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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by 이성근 2022. 8. 7.

사진: 정윤재

항소이유서 / 이산하

우리가 사랑한 모든 거짓말들 / 박지웅

삼례에서 전주까지 / 안도현

흐르는 혀 / 이미산

미시령에서 / 강연호

수의를 입히며/ 고정희

순천 아랫장 / 허형만

백운에서 다산 생각 / 나희덕

연애 / 안도현

능소화가 지는 법 / 복효근

진눈깨비 부고 / 조정

샘가에서 웃던 춘아 / 조정

칡넝쿨이 일어서는 법 / 조동례

/ 이홍섭

몸이 많이 아픈 밤 / 함민복

이름 없는 것들에게 / 주용일

먼 강물의 편지 / 박남준

기별 / 윤성택

꿀벌 사원 / 박후기

제비꽃 / 송기원

어색한 휴식 / 김명환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갠지스 화장터에서 / 박동진

滿月 / 원무현

꽃나무 아래의 키스 / 이수익

낙타 / 이상국

새벽 통신 / 윤인애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폐가 / 강연호

나비가 날아간 자리 / 박남준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 박정대

강 건너 등불 2 / 임영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 박남준

여름 엽서 / 이외수

물수제비뜨는 날 / 이홍섭

유월에 쓰는 편지 / 허후남

달의 난간 / 정군칠

대청에 누워 / 박정만

 

 

 

항소이유서 / 이산하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

 

28살 무렵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적의 심장부에 두번째 폭탄을 던지는 심정으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썼다.

담당변호사가 급히 교도소로 달려와 말을 더듬거리며

", 당신, ,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지금 검찰과 법원까지 발칵 뒤집혀 황교안 공안검사가

이자는 손목을 잘라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난리"라며

잔뜩 흥분해 소리쳤다.

그리고 여죄를 캐며 추가조사에 들어간다고 했다.

난 아무 말 없이 창문 밖의 하얀 자작나무만 쳐다보며

저 백척간두의 꼭대기로 망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김수영의 미발표 유고시 발굴 기사가 나왔다.

표현의 자유를 개탄한 '김일성 만세'라는 작품이었는데

4.19혁명 뒤에 썼다가 발표되지 않고 50년 후 공개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처럼 공개되어도 안전할 때 공개되었다.

허용된 무기는 이미 무기가 아니다.

모두 김수영 신화만 덧칠할 뿐 썩은 사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129번째쯤 자작나무 잎을 세다가 멈춘 것 같은데

갑자기 상처 입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지에 앉더니

나에게 항소하듯 잠시 눈부시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담장 너머로 이송되었다.

담장 안에는 아직도 하얀 유골 같은 자작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난 여전히 망명도 못한 채 혼자 불을 피우고 혼자 불을 끄며

저 지극한 난공불락의 자작나무 꼭대기만 쳐다보고 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2021

 

 

우리가 사랑한 모든 거짓말들 / 박지웅

사랑스러운 말들을 잔뜩 뭉쳐놓으면

종잇조각이 되기 십상이라 했지요

 

당신이 종이로 만든 꾸깃꾸깃한 눈물이나 방울새 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면 안주머니에 받아 넣었지요

 

종이 속에서 가늠할 수 없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지그시 쥐었다가

볕 좋은 창가에 올려두었지요

(그래도 날아가진 않아요)

 

우리가 사랑한 모든 거짓말들은

붉고 아득한 저녁과 함께 종이 관에 넣었지요

 

달리 장례를 치르지 않아서일까요, 죽은 것들이 가끔 심장에서 두근거리지만요

이미 사라진 것들이라도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종이뭉치가 저절로 풀리듯

그냥 나무 하나가 별을 향해 걸어간 죄로 사과를 낳았거니, 달콤하게 생각해요

(입안에 고인, 고이는 일종의 맛있는 실망!)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말아서 버린 새와 종이와 거짓말은 다 한 핏줄이었어요

가장 부드러운 쪽부터 바뀌는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2021

 

 

 

삼례에서 전주까지 / 안도현

 

