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김남주

by 이성근 2013. 7. 14.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창비에 실린 시를 보고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 보았다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나의 시를 보고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 싶어보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또는 전사가

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으면 한다.

그것이야 말로 나의 보람이고 나의 자랑이다

 

그 무렵 창비에 실린 시를

내가 읽어주면 우리 어머니가 듣고

헤헤 영축없이 우리 사는꼴이다이

그런거이 시다냐 참 우습다이 참 재미있다이

그 당시 창비에 실린 시는 그런 것이었다.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1988 도서출판 남풍)에서

 

 

 

“나는 시라는 것을 내가 헤쳐 가야 할 길을 위한 무기 이외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내 시에서 소위 서정성을 빼버릴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쓰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되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내가 제거하려고 했던 서정성은 소시민적 서정성, 자유주의적인 서정성, 봉건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고리타분한 무당굿이라든가 판소리 가락에 묻어 나오는 골계적, 해학적, 한적 서정성이었습니다.”(『옥중연서』)

 

 

[金南柱]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 봉학리에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때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뒤 3선 개헌 반대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하였으며,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하였다.

 

8개월 복역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듬해 광주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를 열었으나 경영난으로 1년만에 문을 닫고,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 사상성 문제로 1978년 서울로 피신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하였다.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4년 수감중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만에 석방되었으며, 이듬해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상의 문제로 사퇴하였고,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망월동의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스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칭했듯이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유장하면서도 강렬한 호흡으로 반외세와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노동문제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참다운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시집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상의 거처》(1990),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 등과 시선집 《사랑의 무기》(1989), 《학살》(1990), 산문집 《시와 혁명》(1991),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1978)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1991)과 단재문학상(1992), 윤상원문학상(1993), 민족예술상(1994)을 받았으며, 2000년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제막되었다.

 

옛마을을 지나며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나를 깨워 사립문 밖으로 내몰았다

 

"남주야 해가 중천에 뜨겄다 일어나 깔 비러 가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학교에 늦을까봐 아침밥 뜨는둥 마는둥 책보 메고 집을

나서면

내 뒤통수에 대고 냅다 고함을 쳤다

 

"너 핵교 파하면 핑 와서 소 띧겨야 한다

길가에서 놀았다만 봐라 다리몽댕이를 분질러놓을 팅께"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방학 때라 내가 툇마루에서 낮잠 한숨 붙이고 있으면

작대기로 마룻장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야 해 다 넘아가겄다 빨랑 일어나 나무하러 가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저녁 먹고 등잔물 밑에서 숙제 좀 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 숨 자고 일어나 다그쳤다

 

"아직 안 자냐 섹유 닳아진다 어서 불 끄고 자거라"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소가 병이 나면 어성교로 약을 사러 간다

읍내로 수의사를 부르러 간다 허둥지둥 몸둘 바를 몰랐으되

횟배를 앓으며 내가 죽을 상을 쓰면 건성으로 한마디 뱉을 뿐이었다

 

"거시기 뭐드라 거 뒤안에 가서 감나무 뿌리나 한두개 캐다가

델여 멕여"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공책이란 공책은 다 찢어 담배말이종이로 태워버렸다

내가 학교에서 상장을 타오면

"아따 그놈의 종이때기 하나 빳빳해 좋다"면서

씨앗봉지를 만들어 횃대에다 매달아놓았다

 

그는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그는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그것은 보리 서너 말 얹어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그는 지푸라기 하나 헛반 데 쓰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내가 그릇에 밥태기 한톨 남기면 죽일 듯 눈알을

부라렸다

 

그는 내가 커서 어서어서 커서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농사꾼은 그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뺑돌이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딱까딱하고도

먹을 것 걱정 안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는 못 되도 내가 면서기쯤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자기도 면에 가면 누구 아버지 오셨나며

인사도 받고 사람 대접을 받는다 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대하교 다닐 때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상 말해왔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일러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장롱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일 거라고

부러워했다

 

그는 죽었다 화병으로

내가 자본과 권력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그는 손을 더듬거리고 나를 찾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

