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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12- 울주 진하에서~기장 고리까지

by 이성근 2013. 6. 13.

 

회야강 하구 어둠속에 묻혀 있던 명선도(名仙島)가 동해의 일출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섬은 육지쪽으로 꼬리를 달면서 사주를 만들었다. 일종의 육계도(陸繫島)라 할 수 있는 명선도 사주는 회양강이 운반해 온 모래를 연안류가 밀어붙이면서 형성됐다. 이전에는 썰물이면 사주를 따라 섬에 닿았다. 그렇게 뛰어난 미를 갖춘 얼굴은 아니지만 일출이 좋아 사진 찍기 명소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밤마다 색색의 조명을 밝혀 ‘날 보러 와요’ 라며 호객행위도 한다.

사람대신 곰솔이 우두커니 줄지어 선 진하(鎭下)해수욕장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다. 파도에 밀려온 패각들을 주워 간이 종 조사를 해 보았다. 열거해 놓고 보니 빛조개와 반지락이 중복적으로 관찰됐다. 강하구 지역이 가지는 저질층이 이 친구들의 서식을 가능케 했다. 퇴적이 많아지다 보니 수심이 얕다. 퇴적량이 많아졌다는 것은 회야강 영향권 어디쯤 토지의 형질이 변경되는 사업장이 많아졌다는 것의 반증이다.  뒤돌아보니 컨테이너 운반선들이 수평선에 걸려있고 온산공단의 굴뚝에서 뿜어 올린 연기들이 강양 봉화산을 넘고 있다.

 

해수욕장 야영장 뒷길을 통해31번 국도를 따라 4km 못미쳐 간절곶이 있다. 길은 들고 나는 차량들로 뒤엉켜 주자장이 됐다. 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알려진 이후 탐방객들이 급증했다 거기다 이것저것 어줍잖은 조형물을 설치하다 보니 어수선하다.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카페만 신이 났다.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은 이런 커피전문점에서 간절곶의 낭만을 사고 풍경 한 점을 산다. 주말에는 자리가 없다고 한다. 행정은 더 많은 차량이용자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해안도로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해안 가장자리는 그 만큼 깎여 나갔고 갯바위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던 민물가마우지들이 자리다툼이다.

간절곶해안길을 따라 2km 가면 나사리가 있다. 모래가 뻗어나간다는 뜻에서 나사(羅沙)로 불렸던 이곳은 1km에 육박하는 해안을 가졌다. 폭30m의 백사장은 마을 중간에 들어선 방사제와 호안으로 인해 양분되었다. 마을 뒤편 봉화산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는 형태로서 서생면사무소 방향은 급격한 침식을 가져왔고, 나사항이 있는 간절곶 방향으로는 퇴적이 증가한 상황이다. 어항을 보호하기 위해 들어선 방사제가 되려 해안을 기형화시켰다.

 

대흥수산 앞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가다 서생중학교 삼거리에서 솔진개(송진)를 거쳐 신암해안길로 방향을 꺽는다, 신암봉산에서 발원한 시냇물 같은 신암천이 쫄레쫄레 흘러 신암항에서 몸을 푼다. 여기도 예전에는 작은해변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방파제와 물양장이 들어서면서 신암천 끝트머리 손바닥 만큼만 모래를 퇴적시켜 놓고 있다. 자연발생유원지 언덕에 올라 항내 풍경과 서생면 일원을 조망한다. 거시기처럼 솟아오른 신고리 5.6호기 돔 건물과 송전탑이 남쪽 모든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

