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폐소공포
뻘에 울다
돌에게는 귀가 많아
퉁소
시체놀이
사골국 끓이는 저녁
빌려 줄 몸 한 채
포구의 방
사랑의 거처
69-삼신할미가 노는 방
어리고 푸른 어미꽃
내력
양변기 위에서
목포항
간이역
나생이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개부처 손
짜디짠 잠
물로 빚어진 사람
그 많은 밥의 비유
맑은 날
능소화
사랑의 정원 2
화전에서 소금을 캐다
부쳐 먹다
봄잠
민둥산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어여쁜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잘디잔 보랏빛 총총한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사슴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곱게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을 채집하며 날갯짓하는 나비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을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함께 가락을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나무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을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
어여뻐아주 잊듯이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폐소공포
강원도 산골로 국어선생을 갔던 물방울 같은 처녀의 이야기네 흙마당 어여쁜 여자의 방에 푸른보라 몸빛이 동쪽바다 물속 같은 장수하늘소 한 마리 날아들었네 어디서 큰 시름 있었는지 창 아래 반뼘 그늘 밑에서 날개를 쉬었다 하네 여자가 설탕물 만들어 약지에 찍었고 푸른보라 물결이 여자의 손을 핥았네 이슬과 송진과 개암냄새를 핥았네 그늘 깊은 피안이 달 끝에 걸려 문풍지를 악기처럼 울릴 동안 여자의 몸에서 새어나온 물소리 푸른보라빛 안쪽을 적셨네 서른 낮과 서른 밤……그늘이 뼈가 되고 꽃이 거품이 되어……훌훌한 이슬의 손이 어느날 장수하늘소를 일으켰네
여자는 갑자기 겁이 났네 하늘소 깊은 밤바다빛 떠나면 영영 안 돌아올까봐 유리병 속으로 밀어넣었네 창호지 마개에 숨구멍 내주고 꿀물 축인 연한 잎새 가장 깊은 살을 베어 넣어주었지만
일몰 낭자한 어느 저물녘 유리병 속에서 푸른보랏빛 바다는 죽어 있었네 사지가 뻣뻣해진 수천 장의 물결이 여자의 안쪽을 때려……
눈물빛 종이옷 손 끝에 매달려 타오르다 자지러지네 요령소리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가 어둠을 입고 나오네 안쪽을 적셔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천길 만길 밤물결이네 긴긴 순례 끝에 여승이 가만히 펼쳐 보여준 손 안에 쐐기처럼 장수하늘소座 박혀 있었네 손금에 파묻힌 유리병 속에서 잔물결 가득한 푸른보랏빛 성좌가 소름처럼 몸을 울고
지독한 폐소공포를 앓던 한 처녀의 이야기네 주먹을 꼭 그러쥐고 여승이 가만가만 목탁을 두드렸네 잘 살라지지 않는 무거운 종이옷을 입은 채 나는 손목을 잘라 자꾸만 닫히는 유리병 밖으로 던졌네
뻘에 울다
(씨앗사람들을 데리고 도요새 떼 여길 지나갔네 비 많이 와 늙은 도요의 눈 속이 흠뻑 젖어 있었네 그들의 마지막 말을 누군가 편집했지만,)
여기가 좋아요
뭍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중음(中陰)의 보드라움, 몽유하는 혼들이 숨구멍처럼
열렸네요 오, 예뻐요 빗방울처럼 제각각 몸을 둥글린
시간들
우리가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와도
씨앗들 퍼지네요 음악처럼 별빛처럼 무화과 입속처럼
여기가 좋아요
뭍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한
살가운 접촉, 흔적이 흔적 속에 잘 스며들어, 당신이 나를 낳기 좋은 아침이 왔죠 내가 당신을 낳기 좋은 저녁이 왔죠 젖멍울 짠한 노을이 땀 냄새 풍기며 우리에게 젖을 물려주었어요 여러 겹의 수평이 번져간 발치엔 오래전의 목숨들이 세족식의 물 대야를 받치고 있었죠
이 틈이 좋아요
내 살과 당신의 살 사이, 서로 다른 육즙의 신선한 향내
뭍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는
여기는 시들지 않는 신접살림이 바람개비처럼 까불거리죠
이쪽이기도 하고 이쪽 아니기도 한, 소슬한 틈새의 베갯머리에서
시간이 숨구멍처럼 휘는 이곳의 혼돈이 좋아요
우리가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와도
날갯짓 아스라한 혼돈의 파도가 하늘 어딘가 상한데를 쓰다듬고 온 것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런 것처럼
뭍과 바다 사이, 이토록 모호한
어디에든 속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 드넓은 틈 사이에 씨앗사람들을 내려놓을게요
(그런데 혹시 이 모호함이 두려운가요? 그래서 자꾸 딱딱해지고 싶은 건가요?)
