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빨갱이'가 된 인간의 뼈, 그리고 유해발굴 저자 노용석|산지니 |2018.07.
저자 노용석-2005년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논문 제목「민간인학살을 통해 본 지역민의 국가인식과 국가권력의 형성」)를 취득하였다. 이후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 사업을 총괄하였다. 현재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에 재직 중이다. 저서로 『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폭력과 소통』(공저)『트랜스내셔널 노동이주와 한국』(공저)이 있다.
목차
머리말
서론 의례과정으로서의 과거사 청산: 국가폭력의 새로운 극복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과거사 청산
의례과정으로서의 과거사 청산
죽음과 의례
비정상적 죽음(uncommon death)과 국가폭력
의례로서의 유해발굴
왜 유해발굴이 성행하는가?
기억과 사회적 기념
제1장 시체를 찾는 ‘귀신들’: 민간인 학살과 시신의 유기
1.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개요
2.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규모와 형태
3. ‘빨갱이 기피증’: 민간인과 양민의 이분법
4. 시체를 찾는 ‘귀신들’: 학살 이후 시신을 찾아서
제2장 유해의 수습과 새로운 공포
1. 4.19혁명과 과거사 청산의 시작
2. 4.19혁명 이후 유족회 결성과 ‘장의체계’의 수립
3. 5.16 군사쿠데타와 ‘무덤의 파괴’
4. 1960년대 민간인 피학살자 진상규명 운동과 유해발굴의 관계
5. 과거사 청산과 유해발굴의 암흑기(1961년~1999년)
제3장 약화된 ‘공공의 비밀’과 유해발굴의 다양화
1. 1999년 노근리사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2. 과거사 청산과 새로운 내셔널리즘, 그리고 유해발굴
3. 유해발굴의 사례들(1999년~2005년)
4. 약화된 ‘공공의 비밀’과 새로운 차원의 유해발굴: 1999~2005년 유해발굴의 특징
제4장 국가와 유해발굴: 진실화해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도 유해발굴
1. 진실화해위원회의 유해발굴 결정 과정
2.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결과
3. 진실화해위원회 사업 외 유해발굴(2006년~2010년)
4. 민간인 학살과 국가의례과정의 형성
제5장 사회적 기념으로의 전환
1. 시민사회의 유해발굴
2. 2014년부터 시민사회단체에 의한 유해발굴 경과 및 결과
3. 사회적 기념으로의 유해발굴 인식
제6장 위계화된 죽음과 사회적 기념의 국가주의화
1. 사회적 기념의 현실
2. 사회적 기념의 국가주의화와 죽음의 위계화
보론 라틴아메리카 과거사 청산과 유해발굴
1. 라틴아메리카와 국가폭력
2. 라틴아메리카 유해발굴의 사례들
3. 라틴아메리카 유해발굴의 특징
참고문헌
찾아보기
노용석 교수는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주관한 13개 유해발굴을 주도했고, 2011년부터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참여해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의 진상 파악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연구범위를 한국 사회로부터 라틴아메리카 사회까지 확장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국가폭력의 치유와 상징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간다. 「서론」에서는 죽음, 의례의 정의부터 과거사 청산의 의의와 유해발굴이 성행하는 이유까지 과거사 청산과 유해발굴에 대한 배경 지식을 소개한다. 1장「시체를 찾는 ‘귀신들’」에서는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 개요와 규모, 형태에 대해 상세히 밝힌다. 2장 「유해의 수습과 새로운 공포」와 3장 「약화된 ‘공공의 비밀’과 유해발굴의 다양화」에서는 민간인 학살 이후 이념의 대립으로 쉽지 않았던 유해발굴의 과정과 4.19 혁명 이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유해발굴의 과정을 다룬다. 4장 「국가와 유해발굴」, 5장 「사회적 기념으로의 전환」, 6장「위계화된 죽음과 사회적 기념의 국가주의화」에서는 노무현 정부 이후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유해발굴과 유해발굴이 사회적인 행위로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지막 보론 「라틴아메리카 과거사 청산과 유해발굴」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유해발굴 사례를 들며 고민의 범위를 넓힌다.
왜 지금,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이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가?