이웃한 신리항은 방파제가 들어서 있어도 그 구조물과는 상관없이 예쁘고 아담하다. 물밑에는 잘피들이 하늘거리고 치어들이 떼지어 놀고 있다. 살펴보니 유난히 바위덩이가 많은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 천 년 전 이 마을 입향조라 할 수 있는 윤씨, 안씨, 이씨 대표들이 모여 해안에 즐비한 구름같이 큰바위들에 착안하여 마을이름을 운암동(雲岩洞)이라 정했다고 한다. 사실 일대는 선사시대 유물인 줄문토기와 고인돌이 수십기가 발견될 정도로 오래된 사람의 터였다. 핵단지 후문 앞 할배당을 지키고 선 수령 450살의 곰솔도 신리의 역사를 대변한다, 일제시대에는 방어진간의 물류가 오가던 항으로서도 유명했다. 또한 동해산 장어기지항으로도 이름을 날렸고 1960년대에는 밀복잡이 주항으로서도 기능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마을은 여느 갯마을 보다 차분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일상 속에는 졸지에 들어선 신고리핵단지로 인해 불안이 들어 앉아 있다. 도로변에는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분통터지는 주장이 내걸려 있다. 우리끼리 잘 살고 있는데 국가란 것이 뭔데 송두리째 우리 삶을 뒤흔드느냐는 거친 항의였다. 이미 마을의 절반이 핵발전소 부지로 수용되었다. 신리해안길을 따라 비학마을 쪽으로 가 보지만 길을 골내마을에서 차단된다. 둔덕 하나를 두고 마을 분위기는 이웃한 신리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주민들도 좀체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했고 조심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은 이미 고리핵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이주를 당했던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언덕너머 비학마을과 효암마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신리삼거리로 돌아서 나오는 길, 띄울 바다를 잃어버린 선외기며 연안통발 소형어선들이 도로변에 줄줄이 누워 있다. 1km 전방 신고리사거리에서 갈 길을 찾는다. 효암삼거리를 지나 길천삼거리까지 고개를 넘어 2,2km 직진하느냐? 아님 효암천을 따라 봉대산을 우회하는 3.4km길을 택하느냐? 후자를 택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파랑길 부산권 4코스도 이 길을 버렸다.

돌아서고 싶었다/ 가던 길 돌아서 그 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방이 기형아 기형가축 기형어 투성이/기분 나쁜 땅 영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재수없게 재수없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체르노빌이나 드리마일에서처럼 / 오늘 저 핵발전소 괴물덩어리 /자폭이라도 하지 않을까 / 일본사람 고리근처 일광 바닷가 회먹으러 왔다가/ 핵발전소 돔 건물보고는 놀래서 도망쳤다는/ 씁쓸한 얘기 떠올리며...(이하 생략-졸시 1991 성산리 中)

 

 

하물며 지역민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제발 그따위 소리 걷어치우라고 한다. 우리는 뭐냐고 ... 그렇다. 이 무슨 개떡같은 지랄이란 말인가. 투덜투덜 철뚝넘어들과 무학동들을 가로지르는 효암천을 따라 걸으며 잠시 옛생각에 잠겼다. 특히 효암 잠수부 김만규씨의 소식이 궁금했다. 그이는 아이 둘을 잃었다. 무뇌아로 태어나 한 살을 못 넘기고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마누라는 미쳐버렸다. 온곡2구 세월교에서 구동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면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도로표지판이 한빛아파트 3단지 사거리에 서 있다. 예전에 핵광아파트라 불렸던 곳으로 한전사택이다. 아이들 유치원까지 핵광유치원이었지 싶다. 기막힌 기만의 세월이었다. 핵을 구세주처럼 받들고, 그 단물을 받아먹고 배부른 삶을 사는 집단이 조성한 세뇌의 결과다. 후꾸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보여준 그 절망적 상황이 대한민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리핵발전소를 바라보는 일은 역겹다. 전직 기자였던 이훈이 쓴 ' 내가 걸은 남도 갯길'에 핵발전소가 들어서 닥친 세가지 불행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첫째, 해안연결로가 끊김으로서 고립된 점과, 항금어장이던 해역의 몰락, 셋째, 전남 3대 해수욕장으로 군림하던 가가미의 몰락을 들었는데, 그가 말 한 곳은 영광 계마항이었다. 고리나 길천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이 지역 출신 이해웅시인이 쓴 고리추억비(고리핵발전소 정문 왼쪽) 를 통해 고리의 옛모습을 그려 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해안 속초 이남을 통 털어 고리만큼 자연경관이 빼어난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분명 그랬을 것 같다.

 

...에헤요 데헤요 에헤에요 고리가 좋아 멋들었네/ 소금가을 방불케 하던 아름답던 마을 고리/ 바닷가에 울창했던 소나숲과 기암괴석 /연위(渭涇)로만 살아가던 어진 촌민들 /지금은 실향민 되어 동서로 뿔뿔히 흩어졌네....

Crying In The Rain - A 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