秀미시 갈맷길 그린워킹에 대해
秀 빼어날 수 (훌륭하다/ 아름답다 등의 뜻 )에 더하여 아가씨의 구어인 'missy'와 무리의 의미를 가진 '족'의 합성어를 그린워킹에 접목함. 미시는 1994년 신촌의 그레이스백화점 홍보팀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 전반적인 여권신장의 흐름을 타고 등장한 미시족은 적극적인 사고와 자기표현능력을 가져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거나 전업 주부일지라도 남편들에게도 당당하게 집안 일의 분담을 요구하는 등 젊은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결혼한 여성이지만 외모, 가치관, 라이프스타일에서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삶의 중심이 남편과 자녀들에게 맞춰져 있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을 위해 돈과 시간에 투자하는 과감한 소비경향을 보여 영향력 있는 마케팅 대상이 되고 있다.
해석과 응용: 기존의 미시가 소비를 장려하기 위한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면 수미시그린워킹은 적극적인 사고와 자기표현으로 능동적 삶을 추구하는 아름다운 주부들이 생태적이고 환경적인 길걷기를 통해 자아를 완성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정서의 함양을 목표로 함.
기본 프로그램:
참가자 준비 시(자작시 포함)낭송과 명상, 들꽃관찰, 수다(상처에 바람쏘이기) 등
-상처는 처음부터 붕대로 감아두면 바깥 바람을 쐬지 못해 곪기 쉽듯 마음의 상처 또한 밖으로 드러내 위로받는 가운데 아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자존심·수치감· 남의 이목 이런 붕대를 당장 풀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상처에 바람을 쐬어주고 다시 살기 위해 .
-풀과 나무의 생태와 특성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생태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생활 속에 접목시킴으로써 환경지킴이가 되도록
-여성 특유의 연대감에 바탕을 둔 낭만의 자아의 회복과 찾기
도시철도 1호선 하단역에서 용원이나 녹산 방면 마을버스 16.12.7 일반 58. 좌석221 환승 후 낙동종합사회복지관에서 내린다.
지난 2009년 걷고싶은부산의 전신인 부산 길걷기시민모임이 7차 시민걷기 행사를 했던 코스다. 수미시 갈맷길 그린워킹이 2년전 그길을 첫 행사 코스로 잡았다. 답사 결과 다들 만족스러워 했다.
녹산은 봉화산의 동쪽은 굶주린 사슴이 들판을 달리는 모양인 기록주야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녹산이라 하였다고 하나 녹산(菉山 )이라는 지명은 녹두처럼 작은섬인 녹도(菉島 )에서 연후한것을 봄이 타당하다. 그것은 녹산이라는 지명에 앞서 녹도가 여지도서의 김해부지도상에 표시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 순조 11년의 염전 관계기사에서도 명록양도라고 하여 녹도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여지도서 단계까지는 조그만 일개 섬이었던 녹도가 계속되는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발달로 인하여 서서히 육지로 변모되는 추세속에 놓여 있었으며 19세기 초반 이후는 비록 섬으로 기록되기는 하였으나 명지도와 더불어 염전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육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녹산수문은 서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서낙동강은 강서구 대저동(大渚洞) 대저수문(大渚水門)부터 명지동(鳴旨洞)·녹산동(菉山洞)의 명지수문·녹산수문 경계지점까지 흐르며 이후 남해 앞바다로 흘러나간다.
예전에는 낙동강의 본류를 이루던 하천이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강물에 의한 퇴적으로 이루어진 삼각주(三角洲)가 강물의 흐름을 세 갈래로 갈라놓았다고 하여 삼차수(三叉水) 또는 삼차강(三叉江)이라 불렀다.
1934년 일제가 지금의 김해평야를 개발할 목적으로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을 만들면서 면서 본류가 동쪽 낙동강으로 바뀌어 흐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서낙동강은 낙동강 하류의 지류가 되면서 선암강(仙岩江) 또는 불암강(佛岩江)이라 불렸다.
녹산수문에서 좌축이 진해-부산간 2번 국도고 우측은 58번 지방도다. 만들어 진 때는 1934년(소화 9) 일제시민시절이다.
