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민주주의 저자 최경봉|책과함께 |2012.08
저자 : 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1965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한국어연수부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으며, 1995년 같은 연구소 국어사전 편찬실에서 사전 편찬원으로 근무했다. 1997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국어학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 『관용어사전』(공저), 『국어 명사의 의미 연구』, 『우리말의 수수께끼』(공저), 『한국어가 사라진다면』(공저),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공저), 『우리말 오류사전』(공저) 등이 있다.
책을 시작하며│우리에게 한글은 무엇인가
1부 민권-한글과 더불어 성장한 민주주의
‘알려야 할 의무’와 ‘알권리’를 말하다
표준어 정하기
말의 표준화, 소통의 민주화
표기법과 대중, 규범의 유통기한
* 영어 시대, 우리말로 말할 권리와 의무
2부 자주-한글로 지켜야 할 주체성의 한계
국어 순화의 이데올로기
생활 속 언어로 외래어 자리잡기
생활 속 언어로 고유어 자리잡기
한글 표기로 본 외래어 인식
한글 표기를 통해 본 한자와 한자 문화권
* 광화문 현판에 새겨진 정치역학
3부 평화-한글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모색
Corea 되찾기의 복고주의
독립운동으로서의 한글운동
한글인도주의와 한글제국주의
통일시대 남북 언어의 통일과 공존의 방식
다문화 시대, 소수자의 언어적 권리
* 한글소유권
책을 마치며│국어정책의 갈 길을 생각하며
지은이의 말
인물색인
참고문헌
출판서 서평
언어민족주의를 걷어내고 한글을 둘러싼 역사적 선택의 과정을 톺아보다
세종대왕은 자신이 새로이 만든 문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한문’에 대비하여 ‘언문’이라고 불렀다. 근대화가 되어 민족과 국가의 의미가 새로워지면서 ‘속되다’를 함의하는 언문이라는 표현을 용납할 수 없었고, ‘국문’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국가가 일본에 병합되고 국문과 국어가 일문과 일본어를 뜻하는 이름이 되자, 조선인들은 ‘국문’을 대신할 이름을 찾았고 대한제국의 글 또는 문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한문’을 풀어쓴 ‘한글’이 탄생했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한글’은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는 이름이기도 했고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은 문자의 이름이면서 우리말의 이름이 되었다. 한글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말을 지키는 길이었던 상황에서 말과 글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를 걷어내고 한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선택되어왔는가를 차근차근 살펴본다. 말이란 생득적인 것이지만 문자는 선택의 대상이며, 그러한 선택은 언제나 역사적 선택이었다.
세종은 소리문자가 필요하다는 역사적 요구에 응하여 문자를 만들었고, 조선 사회는 그 문자를 받아들여 활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한글이 백성의 것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정조는 백성과 소통하는 문자로 한글을 채택하고, 나아가 고종은 백성들에게 법률을 알릴 때 국문을 기본으로 하라고 칙령을 내림으로써 ‘알려야 할 필요’를 넘어 ‘알려야 할 의무’를 자각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공공의 글쓰기는 일반인들의 ‘알 권리’를 충족하기 위해 우리말의 규범, 즉 사전을 출판하는 일에 주목하게 된다.
‘원칙의 고수’와 ‘관습의 수용’ 사이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둘러싼 역사적 선택의 과정은 그 자체로 근대화운동이면서 독립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어 상용화 정책에 맞서 표준어, 맞춤법, 띄어쓰기, 외래어 등 여러 방면에서 역사적 선택의 노력이 있었다. 역사적 선택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의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합의하여 내리는 결정이다. 문자 선택의 정당성은 대중의 수용이라는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해 확보된다. 예컨대 단일 표준어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조선어 정리의 주도권을 잡은 조선어학자들의 언어 규범화 작업은, 피지배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서 현재까지도 국어생활을 이끄는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국가가 가장 강력한 제도적, 현실적 공동체임을 생각한다면 국가적 소통을 위한 표준어 정책은 계속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연구원의 발표는 표준어 정책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국민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표준어 대접을 받지 못한 ‘짜장면’, ‘먹거리’ 같은 39개의 단어들을 표준어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규범과 관습의 괴리 문제를 해결했으며, 이는 소통의 민주화를 이루고 나아가 통일을 지향하는 어문정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간명화된 언어를 통해 다문화사회의 공적 의사소통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글의 열린 사용을 위한 제언
예정대로라면 2014년에 남북이 함께 편찬한 사전, ‘겨레말큰사전’이 나올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말사전은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적 사명을 안고 편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라는 사명을, 해방 이후엔 국어를 정립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앞으로 겨레말큰사전은 통일 시대를 살아갈 남북한 사람들에게 품격 있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폭넓은 우리말의 세계를 보여주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굴곡과 상관없이 중단 없는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는 한국 사회의 이주민에 대한 국어 정책도 포함된다. 이주민의 인권과 복지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혀 이중어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이주민들에게 최대의 복지 정책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이중어 교육의 체계화는 이주민 공동체가 확대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언어적 불평등은 곧바로 사회적 불평등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언을 통해 이 책의 저자는 ‘한글이 없다면 우리말(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주장을 극복하고 ‘한글문화가 풍부해진다면 우리말 문화도 더욱 풍성해진다’라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논리를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이 ‘역사적 선택’과 그 선택을 수용하여 이룬 ‘관습’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태도이다.
‘한글민주주의’라는 말에 담은 국어학자의 ‘한글 사랑’
주시경과 그의 제자 김두봉은 고유한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이태준은 언어를 생활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병기와 그의 제자 이태준, 정지용은 언어의 순혈성을 강조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우리말의 발전과 전통미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지금 우리 곁에는 주변에 머물던 말들이 생활 속 언어로 자리 잡기를 바랐던 김소진이 있었고, 그리고 새로운 말의 씨앗을 심고자 하는 백기완과 생명이 꺼져가는 말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손석춘이 있다.
국어학자 최경봉은 이 책에서 ‘한글과 우리말만 쓰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글을 사랑하는 모습은 민족주의와 실용주의 등을 포함해 제각각 다르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 관점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어 의식과 국어 정책을 하나로 꿰뚫는 것은 수용자의 민주주의적 선택이어야 함을 주장하는 국어학자의 시선은, 소수민족의 언어 문제와 국어학의 대중화, 다문화사회의 결혼 이주민, 남북한 사전의 편찬 등으로 뻗어나간다. 국어학자의 민주주의 이야기가 어리둥절하고 불편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우리말의 역사를 한쪽의 시선으로만 보아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부록으로 실은 ‘우리말을 사랑하고 지켜온 인물들의 색인’이 말하는 것은, 저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말 문화를 풍부하게 하고자 노력해온 삶’일 뿐이다.