만경강 둑길로 퇴근하는 중이었다

오른쪽 논에 가을이 와서 어둗어둑해질 때였다

나는 저녁에 왕새우나 구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새 두마리가 논바닥에서 날아올라 느닷없이 차창을 향해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다가오고 있었다

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힐 리가 없었다

검은 새였다

제법 몸집이 컸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시속 사십 키로미터였고 속도의 측면은 유리창이었다

순식간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패스트, 패스트, 패스트

아슬아슬하게 차는 급정거했고 세상에 새하고 부딪히다니 하고 나는 내 인생을 걱정했다

노을이 차창을 깨뜨리고 피를 흘리며 죽었을 거라고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나비와 잠자리를 들이받았던가 생각했다

백미러 밖으로 검은 새 두마리의 그림자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도 식겁해 별안간 날개를 몸에 붙이고 물갈퀴를 그러모으고 소름 돋는 몸을 급히 단단하게 돌돌 말았을 것이었다

새들은 물가 쪽으로 간신히 날아가 안착하는 것 같았다

새들의 발목과 저녁 식사와 이부자리를 생각하는 동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검은 새하고 부딪쳐서

미련한 차가 강둑 아래로 구르는 저녁이 왔어야 했다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 2020

 

 

흐르는 혀 / 이미산

 

말의 샤워를 퍼붓는 혀가 있다

통속을 깨트리는 혀의 불친절이 있다

 

날마다 자라는

조밀한 돌기들

합창하며 말의 등을 훑고 지나갈 때

일억 오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햇빛이 있다 팔 분 십팔 초 동안 내리꽂히는 간지러움이 있다

몸속으로 자라는 혀가 있다

태양과 지구 사이를 가로지르는 고백이 있다 아득한 방식으로 오르내리는 예감이 있다

얼마나 먼 곳까지 닿는 혀인지

태초를 초대하고 착란을 도모하는 메아리인지

 

익명으로 파견된 태양의 애첩인지

햇빛을 동강내며 찡그리는 눈썹인지

 

놀이공원에 남겨진 아우성처럼

안부와 무관하게 태어나는 소리인지 울퉁불퉁 피어나는 멍꽃인지

 

혀로 출렁이는 바다

천년만년 캄캄한 혀의 발바닥

 

혀가 혀를 감아올리며

흘러가는 날들

시집 <궁금했던 모든 당신> 여우난골. 2022

 

 

 

미시령에서 / 강연호

 

올 때는 한계령을 넘었으니

이제 미시령 타고 돌아가자며 우리는 쉽게

결정했다 때로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세상 건너가는 법 아니겠냐고

폭우 쏟아지는 오르막을 무릅쓰는 동안

방향 없는 왜바람 몇 자락에도 움찔 놀라

차는 자꾸만 시동을 꺼뜨렸다 운전이 서툴러서도

굵디뻑센 빗발 때문도 아니었으리라

너나없이 무겁게 실어놓은 쓸쓸함 감추려

차창을 열고 고래고래 악쓰며 노래 부르며

이대로 실종되자고 시끌벅적했지만

굽이치는 산맥의 옆구리에서 끊임없는 안개다발

풀어지니 한여름 폭우쯤에도 가슴이 시려

저마다 문득 때아닌 군불을 지피고 싶었다

한계령이거나 미시령이거나

시원하게 뚫린 도로와 가드레일과 낙석주의 표지판,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곳 명쾌하게 지시하는 이정표 있으니

우리 건너가야 할 세상 멈춰 서게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일기예보는 고개 너머 저쪽

춘천조차 맑다고 자못 경쾌했지만

낮은 포복으로 산맥 오르다 지친 먹장구름들

되내려와 이곳에만 폭우 뿌려 분탕질하며

왜 함께 젖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 있었다

허나 마음 둘 곳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여서

함부로 차를 몰면 어느새 미시령 꼭대기

휴게소에 잠시 들러 먹는 강원도 감자 맛이

어째 영 아니다 싶어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면

, 일제히 주먹 쥐고 감자먹이는 산

미시령이거나 한계령이거나

어느 세상인들 만만하게 건너갈 것인가

입안 가득 씁쓸한 감자를 삼키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서둘러 남은 길 재촉할 때