추수가 끝난 들녘이다

나는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밤길을 걷는다

마른 옥수숫대 사이로 난 좁다란 밭길이 끝나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논길로 꺾이는 어귀에서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논가에 쓰러져 있는 흰옷의 허수아비를 일으켜 세운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절 받으세요

그 동안 숨어 살고 갇혀 사느라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허수아비는 대답이 없다

야야 거그서 뭣하냐 어서 오지 않고

저만큼에서어머니가 재촉하신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래요 어머니

가뭄의 논바닥에 물을 댄다고

아버지와 같이 여기사 이슬잠을 자다가

새벽에 제가 피똥을 싸는 배를 앓았어요

나도 알고 있어야 그해 가을 일은

그 때 느그 아부지 놀래가지고 널르 업고

어성교 약방을 달려가던 모양이 눈에 선하다야

그날 새벽에 니가 꼭 죽는 줄 알았어야

나는 다시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또랑을 건너고 솔밭 사이 황톳길로 들어선다

 

다 왔다 저기 저것이 느그 아부지 묏등이어야

니가 서울서 숨어 살 때 돌아가셨는디

참 불쌍한 사람이어야 일만 평직 죽자 사자 하고

자식덜 덕 한번 못 보고 저승 사람 됐으니께

느그 아부지가 너를 을마나 생각했는 줄 아냐

너는 평생 돈하고는 먼 사람일 것이라면서

저 아래 징갤 논배미는 니 몫으로 띠어놓아라 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단다

 

 

산언덕바지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무덤은

일곱 마지기 우리 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아 니가 그러고 댕긴다고 세상이 뒤집힐 것 같으냐

첫 감옥에서 나와 무릎 꿇고 사랑방에 앉아 있을 때

아버지가 내게 하셨던 꾸중이 떠올랐다 가엾은 양반

                                                 김남주시집 '사상의 거처에서'

 

 

 

나는 나의 시가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 마지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 일어서는 봉기의 창끝이 되기를

 

 

그들의 시를 읽고

 

희한한 일이다 그들의 시를 읽다 보면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많이 있다

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뿌리가 닮았다고나 할까

소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맛이 닮았다고나 할까

빛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둠을 밀어내는 그 모양이 닮았다고나 할까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시에는 영락없이 쌍둥이 같은 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흙이 타고 밤이 타는 냄새와도 같다

그것은 노동의 대지가 파괴되는 천둥소리와도 같다

그것은 투쟁의 나무가 흘리는 피의 맛과도 같다

한마디로 말하자 그들의 시에는

인간이 있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원수지게 하기도 하고 동지이게 하기도 하는

물질이 있는 것이다 그 깊이와 역사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꽃이 있고 이슬이 있고 바람의 숲이 있되

인간 없는 자연 따위는 없다 거기에는

인간이 있되 계급 없는 인간 일반 따위는 없다 거기에는

관념이 조작해낸 천상의 화해도 없다

그들 시에서 십자가와 성경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적어도 가난뱅이들에게는

 

보라 하이네를

보라 마야꼬프스키를

보라 네루다를

보라 브레히트를

보라 아라공을

 

사랑마저도 그들에게는 물질적이다 전투적이다 유물론적이다

그들은 소네트에서 천사를 노래했으되

유방 없는 천사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애시에서 비너스를 노래했으되

궁둥이 없는 비너스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래했다 꿀맛처럼 달콤한 입술을

술맛처럼 쏘는 입맞춤의 공동묘지를

그들은 노래했다 박꽃처럼 하얀 허벅지를 그 부근에서

은밀하게 장미향을 피워내며 끊임없이 흐르는 갈증의 샘을

나는 자신한다 감히 다른 것은 자신 못해도

밤으로 낮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며

육체의 허무를 탄식하는 도덕군자들도 그들의 시를 읽으면

느끼게 될 것이다 빳빳하게 일어서는 아랫도리의 물질로

나는 자신한다 감히 다른 것은 자신 못해도

플라토닉 러브 어쩌고저쩌고 하는 순수 여류시인들도

그 시를 읽고 감격해 마지않는 신사 숙녀 여러분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시를 읽으면

자기들도 관념이 조작해놓은 위선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축축하게 젖어드는 아랫도리의 물질로 알게 될 것이다