수문 앞 노적봉( 露積峰)이 있다. 서낙동강 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높이 약 50m정도 되는 작은 독 뫼로. 조선 순조 때 염전관계 기사에 명 녹 양도라고 하여 명지도와 함께 녹도의 지명이 보이며 이학규(李學逵)의 금관죽지사(金冠竹枝詞)에도 녹도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의 수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이 섬 전체를 더미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갈대와 짚으로 덮어 위장하였다고 전하므로 노적봉 이라하며,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독사리목(禿沙悧木)이 이곳 일대이며 형산진(荊山津)이라고 부르는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에 남도식 사투리 발음에 따라 지금은 성산 (星山)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낙동복지관으로부터 약 10분 남짓 이동하다 녹산종묘농약사 옆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최근 조성한 산책로가 나온다.
산책로는 58번 지방도까지 조성되어 있다. 1km남짓하니 10분이면 된다. 갈빛의 서낙동강이 꾸역꾸역 흐른다.
서낙동강은 삼각주 인근 관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지만, 물의 흐름이 여러 수문에 가로막혀 본류와 차단됨으로써 고여 있는 호수 상태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가정과 공장, 식당 등의 각종 오·폐수가 여러 지천을 통해 유입되면서 수질이 나빠졌다
낙동강 삼각주는 하천에 의해 만들어진 상부 삼각주와 파랑이 들락 날락 거리면서 만들어진 하부 삼각주로 구분된다. 상부 삼각주에서는 자연제방, 배후습지, 하중도와 같은 하천 지형을 볼 수 있고,하부 삼각주에서는 해수 흐름에 의한 동서 방향의 모래톱(사주, 예를 들어 대마등)을 볼 수 있다. 삼각주 규모는 남북 방향 약 30km, 동서 방향 약 6km이고 주변 평야(김해 평야)까지 더하면 대규모 퇴적 지형이라 할 수 있다.
그 길에 무명항일독립투사 위령비가 있다. 1945년 8월15일 가덕도 근처 일본군 부대에 근무하던 조선인이 10리 녹산앞바다를 헤엄쳐와 송정을 거쳐 이 근처 까지 왔다. 성산2구에서 밥을 얻어 먹고 이동중에 총을 쏘며 추격하는 일본군과 대치하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절벽 아래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그의 시신은 일본군이 수습해갔지만 어디 출신 누구인지 주민들은 몰랐다고 했다. 그때가 오전 10경.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1995년 8월15일 일대의 주민들이 그 현장을 목도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구천을 떠도는 그의 혼령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장락 (獐洛) 포구 다. 노루장 에 떨어질 락으로 노루가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곳이란 의미다. 산세가 내려오다 서낙동강(이곳에서는 '장강'이라 부른다)을 만나 큰 절벽을 이루는데 문득 1945년 8월 무명독립투사의 주검이 겹쳐진다. 그도 한때는 노루였든가. 장락은 서낙동강과 조만강, 지사천이 합류하는 물목이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포구나무(팽나무 수령 약300년)는 졸지에 도로에 갇혀버린 형국이 됐다. 곡각지를 돌아서면 서낙동강이 신어산과 둔치도를 배경으로 다가선다.
새로 만들어진 둔치교를 지나 가이샤교를 건너 범방으로 향한다. 지난 가을 꽃을 피웠던 갈대들 위로 버드나무 가지가 치렁치렁 바람에 춤을 춘다.
산책로는 아스콘으로 반듯하게 깔렸고 풍광은 시원하다.
봉화산 북면 생곡(生谷) 쓰레기매립장이 보인다. 본래 지명은 생활리(生活)였다. 녹산에서는 선각자들에 의해 신문명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개화마을이다. 매립장이 입지한 곳은 한적골로 삼삼이 발견되고 흐르는 골짜기의 물은 맑디 맑아 이끼가 끼지 않을 정도라 했는데, 이제 침출수가 고일 뿐이다.
쓰레기(명사)는 사전에서 풀이한 바로는 비로 쓸어 낸 먼지나 티끌, 또는 못쓰게 되어 내다 버릴 물건이나 내다 버린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도시화 이전 쓰레기란 말이 있었든가 싶다.
부산지역의 쓰레기 매립지는 1980.1~12 신평장림(140천톤) > 1982.7~1985.5 청학(2,483천톤)> 1982.7~1985.5 명지(2,483천톤) >1982.2~1983.5 대저 (391천톤) > 1985.5~1987.12 화명(2,327천톤) > 1987.6~1993.5 석대(8,994천톤) > 1993.6~1996.3 을숙도(4,728천톤) > 1996.4~2031.12 생곡(17,146천톤)을 묻으며 지나온 부산의 쓰레기 매립 역사다.
