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자동차로 8시간을 쉼 없이 달렸다, 고성 통일전망대. 더는 못 간다. 사람의 내왕은 막혔지만 다른 것들은 자유로이 오간다. 백두대간과 동해가 벗하는 그곳에서 바람과 새와 바다는 남북이 따로 없다.
남한 최북단 명파리를 빠져나와 대진항을 거쳐 화진포로 향한다. 명파리의 ‘금강산슈퍼’와 ‘평양면옥’은 금강산관광 중단 이후 을씨년스런 한 조각 풍경이 됐다. 전국적으로 ‘길 걷기’ 붐이 일자 고성군이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차용한 ‘관동별곡길’을 선보였다. 그 길 곳곳에서 60년대 여성보컬 이시스터즈의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 흘러나온다. 40년 전 노래지만 향수는 새롭다. 강원도도 바닷가의 낭만을 상품화시켰다. ‘낭만가도’로 명명된 그 길은 고성군 대진에서 삼척시 원덕까지 7번국도 구간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입구에 이정표 하나 눈길을 끈다. 이승만과 김일성 그리고 이기붕의 별장이 화진포 한 호수에 있다. 별일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부터 방문했다. 때마침 이대통령은 프란체스코여사와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불쑥 물었다. “왜 그렇게 살았냐고?” 그는 침묵했다.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별장에 가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들도 침묵했다.
그 길에 해당화가 만개했다. 호수를 낀 정갈한 길이 거진항으로 이어진다. 금강송 도열한 길을 걷다가 7번국도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나선다. 거진등대 가는 길은 동해로 곤두박질치는 구릉지대 능선길이다. 망망한 바다가 수평선에 누웠고 해안도로는 파도처럼 굽이친다. 그 길 곳곳에서 자주 발걸음 멈춘다. 등대는 질감을 달리 하는 청색계열의 바다와 하늘을 대비시키며 오롯하다. 그 아래로 거진읍이 보인다. 방파제에 싸안긴 듯한 거진항. 20리 밖 휴전선의 긴장감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딴 나라처럼 보인다. ‘거진횟집’에서 매운탕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니 어느새 어둠결이다. 음력 열사흘 밤, 항구에 핀 불빛이 달빛과 함께 물결에 어린다. 한 여인네가 치성을 드린다. 소박한 제물을 두고 올리는 이 땅 어미들의 간절한 바람이 바다처럼 깊다, 넓다. 언덕 윗마을 가로등들이 꽃밭처럼 피었다.
새벽녘, 먼동 터오는 바다에서 밤 새워 조업했던 배들이 항구로 든다. 명태 소식이 궁금하다. 자리를 박차고 선창으로 나섰다. 이 계절의 상징이자 이 고장, 거진의 명물인 명태는 눈 씻고 봐도 찾을 길 없다.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더 이상 동해에서는 잡히지 않는단다. 원래 원산이 주산지였던 명태잡이는 한국동란 이후 고성에서 맥을 이었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씨가 말랐다. 기후변화를 원인으로 꼽지만 노가리까지 싹쓸이하는 남획도 한몫했다.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진 것도 문제지만, 누구도 명태가 자취를 감춰 가면서까지 던진 경고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러시아산 동태나 일본산 생태를 먹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는 걸까? 사라진 명태는 이제 명태의 고장으로 이름값을 지키려는 고성군의 ‘명태축제’로만 살아있다. 명태 대신 듣도 보도 못한 남방어족들이 그물에 흔하다. 동해가 낯설다.
송포리를 거쳐 반암리로 들어선다. 군 작전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된 해안선 대신 북천 하구까지 이어진 방풍림을 따라 펼쳐진 들길은 맛이 있다. 문득 한 사내의 죽음이 떠올랐다. 1982년 WBA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챔피언의 펀치에 쓰러져 끝내 이승을 떠난 복서. ‘가난은 나의 스승’이라던 영원한 도전자 김덕구의 고향이자 묘소가 이 마을에 있다.
다시 7번 국도를 따라 합축교(合築橋)로 향한다. 합축교 못 미쳐서 진부령 가는 46번국도와 화진포 방향 7번국도 갈림길이 나온다. 거진읍과 간성읍을 연결하는 합축교는 다리 상판을 떠받치는 교각 17개 중 9개를 남이, 8개를 북이 만들었다. 원 이름은 북천교(北川橋)로 남북이 합쳐야 한다는 뜻에서 ‘합축교’로 불리게 됐다. 그 다리 상류에 백두대간 능선이 구불거린다. 다리 아래 갈대밭이 한 폭 풍경화다.
다리 건너 관동별곡길 제5코스 안내판이 있다. 간성읍에 있는 남천교까지 7.7킬로미터, 화진포에서 20킬로미터 지점이다. 가진항까지 4.1킬로미터를 남천 옆 농로를 따라 이동한 뒤 다시 가진항에서 송지호까지 6.6킬로미터를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한다. 해안철책을 따라 20미터 폭의 모래벌판이 이어진다. 공현진 지나 7번국도 건너 북방식 전통가옥 보전지구인 왕곡(旺谷)마을로 든다. 고갯길 넘어서자 골 안에 기와집과 초가집들 옹기종기 들어앉았다. 전쟁도 피해 갔다는 왕곡마을은 인근 두백산, 호근산 등 다섯 개의 큰 산에 가려 난을 피할 수 있었다. 국도변에서 벗어난 마을이다 보니 70년대 새마을바람도 피해 갔다. 1996년 고성산불조차 비켜 갔다니 그 터가 새삼 귀해 보인다.
길은 송지호로 연결된다. 둘레가 6.5킬로미터 송지호는 6000년 전 하천 퇴적과 바다 파랑에 의해 생겨난 사주가 퇴적을 거듭해 입구가 막히면서 생성된 석호다. 민물과 짠물이 섞인 송지호에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또 그들을 먹이로 하는 큰고니나 흰꼬리수리, 개리 등 겨울새들이 해마다 찾아온다. 송지호를 벗어나 봉수대-삼포-자작도-백암-교암을 주파한다. 작지만 물빛 하나만은 으뜸인 해수욕장 하나를 지나자 고성 팔경(八景)의 하나인 천학정이 서 있다. 여기서 아야진항과 마주하여 설악 미시령 자락에서 발원한 천진천의 하구 쪽, 바다로 돌출한 언덕에 청간정(淸澗亭)이 있다.
누가 다녀갔던가. 두 전직 대통령이다. 이승만의 자필 현판 하나, 최규하의 다소 싱거운 한시 ‘과시관동수일경(果是關東秀一景, 과연 관동의 빼어난 경치로구나)’ 한 편 걸려 있다. 남으로 시선을 두니 속초가 코앞이다. 쉼 없이 걸어온 고성 해안길 130리. 400년 전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정철은 이렇게 노래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는 지난 2011년1월부터 2012년 4월까지 월간 '함께사는 길'에 연재했던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노선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환경적 관점에서 동해를 바라보았고 그 길에 얽힌 사연을 담고자 했다. 종주는 2010년 여름에 이루어졌고, 이후 매달 글을 쓸 때 마다 확인 답사가 있었다. 지면의 한계가 있음을 밝힌다. 하여 주마간산을 경계하며 글을 작성했다. 하마 3년 전이다.
전체 길이는 처음의 688km보다 12km 추가되어 해파랑길은 총 연장 770km에 달하는 도보여행 길로 동해의 시작점인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을 1코스 기점으로 하여, 강원도 고성 최북단인 통일전망대를 50코스 종점으로 하는 국가 트레일이다. 2009년에 시작하여 2014년에 완전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출처 다음블로그 홍이 아뜨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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