돌에게는 귀가 많아
귀가 하나 둘 넷 여덟 나는 심지어 백 개도 넘는 귀를 가진 돌도 보았네 귀가 많은데 손이 없다는 게 허물될 것 없지만 길 위에서 귀 가릴 손이 없으면 어쩌나 나도 손을 버리고 손 없는 돌을 혀로 만지네 이 돌은 짜고 이 돌은 시네 달고 맵고 쓴 돌 칼칼한 돌 우는 돌 단 듯한데 실은 짜거나 쓴 듯한데 실은 시거나 혀끝을 골고루 대어보아야 돌이 자기 손을 어떻게 자기 몸속에 넣었는지 알 수 있네 무미무취라니! 무취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귀가 많으니 돌이야말로 맛의 궁전이지 당신이 가슴속에서 꺼내 보여준 막 쪼갠 수박처럼 핏물 흥건한 돌덩이 맵고 짜고 쓴데 귀 가릴 손이 없으니 내 입술로 귀를 덮네 입술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어떻게 자기 귀를 몸속에 가두는지 보라 하네
-김선우 시집"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사상사]에서
퉁소
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느 일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내가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 라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신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평범하기 그지없던 일요일
가난한 연인들이 되풀이하며 걸었을 골목길을 걸었고
쓰러져가는 담장의 뿌리를 환하게 적시며
용케도 피어난 파꽃들의 무덤을 보았고
변두리 야산 중턱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을 뿐
평생토록 한곳에서 저렇게 흔들려도 좋겠구나,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위에서
생채기를 만들지 않고도 나무 그늘이 진자처럼 흔들렸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노란 새가 퉁소 소리를 내며 울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한 장난처럼
가끔씩 구름 조각을 옮겨다 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조을다 까마득한 낮잠에 들었을 뿐
너무 길지 않은, 너무 짧지도 않은
그 시간에 어떤 손들이 내 이마를 쓸고 지나간 걸까
십이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왜 갑자기 생겨났는지
목젖 아래 깊은 항아리로부터
우주, 라는 말이 왜 떠올라 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노랫소리와 구름 조각을 옮기던
새의 깃털 하나하나가 퉁소 구멍처럼 텅 비어
맑게 울리는 게 보였다
시체놀이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 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 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 넝쿨 물새 알 산새 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사골국 끓이는 저녁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나를 향해 눈을 끔뻑이고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내 옆과 뒤를 통째로 보면서(오, 질긴 냄새의 눈동자)
아무것도 안 보는 척 멀뚱한 소 눈
찬바람 일어 사골국 소뼈를 고다가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한 그릇…… 한 그릇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네 눈동자 후루룩 삼키고
내 몸속에 들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볼
너에게 기꺼이 나를 들키겠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
빌려 줄 몸 한 채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얼레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쟎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 해토머리 / 얼었던 땅이 풀릴 무렵, 따지기
포구의 방
생리통의 밤이면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더라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이 더,
소라 냄새 나는 베개로 코 박고 있노라면
푸른 연어처럼
나는 어린 생것이 되어
무릎 모으고 어깨 곱송그려
앞가슴으론 말랑말랑한 거북알 하나쯤
더 안을 만하게 둥글어져
파도의 젖을 빨다가 내 젖을 물리다가
포구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면
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부르며
물장구를 쳤으면 모래성을 쌓았으면 싶더라
미열이야 시시로 즐길 만하게 되었다고
큰소리쳐놓고도 마음이 도질 때면
비릿해진 살이 먼저 포구로 간다
붓다도 레닌도 맨발의 내 어머니도
아픈 날은 이렇게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
처녀 하나 뜨거워져 파도와 여물게 살 좀 섞어도
흉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사랑의 거처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 나무도 생각이 있어
여기 이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 <장자>인간세편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그렇다네 내 혼이
다른 육체에 머물고 있는 느낌
그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네
69삼신할미가 노는 방
오랜만에 고향집 안방에서 한낮을 백년처럼 뒹구는데 까츨하고 굽실한 희끗한 터럭 하나, 집어들고 햇살 속에 이윽히 뜯어보니 이것은 분명 그곳의 터럭 어머니의 것일까 아버지의 것일까 오래 전 돌아간 조부모의 그것이 장롱 밑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햇볕 쪼이러 시남시남 나와 본 걸까 희끗한 터럭 집어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사이에 마음이 뜨끈하게 여울져오고 별안간 이 오래된 삼신할미 같은 방이 쌔근쌔근 더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는 거라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방이 무덤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만 사방이 69 천지인 거라. 방구들과 천장의 69, 전등과 전등갓의 69, 문틀과 문의 69, 한 시와 두 시의 69, 이불과 요의 69, 자음과 모음의 69, 모서리와 벽의 69, 두 시와 세 시의 69, 얼룩들의 69, 얼룩이 얼룩을 낳고 얼룩이 얼룩 속에 제 몸을 비벼넣으면서, 쥐오줌과 곰팡이꽃의 69, 숟가락과 국그릇의 69, 주춧돌과 두꺼비집의 69, 옛날 옛적 산이었던 이 터와 지붕 얹힌 것들의 69, 죽은 것과 산 것들의 69, 어머니 태 속의 나와 어머니의 69 그러고는 이 삼신할미 같은 방이 맨 나중으로 펼쳐 보여준 것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69였는데, 흰머리 성성한 어머니가 외할머니 젖을 빨듯, 시든 아버지가 할머니의 젖을 빨듯, 이상하게도 자분자분 애틋한 소리가 온방에 가득해져 오는 거라 방구들이 천장에게, 모서리가 벽에게, 한 시가 두 시에게, 삶이 죽음에게 젖을 물리며 늙은 방이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는 거였다
