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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길에서

초량 이바구길 -도시건축시민투어 사전답사 및 실행(13.4.6)

by 이성근 2013. 6. 13.

 

4월13일 부산국제건축건축문화제조직위원에서 주관하는 제18차 도시건축시민투어가 산복도로 보물찾기 란 주제로 열린다 .  이날 투어를 위해 사전답사가 있었다.  부산역에서 집결 후 >텍사스골목> 옛 백제병원 (부산그린트러스트 사무실) > 초량 이바구길  > 디오라마 전망대> 이바구공작소> 장기려기념관 더 나눔> 유치환우체통> 까꼬막> 마을카페로 이어지는 동선이다.  답사에는 구영기 생명그물 공동대표와 마을만들기 활동가 변광훈,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성근 사무처장, 서원건축사무소 조서영 대표, 동의대 신병원 교수, 부산국제건축문화제 김유진 팀장이 동행했다. 답사는 주요 지점과 동선을 공유하고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부산역에서  투어에 참가를 신청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모였다.

가족모임은 변광훈씨가 일반시민은 3개 모둠으로 나누어 구영기 대표, 신교수, 이처장이 맡았다. 그 중 제일 작은 인원으로 출발한 2모둠을 맡았다.

답사 때만 하더라도 억지 조성된  전쟁 분위기로 뒤숭숭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이곳 부산역은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물론  당시 부산역은  현재의 장소가 아니었다.  1905년 1월 1일 서울~초량(草梁) 간 경부선이 처음으로 개통된 뒤 3년 만인 1908년 4월 1일에 부산역에서 업무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공사비 97만 4천원을 들여서 부산역 본관과 부대설비 공사에 착수하여 1910년 10월에 준공하였다. 건물 최고 높이가 22m로 벽돌조의 2층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에 흰색 화강석을 섞어 전체의 구성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한 철충 양식으로 공사는 하야가와 하지매가 수행하였다. 그 후 1943년 12월 10일 부산부두역으로 개칭하였으며 1945년 6월 10일 부산역으로 개칭함에 동시에 화물구와 구내구(構內區)로 분리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일 화물구와 구내구의 2개구를 통합하였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대화재로 역사가 전소하여 중앙동에 임시가건물을 역사로 사용하다가 1965년 11월 1일 부산진역과 통합하여 부산진역에서 영업을 하였다. 그 후 1968년 지금의 위치에 역사를 신축하여 1969년 6월 10일 역사를 준공하여 역무를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부산역사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되었다.

부산역은 전쟁으로 인한 이별과 실향의 상징이다.  "대중가요로 불러진 부산 노랫말은 대부분 이별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항구의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장소적인 특징 때문이었다. 이별은 한국전쟁 때 부모형제, 연인, 해양산업의 성장과 함께한 마도로스와 부산 아가씨들과의 이별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대중가요를 불렀던 피난민들이나 근대화의 환상에 빠져 부산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점차 부산 사람이 되었다" (최철욱 1950-60년대 대중가요 속의 부산 장소성 중에서)

의외로 시민의 참여가 적극적이라는 사실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탐사 중에 알았지만 같은 부산땅에 살지만 산복도로가 처음이었다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산복도로 이바구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곳은 한국전쟁이 낳은 부산의 이방인지대였다. 전쟁으로 중앙동 뒷골목에 미군 상대 홍등가가 생기고, 권총을 차고 몰려드는 미군들은 서부 활극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여 언제부터인가 텍사스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는 중국 조계지가 있어서 청관(淸館)으로 불렸던 곳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러시아 선원과 상인이 즐겨 찾는 것으로 변모했지만 한 번씩 미군함정이 입항할 때면 그들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나붙고, 도깨비 시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요즘은 필리핀사람들도  많다.

상해문 근처 홍성방 터는 예전에 설문(設門)터로서 문 안쪽인 옛 초량지역(용두산 일대)에 거주하는 왜관의 왜인(倭人)들의 조선인 부락으로의 무단출입을 막기 위해 동래부에서 마련한 군관들의 기찰(譏察)터였다. 왜관은 일본인을 위한 객관으로 조선 근해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에 대한 회유책으로 설치된 대일외교의 관문이자 실제적 교류의 현장이다. 조선초기 진해, 울산 등지에 설치된 왜관은 개항과 폐항을 거듭하다 임진왜란 이후 1607년 6월, 지금의 수정시장 일대에 있던 두모포왜관(1609~1677)이 설치되면서 상설화되었다. 이후 두모포 왜관은 지형적 한계와 거듭되는 화재로 1678년 지금의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중구일대로 옮기게 되면서 그들만의 공간이 됐다.

