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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13.-부산1. 고리에서 송정까지

by 이성근 2013. 6. 13.

 

고리의 옛이름은 ‘불살개’다. 새벽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갯가의 아름다운 광경을 뜻함인데, 난데없이 핵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지명이 가지는 본래 뜻을 오역(誤譯)했다. 그러면서 핵발전소의 입지를 필연적 인 듯 아전인수 하여 해석했지만 정작 지역민들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암담한 사실은 세상을 뒤흔들었던 후쿠시마핵발전소 사고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동해안에는 핵발전소가 계속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전보다 반핵의 분위기는 확장되었지만 탈핵의 길은 아직 요원하다.

월내역을 뒤로하고 포구로 가는 길, 이 지역 출신 보부상 우두머리 배상기의 영세불망비기가 발목을 잡는다. 1904년에서 1917년 세워진 좌우사반수배상기휼상영세불망비(左右社班首裵常起恤商永世不忘碑)를 비롯하여 세 개의 비가 도로변 담장 아래 서 있다. 비록 그 신분이 미천하여 주목받지는 못했을 지라도 그 어떤 불망비보다 오래 기억되는 삶이었으리라. 어쩌면 기장 구포를 연결하는 길은 이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 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여 그들이 등짐을 지고 걸었던 그 시대의 해안을 쫒아 길을 재촉한다.

기장군의 해안은 그 길이가 월내에서 송정까지 약 40.7km 쯤 되는데 대체로 단조롭다. 옛부터 아홉 개의 포구가 있어 연근해 어업이 발달했다. 아홉 포구는 화사을포(火士乙浦)-고리, 월내포(月來浦)-월네.임랑, 독이포(禿伊浦)-문오동(文五洞).칠암.신평, 동백포(冬柏浦)-동백, 기포(碁浦)-이동, 이을포(伊乙浦)-일광.이천, 무지포-대변, 공수포(公須浦)-공수, 가을포(加乙浦)-송정을 말한다. 이중 송정은 조선 고종때 이곳 출신으로 승지벼슬을 했던 노영경(盧泳敬)이 그 출신지인 갯가를 뜻하는 가을포를 숨기려는 뜻에서 송정으로 개명하였고 이로 인해 가을포는 차성 아홉포(九浦)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송정은 기장군 소속이 아닌 해운대에 속해 있다.

월내리와 임랑리는 옛날 같은 권내의 마을이었고 월내해수욕장과 더불어 임을랑포(林乙浪浦)라고 불렸는데,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이다. 수려한 송림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을 두고 마을 이름을 임랑이라 하였고,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월출경이 좋아서 월호라 한다고 자랑하지만 민박집이 줄지어 선 임랑해수욕장의 침식은 심각한 수준이다. 임랑교를 건너 31번 국도변 문오성길 입구 까페 하눌타리에서 독이포길로 이동한다. 옻을 칠한 것처럼 바다는 검은 빛으로 일렁인다. 칠암(漆岩)이다. 돌샘횟집 주인장 최성호씨 내외가 손님이 주문한 회를 다듬고 남은 내장을 테트라포트에 올려두자 순식간에 갈매기들이 모여들어 한바탕 장관을 이룬다. 서로 먼저 먹으려고 쟁탈전이 벌어 졌다. 멀리서 파도가 물굽이를 세워 달려들었다.

 

파도는 신평 해안소공원을 지나 고리에서 쫒겨난 주민이 마을을 이룬 온정, 자연발생유원지 갯바위에서 작열했다. 1km 남짓한 이 해안은 송림을 배경으로 몽돌과 기암이 보기 좋은 기장 해안의 원형을 보여준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다 기포(碁浦) 지나 한국유리 뒤편 담벼락을 따라 가면 일광 이을포가 나온다. 월내에서 13km 쯤 되려나 일광천 하구에서 학리까지 해안은 반원형을 그리며 사빈을 형성하고 있다. 넓은 백사장과 강송정 포구 위를 나는 갈매기의 군무가 아름다워 평사낙구(平沙落鷗)의 승경으로 차성팔경의 하나로 칭송된 곳이다. 이 일대를 배경으로 작가 오수영이 소설 ‘갯마을’을 썼다.

멀리 기차소리 바람결에 들리고, ‘덧게덧게 굴딱지가 붙은 돌담에 낡은 삿갓 모양 옹기종기 엎딘 초가들이 있는 마을에 스물 셋 청상과부 ‘해순이’ 살았던 마을이지만 그 흔적은 소설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에나 그 무대는 학리 쪽이 옛모습을 더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학리를 지나 죽성 가는 길이 끊겨버렸다.