어리고 푸른 어미꽃
사람이 하려면 어림없는 것인데 봐라, 하늘이 하시는 일인 거라. 마당에 내려선 어머니가 합장을 하였습니다 가뭄 끝에 단비 땅을 적시어 땅냄새 물큰하니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봉인을 풀 듯 나직한 그림자 적시며 생땅 냄새, 푸른 꽃내음이 훅 끼쳐 왔습니다 50억살 먹은 어리고 푸른 꽃이 50억년 찰나 동안 피워올린 몸의 향기 라일락이랄지 감꽃이랄지 이윽한 것들의 향기 속에 배어 있던 흙내음이 어린 어미꽃의 몸냄새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가뭄 끝이었습니다
내력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양변기 위에서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목포항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개 바늘은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간이역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맵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나생이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잇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 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니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니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둣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를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개부처 손
개두릅 개복숭아 개살구 개머루 개꿈 개떡 같은
참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된 걸 말하는 개,라는 접두사가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긴 풀 앞에 그것도 좀 모자란 듯한 잘디잔 손바닥 앞에 이름 붙어
개부처손이라 했다
납작한 바위를 감싸며 깊은 그늘 만들고 있는
고작 엄지손톱만한 초록빛 개부처손들 앞에서 서성거린다
저잣거리의 좀 덜된 무명씨 같은 이도 부처 될 만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막된 인사(人事)보다 개가 부처를 이루는 게 도리라는 것도 같고
개나 소나 팽나무나 바위나 그저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것들 중에
이미 부처를 이룬 것들 수두룩 할 것 같고
짜디짠 잠
동안거 끝낸 스님네와 차를 마신다
안거할 곳 없는 내 겨울잠은
새 발자국 모양의 가지 끝에서 천일염을 만든다
찻잎이 너무 많았는지
묵상이 너무 길었는지
진하게 우려진 차 한모금
차가 짭니다. 한스님이 입을 연다
짭니까 차 달이던 스님이 나를 보고 물으신다
독하다고 해야 할지 쓰다고 해야 할지
차맛 하나를 두고 오만가지 생각을 짚어보다가
짜군요 내가 대답한다
하늘의 구름에도
구름을 길어올린 나무뿌리에도 염분이 있어
차나무의 겨울잠은 아찔하게 짜고
새순을 따는 순간 어미로부터 떠나는 잎새의 절박함에도
찻잎이 덖어지는 순간의 설레임에도 염분이 있어
눈물 같은 맛,
내가 떠나온 그곳도 드넓은 염전과 같았을 것이다
스님네와 짠 차를 마신다
아무런 미련도 슬픔도 없다고 생각한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싱거운 경(經) 하나가 겨울잠을 자고 난 후
짜딘짠 문자들이 내 목울대로 쏟아진다
물로 빚어진 사람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주던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바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떼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엄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그 많은 밥의 비유
밥상 앞에서 내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 몸속이 여전히 깜깜할지 어떨지
희부연 미명이라도 깊은 어딘가를 비춰줄지 어떨지
아, 입을 벌리는 순간 췌장 부근 어디거나 난소 어디께
광속으로 몇억 년을 달려 막 내게 닿은 듯한
그런 빛이 구불텅한 창자의 구석진 그늘
부스스한 솜털들을 어루만져줄지 어떨지
먼 어둠 속을 오래 떠돌던 무엇인가
기어코 여기로 와 몸 받았듯이
아직도 이 별에서 태어나는 것들
소름끼치게 그리운 시방(十方)을 걸치고 있는 것
내 몸속 어디에서 내가 나를 향해
아, 입벌리네 자기 해골을 갈아 만든 피리를 불면서
몸 사막을 건너는 순례자같이
그대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가 아, 입 벌리네 어둠 깊으니 그 어둠 받아먹네
공기 속에 살내음 가득해 아아, 입 벌리고 폭풍 속에서
비리디 비린 바람의 울혈을 받아먹네
그대를 사랑하여 아, 아, 아, 나 자꾸 입 벌리네
맑은 날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움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꺾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 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능소화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납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능소(凌宵)야 능소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이야 아니 되어도 능소야 능소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려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 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째 툭,툭, 떨어져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사랑의 정원 2
연꽃 속의 연꽃 속의 연꽃 속의 연꽃이여
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
천 개의 꽃잎을 보네 천 개의 꽃잎 하나하나마다
천 개의 꽃잎 가진 연꽃이 들어있어
처음 연꽃보다 작거나 크지 않네
성한 데 하나 없는 비로자나 비로자나
그대가 온 곳 몰라도
그대가 간 곳 몰라도
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네
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
천개의 꽃잎 하나하나 속에
천 개의 꽃잎 가진 그대가 핀 걸 보네
화전에서 소금을 캐다
강원도 산골 깍아지른 비탈의 화전을 지난다
삼복 무더운 날 소금단지를 열었을 때 훅, 끼쳐오던