그제야 조용해졌다며 산은 천천히 돌아눕고 있었다

시집 <비단길> 세계사. 1994

 

 

 

수의를 입히며/ 고정희

 

논두렁 밭두렁에 비지땀을 쏟으시고

씨앗 여물 때마다 혼을 불어넣으시어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

바람개비처럼 가벼운 줄 알았더니

어머니 지신 짐이 이리 무겁다니요

날아갈 듯 누우신 오척 단신에

이리 무거운 짐 벗어놓고 떠나시다니요

이 짐을 지고 버티신 세월

억장이 무너지고 넋장이 부서집니다

구멍이란 구멍에 목숨 들이대시고

바람이란 바람에 맨가슴 비비시어

팔남매 하늘을 떠받치신 어머니,

당신 칠십 평생 동안의 삶의 무게가

마지막 잡은 손에 전류처럼 흐릅니다

당신 칠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

마지막 포옹에 화인처럼 박힙니다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

흘러라

내가 놓은 징검다리 밟고 가거라

되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

다만 단정하게 눈 감으신 어머니

아흐,

우리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당신 품 속에 슬몃 밀어 넣고

베옷 한 벌로 가리워드립니다

그래도 마다 않고 길 뜨시는

어머니······

시집 <지리산의 봄> 문지. 1987

 

 

 

순천 아랫장 / 허형만

 

장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온 집안이 잔칫집처럼 들썩거렸다

어머니는 열무를 보기 좋게 가지런히 다듬고

나는 밭에서 이슬 젖은 깻잎을 뜯느라

손톱 밑이 새까만 손으로 깻잎을 간추려 다발로 묶었다

할머니는 채소들이 수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리거나

젖은 무명베를 광주리에 담긴 채소들 위에 덮었다

아랫장까지 십리길,

당숙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수지 방죽을 지나

장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나난 리어카에 고추며 열무를 싣고

희희낙락, 아직은 이슬 어린 햇살을 밟으며 장으로 갔다

장날이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말끔하게 차려입은 밤재골 이모랑 이모부를 만나고

해룡면사무소 주사인 외삼촌과 외숙모도 만났다

깻잎이며 열무며 고추까지 다 팔고 난 파장 무렵이면

우리는 손가락이 예쁜 아주머니의 국밥집 긴 의자에 앉아

눈먼 외할머니 안부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낮부터 한잔하셨는지 따가운 햇살에 더 불콰한

낯모르는 어르신에게 외삼촌은 나를 자랑하며 인사시키기도 했다

제대하고 농사짓던 두 해 동안

그렇게 아랫장은 나를 먹여 키웠다

시집 <가벼운 빗방울> 작가세계. 2015

 

 

 

백운에서 다산 생각 / 나희덕

 

다산(茶山)이 병든 몸으로 찾아왔던 별서정원에

절뚝거리는 마음 하나 서성거린다

 

반만 피가 도는 동백꽃이여

 

그 붉은 마음 헤아리며 숨어살았던 사람 있어

깊은 골짜기 따라와 살던 슬픔도

계곡물 따라 하염없이 흘러내렸으리라

 

계곡에 물이 돌아와

친구들과 마주앉아 두런거리는 밤,

우리의 물 건너는 이야기를

듣고 또 듣나니

다산도 이렇게 두런거린 날 있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정원의 이슬 밟으며 돌아가는 길

 

머뭇거리는 발등에 동백꽃이

말을 걸듯 투욱, 투욱, 떨어져내리고

그 꽃을 누군가의 마음처럼 받아들고 내려갔다

 

벌써 흙에 스며드는 꽃도 있다

 

흩어진 동백꽃을 밟지 않고 지나기가 쉽지 않았

다산의 지팡이도 이렇게 휘청거렸으리라

시집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2021

 

 

연애 / 안도현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랫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능소화가 지는 법 / 복효근

 

능소화는 그 절정에서

제 몸을 던진다

 

머물렀던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주고

그 너머를 기약하지 않는다

 