책의 구성
이 책은 민주주의적 원칙인 민권, 자주, 평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글민주주의’를 고찰한다. 1부에서는 근대 초기의 국어 정책이 어떻게 민권을 향상시켰는지 살펴보고 있다. 한글은 말과 글이 불일치하던 한문의 시대를 끝내고 말과 글이 일치할 수 있는 국문의 시대를 열었고, 이로써 대중의 알 권리와 말할 권리가 확대되었다. 2부에서는 국어 정책과 국어 교육이 우리말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사회의 민주적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펼쳐져왔는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통일국가를 꿈꾸는 다문화사회라는 현실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국어 정책이 다른 언어에 대한 폭력과 편견 그리고 이로 인한 소외와 불평등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다른 언어공동체와의 평화적 공존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편 이 책에서는 영어 광풍의 시대에 우리말로 말할 권리와 의무, 광화문 현판에 새겨진 정치역학, 한글소유권 등을 살펴보는 별면을 따로 마련했다. 별면에는 우리말로 학문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설명하는 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영어의 위상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아울러 광화문 현판을 통해 한글과 한자의 위상 변화를 살펴보고, 한글소유권을 주장하기보다 그것을 제대로 쓰는 공동체가 곧 그 소유자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책속으로
‘다양한 방언의 말살을 의미할 수도 있는 표준어 정립이 곧 우리말의 발전일 수 있을까’라는 홍기문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는 근대적 가치관이 도전받는 현실에서, 언어의 표준화라는 근대적 논리의 유효성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표준화된 한국어를 열망하며 단일한 말로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던 더 넓게는 국가주의에 매몰되었던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기도 하다. 한국어는 지역에 따라, 나이에 따라, 계층에 따라, 심지어는 성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 1부: 말의 표준화, 소통의 민주화」 중에서
이승만이, 형태주의 표기법이 역사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는 20세기 초의 상황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해방 이후 정립된 한 국가의 표기법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관습을 존중하고 대중들에게 편리한 표기법을 만들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겠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철자 개혁이 실패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의 국어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파악하지 못한 대중의 국어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형태주의 표기법을 정착시킨 조선어학회의 활동 역사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1부: 표기법과 대중, 규범의 유통기한」 중에서
맞춤법의 원칙을 절대화하다 보면 사전 편찬자는 새로운 단어를 사전에 올릴 때마다 갈등하게 된다. 관습적으로 쓰이는 표기를 사전에 올릴 것인가, 아니면 맞춤법에 따라 낯선 표기라도 사전에 올릴 것인가. 만약 사전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맞춤법 규정이 별도로 공식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편찬자는 표기 규칙을 염두에 두고 표기를 결정하되 관습화된 예외 표기를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색이 저도 학교를 다닐 만큼 다녔고 배울 만큼 배웠는데 ‘동탯국’이란 표기는 생각도 못해봤습니다”라는 경험담이 공감을 얻는 상황이라면 사전편찬자는 ‘동태국’을 표제어로 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1부: 표기법과 대중, 규범의 유통기한」 중에서
‘~인 것으로 판단된다’나 ‘~로 이해된다’ 같은 표현이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 글쓰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동형을 이용한 표현의 기법일 뿐, 이런 점을 들어 피동 표현을 적대시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이다. 말은 나쁘게도 쓰이고 좋게도 쓰이는 법, 말 자체에 선악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식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으로 이분한 후 정 체가 모호한 한국식 문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표현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외래 요소가 문제가 되는 것은 외래 요소가 우리말의 소통 질서를 교란할 때다. 그렇다면 외래 요소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말의 소통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외래 요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 정리를 위한 정책적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2부 국어 순화의 이데올로기」 중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고유어와 외래어는 그 단어를 이해하는 토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고유어는 어근을 통해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어휘라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만, 외래어는 해당 외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이러한 가능성이 차단된다. 대부분의 외래어는 원어에서의 단어 구성이나 어휘체계와 상관없이 우리말에서는 독립적인 단일어로 인식된다. 따라서 외래어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외래어 쓰기는 신중해야 한다. 특정 독자층을 상대하지 않는 이상 외래어는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2부 생활 속 언어로, 외래어 자리 잡기」 중에서
효율성과 실용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이들의 ‘실용주의’는 특정 계층의 편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말하는 ‘실용’과 ‘효율’은 ‘관습’을 부정하고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실용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낯설어함과 곤혹스러움을 개의치 않는다. ‘일반인들이 낯설어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선점한다는 것은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공교육으로 소화할 수 없는 시험으로 수험생들을 줄 세우기 하려는 것, 영어 성적으로 모든 구직자들을 줄 세우기 하려는 것 등이 이들의 ‘실용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 2부: 한글 표기를 통해 본 한자와 한자문화권 」 중에서
그런데 ‘한글이 여러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는 사실이 ‘한글이 그 언어의 표기에 가장 적합하거나 유일한 문자’라는 사실로 뒤바뀌는 과정은 분명 비이성적이다. 한글의 우수성과 한글 사용의 당위성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다른 문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부추기며 오해와 편견을 낳기 때문이다. 한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는 그 언어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선택하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한글 보급 혹은 한글 세계화 과정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한글처럼 우수한 소리문자가 세상의 모든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소외된 천재의 강박’과 ‘한글제국주의의 애절한 탐욕’이 배어 있다. 그래서일까? 한글의 우수성을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노골적이고, 이러한 바람이 크기에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가 과장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 「3부: 한글인도주의와 한글제국주의」 중에서
겨레말큰사전은 근대 어문 개혁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줄기차게 추진해온 우리말사전 만들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업이다. 분단 극복을 위한 것이기에 앞서 명실상부한 우리말사전을 갖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가 ≪괴테사전≫과 ≪양안사전≫보다 깊고도 넓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편찬 사업비(약 15억 원) 지원을 승인해달라는 시인의 호소를 경제 규모 세계 15위인 대한민국에서 접해야 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3부: 통일시대 남북 언어의 통일과 공존의 방식」 중에서
한글날, '한글 파괴' 기사는 그만 보고 싶다
[서평]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 한글 이야기 '한글민주주의'
매번 한글날 무렵이면 무분별한 번역투와 외래어, 신조어 사용을 질타하며 '한글 파괴' 현상을 개탄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때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까지 언급하면서 세종대왕의 창제 정신을 기려 '올바른 우리말'을 써야 한다고 자못 준엄하게 꾸짖기까지 한다.
1년에 한 번만이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늘 사용하는 한글의 의미를 돌아보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올바른 우리말'이 뭘까? 뭐가 '올바른 우리말'이고, 뭐가 '올바른 우리말'이 아닌지는 누가 정하는 거지? 같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한글민주주의>(최경봉 지음, 책과함께 펴냄)를 읽었을 때 반가웠다. <한글민주주의>는 내게 '그래, 네 생각이 맞아'라고 말을 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회 구성원 공동의 소유물"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한글을 바라본다. 저자인 최경봉 원광대학교 교수는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16쪽)고 강조한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언어 혹은 문자는 사회 구성원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고,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지 못한 언어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글의 역사에는 구성원의 합의를 무시한 국어정책이 결국 실패로 끝난 사례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주시경과 최현배, 김두봉이 주창했던 '풀어쓰기'다. 예를 들어 '너를 사랑해'를 'ㄴㅓㄹㅡㄹㅅㅏㄹㅏㅇㅎㅐ'로 쓰는 방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모아쓰기'에 익숙해져서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할 뿐이지 본디 음소 문자(하나의 문자 기호가 한 개의 낱소리 즉, 음소를 표기하는 문자를 의미한다. 한글에서는 'ㄱ', 'ㄴ', 'ㅏ', 'ㅑ 등'의 자음, 모음 24자가 음소다)인 한글을 음절(말을 할 때 가장 쉽게 직감할 수 있는 발화의 최소단위. 한글에서는 자음과 모음을 음절 단위로 묶어서 '가', '나' 등으로 표기한다) 단위로 모아쓰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 알파벳과 비교하면 한글의 표기 방식이 얼마나 독특한지 알 수 있다. 한글은 알파벳과 같은 음소 문자이고, 알파벳 표기 방식이 바로 '풀어쓰기'다. 다시 말해 'ㄴㅓㄹㅡㄹㅅㅏㄹㅏㅇㅎㅐ'라는 표기가 보편적인 음소 문자의 표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풀어쓰기'에는 여러 장점도 있었다. '풀어쓰기' 주창자들은 '풀어쓰기'의 장점으로 ▲모아쓴 글자에 비해 읽기와 쓰기가 쉽다 ▲기계화가 용이해진다 ▲단어를 한 덩이로 표기하게 되면서 철자법이 간편해진다 ▲한자 폐지를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등을 꼽았다. (<우리말의 수수께끼> 222쪽~223쪽)
'풀어쓰기' 주창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풀어쓰기'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남한에서는 1953년 12월 국어심의회 한글분과위원회에서 '풀어쓰기' 안이 국가정책으로 채택됐고, 북한에서도 김두봉 등이 '조선어 신철자법'이라는 이름으로 '풀어쓰기'를 추진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타당성도 있고, 한때 국가정책으로 채택되기까지 했던 '풀어쓰기'도 결국 대중의 관습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모아쓰기' 전통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풀어쓰기'의 실패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언어나 문자는 어떤 개인이나 한 단체의 독점물이 아니고 우리 사회 구성원 공동의 소유물이라는 점에서, 개인이나 단체나 정부기관의 힘으로 일시에 바꾸어 놓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 <우리말의 수수께끼> 224쪽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구성원들이 규범에 맞지 않는 말을 쓰는 것보다 일부 정치가나 전문가들이 대중의 언어생활을 고려하지 않은 규범, 대중과 유리된 규범을 일방적으로 정하고, 대중들을 향해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훈계를 늘어놓는 행태가 더 문제일 수 있다.
