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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10- 울산의 번영과 상실

by 이성근 2013. 6. 13.

 

울산의 시작은 31번 국도 신명휴게소부터이다. 경주로부터 이어져온 해안의 풍광은 동해 어느 바다와 견주어도 손색없다. 정자항까지 약 5km. 해안은 검은 암초들을 칼날처럼 세웠다가 포구를 품기도 하고 백사장을 풀어 놓기도 했다. 동대산에서 발원한 신명천이 모래를 공급하는 해안은 지금 갈림길에 섰다. 신명천을 경계로 경주쪽은 들이 온전한 반면 울산쪽은 강동. 정자해수욕장 뒤편은 리조트위락시설 공사가 한창이다. 안 그래도 야위어 가는 해안은 이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예전과는 다른 환경을 해안은 강요받을 것이란 것이다.

 

강동 화암마을 앞 검고 긴 바위덩어리인 주상절리를 본다. 단면이 육각형 내지 삼각형으로 된 긴 기둥 모양의 바위가 겹쳐져 있는 특이 지질의 하나로 화암마을 해변 일대에 있는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약 2,000만년전)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Lava)이 냉각하면서 열수축 작용으로 생성된 냉각 절리이다. 생김새는 수평 또는 수직 방향으로 세워진 다량의 목재더미 모양을 하고 있다. 동해안 주상절리 가운데 용암 주상절리로는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인 ‘화암(花岩)’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주상절리 옆에는 곽암이란 미역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允雄’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는데, 고려개국 공신 박윤웅의 공훈을 기려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가 새긴 것이라 한다. 프린스호텔을 돌면 강동. 정자해수욕장이 연달아 이어진다.

정자항 입구, 귀신고래 두 마리가 솟구쳐 올라 등대가 되었다. 가로등은 돌고래로 장식했다. 하지만 정작 진짜 고래는 볼 수 없다. 문득 부산일보(2011.10.7)의 웃기지도 않는 기사 한토막이 떠올랐다. 고래들이 년간 2~3톤 가량의 오징어와 청어, 멸치를 잡어 먹어 어족 자원 감소에 따른 어민의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장보호 차원에서 혼획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바다가 가난해지는 이유를 고래탓으로 돌리는 그 인사의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

멸치젓으로 유명한 판지를 지나 북성마을과 제전항을 거쳐 우가포로 하여 당사로 내려선다. 이 해안길은 얼마전 북구청이 만든 ‘강동사랑길’로서 信, 生, 愛, 情, 學 등7개의 테마를 가지고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다.

 

1027 지방도가 지나는 구암 노변에는 펜션과 민박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다. 담벼락에 ‘민박’이라고 페인트로 갈겨 쓴 그 집 앞 마당에는 늙은 내외 그물코를 손질 중이었다. 반면 펜션으로는 말끔하게 생긴 자가용들이 들락날락이다. 민박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펜션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펜션이 마을 가운데 들어서면 줄줄이 들어서고 마을은 시나브로 원형을 잃고 만다. 그게 대세라고 하지만 이 또한 불만이다.

 

대도시에서만 자본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 한적한 어촌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럼으로 인해 공동체가 담벼락 무너지듯 해체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그들이야 작정하고 방을 빌려주는 것으로 업을 삼는 반면 민박은 방치는 것이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참한 노릇은 국도변에서 이런 장면은 너무 흔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도로를 벗어나면 울산시가 자랑하는 주전 몽돌해안이다. 운곡천을 경계로 남쪽은 동구고 북쪽은 북구청이 관리한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도 두 개다. 순전히 방문객의 편의를 위했다기 보다 북구청도 주전해안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상징하는 화장실이다. 전체 길이 1.5km중 3분1이 북구청 관할 해변이다. 철지난 바닷가, 동행했던 울산환경운동연합 김장용 대표가 하마 흘러간 세월을 꺼집어낸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갑갑할 때면 즐겨 찾았다며 몽돌해안을 제대로 보려면 날이 저물고 어둠이 짙어 질 때라고 했다. 몽돌밭에 퍼질고 앉아 귀를 기울이면 파도가 들고 날 때 마다 몽돌이 구르는 소리가 그렇게 운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했다. 몽돌 대신 모래가 드러난 주전몽돌해안은 그만큼 울산의 해안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주전을 지나면서 해안은 빈틈없이 매립되었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골리앗크레인이며 타워 크레인, 기중기들이 빼곡하다. 울산의 상징이지만 울산의 상실이다. 현대중공업 담벼락을 따라 4km를 걷다보면 이 도시가 ‘현대왕국’이라는 느낌을 자연스레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울산은 현대가 없으면 왕창 무너질 것 같은 도시다. 봉대산을 넘어 서면 아파트에서 학교, 일터, 병원, 호텔에 이르기까지 온통 현대다. 끔찍한 일이다.