소금내음 밭고랑에 물큰하다 고갯길 지나 하늘벽 지나
시골집 뒤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한 자락 짜디짜다
하루 세 번 손가락 끝에 불꽃을 매달고 소신공양하는
낡은 집 굴뚝으로 참매미 울음소리 소금짐을 지고 온다
지상의 며칠을 필사의 노래로 오체투지 하는 매미울음
짜디짜다 몸 피할 바람 한 점 없는 불붙은 폭염의 날이라야
소금밭에는 향기로운 소금이 오신다고 하였다
맨무릎으로 땅에 엎드린 집 한 채 속에 오체투지로
웅크린 검은 아궁이, 한 끼 밥도 사랑도 오체투지 없이는
허락되지 않는 화전의 타는 맨발이 짜디짜다
부쳐 먹다
강원도 산간에 비탈밭 많지요
비탈에 몸 붙인 어미 아비 많지요
땅에 바싹 몸 붙여야 먹고 살수 있는 목숨이라는 듯
겨우 먹고 살만한
'겨우' 속에
사람의 하늘이랄지 뜨먹하게 오는 무슨 꼭두서니빛 광야같은 거랑도 정분날 일 있다는 듯
그럭저럭 조그만 땅 부쳐먹고 산다는 ……부쳐 먹는 다는 말 좋아진 저녁에
번철에 기름 둘러 부침개 바싹 부치고
술상 붙여 그대를 부를래요
무릎 붙이고 발가락 붙이고 황토빛 진동하는 살내음에 심장을 바싹 붙여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듯
바싹 몸 붙여 그대를 부쳐 먹을래요
봄잠
-산 밑, 사랑에 관한 두 마디 그림자극
한 무리의 군인들 몰려왔네
산벚나무 그늘에서 한 여자 끌려나왔네
다른 이념을 가진 그릶자에게 밥 지어 먹인 죄라하네
함부로 엎질러진 허공의 밥공기에서
돋지 못한 꽃눈들 애벌레처럼 쏟아졌네
다행이야 아주 차갑진 않아서 -
여자가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고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솟은 순간,
산벚나무 그늘에서 한 그림자 달려나와 여자의 몸을 덮었네
낯선 그림자의 펼쳐진 옷자락 속
여자의 애벌레들 나비, 나비, 나비 떼로 펄럭대고
그림자 쓰려졌네
따스한 핏물이 쓰러진 그림자의 발목을 적셨네
밥물처럼 흥건한 나무 밑,
혹시는 이것도 사랑일까 쫓겨든 산속
멍울진 꽃눈들 파근하게 팬 오후에
밥 한 덩이 건네받은 적 있을 뿐
나비 분 일 듯 아주 찰나 손끝 스친 적 있을 뿐
산벚나무 밑에 잠든 늙은 여자를 본다면
그 여자 심장 위로 꽃잎 사무치게 져 내린다면
잠든 그림자 가만히 열어 나비를 꺼내야 하리
꽃잎 져 내린 후 푸르게 남아 흔들리는 꽃받침,
그 흔들림까지 다 꽃이었으니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민둥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산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계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시인 너머 쓰는 자, 그리워하면서 나는 쓴다
- 시인 김선우의 20년을 재구성하다 글. 박제영
다섯 번째 시집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으로 제5회 발견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김선우를 만나러 강릉 가는 길. 멀쩡하던 날씨가 대관령 자락 지나면서 변덕을 부린다. 안개가 자욱하다. 고개만 넘으면 강릉이 지척인데, 거기 시인 김선우가 있는데. 안개가 길을 지우고 있다. 터널을 지나면 괜찮을까 이번 터널만 지나면 보이겠지. 웬걸. 이번에는 비가 내린다. 안개가 지운 길을 비가 다시 지운다. 비 온다는 일기예보는 없었는데. 대관령 옛길을 넘어 갈 걸 그랬나? 대관령 옛길이 어디더라? 김선우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그의 시, 「대관령 옛길」을 생각하는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 걷히고 비가 그쳤다. 어느새 강릉이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 김선우, 「대관령 옛길」 부분
강릉에서 열린 문학캠프. 일정을 따로 빼는 것은 어렵고 문학캠프에 초청 강사로 참여하게 되었으니 그곳에서 보자고. 그렇게 약속이 되어서 강릉 문학캠프를 찾은 것인데, 막상 단독 인터뷰가 아니라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합동으로 진행되는 인터뷰다. 뭐 차라리 잘 됐다. 친절한 기자들께서 나 대신 질문을 할 것이고 나는 그저 공으로 받아먹으면 되는 것이니.
인터뷰는 한 시간 가량 진행이 되었다. 기자들의 질문은 가볍지만 유치하지는 않거나, 무겁지만 두루뭉술한 반면 김선우 시인의 대답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지만 유쾌하고 단호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애초에는 ‘월간 태백의 질문과 시인 김선우의 대답’으로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질문 자체가 바뀐 것이다.
전제가 바뀌면 결과도 달라지는 법. 그래서 바꿨다. 애초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말이 아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시인 김선우(의 시)를 짚어볼 생각이다.
여성의 몸, 어미의 몸을 살려내다
“그러면서 문득 길의 몸을 본 것 같다. 더듬거리며 그 몸을 찾아나설 때가 다시 오고 있음을 안다. 더 멀리 가야 한다. 더 큰 고통과 축복의 몸들에게로. 여전히 내 언어는 불화의 쪽에 있지만, 내 속에서 오래도록 나를 불러온 허방으로 두려움없이 가야겠다. 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다.”
- 시인의 말,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중에서
김선우 시인이 창비에 「대관령 옛길」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을 한 건 1996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저 좋은 신인이 나왔구나, 그랬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이 나왔다. 첫 시집을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한 시대를 끄-을고 갈 무서운 시인이 나왔구나.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 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딱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믓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 「내력」 전문
毒을 잘 쓰면 藥이 되는 법. 그러니까 名醫란 독을 제대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어머니, 아버지의 ‘거시기’를 입에 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시적 소재로 쓰기에는 얼마나 아슬아슬한 물건이던가. 자칫 조금만 삐끗해도 외설과 불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오래된 경력의 시인이라도 다루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예민한 소재일 터. 명의 중의 명의도 다루기 쉽지 않은 毒일 터. 김선우의 「내력」은 어머니, 아버지의 거시기를 어떻게 다루면 시가 되는지, 예민하디 예민한 저 소재를, 저 처소(處所)를 어떻게 다루면 시가 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시라고 하겠다.