'동탯국', '북엇국'… 현실과 맞지 않는 국어 규범
그렇다면 맞춤법을 비롯한 국어 규범은 얼마나 대중의 언어 사용을 잘 반영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쉬운 점이 많다.
▲ 서울 광화문에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다. ⓒ Pixabay
예를 들어 '동태국', '북어국'을 각각 '동탯국', '북엇국'으로 써야 한다는 사실은 국어 규범이 대중의 언어생활과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글 맞춤법 4장 4절 30항은 '순우리말이 포함된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 앞에서 소리가 덧나는 경우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어 '동태국'과 '북어국'은 사이시옷 규정이 적용된다.
저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 복수 표준어의 폭넓은 활용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2011년 8월 '간지럽히다', '맨날', '허접쓰레기' 등과 같이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표준어 대접을 받지 못한 단어 39개를 표준어로 지정한 바 있다.
최경봉 교수는 언어 현실을 인정해서 이 같은 복수 표준어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시옷 규정을 다시 예로 들면 '동태국/동탯국', '북어국/북엇국'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말은 곧 맞춤법, 띄어쓰기 등의 각종 국어 규범을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의 관습과 언어 현실을 고려해 조정해야 할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표준어는 학문이 아니라 생활의 문제"
돌이켜보면 나는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는 대중을 질타하는 기사에서 느껴지는 엘리트주의, 계몽주의가 싫었다. <한글민주주의> 속 표현처럼 "표준어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생활의 문제가 아닌 학문의 문제가 되어버린"(61쪽)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풀어쓰기' 주창자들이 그랬듯이 그들의 주장에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해도 소수의 전문가, 정치가가 '올바른 우리말'이 뭔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대중들이 그에 따르지 않는다고 꾸짖는 듯한 행태가 불쾌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런 기사를 볼 때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한글은 일부 학자나 정치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중이 일상에서 늘 사용하는 도구이자 모두의 소유물이다. 표준어를 결정하는 것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다. '올바른 우리말'이 무언지를 결정하는 이들은 대중이어야 한다."
나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한글날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전문가가 결정한 대로 그저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대중 스스로 한글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우리말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올바른 우리말'을 함께 만들어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한글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자세가 정말 한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글의 의미를 다시 되짚는 자세 아닐까?
그래서 올해 한글날에는 이제껏 매번 보던 '한글 파괴' 현상을 개탄하는 기사와는 좀 다른 기사를 보고 싶다. '올바른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는 대중을 질타하는 기사가 아니라 대중이 현행 국어 규범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한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기사 말이다./ 오마이뉴스 18.10.8
한글전쟁 우리말 우리글 5천년 쟁투사 저자 김흥식|서해문집 |2014.10
저자 김흥식은 1990년 출판사를 세웠다. 하지만 출판의 길은 쉽지 않았고,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의 출판사 서해문집은 인문사회·역사·고전 분야의 책을 주로 출판하고 있는데, 특히 역사와 고전을 좀 더 사람들과 가깝게 만드는 일에 주목해 왔다. 그 결과 우리 고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으로 평가받은 ‘오래된 책방’ 시리즈를 비롯해 ‘서해클래식’ 등을 기획, 출간했다. 그를 저자로서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은 《세상의 모든 지식》이다. 책을 좋아하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바탕으로 정말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던 지식들을 모아 만든 이 책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외 그가 관여해 출간한 책으로는 《한국의 모든 지식》(지음),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1, 2, 3》(기획), 《징비록》(옮김), 《1910년 오늘은》(엮음), 《조선동물기》(엮음) 등이 있다. 최근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은 1인 독립잡지 《산책》을 통해, 책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출판계 독설 비평, 내맘대로 서평 등을 거침없이 날리고 있다.
지은이의 말 / 들어가며
가 한자, 세상의 문자
말은 많으나 글은 하나다 / 서양의 알파벳, 동양의 한자, 그 아이러니 / 동아시아 문자와 한자 / 글자는 모두 그림문자에서 출발했다 /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상형문자, 한자 /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문자, 한자 / 한자를 향한 동아시아 각국의 도전 / 동아시아 문자의 탄생
나 우리말, 제1차 전쟁
한자의 탄생과 영향 / 한자, 한반도 지배층의 언어가 되다 / 한민족의 말, 한자어 / 신라어의 흔적 / 고구려어 엿보기 / 백제어 엿보기 / 구체적인 표현은 살아남았다 / 한자어의 유입과 문자 생활의 변화 / 1차 휴전협정, 차자표기법의 성립
다 한글의 탄생과 제2차 전면전 발발
한글전쟁 선전포고문, 최만리의 상소 / 최만리, 그는 누구인가 / 한글은 왜 탄생했을까 / 지금 이 순간, 한글이 필요했다 / 동국정운, 우리나라의 바른 소리? / 훈민정음? / 최만리, 수구사대주의자인가, 합리적 보수주의자인가 / 훈민정음과 관련된 의문 /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해례본 본문, 그 합리적 세상으로의 여행 / 모아쓰기 대 풀어쓰기 / 풀어쓰기는 과연 한글인가 / 한글을 만든 원리, 그리고 한자 / 조립된 문자, 한자 / 한글과 한자는 참으로 공동운명체인가 / 휴전의 성립, 한글의 승리 / 한글의 세력 확장
라 한글을 향한 연산군의 쿠데타
쿠데타 전야 / 연산군은 한글의 적이 아니다 / 쿠데타의 발발 / 신속하고 철저하게 / 쿠데타의 후속 조치 / 쿠데타의 부작용 / 연산군과 한글의 평화로운 동거 / 연산군을 위한 변명 / 영웅의 탄생 / 최세진, 언어의 연금술사 / 중종, 최세진을 끝까지 옹호하다 / 훈몽자회의 창의성 / 훈몽자회에도 한계는 있으니 / 훈몽자회, 한글 학습의 새로운 장을 열다 / 훈몽자회 범례, 훈민정음의 재탄생 / 훈민정음 자음과 모음의 재구성
마 한글, 서서히 조선을 뒤흔들다
게릴라전의 시작 / 선조국문유서 / 한글, 조선을 뒤흔들다 / 노래, 조선을 풍미하다 / 노래하는 이, 가사를 기록하다 / 이야기, 백성을 어루만지다 / “뒤?박?” /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 또 다른 저항, 문체반정 / 패관문학, 잡스러운 글 / 한글,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다 / 혁명하는 선비, 선비의 혁명
바 근대의 시작, 제3차 전면전
한글, 백성의 주검 위에서 꽃피다 / 새로운 문자 생활의 시작 / 신문, 세상 소식을 전하다 / 한글 교육의 시작 / 최초의 교과서 / 국어 연구의 선각자들 / 한글 문학의 등장 / 한글의 완전한 승리
사 식민지 시대, 제4차 전면전
교과서 전쟁 / 식민지 학교 체제의 형성 / 교육 칙어와 국민교육헌장, 데자뷰의 탄생 / 3·1운동, 은밀한 침략의 출발점 / 신문 전쟁 / 조선, 동아 그리고 조선중앙일보 / 문화를 점령하라 / 마지막 공격, 이름을 탈취하라 / 창씨개명의 본질 / 창씨개명의 진실 / 레지스탕스, 우리말 연구 단체 / 한글날의 탄생과 철자법 갈등 / 우리말 사전, 잉태부터 탄생까지 / 이상춘, 조선어 사전을 낳은 어머니 / 문세영, 그는 진정 누구인가 /원고는 어디로? / 한글 대중화 운동의 시작 / 레지스탕스의 종언, 조선어학회 사건
