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길 모임(준) 결성을 위해 3.18~21간 제주를 방문했다. 지난해 동해안 트레일 중에 전국 길 네트워크 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던 차 몇 몇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만남 속에 제1회 국내 트레일 네트워크 간담회가 2010.12.10~11 군산 구불길에서 있었고 2차는 2011.1.21~22 강릉 바우길에서 있었다. 그 세번째 모임으로 제주 올레가 주관하여 개최됐다. 처음에는 부산갈맷길을 포함 6개 기관이, 두번째 강릉모임에서는 11개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그래도 이런 모임이 만들어 지는 것을 모르는 단체가 있을 것 같아 제주모임에는 전국에서 활동중인 길 관련 단체에 제안서를 돌란 결과 28개 기관 80여명이 모였다. 제주라는 특성이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길이 붐인 작금의 상황에서 여러 단체들이 참여 한국 길모임에 대한 논의를 하고 이튿날 올레길 6구간을 걸었다.
제주 방문은 실로 오랫만이었다. 각종 회의 참가 차 제주를 곧잘 방문했어도 올레길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이었다. 이하 서너개의 글은 제주 방문에 따른 목적과 후기에 속한다. 첫째날은 길모임 결성과 관련된 이야기와 올레6코스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며, 둘째날 이후에는 제주 4.3과 제주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마지막 으로 이번 제주 방문을 겸해 별도의 목적으로 수행한 제주 올레 주변 게스트하우스 , 정확히 말해 제주 관광의 한 축인 숙박시설의 실태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휴일 없는 3박4일의 일정에 날씨가 아쉬웠지만 나름 의미있는 나들이었다.
눈을 뜨자 말자 사계해안으로 나갔다. 근처에 있는 송악산으로 가기위해서였다. 갯강활과 유채꽃 넘어 송악산이 보인다. 송악산은 1차 분화구 응회암층과 2차 분화구인 분석구로 형성된 수중화산체(水中火山體)로 최대 높이 81미터 지름 800여 미터의 응회환이 외곽을 형성하고 그 내부에 다시 화산활동에 의해 높이 104 미터 깊이 69 미터의 분석구가 형성된 이중화산이다.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느나 분석구의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수만년 이내의 젊은 화산으로 추정된다. 송악산을 이루는 주요 암석은 응회암, 현무암 등이며 응회암에 찍힌 새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여러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형성된 곳으로 예전에 소나무가 많았다 하여 송악산(松岳)이라 했는데 파도가 쳐서 울린다고 하여 절우리 또는 저별악이라고도 부른다.
형제섬은 제주 일출의 주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섬도 부산의 오륙도처럼 조류의 들고 남에 따라 많게는 10개까지 보인다고 하든가. 또 가까운 곳에 산방산이 있다. 신혼여행 때 마누라와 찍은 사진이 있다. 그때는 시월이었지만 바다가 짙푸르게 나와 인상적이었다. 다시 와 본다는 게 벌써 20년이 다 되간다.
가는 길에 전에 못보던 표지판이 하나 서 있었다. 드라마 대장금을 찍은 곳이라서 , 드라마나 영화의 위력을 다시 생각한다. 어디나 마찮가지다. 그 영향이 엄청나 고개를 흔들 정도다. 여기서는 주인공이 의녀수련을 하는 장소로 진지동굴을 택한 모양인데 마지막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정사람들은 이런 시설물이들어서는 것을 달갑지않게 여겼다고 한다. 슬픈 역사가 묻혀버릴까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1944년 말 일본 해군이 퀘멸되자 제주를 비롯하여 남해안 등에 진지 구축에 혈안이 됐는데 송악산의 해안 절벽 역시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모슬포를 비롯 일대에 17개의 인공동굴이 있다. 형태는 -형 H형 ㄷ형 이 있다. 송악산 해안의 경우 다른 곳 보다 빨라 그 시기는 1926년부터라 한다. 일본군은 송악산 주변에 알뜨르 비행장을 만들어 가미카제 전투기의 출격과 같은 용도로 전쟁에 이용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의 예비 검속에 의해 상모리 주민 132명이 송악산과 이어진 섯알오름에서 학살되었다. 당국은 학살 현장에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은폐하였으나 1957년 우연히 유해가 드러나 발굴되었다. 유해가 뒤엉켜 있어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유해를 한데 모아 다시 132개의 작은 봉분을 만들고 백조일손지지를 조성하였다.
