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부는 바람처럼 김남호
낮은 곳으로 이정하
사무친다는 것 방지원
북행열차를 타고 이달균
지상에 남은 술잔 김익두
사랑아 서상만
밤 전동차 신현배
파묻힌 얼굴 오정국
고래들께 귀띔함 이종문
거짓말 송찬호
모자(母子) 고형렬
너덜겅을 걷다 구지평
골목길 –정호성
또 기다리는 편지
마음이 없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허수경
사랑의 지옥 유하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쓸쓸한 날의 연가
세상의 길가 김용택
오늘도
밥줄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박제영
남겨진 가을 이재무
이른 봄의 시 천양희
쓸쓸한 여름 나태주
쓸쓸한 날에 강윤후
다리 위에서 김수영
찡한 사랑 노래 황동규
https://www.youtube.com/watch?v=XXECRwM881Y&list=RDXXECRwM881Y&start_radio=1
작년에 부는 바람처럼 김남호
할 수만 있다면 한 백년 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지
평사리 백사장에 눈먼
나끼대 하나 꽂아 놓고
밑 빠진 독에 물이나 부으면서
잡초나 무성하게 키우면서
일년 치 봉급
사흘 만에 탕진하고
빈 호주머니에 두 손 찌른 채
섬진강 은어 떼나 굽어보고 서 있는
저 벚나무들처럼
낮은 곳으로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방울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것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몰려 오라
사무친다는 것 방지원
맘속에
고개 외로 꼬인 사람 하나
품고 사는 일이다
뼛속 깊이
혈관 속까지 차지하고 들앉은
그를 상상하는 일이다
온종일
미동도 않던 혀가 느닷없이 굴러
미음(ㅁ)으로 멈추는 추상명사
그리움 설움 외로움
사무친다는 것은
군내 나는 입 우물우물
온몸 뾰족이 가시 돋우어
박하 향 피워 올리는 일이다
덩굴장미 유난히 붉은 날
초록이 무성한
굴참나무 그늘에 서는 날
편두통 앓는 일이다.
북행열차를 타고 이달균
사리원 강계 지나며 빗금의 눈을 맞는다
북풍의 방풍림은 은빛 자작나무
퇴화된 야성을 찾아 내 오늘 북간도 간다
북풍에 뼈를 말리던 북해의 사람들
결빙의 청진 해안은 박제되어 서성이고
고래도 상처의 포경선도 전설이 되어 떠돌 뿐
다시 나는 가자 지친 북행열차
어딘가 멈춰 설 내 여정의 종착지는
무용총 쌍영총 속의 그 초원과 준마들
갈기 세워 달려가던 고구려여 발해여
수렵의 광기와 야성의 백호를 찾아
꽝꽝 언 두만강 너머 내 오늘 북간도 간다
지상에 남은 술잔 김익두
첫눈이 올 거라 전화를 했드니,
그대는 일이 있어 먼저
제주로 간다고.
혼자, 빈 연구소 문을 나올 때
첫눈이 나렸다.
공중전화로 가 “첫눈이 온다!” 하니,
쓸데없는 소리 허지 말구
지갑이나 잘
챙기라 한다.
하염없이 나리는 눈발 어쩌지 못해,
따개 성님 함께 아점 막걸리,
저 덧없는 함박눈 눈발로 허여,
밥은 한 술도 뜨질 못허구
연해연신 들리우는
지상에 남은
술잔,
저승 바닥을 마지막 ‘쨍그렁’ 울리기 전
내가 다 비우고
떠나야 할,
지상에 아직 남은
이 쓸쓸헌
사랑들
사랑아 서상만
―막고굴 45호 보살상에
저 미소 천 년도 더 아꼈다
하룻밤 사랑에 울던 사람아
서역이 따로 있나
사랑도 헤매지 말고
뚜벅뚜벅
낙타 가는 길을 따라가야
신기루를 본다더라
천 년 후 나는 어디에 있을까
사막도 혹 서리 치는 날
내 죽음길 꽃가마에
저 미소 인질로 모셨으면
아, 나는 천 년까지 따라가
눈물 흘려도 내가 또 속을
사랑 같은 사랑아
밤 전동차 신현배
지하철 전동차는
놓치는 법이 없네.
기다란 승강장에
한두 명 서 있어도
문들을
활짝, 일제히 열고
반갑게 맞이하네.
어둠이 발 뻗고 누운
땅속 길을 열면서
지친 사람들을
자장자장 재우고
어느새
선로를 바꿔
꿈나라로 들어서네.
