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지음/후마니타스/260쪽/2020.03
저자 : 조정진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퇴직 후 4년째 시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버스 회사 배차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관리원 겸 경비원을 거쳐 버스터미널에서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쓰러져 해고되었다. 7개월간의 투병 생활 이후 지금은 주상복합건물에서 경비원 겸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다.
목차
들어가며7
첫 번째 일터. 버스 회사 임계장이 되다10
두 번째 일터. 아파트 경비원이 되다48
세 번째 일터. 빌딩과 아파트를 오가며132
네 번째 일터. 터미널 보안요원의 일 208
나가며 247
감사의 글258
책속으로
고용주들은 최저임금이 조금 오르면 업무량은 그대로인데도 인원을 대폭 줄였다. 또 무급 휴게 시간을 계속 늘려 최저임금이 올라도 시급 노동자는 더 받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시급 노동의 현장이며, 은퇴 후 일터에 뛰어든 단기 비정규직 고령자들의 세상이다. 수십 만에 달하는 노인들이 믿기지 않는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노령 노동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전혀 없다. --- p.8
나이 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문득 터미널을 둘러봤다. 구석구석을 쓸고 있는 등이 굽은 할아버지들과 늦은 오후 영화관으로 출근하는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터미널만 봐도 인력의 80퍼센트가 비정규직이고 그중 많은 수가 임계장들이었다. 이 고단한 이름은 수많은 은퇴자들이 앞으로 불리게 될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임계장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p.39
“당신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니까 해주는 말인데, 버스 회사에서 업무상 재해라는 건 교통사고 하나뿐이야. 당신이 회사 버스에 치였어? 아니지? 당신이 한눈팔고 일하다 다친 거지? 그래 놓고 회사에 책임을 떠밀어?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p.45
똥을 무서워해서는 청소원 노릇을 못 하듯이 음식물 찌꺼기의 악취를 두려워해서는 경비원 노릇을 못 한다. ...... 잡균과 오물이 묻은 손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고, 주민의 심부름도 할 수 없으며, 택배를 다룰 수도 없으니, 하루 평균 손을 씻는 횟수가 서른 번, 어떨 때는 쉰 번이 넘을 때도 있었다. 하루에 몇십 번씩 손을 씻는 이가 경비원 말고 누가 있을까? 우리의 손은 하루 종일 더러운 쓰레기를 만지는 손이지만 그런 이유로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손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p.86~87
실제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2017년 들어 최저임금이 6030원에서 6470원으로 상승했는데, 그 상승분 440원을 주기 싫어서 무급 휴게 시간을 한 시간 더 늘린 상황이었다. 경비원들이 모이면 웅성웅성 울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p.109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 가루가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p.122
“여러분은 고령자가 일하는 모범 사례이십니다. 집에서 따분하게 노는 것보다 일을 하시니 건강에도 좋고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기대에 부풀었던 가슴이 서늘해졌다. 의원은 경비원이 ‘집에서 노는 것이 따분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p.126
“아이고, 선생님,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떤 간 큰 구청장이나 시의원이 그런 조례를 만들려고 하겠어요? 당장 유권자의 절반이 넘는 아파트 주민들이 반발할 것이고 그리되면 다음 선거는 포기해야죠.” --- p.130
졸음을 이기기 위해 봉지 커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생으로 씹어 먹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뜨거운 물에 커피를 타먹을 시간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52
하지만 경비에게는 꽃잎도 치워야 할 쓰레기다. 종일 꽃잎을 쓸고 있는 내게 고참이 한 수 가르쳐 준다면서 말했다. “이 사람 경비원 되려면 아직 멀었군. 그렇게 꽃잎만 쓸다가 다른 일은 언제 하나. 꽃은 말이야, 봉오리로 있을 때 미리 털어 내야 되는 거야. 꽃이 아예 피지를 못 하게 하는 거지. 그래야 떨어지는 꽃잎이 줄어들거든. 주민들이 보게 되면 민원을 넣게 되니까 새벽 일찍 털어야 해.” --- p.180