 

 

사상에 대하여

 

새로운 사상은

썩고 병들고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 태어난다

이를테면 동학이 그러했다 반봉건싸움에서

새로운 사상은 그 초년에는

거리와 시장의 우스갯소리가 되기도 하고

사문난적이라 박해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반역의 씨앗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것을 멀리하고

굶주린 이들이 그것을 가까이 한다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

처녀들은 깊숙한 곳에 호미로 그것을 파묻고

사내들은 억센 주먹으로 그것을 지킨다

밤이 그들의 옷이고 별이 그들의 미래다

고난의 긴 세월 낡은 껍질과의 싸움에서

새싹의 기운은 이기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지천으로 그 가지를 뻗는다

사상의 꽃이 아름다운 것은

민중의 피로 그것이 개화하기 때문이다

그 열매가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만인의 입으로 그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혁명의 길

 

시대의 절정에서

대지의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새벽을 여는 사람이 있다 어둠의 벽을 밀어

혁명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굶주림이 낯익은 그의 형제이고

몸에 밴 북풍한설이 그의 이불이다

그리고 얼굴 없는 그림자가 그의 길동무고

 

혁명의 길은

다정히 둘이 손잡고 걷는 길이 아니다

박수갈채로 요란한 도시의 잡담도 아니다

가시로 사납고 바위로 험한 벼랑의 길이 그 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피와 투옥의 길이고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긴긴 싸움이 혁명의 길이다

그러나 사내라면 그것은 한번쯤 가볼 만한 길이다

전답이며 가솔이며 애인이며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며……

거추장스러운 것 가볍게 털어버리고

한번쯤 꼭 가야 할 길이다

과연 그가 사내라면

하늘의 태양 아래서

이름 빛내며 살기란 쉬운 일이다

어려운 것은

지하로 흐르는 물이 되는 것이다 소리도 없이

밤으로 떠도는 별이 되는 것이다 이름도 없이

 

돌멩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경기대에서 <조국은 하나다>/ 육성시 낭송을 듣고도 울지 않고/ 광주 톨게이트, 빛고을 시민들보다/ 먼저 와 그를 기다리고 섰던/ 백골단 장벽 보면서도 울지 않고/ 불 꺼진 취조실마냥 어둡던 망월동/ 그의 하관을 보면서도 이 악물었는데// 그를 묻고 돌아온 서울/ 심야버스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다/ 다리 난간에 덜덜거리는 허리 받치고/ 해머드릴로 아스팔트 까며 야간일 하는/ 늙은 노동자들을 본 순간/ 이 악물며 울고 말았다/ 그가 간 것보다 그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이 서러웠다.(‘김남주를 묻던 날’, 송경동) 김남주 시인이 타계(1994년 2월13일)한 지 20주기가 됐다. 그로부터 시와 글과 삶을 배웠던 송경동 시인이 ‘스승 김남주’의 시와 글과 삶을 이야기했다. 송경동 시인은 ‘김남주를 기념하는 대신 김남주를 매일 만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만나는 김남주는 20년 전 죽은 혁명시인이 아니라 2014년 지금도 다른 세상을 꿈꾸며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살아 있는 김남주들’이다

나는 그를 매일 만나고 있다

김남주 선생의 20주기를 맞아 몇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주로 문학 행사들이다. 이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문예지에 선생 관련 글이 조금씩 실리는 듯하다. 주로 회고와 문학사적 평가들이다. 생전엔 소나 말이나 닭 같은 짐승이었다면 진즉 죽고 말았을 0.75평의 동굴 같은 ‘납골당’에서 생활하다 지금은 광주 망월동의 옛 묘역에 그보다 작은 망각의 관 속에 묻혀 20여 년을 ‘살고’ 있는 그가 본다면 어쩌면 서운할 일이다. 그는 이미 말하고 갔었다. “사후의 평가? 아나 비평가 너나 처먹고 입심이나 길러라.” 그러면서 말했다. 네가 쓴 시가 깜부기가 될지 보리밥이 될지 그것은 농부에게나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꼴뚜기가 될지 준치가 될지 그것은 어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황금이 될지 똥금이 될지 그것은 어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비싸게 팔릴지 싸게 팔릴지 그것은 임금노동자에게 맡기고 써라(‘시를 쓸 때는’ 중에서)