아 제5차 한글전쟁의 시작, 광복
문맹과의 전쟁 / 한글 교육의 출발 / 한글 전용 전쟁 / 한글 간소화 파동 / 대통령 이승만이 일으킨 한글 파동 / 이승만의 맞춤법 / 가장 반민주적인 민주주의 상인, 이승만 /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 언중의 저항 / 곡학아세, 이선근의 등장과 한글 간소화 / 물러서지 않는 정부와 시민 / 돌연한 항복 선언
자 끝없는 전쟁, 한글 전용 대 한자 혼용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 아는 것과 모르는 것 / 왜 한글 전용인가 / 왜 한자 혼용인가 / 한글 기계화 문제 / 문자가 쉬워야 사회 발전? / 시대의 변화는 진행 중 / 읽지 않고 쓰지 않는 늪 속에 빠진 대한민국 / 한글 = 표음문자 = 우리말? / 한글의 원죄, 조어력과 독해력 / 시각적 문자의 역할 / 먼 훗날, 한자어는? / 하나하나, 그리고 천천히 / 새로운 시대의 도래
차 한글 세계에 떨어진 핵폭탄, 영어
세계어인 영어, 그 이익을 버릴 것인가 / 조어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 돈 드는 조어력, 돈 안 드는 외국어 / 그런데 세계는? / 영어 침략군의 장애물? / 한국어의 거울, 하와이어 / 더 이상 언어를 잃으면 안 되는 세 가지 이유 / 번역, 또 다른 전쟁 / 21세기 문체 전쟁 / 사투리의 마지막 저항 / 한글과 조선어, 전쟁과 화해의 갈림길 / 마지막 전쟁, 사라지는 어휘를 지켜라
맺으며 / 미주 / 참고 도서 및 자료
언어는 존재의 집, ‘한글’은 곧 한국인의 ‘삶과 역사’
언어, 즉 말과 글은 인간에게 공기와 같은 존재다. 한국인에게는 우리말과 한글이 그런 존재일 것이다. 사람에게 공기가 그렇듯, 한국인은 한글의 소중함을 크게 의식하지 못한다. 이 책은 우리말과 우리글이 5000년의 한반도 역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는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말글 쟁투사다. 저자는 그 역사를 박제화하지 않고 바로 눈앞에서 꿈틀거리며 독자가 감각하도록 과감하게 펼쳐 보인다. 한자에서 영어까지 외세어와 싸우고 내부의 사대주의자와 한판 승부를 벌이며 쓰러져도 일어나는 우리말 우리글의 5000년 쟁투사를 이 책은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로써 공기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주듯 한국인은 우리 말글로 사고하고 표현하며 기록해 스스로를 이어감을 증명한다. ‘당신은 한글 없이 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당신은 한글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이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살아 있는 우리 말글의 화두다.
“존재는 명칭으로부터 비롯한다. 말이 없으면 우리는 없다”
이 놀라운, 그러나 두려운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우리말, 우리 글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뒤죽박죽에 학술적으로는 오류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 분명한 《한글전쟁》이라는 책을 머리에 떠올린 것은 5년 전이다. 그리고 원고 완성에 같은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내용에 대한 아쉬움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말글살이에 대한 애정과 그 밝은 미래를 이웃과 함께 지켜나가고자 하는 염원이 더 큰 것을. _‘지은이의 말’ 중에서
한글 탄생 이전부터 현재까지
오늘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냉전(冷戰), 즉 저 밑바닥에서 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며 싸우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열띤 전투가 벌어지는 열전(熱戰) 중이다. 한글전쟁은 그 본질이 문자(文字) 전쟁이요, 문화(文化) 전쟁이다. 그리고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과 그 형태는 다르다 해도 목표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한글전쟁은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벌어진, 무력을 동원한 무수한 전쟁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전쟁일지 모른다.
‘한글전쟁’ 그 피투성이의 현장 속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글전쟁은 우리를 우리로 인식하게 하는 본질, 즉 언어와 문화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번 전쟁의 결과에 따라서는 한반도에 지속되어온 한겨레라고 하는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 언어와 문화를 갖지 못한 민족은 이미 한 민족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상실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100여 년 전 세계 최대의 국가였던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이 오늘날 그 존재마저 희미해진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 전쟁의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죽고 누가 살며, 누가 이기고 누가 졌으며, 내일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의 민낯을 보고 충격에 빠질 수도 있다.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조차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책속으로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한자라는 문자뿐 아니라 외국어로서 한자어도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새로운 외국어는 당연히 지배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일자 우리 고유의 말을 한자어가 대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가 있다. 물론 이를 문자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배우기보다는 역사적 변천이라는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배웠지만.
그러나 분명히 이는 언어 전쟁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후에 벌어질 한글전쟁보다 훨씬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그 무렵 우리 겨레가 사용하던 수많은 고유의 말이 한자어에 밀려 사라져버린 것이다. - ‘나 / 우리말, 1차 전쟁’ 중에서
한자나 이두로 기록할 때 공문이나 학술적 문장의 경우에는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인지의 말대로 우리 겨레는 훈민정음이 탄생하기 전까지 바람 소리나 학의 울음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를 그대로 표기할 수 없었다. 결국 한자나 이두로는 결코 표기할 수 없었던 우리 겨레의 말을 드디어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우리말 독립선언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게 정인지 서문인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 겨레는 말로만 이어져 내려오던 문명과 문화, 정신과 감정을 표기해 역사에 기록하고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자의 역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을 살펴볼 때 반드시 읽어야 할 문장에는 세종 어제서(御製序)와 함께 정인지의 후서(後序)도 포함되어야 한다. - ‘다 / 한글의 탄생과 제2차 전면전 발발’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외국에서 들어온 컴퓨터라고 하는 기계를 표현하는 데 아무런 고민 없이 그 나라에서 붙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우리가 자랑하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글은 영어 computer를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표기한 발음기호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다. 이는 computer를 읽는 발음기호 [k?m|pju:t?(r)]와 그 형태만 다를 뿐 아무런 차이가 없는 셈이다.