왔다 가는 것에 무슨 주석이냐는 듯

씨앗도 남기지 않는 결벽

알리바이를 아예 두지 않는 결백

 

떨어진 꽃 몇 개 주워 물항아리에 띄워보지만

그 표정 모독이라는 것 같다

꽃의 데스마스크

 

폭염의 한낮을 다만 피었다

진다

왔던 길 되짚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수직으로 진다

 

딱 거기까지만이라고 말하는 듯

연명치료 거부하고 지장을 찍듯

 

그 화인 붉다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 2021

 

 

 

진눈깨비 부고 / 조정

 

뭔 일이여 이 사람아 문짝 뿌서지것네 월출산 호랭이 내래왔능가?

성님네 모름 윤바우가 죽어부렀어라

윤바우가! 아척에도 우리 영감님허고 소작 땀시 이라고 저라고 타읍 허고 가든디 이것이 뭔 소리당가

 

외지 노름꾼들이 지난달부터 청문네 사랑서 안 살았소 거그서 소 잽히고 화토짝 주ㅣ었능갑써라 윤바우댁이 저녁밥솥에 불 땐디 그 작것들이 와서 두말도 없이 소막 들어가 소앙치를 끄꼬 가드락 안 하요

 

오매오매 어째야쓰끄나 거년에도 나락 스므 섬을 그놈들한테 다 뽈려불드니이 윤바우는 그놈들허고 쌈이 나서 그리 됐다등가?

 

아니어라 소앙치 끄꼬 나강 것 보고 말래서 뛰어내림서 배락같이 소락데기를 질르드만 그질로 허청 들어가 농약 시 병을 들어서 둘러마세불렀다요

 

윤바우떡이 뜸물 입에다 들어붓고 뱅남이가 들쳐 업고 읍내 빙원으로 담박질 했는디 밸로 손도 못 썼능갑소, 우리 갱문이 아배가 병원까장 들고 뛰어갔다가 오메 윤바우 죽어부럿네 내 벗 잃었네에 허고 시방 들옴서 퍽퍽 우요야

 

오메 윤바우 짠해서 으짜끄나 가실 타작 끝에 화토짝 잡는 거시 빙이재 내불 데가 없는 사람인디 오메 내 채에 끈타불 떨어지먼 인자 누가 감어주꼬 그 엽엽헌 사람 으째야 쓰끄나야

 

 

 

샘가에서 웃던 춘아 / 조정

 

동네 부자반 놈들은 다 건들었을 것인디 누구 새낀 줄 알것능가 즈그 오빠가 뚜들어팸서 물어봤다는디 헛짓이재 눈만 마주치먼 아무나 보고 히히거리는 가이나가 옳은 대답 못 허재 오메 어느 썩을 놈인지 동네서 아조 멍석몰이를 해야 쓴디

 

낳는 즉시로 없애부러서 지가 새끼를 낳는지 어짠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헙디다 아까 저녁참에 풋것 씨치러 시암에 강께 팬허고 좋내 했드니 웃어쌉디다 오메 불쌍허등거

 

쩌번창께도 영애원 다리 우게 넋놓고 앉었다가 나허고 마주칭께 짜부라지게 웃드라야 오메 저 가이나를 어짜끄나 속이 씨래 죽겄드만 즈거매 속은 오직허겄냐

 

사산이 그나마 천행이네 누가 그 새끼 보듬아 키울 것잉가 성가시재 참말로 성가시재

 

성님이 보셌소 사산인지 엎어부렀는지 누가 안다요 춘아가 즈가부지 죄닦음허는 것 아니요? 즈가부지가 인공 때 사람들 징상시랍게 죽엤어라 무단히 좌익으로 몰아 무지하게 놈못할 일 햇재

 

이 사람아 배락맞을 소리 마소 아무리 근다고 새끼가 죄닦음헌당가

 

아야 성용아 너는 잔 으째 그라고 입이 방정이냐 글지 잔 마야

음마 나만 허는 말 아니여 동네서 다 수군수군해야 배가 그라고 야무지게 불렀는디 먼 죽은 애기를 난다냐고 그래

 