“잘 들으세요. 예전에 118동 경비원이 지하실에서 죽었다고 합디다. 혼자서 뒈지는 바람에 한참 뒤에야 알게 되어 난리가 났대요. 난 경비원이 또다시 죽어 나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소. 그러니 지하실에 들어가서 쉴 생각은 애당초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p.196
명절이면 경비원의 하루는 뜀박질로 바뀐다. ...... 경비원에게 명절의 ‘3대 공포’는 선물 상자 택배와 명절 쓰레기, 방문 차량이다. --- p.199
똑같이 터미널에서 일한다 해도 터미널고속의 직원이냐, 파견 근로자냐에 따라 마시는 공기도 달랐다.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분진은 비정규직인 파견 노동자들이 마시고, 터미널고속 직원들은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정규직은 공기 순환 장치가 달린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용역인 경비원들은 매연으로 가득한 지하 주차장과 노상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p.217
맨 마지막 10호를 보면, “터미널고속의 직원이 지정하는 기타의 제반 업무”라는 포괄적 규정이 하나 더 있다. 이 규정에 따른다면 터미널고속의 직원은 경비에게 무슨 일을 시켜도 규정 위반이 아니었다. 이런 규정이 갑질을 부르고 경비원을 구속하는 족쇄와 굴레가 됐다. 전에 일했던 아파트와 고층 빌딩은 근거도 없이 갑질을 했지만 대기업은 갑질을 정당화하는 규정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감독자들은 이 규정을 내세워 정규직의 고유 업무에 속하는 일들도 경비원에게 떠넘겼다. 대체로 고객과 실랑이가 벌어질 만한 일이나 운전기사들과 부딪혀야 하는 껄끄러운 일들이었다.--- p.219
입사 첫날, 나는 별 생각 없이 미세 먼지 마스크를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더니 돌아섰다. 등 뒤로 혼잣말이 들렸다. “염병…… 다 늙은 경비가 얼마나 오래 살고 싶어서…….”--- p.236
이 터미널에서는 하루 열 시간 이상을 삭풍 한가운데 서서 일해야 한다. 견디다 못해 용역 회사에 방한 장비를 요청하니 터미널고속에 말하라고 하고 터미널고속에 말하니 용역 회사에 말하라고 했다. 추위를 견디다 못한 경비원들이 파카를 지급해 달라고 좀 더 높은 사람에게 건의해 봤다.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노인도 추위를 탑니까?” --- p.238
“병이 났다고요? 그럼 빨리 사직서를 제출하세요. 그러면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도록 권고사직으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무단결근으로 해고하게 되며 이 경우 실업 급여를 못 받게 됩니다.” ...... “우리 회사는 규정에 질병 휴가란 것이 없습니다. 근로계약서 9조의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우선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라는 조항에 의한 적법한 조치입니다.” --- p.244
임계장’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63세 노동자가 쓴 극한의 노동일기
봄이다. 동백이 지면 매화가 만발하고 그러고 나면 벚꽃이 핀다. 벚꽃이 지고 나면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6월까지 꽃잎들을 토해낸다. 꽃송이 하나는 수많은 꽃잎을 매달고 있다. 하루 종일 꽃을 피워 내고 하루 종일 꽃잎을 떨군다. 이렇게 낭만적인 봄꽃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쓰레기’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그렇다.
“사실 경비원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중 반가운 것은 빗방울뿐이다. 눈이며, 꽃잎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다.” 고참 경비원에게 꽃은 봉오리로 있을 때 미리 털어 내야 하는 존재다. 아예 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떨어지는 꽃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가. 그들이 처한 노동환경이 진짜 비인간적이다.
“꽃잎이 주차장에 나뒹굴면 그렇지 않아도 오래된 아파트가 더 지저분해 보여 집값이 떨어진다고 주민들이 난리를 치지 않던가? 꽃잎이건 뭐건 떨어지는 걸 바로바로 치우지 않으면 당하는 건 우리 경비원이야. 무더기로 쌓이고 무더기로 흩날리는 꽃잎들을 하루 종일 치워 본 사람이라면 내가 한 짓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
조정진씨는 일에 방해가 될까 싶어 취업 이후 스마트폰을 전화만 쓰는 구형 폰으로 바꿨다. 그래서 조씨가 찍은 사진들은 화질이 좋지 않았다. 후마니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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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는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공기업 사무직으로 38년간 일하다 퇴직한 조정진씨(63)가 생계를 위해 시급 노동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쓴 3년간의 노동일지를 모은 책이다. 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조씨가 버스터미널에서 일할 때 실제 주변에서 그를 부르던 이름이다.
