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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14. 에필로그 : 송정에서 오륙도까지

by 이성근 2013. 6. 13.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14 에필로그] 남해로 열린 동해의 마지막 여로

 

해파랑길의 마지막 구간, 송정에서 구덕포로 가는 길은 좀 민망한 길이다. 특히 어둠이 내리면 도로변 가득 아베크족들이 진을 치고 있다. 진한 사랑도 마다않는다. 방해받지 않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자동차 안이라는 사실이 딱한 노릇이긴 하다만, 길을 차에게 빼앗기고 사람들은 길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길은 사람을 위한 것, 도로는 자동차를 위한 것!’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1킬로미터가 좀 넘는 ‘바다가 속삭이는 길’을 걷다가 신선장 횟집 뒤편에서 구덕포의 역사를 말해주는 300년생 소나무를 만났다. 대견하다. 잘생긴 나무였더라면 진작 베어졌겠지만 못나고 뒤틀린 덕에 지금껏 살아 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300년 와송은 오늘의 구덕포를 지키고 섰다. 길은 은성횟집 뒤편 동해남부선이 지나는 철길 아래 담장길로 이어진다. 굴다리를 빠져나와 초병들이 이용하던 참호길을 따라 이동한다. 수평의 바다 조망이 수직의 굽어보기로 바뀐다.

 

청사포는 1980년대까지도 오지였다. 지금처럼 해안에 모텔과 횟집이 없었다. 땅을 이용하는 건 자연에 순응하는 소박한 형태만 있었다. 신기마을은 바다와 산에 한적하게 묻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의 왁자지껄로 변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저 값싼 치장이 마을을 도리어 한적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옛 모습을 지켰다면 다른 의미에서 이 마을은 붐볐을 것인데. 안타까움에 탄식이 인다. 수백 년 묵은 소나무들이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일러주며 수런대고 있었다.

 

철길 건너 청사포에 다다르자 백등대가 손짓한다. 누군가 등대 벽면에서 매직으로 이해인 수녀의 『바다새』를 옮겨 놨다.

 

 ‘이땅의 어느 곳 /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바다로 온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 까지 온거야…’

누군가 저 시를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싶다. 발길 돌려 미포로 향한다. 문텐로드와 이어진다. 달빛을 받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안정을 찾게 하자는 취지에서 문텐로드라 했지만 그 이름에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시비를 건다. 벚나무 테크길을 따라 내려오면 해운대의 바다가 활처럼 휘어져 있다. 멀리 오륙도와 이기대 해안까지 보인다. 동백섬 옆 한 덩이 마천루가 솟았다. 해운대의 번영처럼 보이나, 정작 부산사람에게는 낯선 곳이다. 1000년 전 최치원 선생이 급변한 환경에 놀라 동백섬에 각자(刻字) 해둔 ‘해운대’를 걷어 갈 판이다.

미포육거리를 내려서면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이 클로즈업 된다. 몰려오는 해일 대신 오륙도가 수평선을 물고 솟아오르는 풍경이 일품이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광안리해수욕장까지의 해안길은 심심치 않다. 부족함이 없는 편의시설과 다양한 볼거리, 이벤트가 해운대해수욕장의 명성을 가늠케 한다. 여름이면 해운대는 말 그대로 ‘사람을 부르는 곳’이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실은 사람 구경이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뉴스의 첫 머리는 해운대 피서 인파의 규모다. 달착지근한 선크림 냄새가 진동하고 낮과 밤이 끈적끈적하다. 어쩌면 그 끈적거리는 욕망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동백섬을 돌아 오거리에서부터 요트경기장 가는 길은 주객이 전도된 길이다. 해안은 여전히 차량 빼곡한 주차장이다. 예전 이 바다는 거대한 멸치떼를 불러들였다. 멸치만큼 많은 멸치잡이 배가 밝힌 불이 밤바다를 금빛으로 출렁이게 했다. 그 풍요가 좌수영어방(左水營漁坊)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2호)를 낳았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을 있게 했다. 그 시절 돛단배 대신 오늘날 수영강 어귀에는 날렵하게 생긴 요트들이 계류돼 있다. 수영강을 건넌다.

교각 옆 우동항이 귀퉁이에 붙어 있어 안쓰럽다. 비단 우동항만의 행색은 아니다. 이름 높던 수영팔경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민락항을 지나 회센터 앞부터 광안리다. 여기까지 약 8.5킬로미터 멀리 장자봉 자락 이기대 끝 동생말이 이정표로 다가선다.