일산해수욕장을 돌아 대왕암공원으로 향한다. 대왕암공원은 공업화된 거대도시 울산의 섬 아닌 섬이다. 경주 토함산의 말단인 이곳의 산지 자락 대부분 바다와 만나지 못한 채 늘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다로의 접근이 봉쇄된 상태에서 방어진 순환도로를 따라 일산으로 향한다.

도로의 우측에는 한창 공업도시로 울산이 발돋움할 무렵 살기 위해 울산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의 거처가 있던 만 세대 아파트를 대신하여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됐다. 번덕사거리에서 일산마을로 들어선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통행할 수 있는 도로에는 울산의 번영과는 거리가 먼 일산마을이 수많은 골목을 숨긴 채 숨박꼭질을 한다. 담장 너머 대청마루가 보이고 가족의 흑백기념사진이 오래된 시계와 나란히 벽을 장식하고 있다. 손 때 묻은 세간은 아직은 사람이 산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가난을 강요당하는 시절이다. 해안으로 나서자 지금껏 보아 왔던 동해안의 그 많은 해수욕장과는 전혀 다른 얼굴의 일산해수욕장이 앞 뒤 좌우 기중기와 크레인을 배경 삼아 기묘한 조화로 외롭게 펼쳐져 있다.

 

일산진(日山津) 마을 끝에는 어풍대(御風臺)가 있다. 어풍대는 임금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 해 붙여진 이름으로 신라왕들이 하계휴양을 왔던 곳이다.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당시 꽃나루라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화진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다. 발길을 돌려 반도처럼 바다로 돌출된 대왕암공원으로 향한다. 1934년 일제는 이곳을 군사기지화 하기 위해 주민들을 대거 부역으로 동원해 해송을 이식했는데 대왕암에 깃든 황룡의 기를 꺽는 한편 군기지를 은폐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해서 일각에서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송림을 베어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글쎄다.

 

아무튼 숲의 끝에는 울산의 끝임을 뜻하는 ‘울기(蔚埼)등대가 있고 바다 쪽은 기암절벽과 우뚝한 바위들이 얽히고 섥혀 있다. 대왕암이라 부르는 곳이다. 혹은 용추암이라 부른다. 동해의 용이 승천하다가 이 바위에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때부터 바위의 빛이 용의 피로 인해 주홍빛이 됐고 명칭도 용추암이 됐다고 한다. 조류가 센 곳이어서 하얀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절경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 절경의 중심부까지 건너간다. 그냥 두었더라면 해 본다. 이런 식의 길 내기 끝은 무엇일까. 만족을 모르는 욕구들은 늘 또 다른 배설을 동반한다.

 

길은 방어진쪽으로 이어 진다. 에나 해안을 따라 조붓하게 열린 이 길이 편하다. 해송과 억새가 핀 해안가 황토길은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았지만 걷어 본 사람 열이면 아홉 만족한다. 슬도에 방파제를 달았다. 방어진 항으로 들어오는 파도를 막아주는 섬으로 구멍 숭숭 뚥린 바위에 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딫힐 때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슬도(瑟島라) 했지만 거문고 소리는 듣지 못했다.

 

성끝마을을 나서면 오징어잡이 배 가득한 방어진항이다. 해안은 다시 현대중공업 제2공장과 현대미포조선, kcc울산공장, 현대하이스코, 현대자동차 에 의해 막혔다. 문현삼거리에서 성내삼거리를 거쳐 9km를 공장 담벼락이나 담벼락 넘어 크레인이나 골리앗을 보며 걸어야 한다. 고역이다. 태화강이 울산만에서 흐름을 마감하는 곳이지만 주변의 풍광은 삭막하다. 아이러니 하게도 날이 저물자 그 삭막한 풍경들은 빛을 내면서 그런대로 봐 줄만하다는 사실 앞에 당혹스럽다. 더구나 그 땅은 공해로 정든 터를 빼앗기고 떠난 사람들의 한이 서린 곳 아니던가. 어둠이 짙어 오는 명촌대교를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