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있는 마을
그대로 고스란히
사라져버린 마일
전차는 애써 먼발치로 달리고
화장터만은 잽싸게
눌러앉은 마을
누구나 다 알지만
지도엔 없고
지도에 없으니가
일본이 아니고
일본이 아니니까
사라져도 상관없고
아무래도 좋으니
마음 편하다네
거기선 다들 목청을 돋우고
지방사투리가 활개치고
밥사발에도 귀가 달렸지
엄청난 위장은
콧등에서 꼬리까지
심지어 발굽의 각질까지
내장, 곱창까지도 다 먹어치우고
일본의 영양을 몽땅 차지했노라
의기양양 호언장담
그래서일까
여인의 억척은 각별하다
철구통만 한 골반에는
자식들 네다섯 줄줄이 딸려 있는
하릴없이 먹고 지내는
사내 하나는 별 문제
단 여자가 생겨나가든 말든
홍역앓는 어린애 투정마냥 나 몰라라
돌아오는 건 사내려니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사내가 사내인 것은
자식한테 큰소리칠 때뿐
사내의 사내도 생각하면
어엿한
아비이다
시끌벅적
툭터놓고
호들갑을 떨어도
음침한 건 딱 질색
한물간 시대가 유유자적
관습 고스란히 살아남아
되돌릴 수 없는 것일수록
중히 여겨
한 주에 열흘은 줄줄이 제사
사람도 버스도 저만치 돌아가고
경관마저 드나들지 못해
한번 다물었다 하면
열리지 않는 입이라
가벼이
찾아오기엔
버거운
마을
우리의 이카이노
재일 시인 김시종의 <이카이노시집>에서
이카이노(猪飼野): 오사카이쿠노구한인촌[ 大阪生野區韓人村 ]
오사카(大阪)시 JR오사카 환상선 및 긴테츠(近鐵) 나라(奈良)선의 츠루하시(鶴橋)역과 모모타니(桃谷)역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한인들의 집중거주 지역.
개설-해방 전부터 이카이노(猪飼野)는 제주도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도일 한인들의 집중 거주지였다. 그들은 이카이노와 그 주변에 거주하며 오사카 지역에서 발달된 고무공업의 하청 노동에 다수 종사하였으며, 그 외 토목 노동자, 노점상 등도 적지 않았다. 특히 노점상은 한인들이 집중 거주함에 따라 한반도에서 각종 생활 용품을 반입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이었다. 1930년대 말에는 이미 이카이노에 조선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명태, 고춧가루 같은 식료품부터 혼수 용품까지 거주 한인의 생활 용품을 파는 점포가 약 200개에 달할 정도였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거주 한인들은 대거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한 반면, 고향에 생활의 근거가 없는 사람들은 계속 이카이노에 잔류하였다. 1965년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협정’의 직후에는 이카이노에서도 한국적 변경 및 영주자격(‘협정 영주’) 취득을 둘러싸고 한국거류민단 세력과 조총련 세력 간에 대립이 있었지만, 동포들의 기본적인 생활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이쿠노구를 포함한 오사카 지역에도 한국인 “뉴커머”들이 서서히 유입하였다. 이후 2세, 3세의 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이쿠노 조선시장을 활성화하자는 새로운 시도가 일어났다. 1993년에 미유키 거리의 세 군데 상점가를 연결하여, 동쪽 상점가에 ‘백제문’을, 중앙상점가에 ‘미유키거리중앙문’을 세웠고, 새롭게 가로등 설치 및 보도 포장을 하면서 ‘코리아타운’이라는 명칭도 사용하게 되었다. 새로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조성하여, 일본 사회에 재일 한국·조선인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곳이라고 어필한 것이다.
명칭 유래-원래 이 지역은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렸는데, 한자명을 보면 상상이 가지만 그 유래는 고대 한반도 특히 백제 유민들이 이 곳에서 돼지를 사육하며 살았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다. 고대의 지명은 구다라(百済)군 이었으며, 지금의 히라노(平野)강도 예전에는 구다라강 즉 백제강이라고 하였다. 행정구역의 명칭은 1973년까지 계속 이카이노쵸(猪飼野町)였지만, 그 후 구획 변경으로 인해 이카이노라는 명칭은 츠루하시(鶴橋), 모모타니(桃谷), 나카가와(中川), 다지마(田島) 등으로 분할되면서 지명에서 사라졌다.
형성 및 변천-1921년부터 1923년까지 이 이카이노 지역의 배수를 개선하여 주택지와 공업용지 및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히라노강을 확장·개수하는 공사를 실시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토목 노동자를 사용하였다. 그 히라노강 공사를 위해 각지에서 유입된 조선인 노동자들 중에서 그대로 남아서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1920년대 중기에는 히라노강 공사가 하수공사와 더불어 완료되면서, 공장 및 주택의 입지조건이 갖추어졌고, 국철 및 시영 전차의 전기 철도가 연결되었고 시영 버스의 노선도 통과하게 되면서 이 지역에 유입되는 인구가 증가하였다.
이카이노가 소속된 히가시나리(東成)구는 공장의 입지조건이 좋아 고무 신발과 완구를 생산하는 공장이 많이 설립되었다. 1930년경에는 오사카 고무제품 공장 전체의 약 5할이 히가시나리구에 집중될 정도였다. 이 고무 신발을 비롯한 고무제품 공장은 영세한 규모로 하청을 받아 납품하는 곳이 많은데, 거기에 임금이 저렴한 식민지 출신의 한인들이 많이 고용되어 있었다. 특히 1923년에 제주-오사카 직항로가 개설 이후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의 유휴 노동력이 대거 지연과 혈연에 의지하여 오사카에 유입되었고, 이카이노 지구와 그 주변에 거주하였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살다보니 기존 도일자들 중에서 한반도의 식자재 및 생활 잡화를 파는 상인들이 증가하여 이른바 ‘조선시장’이 형성되었다. 1943년에 이카이노 지구는 히가시나리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이쿠노(生野)구에 소속되었다.
현황-현재 오사카(大阪)시 JR오사카 환상선와 긴테츠(近鐵)의 츠루하시(鶴橋)역과 모모타니(桃谷)역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쿠노(生野)구 모모타니(桃谷) 4정목(丁目)의 미유키통(御幸通) 상점가를 중심으로 한인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와 2005년경부터 본격화된 ‘한류 붐’의 영향으로 관광객이 늘어나자 츠루하시 역의 서쪽까지 코리아타운이 확산되었다. 2009년부터는 ‘이쿠노 코리아타운 공생 축제’를 개최하며, 지역 전체의 활성화를 기하고 있다.
2010년의 『국세조사』를 통해 거주 인구를 보면, 오사카시 거주 한인 총수 약 5만 5천명 중에서 38%에 해당하는 약 2만 8백명이 모모타니를 중심으로 한 이쿠노구에 거주하고 있다. 오사카시 중에서도 한인 인구가 가장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曺智鉉写真集 猪飼野ー追憶の1960年代』(曺智鉉, 新幹社, 2003)
『越境する民-近代大阪の朝鮮人研究』(杉原達, 新幹社, 1998)
『私の猪飼野ー在日二世にとっての祖国と異国』(金蒼生, 風媒社, 1982)
「大阪市 国籍別・男女別外国人数」(総務省,『2010年 国勢調査』, 大阪市ホームページ)
「町名の由来」(大阪市生野区役所ホームペー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오사카이쿠노구한인촌 [大阪生野區韓人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20년대 오사카 이카이노에 거주하던 제주도 이주민 세대 가족들의 모습
야키니쿠 드래곤 1970년대 일본 관서지방(오사카)의 곱창집을 운영하는 김용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드래곤’은 곱창집을 운영하는 김용길의 ‘용’자가 ‘龍’(드래곤)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재일작가 정의신은 이 작품을 통해 경계인인 자이니치의 고단한 시ᅟᅡᆱ을 보여주면서도 가족애, 용서, 배려, 희망들을 메시지로 담고 있다. 최근 영화로 만들어져 2018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 ‘피와뼈“는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이주한 김준평의 일대를 자이니치 최양일 감독이 민들었다. 배경은 츠루하시 어묵공장이다
김준평이라는 제1세대 자이니치이 일생에 관한 처절한 이야기다
이카이노 일본 속 작은 제주 저자 조지현|각 |2019.02.