송악산 가는 길
이애자
맞바람에 돌아앉은 풀꽃들의 뺨이 붉다
저물녘 바다 추위 윗목까지 차오르면
마늘밭 감자밭머리로 페비닐을 당기는 곳
섬 뜨던 밀항선에 할머니의 해는 긴데
송악산 들마루에 나와 앉은 유채꽃들아
파르르 한겨울 그새 봄 눈빛을 담았구나....
푸른 불꽃 저으며 섬들을 일으켜 앉힌
저물도록 졸인 햇살 하늘가에 눌어 붙고
바람은 솔가지 꺽어 산등성이에 어르고
백조일손 혼불들이 노을 켜는 산수이동
푸른 속내 뒤집어 산빛 물빛 다 보인다며
해마다 탄원서 쓰던 억새꽃을 헤며 간다.
분화구를 보려 했지만 정상은 오르지 못했다. 순진하게도 출입을 자제해 달라기에 그렇게 했다.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올라가 봤다고 했다. 좌측 지평선에 마라도가 떠 있다. 1883년부터 사람의 거주가 있었다고 한다. 헤진스님이 오는 길에 들리라고 한 곳이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 눈에 담아만 왔다. 송악산에는 말 두마리가 사는데 외지인에게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만 주인이 가자 표정이 딜라졌다. 오래동안 알고 지낸다는 것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같다. 하물며 낯선 사람이...
숙소로 돌아갈 때는 산이수동(山伊水同) 마을길을 이용하여 머을의 모습들을 보고자 했다. 특히 돌담과 가옥구조 등인데 마을회괸 한 귀퉁이에 비석들이 마을의 최근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기록의 문화로서 바람직한 일이라 본다. 예컨데 1976년 전기가 들어왔고, 전기를 가설하는데 누가 앞장섰는지 따위를 기록해두고 있다. 제주가 마음에 드는 이유 중에 하나다.
18일 도착하자 마자 길모임 회의가 있었다. 서명숙 올레길 이사장의 인사말로 시작된 이날 회의는 다소 싱겁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진행됐다. 2차 회의에서 합의 된 대로 길모임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여러 지역 길 모임 관계자들에게 참가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지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에 걸맞는 밀도있는 토론은 되지 못했다. 다들 쉽게 가자고 했다. 글쎄 ? 내가 욕심이 많은 탓일까 ? 그들이 관대해서 일까 ? 군산, 강릉에서의 사전 회의 결과를 존중한다며 ... Korea Trail Network 를 발족하는데 이견은 없었다.
서명숙 이사장은 “우리의 걷기여행은 지금 토목산업으로 빠지느냐 건강한 문화를 생산하느냐를 가르는 중차대한 시기에 놓여있다”며 “‘한국 길 모임’을 통해 민간인이 길을 내고 행정에서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한 결합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국 트레일 관계자 모임을 제안합니다.
바야흐로 도보여행의 전국화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선언해도 좋을 만큼 도보여행의 실질적 발판이 되는 걷는 길과 관련하여 중앙정부부처도 전국의 각 지방자치단체들도 저마다 경쟁적으로 걷는 길을 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선조들이 거닐었던 옛길의 자연스러움과 탐방로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과도 같은 자연친화적인 접근보다는 각 지역마다 또 다른 형태의 국토개발사업을 펼치듯 산과 들과 계곡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토목공사판을 펼치고 있는 듯 한 모습이다. 자연과 벗하여 유유자적 걷는 도보여행의 기본적인 의미조차 도외시한 채 오직 개발의 대상으로 길과 자연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모습으로 걷는 길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우려와 자각 아래 전국의 걷는 길 관계자들이 모였다. 우리는 도보여행의 대중화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길이 진정 걷기 좋은 길이며, 또 좋은 길을 내기 위해서 저마다 지역에서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탐방로에 대한 자기성찰의 자세로 한 자리에 모여 서로 길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걷는 길에 대한 바른 문화를 선도하는 일에 함께 동참하기로 했다.