반면에 우리와는 달리 같은 한자 문화권이면서 독자적인 문자를 포기한 후 알파벳을 받아들인 베트남의 경우에는 표기는 알파벳이지만 명칭은 세계 유일한 자신들의 것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띠엔나오(??)라고 하는 신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중국의 경우는 우리가 그토록 경원시했던 뜻글자가 이른바 ‘글로벌(global, 세계적인?지구의)’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 ‘차 / 한글 세계에 떨어진 핵폭탄, 영어’ 중에서
“나는 영어 교육이 좀 더 보편화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백성들이 이 언어로 교육받지 않는다면, 지적인 발전 그리고 외국인들과 대등한 관계에 서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은 부질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언어의 종말》)
1855년, 하와이로 몰려드는 무역상과 거래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움직임이 일고 이를 통해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상황에서 하와이의 왕 카메하메하 4세가 한 연설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적어도 1940년대에 들어서는 하와이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고, 아니 제2언어로도 쓰지 않는 세대가 등장했다. 대개 그들은 카메하메하 왕이 바란 것처럼 외국인과 대등한 관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저임금에 천대받는 직업을 찾을 수 있었을 뿐이다.”(《언어의 종말》)
하와이어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200년 이상이 걸렸다. 반면에 대한민국에 영어가 본격적으로 흘러들어온 시기를 멀리는 1945년 이후, 가까이는 본격적인 서구적 산업화가 시작된 1970년대로 상정한다면 이제 고작 50~7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향후 100년 이상 영어의 침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후에도 우리말이 남아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오히려 특이한 생각이 아닐까. --- ‘차 / 한글 세계에 떨어진 핵폭탄, 영어’ 중에서
한글의 탄생 문자 라는 기적 저자 노마 히데키|역자 김기연, 박수진, 김진아|돌베개 |2011.10.09
원제 ハングルの誕生
저자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1953년 출생. 도쿄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아키타의 국제교양대학 객원교수로 있다. 1970년대에 현대일본미술전에서 입상한 바 있는 미술작가였던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던 한글의 매력에 빠져, 1983년 서른의 나이에 다시 도쿄외국어대학교 조선어학과에 입학했고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한국어학자가 되었다. 1996~199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있었다. 2005년 대한민국문화포장을 받았고 2010년에는 『한글의 탄생』에 쏟아진 호평과 인기 속에서 마이니치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어판 출간을 맞이하여
책머리에
서장 한글 소묘
01 한글의 구조
02 『훈민정음』이라는 책
제1장 한글과 언어
01 한글이라는 이름
02 한국어의 세계
03 말과 문자
04 한국어는 어떠한 언어인가
제2장〈정음〉탄생의 자기장
01 문자를〈만든다〉-한자의 자기장에서
02 자기 증식 장치로서의 한자
03 〈한문훈독〉시스템
04 한국어의〈한문훈독〉-〈구결〉의 구조
05 〈질량을 가진 텍스트〉
06 서방에서 온 길-〈알파벳로드=자음문잣길〉의 종언
제3장 정음의 원리
01 문자를〈만든다〉-공기의 떨림에서 음을 잘라 낸다
02 〈음〉에서〈게슈탈트〉로
03 단음=음절문자 시스템의 창출
04 사분법 시스템의 충격
05 음의 변용을〈형태화〉하다-형태음운론으로의 접근
제4장〈정음〉에크리튀르 혁명-한글의 탄생
01 〈정음〉혁명파와 한자한문 원리주의의 투쟁
02 〈용음합자用音合字〉사상-〈지〉의 원자를 묻는다
03 〈정음〉이여,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를 들으라
04 〈정음〉이여〈나ㆍ랏:말□〉을-에크리튀르 혁명 선언
제5장〈정음〉에크리튀르의 창출
01 〈정음〉이여 음을 다스리라-『동국정운』
02 〈정음〉이여 삼천 세계를 비추라-유불도의 길
03 〈정음〉이여 천지 우주를 배우라-『천자문』
04 〈정음〉이여 우리의 가락을-『두시언해』와 시조
05 〈정음〉이여 이야기하라, 읊으라, 그리고 노래하라-〈정음〉문예와 판소리
06 고유어의 혈맥과 한자한문 혈맥의 이중나선 구조
07 〈정음〉반혁명을 넘어서
제6장〈정음〉-게슈탈트의 변혁
01 〈형태〉란 무엇인가?
02 정음의〈모양〉과〈형태〉
03 신체성을 얻은 정음의 아름다움〈궁체〉
제7장〈정음〉에서〈한글〉로
01 鬪爭하는〈正音〉, 투쟁하는〈한글〉
02 다시 게슈탈트를 묻는다-근대에서 현대로
종장 보편을 향한 계기〈훈민정음〉
『훈민정음』을 읽는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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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우리는 ‘한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매일매일 한글에 둘러싸여 생활하는 우리.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한글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수한 문자인 것에 뿌듯해하지만, 혹 세종대왕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세종대왕 전에 우리 민족이 무슨 말을 하고 살았을지 궁금해하지는 않았는지? 과학적이고 배우기 쉽다는 한글의 구체적인 창제 원리는 무엇일까?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문화 속에 자리잡은 한글의 문화사적인 의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깊이 생각해 본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한글’이 ‘문화의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정작 한글을 쓰는 우리는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었다는 것 외에 그 이상의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한글의 창제는 중세의 지적 혁명이며 충격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언어란 무엇인고 문자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을 통해 한글에 대해서 통찰한다. 한글 이전의 문자생활, 한글의 창제 과정, 마침내 한글이 한반도에서 ‘지(知)’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과정, 나아가 그 미적 형태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한글이라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뜯어 보았다. 일본에서는 학자들의 호평을 받았음은 물론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독자들까지 매료시키며 3만 부 넘게 읽히고 있다. 이 책으로 저자는 2010년도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한글은 세계문자사의 기적이다
『한글의 탄생』은 단지 ‘한글’만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한글 창제 이전부터 있어 왔던 수천 년 동안의 문자 생활 및 환경을 꼼꼼이 짚으며, 조선의 임금 세종과 학자들이 이 <쓰기>와 <언어>에 대한 얼마나 무서울 만큼의 이해력과 분석력과 창조력을 통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는지를 밝히고 있다.
한글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살았을까?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동아시아에서 한자한문으로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한글’ 없이 한자한문만으로 글을 써왔던 15세기 이전의 한반도와 일본에서, 글을 조금이라도 잘 읽고 쓰기 위해 궁리해 낸 온갖 방법을 보여 준다. 이는 한글이 탄생하게 된 배경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까지 생각해 보게 하는 재미있는 지점이다.
한자문화권의 반대편에는 서방에서 동쪽을 향해 흘러 들어온 ‘알파벳로드’가 있었고, 세종 또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랍문자, 로마자, 몽골문자 등으로 가지를 치며 이어지는 이 ‘알파벳로드’에서 한글은 어떠한 영향을 받았고 통찰을 얻었을까, 그리고 어떤 모자람을 발견했을까? 이 광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아시아의 동쪽 끝 한반도에서 태어난 한글이 세계문자사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 존재인지를 넓고 보편적인 시야에서 바라볼 수가 있다.
극적으로 펼쳐지는 한글의 창제 원리
저자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한글의 탄생’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재현한다. 귓가에 들려오는 자연의 말소리로부터 ‘음’의 단위를 추출해 내고, 이들을 각각 ‘자모’로서 형상화해 설계해 내는 그 과정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정립된 갖가지 현대 언어학의 개념 이해에 이미 도달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특히 한글의 창제 과정을 과거에 벌어진 일로서 들려 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 이 순간 독자와 함께 새로운 문자 만들기 프로젝트에 착수한 듯 드라마틱한 시간 속으로 박진감 있게 인도한다. 또한 그 안에 동원된 정교한 언어학의 개념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한글의 ‘과학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데 함께한다. 그리하여 ‘15세기 현재’까지 아무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최신 문자 ‘훈민정음’의 탄생 과정이 경이롭게 펼쳐진다.