정치적 변화와 무관하게 과거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던 피해자들의 유해가 아직까지 방치되어 있으며, 그 가족들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러한 ‘원한’을 사회에 그대로 남겨둔 채 우리는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또한 사회의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항상 새로운 법적 장치의 보완과 같은 활동일까? _ p.13 「머리말」에서
노무현 정부 이후 ‘과거사 청산’ 법 개정이 본격화되었고, 2005년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공권력의 남용으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하였다. 이후 유해발굴 작업은 몇 년 동안 멈춰 있었지만,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다시 활발히 이루어지는 지금 이 시점에 유해발굴의 필요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저자는 유해발굴을 위한 법적 장치의 보완도 중요하지만 유해발굴이 사회적 기념으로서 전환되는 행위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유해발굴은 국가만의 획일적 작업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현재까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생각해보고,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어두운 역사와 그 회복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걸어갈 길을 찾을 수 있다.
책속으로
학살과 희생은 크게 ‘우연성’과 ‘고의성’이라는 측면에서 구분할 수 있다. 즉 학살은 ‘의도된 정책 하에서 자신들의 사상 및 정책과 반대되는 이들에 대한 살해’를 말한다. 주로 이러한 학살은 규모면에서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거의 ‘대량 학살(massacre)’의 개념과 일치하고, 국가와 같은 거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p.45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사회의 학살에 대한 개념은 ‘양민’에 고정되어 있었다. 즉 ‘양민’과 ‘민간인’의 범주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때 ‘양민’이라 함은 ‘착한 백성’, 즉 좌익혐의가 전혀 없는 깨끗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2000년대를 전후해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에서는 학살의 범주를 ‘민간인’으로 재규정했으며, 이때 ‘민간인’은 ‘무장하지 않은 비전투요원’의 범위로서 좌익 혐의자라 할지라도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참하게 학살된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 p.53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이외 국가기관에 의해 수행된 다수의 유해발굴이 있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과거사 청산을 주요 개혁과제로 공포하면서 각종 과거사 청산 관련 유해발굴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발굴은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정리기본법 이외 독자적인 과거사 청산 법률을 가지고 있던 제주 4.3사건과 노근리 사건 등의 영역에서 실시되었다. --- p.208
이와 같은 발굴 단계의 ‘과학화’ 및 ‘공식화’는 발굴된 유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1960년도 유해발굴 당시 유족들은 발굴된 유해가 자신의 가족들이라 인식하였지만 사회적 ‘증거’나 ‘표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유해발굴에서는 많은 발굴이 전문적 발굴팀의 주도하에 작업이 이루어짐으로써, 개인적인 연고를 주장하며 유해를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개별적 지위에서 거리를 둔 ‘사회적 표상’으로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 p.220
이렇듯 사회적 기념을 완성하기 위해서 국가의 참여는 반드시 필요하다. 많은 유족과 시민사회단체들도 과거사 청산의 마무리를 국가가 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국가주도 기념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국가주도의 사회적 기념은 자칫 또 다른 방식으로 개별적 기억을 억누르면서 국가주의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252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의 진짜 의미는
[인터뷰] '국가폭력과 유해 발굴의 사회문화사' 펴낸 노용석 교수
지난 노무현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함께 근무하던 '직장동료' 노용석 교수가 최근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를 출간했다. 그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을 연구했고 유해 발굴 사업을 주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 전후기 국가폭력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전개 과정, 피학살자들의 유해 발굴 과정,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 얻게 된 풍부한 사례와 자료에 이론을 더해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유해발굴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유해발굴의 의미를 단순히 가족의 시신을 발견하는 '좁은 단위'에서 국가와 인간의 보편적 인권을 이야기하는 '넓은 단위'로 확장하여 해석하고 있다.
지난 9월 8일부터 10월 1일까지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하여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유해 발굴, 국가기구가 아닌 민간단체에 의해 실시
- 지난 1950년 7월경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의 진실은 국가 공권력의 명백한 잘못이었음이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입증되었다. 하지만 지난 2015년의 학살피해자들의 유해발굴은 정작 국가기구가 아닌 민간단체에 의해 실시되었다. 왜 국가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유해발굴이 국가기구가 아닌 민간단체에 의해 실시되었다고 보나?
"국가가 가해자임에도 민간단체에 의해 발굴이 실시된 것은 외형적으로 볼 때 법적, 정치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대한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 의례적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 국가는 민간인 피학살자와 같은 죽음에 대해 국가의 의무를 수행할 근본적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시민사회단체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국가는 많은 자본을 투여해 전사자 유해 발굴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국가위주의 역사의식을 고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인 피학살자의 유해 발굴은 위와 같은 취지로 볼 때 국가에게는 커다란 반사이익이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방치된 죽은 자의 유해를 발굴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적군이라 할지라도 전사한 이들의 유해를 발굴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문화적 조건이며 의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과정으로서의 유해 발굴이 아니라 사회의 의례를 완결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유해 발굴이 필요한 것이다."
