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릅과 무릅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2008 열림원)
사무친다는 것
사무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무친다는 것이다
마음의 벼랑 끝에 독락당(獨樂堂) 한 채 짓고
오늘도 날이 저문다는 것이다
저녁노을도 없이 강 건너 주막도 없이
새벽별도 뜨지 않았는데
허우적허우적
물살 센 깊은 강을 혼자 건너간다는 것이다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반달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
새벽 기도
이제는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홀로 울지 않게 하소서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을 열어주시고
때로는 조그만 술집 희미한 등불 곁에서
추위에 떨게 하소서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을 알게 하시고
아름다움의 추함과 희망의 절망과
기쁨의 슬픔을 알게 하시고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리어카를 끌고 스스로 밥이 되어
길을 기다리는 자의 새벽이 되게 하소서
-시집 수선화에게.
나는 너에게
겨울비 오는 날
나는 너의 빈 손을 잡고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겨울비 내리는 사막 위를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를 찾는데
너는 지금 어느 길
어느 하늘 아래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지하철을 탄 비구니
그대 지하철역마다 절 한 채 지으신다
눈물 한 방울에 절 하나 떨구신다
한손엔 바랑
또 한손엔 휴대폰을 꼭 쥐고
자정 가까운 시각
수서행 지하철을 타고 가는 그대 옆에 앉아
나는 그대가 지어놓은 절을 자꾸 허문다
한 채를 지으면 열 채를 허물고
두 채를 지으면 백 채를 허문다
차창 밖은 어둠이다
어둠속에 무안 백련지가 지나간다
승객들이 순간순간 백련처럼 피었다 사라진다
열차가 출발할 때마다 들리는
저 풍경소리를 들으며
나는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다니는 사내처럼 운다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
먼지의 꿈
지는 흙이 되는 것이 꿈이다.
봄의 흙이 되어 보리밭이 되거나
구근이 잠든 화분의 흙이 되어
한송이 수선화를 피워 올리는 것이 꿈이다
먼지는 비록 끝없이 지하철을 떠돈다 할지라도
내려앉아
더 낮은 데까지 내려앉아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밥이 되는 것이 꿈이다.
공복의 출근길에 승객들 틈에 끼여
먼지가 밥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 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고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은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굴비에게
부디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
강한 바닷바람과 햇볕에 온몸을 맡긴 채
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
오직 너만은 굽실굽실 비굴의 자세를 지니지 않기를
무엇보다도 별을 바라보면서
비굴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기를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
내 너를 굳이 천일염에 정성껏 절인 까닭을 알겠느냐
징금다리
물은 흐르는 대로 흐르고
얼음은 녹는 대로 녹는데
나는 사는 대로 살지 못하고
징검다리가 되어 엎드려 있다
오늘도 물은 차고 물살은 빠르다
그대 부디 물속에 빠지지 말고
나를 딛고 일어나 힘차게 건너가라
우리가 푸른 냇가의 징검다리를
이제 몇 번이나 더 건너걸 수 있겠느냐
때로는 징검다리도 물이 되어 흐른다
징검다리도 멀리 물이 되어 흘러가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 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와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와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새벽 편지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강변 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물끄러미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켜둔 촛불이 가물가물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눈길에 버려진 타다 만 연탄재처럼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쌓인 막장의 갱목처럼
추적추적 겨울비에 떨며 내가 버려져 있어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
등단 50년 맞아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내놓은 정호승 시인
‘봄길’, ‘고래를 위하여’, ‘슬픔이 기쁨에게’ 등 그의 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여러 편이 수록돼 있다. 고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 고 이동원의 ‘이별노래’, 양희은의 ‘수선화에게’ 등 노랫말이 된 시도 70편이 넘는다. 그만큼 그의 서정시는 탄탄하면서도 읽는 이의 가슴을 흠뻑 적신다.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72) 얘기다.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이 지난 11월 16일 서울 중구 천주교성프란치스코회수도원교육회관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그는 자기 시와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 김창길 기자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이 지난 11월 16일 서울 중구 천주교성프란치스코회수도원교육회관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그는 자기 시와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 김창길 기자
그는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시작으로 모두 14권의 시집을 펴냈다. 14번째 시집은 올해 9월 발표한 <슬픔이 택배로 왔다>다. 사랑과 슬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담은 시집이다.
