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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조태일 -국토서시

by 이성근 2015. 1. 24.

80년 대 초 중반 이 시가 가슴에 들어 왔다. 

내 삶에 있어 국토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심어준  시 였다.   예컨테 국토란  두 발로 걸어 확인하는 땅이었다 고 할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생각은 변함 없다. 

 

 

국토서시(國土序詩)’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1975>

 

 

한 시인의 이름 앞에 그의 작품이 관형으로 얹어져 함께 불리는 예가 더러 있지만, 죽형 조태일 시인만큼 그 조합이 선명한 경우는 흔치 않다. '소주에 밥을 말아 먹는 시인'으로 불릴 만큼 술을 즐겼던 그의 호탕하고 남성적인 기질이 베인 국토가 바로 그 수식어이다

 

힘찬 연어처럼 반역의 시대를 거슬러 오르면서 시대를 다만 묵상하지 않고 전국토를 온몸으로 노래했던 조태일 시인의 문학정신은 오늘날 더욱 소중한 가치로 기억되고 재해석되어 마땅할 것이다. 국토에 대한 사랑과 새 역사의 도래를 소망하며 빗어진 시인의 언어는 억누르는 자, 거드름 피우는 자, 자신의 영달에만 혈안인 높은 자들에 대한 부릅뜬 눈과 더불어 헐벗은 자, 억울한 자, 낮은 자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 있다. 이 시를 서막으로 연 국토연작시는 비탄에 찬 세상에서 희망의 촛불 하나를 밝혔던 작품들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처한 숙명적인 현실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환기케 한다.

 

선 굵은 남성성을 오롯이 느끼게 하는 그의 시들은 비탄과 한숨 속에서 연명하듯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나약한 가슴을 펴게 하고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주먹을 불끈 쥐는 것만으로도 희망이었던 시절에 그의 시는 참으로 힘이 셌다. 신경림 시인은 그의 시를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모아진 힘, 짓밟히고 살아온 민중의 지혜를 찾아 빛나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평했다. 그리고 국토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애정은 곧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민초들에 대한 애정이므로 시인은 그것을 비록 버려진 땅이라 칭하면서도 그 땅이 배태하고 있는 풀잎이나 돌멩이 하나에까지 따뜻한 눈길로 보듬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으며 강바닥이 파헤쳐진 오늘날의 이 국토를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뭐라 하겠는가. 그가 꿈꾸어왔던 빛나는 전망과 낙관의 21세기 시대를 우리들은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그 시대에 우리 시인들마저 밀실에 숨어 자기연민의 노래나 가랑가랑 부르고 있지는 않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금 그 섬세함으로 이 국토의 '새 숨결이 열리도록' 힘써야 할 때이고, 그것은 시인이 다 이루지 못한 정신이기도 할 것이다.(권순진 2014.11.26.)

 

 

내가 뿌리는 씨앗은
―國土•42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다.
이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에
가릴 것은 가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지.


사람아, 사람아, 떠나가라.
나로부터 떠나가라.
내가 딛는 땅도 내가 받는 밥상도
떠나가라 떠나가라.


그리하여 혼만 남고 내 육체도
내가 걸치는 옷도 땀도 때도
손톱도 발톱도 털도 떠나가라.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地平의 저 넘치는 뜨락에는
마음놓고 뿌릴 수 있는 品種이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산간벽지 호젓한 개울물로 씻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사람아 사람아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지만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남아 있다.

아아! 그것은 죽는 일인데
죽어서 다시 깨어나는 일인데
아아! 그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인데
우리들은 아직 혼을 찾지 못했는데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地平과 뜨락만 넘쳐나네라.

 

시인 조태일은 1941년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태안사에서 보내고 광주서중· 광주고,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2"다시포도에서"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9년 시 월간지인 "시인"지를 창간하였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창립자이며 민족문학작가회 초대 상임이사와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광주대학교 초대 예술대학장을 지냈다. 시인은 1970~80년대 폭압적 현실에 시와 온몸으로 맞섰던 저항시인이자 빼어난 서정시인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식칼론>을 비롯한 8권의 시집을 간행하였으며 편운문학상과 성옥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작고 후 보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1999년 타계한 조태일 시인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전남 곡성 봉두산 태안사 계곡에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이 건립됐다.(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호 622-38 (원달리 799)

 

 

 

"아침 선박

 


아침 바다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서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깨는 출항.

세수를 일찍 끝낸 여인들은
탄생을 되풀이한 오랜 진통에
땀배인 내의를 벗어 바다에 던지고
파이프에 남자들은, 두고 온 시대를 열심히
피워 문다.


철저한 자유를 부르면서
흐느끼는 심연, 그 움직이는 고요,
가파른 정오의 한 때를.
이해만이 남고, 오직 진행이 있을 때 당황하던 파도를,
식욕을 거느린 별들이 주워 들고 멀리 떠났다.
험한 해협엔, 그러나
의지를 철썩이는 잔잔한 파도의 무료.
밤세워 해변을 지키던 새의 *녹은 남고.
순수의 깊이에서 일어서는 서적들의 눈부신 항변.