—『햇빛 잘잘 끓는 날』(도서출판 아동문학평론, 2011)
파묻힌 얼굴 오정국
-또는 매장된 시
기꺼이 무릎 꿇고 절을 하듯이, 머리를 진흙 속으로
들이밀고, 벌거벗은 궁둥이만 보여주시는
나의 어머니, 저렇듯 얼굴을 뭉개어
진흙이 되셨으니, 그 기쁨 홀로 누리시도다
진흙을 처발라 출구를 봉해 버린
참나무 불길을 견디시고 이기셨으니
그 고통 세세연연 당신 몫이옵니다
타관을 떠돌던
낡은 가방 내려놓고
노숙의 험한 망치와 목장갑을 등 뒤로 감추고
이마에 재를 바르듯, 당신께 나아가
두 볼의 눈물을 경배하고자 하오나
얼굴은커녕 발가락마저
궁둥이로 눌러서 감추어 두셨도다
진흙 속으로 캄캄하게 묻어버린 눈, 눈꺼풀을
어떻게 열고 계신지, 진흙을 눌러 붙인
사방의 손자국을 둘러보는 것인데,
오, 엉덩이로만 빛의 윤곽을 느끼시는
나의 어머니
고래들께 귀띔함 이종문
이 세상 고래들아, 혹시 그거 알고 있니?
너희들 보호를 위한 국제 포경 회의에서
일본이 안면 몰수의 강탈퇴를 감행한 걸
왜 탈퇴를 했느냐고? 그거야 뭐 뻔하잖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슬쩍슬쩍 잡아먹다
이제는 대놓고 너흴, 잡아먹겠다는 거지
귀 좀 줘봐, 고래들아, 내 슬며시 귀띔할게
놀더라도 울릉도와 독도 근처에서 놀고
일본의 배타 수역엔 아예 갈 생각을 마라
거짓말 송찬호
우리 집 개, 돌이가
고삐를 풀고
집을 나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와 죽었다
누구한테 맞았나?
밖에서 나쁜 걸 먹었나?
아빠는 이제 개똥을 치우지 않아 좋다 하고
엄마는 시끄럽게 짖는 소리 듣지 않아 좋다 하고
나는 개밥 당번을 하지 않아 좋다
다 거짓말이다
정선에게 전윤호
화암리* 벼랑인 양 버티는
너를 좋아했지
마음 한 번 받지 못한
짝사랑이었어
가문 여름의 옥수수 밭처럼
매련없이 울다가
아무도 없는 역에서
밤기차 타고 떠났지
굴이 무너지고
철교가 끊어졌어
밀려난 것들끼리 거품이나 흘리는 하류에서
늘 입석으로 살았어
빈자리가 생겨도 앉지 않았지
언제든 돌아가야 하니까
가슴속엔 구멍이 생기고
점점 커졌어
한 방울 한 방울 그리움이 떨어져
종유석이 된다면
몇 억 년을 건너야 입구를 찾을까
오래 참은 아라리처럼
이제 나 돌아가려네
길은 흐리고
다른 우주가 머지않으니
바퀴들이 삐걱이며 비행기재** 넘을 때
기어코 안개는 비가 되겠지
더는 오지 말라고
입술 터진 강물이 막아서고
나 따위 잊는 지 오래라고
좋은 사람 만나 잘산다 해도
나는 기필코 가네 이 한 목숨
함백산 만항재 주목으로 남고 싶다네
* 화암리:기암절벽으로 유명한 정선 화암면 마을.
** 비행기재:평창에서 정선 넘어가는 험한 고개.
모자(母子) 고형렬
어머니 그래
어머니 손에서 제 손이 생겼지요 그래
어머니 무릎에서 제 무릎이 나왔지요 그래
어머니 눈에서 제 눈이 왔고요 그래
어머니 고생에서 제 고생도 왔어요 그래
어머니 마음이 제 마음에 있어요 그래
어머니 그래
그때 아버지 목소리도 들었어요 그래
마을 사람들 소리도 들었어요 그래 들었구나
예, 잎 지는 바람도 들었어요
그래 총소리도 들었지
그래 우리는 이곳에서 와서 이곳에서 산단다
―『이 땅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인 61인의 헌사』(예하, 1988)에서
너덜겅을 걷다 구지평
짧은 자소서에 낭만은 감점 포인트
하얗게 밤 새우며 너덜겅*을 걷는다만
그래도 고래 한 마리
가슴속에 키운다
사막에서 찾는 막다른 정규직행
쉽게 쓰고 버려지는 삶의 결이 거칠다
힘겹게 채용 사이트에
매달리는 사이보그
영혼이 푸석푸석 서른 살의 스펙 쌓기
진짜인 듯 가짜인 듯 인공지능 이중대
오늘도 헬조선 풍경에
젖어드는 티슈인턴**
*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길.