문자의 탄생에서 ‘지(知)의 혁명’에 이르는 거대한 드라마
한글은 문자체계로서 훌륭하게 창제되었으나, 아직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한글의 진정한 완성은 그 문자가 실제로 사람들에 의해 문장이 되고, 글이 되고, 책이 되고, 글씨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이 가장 먼저 부딪힌 최만리의 유명한 상소가 담고 있는 진정한 의도를 풀어 내고 이에 대한 세종의 반론을 서술한 부분은 책의 압권이다.
이 책에서는 한글이 사람들의 손에서 문장이 되고 텍스트가 됨으로써, 단지 하나의 문자체계가 아니라 기존에 있던 지(知)를 뒤흔들어 놓은 존재로서 등장했음을 보게 된다. 나아가 저자는 붓과 종이를 통해 만들어진 한글의 서예법,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글꼴 등 물질적인 차원에서도 한글을 보며, 훈민정음이라는 독특한 문자의 미적 발전과 성취까지도 다루고 고민한다.
저자는 한글이 불러일으킨 이 모든 것이 ‘지(知)의 혁명’이었으며, 한글은 그것을 가능케 한 ‘지의 원자(原子)’였다고 말하고 있다.
한글을 바라보는 일본인 학자의 열정 어린 통찰력
『한글의 탄생』을 쓴 저자 노마 히데키는 진지하고 열정적인 문체로 한글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인 한국어학자인 그는 언어와 문자의 보편에 이르는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을 최대한 풀어 전달하기 위해 곳곳에서 발휘되는 위트도 매력적이다. 이 책의 원서는 한국어와 한글을 거의 모르는 일본어 화자를 대상으로 쓴 것이다. 한글에 대한 기초적 소개에서부터 언어와 문자에 관한 전제까지 차근차근 풀어가는 내용은 일본의 독자에게는 ‘일본어의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어권의 독자에게 이 책은 반대로 한국어와 한글을 다시 보게 한다. 한국에서는 흔히 한글이 자랑스럽고 우수한 문자라 말하지만, 저자는 이를 한반도 내의 민족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더욱 더 크고 넓은 차원에서 구체적이고 드라마틱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책은 그리하여 독자가 한글이라는 존재의 맥락을 더욱 보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음식의 언어 국어학자가 차려낸 밥상 인문학 저자 한성우|어크로스 |2016.10
저자 한성우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과 아산을 오가다가 열두 살 이후로는 내내 서울에서 살았다. 아산에서 산 기간은 합쳐봐야 일곱 해 정도인데 말이나 행동, 그리고 머릿속은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대 진학을 꿈꾸던 자연계열 학생이었으나 진로를 바꾸어 1988년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거쳐 200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 재직하다 2007년에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전공 교수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전공 분야는 한국어음운론과 방언학이지만 일찍부터 글쓰기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경력을 쌓았다. 박사학위를 받기 전 (주)이텍스트코리아의 문장상담팀장을 맡아 문장컨설팅이라는 새로운 서비스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때 수도권의 문화재 안내문, 삼성전자를 비롯한 여러 회사의 매뉴얼 등 기관과 기업의 모든 문서에 대한 컨설팅을 하였다. 또한 문화방송의 우리말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서 아나운서, 기자를 비롯한 방송인의 언어에 대한 연구와 교육도 하였다.
글쓰기와 관련된 연구도 열심히 하여 많은 업적을 내었다. 글쓰기 및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저서로는 『경계를 넘는 글쓰기』 (2006), 『보도가치를 높이는 TV뉴스 문장쓰기』 (2006, 공저), 『방송발음』 (2008, 공저)이 있고, 논문으로는 『...텔레비전 자막의 작성과 활용에 대한 연구』 (2004), 『자막의 효율적 이용 방안에 대한 연구』 (2004), 『텔레비전 자막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 연구』 (2005), 『대중매체 언어와 국어음운론 연구』 (2008) 등이 있다. 전공 분야에서는 4권의 단독저서와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있다. 글쓰기 관련 교육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 현재 재직하고 있는 인하대학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글쓰기』 (2009), 『새내기를 위한 글쓰기 첫걸음』 (2012)이라는 온라인 강좌를 개발하여 지금도 서비스를 하고 있다. 또한 한국어문학전공 내에 실용글쓰기 과목을 개설하여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적인 글쓰기에 대한 연구결과를 학생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 지역은 물론, 중국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많은 지역을 조사하고 연구했지만 주로 반도의 서쪽을 대상으로 했다. 북한 지역의 말은 학문적, 민족적인 면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방언조사를 떠날 궁리를 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 먹고사는 이야기
1 쌀과 밥의 언어학
일편단심 밥! | 햅쌀에 담긴 비밀 | 반으로 줄어든 밥심 |
가마솥에 누룽지 | 죽이 한자어? | 삼시 세끼와 며느리밥풀꽃
2 ‘집밥’과 ‘혼밥’ 사이
밥의 등급 | 집밥의 탄생 | 식구 없는 혼밥 | 짬밥의 출세기 |
비빔밥 논쟁이 놓치고 있는 것 | 덧밥의 도전 | 이상하고도 씁쓸한 뻥튀기 |밥상의 주인
3 숙맥의 신분 상승
쌀이 아닌 것들의 설움 | 보릿고개를 넘기며 | 밀과 보리가 자라네 |
밀가루가 진짜 가루? | ‘가루’라 불리는 음식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옥 같은 수수 | 고급 먹거리?
4 빵의 기나긴 여정
빵의 언어학 | 잰걸음의 음식과 더딘 걸음의 이름 | 식빵, 건빵, 술빵 |
찐빵과 호빵의 차이 | 빵집의 돌림자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밥상 위의 동도서기와 서세동점
5 가늘고 길게 사는 법
면과 국수의 다양한 용법 | 뜯고 뽑고 자르고 | 중면과 쫄면의 기묘한 탄생 |
차가운 국수와 막 만든 국수 | 짜장면, 그 이름의 수난 | 중국 음식 우동, 일본 음식 짬뽕 | 어우러짐, 국수의 참맛 | 라면, 라?, 라멘
6 국물이 끝내줘요
국, 찌개, 탕의 경계 | 말할 건더기도 없다 | 국과 밥의‘따로 또 같이’ | 속풀이 해장국 |
‘진한 국’과‘진짜 국’의 차이 | ‘썰렁한 탕’과‘흥분의 도가니탕’ | 부대찌개라는 잡탕
7 푸른 밥상
푸성귀, 남새, 푸새, 그리고 나물 | 채소와 과일 사이 | 시금치는 뽀빠이의 선물? |
침채, 채소를 담그라 | 김장을 위한 짓거리 | 섞어 먹거나 싸 먹거나
8 진짜 반찬
중생과 짐승, 그리고 가축 | 알뜰한 당신 | 닭도리탕의 설움과 치느님의 영광 |
어린 것, 더 어린 것 | 부속의 참맛 | 고기를 먹는 방법
9 살아 있는, 그리고 싱싱한!
물고기의 돌림자 | 진짜 이름이 뭐니? | 물텀벙의 신분 상승 | 물고기의 스토리텔링 |
살아 있는 것과 신선한 것의 차이 | ‘썩다’와‘삭다’의 차이 | 관목어와 자린고비
10 금단의 열매
관능과 정념의 열매 | 능금과 사과 | 님도 보고 뽕도 따는 법 | 너도 나도 개나 돌 |
귀화하는 과일들의 이름 전쟁 | 키위의 여정 | 바나나는 길어?
