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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옛 노트에서

by 이성근 2022. 8. 7.

황지우-

중언부언의 날들 -강연호

겨울산- 황지우

옛 노트에서 / 장석남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 김명기

눈물을 머금는다는 말처럼 아슬한 말 있을까

사랑으로 나는 / 김정란

허물어진 집 심재휘

모란을 헛딛다-이은규

아버지의 자본론-김명기

국밥집에서

독창

절망- 김수영

그날도 아버지는- 허 연

어떤 싸움의 記錄- 이성복

시정잡배의 사랑-허연

풍경의 깊이 김사인

애인- 장석주

여인숙에서 보낸 한 철- 김경주

食堂에 딸린 한 칸- 김중식

문정희 - 고독

주름-박규리

최승자 -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https://youtu.be/XXECRwM881Y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중언부언의 날들 -강연호

잘 지내고 있지?

 

잘 지내고 있지? 설마 외로운 건 아닐테고

옷깃만 스치는 날들이 지나가서 나는 이윽고 담배를 끊었다

산 입에 거미줄치며 침묵이 깊었다

침묵이 불편해지는 관계는 오래 가기 힘든 법이다

번번이 연락하게 만든다며, 이번에도 졌다고 너는 칭얼거렸다

나는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이 너를 찾아갔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 이름 붙였던 유배지는 텅 비어 있었다

내 기억의 못갖춘마디 속에 꾹꾹 되돌이표를 찍어놓고

너는 또 어느 봄날에 미쳐 해배된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 그만두자고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적어를 명시하지 못한 객기는 조금 불안했다

대신 하염없는 취생몽사의 어디쯤

옷깃만 스치는 생의 말엽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말엽,그때는 정말 마지막 잎새처럼 악착같이 매달리지는 말자

다만 잘 지내지? 지나가는 말로 안부나 물어주는게

그나마 세상의 인연을 껴안는 방식이라는 것

설마 외로운 건 아니었으면 싶다 나는 또 담배를 끊었다

 

 

 

겨울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 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 김명기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날,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

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판 한 귀퉁

,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

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

랜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

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됐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

므로...... ,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

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

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즈막이 말해주었

.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

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

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아슬한 말

 

 

 

눈물을 머금는다는 말처럼 아슬한 말 있을까

 

늦은 술자리 끝

술방 문 열고 나서는데

아랫배 축 늘어트린 하현달 아래

꽃 지고 잎 다져

맨살만 하얗게 비치는 배롱나무 한 그루

 

그 가지 끝

지난 생을 마저 털어내지 못한 미련으로

터질 듯 터질 듯 차마 터트릴 수 없는

말간 눈물들 달려 있네

 

슬픔이 영글면 언젠간 터질 텐데

오롯이 작은 꽃잎에 매달려

짧게 지나간 사랑했던 날들

길게도 배웅하고 돌아서서

저토록 모질게 참는 몸이라니

 

머금은 몸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

그의 생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도 하는데

꽃피던 그 즈음이었던가......

 

내 눈 끝마저 시려와

잠시 한눈 파는 사이

상강霜降의 밤을 막 지나온 바람

그 가지 끝에 걸려 넘어지네

 

마침내

,

터져버리네

저 눈물들

 

 

 

사랑으로 나는 / 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들을 이해한다.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사랑으로 나는 내 내장 깊은 곳까지 박힌 칼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허물어진 집 심재휘

 

태백에서 사북 쪽으로 재를 하나 넘으면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겠다

돌의 어둠을 기다랗게 파고 들어가

다시는 돌아 나오지 않겠다는 눈물이었겠다

그러나 이제는 막장 같은 삶도 사라지고

그 말도 사라지고

폐광들 근처 산비탈에는 허물처럼

빈집들만 남아 허물어지고 있다

그 옛날

몇 개의 재를 넘어 이곳까지 밀려와

기울어진 땅에 기울어지지 않게 세운 집

최후의 후회인 듯

최초의 결심인 듯 서 있던 집

생각하면 나에게도 그런 집 하나 있었으리라

검은 낯 씻으며 또 살아졌던 하루가

허리 숙여 들던 그런 집 누구에게나 있었으리라

 