조지현(1938-2016)
조지현은 1938년 5월 3남2녀의 장남으로서 제주도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신촌리는 김석범의 장편 소설 『화산도』의 무대가 된 인구 약 5000명 정도의 마을. 당시는 전기도 안 들어오던 바닷가 한촌이었다. 10살 때인 1948년 8월 고모를 따라 아버지가 돈벌이를 하고 있던 일본 오사카의 이카이노로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카이노에서 맛본 아이스캔디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이후 54년간 인생의 대부분을 이카이노와 그 주변에서 살아왔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살고 있는 고향 제주도에 처음으로 돌아간 건 1989년. 41년만의 귀향이었다. 연극 공연 사진을 시작으로 일본의 차별계급인 ‘부락민’을 기록했고, 한반도 도래인들의 역사를 찾아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다. 2016년 4월에 사망. 사진집으로 『부락』(筑摩書房, 1995) , 『이카이노(猪飼野) _ 추억의 1960년대』(新幹社, 2003), 『아메노히보코(天日槍)와 도래인(渡来人)의 족적』(海鳥社, 2005) 등이 있다.
필름에 극명히 새긴 ‘보이지 않는 동네’
조지현은 1960년대에 일본 최대의 조선인 밀집지역 ‘이카이노’를 5년 동안 촬영했다. 그의 사진집 <이카이노>에서는 자이니치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오사카를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나는 이 사진집에서 ‘60년대’를 넘어서는 자이니치의 역사를 보았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이 있는 곳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형태를 갖추고 우리 앞에 역사로 떠오르게 한다.” <화산도>의 자이니치(在日·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은 조지현이 1960년대에 촬영한 오사카 ‘이카이노’의 사진을 접하고 이렇게 평가했다.
이카이노는 지금은 사라진 지명이다. 현재 오사카 이쿠노구 일부 지역의 지명이었다. 이카이노는 일본 최대의 조선인 밀집지역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일본인에게 이카이노는 조선인을 연상시키는 기피 지역이자 차별의 공간이었다. 옛날에는 이카이쓰(猪甘津)라고 불렸다. 5세기께부터 한반도에서 집단으로 도래한 백제인이 개척했다는 백제향(百濟鄕)이기도 하다. 1920년대 구다라가와(百濟川)를 개수하여 신히라노가와(新平野川·운하)를 만들 때 공사를 위해 모였던 조선인이 그대로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이니치 시인 김시종은 이카이노를 ‘보이지 않는 동네’라고 노래했다. “없어도 있는 동네/ 그대로 고스란히/ 사라져버린 동네/ 전차는 애써 먼발치서 달리고/ 화장터만은 잽싸게/ 눌러앉은 동네/ 누구나 다 알지만/ 지도엔 없고/ 지도에 없으니까/ 일본이 아니고/ 일본이 아니니까/ 사라져도 상관없고/ 아무래도 좋으니/ 마음이 편하다네.”
조지현이 촬영한 이카이노의 사진에는 자이니치의 ‘영주권’ 문제를 둘러싼 정치 상황이 담긴 현수막, 전봇대에 달린 찢어진 표어,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고 통학하는 여학생들, 다리에 한글로 쓰여 있는 낙서, 비 오는 날 밤의 조선시장, 폐품을 회수하는 노인,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시장과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 바람에 날리는 빨래, 콩나물 통, 두 이름이 쓰인 문패, 조선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장례식 모습 등 이미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지현이 이카이노를 촬영한 건 1965년부터 1970년에 이르는 5년간이다. 한·일 회담과 남북 분단의 정치적 갈등은 이카이노에도 여과 없이 투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정치적 혼돈과 갈등, 대립 속에서도 차분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카이노라는 용광로는 역사적 격랑을 조용히 녹여내고 있었다. 조지현은 “감수성이 많은 소년기에 이카이노에서 맛보았던 비애와 사춘기에 경험했던 차별의 기억은 치유되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아픔과 굴욕으로 남아 있었다”라며 일본에서 출판된 사진집 <이카이노>에서 회고했다. 조지현은 27세 때부터 이카이노 사진을 찍었다. 계기는 특별히 없었다. 어느 날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자이니치 청춘의 혼란과 방황이 자신도 모르는 동력을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저항정신 발현된 리얼리즘 사진
“찢어졌던 기억을 되돌아보면서 자이니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물으며 떠돌던 청춘의 순진했던 사색과 사진의 방황에는 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적막감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제주도와 이카이노에서의 기억은 내 사진 표현의 원점이자 모티브와 주제였다. 사진에 찍힌 소년들은 내 분신이며, 어머니들은 뇌리에 남아 있던 어머니의 환영이었다.”
조지현은 1938년 5월 3남2녀의 장남으로 제주도 조천읍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신촌리는 인구 5000명 정도의 마을. 전기도 안 들어오던 바닷가 한촌이었다. 조지현은 열 살 때 고모를 따라 아버지가 전쟁 전부터 돈벌이를 하던 일본 오사카의 이카이노로 왔다. 1948년의 일이다. 밀항이었다.
ⓒ조지현 1960년대 이카이노 뒷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는 아이들.
조지현이 대학생이 된 1960년은 ‘미·일 안보조약’ 반대 투쟁에서 패배한 절망스러운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 최대 탄광 지역을 기록한 도몬 겐의 사진집 <지쿠호(筑豊)의 아이들>이 출판되었다. 이 사진집을 접한 조지현은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사진집에는 조지현의 소년 시절 이카이노 생활과 연결되는 절대적 빈곤의 세계가 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사진 전문학교에 들어가 기초 기술을 배운 다음 사진 스튜디오 몇 곳을 옮겨 다니며 전문 기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던 이카이노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하루살이의 삶도 낯설지 않은 공간이었다. 일본이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었지만 이카이노는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커피 한 잔이 100엔이던 시절, 당시 코닥의 흑백필름 트라이X는 500엔이었다.
조지현은 이카이노 사진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엄청난 사진을 찍자는 의식보다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이카이노의 모습을 인화지에 극명히 남기고 싶다는 의식과 언젠가 역사의 증언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의식했다. 이카이노의 현실에 부딪혀 찍어낸 리얼리즘 사진은 내 저항정신의 사진적 발현이었다.” 조지현이 기록한 1960년대는 ‘자이니치’로 살아가는 데 삶의 명암이 뚜렷이 구별되던 시대였다. 1960년대의 이카이노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자이니치 삶의 연장선이다.
김시종은 이 사진들이 “이 마지막 ‘이카이노’를 현재에 멈추게 한 정지화(静止畫)”이고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아로새겨진 형상처럼 정착하고 있다”라고 정의했다. 김석범은 “조지현의 조각도로 배경 깊숙이 윤곽을 새긴 듯한 빛의 스케치가 가지는 힘은 화면 속 심오한 공간으로 보는 사람의 혼을 끌어당긴다. 예술성이다. 추억은 존재의 배경이다. 심연의 배경은 기억이자 역사다.”
자이니치 사진가 조지현이 기록한 <이카이노-일본 속 작은 제주> 사진전이 2월15일부터 서울 강남역 사진 전문 갤러리 스페이스22에서 열리고 있다. 3월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2016년 향년 78세로 타계한 자이니치 사진가 조지현의 추모 사진전이기도 하다.