 

계승하기 위한 ‘동지들’의 행사 없어


그는 “낡은 세계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려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창작 기량을 향상시킨답시고 문장론이라든가 수사학이라든가 문예이론 서적 따위를 일부러 읽은 적도 없었다.” 그는 믿었다.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내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삶인 것이다. 그 길이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비인간성, 부패와 타락에 대한 전면전에 시인 자신이 몸소 참가하는 길밖에는 없다.”(‘나는 이렇게 쓴다’ 중에서)

 

과하게 말해 그가 평소 시와 입에 가끔 올리던 표현을 따르자면 “개 같거나, 좆돼버린” 일일 것이다(그는 병상에서 죽어가며 “개 같은 세상 개같이 살다 개같이 간다”고 했다. 1972년 첫 징역을 선고받은 뒤 “좆돼버렸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리는 더 많은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했던 혁명과 세계관에 관련한 논의가 없어서다. 어디에도 그가 진정으로 목숨을 바쳤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실천과 노선을 평가하고, 비판적이고 반성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동지들’의 행사는 없다. 그가 뼈 속까지 증오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더욱 창궐하는데 그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그의 끝나지 않은 투쟁을 논하는 자리는 찾기 힘들다. 그가 혁명을 위한 무기로 생각했던 ‘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있는데, 그 목적으로 삼았던 ‘다른 세상’에 대한 논쟁은 없다. 다른 세상을 위해 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혁명적 조직’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생전에 ‘벗에게’라는 시에서 “참된 삶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로 향한 끊임없는 모험 속에 있다”고 말하고, “투쟁 속에서만이 인간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혁명은 실천 속에서만이 제 갈 길을 바로 간다”고 했는데, 변화된 세계 속에서 그 ‘실천 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는 짚어지지 않는다. 그런 총체성이 거세당한 김남주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다시 배우고 무엇을 계승할 수 있을까.

 

어느 때나 선한 웃음을 잃지 않아 ‘물봉’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생은 무척이나 구체적이고, 전투적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깔보면 바로 그 낫으로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라(‘종과 주인’)고 했던 이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산다고 노래하는 사람 따로 있고 노래를 위해/ 피를 흘리는 사람 따로 있는가라며 스스로 그 노래를 살고자 했던 사람이다. 권력 앞에서 꿇지 않는 무릎 없고/ 돈뭉치 앞에서 걷어올리지 않는 치마가 없고/ 부패와 타락이 그 본색인 부르조아 사회에서/ … / 누군가 턱짓 하나로/ 총칼의 숲을 이룬 수십만 군대를/ 제 사병처럼 부려먹을 수 있고/ 누군가 손가락 하나로/ 몽둥이와 방패로 무장한 수십만 경찰을 제 하인처럼 부려먹을 수 있고/ 누군가 지시 한마디로/ 꼭대기에서 말단까지 수십만의 관리를/ 일사천리로 부려먹을 수 있는 그런 기계적인 나라에서/ …/ 허위의 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진실의 인간을 허위의 인간으로/ 날조하고 조작하고 왜곡하고 확대하고 축소하는/ 신문이며 라디오며 텔레비전을/ 누군가 한 사람이 독점하고 있는/ 그런 어두컴컴한 나라에서, “맨입의 빈손으로 표를 모아” 선거를 통해 “허위의 인간을 몰아낸다는 것”이, “착취의 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압제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환상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서만 무너진다”고 했던 전투적 인간이었다.(‘환상이었다 그것은’ 중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 있었던가”

혹 그는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엔 감옥에서가 아니라 저 무덤 속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날쑥 쥐새끼들 귀신 씻나락 까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우리에게 얘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 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달라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따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들 스스로 제 둥지를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아무개와 박아무개가/ 지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하고 지금 우리에게 다시 묻고 싶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혁명시인/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나 자신을 노래한다’ 중에서)

 