어야 성용어매 그래도 그라지 마소 한동네서 한 시암 묵고 삼서 안 존 일로 자꼬 입초사에 올리먼 사램이 다 눈치가 있는디 유제서 속 내래놓고 살것능가

 

글재라 성님 성용어매 저것이 속은 순진허고 존디 말이 너머 빨라분단 말이요 오메 으디 데꼬 가먼 내가 아조 성가세 죽것어라 물가세 애기 세와둔 것 한 가지한 말이요

 

니는 참말로 염병이다이 니가 나를 으디 데꼬 가야 내 발로 가제 내가 성전서 시집와가꼬 수십 년을 너허고 유제서 벗허고 산디 니가 내 티 뜯으먼 니는 존데로 목 가야 내 눈빼기내기 해바라 너는 직행으로 지옥행이여

 

오사네 나는 거그까지도 니하고 같이 갈께미 아심찬하당께 저번 달에 우리 시아바니가 지사 드시러 오세서 글드라 니허고 나허고 나란히 갈 터가 지옥에 있다여

 

오메 징한 거 이 사람들이 한 살 더 묵응께 더 애기 되야부네 어야 학산떡 저녁밥 해묵고 삭은 불에 감재 묻어논 것 익었것네 내다 묵고 심 내서 밤새 싸와보소이

시집 <그라시재라> 이소노미아. 2022

 

 

 

칡넝쿨이 일어서는 법 / 조동례

 

어쩌다 네 곁에

뿌리내리게 됐지만 굴참나무야

혼자서는 설 수 없는 넝쿨이기에

너를 붙들고 오르고 싶어

네 몸 거칠어 정붙일 곳 없다지만

중심에 흐르는 물소리 따라

나선의 아득한 길 타고 오르니

부드러운 만남이 되지 않겠는가

 

밑바닥 기며 살다 보니,

네게 향한 굴절이 함께 쓰러지는 길일지라도

질긴 끈 하나 맺고 싶어

얼음장 같은 세상에도

추울수록 감싸가며 일어서는

결코 얼지 않는 길이 있다는 걸

사람과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시집 <어처구니 사랑> 애지. 2009

 

 

 

/ 이홍섭

 

일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절을 잘 하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절하시는 모습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

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세상사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만히 그 모습을 떠올리며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끝을 모아보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자세라

제풀에 꺾여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먼 훗날 내 자식이 또한 영글어

제삿날 내 절하는 모습을 뒤에서 훔쳐볼 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지길

 

그리워져서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생각해 주길 내처 기대하며

나는 또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가만히 발끝을 모아보는 것이다

시집 <숨결> 현대문학북스.. 2002

 

 

 

몸이 많이 아픈 밤 / 함민복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어주었습니다

 

태양은 낙타가 되어 몸을 옮겨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바람은 귓속 산에 나무를 심어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의 피를 순환시켜주었습니다

 

 

 

이름 없는 것들에게 / 주용일

 

세상에는 불리고 싶어

날치처럼 뛰어오르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은자처럼 풀숲에 제 이름 묻고 사는 것들도 있다

산에서 길 잃어 계곡을 헤매다

풀꽃이라면 자신만만하던 내게

난생처음인 풀꽃이 나타났다

이파리며 꽃잎 암술 수술의 생김새까지

꼼꼼 살폈다가 집에 돌아와 그림을 그려놓고

식물도감을 뒤져도 그놈이 없다

산속에만 있고 책 속에는 없는

어쩌면 미 기록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을 붙여줄까 하다가

아니, 그 풀꽃은 그냥 이름을 얻지 말았으면 싶었다

우리 산하에 이름이 없거나

세상을 외면하고 사는 이름 없는 풀꽃이

몇 포기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이름이란 존재를 붙들어 매는 올가미이기도 하며

또 세상에 알려져 생사여탈권이 되기도 하거니

뛰어오르거나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돌 틈에 제 이름을 묻고 살아가는

저 풀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행히 이 땅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것들은

이름 대신 순한 햇살에 빛나는 꽃을 얻는 법이다

 

사진:오선미  여여제

 

먼 강물의 편지 /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는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거라