안해룡 (아시아프레스·다큐멘터리 감독) webmaster@sisain.co.k
몽당연필
김경숙 (일본 군마 /2011.7)
열심히 공부하다 짧아진 연필
우리 학교 아이들이 흔히
꽁다리연필이라 불러온
'몽당연필'이랍니다
아끼는 마음의 쪼각들
아기자기 모아서
사각사각, 하나로 엮어주는
'몽당연필'이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찮다면서
자꾸 버리라고 우기는데
일본에서 소중히 품어온 것
우리 학교라서 자래울 수 있는 것
모두 함께 지켜가자고
또박또박 마음에 새겨주는
'몽당연필'
그 이름은 처음부터
친근하게 다가와
마법처럼 부쩍 힘을
보태줄것같아
우리 학교 아이들
가슴속 호주머니에
언제나 지니고다니는
'몽당연필'이랍니다
일제강점기 사회와 문화 식민지 조선의 삶과 근대 저자 이준식|역사비평사 |2014.07
저자 이준식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외국인교수,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상임부위원장, 한국사회사학회 부회장대전자령으로 활동했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사를 전공했으며, 지금은 일제강점기 동아시아의 영화사와 이주사, 한국의 과거사청산 등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농촌사회의 변동과 농민운동』,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식민지시기 검열과 한국문화』(공저), 『일제 파시즘 지배 정책과 민중생활』(공저), 『일제하 만경강 유역의 사회사』(공저) 등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_식민지 근대의 양면성
01 일제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 근대
식민지 근대의 기본 성격
식민지 조선과 차별의 구조화
02 농촌사회의 변화와 농민의 생활상
농민층 양극화와 농민의 생활난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침투와 농촌사회의 변화
사회관계의 변화
03 식민지 공업화·도시화의 빛과 그림자
식민지 공업화와 조선인 자본가·노동자의 존재양상
식민지 도시화와 도시 주민의 삶
스페셜 테마 : 서울 남산에 신사가 들어서다
04 해외 이주민의 타향살이
러시아 연해주 이주민의 카레이스키화
망국민에서 만주국인으로 바뀐 만주 이주민
식민지 종주국 일본으로 건너간 ‘조센징’
전시체제하에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05 새로운 사상과 계층의 출현
근대로의 다양한 사상적 모색
스페셜 테마 : 사회주의운동을 막기 위해 치안유지법이 제정되다
새로운 계층의 출현
06 교육과 언론매체의 굴곡
우민화 교육에서 황민화 교육까지
근대 언론매체의 등장과 변화
스페셜 테마 : 식민성과 근대성의 혼종 매체, 라디오 방송의 시작
07 식민지 대중문화의 형성과 전환
영화의 유행과 선전도구화
창가에서 친일가요로
스페셜 테마 : 전시동원체제하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
08 글을 맺으며_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산
출판사 서평
“신고산이우르르화물차떠나는소리에구고산큰애기단봇짐만싸누나”
근대화의 환상과 기만을 깨고 ‘식민지’ 근대의 비틀린 모습을 직시하라
위 가사는 유명한 [신고산 타령]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전통도시 고산을 빗겨 철도역이 들어선 ‘신고산’은 식민지 근대와 자본주의 도입의 한 상징이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를 한반도 전역에 퍼뜨린 “우르르 화물차 떠나는 소리”는 조선의 백성에게 그저 “단봇짐” 싸서 고향에서 쫓겨나 도시의 변방에 토막을 치고 더 처절한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고난의 신호일 뿐이었다. 철도가 놓이고 공장이 들어서는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근대화’와 ‘경제성장’으로 봐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 정체된 조선 사회를 일제가 ‘근대화’시켜주었기 때문에 이후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뉴라이트적 인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근대사회란 무엇보다 모든 개인의 자유와 권리, 더 많은 사람의 평등을 최대한 보장하는 사회를 뜻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 땅에서는 일본제국의 존립, 식민지 지배권력의 유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우리 민족의 생존보다 우선되었다. 일제가 만든 각종 법과 제도는 그 근대적 외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도구였다. 이 책의 저자 이준식은 식민지 근대에 대해 ‘근대’에 방점을 찍어 인식하는 일련의 흐름을 경계하면서 ‘식민지’에 방점을 찍어 조선의 일그러진 근대의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부평초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식민 정책에 떠밀려 조국을 떠난 동포들. 그리고 전쟁범죄에의 강제동원
땅을 잃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빈민들도 그러했지만, 누구보다 ‘타향살이’의 설움을 절감한 것은 해외 유민들이었다. 이 책은 살 길을 찾아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카레이스키들, ‘이등공민’ 담론에 농락당한 만주의 조선인들, 일본으로 건너가 ‘조센징’에 대한 민족차별에 시달린 동포들의 시련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권침탈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가산을 정리해 이국땅으로 향한 망명객들과, 전시체제 아래서 노동력으로 총알받이로, 심지어 ‘성노예’로 착취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식민지 근대’는 대다수 민중을 뿌리 뽑힌 “부평초” 신세로 전락시키고 만 야만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맑스보이,맑스걸”은사라지고“모단보이,모단걸”만남아
새로운사상과계층의출현,식민지의문화·사상탄압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주권재민의 근대국가였다. 대한제국이 강제병합된 지 10년도 안 된 시점에서 이미 근대적 민주공화제에 대한 지향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것이다. 민주공화주의와 함께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가 새롭게 등장한 ‘청년’ 계층을 중심으로 시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치안유지법 등을 앞세운 일제의 엄혹한 탄압으로 인해 사회주의운동은 곧 지하 비밀결사로 숨어들었고, 소비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도시 중산층 이상을 중심으로 ‘모단 보이’ ‘모단 걸’이 유행을 선도하게 되었다. ‘어린이’와 함께 근대적 주체로 새롭게 ‘발견’된 ‘여성’ 역시, 근우회 해체 이후 사회변혁적 전망을 상실한 채 소비의 주체로서, 혹은 충량한 제국신민을 길러내는 ‘군국의 어머니’상으로 왜곡되어갔다.
‘한때’민족신문이던[조선일보],[동아일보]는어떻게친일매체가되었나
일제의언론탄압·문화통제정책과신문·잡지의굴곡
강제병합 이전,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한 자생적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신문·잡지가 발간되고 근대교육을 표방한 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 언론과 교육은 크게 위축되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야 민족언론과 민족교육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에 무릎 꿇은 각종 언론은 급격히 친일화되었고 교육도 입신출세의 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이 책에서는 [시대일보]와 함께 한때 ‘3개의 정부’라 불릴 정도로 민족 정론을 이끌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언론탄압과 재정위기에 굴복하면서 친일화되는 과정이 차분히 그려지고 있다. 시사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전문잡지들의 명멸을 섬세하게 짚어보는 대목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아리랑]에서 [병정님]까지,공감의 매체에서 선동의 매체로
식민지 대중문화의 발현과 왜곡
1910년 서울에 처음 등장한 영화 상설관이 다른 도시로 확산되면서, 1920년대 이후 본격적인 ‘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6년에 나온 [사의 찬미]가 널리 불리면서 대중가요도 새로운 문화산업으로 각광을 받았다. 비록 도시 지식층과 청소년층에게 국한된 문화현상으로서 농촌과의 온도차는 컸지만, 영화와 대중가요는 하나의 ‘산업’으로서 점차 규모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 상품’으로서의 영화, 대중가요는 곧 ‘식민제국’의 ‘전시동원’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침략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하고자 했던 일본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에게 ‘천황을 위해 죽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군국주의 친일가요를 부르게 하는 한편, 이동 영사단을 조직해 농촌 구석구석까지 전쟁 선동 영화를 보급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1926년 공개된 나운규의 [아리랑] 같은 뛰어난 작품성과 리얼리즘을 구현한 영화도 있었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이 극에 달할수록 노골적으로 죽음을 선동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영화와 가요가 쏟아져나왔다. 특히 일제강점기 영화사는 저자 이준식의 전공분야이기도 하다. 큰 맥락에서 일제시대 전반의 영화산업이 어떻게 탄생하고 왜곡되어갔는지 역사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식민지 종주국 일본으로 건너간 ‘조센징’
강제병합 이전만 해도 일본으로의 이주민은 별로 많지 않았다. 공장이나 탄광에서 노동하기 위해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제주도 해녀들이 일본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주형태도 개별분산적인 데다가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국망 이후 일본으로의 이주는 크게 늘어났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1910년만 해도 250명에 지나지 않던 일본으로의 이주민은 1920년에는 31,720명, 1925년에는 136,809명, 1930년에는 298,091명, 1935년에는 625,678명, 1940년에는 1,190,444명, 그리고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1,936,843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해방될 때에는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은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1910년대 후반 이후 일본 노동시장에서는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일본의 자본은 저임금 노동력을 충원하는 방안으로 조선에 주목했다. 일제가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나타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2년부터 조선인의 자유 도항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연평균 1만 명 이하였던 일본으로의 유출 인구가 연평균 3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런 경향은 나중에 자유 도항이 철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일본으로의 이주민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라도, 경상도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의 대표적 공업지대인 도쿄와 요코하마(橫濱)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방과 오사카(大阪), 고베(神戶)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 지방에서 저임금 노동시장의 최하층으로 편입되었다. 그 밖에 일본 탄광업의 중심지대인 규슈 지방에도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이주했다.