광안리는 수영팔경 중 남장낙안(南場落雁)이라 하여 기러기가 쉬던 땅이다. 그땐 칠산포라 부르기도 했다. 시월이면 여기서 열리는 불꽃놀이의 장관을 보기 위해 100만 인파가 운집한다. 불과 한 시간,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듯 불꽃은 피어올랐다 폭포가 되어 사라진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보아도 충족되지 않는 허무의 불꽃에 열광하는 시대다.

 

남천동 삼익아파트 단지를 돌아 광안대교 입구를 지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지만 예전 이 바닷가는 수심이 얕고 뻘과 모래가 섞인 혼합갯벌이었다. 백합과 고둥이 지천이었다. 사람들은 해수욕을 즐겼다. 그곳이 미군 쓰레기 야적장이 됐고, 미군이 나간 뒤 흉물로 방치되다가 60년대 지금의 메트로시티 자리가 매립되면서 동국제강이 들어왔다. 아주 오래 전 이곳은 원래 염전자리였다. 지금도 이 일대를 분포라 부른다. 동이(가마)를 이용해 소금을 부었다고 해서 ‘분이 있는 포구’라는 분개(盆浦)라 부른 것이다.

용호부두를 지나 언덕에 오르자 시원하게 펼쳐지는 수영만이 보인다. 파도는 언제나 발아래 출렁이거나 달려들고 때로 포말 세례를 입힌다. 눈과 귀가 즐겁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걷는다면 그 맛은 배가 된다. 다소 오르막이 있어 숨이 가쁘지만 이기대(二麒臺)가 보여주는 풍광을 생각하면 감내할 만하다. 이기대는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히 바다로 몰입하는 형태의 해안이다. 어울마당 주변에는 공룡들의 발자국 화석도 있다. 가족 나들이 길로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장바위와 낭끝을 돌아서면 농바위 같은 기암절벽을 만날 수 있다.

 

승두말까지 이동하면서 해식대지와 해식동, 해식절벽에 가지를 뻗친 소나무가 풍경을 더한다. 고개길을 넘어서면 오륙도 SK뷰 아파트 단지가 있다. 흉물이다. 누구나 혀를 찬다. “어떻게 이런 곳에 저런 대단지 아파트를 지었냐?” 사람들은 인허가 과정에 대한 의심을 토로하다가, 민자 개발로 'Sea-Sade' 라는 해양관광단지 개발이 3천억 원이라는 사업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취소된 사연까지 짚어낸다. 기간을 연장을 했다지만 별로 실행될 듯하지 않다. 이런 판에도 이번 총선 출마자들마다 하나같이 개발공약으로 내걸었다. 오륙도 옆 백운포에 이미 마리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또 여기다 관광단지를 하겠다는 이유가 언필칭 ‘지역 활성화’다. 정치작업 하느라 들쑤신 채 버려둔 언덕을 보니 천불이 난다.

해맞이언덕을 내려서면 동해안 해파랑길 770킬로미터의 종점, 오륙도 선착장이다. 아니 시작점이기도 하다.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로부터 시작하여 부산 오륙도까지 4개 시도 18개 구와 군을 경유했다. 부지런히 걸으며 보았던 동해안은 더 이상 낭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동(洞)과 리(里)를 포함 총 285개 마을과 그보다 많은 약 300개의 크고 작은 항과 포구, 114개의 해수욕장과 71개의 하구와 만났다. 동해는 단순하고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그 해안선은 항구 대부분이 백사장 주변에 건설된 탓에 모래의 이동 평형이 깨져 해안선이 후퇴하거나 심한 침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지구온난화에 더해 오염원이 가중되고 막개발로 원형을 상실한 곳이 많았고 위협받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국립공원이나 군립공원, 명승지는 동해의 또 다른 섬이었다. 그 섬 주변에는 온갖 이름의 해양관광단지가 우후죽순 들어서거나 계획중이다. 견딜 수 없이 거부감이 생긴 곳은 울진, 월성, 고리 핵발전소였다. 도망치듯 빠져나왔지만 사실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안 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오륙도를 돌아서면 동해는 또 다른 아름다운 이름을 얻어 남해로 불리기 시작한다. 해안길의 풍경 또한 다시 생태적으로 아름다운 변신을 이루기를 꿈꾼다.

 

The Loco-Motion(1962) - Little E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