그런 실천을 위해 그는 고교 시절 이미 획일적인 반공교육에 반대해 자퇴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들어간 대학 시절 1972년 10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박아무개”가 이른바 ‘유신’이라는 것을 선포했을 때 그에 반대하는 전국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어 전국에 뿌리려 했다. 그 일로 ‘반국가단체 예비음모죄’로 체포돼 근 1년을 살고 나와야 했다. 다시 복학되었지만 말도 안 되는 교수의 수업을 받다 “허허허 허허허” 웃고는 영영 교정을 떠났다. 고향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지금은 고인이 되어 그의 망월동 묘역 옆에 함께 잠들어 있는 고 정광훈 선생, 홍영표, 윤기현 등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만들고, 소설가 황석영, 최권행, 김상윤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기도 했다. ‘카프카’라는 서점을 만들어 광주 지역 학생운동의 거점을 만들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에 이미 무산자들의 무기가 될 프란츠 파농의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번역해 내기도 했다.

 

좀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을 위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들의 피 묻은 내의로 깃발을 만들기도 했다는 남민전의 전사로 가입하고 지하 활동에 나섰다.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들에게 빼앗긴 민중의 고혈을 되찾으러’ 동아건설 회장집 담을 넘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그를 수사관들은 ‘강도시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15년형을 받고 감옥을 사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고 수백 편의 투쟁의 시를 써서 은밀하게 밖으로 내보냈고, 파블로 네루다와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등의 시를 번역해 저항하는 이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될 저항시선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펴내기도 했다. 1988년 12월 9년3개월 만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그의 삶과 시를 폄하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를 변호한다는 옹색한 이유로 그에게도 ‘서정시’가 있었다고 별도로 김남주의 서정시를 펴내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시를 ‘관념적’이고 ‘도식적’이라 폄하하거나, 너무 직설적이고 산문투여서 예술성이 담보되지 않는 단순 ‘선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예 ‘예술’의 울타리 밖으로 그를 밀어내려는 시도가 무수히 있어왔다. 거기에 맞서 그는 생전에 “애초에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지 않았다.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바르게 설정하고 지배계급의 허위 이데올로기를 폭로하여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방편으로 나는 시라는 무기를 잡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의 시가 ‘너무 전투적이라는 독자의 역겨운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기도 했다.


“80년대는 피와 학살과 저항의 연대였고, 나는 그 연대에 인간성의 공동묘지인 파쇼의 감옥에 있었다고, 일부의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이제 와서 80년대의 시문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반성하자고 하는데 나는 그들의 앞날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늘의 현실이 어제와는 다르다고 해서 어제의 역사적인 실천과 그것의 문학적 대응을 오늘의 잣대로 잰다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저의마저 감지케 한다.”(옥중시전집 머리말 중에서)

 

나아가 그는 생전에 ‘변했다고 이야기하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무엇이 구체적으로 변했다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캐묻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민주화가 잘 되어간다고 그러네/ 어떻게 잘 되어가느냐고/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청와대도 개방하고/ 각하라는 호칭도 없애고/ 장관 임명장도 서면만으로 하고/ 국무회의 같은 것도 원탁에서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공산권에도 자유의 물결이 일고 있다고 그러네/ 어떻게 일고 있냐고/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디스코장도 생기고/ 청바지를 입고 청춘남녀가 연애도 하고/ 여성들은 허벅지까지 드러난 패션쇼도 하고/ 사기업도 생기고 시장경제도 도입하고// 벗이여 닫힌 사회의 대중은 열린 사회의 대중을 모른다네/ 그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연출하는 텔레비전 속의 연극뿐이라네/ 그들이 알고 있는 자유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 각색한 연극 대본뿐이라네(‘연극’ 전문)

 