그러나 살길을 찾아 대거 도일한 조선인들은 곧 민족차별과 계급차별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직면해야 했다. 먼저 일본인들이 즐겨 쓰는 ‘조센징’이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의 천민인 부락민,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찍이 식민지화된 홋카이도(北海道)와 오키나와(沖繩)의 선주민족인 아이누족, 류큐(流球)인과 함께 일본 내에서의 차별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일본에서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인은 일본의 신민이 아니라 ‘외지인’일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국내에 거주할 때보다 더 심한 민족차별을 실감하게 되었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들은 일상적으로 일본인에 의한 멸시, 억압,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이 흔히 내뱉던 “정어리가 생선인가, 찬밥도 밥인가, 조센징이 인간인가?”라는 말은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겪은 차별과 억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셋집 앞에 붙어 있던 “개나 조선인 사절”이라는 글, 방적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방적의 조선돼지”라고 부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차별과 억압은 때때로 극단적인 형태로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보기로,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6,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인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당한 것을 들 수 있다.
조선인은 주로 일본의 최하층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근현대 일본에서 사상 최대의 자연재해라고 일컬어지는 간토 대지진의 엄청난 재앙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하층민의 불만을 해소하는 통로로 조선인을 이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와 군부의 조장 아래 조선인이 폭행과 약탈을 자행한다는 유언비어가 일본인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심지어 언론매체도 “불령선인들이 절도와 강간을 자행하고 있다”는 식의 허위보도를 함으로써 유언비어를 부추겼다. 이에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학살은 지진이 일어난 9월 1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군경이 직접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고 군경의 지도하에 조직된 자경단이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살방법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죽창,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죽여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워 매장했다. 학살 사건이 문제가 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희생자가 2명뿐이라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일본 정부는 희생자 숫자를 조금 늘려서 23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역시 거짓말이었다.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조선인 희생자가 2,534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이 비밀리에 파견한 기자가 발로 뛰어다니며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간토 지방 전체에서 6,066명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한다. 아무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의 숫자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대체로 6,000명 이상의 피해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는 10,000명 이상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6,000명이든 10,000명이든 엄청난 숫자의 조선인이 단지 ‘조센징’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학살당한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인 겪고 있던 일상적인 차별을 그 어떤 예보다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조선인 노동자는 같은 직종의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심지어 집을 구하지 못해 일본인들이 살지 않는 불량주택, 가건물, 축사, 전염병 환자 수용시설 등의 열악한 공간에 모여 살았다. 부락민 거주 지역에 섞여 살면서 일본의 최하층 신분인 부락민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다행히 집을 구하더라도 일본인보다 많은 보증인과 보증금이 필요했고, 집주인의 횡포와 그로 인한 차가(借家)쟁의가 잇달았다.
민족차별과 함께 계급차별도 조선인 노동자를 괴롭혔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이 조선인 노동자의 현실이었다. 일제 당국이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상태는 실로 비참 그 자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여기에 1920년대 말부터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실업의 위험에 직면해야 했다. 방적공장의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이 불렀다는 다음의 노랫말은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비참한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아 우리 여공들아 하루 생활 읊어보세
밤이어도 한밤중에 깊은 잠에 빠져들 때
시끄러운 기상소리 감긴 눈을 깨웠으니
머리 빗어 올리고서 얼굴을 씻어내고
부리나케 허둥지둥 식당으로 나가 보면
먹지도 못할 밥에 된장국만 뎅그러니
밥을 국에 말아먹고 공장에 나갔지만
허리 펴고 살아갈 날 언제나 올 것이냐
꽁꽁 묶인 이곳에도 전등불을 밝혀 두고
태산 같은 기계뭉치 가슴에 안노라면
시간은 흘러 흘러 숙소로 돌아갈 때
친구 없는 텅 빈 방에 홀로 젖는 슬픔이여
조선인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조선정(朝鮮町)’, ‘조선촌(朝鮮村)’이라 불리는 특정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각종 차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생활 공간을 만들어갔다. 오사카의 이카이노(渚飼野, 지금의 이쿠노(生野))는 원래 돼지를 많이 키우던 동네였다. 사람이 살기 힘든 동네이니 당연히 집값도 쌌다. 당시 오사카로 이주한 제주도 출신 이주민들은 이카이노에 하나둘 모여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카이노는 ‘제주 사람들의 거리’라고 불릴 만큼 제주도 출신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 되었다. 제주도 출신 이주민들은 각종 차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생활 공간으로 ‘작은 제주’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사회 그 자체가 적대적 차별구조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인의 집단거주 지역은 안식의 장소였다. “막걸리가 있고, 무당의 신명나는 푸닥거리가 있는 곳, 명절에는 마을 광장에서 고국 연예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곳. 소박하면서도 갑자기 싸움이 일어나거나 거칠게 달려들기도 하고, 울부짖는 여자 소리, 떠들썩한 웃음소리, 무너지는 소리, 고함지르는 남자들 소리가 울려 퍼지는 별세계”였던 것이다.
한편 조선인의 집주화는 정주화와 아울러 진행되었다. 당초 조선인의 도항은 생산연령층에 의한 일시적인 단신 출가의 성격이 강했다. 많은 이들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는 고향에서 논밭이라도 살 정도의 돈만 모으면 돌아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단신 출가자들도 일본에 머물러 사는 정주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처음에는 얼마 되지 않던 여성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오사카의 경우 1916년만 해도 조선인 남성 100에 대한 조선인 여성의 비율이 2에 불과했지만, 1921년에는 20, 1926년에는 31, 1931년에는 47로 계속 증가했다. 고향에서 처자를 불러들이는 경우도 늘어났고, 일본에서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경우도 늘어났다.
조선인의 정주화는 자녀교육 문제와 직결되었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도 야학과 강습소를 통해 민족의 언어를 가르침으로써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신문과 잡지의 발간을 통해 조선인 사회의 의사소통망을 확립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다.
이런 교육 활동과 언론 · 출판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집단적 거주지는 그 자체로 민족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거주공동체를 바탕으로 메이데이 행사 참가, 파업지원, 민족기념일 행사 참가, 식민통치 규탄대회 참가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인들은 계, 친목회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자신들만의 단체를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출판 활동을 벌임으로써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민족운동에 이바지한 것이다. 한편 청년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양상도 나타났다. 이들은 국내를 드나들면서 새로운 사상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가 하면, 스스로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직접 일본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시체제하에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전시동원체제 아래 일제는 물자뿐만 아니라 인력까지 수탈했다. 일제의 강제동원 정책은 국민총동원령이 공포된 1938년부터 시작되었다. 모집, 관 알선, 징용의 방식을 거친 노무 동원, 지원병 · 학도병 · 징병 등의 병력 동원, 군속 등의 군 관련 동원, 여자근로정신대 · 군‘위안부’ · 종군간호부 · 근로보국대 등의 여성 동원 형태로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강제적 · 집단적인 대규모 동원이 이루어졌다.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지역도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사할린, 만주, 중국, 남방 등 일제의 제국 판도 전역에 산재했다. 이 가운데 해외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만 최소 70만 명에서 150만 명 정도에 이르고, 군인 · 군속도 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강제동원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노무 동원이었다. 노무 동원은 처음에는 자유모집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자유로운 모집과 응모는 아니었다. 노무 동원을 원하는 사업자가 모집 희망인원을 일본의 관할 부현(府縣)에 신청하고 후생성 심사를 받은 뒤 조선총독부에서 모집 지역을 할당받아 모집했는데, 이때 동행한 면사무소 직원과 경찰관이 모집에 응하도록 강제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강제모집이었다.