- 많은 시간 동안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은 사회의 밝은 부분으로 나오지 못했다. 왜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학살 피해자들이 어둠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보는가?
"민주화과정 이후에도 본질적으로 유해 발굴이 필요한 부분은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피학살자의 죽음은 개인이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게는 크나큰 아픔일 수 있지만, 국가에게 이 죽음으로 인해 얻어지는 효과는 미미할 뿐이었다. 민주화된 정권 역시 피학살자에 대한 유해 발굴이 큰 범주에서 볼 때 새로운 집단 정체성을 창조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민주화와 반민주화의 문제가 아니라 과도하게 국가정체성만을 강화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인식은 바뀌어야 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큰 범주에서 '민주화' '반민주화'라는 카테고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단정체성이 자리 잡는 순간에 '개인의 기억과 위령'이 얼마나 보장되는가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그 죽음들이 국가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는 집단성 이외에 개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의례를 적극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또한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은 개별적 위령의 보장을 떠나 사회적으로 기념되어, 다시는 그러한 악행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는 기념 구조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개인의 기억과 위령', 그리고 '사회적 의례'를 형성하기 위한 기반이 부족하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죽음들이 아직까지 정착할 수 없는 것이다."
유해 발굴, 악행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기제로서의 역할
- 지난 200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관련 유해발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유해발굴은 우리 사회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떠한 문화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나?
"유해발굴의 상징성은 단순히 인간의 뼈를 지상으로 수습한다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실 유해발굴은 고고학적이고 법의인류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행위로 인해 얻어지는 것은 잊힌 소수자의 기억과 진실을 사회적으로 공유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유해발굴은 의례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하여 누구도 모르는 곳에 암매장되어있던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의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결국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발굴은 비정상적 죽음을 당하여 암매장되어 있던 이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의례적 행위이며, 또한 이들의 기억과 존재를 사회적으로 승화시켜, 다시는 이러한 악행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기제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해 발굴 업무를 담당하면서 다양한 지역의 유해 발굴을 주도하였는데 당시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발굴을 현장에서 직접 실시하면서 느낀 점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유해발굴을 실시하면서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현재까지 한국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시스템적인 측면이 많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굴을 실시하는 조직 및 체계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만, 유해발굴을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은 유해를 발굴하여 진실을 규명하고 싶어 하지만,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위령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단지 유해발굴의 역사가 짧아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기념과 위령에 대한 사회적 합의 및 체계가 원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인 규모로 자행되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 이후 특별히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만 민간인 학살 유족회 결성과 진상규명 요청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우선 경상남북도의 많은 지역은 한국전쟁 중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은 지역이었으며, 설사 인민군이 들어왔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 동안 인민군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것은 한국전쟁 초반 낙동강을 중심으로 약 3개월간의 지난한 교전이 지속되었으며, 이후 1950년 9월 이후 전황이 빠르게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많은 지역은 이승만 정부가 전쟁초기 빠르게 후퇴를 하는 바람에 제법 긴 '인공' 시기를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북한군에 동조하거나 '부역'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역혐의'는 1950년 9월 이후 다시 남한정부가 인민군 점령지역을 재수복했을 때 상당히 많은 보복과 학살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부역혐의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고 말한다.
부역혐의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다른 유형의 학살과 비교해 볼 때 개인적 원한과 보복이 짙게 깔려 있으며, 상당히 잔인한 형태의 린치가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해당 사회의 전반적 경향은 공포와 침묵으로 바뀌게 되고, 많은 경우 누구도 학살과 관련한 담론을 거론하지 않게 된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경우 1950년 9월 재수복 이후 상당수의 부역혐의자에 대한 보복이 행해졌고, 이로 인해 해당 지역의 피학살자 유족 혹은 주민들은 4.19혁명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어떤 규탄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향후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 오마이뉴스 18.10.06 김성수(wadans)
'PD수첩' PD,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지체할 시간 없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연출한 김동희 PD "생존자 대다수 노령...갈수록 진상규명 어려워져"
▲ MBC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편에서 김동희PD(오른쪽)가 피해자 증언을 듣고 있다. ⓒ MBC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로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8일 방송된 MBC <PD수첩>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아래 '민간인 학살' 편)을 연출한 김동희 PD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문경으로, 아산으로, 제주로 향했다. '불행'이라는 한 단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세 시간을 훌쩍 넘겨도 끝날 기미가 없었다.