11 때때로, 사이에, 나중에 즐기는 맛
주전부리와 군것질 | 밥을 닮은 그것, 떡 | 빈자의 떡, 신사의 떡 |
과자와 점심 | 달고나와 솜사탕의 추억 | 엿 먹어라! |
딱딱하고도 부드러운 얼음과자 | 불량한 배부름의 유혹
12 마시고 즐거워하라
액체 빵과 액체 밥 |말이여, 막걸리여? | 쐬주의 탄생 | 정종과 사케 |
폭탄주와 칵테일의 차이 | 차 한잔의 가치 | 사이다와 콜라의 특별한 용도 | 마이 마입소!
13 갖은 양념의 말들
맛의 말, 말의 맛 | 갖은 양념 | 말 많은 집의 장맛 | 작은 고추의 탐욕 |
웅녀의 특별식 | 열려라 참깨! | ‘미원’과‘다시다’의 싸움
14 붜키와 퀴진
부엌의 탄생 | 음식의 탄생 | 밥상의 하이테크 | 금수저의 오류 | 붜키의 추억
에필로그 | 오늘도 먹고 마신다
‘밥상’에서 ‘식탁’으로 ‘부엌’에서 ‘퀴진’으로
음식 격랑 시대의 자화상
한 도자기 브랜드가 1940년대부터 출시해온 밥그릇의 변천사를 보면 지난 70년간 그 용량이 550cc에서 260cc로 반 이상 줄었다.(1장, 28~29쪽) 밥그릇의 크기는 왜 이렇게 급격히 줄어든 걸까? 그에 반해 직장인이 가장 선호하는 점심 메뉴는 지난 6년간 부동의 1위를 지켜온 ‘김치찌개’를 제치고 ‘가정식 백반’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백반 메뉴에 ‘가정식’이 앞에 붙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밥그릇 크기는 작아지는데 ‘집밥’에 대한 갈망은 커지는 현상은 오늘 우리 삶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서양의 음식이 오랜 기간 혼종의 과정을 거쳤다면, 우리는 음식뿐 아니라 식생활 전반이 한 세기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격변했다. 저자는 방바닥에 앉아 먹는 밥상에서 의자에 앉아서 먹는 식탁으로의 변화에 주목한다. 그야말로 밥상의 주인이었던 커다란 밥그릇, 그리고 국그릇과 자잘한 반찬이 차려진 우리네 밥상이 국적을 막론한 각종 음식들이 올라오는 식탁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고봉밥’이 익숙한 아버지 세대에서 ‘빵’이 밥이나 다름없는 아이들 세대까지, ‘밥’에 집착하던 우리의 삶은 어느새 ‘먹을 것[식食]’ 전반을 즐길 수 있을 만큼 풍요롭게 바뀌었다.
밥이 담기는 그릇, 밥이 차려지는 공간뿐 아니라 밥이 만들어지는 공간, 밥을 먹는 장소도 달라지고 있다. 불을 때어 음식을 만들어내는 전통적 공간을 가리키는 고유어 ‘부엌’에서, 음식을 차리는 현대식 공간을 가리키는 한자어 ‘주방廚房’으로의 변화에 더해, 영어 ‘키친kitchen’이 어느새 우리말 속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키친과 어원이 같은 프랑스어 ‘퀴진cuisine’은 ‘요리’, ‘요리법’ 혹은 ‘음식점’까지 키친과는 또 다른 용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14장, 349~350쪽) 또한 밥을 집에서 먹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 ‘집밥’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집밥의 부재를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집에서보다 ‘밥집’에서처럼 ‘밖’에서 ‘때우듯’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2장, 47~48쪽)
이처럼 식생활의 변화는 오롯이 말에 반영된다. 우리가 먹고 말하는 것들에 우리의 삶과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나간다. 이 책은 삼시세끼의 말들을 통해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포착해낸다. 음식의 언어는 우리 식생활의 자화상이자 이력서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을 어떻게 말하는가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게 하는 길이라 믿는다.”
쌈과 샐러드, 닭도리탕과 치느님, 군것질과 디저트, 흙수저와 금수저……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 것을 넘어서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풍성한 언어
책은 영어 ‘라이스rice’가 우리말에서는 ‘벼’, ‘쌀’, ‘밥’으로 구별된다는 점, ‘쌀’과 ‘밥’을 일컫는 사투리는 방방곡곡 어디에도 없다는 점, ‘밥’은 어휘적 변화를 전혀 겪지 않은 드문 단어라는 점을 밝혀내는 데서 시작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있어 밥이 지닌 특수한 의미와 정서를 짚어본다.
주식인 밥을 거쳐 빵과 면을 다룬 장에서는 한중일 3국의 같은 듯 다른 음식들의 향연이 흥미롭다. 중국의 ‘라몐’, 거기서 유래된 일본의 ‘라멘’과 한국의 ‘라면’은 같은 한자인 ‘麵(밀가루 면)’을 쓰지만 모두 각국의 문화를 담은 고유의 음식이 되었다. 떡을 뜻하는 한자 ‘餠(떡 병)’이 쓰인 음식도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우동, 짬뽕, 만두 같은 음식들에서 우리는 세 나라의 역사와 역학을 들여다볼 수 있다.
채소를 다룬 장에서는 여러 재료를 한데 둘러싸 하나로 만드는 ‘쌈’과 다양한 것이 뒤섞이는 공간인 ‘샐러드 볼’을 이야기하며 우리와 서양의 문화 차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국을 다룬 장에서는 ‘부대찌개’를 통해 동서양을 막론한 재료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어우러지는 국의 참맛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우리는 밥을 왜 ‘짓는다’라고 할까? ‘비빔밥’ 논쟁이 놓치고 있는 것은? 김치는 어쩌다 자부심과 혐오를 동시에 품게 됐을까? 닭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가 아니다? 군것질과 디저트의 결정적 차이? 금수저론에 숨겨진 뜻밖의 오류? ‘숟가락’과 ‘젓가락’, 왜 받침이 다를까? 같은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봤음직한 물음에 대해 언어학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답변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핵심어는 ‘음식’과 ‘언어’ 그리고 ‘우리’ 세 가지이다. 이 책은 ‘음식’에 관한 책이되 ‘요리, 요리법, 요리사, 맛집, 먹방’ 등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또 ‘언어’에 관한 책이니 말의 의미, 기원, 변화 등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이런 것들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것에 대한 책이되 ‘우리’의 것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국어학자가 차려낸 따뜻한 말들의 밥상
혼밥의 시대에 읽는 집밥 같은 이야기
저자는 앞서 언급한 ‘집밥’의 탄생에서 나아가 ‘식구’ 없는 ‘혼밥’의 세태를 언어학적으로 짚어내기도 한다. ‘햇반’의 파격적인 조어법에 감탄하다 ‘혼밥’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며 쓸쓸해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다. 그는 전작 『방언정담』에서 잘 보여주듯 자신의 경험이 풍부하게 녹아든 말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말의 정조와 우리 삶의 풍경을 한 편의 소설처럼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 이 책에도 그러한 특징은 그대로 드러난다. 삼대가 모여 있는 밥상의 풍경, 타향에 살아 있는 우리 민족의 말들, 문학작품과 노랫말, 옛 음식 광고와 포스터에서 오늘의 TV 프로그램까지 종횡무진하며 때로는 구수하게, 때로는 얼큰하게 우리의 ‘먹고사는’ 일을 담아냈다.