그나마 1942년부터는 자유모집을 관 알선으로 바꾸어 아예 번거로운 모집절차를 생략해버렸다. 곧 모집의 주체를 사업자에서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노무회로 이관해, 관이 직접 노동력의 모집 · 전형 · 송출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관이 공식적으로 개입했으니 강제력이 작용한 것은 당연했다. 일정한 숫자를 할당받은 하부 행정기관은 사실상 강제모집을 자행했다.
1944년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징용이 실시되었다. 국민징용령은 만16세 이상 40세까지의 모든 청장년 중 현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징용은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국가의 힘으로 직업전환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징용은 도지사가 징용영장을 받은 사람들을 모아 항구로 데려오면 조선총독부가 직접 사업자에게 인계하는 방식이었다.
징용은 신규징용(직업이나 직장을 강제적으로 전환배치시키는 것)과 현원(現員)징용(종래의 직장에 계속 근무하도록 한 것)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신규징용이었다. 길을 지나가는 청장년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경우도 있었고, 마을을 습격해 청장년을 연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로 원시적 폭력이 동반된 노동력 동원방식이었다.
강제동원된 노동자의 숫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추산치만 존재할 뿐이다. 일본만 72만 명이라는 추산도 있고 150만 명이라는 추산도 있다.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 일본의 점령지로 동원된 숫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심지어 강제로 끌려갔다가 죽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전혀 알 수 없다.
자유모집이든 관 알선이든 징용이든,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들은 일본 현지에 도착한 뒤 바로 군대식 훈련을 받고 혹독한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막지한 폭력이 일상적으로 가해졌으며 쉬는 날도 없이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체력도 정신력도 다 고갈되었고, 재해의 위험이 상존하는 작업장에 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았다.
억압은 작업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의 생활 공간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 기업의 노무과 직원과 경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기숙하는 곳을 ‘문어방’이라는 뜻의 ‘다코베야’라고 불렀다. 문어의 발을 자르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수족을 마구 자르며 일을 시킬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워낙 일이 힘들다 보니 감시를 뚫고 탈주하는 노동자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망하다가 발각되면 즉결처분이 가해졌다. 즉결처분으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는 상당수에 이르렀다. 여기에 재해와 과로로 사망한 경우까지 합하면, 강제동원되었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 땅에 묻힌 조선인 노동자는 꽤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이 끌려갔던 홋카이도 지방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는 현재도 이때 죽어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신의 유골 발굴 작업과 송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일반에게도 공개된 한 탄광의 벽에 적힌 ‘어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쓰인 한글 문구는 어두컴컴한 탄광 안에서 죽음에 이르는 열악한 노동을 강요받던 조선인 노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찍이 일본 정부는 신성한 천황의 군대에 조선인이 입대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침략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군인이 부족해지자, 조선인을 군대에 동원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령’을 공포한 것이 그 시초였다. 일제는 다가올 징병제에 대비해 지원병을 황민의 모델로 삼으려고 했다. 곧 지원병제도는 조선 민족의 완전한 황민화를 달성하기 위한 과도적 방법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말로는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할당에 따른 강제모집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지방행정기관에 지원병 지원자 수를 할당하면 지방행정기관은 경찰을 앞세워 강제적으로 지원병을 모집했다. 당시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지도자급 조선인들은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과 강연회를 통해 천황의 군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강변했다. 지원병은 여섯 달 동안 사상교육을 포함한 훈련을 받은 뒤 전선에 투입되었다.
지원병제도를 시행할 당시만 하더라도 일제는 조선인의 황민화 정도로 보아 징병제 시행이 앞으로 20년 내지 30년 뒤의 일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전쟁상황이 점차 악화되고 중일전쟁이 아시아 ·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당초의 예상보다 빨리 징병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10년 이상 계속된 침략전쟁으로 일본의 병력자원이 이미 고갈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일제는 1942년 5월 징병제 시행을 공포했다. 1944년부터 조선인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해 징집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전준비로 조선인 호적의 일제정비를 실시하는 한편, 1942년 10월에는 징집 대상자를 사전에 교육시키기 위해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을 제정했다. 특별연성의 내용은 국민학교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17세부터 21세 미만의 남자를 대상으로 각 읍면 단위로 일본어와 정신교육을 강제시행한다는 것이었다. 1944년 징병제 시행을 앞두고는 친일파를 앞세운 대대적인 선전 활동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그러나 징병제는 일제의 의도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4년 4월 첫 번째 징병검사가 실시되었지만, 조선인이 실제로 입영하기 시작한 1944년 9월 이후 전황 악화에 따른 패전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언어와 생활양식의 차이를 절감하고 있던 조선인 입영자의 탈주가 계속되었다. 일제는 징병제가 제국과의 운명공동체 속에서 황민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선전했지만, 상당수의 조선인은 그런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끝내 가질 수 없었다.
한편 징병제 실시에 앞서 1943년에는 ‘대학생육군특별지원령 임시채용규칙’이 공포되었다. 17세 이상의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연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모든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실시 중이었기 때문에, 전문학교 이상의 학교 재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가 매우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총알받이용 징집을 피해 도주하거나 잠적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훈련을 받다가 도주하거나 군부대에 배속된 뒤 탈주해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학도병도 많았다.
군대에 동원된 조선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현역 군인이던 조선인은 육군 186,980명, 해군 22,299명, 합계 209,279명이었다고 하지만 이 수치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강제동원의 마지막 유형은 최악의 전쟁범죄인 여성 동원이다. 일제는 1930년대 말부터 군수산업에서 여성 노동력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고 1944년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했다. 근로정신대와 관 알선방식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여성 노동자는 배고픔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렸다. 노란무와 밥, 그리고 된장국이 전부인 하루 두 끼 식사와 하루종일 계속되는 노동, 무서운 감시가 그들의 일상이었다.
여성 노동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로의 강제동원에 따른 성의 착취였다. 일제는 침략전쟁 과정에서 군인들의 정서안정을 위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할 ‘위안부’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만주에서 1930년대 초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소가 일본군 전체로 확산된 것은 1937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위안소의 설치 · 경영, ‘위안부’의 모집 · 수송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것은 군이었다.
보기를 들어, 1941년 7월 만주의 관동군은 소련과의 개전을 예상하고 ‘관동군특별연습’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전투훈련을 벌였는데, 이때 훈련에 참가한 일본군에게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 2만 명의 조선 여성을 동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실제로는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동원된 ‘위안부’ 숫자는 설이 분분하지만 조선총독부가 나서서 적어도 3,000명 이상의 조선 여성을 동원했다.
관동군특별연습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군 ‘위안부’ 동원과 관련된 군의 결정에 적극 협력하고 있었다. 일본 군부는 침략전쟁의 확대 과정에서 조선 여성을 군 ‘위안부’로 동원할 것을 결정했다. 때로는 민간인을 앞세워, 때로는 관리 · 경찰 · 군인을 내세워 ‘위안부’를 연행했다. 민간인은 대개 일본의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사기로 여성을 꾀어갔고, 관리 · 경찰 · 군인은 폭력을 사용해 주로 가난한 농촌에서 여성을 끌고 갔다. 당시 조선에서 해외로 나가기 위해서는 도항 증명서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대규모의 성노예가 해외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제연행이든 취업사기이든, 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은 모두 자신이 성노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연행 도중에도 도주할 수 없도록 늘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따라서 무엇이라고 이름붙이든 성노예 동원은 실제로는 모두 강제연행이었다. 성노예들은 일본군의 수송수단을 이용해 만주, 타이완, 중국,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 일본군이 주둔하던 모든 곳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하루에 많은 경우 40~50명, 보통 20~30명, 적을 때도 5~6명 정도의 일본군을 상대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이를 거절하면 뭇매를 맞거나 타살당하기도 했다. 군 작전 지역 안에서 성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감금상태였다. 물건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 우리말도 쓸 수 없었고 본래의 이름 대신에 일본식 이름을 써야 했다.
