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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장석주 외

by 이성근 2015. 4. 3.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수선화에게/ 정호승

나무는 김점순

거울 속 거미줄 정 용 화(안양)

저녁의 비행운飛行雲 함기석

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이해존 /녹번동

히말라야시다 신은숙

, 이유 / 김유경

목련꽃 지다 / 권행은

등불 한경옥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시집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91)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 갈수 있다면>(세계사, 1998)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랜덤하우스중앙,2006)

 

나무는 김점순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가만히 그 속으로 따라가 본다

이파리가 흔들리기까지

먼저 가지가, 줄기가

뿌리를 묻고 있는 저 땅이

얼마나 많은 날을 삭아내려야 했는지

가볍게 흔들리는 것 뒤에는 언제나

아프게 견딘 세월이 감춰져 있는 것을

 

푸르게 날을 세우고 있다고

외로움이 없었겠는가

허풍으로 길 하나 내기 위해

초승달 돌은 하늘에 가슴을 풀어놓고

얼마나 몸서리를 쳤는지

돌아앉아 숨 고르는 소리에

발 아래가 술렁거리고, 서쪽 하늘로

수만 마리의 새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그러면 나무는

제 한숨을

나이테 속에 꼭꼭 태워 넣고 섰을 뿐

 

(10회 신인지용문학상 당선작.2004)

 

 

거울 속 거미줄 정 용 화(안양)

 

덕천마을 재개발 지역

반쯤 해체된 빈집 시멘트벽에 걸린

깨진 거울 속으로 하늘이 세들어 있다

무너지려는 집을 얼마나 힘껏 모아쥐고 있었으면

거울 가득 저렇게 무수한 실금으로 짜여진

거미줄을 만들어 놓았을까

구름은 가던 길을 잃고 잠시 걸려들고

새들은 허공을 물고 날아든다

거미줄에 무심히 걸려있는 지붕 위

주인도 없이 해가 슬어놓은 고요를

나른한 오후가 갉아먹는다

간절함은 때로 균열을 만든다

한 때 두 손 가득 무너지는 인연 하나

잔뜩 움켜쥐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가느다란 손금이 조금씩 깊어졌다

심경, 마음을 들여다볼 때 마주치는 거울 속으로

손금이 흘러들어 무수한 실금을 남겼다

균열은 어떤 부재를 품고 갈라진 틈 속마다

허기진 풍경을 흘려 넣는 것인가

무너짐이야말로 더 큰 열림이기에

거울 속 거미줄은 어떤 것도 붙잡아 두지 않는다

나를 흘리고 온 날

서까래 같은 갈비뼈 사이로 종일 바람이 들이쳤다

그러고 보면 깨진 거울은 무너지는 것을

움켜쥐고 있던 집의 마음이었음을

 

14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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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비행운飛行雲 함기석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

대문가 목발을 짚고 올라온 어린 나팔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녁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 서녘하늘 전체가 붉은 갯벌로 변해가고

벼랑이 보이는 해안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햇살 하나가 가만히 다가와 아이의 상처 난 뺨을 혀로 핥아준다

흰 이가 막 돋아난 햇살의 빨간 잇몸

공기들이 만드는 투명한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아이는 약에 취해 잠든다

나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놀이터 모래밭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온종일 허공을 날다 저녁에

모래밭에 떨어져 죽은 새

새가 남긴 마지막 무늬와 추상의 발자국들이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

나는 잠든 아이를 꼭 안고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점점 붉게 지쳐가는 하늘과 대지

저 두 장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침묵들

거미의 입으로 들어간 벌레와 빗방울과 어둠이

환한 허공의 집이 되기까지

삶의 습한 저지대를 비행하는 아픈 비행운들

멀리서 석양에 젖은 새들이 하늘을 돌고

나무의 혼들이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빠져나와 찬 물결처럼 고요히

허공 저편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인다

 

2012년 제10회 애지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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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

산과 산 사이

와 여울, 여울과 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2013 한국일보 신춘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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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존 /녹번동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2013 경향 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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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시다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2013 세계일보 신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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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2013 국제신문 신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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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지다 / 권행은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2013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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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한경옥

야간자습 끝난 늦은 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사립문에서 깜박이던

별 하나

 

겁에 질려

땀이 흥건하도록

내달리던 발걸음을,

왈칵!

울음으로 바뀌게 하던 그

불빛

 

종종걸음치시던 어머니는

마중 대신

호롱불을 걸어놓으셨다.

 

머리 희끗한 딸이, 아직도

마음 놓이지 않는 듯

당신의 산소 앞에 환하게

불 밝혀 놓으신

원추리 꽃 한 송이

 

2013 월간 유심신인문학상

 

 

 

창밖에는 봄이 저리도 난리법석인데  올해도 봄 가운데 서지 못하고 비켜서 있다.   가끔식 도지는 편두통을 잠재우기 위해 설합을 뒤진다.  참 재미없는 세상이다.

Drowning In The Sea Of Love / Eva Cassi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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