지난 11월 16일 정호승 시인을 만났다. 흰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정돈하고,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시인은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시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등단 50년을 맞은 소회가 어떻습니까.
“50년간 시인으로서 살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죠. 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시를 통해 찾을 수 있으니까요.”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표제는 이 시집에 실린 ‘택배’라는 시의 첫 문장이에요. 어떤 함의를 담았나요.
“우리가 택배문화 속에서 살잖아요. 택배 안내 문자를 받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죠. 그런데 살아가면서 행복한 소식만 듣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저는 택배로 은유한 거예요. 정말 받고 싶지 않은 택배는 이별이고, 특히 죽음이라는 이별이에요. 제 경우에는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슬픈 택배를 받았어요. 그 택배는 반송할 수도 없어요. 언젠가는 제 죽음이라는 택배를 받게 될 거고요.”
-그러고보면 정 시인은 1979년 출간한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속 시들을 시작으로 슬픔을 담은 시문을 많이 지었어요. ‘슬픔의 시인’으로도 불렸을 정도로요. 시인의 기저에 무엇이 슬픔을 끊임없이 길어올리는 건가요.
“저는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적 삶에서도, 시대의 삶에서도 원하지 않는 비극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니까요. 그래서 모든 예술은 비극에서 꽃피는 거예요. 인간 삶이 비극이 아니었다면 예술은 꽃필 수 없었을지 몰라요. 제 시의 발원을 묻는다면 인간 삶의 비극에서 시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시도 모든 예술도 비극에서 꽃피어
18년 함께하며 부모님 보내드린 뒤
죽으면 사랑으로 남겨지는 것 깨달아
-새 시집에는 ‘구급차 운전사가 바라본 새벽녘’, ‘부르심’, ‘수의’ 등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가 많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부모님을 비롯해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많이 겪고 있으니까요. 사회적 죽음도 많고요. 제가 직장생활을 하던 ‘샘터’에서 상사와 부하로 만난 인연으로 형제지간처럼 아주 가깝게 지낸 정채봉씨(동화작가·수필가·시인)가 2001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탔는데 그가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세상에 없으니 볼 수 없잖아요. 그러고나서 제 주변을 보니 늙으신 부모님이 계셨어요. 그 길로 부모님 댁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만들어 그곳으로 매일 출퇴근했어요. 아버지는 2013년, 어머니는 201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18년간 그렇게 살았어요.”
-정말 효자였군요.
“그렇다고 해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한 것은 아니에요. 같이 식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와 목욕도 다녔지만, 부모님께 내 마음을 다 바치지 못했고, 제 인생의 시간을 많이 나눠드리지 못했어요. 부모님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였잖아요.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는 그분들의 외로움, 존재로서의 고독함, 그런 것을 제가 나누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인생의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를 뿐.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게 있어요. 바로 당신의 죽음이에요. 그것을 통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려주고 떠나시는 거예요. 죽어가는 섬세한 과정과 누구나 종생(終生)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무언으로 가르치시는 거죠. 저는 부모님의 유해를 화장해 공동묘지에 조그만 표지석 하나 세워 묻어드렸어요. 한 달 만에 분해되는 친환경 유골함을 사용했기에 완전히 흙이 돼 어디 계시는지 몰라요. 결국 인간은 생명의 원천인 흙으로 돌아간다는 배움을 얻었어요. 가르침은 또 있어요.”
-뭔가요.
“부모님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분들이 제게 주셨던 사랑, 부모님에 대한 제 사랑은 제 가슴 속에 살아 있다는 점이에요. 인간은 결국 사랑을 남기는 거예요.”