조씨는 아파트, 빌딩, 버스터미널을 전전하며 경비원, 주차관리원, 청소부, 배차원으로 겪은 시급 일터의 팍팍한 현실을 담담히 써내려간다. 2016년 8월1일부터 2019년 3월31일까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책에선 차마 실명으로 적을 수 없는 날 것의 삶을 보여준다. 1장부터 4장까지 동명고속, 노을아파트, 대형빌딩, 터미널고속(모두 가명)을 거친 ‘임계장’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사회의 낮은 곳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반백의 노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검표원, 콜센터 상담원, 편의점 알바생, 미화원 등 그가 거쳐 간 일터들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도 새삼 환기한다. 우리의 빈곤한 상상력과 무지를 반성하게 만드는 경악스러울 정도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제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고령층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은퇴 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된 나의 이야기다. 은퇴자의 대부분이 70세까지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고, 나 역시 그랬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조씨는 ‘늘공’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60세의 나이로 퇴직했다. 가족은 전업주부인 아내와 출가한 장녀, 대학 3학년 아들이 있다. 당초 아들은 졸업 후 취업 예정이었으나 로스쿨에 진학하려해 노후 설계에 변수가 생겼다. 딸은 퇴직을 앞두고 결혼해 저축한 돈을 써버렸고, 퇴직금도 미리 당겨써 막상 받은 돈은 별로 없었다. 2010년 지방 소도시에서 광역시로 발령받아 거처를 옮기면서 부족한 집값을 1억5000만원의 주택담보 대출과 추가적인 직장인 신용대출로 메워야했다. 퇴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선 퇴직과 함께 ‘신용’도 사라졌다며 즉시 상환을 독촉했다.
노인 노동 르포르타주 <임계장 이야기>는 조정진씨가 일하는 틈틈이 써내려간 노동일지 10권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는 경비원 노조를 만들겠다고 모인 자리에서 나온 한 의원의 개회사가 인용된다. “집에서 따분하게 노는 것보다 일을 하시니 건강에도 좋고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노인 노동자의 현실과 세간의 시선의 괴리를 보여준다. 조씨는 단순히 현실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경비업법 실행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에 대해서도 따끔한 비판을 한다. 후마니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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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책은 조씨의 퇴직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평생직장에서 20년 넘게 개인연금을 부으며 노년을 대비한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의 상황은 남 일이 아니라 나에게 그리고 지인에게 닥칠 수 있는 평범한 현실이라는 의미다. 한국 사회가 약간의 변수만으로도 언제든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 가게 될 줄 몰랐다”는 그의 얘기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조씨는 생활정보지의 구인광고를 뒤적였다. 애초에 나이 많은 사무직을 구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60대 ‘어르신’에게 허락된 일자리는 단순 노무직 뿐이다. ‘고다자’,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쉬운 일자리들이다. 그는 은퇴 후 첫 직장으로 작은 회사의 배차 계장이 됐다. 업무의 부당함을 항의했다가 25년간 지켰던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다. “차 출발하는데 쳐죽으려고 환장했냐? 이 OO새끼야?”라는 욕설에도 익숙해지고, 잔반이 당연하게 올라오는 4000원짜리 눈칫밥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는 세 사람이 해야할 일도 기어코 혼자 해내는데 성공하지만,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탁송 작업을 하다 허리를 다친다. 사흘의 질병휴가를 신청하자 곧바로 해고되고 만다.
아픈 허리를 끌고 일주일 만에 다시 아파트에 취직했다. 경비원으로서 각종 쓰레기 분리수거, 주차관리, 소음 분쟁, 주민들의 갑질, 각종 잡역과 심부름 등 수십가지의 ‘비정형적 업무’를 하게된다. 최저임금 핑계로 7명이 하던 일을 혼자하게 됐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보급 없이 나서는 전쟁터’다.