성노예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의 정확한 숫자를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그 숫자는 15만 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다. 군 ‘위안부’의 절대다수가 조선인 여성이었다. 일본인은 소수의 매춘여성 외에는 동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성노예 동원에도 민족차별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여성들은 전쟁터에서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으며, 설령 돌아왔더라도 침묵을 강요받은 한국 근대사의 최대 희생자였다.
경계의 시 김시종 시선집 저자 김시종|역자 유숙자|소화 |2008.05.
김시종-1929년 부산에서 나고 제주에서 자랐다. 1948년 제주 4·3항쟁에 참여했다가 1949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재일조선인으로서 민족운동과 시작(詩作)에 나섰다. 재일외국인 최초의 공립학교 교사가 되어 15년간 조선어를 가르쳤고 이후로도 강연과 저술,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현재 나라(奈良)에 살고 있다.
재일조선인 동인지 『진달래』(1953), 『카리온』(1959)을 창간하고 시집 『지평선』(1955), 『일본풍토기』(1957), 『장편시집 니이가타』(1970), 『이카이노 시집』(1978), 『광주시편』(1938), 『원야의 시』(1991), 『화석의 여름』(1999), 『경계(境界)의 시』(2005), 『잃어버린 계절』(2010)을 짓고 평론집 『‘재일’의 틈에서』(1986), 대담집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해왔는가』(2001), 강연록 『나의 생과 시』(2004)를 펴냈으며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시』(2004), 『재역(再譯) 조선시집』(2007)을 옮겼다.
<꿈같은 일>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모두들 금방 웃어 제친다
"꿈같은 얘기 그만 해"
나마저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단념할 수 없어
그 꿈같은 일을
정말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더 이상 친구들은 비웃지도 않는다
"또 시작이군!" 하는 투다
그래도 꿈을 버리지 못해
나는 혼자 힘겨웁다
온몸으로 겪어낸 20세기의 역사, 디아스포라의 삶
김시종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어나,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소년 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에서 보냈다. 해방 전까지 그는 그야말로 황민화 교육이 길러낸 제국의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일본 동요와 군가에 흠뻑 빠졌으며,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지 않는 부모를 답답해했고, 전차병 학교에 지원하여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 했다. 한글은 한 글자도 쓸 줄 모르고 ‘식민지 지배’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외골수 ‘황국소년’이었다. 그러던 1945년, 열일곱의 그는 자기 나라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조선으로 ‘떠밀려오듯’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공간이 펼쳐진 이후의 제주에서 그는 조국에 일익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판단으로 좌익활동에 매진한다. 그리고 참혹한 4?3이 몇 년에 걸쳐 제주를 피로 물들인다. 2015년에 펴낸 자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에서 그는 비로소 그 현장에 있던 자신을 놀라울 만큼 정밀하고 생생하게 증언한 바 있다. 당시 남로당 연락책이었던 그는 목숨을 구하기조차 어려워진 제주에서 부모가 절박하게 마련해 준 수단으로 1949년 5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한다.
그렇게 일본에 ‘불법입국’한 그는 오사카의 재일 집단거주지 이카이노(猪飼野)에 깃들여 살게 된다. 불안과 가난이 뒤얽힌 디아스포라의 공간 속에서 차츰 삶의 자리를 잡아나가게 된 그는 한국전쟁이 치러지던 1950년 무렵부터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해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가는 등 활발한 사회, 문학 활동을 이어나갔다.
본래 ‘북조선’으로 가고자 했던 그였으나, 김일성 우상화와 조총련의 북한 편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57년 그는 조총련으로부터 조직적 비난을 받고 ‘코스모폴리탄적 허무주의자’로 낙인 찍혀 십 년간 고립된 채 일체의 표현 행위를 가로막힌다. 1959년에는 일본공산당에서 이탈했고, 1970년에 는 조총련의 조직적 규제에서 완전히 빠져나온다. 한편 그에게 한국은, 남로당 활동 경력뿐 아니라 이후로도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평론을 잇달아 쓰고, 5·18 광주항쟁에 관한 시집 『광주시편』을 펴낸 이력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그는 이카이노에서 계속해서 일본어로 일본과 한반도 사회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실존을 직시해 나간다.
보복하고 대결하는 시인의 언어, 조선어와 일본어
시인 김시종에게 일본어란 자신의 감성과 사고체계를 길러낸 정다운 모국어와도 같은 언어였던 동시에 ‘국어’로서 강제되었던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조국의 현실과 사회의식에 눈을 떠 민족의 말과 글, 문학을 왕성하게 배워나갔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학생운동과 남로당 활동에 투신하는 등 커다란 사상적 전환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그가 ‘해방’되어 떨어져 나왔던 일본에서 결국은 생의 대부분을 살아가며 일본어로 말과 글을 써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재일시인 김시종이 끊임없이 의식하고 대결해야 하는 쓰라린 조건이자 아이러니였다. 김시종에게 ‘일본어’는 모어도 모국어도 아닌, 식민지 지배 아래서 무방비로 받아들이고 만 ‘지배자의 언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잘 통하는 유창한 일본어가 아니라 일본어에 대한 위화감을 계속 표명하고자 하는 일본어다. 의지적으로 선택해 긴 세월에 걸쳐 철저히 조탁한 위화감, 그것이 ‘일본어에 대한 보복’이라고 그는 말한다. 일본어로 적히는 김시종의 문장 속에는 늘 절실한 투쟁이 그 자체로 직조되어 있다.
나는 내 요람 시절의 꿈을 가득 품고 있는 일본어를 버릴 마음이 전혀 없다. 과중한 규제를 받으며 습득한 일본어를, 일본인을 향한 최대의 무기로서 나는 구사하고 싶다.” “일본인의 시각, 일본인의 감성, 일본인의 사유를 깨뜨리는 무기로 삼는 것이다.
일본어와의 투쟁과 ‘재일’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품은 채 1973년 9월 마흔셋의 김시종은 재일 외국인으로서 첫 공립고등학교 교원이 되어 효고현립 미나토가와고교에 부임하면서 또 하나의 국면을 맞는다.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그는 최초로 정규 과목이 된 조선어를 교사로서 가르치게 된다. 이 시기 교단 현장에서 있었던 생생한 경험과 고민이 『재일의 틈새에서』에는 여러 편의 글에 걸쳐 담겨 있다. 조선인이나 피차별 부락 출신이 다수인 학생들 사이에서 진보된 해방교육을 해나가는 자부심 가운데서도 ‘우리가 왜 조선어를 배워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조선어가 비로소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의 자괴감은 일본 사회에 내재한 여러 소수자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이라는 문제로 나아간다. 그러한 가운데서 차별-피차별의 이항을 고정적으로 인식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정신적 전환의 방향을 대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는 ‘재일’에 대한 그의 궁극적 물음과도 이어진다.
김시종의 명제, ‘재일을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고해야 재일을 산다는 것의 의미에 다다르고, 재일의 실존을 어떻게 펼쳐야 재일 세대의 전망이 설 것인가. 재일이라는 근대 백 년의 역사가 뒤얽힌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분단이라는 민족적 시련에 시달리는 조국의 역사적 운명에 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나는 왜 재일조선인인가.
김시종은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면서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한국으로 귀의하지도 않았다. 그가 조선적을 유지함으로써 그는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남겠다는 의지와 동시에, 동족학살 위에 미국이 만들어낸 반공국가 한국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견지했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면서 조국과 거주국, 남과 북 사이의 재일이라는 틈새를 새로운 생활의 거처로 삼고자 했다. 조국에서 떨어져 있다는 조건을 열등감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지점에서 문화 창조를 일구는 데 따르는 고뇌를 끌어안고자 했다. 이러한 물음 앞에서 그는 ‘재일’의 현재와 미래를 직시하면서, 다음 세대에 ‘재일’의 조건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방향으로 제시하는 길잡이로서도 일조하고자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시인으로서 추구해온 궁극적인 지향점과도 맞닿는다.