대신 출입과 이동은 엄격히 통제되었고, 조선인 역시 접근에 제한을 받았다. 조선 정부는 국가의 기밀 누설과 밀무역, 일인과의 자유로운 접촉에 따른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 돌담을 쌓는 한편 각 처에 복병막을 두고 최종적으로 설문을 두었다.

변박의 왜관도에 하늘색 원 지점이 답사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일제의 강점이 이루어진 개항시기 일본 육군문고(陸軍文庫)가 발행한 조선전도 부산포(釜山浦-1894)와 1930년대 부산항 지도는 일대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본다.

1920년 최용해가 개인종합 병원으로 신축했는데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부림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 3대 종합병원이였다. 한때는 독일인,일본인 의사들을 초빙하여 나날이 번창했으나 건축과정에서 과다한 경비지출로 경영에 어려움을 격던 중 행려병 사망자에 대한 인체표본이 알려지면서 내진객이 급감했다. 이같은 상황은 당시 정서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사회적 비난으로 이어져 병원경영에 막대한 장애로 작용하다 적자 끝에 병원이 문을 닫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건물은 중국인 양모민이 인수하여 중국 요리집 봉래각으로 1942년까지 운영되다 태평양 전쟁 말기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아까즈끼부대가 접수하여 장교숙소로 사용되었고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치안대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53년 신세계예식장으로 운영되다 1972년 화재로 건물 일부를  태웠으며 이후 5층이 츨거되고 일반상가 임대사무실로 이용중이다.  부산그린트러스트와 같이 들어온 꽃집이 아니었다면 출구쪽은 보기 민망할 정도였을 것이다. 현재 부산시 근대건조물 4호로 지정받았다. 부산시와 건물주 간에 매입에 따른 이야기가 오갔다고는 들었으나 언제쯤인지 ...

붉은 벽돌을 화란식 쌓기로 처리했다. 건축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기본적 자료만 실었다. 다만 노란원 처럼 기단과 붉은 벽돌의 변화가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허나 이또한  시간의 반영이다.  더욱이 이 건물 3층에 세들어 있는 나로서는 불만이 많다.  

남선창고는 경원선(원주-서울)이 개통되기 잔 함경도의 수산물과 강원도의 목재를 부산으로 실어와 전국으로 보내던 물류창고로서 주로 명태,화공약품,합판,러시아상인의 짐등이 거래됐는데, 현재 그 부지에는 붉은 벽돌 벽만 남았다. 대신 서원유통 탑마트 초량점이 영업중에 있다.

이바구길 산동네 초입이다.

초량초등학교다 . 1937년  부산초량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이 학교 출신인으로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박칼린이 있다.  박칼린은 아버지가 미국유학가서 민난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외모가 서구형이다.   뮤지컬전공인데 판소리꾼 박동진에세 판소리를 사사받기도 했다. 부산 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로 대한민국 음악감독 1호가 되었다.

이경규는 박칼린 보다 다섯살 나이가 많은데 다들 친근한 얼굴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가수 나훈아가 아닐까 싶다. 본명은 최홍기로