생곡은2001년과 2006년 주민 동의(?)를 통해 2031년까지 사용연장이 이루어 졌다. 그 다음은 어디가 될 것인가. 이 도시는 매립장이 없으면 난리가 난다. 가끔씩 지역민들을 화나게 만드는 행정 앞에 주민들은 실력 행사를 벌이곤 했다. 그때 마다 도시는 비상에 걸린다.
한반도의 7배 크기 정도되는 거대한 쓰레기가 태평양을 떠다닌다. 1995년 이후 매 10년 마다 10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한다. 미국의 찰스모어 선장이 1997년 발견했는데 처음엔 항로를 잘못들어 섬인줄 알고 막상 접근해 보니 쓰레기천국이었다고 했다. 최근 외신은 일본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거대한 쓰레기섬은 더욱 커질 것이란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007년 일본에서 열린 동북아 해양폐기물 대책회의에서 접했던 각국의 쓰레기 문제, 특히 행양으로 유입되는 육상기인 쓰레기는 어느 나라고 막론히고 골치 아픈 과제였다.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야생동물의 수난과 생테계의 훼손은 상상을 초월한다.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제 쓰레기는 에너지이자 자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이 가동되는 한 이 도시의 어느 곳은 매립장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생곡마을 역시 쓰레기장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충돌이 있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님비현상이다. 이제 매년 9월4일을 자원순환 재생의 날로 기념하여 그 의미를 새로이 해석하고 실천을 노래한다. 시민그린워킹에서도 이를 의제화 하여 실천하고 있다. 예컨데 페트용기에 담긴 생수 보다 물통 이용하기나 1회용품 안쓰기, 대중교통이용하기 등인데, 1회용품에 대한 유혹은 아직도 강력한 실정이다.
조만강변에는 쑥이 지천에 깔렸다. 그래서 착상한 것이 쑥을 뜯으며 쑥덕쑥덕 수다떨기다.
범방대 앞에서 멈추어 걸어온 길과 주변 풍광을 챙긴다
유채꽃이 만개했다. 걸음이 경쾌하다. 특히나 여인네 들에게는 꽃의 존재가 퍽이나 인상깊은 듯 하다.
쑥 가지고 할 수있는 요리가 뭐 뭐 있는교? 먼저 쑥국인데 여러 재료가 등장했다. 우리집에서 즐겨 먹는 쑥국은 된장들어가고 반지락 넣고, 들깨 넣어 끓안 쑥국인데 뭐니뭐니 해도 입맛 돋구는 건 도다리쑥국, 가지미 쑥국인데, 굴을 넣고 끓인 쑥국도 괜찮다고 했다. 아마도 굴을 넣는 것으로 봐선 3월초가 제격일 듯 싶다. 굴은 가능한 4월에서 먹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알이 생기는 시기고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상식으로는 ? 암튼 뒤어 등장한 쑥요리는 쑥떡, 쑥버무리, 쑥털털이, 쑥튀김 등이었다. 그 중 기록해 둔 것이 소고기를 다져 완자로 만든 쑥완자 애탕국과 쑥밥이 궁금했다. 어떤 맛일까
다음.즐거운 농사꾼 행복한 배에서 네이브 예쁜포비의 well world에서 다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에서
다음까페 포항장터에서 다음 다해랑 준이랑 에서 다음 도화지에 색칠하기 에서
누군가 그런말을 했다. 한국인이 먹을 수있는 식품중 최고의 검증된 식품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이라는 것, 쑥 하면 웬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허기진 세월을 지나온 사람들은 누구나 쑥이 주식이었던 시절있었다. 지금은 좋은 표현으로 구황식물이었다. 들어있는 성분도 많고 그 성분 각각이 좋다. 고단백에 당질, 아스코르빈산, 베타카로딘, 철분, 칼슘 등 등
주변이 자연스러워 훨씬 눈이 평화롭다.
범방 (凡方)의 지명은 옛날 배가 가는 행주형의 명당이 있기 때문에 범방리라 하였다. 남쪽은 거의 갈대밭이었는데 해방 후 차츰 개간되어 농지가 되었다.금병산을 경계로 하여 장유면 수가리와 등지고 있는 범방 본마을과 대밭이 많은 죽곡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선사시대 이래 이곳에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범방패총으로 남아있다. 이제 본 범방 마을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2001년 정월 대보름 고별 당산제를 끝으로 경마장 부지로 변했다.