십여 년 전, 그의 첫 시집을 읽다가 나는 이렇게 메모를 해두었던 것. 그랬다. 그는 몸을, 여성의 몸을, 어미의 몸을, 자연이라는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시인이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시에 있어서 페미니즘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 김선우 이전과 이후가 갈린다고 말한다. 적어도 여성의 몸을, 어미의 몸을 다루는 법에 관한 한 김선우 이전과 이후로 지평이 갈린다고. 김선우 시인이 다루는 방식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방식이다.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방식이고 어둠 속으로 숨김이 아니라 밝은 곳으로 드러냄의 방식이다.
그러니까 그 이전의 페미니즘이 주장했던 것이 남성의 대칭으로서 적대적인 여성의 몸이라면 그가 그려낸 여성의 몸, 어미의 몸은 그런 투쟁을, 그런 이분법을 뛰어넘는 아니 그 모든 것을 아예 통째로 품어버리고 마는 소위 자연으로서의 몸, 생성으로서의 몸이다.
90년대 세계화라는 괴물이 전지구를 쓰나미처럼 덮치고 천민 자본주의(누구는 신자유주의라고도 하지만)라는 벌레가 전지구를 포획하면서 망가뜨린 게 어디 한둘이랴 마는 인간의 몸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던 것. 특히 여성의 몸은 더더욱 그러했다. 고래로 가부장적 시각으로 남성의 시각으로 왜곡되었던 여성의 몸이 자본주의를 만나 이제는 아예 상품으로 변질되기까지 했던 것. 그 몸, 그 여성의 몸을 다시 건강하게 살려낼 수 있을까 싶을 때, 김선우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거침없이 자기의 몸을 벗어보였다. 자 봐라. 내 몸을 봐라.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민둥산」 전문
일찍이 수많은 누드사진, 누드화를 보았었지만 이만큼 아름다운 알몸의 풍경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알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시인은 말한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몸의 그대가, ‘상처를 모신 바람’이 되어 나부껴 온다고.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라고.
바람과의 통정이라니!
그대 몸이 신전이라니!
맞다. 허명이라는 허울을 벗고 세상의 상처를 받아드리는 것이니, 상처를 모신 바람을 받아드리는 것이니, 그리하여 치유된 세상을 낳는 것이니 당신의 그 몸, 신전이 맞다.
김선우는 등단 이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그 다섯 권의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여러 주제 중 하나는 분명 몸이다. 병든 몸의 회복이다. 몸에게 다시 길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쓰는’ 사람으로 다시 시작한 혁명
1989년 11월 9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듬해 10월 3일, 분단국 독일이 41년 만에 통일되었다.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옐친이 탱크 위에 맨몸으로 뛰어올라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고 외쳤다. 1991년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CIS)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소련이 해체되었다.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레닌의 동상이 사회주의권의 해체와 함께 성난 군중들에 의하여 내려지고 있던 그 때,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이 무릎을 꿇고 있던 그 때, 혁명을 꿈꾸던 청년 김선우도 마침내 혁명의 동인(動因)을 잃어야 했던 시기였다. 그는 강원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학과 88학번이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사실은 별로 살고 싶지가 않았다. 내 청춘이 그랬다. 내가 사범대인 강원대 국어교육학과를 나왔다. 교사가 될 생각은 딱히 없었다. 격렬한 운동권으로 살았다.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가 변했다. 세계적인 정세도 변화가 컸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었다. 이런저런 현장들에서 궁리해보다가 ‘내 길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야지?’ 자문하던 시기가 이십 대 중반에 왔다. 그런 중에 시를 쓰고 싶었고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시절 등단을 하지 않았다면 사회에 대한 적당한 냉소와 반항으로 세월을 탕진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등단을 했고 글쟁이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이십 년 동안 삼사 년에 한 권씩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장편 소설도 썼다. 시집을 쓰는 와중에 소설과 에세이를 같이 써왔다. 시, 소설, 에세이 모두 매력이 있다. 한국은 아직 장르 순혈주의가 세지만 외국 작가들은 보통 라이터(writer),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쓰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시는 바탕이다. 그 바탕 위에서 소설하고 산문집을 냈다. 지금까지 총 열 다섯 권 정도 책을 냈다. 시 해설서까지 더 하면 스무 권 정도 나왔다. 최선을 다해서 썼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리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 「피어라, 석유!」 전문
1997년 외환 금융 위기가 터졌다. 국제 통화 기금(IMF)의 지시에 따라 소위 구조 조정이 시작됐다. 실직한 가장이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하였다는 기사가 차고 넘쳤다. 이런 사태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통합된 제3세계 국가들 대부분이 우리와 비슷한 사태를 겪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겪고 있다. 1996년 등단 이후 김선우 시인이 목도하고 있는 세계다. 「피어라, 석유!」는 그가 목도하고 있는 세상과 그가 새롭게 시작한 혁명의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찍이 스무 살 혁명의 치기는 버렸으나 쓰기를 통한 아름답고 아픈 그의 혁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중략) …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중략) …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중략) …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중략) …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중략) …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중에서
“‘지금 여기’의 이 아득한 거리감 속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세상의 하루해를 지지고 볶으며 그리워한다. 떠도는 몸들이 벌이는 쟁투의 고단한 흔적들. 그 속에 무언가 ‘쓰는’ 자로 기꺼이 남고자 하는 내 모든 행/불행의 뿌리와 꽃들에 입 맞춘다. 오, 자유!”