철거민·장애인·노동자·농민의 형상으로

그로부터 ‘민주화’ 20여 년을 더 보냈지만 정말이지 무엇이 ‘민주화’되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를 진정으로 죽이려면, 저 먼 옛날의 무슨 골동품처럼 만들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의 구체적인 물음에 구체적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는 이제 해소되었는지,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팍팍한 가슴에도 있고/ 제 노동으로 하루를 살고 이틀을 살고/ 한 사람의 평등한 인간이고자 고개를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허리에도 있고/ …/ 아무도 얼씬 못하게 철가시를 꽂아놓는 부자들의 담에도 있는 삼팔선은 걷혔는지, 그가 그토록 저주하던 “자유의 집단수용소”이자 “인간성의 공동묘지”인 자본주의는 극복되었는지, 극복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지, 백보 양보해 조금이라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개량이라도 얼마나 되었는지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런 구체적인 답이 없는 이상 20년, 아니 50년, 1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는 우리 곁에 불편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김남주를, 선생을 매일매일 만나며 살고 있다. 며칠 전에는 대전교도소에 가서 4년째 그곳에서 살고 있는 김남주를 만나고 왔다. 그는 전국철거민연합 의장으로 용산 참사 건으로 구속돼 우리 모두를 대신해 살고 있는 남경남이었다. 그는 투기건설자본과 그들을 비호하는 정권과 공권력에 맞서다 벌써 생의 3번째 감옥을 살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저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는 들어와야 할 길 아니었겠느냐고, 그게 오히려 자신이어서 다행이라고 웃어 보였다.

 

그날 작은 감옥에 갇힌 그를 떠나 높은 감옥에 갇혀 있는 김남주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들은 옥천IC 옆 30여m 높이의 광고탑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야간노동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그들은 3년여 사이 두 번이나 해고당했고, 몇 번이나 고공농성에 나서야 했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한 용역깡패들과 창조컨설팅 등 노조 파괴 노무법인들은 한때 국회와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노동자들에게만 손배 가압류가 주어졌다.

 

며칠 뒤에는 다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는 또 다른 김남주를 만나러 갈 참이다. 그는 동료 가족들 24명의 주검을 안고 대한문 분향소를 지키다 다시 경찰에게 끌려간 전 쌍용자동차 지부장 김정우다. 합법의 외피를 입고 다시 나타난 독재자의 딸을 퇴진시켜야 한다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망월동 선생의 곁에 묻힌 고 이남종 열사의 서울역 49재 때에 나는 선생을 만날 것이다. 그 모든 자리에서 나는 선생을 매일 만난다. 선생은 그때마다 어떤 때는 철거민의 형상으로, 어떤 때는 광화문 지하도에서 1년 넘게 농성 중인 장애인의 형상으로, 어떤 때는 비정규직 해고노동자의 형상으로, 다시 나락을 태우고 있는 늙은 농민의 형상으로, 어떤 때는 노점상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눈이 초롱초롱한 대학생 동지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런 그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매일매일 의논하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읽고 있으면 저만치 서서 늘 대견한 듯 나를 보고 있는 그를 본다. 이렇게 역사적 생명으로 만날 때 생과 사의 경계란 실제 무의미하고, 1년이든 20년이든 무엇을 평가하기에 너무나 짧은 찰나일 뿐이다.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끄럽게 쑥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전사2’ 중에서) 송경동 시인 한겨레21  2014.02.24 제999호]



교도소서 은박지에 꼭꼭 눌러 쓴 김남주 시, 눈물이 난다

전남대 인문대 7일 김남주 기념홀건립 추진위 출범식

반독재 투쟁 전사 시인510편 중 360편이 옥중시

 

김남주 시인이 교도소에서 영어의 몸으로 있을 때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우유갑 안쪽면에 새긴 다산이여 다산이여라는 시. 전남대 제공

 

편지 봉투만 한 크기의 은박지에 시가 꽉 차있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다.”

 

김남주(1945~94) 시인(이하 김남주)옥중시로 유명하다. 후배 고형렬은 2014년 자전적 에세이 <등대와 뿔>에서 김남주가 옥중에서 은박지에 눌러 쓴 시 '단식''일제히 거울을 보기 시작한다' 2편을 받아 간직하고 있다가 공개했다. 그는 당시 칫솔을 부러뜨려 한쪽을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뒤 은박지에 눌러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시인은 때론 교도소에서 받은 화장지에 가슴 섬뜻한 시를 절절히 풀어 놓기도 했다.