9일 MBC에서 만난 김동희 PD는 "이제는 (시청자에게) '국가의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 편은 어떻게 착안해 준비하게 됐나.
예전부터 관련 자료들을 쭉 찾아보고는 있었지만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오래된 과거의 일이라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이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계속 자료를 들여다보게 됐다.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그러면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종전이 논의되면서 이번 편이 갖는 의미도 더욱 커진 것 같다.
사실 이 시점에 종전 선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웃음) 취재를 시작한 건 제주 4·3 사건 전후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사건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거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추념식에 참석하는 등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놀랍더라. 이제 이런(전쟁 중 민간인 학살) 이야기를 해도 되겠구나, 과거사 청산 문제에 관심을 갖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가 당시의 비극상을 듣는 것도 힘든 일이었을 텐데.
만난 분들이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시작해 현재 시점까지 이야기를 쭉 이어가시더라. 무슨 말이냐면, 이 분들이 그 때의 일로 지금까지 무척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거다. 가족을 잃은 고통이나 슬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이로 인한 고통을 드러내고, 싸우고, 이 모든 과정이 다 현재까지 너무 힘들게 이어지고 있더라. 그러니 이야기가 수십 년 치일 수밖에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어떤 분께는 현장에 대한 이야기, 어떤 분께는 소송에 대한 이야기 등등으로 나눠서 여쭤보려고도 했는데, 결국 안 됐다. 다 들어야 했다. 어떤 날은 두 시간도 세 시간도 걸리고 했지만 차마 (이야기를) 못 끊겠더라. 이야기의 디테일들도 숨이 막힐 정도로 자세했다. (당시) 현장에 대한 아주 자세한 묘사, '그 날'을 비롯해 그 후로 겪은 일에 대한 디테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만큼 생존자나 유족들에겐 당시의 이야기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는 의미겠다.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들긴 힘들었지만 의무감이 들었다. 이 분들께서 이런 이야기를 어디 가서 하시겠으며, 이런 이야기가 자세하게 방송된 적도 없었지 않나. 그럼에도 (증언을) 다 방송하지 못해 아쉬웠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조사관이 증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해 주신 이야기가 그랬다.
인솔자 몇 명이 사람들을 (학살하기 위해) 특정 장소로 데려가던 중, 생존자 여성이 갓난쟁이를 업고 따라가다 중간에 일부러 도랑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업고 있던 아기마저 울지도 않고 숨을 참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 정도로 공포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내 '이게 사람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인가, 아무리 옛날이라지만 가능한 일인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는 것에서 나아가 이명박 정부 당시 석연찮은 판결을 내렸던 사법부에도 주목했다.
지금 우리의 법이, 또 사법부나 우리 국가가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송을 놓고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다. 판결 과정이나 판결문으로만 보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판결이 과거보다 후퇴한 것이 사실이다. 국가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인정받는 부분이나 소멸시효도 축소됐고, 청구권도 확 줄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개입이 있었고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사법부를 다룬 부분은) 많이 축소됐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쉽다.
정권이 바뀌고,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국가 권력이 가한 폭력'에 대해 사과한 만큼 앞으로 흐름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 국회에 '정원섭 법'(영화 <7번방의 선물>의 실존인물인 정원섭 씨처럼 국가로부터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경우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할 수 없도록 하는 법-기자 주)이 발의된 상황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니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욱 전향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마냥 시간이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정부에서 과거사 문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키긴 했다. 그런데 정말 급한 일이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이) 대부분 노령이기 때문이다. 2004년인가 2005년에 비슷한 소재를 다룬 방송이 있었는데 그 방송에 나온 목격자나 생존자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더라. 이번에 운 좋게 만나 뵌 분들도 대다수 80대였다. 이러다간 당시 상황을 아시는 분이나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다 돌아가셔서 (진상규명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민간인 학살' 후속 편도 제작할 생각이 있나.
만약 다시 한다면 '과정'을 담고 싶다. 이번엔 내용만 설명하기에도 숨 가빠 과정들이 많이 생략됐다. 이번에 만난 분들이 싸워온 과정이 정말 엄청나다. 국가로부터 피해를 입은 것도 모자라 억울함을 드러내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말하기까지도 수십 년이 걸렸다.