- 시인의 말,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 중에서
사랑하는 ‘나들’아, 함께 안녕하기를
글이 두서도 없이 길어졌다. 이쯤에서 결론 아닌 결론, 정리를 해야 한다. 텍스트 바깥의 김선우를 나는 이번에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시인 김선우는 순전히 시집과 소설과 수필이라는 그가 쓴 텍스트들이다. 이번 인터뷰 내내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참 단단한 사람이구나. 당당하다, 당돌하다, 당차다, 일반적으로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들이다. 그런데 이번에 느낀 것은 오히려 ‘단단함’이었다.
그는 등단하기까지 수 년 동안 습작시를 무려 1,000편을 썼다. 그리고 지난 20년 그 수십 배의 글을 써왔다. 그리고 그의 ‘쓰기’는 그가 살아있는 한 지속될 것이다.
“책상 앞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글쓰기의 고통스럼움을 백번 고려하고 남을 만큼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을 사랑한다. 이제 내 모든 신체 사이클은 글쓰기에 최적화됐다. 2008년 첫 장편 소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 2008) 초고를 끝내고 담배를 끊었다. 앞으로도 소설을 계속 쓰려면 ‘건강해야겠구나’ 하는 자각이 들어서다. 두 번째 소설을 쓸 때는 술이 당기지 않았다. ‘글쓰기에 최적인 상태로 내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구나’ 무의식이 나의 몸을 그렇게 변화시키고 있다. 하루에 서너 시간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만큼 쓰고 싶은 게 많다. 요즘은 시간이 너무 아까운 단계까지 왔다.”
누군가는 시인을 일러 견자(見者)라 하고, 누군가는 시인을 일러 현자(賢者)라고도 한다. 누군가는 시를 깨달음[覺]이라 하고, 누군가는 시를 끊임없는 질문이라고도 한다. 김선우 시인은 그 모두를 포괄하며 ‘쓰는 자’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쓰고 또 쓰면서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는 사람.
불교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의 과거 자료를 찾아보면 자주 접하는 단어가 실은 불교와 마르크스다. 그의 가족사와 학생운동이라는 내력에 연유한 것일 텐데, 그의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불교 사유의 방식에서 앞으로 미래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아주 좋은 더불어 삶의 정신을 발견한다. 불교는 물질로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정신적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철학체계, 대안철학이다. 한국사를 통틀어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사상가가 원효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자이자 가장 강력한 사상가라고 나는 그렇게 평가한다. ‘개인 개인들의 자유를 어떻게 스스로 쟁취해낼 것이냐 그리고 자유로워진 개인들이 서로 어떻게 연대해서 좋은 인연으로 더불어 삶의 사회를 추구할 것인가’ 이것이 원효가 꿈꾸던 불국토(佛國土)다.”
붓다의 사자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세상에 나만 잘났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와 나, 세상의 모든 만물, 모든 생명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의 최근 시집, 『녹턴』에서 말하는 ‘나들’이 바로 그런 의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읽을 때 ‘나들’이라고 자주 독해한다
1인칭 복수형이지만 ‘우리’와 다른,
‘나들’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읽는다
- 「詩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 『녹턴』(문학과지성사, 2016) 부분
짧은 시간이었지만 글을 써온 20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이야기와 그의 시편들의 연관을 짚어보면서, 그가 앞으로 보여줄 20년이 더 궁금해진 어떤 하루였다. 그가 ‘나들’의 안녕을 빌듯이, 그의 안녕을 빈다.(*)
에필로그
“손하트하고 함께 찍은 고교생 세 명이 있는 사진… 그 아이들 동해 광휘고 독서반 아이들이에요. 그 중, 정혜원이라는 친구는 작가가 꿈이랍니다.^^ 오래전 제게 감동적인 이메일을 보내주었는데, 특히 『물의 연인들』을 가슴 먹먹하게 읽었다고 하더군요. 동해… 자연의 아이들이라서일까….
『물의 연인들』은 4대강 사업의 무지막지한 폭력이 초발심이 된 소설인데, 고교생이 읽기엔 좀 어렵지 않나 싶은 소설이기도 해요. 그런데 혜원의 메일을 보니, 진심으로 그 소설과 통하였더라구요.
작가 인터뷰 요청을 여러 차례 해와서…. 이번에 겸사 문학캠프에 초대한 아이들이에요. 십대들… 특히나 강원도의 여러 학교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이상하게 찡합니다. 강원도의 아이들에게 뭔가 힘이 될 수 있는 일들을 언젠가 해야 하리… 라고, 막연히 생각하지요.”
- 김선우 시인이 보내온 이메일 전문
마감에 쫓겨 쓰다 보니 아쉬운 글이 되고 말았다. 부랴부랴 디자인실로 원고를 넘기고, 김선우 시인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마침 김 시인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뜨끔한 마음으로 시인의 짧은 편지를 읽다가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미래의 작가를 꿈꾸는 아이들과 꿈꾸는 아이들을 기꺼이 품어주는 작가. 따뜻한 풍경이고 아름다운 동행이다. 그래서다. 예정에 없던 에필로그를 쓴다. 애초에 빼기로 한 사진을 다시 넣고, 김선우 시인의 편지글
전문을 싣는다.(*)- 월간 『태백』 2016년 9월호
세상 몸들의 노동조합을 위하여
- 김선우論 -
심재휘 (시인. 대진대 문창과 교수)
시인들에게 시를 위한 매 순간은 언제나 처음인 낯선 시간이다. 이미 나온 시집 몇 권의 분량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마음의 무게가 기울어진다. 따라서 수많은 찰나의 반응들을 이 짧은 글에서 줄 세워 호명하는 것은 필경 오류를 전재하는 일이므로 마땅치가 않다. 다만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듯, 누구에게나 잠버릇이 있듯, 생각의 버릇과 말버릇을 짐작해 볼 뿐이다.