우린 너무 몰랐다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저자 김용옥|통나무 |2019.01
김용옥-도올은 그의 호요, 눌함이란 신음하듯 고통스럽게 외친다는 뜻. 김용옥은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의 문제의식을 다양한 학문분야의 시각에서 천착해가면서 6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낸 철학자, 의사, 예술가, 교육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미 그가 자라 활동하는 시대에는 동·서문명이 회통될 수밖에 없다는 비젼을 획득하고 그것을 착실하게 준비해나가는 선각자적 삶을 살았다.
충남 천안 태생으로, 1960년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동양고전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생물과, 한국신학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편입하여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을 공부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문취급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선진고경에서 얻는 철학적 비젼을 세계화시키려는 사명을 지니고 유학의 장도에 오른다.
국립대만대학 철학과에서 노자철학으로 석사를, 일본 동경대학 중국철학과에서 명말청초의 사상가 왕 후우즈(王夫之, 1619~1692)의 우주론으로 석사를, 그리고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왕 후우즈의 『주역』 해석을 둘러싼 문제들을 동·서고전철학의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여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만 10년간의 유학생활을 통하여 그는 황 똥메이(方東美),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야마노이 유우(山井湧), 벤자민 슈왈츠(Benjamin I. Schwartz) 등 사계의 거장들 밑에서 배움을 얻었다.
198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부임하여 1985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하였고, 1986년 군사정권에 항거하여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교수직을 떠났다. 그 뒤로 올해까지 23년 동안 타협없는 학문의 길을 걸었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을 학부생으로 다시 다녀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동숭동에 도올 한의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교수, 용인대 무도대학 유도학과 교수, 중앙대 의과대학 한의학 담당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강사 등을 역임했다. 미국 뉴잉글랜드 복잡계연구소 철학분과 위원장을 지내고 있으며, 문화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1999년 EBS 노자강의를 시작으로 KBS, MBC, SBS에서 행한 200여 회의 고전강의는 고등한 학문의 세계를 일반대중의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데 획기적 기여를 하였으며 인문학의 대중소통시대를 열었다. 그의 한문해석학, 번역론의 주장은 우리나라 번역경시의 학문풍토를 쇄신시켜 각 대학에 번역중시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하고, 한국고전번역원의 탄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2009년에는 400여 명의 교수·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한국고전번역학회가 창립된 것은 우리 학술사에 매우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도올은 2009년 9월 25일 역사적인 창립주제강연을 행하였다.
목차
제1장 프롤로그 : 현대사가로의 여정
샤오똥과 유사회 17
치작의 승리 20
구례 이야기 22
매천과 고광순 26
매천과 호양학교 32
명동백작 35
고석만과 독립운동 38
카메라만 들고 격동의 독립운동 현장으로 42
광주MBC에서 재방송한 나의 EBS독립운동사 45
제2장 대황제국 고려의 발견 : 청주와 『직지심경』
나의 성서연구를 중단시킨 MBC충북의 기획 48
역사적 예수와 마가 50
『직지심경』을 왜 “경”이라 못 부르는가? 52
『백운화상어록』, 고려문명의 새로운 이해 56
용두사지 철당간을 보라! 57
황제의 나라 고려, 그 연호 준풍! 59
위화도회군이라는 비굴한 역사회전 60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연호 : 영락 62
고려는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이었다 64
알면 괴롭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64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새로운 이해 65
의천의 대장경 : 속장경이 아니다! 67
8만경판의 물리적 실상 69
고려는 당대 세계최고의 문명국 71
『고려사』의 왜곡 실태 73
고려와 조선, 편년체와 기전체 74
『고려사』에 본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76
세종의 양심, 주저 79
현대사의 왜곡, 고대사의 왜곡 80
청주찬가 81
사랑스러운 빛고을 2천 눈동자 82
전라도의 고인돌 84
제주KBS의 서정협 피디, 제주사가 양진건 교수 86
슬픈 제주 88
『제주도지』에 얽힌 사연 91
여수MBC의 김지홍 피디 93
블레어와 브루스 커밍스 95
제73차 국제와이즈멘세계대회 주제강연 97
제주4 · 3과 여순은 하나다 98
여수MBC 기념비적 강연의 서언 100
샤오똥의 가슴에 박혔던 대못, 부레기소 이야기 103
순천 낙안면 신전마을 이야기 105
홍동호와 5 · 18민중항쟁의 마지막 장면 108
제주4 · 3은 여순민중항쟁을 통해 알려졌다 110
제3장 해방정국의 이해
해방이란 무엇인가? 112
해방의 아이러니 114
해방이라는 공백, 제국주의시대에서 냉전질서시대로! 116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3 · 1민족독립만세의거 118
여운형의 제국호텔 강연,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120
건국동맹 122
조선건국준비위원회 123
하지 주한미군군정 군정총독 125
여운형의 죽음 125
인민위원회의 바른 이해 127
“인민”은 공산당의 언어가 아니다 1300
해방원점 : 두 괴뢰의 등장 132
이승만은 누구인가? 단재 신채호의 일갈 133
김일성의 역정 135
두 괴뢰의 입국과정 136
해방이라는 공백, 단 25일 동안의 해방? 137
소련과 미국의 접근 태도 138
한국은 미국의 적이다 139
미국이 세계사에 남긴 가장 큰 오류 141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142
소련은 미국과 달리 직접지배를 구상치 않았다 143
뿌가쵸프호에서 평양공설운동장까지 145
이승만과 맥아더 147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 148
나는 한 평민, 정부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149
거룩한 사기꾼 151
해외세력들의 입국순서 152
시대감각에 뒤진 임정요인들 153
여운형의 실책 : 조선인민공화국의 창설 154
미군정의 인공 불인 : 여운형의 죽음 157
인민위원회의 불법화 157
분단과 내전 : 민중이 제일 싫어한 것 159
이상주의적 상상 : 여운형과 김구의 결합 161
김구의 위대성과 소박함, 내재하는 열등한 정치비젼 162
백범의 최대오류 : 완강한 반탁 163
신탁통치란 무엇인가? 164
좌익과 우익의 연원 166
신탁통치 인식론 167
신탁통치의 원래 의미 : 임시조선민주정부 수립 168
신탁통치는 좋은 것이다 170
동아일보의 가짜뉴스 171
한민당과 반탁 172
임정과 한민당의 반탁결합, 찰떡궁합 175
송진우의 죽음 : 진정한 민족보수의 사라짐 177
제4장 제주 4 · 3
탐라에서 제주로 180
호남가 속의 제주 182
제주목사, 대부분이 날강도 183
말, 전복, 귤 : 탐라인의 사무친 한 184
너영나영 185
이형상의 사람잡는 유교합리주의 187
탐라순력도와 남환박물, 당오백 절오백 소실 189
제주도로 온 최악의 중세기독교 : 신축의거 191
천주교는 반성하라! 교폐와 세폐 192
파리외방선교회의 제국주의 : 뮈텔과 꼴랭 드 플랑시 194
명동성당의 위세 195
김원영의 『수신영약』, 수치스러운 문화박멸론의 대명사 196
파리외방선교회의 양아치 신부들 197
폭력과 탐학의 선교 : 십자군의 부활, 우매한 고종황제 199
외방선교회 양아치선교와 남인의 주체적 경건신앙 200
양아치 신부와 봉세관의 결탁 201
이재수와 드 플랑시 202
키미가요마루 203
오오사카의 이쿠노쿠, 이카이노 206
김정은의 친엄마 제주여자 고용희 207
조선인들의 의식화운동 208
제주인민위원회의 선진성, 비종속성 210
북초등학교 3 · 1절기념 제주도대회 211
가두시위 : 6명 사망, 8명 부상 212
응원경찰이란 무엇인가? 도島에서 도道로의 승격 213
복시환 사건 214
나의 이발소 아저씨 215
제주KBS홀에서 울려퍼진 슬픈 제주 216
집필의 고통 219
3 · 1절 대민발포 이후의 제주총파업 220
조병옥은 나쁜 사람, 경찰발포는 정당방위 222
초대 도지사 박경훈, 양심있는 인물 222
서북청년단 223
김일성과 박헌영 224
위대한 변화 226
컬럼비아대학의 한국학 교수 암스트롱의 북한사회변화 평가 227
열렬한 이승만 지지세력 228
서청의 만행, 서청의 아버지 조병옥, 장택상 230
4월 3일의 거사 230
4 · 3은 결코 무장봉기가 아니다 232
남로당은 픽션이다 233
4 · 3은 남로당과 관련없다 234
김익렬의 평화적 해결, 그것을 무산시키는 조병옥 235
문제아 박진경, 제주도민 30만을 다 죽여도 오케이 237
박진경 사살 238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 제주시내에 그들의 동상을 세워라! 239
제주도민의 이승만 보이콧 242