고양시 금정굴의 경우 유족들이 1995년에 직접 발굴을 했는데, 그때도 (주변에서) '빨갱이다' '여기 그런 일 없었다, 뼈 안 나온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고 한다. 발굴해 놓은 유골도 누가 가져갈까봐 유족들이 돌아가며 밤새 지켰다고 하고. 이런 과정들이 전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9년간 <PD수첩>이 사회고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런 만큼 MBC가 정상화된 뒤 <PD수첩>의 활약을 기대하는 시청자도 많다.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예전처럼 변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회사를 가지고 장난치던 때에는 <PD수첩>을 못하게 하려고 제작 환경과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PD들은 열심히 일했고, 하지만 많이 조롱받기도 했고, 그런 점이 많이 가슴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나.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 먹칠을 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PD수첩>은 MBC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상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과거 다른 프로그램들에 비해 더욱 많이 망가졌던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MBC가 회복됐다, 제 역할을 한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만큼 지켜보는 사람들도 많고, 개인적으로 무딘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담스럽기도 한 게 사실이다. 그런 무게가 있지만…어쩌겠나, 감당해야지. (웃음)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다./이미나 기자 pdjournal. 18.5.11
PD수첩- 민간인 학살에 국가 배상마저 거부한 국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만든 가이드라인, 학살 희생자 두 번 죽인 국가
좌우 이념갈등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숨져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왜 자신이 그렇게 잔인하게 학살되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국군과 경찰, 미군과 동네 극우 청년들에 의해 사망했다. 그 사망자의 대부분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인류 범죄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퇴보한 권력 양승태 대법원장이 만든 가이드라인, 학살 희생자 두 번 죽인 국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북한산 근처에서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우이동에서 발견된 유해들은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해골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 우이동 토박이들은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공사가 매일 벌어지는 서울에서는 알 수 없는 유해들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유해들을 제대로 수습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현장 노동자들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이동에서 다량의 유해들이 발견된 사실도 공사 중 우연하게 현장 노동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MBC PD수첩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편
유해는 발견되었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이동 토박이는 주 선생이라고 주장했다. 음악을 가르쳤던 주 선생과 가족들의 유해라는 주장이다. 두 할아버지의 공통적인 주장은 있었지만 해당 초등학교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1950년으로 추측되는 그 시기만 학교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 선생 가족과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유해는 서울 수복 후 이어진 보복 과정의 학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3개월 동안 지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그들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서울 수복 후 이제는 다른 쪽에서 북한에 동조한 이들을 찾아내 학살을 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서울에서 처음 발견된 유해들이 어린 아이와 노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전쟁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어린 아이들까지 학살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울 수복 후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는 증언과 기록들은 존재하지만 유해가 발견된 것은 우이동이 처음이었다. 이는 천만 인구가 사는 서울 어딘가에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이들이 묻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이동 유해 발견은 그저 말로만 떠돌던 민간인 학살이 실제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MBC PD수첩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편
아산시 배방읍 폐금광에서 발견된 유해는 충격적이었다. 유해 발굴 40여일 만에 200여 구가 발견되었다. 구덩이 속에 차곡차곡 쌓인 유해들을 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졌는지 추측하게 한다. 구덩이를 파고 사살하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다시 사살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배방읍 유해 현장에서 발굴된 것은 단순히 뼈조각들이 아니었다. 90여개의 비녀, 그리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았던 푸른 구술과 장난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민간인 학살 장소에서 사망한 이들이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유품들이다.
이 학살을 주도한 이들이 동네 치안대였다는 점도 충격적이다. 서로 잘 알고 지내왔던 이웃들이 하루아침에 잔인한 학살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그저 밥을 달라는 북한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이들까지,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은 이유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MBC PD수첩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편
경찰이 지시하고 지역 청년단이 학살의 가담한 금정굴 학살 현장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태극단 소속의 생존자는 이무영 경찰서장 가족이 전쟁으로 학살당하자 보복을 했다는 주장이다. 북한군이 학살하고 돌아간 후 남겨진 이들에게 가해진 학살은 잔인했다.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자신의 가족이 학살당했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그 수백 명에 달하는 민간인 중 이무영 당시 고양 경찰서장 가족을 살해한 이가 있고, 가담자가 있었을지 알 수가 없다.