어릴적 나훈아는 말이 없는 대신 싸움질이 잦았던 문제아 였다. 한마디로 못된 짓을 도맡아 했고, 급기야 퇴학을 당하고 가출하여 무작정 서울로 갔다고 한다. 노숙자 생활을 하던 중에 오아시스레코드회사에 사환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오늘의 나훈아는 남국인(작사)  김영광 (작곡)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됨으로써 이루어 졌다. 나훈아가 19살 때 였다고 한다. 그 때 취입한 노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었다.  이후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폭팔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노래 '머나먼 고향' 등은 나역시 한 때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2008년 1월 나훈아는 해괘한 사건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스포츠조선'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나훈아괴담 수사'는 나훈아의 바지 지퍼를 내리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게 만들었다.  내용은 "최근 연예가를 강타한 나훈아 괴담과 관련 내사에 들어간 경찰이 "야쿠자 폭행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나훈아 괴담은 나훈아가 일본 야쿠자 중간 보스의 애인인 국내 한 여자 연예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뒤 야쿠자 조직에 납치를 당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지난 1년간 잠적할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   인터넷상에서 뜨겁게 회자되어 온 나훈아 괴담은 지난 17일 김혜수가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은 괴담 속 여자 연예인이 아니다"고 공식해명하면서 급속도로 확대 전파됐다.
괴담의 진원지 중 한 곳이었던 양산 통도사를 관할하고 있는 경남 양산경찰서 관계자는 “통도사에 나훈아가 요양중이라는 소문이 있어 내사를 해봤지만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고 밝혔다. 부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도 “일부 서에서 내사를 했지만 괴담에 대한 직접적인 수사단서를 찾지 못했다”면서 “현재로서는 나훈아 괴담에 대해 공식적인 수사를 할 계획이 없다”고 전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 역시 “나훈아 괴담에 대해 언론이 앞서간 부분이 있다”며 “피해자 진술이나 수사접수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지 소문만을 가지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직폭력 수사를 전담하고 있는 경찰의 또 다른 관계자는 “야쿠자와 조직폭력배의 동향파악은 경찰의 일상적인 업무 중에 하나다”며 “향후 나훈아 씨가 야쿠자나 조직폭력배에게 피해를 받았다는 구체적인 정황이나 증거가 나오면 수사에 착수할 가능성은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이데일리 200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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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는 그 자신을 관리하기 위해 상당히 잔머리를 많이 굴렸던 것 같다.  그것이 연예계의 특수한 생존법칙일지는 몰라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때 참 많은 사람들이 혹 했던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부산이었다.  나훈아에 대해 이야기 하나만 더 보태고자 한다. 

삼성 비자금을 폭로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김용철 변호사가 2010년 펴낸 ‘삼성을 생각한다’ 에서 나훈아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변호사는  ‘삼성일가와 가수 나훈아씨에 얽힌 일화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 적고 있다. 예컨대 삼성 일가의 파티에 연예인들이 초청을 받아 온다고 했다.  레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 정도 받아간다고 하는데 이를 마다할 가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나훈아 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나훈아는 대중예술가로서 자신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라면 공연장에서 표를 사라고 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살수 있다고, 또 그 금권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일족에 대해 대중가수 한 사람이 가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를 지켰다고 나 할까?  이런 저런 연예계의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던 나훈아였지만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짐으로써 한 사람의 대중스타를  새로이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바구길이기 때문이다. 
 

초량초등학교 앞에서 한 50m 서쪽편 골목입구에 그루터기만 남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은 초량초등학교 담벼락이 일제시대 쌓아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더 오래된, 어쩌면 초량교회 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간직했음직한 이 은행나무의 삶을 기억해 내고 싶었다.   

경이로운 것은 이 그루터기에서 나는 죽지 않았다고 초록 절규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공식 코스는 아니지만 삶의 문제도 이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초량교회는 1892년 설립된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로서 12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실은 동구 텃줏대감이라 할 수 있다. 이 교회는 호주 선교사가 건립한 부산 최초의 교회로서 부산진교회 삼일교회와 더불어 부산 지역 기독교 역사의 주요한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주기철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1936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곳을 다녀갔고, 6.25전쟁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예배했다고 전한다.

담장 갤러리는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 골목에 있다.

초량초등학교 동구 인물사 담장은 동구 출신 정치인과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걸려 있다. 

산복도로 르네상스 거점시설 이 새로 만들어 졌다.

싸이트플레이닝건축사무소 (한영숙 소장)이 설계했다. 그 옆에 일제시대 만든 방공호가 숨어 있다. 그럴거라고 추측한다.  가덕도 일원, 우암, 적기, 용호동, 그리고 자성대와 좌천동 등에 반공호가 있었다.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의 전선이 일본 본토쪽으로 압박하고 B52가 일본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할 때 조선땅 이곳 부산에도 미군 상륙에 대비한 축조가 많았다.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동 광산도 있었다.