알고 있고 가까이에서 보는 공간에서 조씨가 겪은 일들에 숨이 턱턱 막힌다. 이를테면 멋쟁이 할아버지가 재활용품 적치장에 옹기 항아리를 태연히 두고 간다. “여기에 버리시면 안된다”고 하면, 인자한 눈빛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일부러 여기 놔두는 거”라고 말한다. 대놓고 아파트 현관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려달라고 하면, 1000원짜리 지폐를 내던지고는 가버린다. ‘네네 치킨’이 되어서 온갖 심부름을 하는 것은 예사고,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실제로 듣기도 한다. 음식물통을 수압을 강하게 해 씻었다는 이유로 입주민에게 ‘갑질’을 당하고, 길고양이가 튀어나와 여학생이 실신했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쓴다. 동네 아이들의 장난으로 차단기 막대가 멈추는 ‘중죄’를 짓고 사과를 하면서는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근무하던 빌딩 지하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하지만 송기 마스크는커녕 일반 마스크조차 쓸 수 없었다. 후마니타스 제공
아파트 지하실 전경. 경비원들의 식사 장소 겸 탈의실로 쓰였다. 후마니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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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조씨는 격일제 근무 조건을 이용해 아파트에 이어 고층빌딩까지 월화수목금금금 투잡을 뛴다. 60대에 280만원을 벌기 위해선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빌딩에선 ‘본부장 사모님’의 갑질로 해고되고, 아파트에선 자치회장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재계약에 실패해 또다시 실업자가 된다. 이어 배차 계장으로 있을 때 사귀었던 ‘사부’의 소개로 터미널 보안요원으로 취직하지만, 결국 2018년의 혹독한 무더위 속에서 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조씨는 현재 신장과 허리에 손상을 입었고, 똥물에 젖은 쓰레기를 만지면서 얻은 피부병은 만성이 됐다. 그럼에도 7개월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4월부터 다시 15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에서 경비원 겸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일하면서 틈틈이 적은 메모를 본 지인의 권유로 병상에서 원고 2000매를 써서 지난해 8월 출판사에 투고했다. 조씨는 2일 경향신문과 전화인터뷰에서 “글을 쓰면서 직접 겪은 일 외에는 적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면서 “그럼에도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일이 아닌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공통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이들 일자리도 없는 현실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는 없다고 봐야 한다”며 “대부분은 저와 비슷한 현실을 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책을 준비하며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소금꽃 나무>,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현대조선 잔혹사> 등을 읽고 “나의 노동은 한낱 응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씨같은 노동이 보편화된 현실도 사람이 죽고 다치는 노동 현장과 멀지 않은 극한의 현실이다. 그는 “주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글이 짧아 알리지 못한다는 말들을 듣고, 차마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책으로 펴내게 됐다”며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고 만나게 될 세상이 더욱 나아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일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른바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고, 다, 자) 인력이 바로 노인 인력입니다. 제가 경험한바, 노인이 노동하는 일터에는 보호장치나 사회 안전망이 없었습니다. 코로나19 시대 가장 고위험군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셈이죠.”
한국의 본격적인 노인노동 르포르타주가 탄생했다. ‘임시계약직 노인장의 노동일기’를 담은 책 <임계장 이야기>다. 지은이 조정진(63)씨를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광주의 한 주상복합 건물에서 경비원 겸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이날 연차 휴가를 낸 뒤 대체근무자를 섭외해 놓고 아침 차를 타고 왔노라 전했다.
38년간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퇴직 후 지금까지 시급노동자로 일한 수기를 책으로 묶어낸 조정진씨는 1일 오전 <한겨레> 본사 옥상에서 벚꽃과 아파트가 보이는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웃지를 않았다. 그는 “아파트 경비일을 하다 넘어지면서 앞니가 많이 부서져 남들 앞에서 웃을 수 없어 그랬다”고 말했다. 경비원 동료들은 꽃잎, 낙엽, 눈송이 등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라고들 했다.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그는 정년퇴직 뒤 4년 동안 시급 노동자로 일해왔다. 2016년 첫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이었다. 노인 일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했고, 그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건강을 잃었다. 주위의 격려로 틈틈이 적어온 노동일기를 재구성했다. 아파트, 빌딩, 버스터미널에서 배차원, 주차관리원, 경비원, 청소원 등으로 일하며 겪은 노인 노동의 현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고를 만들었다. 그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노동운동가가 아니었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선하게 나이 들어 인격적인 모습을 갖춘 시민일 뿐이었다.