경북 문경 석달 마을에서는 국군들이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진규 소위가 이끈 국군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후 이들이 모두 공비라고 기록한 사건이다. 실제 이런 사건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MBC PD수첩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편
제주 4.3 사건은 짧은 시간 안에 이승만 정권과 미군에 의해 제주도민 수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여전히 제주 4.3 사건의 정확한 명칭도 정해지지 못할 정도다. 올해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에도 봄이 온다는 말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의미를 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군 시기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최대한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 당시 국가 배상 재판이 이뤄지고 많은 이들에게 국가배상금이 확정 판결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명박 집권 시 양승태가 대법원장이 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확정 판결된 국가배상금을 다시 빼앗고 이자까지 더해서 받아내는 국가. 행정부가 걱정해야 할 예산 문제를 법원이 우려를 표하며 국가배상금 지급을 거부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억울하게 숨져야 했던 수많은 이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일이었다.
MBC PD수첩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편
배상금을 제대로 주면 국가가 망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앞세워 피해자 유가족을 괴롭히는 국가는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법관 블랙리스트 등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국가 배상의 기준을 확립해 철저하게 희생자 가족들을 괴롭히는 데 국가 권력을 악용했다.
한반도 영구 평화를 위한 종전 선언이 올해 안에 체결될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수많은 이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방치되어 있다. 잔인하게 학살된 가족들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지난 세월, 빨갱이 가족이라는 말로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숨겨야 했던 공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승만의 빨갱이 프레임은 이명박근혜 시절까지 이어졌다. 아니 현재까지도 극우 세력들의 기본 논리는 종북좌파, 빨갱이가 전부고 그들에게 유일한 전략은 '빨갱이' 하나뿐이다.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념 갈등을 부추기며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를 양산했던 지난 시절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에 대해 국가가 최선을 다해 배상을 해주는 것 역시 당연하다. /미디어스 장영 기자 mfmc86@hanmail.net 18.5.9
미디어스
MBC PD수첩, 우익 학살 집중 부각 논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장인인 권오석 씨의 좌익 활동과 6·25전쟁 당시 좌우익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다룬 MBC ‘PD수첩-권오석 다큐와 과거사 규명’(14일 밤 11:05)이 “편파적이었다”라는 시청자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방송 직후부터 ‘PD수첩’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한쪽에 치우친 방송’(황주연) ‘노 대통령 장인의 학살에 대한 물타기’(DANIEL BAEK)라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15일 오후 11시 현재 게시된 300여 건 중 80%인 240여 건이 방송의 편파성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린 ‘백민아’는 “보도 내용만 보면 군경은 양민들을 90만 명이나 학살한 살인마이고 양민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무고하게 학살당했다고 착각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여정화’는 “좌익 쪽의 피해자들을 보여줄 거면, 권 씨한테 죽은 사람들도 어떻게 죽었는지, 그 가족들의 고통도 다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닌가”하고 비판했다.
‘권오석 다큐’는 인터넷 매체인‘독립신문’이 권 씨가 6·25전쟁 당시 주도했던 학살사건 피해자 11명의 유족들을 인터뷰해 제작한 37분짜리 다큐멘터리. 14일 ‘PD수첩’은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서 권 씨가 50년 8월 경남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 일대에서 우익인 치안대 소속 주민들을 학살하기 한 달 전 치안대가 보도연맹(좌익의 교화를 위해 1949년 만들어진 조직) 소속이었던 권 씨의 일가 등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내용을 다뤘다.
이와 관련해 ‘PD수첩’은 6·25전쟁 당시 학살된 100만 명 중 10만 명은 좌익에, 90만 명은 우익에 의해 희생됐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을 인용했다. 제작진은 “좌우익 양민 학살사건의 피해 가족들이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면 과거사의 전면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게 제작 취지”라고 주장했다.
한편 ‘독립신문’은 15일 1973년 대검찰청이 펴낸 ‘좌익사건실록’을 근거로 방송 중 보도연맹 쪽 피해자로 나와 “눈먼 사람(권 씨)이 무슨 군당 부위원장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등의 증언을 했던 진전면 주민 허도녕 씨는 권 씨와 함께 좌익 활동을 했으며 현 허성관(許成寬) 행정자치부 장관의 아버지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송일준 책임프로듀서는 “허 씨가 권 씨와 좌익 활동을 함께했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며 “허 씨가 허 장관의 아버지인 것은 알았지만 증언과 아무 관련이 없어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2004. 12.16
Interplanetary Wandering - Chen Chen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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