―아직 침실에 누워 있는 자들도 한번은 떠날 것이다.
휴식의 때가 오면 패배의 옷자락을 가다듬을
꼭 가다듬을
늙지않는 아우성, 동족을 꺼려하는 쓸쓸한 시선들도
한 번은 떠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개의 원인은,
서성이는 곳에 쓰러지지 않는 거만한 거부.
타협이 없는 거리를 글세,
걸어갈 수 있을까?

신앙은 놓이고 길을 가는 의문의 날에
찾아 온 제삼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식탁.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천둥이 울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의 식탁은 없을까?

쟁취의 이빨을 내놓기 전
낮에도 눈이 감긴 암초의 눈을 뜨게 할 순 없을까?

겨울을 빠져나온 꽃들이 찾아가
피어날 꽃나무는 없을까.

계절이 없어 과일들은 익질 못한다.


획득의 눈이 내리고 있다.
학동들의 꿈길에서 얻어진,
멀고 먼 나라의 가까운 은혜가 흩날리고 있다.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물러 않은 산.
아침 인사를 받으면서, 오후가 되더라도 피로하지 않을
하이얗게 움직이는 선박이 있다.

우리 젊은, 우울한 선장에겐 무엇을 바칠까?
우리의 모국어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을,
우리의 눈에 맞는 색깔의, 저 지평을 향해 펄럭일
기를 바쳐야 한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풀씨


풀씨가 날이다니다 멈추는 곳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햇볕 하염없이 뛰노는 언덕배기면 어떻고 /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내가면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 /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 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날아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이 묻히리.

 

 

 

달빛

 

달빛 속에서 흐느껴본 이들은 안다.

어째서 달빛은 서러운 사람들을 위해

밤에만 그렇게 쏟아지는지를.

 

달빛이 마냥 서러워

새들도 눈을 감고

두근 거리는 가슴으로 세상을 껴안을 때

멀리 떠난 친구들은 더 멀리 떠나고

아직 돌아오지 않는 기별들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 멀어만 가고.

 

홀로 오솔길을 걸으며

지나온 날들을 반성해본 사람들은 안다.

달빛이 서러워 오늘도

텅 빈 보리밭에서 통곡하는

종달새들은 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세상을

힘껏 껴안으며 터벅터벅

걷는 귀가길이

왜 그리 찬란한 가를 아는 이는 안다.

 

 

식칼론 2
―허약한 詩人의 턱 밑에다가

뼉다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 버리며 내 단 한 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육척 거구, 고집불통, 임전무퇴, 대의명분의 시인. '쑥대머리'를 부르며 '소주에 밥말아 먹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시인. 국토와 식칼의 시인. 반골에 강골의 광주 시인. 의리와 정()의 시인. 조태일(1941~1999) 시인에게 붙여진 수식들이다. 그는 국토연작시와 식칼론연작시로 1970년대 우리시의 저항성에 일획을 더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 대해 '몸도 크지만 마음이 더 큰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도 "이 조가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는데/ 시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석탄·국토 15)라고 노래했다.

 

감옥에 갇힌 후배의 가솔들을 찾아 쌀과 연탄을 사주고, 언제나 제자들 밥부터 챙기는 격의 없는 스승이었다 한다. 술에 취한 야밤에 장독대에 올라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독재자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삿대질 삼창을 일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의 통장에 다섯 해나 더 용돈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의 대학 은사였던 조병화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먼저 간 제자를 추모하며 "조태일은 시인이다 착하고 정직하고 곧고 의리의 시인이다 어린이도 느끼는 시인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념적 지향성은 서로 달랐으되, 스승은 젓갈 행상을 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는 제자의 형편을 알고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고 제자는 두고두고 스승에게 극진했다는 미담도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 조태일에게 국토는 특히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혼'으로 상징되는 소외된 민중의 다른 이름이다. 이 땅의 주인인 그들을 위해 '일렁이는 피', '다 닳아진 살결', '허연 뼈'까지 보태리라는 시인의 뜨거운 의지가 돌올하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라고 국토에 대한 숙명적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은, 간암으로 9997, 58세의 나이로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그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풀씨혔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국토이고, 오매불망 국토를 노래했던 시인의 유택이 되었다. 그는 28세에 "내가 죽는 날은 9999일 이전"간추린 일기이라고 썼다. 미래를 예언한 그의 시참(詩讖)이 서늘하다. (정끝별·시인, 조선일보 2008.04.07)

 

 




  우화(禹話)

 

어느 날 어느 날일 것입니다

한 사나흘 굶어도 배고고프지 않고

한 사나흘 책 덮어도 모를 것 없을

한 사나흘 화장 안해도 얼굴 환하고

한 사나흘 말 안해도 답답하지 않을,

 

어느 날 어느 날일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청년으로 오고

소년 소녀들도 청년으로  달려가

한바탕 어우러질

 

어느 날 어느 날

저마다 남들이던 시간들도

우리들 곁에 이웃으로 와서

제 살에 살에 불 지피고

우리들도 함께

제 살에 살에 불 지필 것입니다

 

자유나 정의, 혹은 진리나 꿈

이런 기막힌 관념들도 청년으로 피어서

제 살에 살에 불 지필

어느 날 어느 날

이 땅은 꽃밭으로 있을 것입니다

(외대학보 1975.10)   -1983 시집 '가거도 '

 

Wild Wood Flower - Maybelle Carter(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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