두 권의 시집을 낸 김선우의 시에도 그러한 면에서 매우 다양하지만 또 어디엔가 기운 마음들이 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가 닿는 마음이 아프고 따뜻하고 맑다. 그리고 웅숭깊다. 서술보다 구술되는 말은 찰지고 넘실거려서 소녀의 사랑 이야기인 듯, 외할머니의 정본 없는 옛이야기인 듯하다. 그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물을 건너고 고개를 넘는다. 그리하여 당도한 곳은 흙냄새 가득한 어느 몸의 신전이다.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그곳을 고향이라고 말한다. 김선우에게 그곳은 대관령을 넘어야 갈 수 있다. 그녀가 자라온, 떠나온, 그러나 영영 떠나지 못하는 어떤 삶들이 거기에 있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영 너머의 그곳은 그러니까 나무에, 물에, 그리고 몸에 새긴 어떤 경전 같은 곳이며 하나의 상징이다.
1. 몸에서 몸으로, 흙에서 흙으로
김선우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몸으로 환산하는 습성이 있다. 이는 단순한 수사로서의 의인법이 아니라 만신론에 깃든 무당의 습성이다. 물론, 대상에 마음을 투사하고 대상과 동화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인에게는 샤먼의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원론적인 단계를 넘어선 듯도 하다. 사물의 소리를 듣고 사물에게 영혼을 불어넣는다. 사물은 물론이거니와 물이나 심지어 허공에도 몸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몸들을 통해 그녀는 사랑을 깨닫고 희생을 깨닫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 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이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것
처음자리에 길은 거였다
ㅡ「빌려줄 몸 한 채」 전문
빈들에 집 한 채 오롯이 서 있다고 해서 보이는 것은 집 한 채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듯싶다. 집을 이루는 많은 건자재들뿐만 아니라 집의 완성을 위해 집과 연계된 것들, 예컨대 허허벌판과 드문드문 나무들과 언제나 그 하늘이 있어 집 한 채라는 생각, 게다가 집이 있어야 바람 소리가 나고 집이 있어야 벌레가 꼬이고 집이 있어서 마을이 생긴다는, 이른바 상생에 대한 고집이 그녀의 시집에는 가득하다.
몸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그러므로 여하한 방식으로 서로 닿아 있다. “시금치 닭 고등어처럼 이 별에 뿌려져/물과 공기와 흙으로 길러졌으니/배냇동기 아닌가”(「숭고한 밥상」)라는 생각은 몸의 수평적 연대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이생에 어긋나면 어느 골짜기 바람이 될까”(「북엇국」)라며 궁금해 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들에게 앞몸과 뒷몸이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전생에서 후생으로 유전하는 만물의 순환은 죽음과 삶이 한 몸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녀의 생명사상을 대변한다. 그래서 “삶이 죽음에게 젖을 물리”(「69-삼신 할머니가 노는 방」)는 풍경을 그녀의 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저한 것은 현생에 기초한 몸들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냐는 재래적 친 자연론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강한 서정을 이룬다. 이점에서 그녀의 성정은 후천적인 환경론과 거리를 갖는다.
봉인을 풀듯 나직한 그림자 적시며
생땅 냄새,
푸른 꽃내음이 훅 끼쳐왔습니다
50억 살 먹은 어리고 푸른 꽃이
50억 년 찰나 동안 피워올린 몸의 향기
라일락이랄지 감꽃이랄지
이윽한 것들의 향기 속에 배어 있던 흙내음이
어린 어미꽃의 몸냄새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가뭄 끝이었습니다
ㅡ 「어리고 푸른 어미꽃」 부분
저 여자, 흰꽃무당버섯의 정원이 되어가는
버석거리는 몸을 뒤척여
가벼운 흰 알들을 낳고 있는 엄마는
아기 하나 낳을 때마다 서 말 피를 쏟는다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
수의 한 벌과 찹쌀 석 되
벽장 속에 모셔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다려온 것이다
ㅡ 「엄마의 뼈와 찹쌀 석 되」 부분
이와 같이 몸들의 수평적 연대와 몸들의 수직적 연계에 대한 경험론적 사유는 김선우가 세상 만물을 아프지만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출발점이자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흙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이 순환의 상상력은 흙과 흙 사이의 과정, 즉 생로병사의 다단한 양상들을 삶의 근원으로서의 대지(大地)와 부단히 연결하는 결과를 낳는다. 생산의 주체로서 땅과, 회귀의 공간으로서의 땅을 바라볼 때에 그녀와 땅 사이에 자주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인류에게 전해내려 오던 땅의 재래적 의미를 환기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포즈가 아닌가 싶다.