오지 같은 마음에 세워졌던 집 하나가

 

 

모란을 헛딛다-이은규

 

언젠가 당신은

얇은 담요 사이로 그녀의 맨발을 본 적 있다

기어이 가는 봄날의 모란 꽃잎처럼

살에 감기는 바람결에도 ()을 잃을까, 야위어갈까

당신의 애를 태우던 그녀의 살빛

 

살이라는 말처럼 연한 발음이 있을까

또 발이라는 말처럼 시린 말은 어떻고

 

이국의 風俗史(풍속사)에 모란꽃 아래서의 죽음이야 말로 도도한 풍류라는 문장이 있다 그날의 풍류는 그녀 발목에 혀의 문장을 새겨넣은 일, 꽃의 씨방처럼 부풀어오른 건 그녀였을까, 그녀라는 方向(방향)으로 흐르던 당신이었을까

 

지금 당신은 그녀의 걸음걸이를 추억한다

또옥 똑, 봄의 운율로 걷던

그녀는 살아서 나비의 後生(후생)이기도 했을 것

종종 바람에 체한 나비처럼, 헛딛는 때가 있어

그 모란 줄기 같던 발목을 삐끗하기도 했던 그녀

당신은 호, 하고 빚어낸 숨결을 불어넣어

그녀 생의 浮氣(부기)를 다독여주곤 했었다

 

마침의 문장에서까지 耽美(탐미)를 반성하지 않았던 그녀

비단 습신에 모란무늬를 수놓아 신겨달라

 

비단에 핀 모란이 얼마나 색스럽다 한들

그녀의 시린 발은 어쩔 수 없겠다

모란 ()에 눈이 밟혀 발을 헛디디면 어쩌나

애면글면하는 날들이 당신의 이력이 되겠다

발음되지 못한 문장들은 바람의 습기가 될 것

습신의 끈이 봄꿈처럼 스르르 풀린다 해도

고쳐 매줄 수 없는 길에 서 있을 그녀

 

돌아오는 길을 지우며 걷는 걸음의 배후는

피는 법을 잊은 꽃의 배후처럼, 허공이 알맞을 것

 

 

 

아버지의 자본론-김명기

 

목침이나 가끔 마른 기침소릴 내는 구형 선풍기의 바람이

오히려 장남보다 위안인 아버지의 등골을 본다.

이른 봄 개드릅 나무로부터 시작하여

이따금 산림감시원의 눈을 피해

주목나무를 퍼오기도 하고

여름 내내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

산 도라지의 향은

장날표 만 원짜리 등산화 다 헤진 값

바람이 바뀌는 중추절 전후로 송이 산막의 밤샘이 철거된 후에야

비로써 산술이 되는 무디디 무딘 아버지의 자본론

작물에 더는 희망이 없다는 건 이제 겨우 텃밭에서 엄마의

심심풀이 노동이 된 토마토나 가지 그리고 노랗게 꽃이 필 때까지 자란

늙은 상추가 내게 알려준 사실이다.

육법전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겉표지조차 본 적 없는 아버지 백태 낀 눈은

차라리 그래서 구체적인지도 모른다.

예순하고도 일곱 해를 등골이 등꼴이 되도록 조직도 없이 오로지 혼자 살아낸

아버지의 자본론은 스스로 자본가이기도 노동자이기도한 역사적 비판을 굳이

찾을 필요 없는 이를테면 스스로 수요와 공급을 조정해낸 독자적 시장성

하필이면 종일 비가 오는 날 돌아누운 아버지의 서글픈 등골을 보았을까?