 

 

 

기별 / 윤성택

 

나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람이 불러주는

사연을 받아적는 것은

잎새들의 오랜 관습이다

여름 지나 가을이 오면

엽서 한 장

그대에게 받을 수 있을까

단풍잎을 우표처럼 떼어내

책갈피에 꽂는 날이면

걷는 이 길 끝

그대가 서 있을 것만 같아

나무들은 온통

붉은 우체통을 꿈꾸는데

 

 

 

꿀벌 사원 / 박후기

 

꽃가루가 얼마나 모여야

꿀이 되는가 나는

생의 도감(圖監) 같은

두툼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밀봉된 전철 안

손잡이에 매달려

겨우 흔들리면서

꽃 찿아 강을 건너간다

세상의 꽃은 모두

벌들의 거래처, 나는

두엄에 핀 민들레와 인사하다

똥무더기를 밟기도 하고

잘못 든 건물

유리창을 들이받다

쫓겨나기도 한다

아주 쓸쓸한 날에는

분가루를 입에 묻힌 채

유곽을 헤매기도 하지만,

모든 씁쓸한 맛이

더해진 꿀맛은 그래서

달콤하다

 

 

 

제비꽃 / 송기원

 

저리도 꽃답게 화사한 도화살과

그대를 홀리던 눈웃음마저 무너져

칼바람과 쌓인 눈 속에, 죽음처럼

몸과 마음을 눕혔더니,

깊은 잠과 두절 속에 끝내 자신마저 잊었더니,

무슨 길인가, 망각의 캄캄한 중심重心에서

건듯, 제비꽃 한 송이 피어올랐습니다.

제비꽃이 낸 길을 따라, 이번에는

그대 또한 제비꽃 한 송이로 피어올랐습니다

 

 

 

어색한 휴식 / 김명환

 

나는 오이에게 미안하다

나이 스물이 되면서

이 땅의 시인이려면

민주화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고추에게 미안하다

나이 서른이 되면서

이 나라의 시인이려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호박에게 미안하다

자식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아버지는 늦도록 고생만하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콩에게 미안하다

어머니는 집도절도 없이

몇 년을 떠돌아 다니셔야했다

나는 토마토에게 미안하다

아내는 첫아이를 낳고도

남편 얼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딸기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늦게 본 아들 녀석이

쑥쑥 자라는 걸 보면 가슴이 뿌듯하다

내 철들 무렵 바라본 세상은 암흑이었다

지금은 새벽동이 터오고 있다

나는 가지에게 미안하다

조합 활동을 하다 시골 역으로 쫓겨나고

오랜만에 휴식을 갖는다

길에서 벽돌을 주워오고

산에서 흙을 퍼 나르고

베란다에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오이 고추 호박 콩 토마토 딸기

가지 부추 파 생강 수박 참외 상추

채송화 맨드라미 사르비아 양분꽃

봉숭아 해바라기 이름 모를 들꽃들

내 불쌍한 화초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휴식은 어색하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며

나는 어색한 휴식을 즐긴다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갠지스 화장터에서 / 박동진

 

얼마나 아쉬운 주검이기에

저리 꽃분을 바른 것일까

 

Ganga(갠지스 강) 화장터

장작더미 깔고 누워있는 얼굴이 곱다

꽃보다 붉은

불꽃이 분단장한 얼굴을 딛고 일어선다

한바탕 회오리처럼 몸뚱이를 휘감아 돌던

화사한 불꽃, 나지막이 사위어 갈 즈음

아직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일까

 

불이 붙어 있는 두 다리가

불똥 가득한 뜨거운 재를 헤치고

땅을 딛는데

 

잠깐 머물다가는, 여행길에서

전부 소진해버린 육신의

마무리!