“제가 고유하게 겪은 일은 빼고, 모든 시급노동자, 비정규 노인 노동의 공통적인 기록만 엄정하게 모아 썼습니다.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에서 책을 쓴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들은 더욱 참혹한 얘기도 엄청나게 많지만 다 담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터뷰 때 자리를 함께한 후마니타스 이진실 편집팀장은 “편집 과정에서 축소할 수밖에 없었지만 2000매짜리 초고에선 훨씬 심한 갑질과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현장은 책보다 더 열악했던 것이다.
고르기 쉬운 노인 노동자
노인 일자리는 적고, 일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지난 4년 동안 지은이가 만난 수십명의 노인 노동자들은 (많은 이들의 오해처럼) 용돈벌이가 아니라 모두 생계를 유지하러 일터에 온 사람들이었다. 손 닿는 것마다 쓰레기였고, 오물이었다. 그보다 더한 구린내를 풍기며 살아가는 관리자와 사용자 들도 수두룩했다. 질병에 걸리면 산업재해 인정은커녕 곧바로 해고되었고,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었다. 실업급여를 받자면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데 아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우리나라 나이 든 남녀 노동자들의 공통 경험”이라고 했다.
ⓒ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권민호
1978년 공채로 공기업에 입사한 조정진씨는 38년간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60살에 퇴직했다. 평생 사무직으로 성실히 일했지만 자녀 학자금 대출이며 주택 구입 자금 등으로 빌린 돈을 서둘러 갚아야 했다. 딸 혼사에 큰 비용이 들었고 인문계 대학생 아들은 전문대학원에 가고 싶어했다. 연금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해 교육비만 2000만원. 하지만 부부 모두 평생 검소한 생활은 인이 박였고, “어떤 일이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분했다. 저임금 비정규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나이 든 퇴직자가 아름다운 멘토가 되어 젊은이들과 어울려 일한다는 영화 <인턴>은 판타지였다. 퇴직 뒤 경력은 “녹슨 훈장”이 되었다. 친지의 도움으로 처음엔 중소 광고회사에 들어갔지만 예의바르고 준수한 젊은이들 앞에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차라리 몸을 써서 깨끗하게 일하면 아쉬운 소리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가 임시계약직 노인 노동의 출발이었다.
작은 버스 회사 배차 계장으로 시급 일을 시작하니 사람들은 “임계장, 임계장” 하고 불렀다. “임시계약직 노인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25년 일하던 전임자가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인수인계도 받지 못해 허둥지둥 갈팡질팡했다. “나이 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 가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는 기록했다. 일하면서 “임계장”이라는 고단한 이름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
자르기 쉬운 사람들
버스회사에서는 3개월을 일하다 탁송 작업중 부상을 입고 이튿날 해고됐다. 그뒤 아파트 경비직으로 1년 동안 일하며 30년 넘은 아파트 두개 동 350세대를 혼자 담당했다. 어느날 화단에 호스가 아닌 양동이로 물을 주었다며 주민자치회장이 징계위원회를 열었고, 이어 해고됐다. 고층빌딩 경비원으로 들어가 일하면서는 브이아이피(VIP) 부인의 차량을 향해 호루라기를 불었다며 해고됐다. 대기업인 버스터미널 회사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뜨거운 여름 햇볕에 쓰러진 다음날, 전화로 병상에서 해고됐다. 척추염으로 석 달 입원을 했고 일곱 달 동안 투병한 끝에 무리해서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강력한 항생제로 신장을 다쳐 곧장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생계 때문에 지금도 “임계장”으로 일한다.
“경비로 일할 땐 24시간 맞교대를 하고 아파트와 고층빌딩을 번갈아 오가면서 하루도 쉬지 못했어요. 100일 가량 집에 가지 못하고 아내가 가져다주는 3개의 도시락을 먹고 하루를 견뎠습니다. 결국 그 소득이 병원비로 다 들어갔지만요.”
