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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해파랑길에서 동해를 보다 11. 울산2 기억의 재생 -온산(溫山)을 가다

by 이성근 2013. 6. 13.

 

태화강 역을 지난다. 건너편 돗질산이 보인다. 90년대 초 미국자리공 공해 논쟁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태화강과 여천천을 사이에 둔 일대는 울산공단으로 지금도 삭막하다. 여천오거리까지는 2.4km 전방 언덕에 벽화마을로 새롭게 변모하고 있는 신화마을이 있다. 마을은 1960년대 석유화학단지조성으로 터전을 잃은 매암동 주민들이 집단 정착한 곳이다. 집은 낡은데다 마을부지 60% 이상이국유지로서 사실상 재개발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작년 이맘때 울산공공미술연구소(대표: 곽영화)가 빈집 세곳을 임대하여 ‘지붕없는 미술관-야음동 신화마을 174번지 展’을 연 이후 올해 두 번째 기획 전시가 이곳에서 개최됐다. 거기다 국내 최초 고래를 주제로 한 영화 ‘고래찾는 자전거’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신화마을은 전국적인 포커스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 미술가인 곽영화씨는 그 중심에 있다. 마을골목을 기웃거리다 그를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곽화백은 이곳이 부산의 산동네 벽화마을처럼 단순히 브로커들의 사진만 찍는 공간이 아닌 예술인들의 창작활동과 지역재생이 이루어진 마을기업으로 진화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장생포로 향한다. 만수삼거리에서 여천천을 따라 울산항 제5부두삼거리를 지나 매음삼거리에서 일반부두쪽 장생포 고래박물관까지 약7km. 달리시선을 둘 때가 없다. 그때마다 고래 조형물이 충혈된 눈을 씻어 준다. 장생포는 1899년 러시아의 포경전진기지 설치 이후 일본인에 의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명성은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에서 상업포경금지를 결의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거기다 장생포 주변을 공장들이 에워싸기 시작하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정부는 1985년 장생포, 매암, 여전 일대을 ‘환경오염이주지역’으로 지정했다.

 

현재 주민의 노력으로 공해지역이란 오명은 벗긴 했지만 장생포의 주민 수는 3000명 정도로 격감했다. 대다수 포경산업 종사자들은 장생포를 떠났다. 옛 명성을 재현하기 위해 울산 남구는 울산고래축제를 여는 한편 장생포 고래문화특구 조성 사업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을 망각한 달갑지 않은 포경재개 주장도 병행되고 있어 환경단체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국민 대다수가 포경을 반대하고 있다.

처용암으로 향한다. 11km 약 3시간을 공단길을 따라 간다. 매암사거리에서 SK사거리와 부곡사거리, 용연사거리를 지나 세죽마을로 가는 길은 나 말고 누가 걸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이 길을 비켜날 수는 없다. 사람의 출입이 뜸한 이 지역이 걷고싶은 길로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그렇고,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땅 역시 사람의 터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때가 언제가 될련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생태산단으로의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반드시 도달해야 할 먼 길이다.

 

처용은 관용의 상징인 처용설화의 탄생지로서 신라적부터 상업항으로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처용암 주변 해안 가장자리는 각종 공장에 포위된 형국이다. 철거된 세죽마을에서 건너다 보는 처용암은 초라하다. 신라왕과 동해 용왕이 노닐던 개운포 바다는 탁한 빛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길은 세죽나루에서 외황강(外隍江)을 따라 개운포 성지로 이어 진다. 외황강(外隍江)의 황(隍)은 성의 외곽을 둘러싼 방어용 해자(垓字)란 뜻으로 개운포성의 외곽 방어수로란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가 있었다.

강 건너가 허전하다.

 

마을하나가 또 사라졌다. 한때 100여 세대가 넘을 만큼 번성했던 오대·오천마을은 개발이 진행되면서 현재는 신일반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중장비의 굉음만이 들리는 곳으로 변했다. 오대오천마을은 배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촌으로 과거에는 마채염전이 있었던 곳이다. 1980년대 초 마을 인근에 울산석유화학공단이 조성된 이후 이곳 주민들은 모기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공단 업체들이 배출한 폐수가 마을 앞 하천과 습지로 흘러들면서 마을 곳곳이 모기 집단 서식처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처용삼거리에서 방도리를 지나 목도방향으로 이동한다. 거남산 자락이 흐르다 말고 사라졌다.