마을의 변화가 거점활동 시설과 실제 살고 있는 집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 혹이나 이 또한 관이하는 일로서 오해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담장갤러리에서 168계단으로 곧 바로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은 산복도로 삶의 상징이다.  시인 강영환은 그 삶을 골목과 계단을 통해 풀어 냈다. 

최영철시인이 쓰는 작품속 부산] <18> 강영환 시 '산복도로'(부산일보 06.7.8) 를  다시금  읽어 본다.  "...산복도로는 부산이 만든 길 중 가장 상부에 위치한 길이다. 위치로는 높은 길이지만 경제 가치로는 낮은 길이다. 낮은 길이어서 가장 나중의 길인 듯 하지만 가장 처음의 길이다. 오륙십년대 부산에 정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둥지를 틀었던 처음의 길이다. 고향산천 일가붙이를 떠나 빈손으로 배수진을 친 곳이다. 그런 점에서 산복도로는 가장 막다른 길이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가장 나중의 길이다.

 

그런 산복도로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심에 있다. 산의 복부,산의 허리,산의 중간을 관통하는 도로다. 이쪽저쪽 위아래에 사람들의 마을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오늘의 부산을 땀 흘려 일군 주역들이 살고 있다. 돈 모아 일찌감치 저 아래 동네로 내려간 사람도 있고,산동네 달동네의 인정이 좋아,저 아래 탁 트인 넓은 시야가 좋아,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도 있다. 어서 부지런히 돈 모아 반듯한 제 집을 가지려고 땀 흘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좌판 위에서 종일토록

가랑비를 맞고 있다

내장에까지 젖는 빗소리

 

맨살에 닿는다

매서운 눈 꼬리를 치켜뜨고

산을 넘고 넘어서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일어설 수 없는 비늘

터지면서 부러지면서

끝끝내 까무라친다

 

껍질 벗긴 꼼장어가 맨살로 엉겨

꼬무작거리고 있다

좌판 위에서 최후까지

목이 쉬어 남아 있는 바다

천천히 토해내면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여름 햇살

붉은 팔뚝으로 남정네들이 떠나간 바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바다를

큰물로 앉아 꿈틀거린다

 

-강영환 시 '산복도로 10 -생선장수'

 

좌판 위에 내리는 가랑비는 산복도로 사람들의 순탄치 않은 세월처럼 추적추적 내린다. '내장에까지 젖는 빗소리'는 혹독한 삶의 시련과 매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다. 터지고 부러지고 까무라치는 비늘은 좌절하는 산복도로의 일상이다. 그러나 산복도로는 새벽마다 다시 깨어나고 있다. 껍질 벗겨진 꼼장어들이 맨살로 엉겨 꼬무작거리며 살아나듯이. 좌판 위에서 최후까지 목이 쉬어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산복도로 주민으로 첫 시집부터 지금까지  산복도로 연작시를 써 온 시인 강영환의 산복도로 순례는 이렇게 진행 중에 있다..."

 

그는 지금도 산복도로에 살고 있는  주민이다.  산복도로 형성의 시기를  고려하자면 텃줏대감격이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영주동 .수정동 에서 살았고, 고교 1학년인  1967년부터 지금까지 초량6동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반갑고 고맙다.

 

168계단 옆 우물 하나  물을 지금도 솟아 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물 또한 생존을 위해 나래비서고 비칠거리며 길어다 날라야 했다.  그런 광경은  한국 다큐멘트리 사진 1세대를 대표하는 부산의  사진작가  고 최민식  선생의  카메라 속에 무수히 담겨 있다.  선생은 평생을  가난한 얼굴을 찍었다. 본인 스스로도 "가난이 나를 찍었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황해도 연안 출신인 선생은  1957년 일본에서 독학으로 사진공부를 했다. 이후 인간을 주제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68년 사진집 ‘인간(휴먼)’ 제1집을 낸 이후 2010년 제14집까지 출간했는데 한번도 주제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존경해 마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80년대 중후반 아주 잠시 부산의  어떤 잡지사에서 같이 일 하면서 선생을 알게 되었다.  문득 그때 일했던 동료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이렇듯 산복도로 이바구길에는 숫한 이야기가 깔려 있다. 

 

사람들은 가파른 계단의 존재가 신기해 스마트 폰이며 사진기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