-정 시인의 시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요. 가톨릭 신자이지요. 모태신앙입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이다’라는 말도 있어요. 생명이 탄생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힘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제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유아세례를 해줬다고 하시니, 모태신앙은 맞아요. 개신교 신자였죠.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서른 넘어 정채봉씨와 함께 성당에서 영세를 받으면서예요. 계기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75년 졸업시험 대신 제출할 논문 형식의 리포터 작성을 위해 읽은 3권짜리 <한국천주교회사>였어요. 천주교회사에 나타난 형벌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선택한 선교사들의 모습에 전율했어요.”
정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군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했다. 큰외삼촌이 그곳에서 사과과수원을 했다. 정 시인의 가족은 그곳에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인근에는 범어천이 흘렀다. 소년 정호승은 친구들과 범어천에서 헤엄을 치고 미역을 감고 물고기를 잡았다. 개천이 꽁꽁 어는 겨울에는 썰매를 탔다. 시련이 닥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은행원이던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연거푸 망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은커녕 졸업앨범을 살 돈도 없어 포기해야 했다. 장학금을 받고 경북대 의대에 입학한 형은 입주과외를 하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했다. 누나는 1960년대 말 파독(派獨) 간호사가 됐다.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했군요.
“매일 집으로 일수를 받으러 온 영감님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해요. 어머니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못하셨어요. 다음에 주겠다고 해도 영감님은 안 가고 버텼어요. 고3 때까지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시인은 가난하다는 통념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인이 되더라도 기본적인 생활능력은 가져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고생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이 힘들었겠어요.
“어머니도 시를 쓰셨어요. 고1 때 어머니가 가계부에 연필로 써놓은 시들을 우연히 읽었거든요. 힘드실 때마다 남몰래 틈틈이 쓰신 것 같았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석에 누워계신 어머니께 ‘예전에 쓰신 시 중 외우시는 거 있으면 말씀해보세요’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는 슬플 때 쓰는 것이다’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는 시의 비밀을 알고 계셨던 거예요.”
-사춘기 때 겪은 가난이 시인의 창작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시는 자기의 삶 속에 있는 건데, 그것이 확대되면 우리의 삶이고 공동체의 삶이잖아요. 저는 가난이 주는 슬픔과 어머니의 고통, 이런 것들 속에서 시를 발견했어요. 한송이 꽃을 봐도 ‘저 꽃이 아름답지만 좀 슬프다’ 하는 시각이 생긴 거죠.”
가난이 주는 슬픔 속에 시를 발견
어머니도 틈틈이 시를 쓰셨는데
“슬플 때 쓰는 거야” 똑같은 깨달음
-문학에 대한 재능이 있음을 처음 자각한 건 언제였나요.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가르치면서 시를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어요. 선생님이 ‘호승이 니 숙제해왔나? 해왔으면 한 번 읽어봐라’ 하셨어요. 키가 작아 앞줄에 앉아있던 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읽었죠. 낭독이 끝나자 선생님은 빡빡 깎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호승이 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겠다’. 이 말씀이 제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어떤 시를 써갔습니까.
“제목은 ‘자갈밭’이에요. 겨울에는 범어천의 물이 말라 자갈이 많이 보였거든요.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나,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엄마는 왜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가 하는 소년의 마음을 담았어요. 당시 제 마음이었어요.”
-그때부터 시를 창작했나요.
“그랬어요. 제가 다닌 학교가 계성중학교인데, 김동리·박목월 선생의 모교예요. 국어선생님 중에 현역 문인들이 많이 계셔서 학생들의 문예창작에 관심이 컸죠. 매달 학생들의 문예작품을 모집해 상을 줬어요. 부상으로는 교내 매점에서 빵이나 학용품을 살 수 있는 상품권을 줬고요. 저는 매번 당선됐어요.”
-어느 날 갑자기 글재주가 생긴 건 아닐 텐데요.