저리 어려운 것인지

 

타다 만 것들, 검게 그을린 채

수북이 쌓여있다

 

 

滿月 / 원무현

 

작은 추석날

사람들 말에는 모난 구석이 없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둥글둥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둥글둥글 빚은 송편을

둥그런 쟁반에 담는 동안

자식이 아니라 웬수라던 넷째를 기다리던 당숙께서

밭은기침을 담 너머로 던지면

먼 산 능선 위로 보고픈 얼굴처럼 솟은 달이

궁글궁글 굴러 와서는

느릅나무울타리도 탱자나무울타리도 와락와락 껴안아

길이란 길엔 온통 달빛이 출렁

 

보시는가

가시 돋친 말이 사라진 밤

*이 둥글고 환한 세상

*고재종의 어느 시에서 차용

 

 

 

꽃나무 아래의 키스 / 이수익

 

더 멀리

떠나왔나 보다.

密敎의 단호한 문을 여러 겹 건너

비바람과 눈보라 사이를 숨차게 헤쳐

바위처럼 금간 상처를 내려다보며

그래도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 서로 위로하면서

몇 백 날을 그렇게 달려왔지.

은닉한 쾌감에 메마른 주둥이를 대고 싶어

피 흐르는 육체의 윤곽을 덮어 지우면서

저 감옥 속으로

감옥 속으로.

 

 

 

연민 / 이상국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낙타 / 이상국

 

새벽 세시에 일어나 동사서독(東邪西毒)을 본다

보아도 서로 모른다

남자들은 칼을 맞으면서도

왜 사랑을 놓지 않는지

 

집은 낡았으나 자식들은 어리다

영화 속의 한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며

날이 새면 또 내일이 오늘을 이긴다니

그쪽으로 아내의 꿈길을 고쳐준다

누구나 잠잘 땐 가엾은 것이다

나도 깨끗한 물에 얼굴을 비춰보고 싶다

 

나는 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어서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사랑이 보인다지만

사랑이 끝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래바람 새벽으로 내가

가시나무처럼 깨어 있는 것은

생이 불구이기 때문이다

 

복사꽃 피는 고향은 떠난 지 오래되었으나

 

나는 아직 이름조차 얻지 못하였다

세상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옛집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사는데

비디오가 끝나고 새벽 어디선가 낙타가 운다

 

 

 

새벽 통신 / 윤인애

 

꿈의 입구였을까

풀벌레 소리에 잠귀를 열었다

지금은 새벽 358

정처 없는 생각들이 밀물지고 썰물지고

그리운 날들의 수평선이 아득하다

 

어느 시골집 장독대 옆에는 아직

맨드라미 분꽃이 호황이라는데

먼 들판을 바라보는 아이야

어제 본 하늘은 뜬금없이 높더라

 

뒤척뒤척, 한 계절이 돌아눕는다

지금은 바로 그러한 때

끝내 해독할 수 없는 마음들은 이제

포맷해야겠다

 

 

 

연변처녀 / 윤제림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어머니

꽃가지 사이로 얼굴만 내놓은 사진 속

시집 오기 전의 아내

눈보라 고갯길을 넘어 교실로 들어서는

정순이, 순옥이, 그리고

국어책 속의 영희

 

연변 처녀야,

나는 지금 네 얼굴에서

내가 알던 모든 처녀를 본다

연변 처녀야,

아무도 주지 말아라

네 뺨 위의 대구 사과

혹은 소사 복숭아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폐가 / 강연호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밝힌 불빛은

근조등이었다고 한다 나는 부의금도 없이

이곳에 왔으므로 슬픔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없다

대체로 인사치레의 조문이 아니라면

상가에서 정작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저 죽은 사람이듯

떠난 식솔들 역시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한때 이곳에 쥔 붙였던 육신을 따라

빈집은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살과 문설주가 아직 버티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기 위한 악다구니일 뿐

햇살이 빈집의 서까래를 들쑤신다

언젠가는 저 햇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해

폭삭 주저앉고야 말 것이다

나는 곡비가 아니어서 울지 않는 게 아니다

어떤 숨죽인 물음도 헛되이

빈집은 녹슨 못처럼 고요를 구부러뜨린다

나는 다만 밥 짓는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간곡한 예를 올리고 돌아설 뿐이다

 

 

 

나비가 날아간 자리 / 박남준

 