우리는 길과 길이 지나는 마을의 연계를 애초 그 길이 있게 한 존재의미로 소중히 여기고, 길이 지나는 지역주민의 이익을 항상 먼저 생각하며 길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소중히 여긴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떤 길이 자연친화적이며 인간친화적인 길인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듯 고민하며 걷기 좋은 길과 좋은 길의 정신적 바탕이 되는 바른 도보여행 문화에 앞장서 나간다.
한국 길 모임 준비위
2011년 1월
참가지역은 약 28개지만 성격과 소속이 다양했다. 비영리민간단체로부터 지역 길 전문법인, 보조금 수령 준 관변에서 행정... 의제의 설정과 공유고자 하는 비젼이 막연했다. 하여 결과적으로 4월 지리산에서의 결성은 하동 토지길에서의 실무 모임을 가진 뒤 가지기로 했다. 세시간 여의 중구난방 식 회의 끝
기념 사진을 찍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뒷담화 자리가 준비되고
제주올레가 준비한 푸짐한 안주인 멸치찌개와 방어회, 그리고군산 구불길에서 공수한 굴 70kg이 더해진 술판은 밤 늦도록 이어졌다
강릉 바우길의 이기호 사무국장은 어디서나 분위기를 돋구는 사람이다.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이완하고 적절한 우스개 소리로 참가자들을 끌어 들였다. 반면에 나는 회의는 회의고 놀 때는 논다는 주의? 라 다소 공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민.관이 모여 새로운 가버넌스를 구축하는데 맺고 끊음이 없이 두루뭉실 넘어감을 경계했기 때문이고 이 실험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필요함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19일 올레6코스로 이동하기 위해 전세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묶었던 숙소 사이게스트하우스를 담아보았다.
전세버스 두 대로 6코스 입구로 향하는 길 올레 사무국 기획팀 정지혜씨가 자근자근 일정을 소개했다.
정지혜씨는 서울 사람이다. 그녀로부터 올레길과 게스트하우스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녀가 1순위로 추천한 곳은 서귀포시에 있는 민중각이었다. 나중에 별도의 소개를 하고자 한다.
쇠소깍 입구에서 진행 동선과 안내 올레지기 소개 그리고 허기를 들어줄 특별 제작 주먹밥이 나누어 졌다. 그리곤 삼삼오오 걷기가 시작되었다.
출처:다음 블로그 Adago에서
쇠소깍은 원래는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쇠둔이라는 지명이었는데, 효돈천을 흐르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어 ‘쇠소깍’이라고 붙여졌다. 쇠는 소,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쇠소는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굳어져 형성된 계곡 같은 골짜기로 이름 만큼이나 재미나고 독특한 지형을 만들고 있다. 쇠소깍은 서귀포칠십리에 숨은 비경 중 하나로 깊은 수심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과 소나무숲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6코스 들머리 하효항 뒷편 쯤 골목길 그야말로 제주 말로 올레에 동백꽃이 지고 있었다. 일행들이 달려 들어 그 장면을 일시에 담았다. 핀 꽃이 아니라 진 꽃에 취해, 어쩌면 동백은 진 자리가 더 아름다운 꽃인지도 모른다. 花無十日紅 이라지만 대개의 꽃들은 꽃대궁에 악착같이 붙어 너덜해지질 때까지 꽃이고 싶어하지만, 동백은 필 때와 질 때를 아는 꽃같다. 무궁화나 오동꽃 역시 질 때 깔끔하게 진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새삼스런 사실을 올레가 보여주었다.