뼈 빠지게 뼈 빠지게 되물어오는 나의 시린 눈으로 곤히 잠든 아버지의

자본론을 가슴 아프게 읽어야하는 날

 

 

국밥집에서

 

비오는 날 장터 귀퉁이 국밥집에 가면

어두운 형광등불빛 떨어지는 낡은 탁자 위

행주질에도 더 이상 밀려나지 않는

오래 묵은 때들이 더욱 빛난다

수많은 상처를 틈에 끼어

다시 그 상처를 덮어버리는 때들

벌어진 살 틈을 비집고 올라온 색다른 덧 살 같다

그곳에 앉아 사천 원짜리 국밥 한 그릇 비워내며

헛헛한 속내에 밀려드는 사치를 본다

먹고 돌아서면 먹은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천오백 원짜리 묵사발보다야

남은 반나절이 얼마나 든든할 것인가

문밖에는 남은 생을 국밥처럼 살고 싶은 이들이

축축한 장거리에 굽은 숟가락처럼 서서

아직 묵사발 같은 생의 좌판을 뒤적이고

장터 귀퉁이 국밥집엔

묵은 때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그들 생의 마지막 사치 같은 뜨끈한 국밥을

아주 천천히 비우고 있는거다

 

 

독창

 

치명(致命)에 들려서라도 돌파하고 싶었던

연애가 있었다 하자,그 찌꺼기까지

기꺼이 받아 마실 어떤 비굴함도

뱃바닥으로 끌고가면서

할 수 있으면 나. 독배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

아편에 저린 듯 자욱한 몽롱을 헤쳐 나왔지만

문제는 난파한 뒤에도 오랫동안 거기 계류되어 있었다는 것

이명처럼 흔들어서 나를 깨운 것은

누구의 부름도 아니었다

한 구덩이에서 엉켜들었던 뱀들

봄이오자 서로를 풀고 구덩이를 벗어났지만

그 혈거 깊디 깊게 세월을 포박했으니

이 독창을 내가 내 몸을 후벼 파서 만든 암거(暗渠)

서로에게 흘려보낸 저의 독으로

마침내 지우지 못할 흉터 새겼으니

허물 벗은 뱀은 제 허물이더라도

벗은 허물 다시 껴안을 수 없는 것들!

 

 

 

어떤사랑-오영해

 

첫눈이 솜뭉치로 내리던 날

소문을 따라 갔다 온

마흔에도 총각인 친구녀석은

골방 어둠 속에서

울었습니다

썩을 년 씨언허다

그러케 갔으먼 잘이나 살지

엄동에 애기 업고 배추 장사가 뭐여

막노동에 갈라진 손등

눈물이 쓰려서

첫사랑은

목이 콱 잠겼습니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먼 곳으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그날도 아버지는- 허 연

 

낮술에 취한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병을 깨어 들었다.

더러운 자식들, 우리가 왜 이래야 되냐고. 어머니는 까무

러치듯 쓰러졌고 비가 내렸다.

 

비명과 함께 달려온 옆집 숙부가 아버지를 가로막았

.형님 왜 이러세요, 나이 생각을 하셔야지요 나이를,

아버지는 4라운드짜리 권투선수였다.바닥난 쌀독처럼

주먹을 휘두르던 거리는 이제 아무데도 없었다.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는 나는 아버지를 부정했을까.

삭발까지 했었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전찻길 따라 달려

가버린 흑백의 세상을 비웃었을까.언제나 등뒤에서 퍼

붓는 이 비가 그칠거라고. 그날도 아버지는 아무도 찌르

지 못했다

 

실어증에 걸린 마을 사람들이 돌아간 마당엔 고속도로

공사 때 잘려나가지 않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당신 분노의 발끝도 모르는 세상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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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싸움의 記錄- 이성복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쓰를 짖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도 없는 동네냐 도 없어 도 그러나

나의 팔은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시정잡배의 사랑-허연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

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워낙 쉽게 무너지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