밥그릇이 점점 야위어가고 밥상의 구석으로 밀려나는 시대, 식구는 사라지고 혼밥이 일상이 된 시대에 이 책은 삼시세끼 말들이 품고 있는 우리네 ‘정’과 ‘온기’를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책속으로
“먹고살기 힘들다.”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 입에서는 습관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이 말이 나오는 맥락도 그렇고, 말 자체의 뜻도 결국은 ‘살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냥 ‘살기 힘들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그 앞에 ‘먹다’를 붙이는 것이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말하거나 더 어려운 상황에서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먹는 것’이 곧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곧 ‘먹는 것’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삼시세끼]란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있지만 ‘삼시에 세끼’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삼시’는 당연히 아침, 점심, 저녁의 세 때를 가리킨다. ‘아침’과 ‘저녁’은 본디 해가 뜨고 지는 무렵을 뜻하는 고유어지만 ‘점심’은 때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고유어도 아니다. ‘점심’은 한자어‘點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억지로 풀이하자면 마음에 점을 찍듯이 조금 허기를 달래며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다. 이 풀이대로라면 ‘점심은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장 쌀과 밥의 언어학」중에서
사전에서는 ‘食口’라는 한자를 붙여놓고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食口’는 한자만 보면 ‘먹는 입’ 정도로 풀이가 되지, ‘가족’의 대용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전의 풀이대로 ‘식구’가 ‘食口’라면 이는 집밥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 1인 가구가 점차 늘어가는 상황에서 ‘식구’란 말은 점차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집에서 밥을 먹어도 끼니를 같이할 사람이 없어 혼자 먹게 되니 ‘식구’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2장 ‘집밥’과 ‘혼밥’ 사이」중에서
‘라면’의 기원은 아무래도 중국어 ‘라몐’에서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 ‘麵’의 발음은 ‘몐’이나 ‘멘’이 아닌 우리식 한자음을 따라 ‘면’이 된다. 라면 역시 3국을 회유하는 동안 같으면서도 다른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한중일 3국에서 그 이름이 조금씩 다르듯이 각국 사람들이 ‘라면’, ‘라몐’, ‘라멘’이란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음식이 각각 다르다. 우리에게 라면은 면과 스프를 물에 넣어 끓여내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라면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라면은 면발도 직접 만들고 국물도 따로 만들어낸 것이다. 중국 역시 손으로 뽑아낸 면을 각종 육수에 말아 먹는 음식을 뜻한다. ---「5장 가늘고 길게 사는 법」중에서
부대찌개는 한마디로 잡탕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재료, 한중일을 섭렵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이 부대찌개다. 엉뚱하게 된장 콩이 올라가기도 하고 수제비가 첨가되기도 한다. 모든 음식이 그렇다. 국경을 넘나들며 재료와 조리법이 섞이는 것이 음식이니 부대찌개도 예외는 아니다. ---「6장 국물이 끝내줘요」중에서
‘갖은 양념’은 ‘균형’과 ‘조화’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갖은 양념’은 가지고 있는 온갖 양념을 양껏 쓰라는 의미가 아니다. 음식의 맛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재료와 양념 사이에 균형이 맞고, 양념끼리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13장 갖은 양념의 말들」중에서
‘밥’이 주인이어서 ‘밥상’으로 불리던 것이 ‘먹을 것’이 주인이어서 ‘식탁’으로 불리는 것에 자리를 내준 변화가 가장 큰 차이다. ‘밥’에 집착하던 우리의 삶이 ‘먹을 것’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을 만큼 풍요롭게 바뀐 것이 가장 큰 변화다. 그 변화는 오롯이 말에 반영된다. ‘밥’이란 단어 하나에 대해서 세대별로 느끼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다르다. ---「14장 붜키와 퀴진」중에서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저자 시정곤, 정주리, 장영준, 박영준, 최경봉 외 |한겨레출판 |2003.08
목차
머리말
여는 글
1장 영어가 밀려오다_영어 공용화 원년
속보! 영어 공용화 시작!
세계가 주목하다!
영어로 하는 대통령 선서
재미교포, 한국 사회를 점령하다
한국어 학교냐 영어 학교냐?
국어 시간이 된 영어 시간
영어 이름이 생겼어요!
우사모의 촛불시위
세종대왕과 조지 워싱턴
2장 영어가 자리잡다_영어 공용화 그 후 30년
예상치 않았던 변화
한국어 학교가 사라지다
아이의 영어 편지
한국의 언어 계층 구조
노인 세대들의 말 못하는 심정
미국식 제스처 따라잡기
핼러윈 데이 공식휴일로 지정하다
아이들의 혀가 길어졌다
부자들의 영어 나라
영어로 뭉치고, 영어로 흩어지고
결혼 상대자 선호도 미국인이 1위
대한민국은 행복하다
좋은 영어 이름 짓기
성조기가 낯설지 않은 아이들
3장 영어의 파라다이스가 도래하다_영어 공용화 그 후 60년
영어 공용화의 어두운 그림자
영어로만 말하는 아이들
달라진 언어 문화
표준 영어와 사투리 영어
한국 영어와 미국 영어
부익부 빈익빈
멀기만 한 노벨상
다시 필요해진 외국어
영어 실력, 좋아졌는가?
사라져 가는 한국어 교육
4장 이젠 중국어_영어 공용화 그 후 100년
새로운 물결
변화하는 것은 아름답다 - 중심축의 이동
'바나나 민족'과 '바나나 세대'
이젠, 자이지엔(再見)!
중국어다운 중국어를 사용하자
중국어 공용화에 대한 반대와 찬성
5장 한국어가 사라진 뒤_영어 공용화 그 후 50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500년 전 제작한 타임 캐슐이 개봉되다
문자와 언어의 비밀을 풀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질 때까지
코리아어로 된 모든 자료가 데이터베이스에서 누락된 경위는?
코리아어 문법책이 타임 캡슐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말'에서 '우리'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내다
코리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다
코리아어가 하나의 언어로 인정되다
참고문헌
부록_영어 공용화 관련 자료
책속으로
필자들은 영어 공용화를 실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영어 공용화가 좋으냐 나쁘냐 라는 가치 판단은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대신 영어 공용화가 실시되고 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야기 서술의 주체를 필자가 아닌 미래의 어떤 사람으로 설정함으로써, 미래 사람들의 눈으로 미래에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서술 방법을 통해 필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자 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살펴보면서 영어 공용화의 문제점을 독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선정하는 과정에는 필자의 관점이 상당 부분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선에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10
외국 학자들 중에는 한국어의 급격한 쇠퇴와 영어의 급성자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 정부가 이대로 한국어를 방치한다면 얼마 안 가서 한국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멸 언어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사회학자는 언어 멸종은 한 문화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문화 생태계, 철학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 한국 사회 내에서 반향은 거의 없다. 영어 공용화 이후 전 국민의 영어 능력이 평균적으로 신장했으며 이로써 국가의 경제력이나 위상이 한층 나아졌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90
영어는 사회학적으로 뚜렷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 다시 말해, 존과 같은 사람을 하류층에, 그리고 미국 북동부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을 상류층에 자리매김하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 공용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상류층을 형성하는 것은 서울 영어가 아니라 미국 북동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거나,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았거나, 아니면 고액 과외비를 들여 가면서 북동부 방언투를 배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방송과 신문, 정치, 경제, 문화의 최상류층을 형성하면서 사투리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대척점에 두고 있다. 사투리 영어를 구사하는 존과 같은 사람들이 하루의 빵을 걱정하면서 동물과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사이, 미국 북동부 영어를 매끈하게 구사하는 이 사람들은 연일 상한가를 치는 주식값을 계산하며 다음 바캉스를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다 하얗게 셀 지경이다. 부익부 빈익빈은 한때 그랬을 것으로 추측되는 교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어에서 오게 되었다. '고급 영어 = 상류층' '사투리 영어 = 하류층' 이란 공식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134-135
Chan Chan - Buena Vista Social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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