나비는 사르릉 날아올라버렸다

망막 속에서 배추흰나비 한 마리 떠나버리자

거기 나비가 앉았던 자리 눈이 환하다

낙엽 부스러기들 그 자리

쓰다듬어본다

철 지난 갈잎들이 부서져 거름으로 돌아가고

깨알 같은 연초록빛 풀씨들

이제 막 깨어나고 있다

돌고 돈다

나 언젠가 쓰러져 거름으로 돌아가고

그 자리 흰나비 한 마리 날아오르고

 

 

쨍한 사랑노래 / 황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한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강 건너 등불 2 / 임영조

 

방배동 호프집 '피카소'에 가면

-그렇게도 다정했던 그때 그사람

언제라도 눈 감으면 보이는 얼굴

거나한 시인 김명인이 무반주로 나온다

 

상기된 왕방울눈 지그시 감고

유독 검은 뿔테 안경만 환하게 뜬 채

저 홀로 심각하고 애절한 십팔번을 뽑는다

 

- 밤하늘에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아아아 당신만을 잊지 못할까?

 

솔로로 어둠켜는 소야곡

그대 추억의 강은 어찌 그리 깊은가

방배동의 밤이 뽕짝조로 출렁거리고

사당동의 별들이 덩달아 박자 맞추는

그대 한이 언제 그리 컸던가

강물은 슬픔이 깊을수록 푸르지

등불은 어둡고 외로워야 빛나고

 

- 사무치게 그리워서 강변에 서면

눈물 속에 깜박이는 강 건너 등불

 

그랬구나, 우리는 저마다

세월이 흘러가도 내보이기 무엇한

그리움을 하나씩 품고 있구나

남모를 아픔 같은 한 같은

강 건너 등불을 갖고 있구나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 박남준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이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모진 바람 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끝 낙숫물 소리

잎 진 저문날의 가을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하릴없다

지는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ㅡ 쓴다

 

 

여름 엽서 / 이외수

 

오늘 같은 날은

문득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구나

우리는 까닭도 없이

싸우고만 살아왔네

그 동안 하늘 가득 별들이 깔리고

물소리 저만 혼자 자욱한 밤

깊이 생각지 않아도 나는

외롭거니 그믐밤에는 더욱 외롭거니

우리가 비록 물 마른 개울가에

달맞이꽃으로 혼자 피어도

사실은 혼자이지 않았음을

오늘 같은 날은 알겠구나

 

낮잠에서 깨어나

그대 엽서 한 장을 나는 읽노라

사랑이란

저울로도 자로도 잴 수 없는

손바닥만 한 엽서 한 장

그 속에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말 한마디만으로도

내 뼛속 가득

떠오르는 해

 

 

 

물수제비뜨는 날 / 이홍섭

 

때로 가슴에 파묻는 사람도 있어

그게 서러울 때면

강가에 나가 물수제비나 뜨지요

 

먼 당신은 파문도 없이 누워

내 설움을 낼름낼름 잘도 받아먹지요

 

그러면 나도 어린아이처럼 약이 올라

있는 힘껏 몸을 수그리고

 

멀리, 참 멀리까지 물수제비를 떠요

 

물수제비 멀리 가는 날은

내 설움도 깊어만 가지요

 

 

유월에 쓰는 편지 / 허후남

 

내 아이 손바닥만큼 자란

유월의 진초록 감나무 잎사귀에

잎맥처럼 세세한 사연들 낱낱이 적어

그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하고도 쓸쓸한 이 그리움은

일찍이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잘도 피어나던 분꽃,

그 까만 씨앗처럼 박힌

그대의 주소 때문입니다

 

짧은 여름 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초저녁별의

이야기와

갈참나무 숲에서 떠도는 바람의 잔기침과

지루한 한낮의 들꽃 이야기들일랑

부디 새벽의 이슬처럼 읽어 주십시오

 

절반의 계절을 담아

밑도 끝도 없는 사연 보내느니

아직도 그대

변함없이 그곳에 계시는지요

 

 

 

달의 난간 / 정군칠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 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곡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절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

 

 

 

대청에 누워 / 박정만

 

나 이 세상에 있을 땐 한 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 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 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 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철은

뒤엄 속의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 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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