주민들의 말로는 90년대 중반까지는 다녔다는데 이후론 성묘도 제대로 못간다며 ‘덧정 없어 했다. 그러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평당 2원~3원에 땅을 팔았던 자신들의 무지를 한탄했다. 현재 일대 백 수 십만 평의 부지는 신앙촌사람들이 ’신앙의 불씨 온전히 간직‘하며 살고자 외부인의 출입이 일절 통제하고 있다. 지난해 기장 군수와 길을 열어 볼 작정으로 현장을 찾았지만, 불발에 그쳤다. 대신 심하게 훼손된 해안을 보고 분노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사유지를 무턱대고 출입할 수는 없는 일이라 하는 수 없이 기장군청을 돌아 죽성으로 향한다. 다들 볼멘소리 한마디씩 남기는 코스다.

기장읍에서 죽성 바닷가까지 십여리, 광해군 8년(1616) 이이첨(李爾瞻)의 전횡과 부정이 횡횡하던 시절, 한 젊은 유생이 차마 그 꼴을 보기 싫어 한마디 했던 것이 괘심죄에 걸려 유배에 들었다. 서른 살 고산 윤선도였다. 아버지는 관직을 파직당하고, 이듬해는 죽음까지 전해졌다. 그렇지만 달려가지 못했다. 한맺힌 세월, 그가 즐겨 찾았음직한 황학대는 이름만 남았다. 죽성천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에는 누런빛의 크고 작은 바위가 듬성덤성 놓여있다. 해안을 굽어보기 위해 국수당으로 오른다. 수령 300년의 여섯 그루 해송이 병풍처럼 당집을 에워싸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늘에 제를 올리던 국수당은 서해와 동해 두 곳이 있는데, 동해의 국수당은 죽성에 있다.

국수당을 내려와 월전으로 향한다. 그 길에 모 방송사가 드라마 촬영장으로 세운 교회가 발길을 붙잡는다. 이국적 풍취의 셋트장은 죽성의 하늘과 바다와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죽성을 방문하면 꼭 한번 들려보길 권하는 죽성교회는 정작 찾는 이들이 없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무려 49번이나 형무소 생활을 했던 항일운동가 최상림 목사가 세운 죽성교회는 마을 가운데 있어도 모남이 없다. 골목을 빠져 나오면 월전포구가 있다.

해안길 대신 공동묘지가 있는 대변고개를 넘어 대변항으로 들어선다. 한창 매립이 진행중이다. 예전에는 일대를 통털어 무지포(無知浦)라 불렀다. 기장 구포중 가장 큰 포구로 세미(稅米)를 저장하는 창고인 대동고(大同庫)와 수군 주사(舟師:船軍)가 주둔했었다.

바다쪽으로 눈을 돌리면 축구공에서 마징가젯트, 젖병모양 등 등대가 파격적이다. 헌데 이곳은 삼성대, 황학대, 시랑대와 더불어 기장 4대 명승지로 이름난 적선대(謫仙臺)가 있었다. 신선이 유배 온 곳인데 어디쯤인지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적선대에는 파도가 허리를 굽혀(揖) 밀려 온다는 뜻의 읍파정(揖波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기막힌 아이러니다. 몰려오는 파도를 보기 위해 정자를 세웠던 옛날과 그 파도를 막기 위해 축조한 방파제가 한 지역에 존재한다. 2km 정도 걷다보면 오랑대 초입이다. 갯바위가 해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살짝 굽이치는 맛이 일품인데 동부산권 관광단지 개발이 이 풍경을 지우고 있다. 안타까움에 속이 탄다.

군부대를 지나 국립수산과학원 담길을 따라 용궁사에 이른다. 해안 바위에 크고 작은 소망탑을 쌓았는데 무수한 그 돌탑은 웬만한 바람에도 끄덕없다. 그나저나 참 빌 것도 많고 기원할 것도 많다. 만족을 모르는 욕심의 흔적이자 이기심의 발로다. 도시가 가까울수록 욕망이 넘쳐난다. 서둘러 용궁사를 벗어나 시랑대로 간다. 시랑대는 영조때 이조참의로 있던 권적(1675~1755)이 기장으로 좌천되어 왔다 이곳의 풍광에 심취하여 바위에 7언체의 시등을 금석화시켜 놓은 곳으로, 신라 때 수도하던 스님과 용녀의 아픈 전설이 전하고 있다. 어쨌든 시랑대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기장사람들이 자랑할 만큼 뛰어난 경관을 가졌다. 시랑대길은 기장해안길의 백미다. 특히 주부끝, 공수로 이어지는 숲길은 호젓하면서도 상쾌하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주부끝에서 만나게 되는 그림도 흡족하다. 골골이 다 이쁜 해안이다.

내쳐걷자 공수포가 마중을 나온다. 이전에 비오리가 많아 ‘비오개’로도 불린 공수포는 고려시대 때 출장중인 관리의 숙박이나 접대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밭이 있던 공수전(公須田)에서 유래한다. 2003년 아름다운 어촌 100선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도로변에는 기장의 명물인 짚불곰장어구이집이 즐비하다. 1km를 더 가면 송정이다. 구포의 마지막 포구인 가을포(加乙浦)가 저무는 햇살에 성큼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