6코스 올레길의 행정지명은 보목포로다. 돌담 아래 민들레가 지천이었다.
제주를 이국적인 정취로 만들어 주는 남방계의 식물들 소철이 숲을 이루고 있다.
돈나무와 선인장, 용설란이 흔하다. 돌담 뒤로는 전부 감귤 과수원이다.
사철 푸른 이 나무들은 바다를 낀 올레를 구성하는 주요 수종들이다.
보목포구를 앞두고 섶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연기념물 제18인 섶섬에는 파초일엽(일명 넙고사리)의 자생지로서 각종 상록수와 180여 종의 희귀식물, 450종의 난대식물이 기암 괴석과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제주 올레의 상징인 간세 이정표
제주 올레는 자원봉사자들로 넘쳐 난다. 이날도 대여섯 분들의 가이드가 안내를 도왔다. 그냥 걷는 것만이 아니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며 ...
제주 올레 안은주국장 , 언제봐도 듬직하다. 그녀도 제주 토박이가 아니다. 들리는 말로는 서이사장 도와주러 잠시 왔다가 그냥 짐싸들고 제주에 눌러 앉았다는데
제지기오름에서 본 보목포구. 서귀포시를 조망할 수 있다. 제지기오름은 이 오름 남쪽 중턱의 굴이 있는 곳에 절과 절을 지키는 사람인 절지기가 있었다하여 절오름 .절지기오름으로 불리다가 와전되어 제재기.제지기오름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남국의 지명유래: 진성기 저) 1800년도 경과 그 이전에 제작된 옛 지도에 "저즉지" 와 " 저즉악" 으로 표기되는 등 "저" 자가 쓰인 것으로 보아 오름모양이 낟가리(눌) 비슷한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주의 마을:오성찬 저)
오름 입구에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별장이 있다.
주먹밥이 위력을 발휘했다. 전복과 파래를 주 재료로 하여 만든 주먹밥인데 처음 받았을 때 이거가 요기가 될까 싶었는데 결론은 됐다.
마을길이 정갈하다. 섬순이 농장 슈퍼 이름도 재미있고 지붕에 있는 테우도 인상적이다. 테우는 떼배의 제주말이다. 테우는 통나무를 8~12개 정도 묶어서 만든 고깃배 겸 바다작업선으로 "테우" ."떼배", "테위", "테" 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과거에는 한라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구상나무로 만들어져 왔으나 지금은 구상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 삼나무(숙대낭)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바다에 적응하도록 만든 테우는 안전하게 물건을 싣고 내리기가 쉬우며 바위에 부딪쳐도 잘 부서지지 않는다. 또한 풍선(돛)을 달기도 하나 대부분 어부가 노를 저어 항해하기 때문에 속도가 없으며 구조는 통나무 본체와 작업용 평상. 노. 사둘(고기잡는 둥근 그물), 풍선(돛), 닻으로 구성되어 해초를 캐거나 자리돔을 잡는데 주로 이용되고 연안 낚시용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쇠소깍 입구에 실물 크기의 테우가 길가에 전시되고있다.
여름이면 이 포구에서 자리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제주는 이런 골목이 살아 있다.
보목천 하구 그림이 참 좋은 곳이다. 동해안으로 흘러드는 하천하구와는 또다른 맛이다
섶섬 할망까페 가기 전 강화나들길 김은미 대표와 기념 삼아 찍어 보았다.
언덕을 빠져 나오면 섶섬 할망까페다.
여든 하나라고 하셨든가 귀가 먹어 큰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데, 객이 해삼을 원하면 직접 물질하러 간다고 했다.
다들 별미도 맛보고 잠시 다리쉼도 하기 위해 평상에 둘러 앉았다.
쉰다리는 쉴려고 하는 밥과 누룩을 발효시켜 만든 음료, 야쿠르트 맛이다.
내친김에 홍삼도 한 접시
섶섬이 코 앞이다. 시계가 좋지 못해 테만 담았다.