 

김남주가 남긴 510편의 시 가운데 360편이 옥중에서 씌어진 것이다. “펜과 종이를 주지 않아 우유를 싼 은박지에 못을 갈아 썼거나 심만 구해 화장지에 어렵게 시를 적었다고 한다. 면회를 온 사람들을 통해 어렵사리 밖으로 나왔다. “가족초청좌담회가 있던 날이다형은 음식을 먹으면서 자꾸 주위를 흩어보곤 했다. 그러더니 교도관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형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재빨리 덜 먹은 밥 속에 쑤셔 넣었다. 얼마 후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이 출간되었다.”(동생 김덕종)

 

그는 청년기의 절반 가량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97210월 박정희 정권이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을 낸다. <함성>이라는 유인물은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이었다. 1973년 이강이 제작해 김남주에게 보낸 <고발>이라는 이름의 지하신문이 중앙정보부 검열에 발각됐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집행유예 3)을 선고받을 때까지 9개월동안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 고향인 전남 해남으로 낙향해 농사일을 거들면서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8편의 시를 발표했다.

 

197910월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됐다. 남민전 산하 민투에서 지하신문을 내는 등 땅벌작업을 했던 전위조직의 일환이었다. 당국은 남민전을 용공조작했고, 80여명이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김남주는 1,2심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국내외의 지속적인 석방운동에 힘입어 198812월 석방됐다. 구속된 지 93개월만이었다.

 

198052일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서울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앞에서 두번째줄 오른쪽 첫번째가 김남주 시인. 전남대 재공

 

그의 시는 불덩이였다. “감옥에서 쓴 시는 밖으로 흘러나와 봄이 와도 움츠리고 있는 자들의 채찍이 됐다. 그의 시는 시위대의 노랫말이 되기도 하고, 대학가의 불온 유인물이 되기도 했다.”(김삼웅) “선하고 착하며 여리디 여린 사람이었던 김남주가 혁명적인 시를 쓰는 전사시인으로 변모했던 것은 군사독재의 포악성이 만들어 준 후천적 요인 때문이었다고 한다.(박석무) 철창 밖으로 나온 시인은 49살이던 19942월 췌장암으로 타계해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교도소 안에서 동생에게 쓴 편지.

 

하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김남주의 시는 언어의 명료성과 윤리적 성실성이 만나 이루어진, 우리 시사에서 만나기 힘든 희귀한 결정체“(김경윤)로 정서적 울림을 주고 있다. “내게 김남주라는 이름처럼 통렬한 거울은 없다. 그것은 늘, 그전의 모든 것이 무의미 속으로 사라진 자리에서 철없이, 또다시 사회운동의 열정을 지피며 타올랐던 자아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김형수)

 

김남주(2010년 영문과 명예졸업)의 모교인 전남대(총장 정병석)7일 오후 4시 인문대학 1호관 113호에서 김남주 기념홀 건립 추진위원회출범식을 연다. 김남주 시인의 삶과 시 정신을 기리자는 의미가 담긴 프로젝트를 널리 알리기 위한 첫 걸음이다. 시인이 타계한 지 25돌이 되는 내년 2,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근대문화유산) 1113호 강의실에 김남주 기념홀(70·231)을 만들 방침이다. 사업비 8억원 중 3억원은 전남대가 마련한다. 추진위원회 쪽은 전남대 총동창회, 전남대 민주동우회, 한국작가회의 등이 나서서 5억원을 모금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남주 시인의 시집.

 

김남주 시인의 시집.

 

시인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들에게 먼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만, 시인의 정신과 삶의 태도, 그리고 문학적 유산은 우리가 길이길이 보존할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시인의 생전에 가까이 지낸 모든 분들과 그 친구들, 시인을 기리고자 하는 모든 분들의 뜻을 모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에 김남주 기념홀을 건립하여 시인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김양현 추진위 집행위원장·전남대 인문대 학장) 문의(062)530-3100./ 한겨레 2018 9 5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 John Tesh
 출처: 다음 블로그 음악과 여행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장석주 외   (0) 2015.04.03
조태일 -국토서시   (0) 2015.01.24
김사의 - 여든 즈음에   (0) 2015.01.15
김수영의 풀   (0) 2014.02.13
어릴 때 조국 -신기선  (0) 2013.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