“아버지가 은행을 퇴직하시기 전에 한국문학전집 33권짜리를 집에 들여놓으셨어요. 중학교 1, 2학년 때였는데 열심히 읽으면서 좋은 문장들은 옮겨 적었어요.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어머니가 용돈을 주실 때마다 헌책방에 갔어요. 당시 유일한 문예지가 ‘현대문학’이었고, 발매 시기에 따라 10원, 20원 했어요. 저는 늘 10원을 주고 사봤어요.”
그는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1968년 경희대 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문단에 등단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2학년 때 휴학하고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970년 1월 군에 자원입대했다. 춘천 야전 공병단에 소속돼 1년간 행정직으로 있다가 이후 2년간은 군종병(군대 내에서 이뤄지는 종교 활동을 보조하는 병사)으로 근무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된 후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됐다. 그의 등단 50년의 기준은 1973년 신춘문예 당선이다.
-군 복무 중에 어떻게 시를 썼습니까.
“주머니 속에 메모지를 넣고 다니며 불침번을 서거나 보초를 서면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 당선으로 복학 후 장학금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어요.”
그는 유일하게 외우는 자작시라며 ‘첨성대’를 읊었다.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 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한단 한단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 불던 그믐밤/ 첨성대 꼭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수놓던 첨성대의 등장불이 되었다// (하략)
-‘첨성대’는 어떻게 나온 시인가요.
“외할머니가 경주에서 사셨어요. 어릴 때 경주에 가면 첨성대에 기어오르고 창을 통해 안에도 들어가 놀았죠. 첨성대 부근은 다 논밭이고, 초가집들과 우물이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생일 무렵 그 초가집 중 한 집에 제 사촌형들이 자취를 했어요. 거기에 외할머니가 자주 가셔서 손자들을 위해 밥해주고 빨래를 해주셨어요. 저도 방학 때면 자주 놀러갔어요. 첨성대의 곡선에서 강한 여성성을 느꼈어요. 한복을 입은 여성, 어머니, 또는 외할머니의 모습을요.”
정 시인은 1976년 대학을 졸업했다. 숭실고 교사를 하다 3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주부생활’, ‘샘터’, ‘여성동아’, ‘여성조선’, ‘월간조선’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1991년 마흔한 살에 나왔다. 기자로 일하던 1982년 <서울의 예수>, 1987년 <새벽편지>, 1990년 <별들은 따뜻하다>를 각각 펴냈다.
시대의 눈물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
1980~90년대 현실참여적 시 썼지만
2000년대 ‘내 눈물부터 닦자’로 변화
-1976년 김창완, 김명인, 김성영, 이동순 시인과 함께 반시(反詩)동인을 결성했지요.
“1960년대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는 관념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1970년대 시인인 우리는 쉬운 일상의 우리말로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구체성에 뿌리를 내려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제 시의 언어 재료는 일상의 쉬운 우리말이에요. 그런데 한글전용정책은 잘못됐어요. 한자를 병용하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우리말이 적지 않기 때문이에요.”
-반시동인 정신의 영향으로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등 1980~90년대 작품에는 현실참여적 시가 주류를 이루더군요.
“시인으로서 시대의 눈물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00년대 이후에는 나 자신의 눈물도 닦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가로 변화했어요. 그래서 이번 시집은 저라는 개인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이 연결되는,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과거에는 시집에 사인해줄 때 ‘시는 우리 시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라고 썼지만 요즘은 ‘시는 인간을, 인생을, 사랑을 이해하게 합니다’라고 써요.”
정호승 시인의 시 ‘명동성당’이 새겨진 서울 명동성당의 시비 / 정호승 시인 제공
-바쁜 기자생활 중에는 어떻게 시를 썼습니까.
