주인은 그대입니다.
그대가 있음으로-박성준
어떤 이름으로든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아픔과 그리움이 진할수록
그대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별과 바다와 하늘의 이름으로도
그대를 꿈꾼다
사랑으로 가득찬 희망 때문에
그대와 함께 있으면-류시화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너무나도
행복한 기분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내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그대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느 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치 내 마음을 털어놓은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항상 나를 이해하는
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너무나도
편안한 기분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사소한 일조차 속일 필요 없고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세상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그대에게 의지하면서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대는 내게
특별한 자신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동행-이수동
꽃같은 그대
나무 같은 나를 믿고 길을 나서자
그대는 꽃이라서
10년 이내 10번은 변하겠지만
나는 나무 같아서 그 10년,
내 속에 둥근 나이테로만 남기고 말겠다.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테니
길가는 동안 내가 지치지 않게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
그리운 나무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내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사랑-박승우
당신이 연두빛 몸매로 왔을 때 나는 몰랐습니다
그저 작은 들풀이려니 생각했습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느날 홀연히 사라질
일년생 들풀 중의 하나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정원에 뿌리를 내린 당신은
그리움을 먹고 자라는 목마른 나무였습니다
날마다 그리움의 파란 엽서를 가지끝에 매달고
손흔드는 갈망이었습니다
보고싶은 마음에 담장을 넘어
하늘로 목을 뻗는 키 큰 나무였습니다
서러움과 슬픔의 열매들이 열리고
고독의 뿌리가 깊어지지만
그래도 기다림의 나이테를 만들며
희망으로 물관부를 채우는 꼿꼿한 나무였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커버려 옮겨 심을 수도 없는
내 정원의 키 큰 나무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나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을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행복-조미하
가슴 뛰는 행복
거창한 것도 아니더라
속깊은 한마디에
가슴 따뜻해지고
작은 정성에
가슴가득 설레이고
토닥토닥 손길에
맘까지 따스하더라
겨우내 잘 견딘
초록빛 고운싹 얼굴 내밀면
새로운 희망이 솟고
어둔밤 반짝이는 별빛이
메마른 나뭇가지를 지키는것도
기분좋은 행복이고
향기나는 여린꽃 한송이에
마음까지 향기가 느껴지더라
행복
가슴뛰는 행복
그거 별거 아니더라
내 안의 그대가 그리운 날-윤보영
그대 그리움이 날 깨운
참 좋은 아침입니다
그대 생각이 내 하루를
마중 나온
참 좋은 아침입니다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내 얼굴에 미소가 이는데
오늘 하루도
어제처럼 행복한
시간들이 채워지겠지요
나보다 그대가
더 행복하길 바라면서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침
그대도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詩論, 입맞춤- 이화은
여자는 키스할 때마다 그것이
이 생의 마지막 입맞춤인 듯
눈을 꼭 감고
애인의 입 속으로 죽음처럼 미끄러져 들어간다는데
남자는 군데군데 눈을 떠
속눈썹의 떨림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며
풍경의 변화와 춤추는 체온의 곡선까지
꼼꼼히 체크 한다고 하니
누가 시인일까
독자는 여자 편에 설 것이고
시인은 당연히 남자 편에
설 것이다
몰입의 바닥에는 시가 없다
불타는 장작을 뒤집어 불길의 이면을 읽어야 하는 남자여
불쌍한 시인이여
키스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눈을 뜨지 않은 시인이거든
그대 당장 독자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하리
그러나 시인의 발바닥은 완전 연소의 재 한줌도 함부로 밟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은 -문정희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 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사 랑 -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바로 당신-홍수희
아침에 유리문을 여니
분홍빛 매화가 송이송이 부끄럽게 웃고 있습니다
언제 그리 꽃송이를 많이 피워놓았는지
비누방울처럼 뭉게뭉게 방울방울 톡톡 터질 것 같아요
지금 내 안에서도 그래요 가끔은 아주 가끔은
보고파서 보고파서 톡톡 터질 것 같아요, 바로 당신
봄편지- 곽재구
강에 물 가득
흐르니 보기 좋으오
꽃이 피고 비단 바람 불어오고
하얀 날개를 지닌 새들이 날아온다오
아시오?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는 것을
밥을 든든히 먹은 바람이
새들을 힘차게 허공 속에 띄운다는 것을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꽃향기가 서 말은 들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새들의 노래를 보내오
굶지 마오
우린 곧 만날 것이오
ABBA - Angel E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