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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질주하는 고속도로에서

by 이성근 2013. 6. 8.

 

19:57 사상 시외버스 터미널, 지인의 상이 있어 급히 진주로 가는 길. 

 

빗발이 차창을 스친다. 차내 승객은 10명 남짓

 

일자로 늘어선 하구의 불빛을 본다. 저 불빛의 지평선도 조만간 허물어 지리라. 10분 남짓 달린 차는 이윽고 가락을 지난다.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소비한 시간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  어차피 고속도로에서는 달려야 한다, 질주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멈추거나 서행은 오히려 문제가 되는 공간이다. 문득 나 역시 시방 사는 일이 이런 체제에 함몰되어 있음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20:15 장유

20:22 진영

다시 불빛을 본다. 저렇게 많은 불빛 어느 하나도 순환의 의미가 사라진 불빛이다. 핵(核), 헥거리며 태우고 있는 저 불빛의 근원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 부조화의 빛이다. 아파트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불빛이나 나홀로 외딴 집의 불빛이나 같다.

 

길은 여러 가지이나 문제는 시간과 거리, 에너지의 많고 적음이다. 우리의 선택은 십중팔구 돌아서 가기보다 직선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라고 못 뻗칠 일이 없다. 실로 맹렬하고도 파괴적인 그 힘은 막강한 권력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달콤하기에 시나브로 중독된다. 자유롭고자 한다면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립고 정겨운 그리고 갸날픈 불빛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내 유년의 호롱불 아래, 그 캄캄한 밤, 오히려 눈이 밝아 어둠이 밝던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이렇게 쫏기듯 허둥지둥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속에는  버려진 것들이 세상을 향해 등 돌린 채 원망하거나 불편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재생, 순환의 지속가능한 것이다. 그 불빛이 보고 싶다.

 

 

20:42 함안을 지나는 중

지난 백년 과학기술에 현혹되어 가차 없이 사라진 또는 남용으로 흔적 없이, 자취 없이 사라진 것이 불과 백년도 안 되는 세월이었다. 그야말로 백년 동안 세상은 만신창이가 되고 사람은 병이 들었다, 나도 병이 들었든가


21:13 진주 하차

 

 

04:15 문상을 끝내고 다시 밤길을 달려, 귀가.

낡은 아파트 베란다 넘어 문현동 로타리 고층의 시티프라자를 본다. 이 새벽 아파트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곰곰 생각해보니 여지껏 저 아파트가 단 한 번도 완전무결하게 불이 꺼진 적을 보지 못했든 것 같다.  그래, 누군가 저 쪽에서도 잠들지 못한 나를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