2. 性과 聖 사이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선우의 시에 가장 많이, 가장 발랄하게 담겨있는 것은 성(性)상상력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에서 읽어 낸 바이기도 하다. 혹자는 그것을 관능성이나 에로티시즘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여성성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를 이야기할 때 성의 화제는 아마도 빠져서는 안 되는 가장 김선우스러운 부분일 테다. 두 편의 시집에 들어있는 시들의 상당 부분이 여성만의 신체와 여성만의 삶, 이를테면 음부와 자궁, 가슴과 엉덩이, 월경과 임신, 그리고 출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녀가 얼마나 여성으로서의 삶에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무 숭숭 썰어 고등어 찌개를 끓이고 물김치 한 보시기 가득 떠놓으니 된장에 박은 장다리 생각 고향 뜨락을 넘어간다 여문 햇살에 옹기들의 쌔근거리는 낮잠 “저것들도 숨쉬고 있어야!” 만삭의 기억을 쓸어안으며 환갑의 어머니 들창을 여신다
아홉 자식의 어머니는 연중 아홉 달 사리돈을 씹는다 형상 기억합금 소재의 브래지어를 빨다가 나도 문득 아랫도리가 아팠던 적이 있다 비틀어짜 말려도 원상태로 돌아오는 둥근 가슴에 대한 기억……유산의 겨울 이후 파드득, 나의 그곳을 헤치며 날아가는 새는 어디에 머물다 해마다 다시 깃들여 오는 걸까 어머니의 앞섶에 꽂혀 있는 돗바늘, 이제 그 바늘 좀 뽑아 버리라고, 짜증을 내다 고등어살을 뜯어 숟가락에 얹어드린다 “거꾸로 들어 두 시간이나 길을 찾더구나 네 길이 내 몸속엔 없는 줄 알았다” 둥글고 따뜻하던 양수의 기억, 나는 좀더 머물고 싶었는지 모른다
“널 갖고 복숭아가 미치게 먹고 싶었어야” 복숭아를 깎아 무른 쪽을 짚어드린다 달칵거리는 틀니 “저물었어야, 장독을 덮어야지 저녁 진지 드실 시간이구마” 팔년 전 돌아가신 조부님 진지 드리러 어머니 황망히 문간을 나선다 대관령 고갯길에 나부끼는 옷섶, 복숭아 열매가 둥글게 자라는 건 열매가 갖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ㅡ 「둥근 기억들의 저녁」 전문
김선우의 시에는 둥근 것들에 대한 기억이 많다. 생명의 중심으로서 둥근 것은 현실에서 알이나 열매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꽃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저수지나 호수 그리고 바다로 확대되기도 한다. 마침내 그것은 지구와 우주의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에서 무변광대의 원형 우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둥근 것들이 종국에 수렴되는 곳은 바로 자신의 주먹만한 자궁이다. 그녀에게 그보다 더 둥글고 아프고 슬픈 것은 없다.
그러니까 여자의 성은 이성애의 육체적 쾌락이나 종족보존 본능의 사회적 기능 이전의 운명적인 무엇이다. 그 운명은 자궁에 이르는 춥고 어두운 길 하나와 그 길을 바라보아야 하는 빈 집의 시선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많은 길의 상징이나 집의 상징은 그래서 여성의 몸을 지향한다. 게다가, 비록 은근하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약자였던 이들의 존재방식을 떠올릴 때에 여자의 성을 환기하는 그녀의 발언들은 발랄하다가도 우울해지고 순하다가도 그로테스크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김선우가 여성 담론의 전사가 되어버리지 않는 것은 여성성의 상징인 어머니를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구체적 삶으로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포함하여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많은 여자들이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로 확산되더라도 그녀들의 위상이 단지 관념화된 인물에 그치지 않고 다시 지금 이곳의 ‘엄마’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선우에게 어머니는 ‘자연인(自然人) 여자’와 ‘사회인(社會人) 여자’가 합류되는 하나의 접점인 데다가 대관령 너머 지병을 앓고 있는 바로 그 엄마의 육화가 덧입혀진 인물이다. 루카치의 말을 빌면 전형성을 띈 여성인 것이다.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를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ㅡ 「내력」 전문
결국 ‘어머니’는 세상 모든 몸들의 원천이자 회향의 공간이다. 세상의 몸들은 그 샘(흙)에서 나와 그 샘(흙)에서 흘러나온 물에 목을 축이며 서로 연대하다가 연어들처럼 거슬러 돌아간다. 씨앗이었다가 밭을 이루어 숲이 되고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여성의 성은 굳이 대지의 모성성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생명 순환의 터전으로서, 우주의 운행 원리를 지닌 생명의 모태로서 가장 성스러운 자연의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순환, 생명, 질서, 고향이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 얼마나 공허한가. 여성성이 소진된 여인의 쓸쓸한 내력을 온통 젖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머니의 몸’이 다시 평화를 찾지는 못하였으리라.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의 진정성이 없었다면 어머니의 성은 단지 황폐한 밭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녀가 관능성이나 여성성을 염두에 두고 시를 쓰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생명의 출구이자 궁극적 회귀의 공간으로서 여자의 몸이 聖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소모되는 무엇이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완경」), 그리고 세상을 창조한 신들의 거처인(「민둥산」) 여자의 성, 그것은 우리가 회복해야할 자연의 순리이자 우리가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이다. 이 거대한 경전을 그러나 김선우는 거창하게 읽어내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 시의 가장 큰 매력이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대관령 너머의 사소한 일상을 그리며 그녀는 지금도 고향집 문 앞에 서서 엄마를 부르고 있을 뿐이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07년 봄호 ㅡ통호 제4호
Massimo Ranieri — Mag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