제주대 연수원을 앞두고 구두미 포구 앞 추모비 하나를 눈여겨 보았다. 그 사연이 긍금했지만 알길이 없었다.
기존 올레길 대신 최근에 발굴했다는 길
하수처리장을 돌아
국궁장을 지나
검은여 해안을 지나는 중
서귀포 칼 호텔 가는길
이런 담벼락도 길 자원으로서는 훌륭한 소재다.
소정방폭포
이 그림을 만나지 못했다. 바로 지척인데도 이 그림 역시 브로그 Adago님으로부터 퍼 왔다.
제주 올 사무국과 간새공방에서 작업 중인 모습들
1층은 안내센타 역활이고 2층은 사무공간이다. 이렇게 좋은 사무실이 또 있든가. 그들이 부러웠다. 많이
사무실 마당에서 보이는 주상절리의 해안
이제 서귀포시로 들어간다.
고급 호텔이 있는 지역이라 정원이 단아하다. 워싱턴 야자수가 풍취를 더 한다.ㅣ
서복전시관길 서귀포에서 전해내려 오는 전설에 따르면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 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한다. 진시황의 사자인 ' 서불'이 불로처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5백명과 함께 대선단을 이끌고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을 찾아 왔다. 그는 영주산의 제1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정박을 하고 불로초를 구한 다음 돌아가는 길에 서불과지를 새겼다. 서귀포 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 다는 설이 있다. 서복전시관은 이런 저런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으로 들어선 건축물이 한눈에 봐도 우리와는 다른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가는 이가 기자인데 꼴찌에서 두번째다. 당연 진짜 꼴지는 나다 칠십리음식특화거리를 지나 무조건 길을 따라 걸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놀멍쉬멍 가다 보니 일행을 놓쳐 버렸다. 1950년대 서귀포의 모습이다. 저 초가 어디 쯤 이 중섭이 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어 물어 도착한 이중섭 거주지 이중섭이 한국전쟁 당시 방을 하나 얻어 가족과 잠시 거주했던 집이다. 이중섭은 여기서 1951년 한해를 머물다 갔다. 이곳에서 그는 '파란게와 아이들', '서귀포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목가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는 제주 도착 후 여러 날을 걸어 서귀포에 닿았고 이 집의 맨 끝방을 얻었다. 방이라고해봐야 1.4평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만 이곳에서의 1년이 행복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은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어쨌든 생가터도 아니고 잠시 머물다 간 집임에도 서귀포시는 이를 자원화 했다.
이중섭 그는 1916년 평안도 출신으로 지주의 아들이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미술유학을 했고, 이때 일본인 이덕남(일본명: 山本方子 야마모토 마사코)과 만나 원산에서 결혼했다. 1945년 5월 이었다. 그들은 원산에서 살았다. 그러나 전쟁이 그들을 갈라 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이중섭은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재차 제주로 왔는데, 이 제주에서 아내와 두 아이는 일본으로 보내고 이중섭만 남았다. 그는 가족을 그리워 했다. 그 그리움은 그의 그림속에 진하게 남았다. 일주일 정도의 가족상봉 후 다시 귀국하여 외롭고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정신이상과 영양실조 등)으로 그는 떠났다. 그 유명한 댐배갑 은박지 그림은 부산과 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화폭대신 그려진 그림들이다. 부산에는 1951년12월 다시 왔고 범일동 보림극장 뒷편에서 판자집을 얻어 생활하기도 했다. 흔히들 이중섭과 고호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고은의 '이중섭 평전'을 보고서 이곳을 찾는다면 해 본다.
