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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집안묘지 개장 및 혼백모시기 09.9.22

by 이성근 2013. 6. 8.

 

9월20일  벌초를 겸해 집안묘지를 개장하는 일로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추석을 앞둔 9월 주말 고속도로는 정체의 연속입니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 고향땅을 밟은 시각은 아침이었습니다.   

시제를 겸한 혼백모시기가 먼저 있었습니다,  의령땅에 입성한 陜川李氏  30대 조의 묘소부터 찾았습니다 .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 때 벼슬하여 강양(江陽 : 지금의 합천)군에 봉해졌고 고려가 건국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합천호장(陜川戶長)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삼고 합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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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ㅡ 네번 절하여 아뢰고

 화장대신 안택의 흙을 봉투에 담아 새로운 거쳐로 모셔갑니다.

 해마다 보았던 노간주가 이제 씨앗을 물고 키도 웃자라 해를 가립니다. 하지만 더이상 오지 않을 곳이기에 그 자태를 담아 보았습니다,  사실 가능하면 벌초 행사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면 고향 산천을 이때가 아니면 밟기 어렵고, 또 갈 때마다 그 땅에서 자란 식물상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였기 때문입니다. 

 웃대 조상님들을 일일이 찾아 뵙고 인사 청한뒤  후손들은 직계 가족별로 산소를 찾아 똑같은 방식으로 혼백을 모시는 일들을 벌였습니다.

 먼저 달성서씨 할머니를 모시러 가는 길입니다 . 낡은 사진으로만 뵌 분입니다.  아버지 어릴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 유세차 하고 혼백을 모십니다.

 절하고 흙을 담습니다

 

 신안주씨 할머니를 모시러 갔습니다.  둘째삼촌의 어머니됩니다.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장의 절차 없이 지게로 시신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만  참 씁쓸한 일입니다.

삼촌 업드려 절하며 "어머니 이제 마지막입니다.  좋은 데로 모셔서 잘 살피겠습니다. "   

 호랑각시덤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이곳을 지날 때면 왠지 무서웠던 곳입니다.  氣가 센곳이라 하여 해지고 나면 어른들도 지나길 꺼렸던 곳입니다. 호롱불을 들고 지나가면 몸이 으스스하고, 불빛이 잦아드는 듯 뭔가에 빨려들듯 작아졌다가 이 덤을 지나면 되살아 나곤 했다고 합니다.  때때로 간이 큰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 어떤 기운을 느끼면 귀신에게 꾸짓듯 큰 소리로 "이 요망할 것 어디서 수작이냐"며 어름장을 놓곤 했다합니다.  여하튼 그런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사실 이곳 말고도 막실재 오르는 길에는 큰골 작은 골, 귀신 베짜는 골 등 오금 저리게 하는 골짜기가 많았습니다.  원래 골짜기가 음습하여 지금처럼 눈밝은 세상이 아닐 적에는 여우, 너구리 장난을 치고 또 아니면 헛것을 보고 놀라 제풀에 홀리기도하는 등 이바구가 골짝골짝 베어 있었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날입니다.  

 세번째 신창표씨 할머니를 모시러 가는 중입니다.

 조부로서는 세번째 부인인 셈인데,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중의 한분입니다.  부산으로 온뒤 방학이면 시골로 갔고(보내어 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할매 하고 뛰어가면  반겨주신 분인데 슬하에 저 보다 어린 고모 두분을 두시고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긴 저도 이제 낼 모레면 오십인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모셔온 혼백을 조부님과 합장하는 의식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묘역으로 다시 모실 차례입니다

 30대에서 37대까지, 먼저 가신님과 앞으로 죽음을 예약하고 있는 35~37손까지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이장 대신 오전 나절 자손들이 혼백을 모셔와 예를 올리고

 모셔온 혼백을 새 묘소로 안장합니다.

 전체 혼들을 모시고 난 다음 시제를 겸한 예를 올림니다

 일가가 꽤 되는데 다들 먹고 사는라 얼굴이 보이지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고향이며, 조상이라 이맘때면 서울이고 어디 할 것 없이 모이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싶습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여성들의  지위는 구분됩니다. 한마디로 뒷수발이지요.

 그 틈에서도 아이들은 크나 작으나 게임에 열중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들 때문에 집안묘지도 만들어 지게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내 죽고 나면 누가 벌초를  할 것이며, 찾아 줄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는 현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정은 어디나 마찮가지일 것이라 봅니다.  좀은 이기적인 발상이다 싶습니다.   아무튼 수목장부터 납골당까지 두루 논쟁을 거쳐 이런 묘지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 남아계신 어른 중의 한 분입니다.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음복을 하고

 잔돌들을 골라내고 뒷정리를 하고

 귀가합니다.  여기가 내 살던 곳인데 귀가라는 표현이 낯섭니다. 할일이 많습니다.  조경사업도 하고, 길도 단장하고 ...돈을 벌면 이럴때 후원도 하곤 할텐데...

 We all Fall In Love Sometimes - Elton Jo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