** 티슈인턴:인턴 근무 후에 채용되지 못하고 일회용 티슈처럼 그냥 버려지는 인턴사원.
골목길 –정호성
그래도 나는 골목길이 좋다
서울 종로 피맛골 같은 골목길보다
도시 변두리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블록담이 이어져 있는 산동네
의정부 수락산 밑
천상병 시인의 집이 있던 그런 골목길이 좋다
담 밑에 키 큰 해바라기가 서 있고
개똥이 하늘을 쳐다보다가
소나기에 온몸을 다 적시는 그런 골목길이 좋다
내 어릴 때 살던 신천동 좁은 골목길처럼
전봇대 하나 비스듬히 서 있고
길모퉁이에 낡은 구멍가게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다
주인 할머니가 고양이처럼 졸다가 부채를 부치다가
어머니 병환은 좀 어떠시냐고
라면 몇개 건네주는
그 가난의 손끝은 얼마나 소중한가
늦겠다고 어서 다녀오라고
너무 늦었다고 어서 오라고 안아주던
어머니의 그리운 손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어느 술꾼이 노상방뇨하고 지나가는
내 인생의 골목길이 좋다
신천동 :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성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마음이 없다
마음이 떠났다
마음에도 길이 있어
마음이 구두를 신고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버렸다
비가 오는데 비를 맞고
눈이 오는데 눈을 맞고
마음이 먼 길을 떠난 뒤
길마저 마음을 떠나버렸다
나는 마음이 떠나간 길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종로에서 만나 밥 먹을 마음도
인사동에서 만나 술 마실 마음도
기차를 타고 멀리
바다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마음이 다 떠나면
꽃이 진다더니
내 마음이 살았던 당신의 집에
꽃이 지고
겨울비만 내린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ㆍㆍㆍㆍㆍㆍ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ㆍㆍㆍㆍㆍ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ㆍㆍㆍㆍㆍ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ㆍㆍㆍㆍㆍ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ㆍㆍㆍㆍㆍㆍ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ㅡ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허수경
고향 언저리에서 나지 않는 열매들이 추억을 채우네
이국의 푸성귀들이 내 살을 어루네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입술은 사랑의 노래로 헤어졌네
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
오 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
내 추억에서 나는 공중변소 냄새
사랑의 지옥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에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매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쓸쓸한 날의 연가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분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세상의 길가 김용택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오늘도 김용택
오늘도 당신 생각했습니다
문득문득
목소리도 듣고 싶고
손도 잡아보고 싶어요
언제나 그대에게 가는 내 마음은
빛보다 더 빨라서
나는 잡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여정에
다홍꽃 향기를 열게 해 주신
당신
내 마음의 문을 다 여닫을 수 있어도
당신에게 열린 환한 문을
나는 닫지 못합니다
해 저문 들길에서
돌아오는 이 길
당신은
내 눈 가득 아른거리고
회색 블럭담 앞에
붉은 접시꽃이 행렬을 섰습니다
밥줄
아이고매
저런 새려쥑일 인사들이
시방까지 살아 큰소리 치며
이 나라 하루 세끼
저 더러운 손으로
저 더러운 입으로
우리 어매 피땀 어린 삼시 세끼
밥을 쥑이네 하얀 밥을 쥑여
저런 쥑일 놈들이
저 밥이 어떤 밥이간디
아깐 밥 편이 묵고 앉아
함부로 남의 밥줄을 끊네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 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준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半空(반공)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 난 조롱박으로 퍼 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이른 봄의 시 천양희
눈이 내리다 멈 춘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 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은 안개를 길어 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이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까르르 웃고 있다
쓸쓸한 여름 나태주
챙이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 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들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차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 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타전)하는 것 같기에
다리 위에서 김수영
그곳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러간다
흐르는 강물 아래
그리운 것들이 먼저 저문다
멀리 잇는 불빛 너머
길이 없으므로 이어지는 다리들
막차를 타고 와서 갈 데까지 가보고 싶은 나는
건들거리며 난간에 기대 노래하고
미련없이 떠나고 싶은 당신은
물 속에서 흔들린다
이따금 추위를 느낄 때면 당신을 생각한다
한밤 중 낯선 도시의 다리 위에서
찡한 사랑 노래 황동규
개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 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답갑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처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은선의 시 (0) | 2023.01.05 |
---|---|
모르는 척, 아프다 外 (0) | 2023.01.02 |
정호승 시인 “반송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0) | 2022.11.27 |
10.29 참사 추모 詩 (0) | 2022.11.20 |
옛 노트에서 (0) | 2022.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