이중섭 1916~1956 1951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 바닷가의 아이들 1952~3 해와 아이들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4 길 떠나나는 가족이 그려진 편지
그는 헤어진 가족을 몹시나 그리워 했다. 그는 아내에게 사흘에 한번 편지를 써 보내 달래는 것이 무슨 어려운 부탁이냐고 했다. 남덕은 우표값이 없어서 보내지 못했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남쪽에서온 덕이 많은 사람 남덕과의 연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생활고로 처자식을 일본에 보내고, 다시 만날 날을 갈망하지만 일 마다 안풀리고 ...기대했던 전시회도 남는 것이 없는 생활, 참담했을 것이다. 1953년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일주일 밀항하면서 찾아간 아내로부터 들었던 말 ' 한나라의 위대한 화가가 그런 치욕적인 밀항을 하여서야 되겠냐며 다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한다. 그 마지막 만남 이후 그는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힐 정도였다. 1955년 사촌들이 그를 서울로 데리고 왔지만 증세가 악화 됐을 뿐이다.
1953 판잡집 화실 1953 범일동 풍경 1956 마지막 그림
1953 노을 앞에서 울부짓는 소 1953 흰소
저무는 하늘
동짓달 서리 묻은 하늘을
아내의 신발 신고
저승으로 가는 까마귀
까마귀는
南浦洞 어디선가 그만
까욱하고 한번만 울어 버린다
五六島를 바라보고 아이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저무는 바다
돌 하나 멀리멀리
아내의 머리 위 떨어지거라
-김춘수-
때마침 목련이 피었다. 그의 쓸쓸한 오후를 위로라도 하듯
내가 서귀포 밤거리를 걷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멈추게 되는 것은
이중섭 거리에 있는 미루나무 카페 때문이다
소꿉장난처럼 사는 젊은이가
밤늦도록 소꿉장난처럼 장난을 하는 것이
힘들어 보이진 않지만 본인은 너무 힘들어
일요일엔 아예 문을 닫고 누워버린다
그의 감각 주변엔
책이 잇고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잇고
시가 있다
그래서 그런 류의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나는 이 카페에 가면 밀실처럼 꾸며놓은 '중섭방'을 차지한다.
이중섭이 살았던 좁은 방에 등을 문지르는 것 같아 좋다
오른쪽 흰 벽에는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좋고
왼편 벽엔 은박지 그림이 걸려 있어
백석과 중섭이 고향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듣기 좋다
그리고 정면에는 중섭이 웃는 얼굴이 행복하고
방 한 가운덴
수백 년 묵은 팽나무 茶卓이 소처럼 누워있어
이중섭의 허리에 내 허리가 닿는 것 같아 따뜻하다
좁은 유리문 밖에는 송악 덩굴이 밤하늘을 감고 별을 찾아간다
낮은 천장에는 습기가 들어 곰팡이가 번지는데
태연한 행복이 중섭의 행복 같아서 좋다
게 잡으로 간 중섭이 금방 돌아올 것 같은 공간
나는 여기서 조금씩 카페 주인과 가까워졌다.
이생진 시인 <미루나무 카페>
서귀포는 그를 기억했다. 이중섭거리가 있고, 미술관이 있다. 언덕을 넘어서면 올레시장이 있다.
7코스로 가기 위해 이곳을 거쳐가는데 초행길이라 연결점을 찾지 못해 두번이나 맴돌았다. 역시 제주는 낯선 곳이다.
스님 한분을 만났다. 친절하게도 길 안내를 자청해주었다.
스님은(비구니) 서문로타리까지 안내를 해주고 갔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입구까지 왔는데 누구인지 어느 절에 계시는지 묻지도 못했다.
하지만 외돌개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서귀교를 건너야 하는데 엉뚱한 길로 들어서 또 한 바퀴 헛걸음?
알고보니 나처럼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러구 나서도 새섬쪽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이 해결해 줄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이 야기한 결과였다. 아니 길을 파악해 두긴 했지만 지도와 인터넷을 통한 평면적 이해가 현장의 구체적 상황앞에서는 큰 도움이 못됐다는 것이다. 아깝도다
새섬 앞 문섬
결국 7코스는 접근 조차 못했다. 나중에 숙소를 잡고 난 뒤 외돌개 주변 까지는 갔지만 날씨가 좋지 못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제주 올레길은 6코스 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Jim Croce - one Less Set of Footsteps
출처: 다음블로그 홍이 아뜨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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