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는 동해안 해파랑길 구간 중 해안선 길이가 가장 짧고, 면적도 12개 시·군 중 제일 좁다. 대신 물이 흔하다. 설악 능선을 담장 삼아 양양, 인제, 고성이 경계하고 미시령과 대청봉 사이 네댓 개의 수원이 계곡을 타고 내려와 속초 시내를 적시고 영랑호와 청초호로 흘러 든다. 그리고 그 물들은 모두 동해로 든다.
속초는 청초호에서 비롯된다. 사실 설악이야 근방 강릉이며 양양, 인제가 공유하는 큰 산이지만 청초와 영랑 두 호수는 오늘의 속초시가 태어난 자궁이다. 청초호는 좁고 긴 사주에 의해 동해와 격리된 석호로 북쪽은 동해에 열려 있었다. 따라서 외해의 풍랑을 피해 선박들을 정박시키는 일이 조선조 수군만호영 시대부터 있었다. 항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건 일제 때다. 속초 토박이들은 청초호가 동적인 아버지이고 영랑호는 정적인 어머니 호수라고 말한다. 생김새며 생태학적 기능으로 미루어 볼 때 일리가 있다. 속초는 두 석호를 빼고 말할 수 없다.
고성 청간정으로부터 약 4킬로미터 토성면과 경계한 용촌천을 지나면 속초시다. 장사항까지는 1.5킬로미터. 이 길은 차량이 질주하는 중앙로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해안길을 살폈지만 군부대가 있다. 장사항에서는 해마다 여름 9일간 ‘오징어맨손잡기축제’가 열린다. 도로를 횡단해 ‘영랑호식당’ 앞에서 호반길로 접어든다. 신라시대 영랑, 술랑, 안상, 남랑 네 화랑이 서라벌에서 금강산으로 수련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영랑만 이곳의 풍광에 취해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는 영랑호가 이름을 얻은 내력이다. 둘레 8킬로미터, 면적 30만 평의 호수 둘레길은 사람의 손길로 빚은 다듬어진 길이다. 그 길에서 만난 설악의 빛나는 능선은 영랑이 이곳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를 알게 한다. 천 년 전 한 사내가 가던 길에서 멈춰 서서 나도 오래 길을 떠나지 못한다.
영랑호 입구로부터 4킬로미터 지점, 범바위 일대. 안타깝게도 자연이 빚은 석호의 천품(天品)을 90년대 중반에 들어선 ‘영랑호리조트’가 깔아놓은 9홀급 골프장이 천품(賤品)으로 만들고 있었다. 범바위 뒤에 타워콘도가 호를 굽어보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범바위의 기운이 등 뒤 콘도에 의해 눌리고 있다.
영랑교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바다로 향한다. 속초 앞바다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장사항에서 속초등대까지 1.5킬로미터 구간 해안에 테트라포트(일명 삼발이 방파제) 칠갑이다. 해안침식은 파향(波向 ) 변화, 하천 정비와 모래 공급 차단, 배후지 개발이 원인이다. 속초의 경우, 무분별한 방파제 건설이 해안침식을 가속화시켰다. 방파제 건설이 파랑(波浪) 흐름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물결이 너울로 해안을 덮치면서 시멘트 구조물을 뜯어내고 있다.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해안을 테트라포트, 잠재, 도류제와 같은 시설로 뒤덮고 그 영향이 다시 해안을 좀먹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속초의 병(病)이다.
속초 8경 중의 1경, 등대 전망대를 오른다. 고성 쪽 해안으로부터 영금정(靈琴亭)과 동명항, 아바이마을 거쳐 제 너머로 설악산을 배경으로 삼은 청초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영금정은 파도가 석벽에 부딪칠 때면 신비한 음곡이 들려오는데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 같았다고 전한다.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이 일대를 비선대(秘仙臺)로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일제시대 속초항개발로 파괴되어 옛 흔적을 가늠할 길이 없다. 그 허전함 달래고 옛 명성 기억하려 정자 하나 섰다. 여기서 보는 일출이 아주 그만이란다.
동명항을 돌아 아바이마을로 향한다. 중앙시장 삼거리 우리은행 앞에서 직진하면 중앙동과 청호동을 이어주는 갯배가 있다. 속초에 와서 아바이순대를 맛보지 않고 갯배를 타보지 않았다면 헛보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 도선비 200원을 내고 그 행열에 합류한다. 불과 60~70미터의 뱃길이지만 청호동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시작과 끝이다.
청호동을 아바이마을이라 부른다. 1.4후퇴 때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내려왔던 피난민들이 청초호와 속초바다가 만든 모래톱에 정착해서 만든 실향민 마을이다. 함경도 출신들이 많았다. 당시 주민들은 폭격으로 침몰한 소형 함정의 옆구리를 뜯어 거처를 마련했다. 팍팍했던 세월은 늙은 피난민 아버지들을 따라 사라지고 텔레비전 연속극이며 『1박2일』의 흥행에 기댄 오징어순대, 아바이순대 가게들이 빼곡하다.
마을 뒤편 청호해수욕장을 따라 속초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덕장4길을 따라 테트라포트 깔린 방파제가 이어지고 외옹치의 덕산봉수 언덕이 보인다. 속초해수욕장 송림길을 접어들 때 동행들이 속초시의 개발행정에 불만을 토로한다. 지금 속초 시민사회의 논쟁거리는 ‘청초호 인공섬조성사업’이나 ‘대청봉 케이블카 설치’ 같은 개발의제들에 관한 것들이다. 지역 시민환경단체들은 이미 청초호의 3분의 1이 매립되어 유원지로 개발된 마당에, 가까스로 지켜지고 있는 청초호 경관과 생태환경적 기능이 그런 개발사업들로 크게 타격을 입을 거라 본다. 시의회가 불필요한 사업으로 보고 2010 예산을 전액 삭감했는데도 시가 13억 원의 국비와 도비를 반납하기 어렵다며 일방적으로 사업을 발주한 상황이다. 속초의 아픔이다.
속초해수욕장 바로 옆 외옹치해수욕장 뒤쪽에 5만여 평의 옥답이 넓게 펼쳐진다. 이 장쾌한 풍경도 주변지 개발로 미래가 어둡다. 언덕길을 넘어서자 단청을 입힌 장승 두 기가 마중한다.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이 아니라 ‘바닷가 솟대마을 외옹치’, ‘속초바다가 보고 싶다’를 새긴 장승이다. 이윽고 대포항이다. 대포항은 속초 남쪽 관문으로 횟집이 즐비하다. 인근 바닷가에서 정치망으로 잡힌 횟감이 대포항을 통하여 처리되기 때문에 생선회를 즐기려는 방문객이 많다. 속초시는 그들을 위해 대형주차장을 깔았다. 그 바람에 속초 해안의 한 귀퉁이가 또 사라졌다. 자동차로 말미암은 이 변화, 어쩔 수 없는 노릇일까. 다시 7번 국도와 만나 어수선한 속초 해안을 벗어난다.
(월간 함께사는 길 2011년 2월호 _)
세노야 세노야 - 최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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