그는 10여권의 메모장을 보여주었다. 매일 빼곡하게 자신의 일과 감정을 기록하기 시작한 건, 메모광이어서가 아니라 납득되지 않는 상황 때문이었다. 정규직으로 일한 시간이 길었던 그는 고용주가 시급 노동자를 상대로 행하는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의 문제를 인지했다. 지방고용노동청에 민원도 해봤다. 하지만 “우리나라 용역업체 가운데 법을 지키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4곳의 일자리 중 아파트 경비를 제외하고 직접 고용인 곳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파견법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전형적인 일이라며 이 일까지 바로잡고 개입할 행정력이 전혀 안 된다고, 정치와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현실을 알아야 고칠 수 있는 것이었죠.”
다루기 쉬운 노인 노동
추운 겨울 땀이 꽁꽁 언 얼음 내복을 입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얼어죽지 않으려 동틀 때까지 제자리에서 뛰고 또 뛰었다. 오수관이 터진 곳에서 줄줄 흐르는 오물을 퍼내고, 석면 가루 떨어지는 지하실에서 3분 만에 밥을 먹었다. 얼굴 모르는 경비원이 죽어나간 지하실에서 도시락을 열었고 동병상련, 그의 혼백을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인적 드문 곳에서 몰래 아침밥 한 술 뜨다가 이곳에서 뭘 하느냐는 동료의 호통에 뚜껑을 그대로 닫기도 했던 경험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밥을 못 먹어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밥도 못 먹게 하는 사람을 동료라 여기고 일해야 하는 현실이 서러웠다.”
책을 쓰면서는 노인 노동의 조건과 현장을 객관화하면서 감정도 배제하지 않았다. 뼛속까지 치사하고 서러워서 고통스러운 차별과 법적 미비가 비정규 노동의 핵심이다. 그는 “네 군데 일터 모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대기업의 행태는 몹시 심했다”고 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한 버스 터미널에서는 하루 10시간 이상 삭풍 한가운데서 일했지만 방한 장비조차 지급받지 못했다. 노조가 있는 정규직 승무 사원들에겐 깨끗하고 따뜻한 숙소가 제공됐지만 비노조원인 경비원 공동숙소에서는 16명이 1980년대 군대 내무반보다 못한 곳에서 잠을 자야 했다. “직원은 경비에게 무슨 일을 시켜도 규정 위반이 아니었고, 이전에 일했던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근거 없이 갑질을 했다면 대기업은 갑질을 정당화하는 규정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청년, 여성 청소노동자 등 다른 비정규직들과 교류한 그의 경험이 책 안에서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연대의 따뜻한 온기 때문이다. 반면 비굴하게 반장이 되고 난 뒤 동료들을 감시하고 차별하는 얄팍한 인간의 표정을 포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도 인간적 품위를 보장받는 나라”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 수 있는 나라를 원했을 뿐입니다.” 꽃잎, 낙엽, 눈송이 등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였지만 그는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를 빗자루로 미리 쳐내는 동료 경비원을 붙잡아 말렸다. 인간성을 잊지 않으려 했다.
경비원은 감시·단속적 근로자가 아니다
지은이는 아파트나 빌딩의 경비원이 더 이상 감시·단속적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을 특히 밝히고 싶어 했다. 감시·단속적 근로자란 감시 업무를 주 업무로 하며 근로가 간헐적이라 대기시간이 많고 피로가 적은 업무를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결국 노는 시간이 많고 쉬운 일이라는 것인데, 경비업은 더 이상 이런 직종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최저임금 상승으로 경비원 숫자를 줄이는 사례가 속출했고 관리원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다. 아파트 한 가구당 소액의 관리비 증가를 감내하면 될 일이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전국민의 60%가 아파트 거주민이며 이들은 정치적인 표요, 이익단체도 많기 때문이다.
“감시·단속적 노동자가 아닌 이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규정을 배제하는 것이 노인 노동문제 해결의 첫 단추가 될 것입니다.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되면 일반 경비원도 주 52시간 근무 제한과 주휴일 근무, 야간근무 등의 적용을 받게 되죠. 사실은 65살 이상의 노인 노동은 훨씬 비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누군가 그 이야기도 이어갔으면 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이런 것 다시 쓸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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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의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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