 

정유공장들이 빼곡하다. 목도는 그 뒤편 해안에 숨어 있다. 아니 갇혀있다. 동물의 눈을 닮아 목도(目島)라고 불리우는 이 섬은 일제시대에는 춘도로 불리워 졌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해안 대표적 상록수림으로 현재 출입은 통제되고 있다. 지난 1992년 무분별한 식물채취와 답압으로 식생의 황폐가 심해짐에 따라 취해진 조치다. 수령 100년 이상의 동백과 후박, 곰솔, 사철, 벚나무,팽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고향을 잃어버린 일대의 지역민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억 재생의 장소다.

온산 앞바다에는 목도를 비롯하여 두룩섬, 노룩섬, 연자도, 풀섬, 거무섬 등 유무인 섬이 있었지만 대부분 해안의 매립으로 흔적도 없다. 덕신리와 산암리 사이에는 솔밭이 우거졌던 산하 당목마을이 있었다. 마을을 대신하여 1980년 쌍용정유가 들어섰다. 해안에는 방어진과 통하는 포구라 하여 이름했던 달포가 있었고 그 앞바다에는 억새가 많아 풀섬으로 불리던 조암도가 있었지만 이 역시 매립으로 육지의 일부가 됐다

 

이진리로 방향을 튼다. 배나루라고 불린 곳으로 이(梨)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나 진(津)이 붙어 예부터 나루였던 것은 분명하다. 거기다 바다쪽으로 돌출된 범월곶이 있던 곳으로 지질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풍화작용에 대한 박물관이라고 명명했던 곳이다. 특히 조개류에 의해 생성된 타포니는 이진리가 유일했다. 마치 바위 표면을 벌레가 파먹은 듯 구멍이 파인 암석을 타포니라 하는데 그 세월이 억겁이다.

 

그 지구의 기록을 울산신항 공사며 공장부지로 만들면서 시방도 깨어지고 사라지는 찰나다. 망연자실이다. 에코폴리스가 무색하다. 얼마전 울산시는 온산해안의 이진공원 28만㎡를 통째로 공업용지로 전환했다. 이에 앞서 이진공원과 바다가 닿은 해안선은 모두 개인 공장부지에 함몰됐다. 범바위 깎이고 울산에 몇 개 안된 섬 가운데 하나인 연자도가 매몰됐다. 돌아서 나오니 대정천도 끝이 묘연하다. 원산리 모래벌 앞바다의 연자도 또한 흔적을 지웠다. 면사무소와 농협, 보건소, 온산초등학교가 있던 곳이지만 이 역시 사라지고 없다.

 

온산역에서 직진하여 당월로 가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우리애들만은 살려주이소!” 호소하던 그 시절의 눈물은 말랐지만 기름진 땅과 해산물이 풍부한 바닷가에서 부르던 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지역에서 시를 써는 김상화씨가 그 아픔을 남긴 바 있다.

 

...마을 머리위로 지나가는 컨베어소리만 유년의 기억으로 남고/ 만선의 멸치는 파도에 실려 바다 가눙데로 떠난다/ 벌거벗은 꼬마들의 놀이터/ 마을 앞 모래펄에/ 덩치 큰 트럭이 몰려와 파도를 메우고 나면/ 아이들의 또 다른 기억 한 켠에 / 물질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사라진다...(마지막 수업 중)

그들은 겨울철 밤새워 복어잡이를 하고 연자도 앞 바다에서 성게, 소라, 전복, 문어를 지천으로 잡았다. 목도장이며 당월장에서 도가술 한잔으로 인정을 나누며 살던 사람이었다. 그들의 고향은 회야강 옆 강구, 우봉, 당월, 산남, 신원, 고래등, 뒷불림, 내동, 번내, 송전,달포, 땅넘, 목도, 방도, 사방동, 신기, 해남, 회학, 처용등 36개 마을이었다. 그들의 고향은 국가산업단지가 된 온산공단이다.

 

 ‘밤에는 희황한 불빛이 대도시처럼’ 밝고 ‘낮이면 삭막한 바람이 공장냄새를 더불고 부두로 내려와 잃어버린 울음을 우는 ’곳이다. 그렇다 차라리 온산에서는 낮보다 밤이 한결 낮다. 맨눈으로 온산을 바라보기에는 현기증이 난다. 그 아픔은 동해펄프를 대신하여 들어선 무림제지와 신한기계를 지나 강양해안으로 내려서면서 해소된다. 공단이 끝나는 지점이자 어둠 속에서도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해송 사이 간간이 달빛어린 바다가 일렁이고 회야강 하구 어귀 진하해수욕장 네온사인 불빛이 조는 듯 번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