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한 번 딱 부르고 죽자.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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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장석주

 

누가 지금

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여인숙에서 보낸 한 철- 김경주

 

한 밤중 맨발로 복도를 걸어가

공동화장실에서 몰래 팬티를 빤다

방으로 돌아와

발가락을 뻗어 스위치를 끄고 누우면

외롭다 미라처럼

창틈의 날벌레들은 입을 벌린 채 잠들고

어제는 터진 베개 솜 같은 눈들이

방안까지 뿌려졌다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서

이 이불은 또 펼쳐질 것이지만

피부병처럼 피어있는 이불위의 꽃잎들,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온

옆방 기침소리처럼 피가 묻어 있는 것은

 

방안 곳곳 낙서처럼 살다간

사람들 머리카락 몇 줄,

손끝에서 가루로 부서진다

때 절은 하모니카를 속이불로 밤새 닦거나

철지난 주간지 위에 뜬 발톱을 깎아 놓는 일,

배를 잡고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며

눈이 튼 사람들과 비린 아침을 주고받는 일은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독채에선

아침마다 작약냄새 환하게 피어올랐다

 

언제쯤 내 몸을 거절하지 않는 위증이

희망이 아닐 수 있을까

이불속에 들어가 라디오를 끌어안으며

사람들은 산다 허구처럼,

몇 줄의 최전방을 수첩 속에 갈겨 놓은 채

 

아침이면

나는 촛농처럼 조용히 바닥에 흘러있을 것이다

 

 

食堂에 딸린 한 칸- 김중식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 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앞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 명순

紅燈 유리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거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食堂에 딸린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 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구 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절정은 아니고 없는 을 만들어 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들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 번 없는 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公園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知人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印度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문정희 -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주름-박규리

 

제 얼굴 제가 만든다는 말 무엇인가 했는데

지울 수 없는 사연 건너뛰지 못한 세월

골골이 주름으로 잡혀 내 얼굴이 되었다

웃음하나에 주름하나 서러움 하나에 주름 하나

이렇듯 살가운 사정과 스산한 과거 내게도 있었는가

누군가에게 몸 버리고 떠돌던 흔적과

양미간 깊이 팬 상처

 

그러나 생각하면,

내 주름은 또다른 누구의 주름 아니었으리

나 때문에 눈물 흘리던 사람이여

나 때문에 섧게 섧게 속 태우던 사람이여

내 철없는 욕심과 부질없는 사랑이

상처 한줄 그을 줄 차마 어찌 알았으랴

 

언제부터였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란

주름과 주름이 섞이는 일이라는 걸 짐작한 뒤부터

내가 먼저 한줄 주름으로 눞게 될까봐

그대에게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깊은 주름으로

쓸쓸히 접히게 될까봐

짐짓 딴전이나 피우다

먼데로 말꼬리 흘린 적 참 많았다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최승자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찌꺼기인 슬픔을 등에 얹고

그들은 나의 창가를 스쳐 흘러갔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래,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는 전화벨이 울리고

나는 피해 가고 싶지 않았다.

그 구덩이에 내가 함몰된다 하더라도

나는 만져 보고 싶었다,

운명이여.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나는 문을 닫아 걸었고

귀와 눈을 닫아 걸었다.

나는 철저한 조건반사의 기계가 되어

아침엔 밥을 부르고

저녁엔 잠을 쑤셔 넣었다.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물론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창조했다는 것까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그 전화선의 마지막 끝에 동굴 같은

썩은 늪 같은 당신의 口腔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 그곳으로부터 죽음은

결정적으로 나를 호명할 것이고

나는 거기에 결정적으로 응답하리라.

타들어가는 내 운명의 도화선이

당신의 썩은 口腔 안에서 폭발하리라.

삼십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늙은 니힐리스트, 당신은 피묻은 너털웃음을 한 번 날리고

그 노후의 몸으로 또다시 고요히

허무의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리라.

몇 천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