“1982년이면 제가 서른두 살이에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죠. 그런데 그해에 <서울의 예수>를 발표하고 5년간 한 편도 안 쓰다가 1987년에야 한꺼번에 몰아서 썼어요. 그러니 썼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요. 제 세 번째 시집인 <새벽편지>는 출근 후 점심식사를 거르고 썼어요. 1987년은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잖아요. 이한열·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시대적인 죽음이 많았던 시절이죠.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후에는 또 3년이 지나서야 <별들은 따뜻하다>를 발표했고요.”
-<새벽편지>에 김광석씨의 유작이 된 ‘부치지 않은 편지’의 노랫말이 된 동명시가 수록돼 있지요. 노래 가사로 쓰인 정 시인의 시가 70곡이 넘는 것으로 알아요.
“100만 장 이상 음반이 판매된 이동원씨의 ‘이별노래’가 가장 히트한 곡이고요. 안치환씨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풍경 달다’도 제 시로 지은 노래예요. 양희은씨의 ‘수선화에게’, 김원중씨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도 그렇고요.”
-저작권료도 꽤 되겠는걸요.
“아니에요. 저는 문학인이다 보니 1997년까지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1997년에 ‘부치지 않은 편지 1·2’를 담은 김광석씨 1주기 추모음반 ‘가객’이 발매됐잖아요. 음반을 기획한 백창우씨가 협회에 가입해야 저작권료를 지급할 수 있다며 가입하라더군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받았지만 이전 곡들에 대해 소급해 주지는 않죠(웃음).”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정 시인이 1987년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기자생활은 왜 그만뒀습니까.
“소설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을 큰아들 이름으로 출품해 당선됐거든요. 이후 소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어요. 그러다 퇴직 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잘 안 됐어요. 6~7년간 소설 쓴다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거예요.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는 것을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달은 거예요. 이러다 시도 못 쓰겠다 싶어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발표했어요.”
바지 왼쪽 주머니엔 늘 메모지
지하철·길거리서 시구 등 기록
“나에게 시는 내 영혼의 밥”
-제목이 격정적이에요.
“중국 당나라 때 임제 선사가 공부하는 선승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라고 했죠. 저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리라는 그 말씀이 가슴에 깊게 와 닿았어요. 언젠가 시집 제목으로 삼으리라 마음먹고 있었어요.”
1998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2000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펴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간 출판사 ‘현대문학북스’ 대표를 맡아 위탁 경영한 것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직장생활은 하지 않았다. 2004년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을 펴내고부터는 3년 터울로 시집을 발표했다.
-지금도 메모를 습관적으로 하나요.
“제 바지의 왼쪽 호주머니 속에 항상 메모지가 들어있어요. A4용지 절반만 한 크기의 용지를 접어서 매일 아침 외출할 때 넣어두거든요. 펜은 셔츠 왼쪽 가슴에 꽂고 다니고요. 시구가 아니라도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면 지하철에서든 길거리에서든 그때그때 기록해둬요. 며칠 지나 앞뒤로 빼곡하게 채워지면 또 다른 종이를 가지고 나가죠. 부족하면 스마트폰 메모창을 이용하고요. 그렇게 적어놓은 것을 파일로 정리해 노트북에 저장해둬요.”
-시를 쓸 때 정 시인만의 루틴이 있습니까.
“제목부터 정해요. 그리고 마음이 비교적 평온하고 컨디션이 좋을 때 몰아서 써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시를 쓸 때의 마음은 아주 고조되거나 긴장돼 있어요. 이 기간에는 꼭 필요한 약속 아니면 외출도 잘 안 해요. 그렇게 100편 정도의 시를 써서 한 권의 시집이 나오는 거예요.”
-정 시인에게 시는 한 마디로 뭔가요.
“내 영혼의 밥이죠.”
올해 그에게는 뜻깊은 경사가 잇따라 생겼다. 지난 6월 6일 고 김수환 추기경(1922∼2009)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명동성당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정호승 시인의 시 ‘명동성당’이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졌다. 또 대구광역시는 이르면 12월, 늦으면 내년 봄에 정 시인이 고교 때까지 살던 곳에 정호승기념관을 연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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