범방대(泛舫臺)는 확인할 바는 없지만 신라말 고은 최치원이 머물고간 명승지로서 금릉팔경(김해) 중의 하나로 옛부터 이름이 잇었다. 조선 정조 때 해산 조심이 대를 쌓았다고 한다. 순조 때 낙하생 이학규의 한시 ‘범 방대 (泛舫臺) 시비가 서 있다.
泛舫臺前 汎舫津 (범방대전 범방진) 범방대 앞에 범방진 나루터에
曺家亭子 去年新(조가정자 거년신) 조씨가문의 정자가 지난해 새로섰네
何時踏月 下江去(하시답월 하강거) 언제 달빛을 따라 강을 내려가
泛舫直到 鷲浦濱(범방직도 취포빈) 배 띄워 곧바로 취포 해변에 갈거나
海雨連江 浪作堆(해우연강 랑작퇴) 바다의 비가 강에 이어 풍랑이 크게 일고
桃花詩節 起蚊雷(도화시절 기문뢰) 복사꽃 피는 절기라 모기때 이는 소리 (해석이 ?)
七山末侶 三山好(칠산만려 삼산호) 칠산 자락에 삼산이 짝을 이루니 좋고
竹島爭如 菉島來(죽도쟁여 녹도래) 죽도를 시샘하듯 녹도가 다가온다
앞에 보이는 마을이 사구 마을로 영월엄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66조만포 다리 개설전 조민포 나루를 이용 김해와 내왕했다. 예전에는 험하고 위험한 고갯길인 등대배기가 있 절토되면서 도로가 되었다.
조만교 위에서 바라본 경관
다리 아래로 내려가 곧장 직진한 다음
해미 정미소앞 둔치교에르 건너 좌회전 한다
해포 정미소 정겨운 상호다.
얼마 가지 않아 종교단체 건물이 있는데 길을 따라 일주문> 불이문>해탈문까지 줄줄이 섰다. 문이라고 하지만 돌에다 그렇게 새겨 놓았다는 것이다
잘 조성된 정원이 있는 죽전가를 지나
둔치도 백만평 공원 조성지대로 들어 선다.
세계보건기구는 도시민 1인당 필요한 공원 면적을 9㎡로 잡고 있다. 부산 시민은 녹지가 턱 없이 모자라는 메마른 환경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01년 시민의 힘으로 녹지 공원을 만들어보자는 운동이 태동됐다. ‘100만평 문화공원 조성 범시민협의회’라는 단체가 2001년 5월 발족한 것이다. 100만평 협의회는 부산시 강서구 서낙동강 유역의 둔치도와 그 주변 100만평 땅에 공원을 조성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런 들길을 걸어 본다는 것이 참 오랫만이라고 입을 모우던 그녀들
그래서 가을에 한번 더 이 길을 걷기로 했다. 그때는 금빛 물결 춤추는 들일거다. 하나 더 조만간 달밤을 이용해 이 길을 걷기로 했다.
협의회는 내셔널트러스트 방식의 운동을 선택했다. 시민 성금으로 땅을 매입해 공유재산으로 보전하자는 것이다. 협의회는 월 회비 2000원씩 내는 풀씨회원을 모집했고 ‘공원 1평 갖기’운동을 추진했다. 시민이 한 계좌 10만원의 기부를 하면 공원 1평이 기부자 명의로 기록되는 것이다. 여기에 3500여 명이 참여해서 수억원에 달하는 기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기금에 5억원의 은행빚을 보태서 1만3400평의 공원용 부지를 매입했다. 2005년 11월 실제로 둔치도 안에 있는 땅 8000평을 부산시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부산시는 여기에 호응해 2006년 4월 기증 토지와 그 주변의 1만5000평을 도시계획상 근린공원으로 지정하는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부산시의 입장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사실 100만평 공원에 대한 꿈은 나 역시 오래됐다. 1995년 뉴욕 센트럴파크을 방문했을 때 부산에고 저런 공간을 조성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은 바 있다. 그 일을 동아대 김승환 교수가 벌였다. 이 일은 1999년 부산녹자마스트플랜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제안되었다. 한결같은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현재의 서부산권 개발게획대로라면 이곳 역시 상전벽해의 땅이 될 터
평야지대 외딴집의 전형적인 주거양식으로 바람의 피해를 막고자 수목을 담장처럼 울타리 쳤다. 강원도나 경북 오지의 외딴집과는 또 다른 맛이다. 허나 이런 집도 점차 허물어 져 사라지고 있어, 유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서낙동강 변 둔치도 남단을 끝으로 둔치도 둘레길 걷기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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