박진경의 충혼비와 동상을 철거하라! 243
경찰의 날을 재고하시오! 244
제5장 여순민중항쟁
군사영어학교 245
남조선국방경비대 247
여수 제14연대 248
반란에서 민중항쟁으로! 249
여수의 연혁 251
여수는 역향이었다 : 조선을 거부하고 고려제국의 적통을 지킴 252
여수지민 : 한 몸에 두 지게 진 꼴 253
삼복삼파 255
약무여수 시무국가 256
선조라는 기묘한 앰비밸런스의 인물 256
여수와 이순신 257
판옥선의 족보 : 제주 덕판배, 탐라국 전승 258
임진왜란 해전사의 하부구조는 여수다 260
이순신과 두무악 261
무호남 시무국가 262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 인간의 상상력 263
정유왜란의 독자적 이해 : 단순한 재란이 아니다 266
선조라는 정신병자, 고문당하는 성웅 267
정탁의 신구차 268
칠천량해전 : 국가의 몰락 268
여수 · 순천에서 남원 · 전주까지 : 코 베인 민중 269
거북선을 만든 여수인민, 그 후손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다니! 여순민중항쟁 희생자 11,131명 271
여수MBC 청중의 무거운 분위기, 그 정체 273
김익렬 중령과 14연대 273
박진경 사살과 숙군 회오리바람의 시작 274
박정희라는 빨갱이 276
박헌영이라는 허구, 허명, 허세 277
이승만 앞잡이 이범석 279
14연대 숙군 바람 : 김영만의 희생 279
해방 후 군 · 경의 대립 281
영암 군경충돌사건 283
구례경찰사건 287
최능진 이야기 288
혁명의용군사건과 14연대 290
가짜뉴스 남발하는 이승만 292
미군정 미곡수집령 293
여순 지역의 태풍, 노아의 방주 295
지창수는 픽션 296
병사위원회의 호소 298
항명도 아니다 : 김영환 대령의 위대한 판단 299
반란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 301
이승만의 명령 :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여라! 303
여순민중항쟁의 여파 : 강고한 우익반공체제 304
제주4·3 - 여순민중항쟁 연표 1943년~1955년 308
참고문헌 389
인명색인 396
출판사 서평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고대부터 근세까지의 제주도와 여수!
제주4 · 3과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에 벌여졌던 최대의 비극이면서, 반공체제의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제주4 · 3사건은 특별법이 만들어져 진압과정에서 무리한 국가폭력이 인정되었고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기념일 제정까지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조치도 없다. 이 두 사건은 우발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별도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여순민중항쟁의 최초의 계기는 현지 주둔 군부대의 제주토벌 출동거부였다. 이것은 항명이 아니라 군인에게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정의로운 거부였다. 그리고 다수의 민중이 여기에 호응해 나선 것은 미흡한 친일파청산과 행정의 폐해, 식량난까지 초래한 민생의 파탄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고대부터 근세까지의 제주와 여수에 대한 핍박과 수난의 역사, 과거 탐라국의 위용과 이순신장군을 도와 국난을 극복한 여수지역 민중의 영웅적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 지역에 대한 이해를 깊고 풍요롭게 해준다.
해방정국과 여운형 그리고 건준!
이 책은 제주와 여순사건의 근본적 배경인 해방이후의 정국을 남북한 전체를 포괄하여 이해시킨다. 그걸 위해 먼저 당시의 국제정세, 냉전질서의 주축인 미국과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을 이해해야만 한다. 역사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역사진행의 과정마다 득실을 따지고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능성의 모색과 성찰이 필요하다. 결국 남북한의 역사는 미 · 소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분단으로 치달았지만, 강대국의 이해충돌 속에서도 현명한 대응으로 민족의 분열을 막고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이 상당했기에 도올 김용옥은 좌 · 우익 진영의 편가르기에 치우치지 않는 현실감각을 지닌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못내 아쉬워한다.
미 군정시기를 엄정하게 평가하자!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한국을 통치했던 시기가 미 군정기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미 군정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 미군정은 국제전략에 따른 미국의 국익추구로 일관했고, 한국에 대해 철저한 무지한 상태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이 갖는 무지는 정황을 잘 파악하는 악의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단순히 점령지를 편리하게 통치하겠다는 발상은, 한국인 스스로 자치능력을 발휘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부정하면서 기존의 친일파 중심 질서를 온존시키도록 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는 단순히 추상적인 대의명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제통치의 치밀한 관리조차 사라진 해방 이후의 행정은 무질서와 부패, 모리배의 농간으로 민생의 파탄을 가져왔다. 미군정은 이에 따른 혼란을 바르게 해결하지 못했으며, 결국 좌익의 탓으로 돌리며 탄압하는 방식으로 처리되면서 민족의 분열과 갈등만 조장하고 말았다. 이러한 흐름의 참혹한 귀결이 제주4 · 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이다.
고려제국에 대한 새로운 발견!
이 책에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고려시대에 대한 풍성한 설명이 다양한 배경으로 펼쳐진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우발적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고려라는 나라가 그만큼 일상적 수준이 세계최고의 문화적 역량을 유지하고 있던 강력한 제국이었음을 설파한다. 청주 흥덕사지 철당간,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등의 확인할 수 있는 실물만으로도 고려는 당대 세계 최강국이었다. 문제는 고려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역사 문헌이 적다는 것이다. 『고려사』만 해도 조선 초기에 편찬된 것으로, 고려를 비하하려는 쿠데타세력의 의도가 깔려있는 역사서라고 저자는 한탄한다.
철학자 도올의 역사에 접근하는 기본태도!
『우린 너무 몰랐다』에 들어있는 도올 김용옥 특유의 역사를 서술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이 그 특색을 분류할 수 있다. 1)언어의 정명이다. 역사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오염된 언어를 바로잡는다. 우리가 무심히 사용하는 관습적인 언어는 많은 경우 이념에 의해 의미가 덧씌워져 있다. 이런 언어는 역사이해의 객관적 판단을 가로막는다. 언어의 올바른 사용만으로도 우리는 잘못 형성된 관념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올 수 있다. 2)인간을 파악한다.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던 다양한 인간군상들, 그 각각의 캐릭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인물에 대한 엄정한 포폄을 행한다. 이것이 역사의 준엄함이다. 3)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흐름을 표피적, 단선적으로 꿰맞추는 몰지각한 역사이해를 배격한다. 역사적 사건에는 다양한 근인과 원인이 서로 얽혀있다. 그 복잡한 현상을 당시의 상황에 맞춰 경중을 가려 제시한다. 그래야만 전체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4)인간의 상식적 감성으로 역사를 대한다. 저자는 인간이면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라는 통탄의 마음으로 우리 현대사에 접근한다. 그리고 슬픈 역사의 극복은 역사에서 슬픔을 없애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 슬픔을 드러내야 하고, 거기에 동참하여 우리 모두의 슬픈 역사로 공유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도올의 역사서술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책속으로
미국은 한국에 무지했다. 오직 미국의 괴뢰정권을 세워 한국의 영토를 안정적으로 친미세력권 내에 있게 만든다는 지배영역적인 관심만 우선했고, 인민의 삶이나 가치나 지향점에 대해 아무런 본질적 관심을 갖질 않았다. --- p.144
자생적으로 발전한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건준”과 연계되어 있었고, 여운형이라는 인물의 애국심, 사상적 포용성, 사심 없는 헌신, 기민한 대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일시에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방정부조직으로 승격되고, 보다 조직적으로 세련화된다. 바로 이 시점이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출발점이다. --- p.155
제주4·3민중항쟁 지도부의 몇 사람이 남로당에 헌신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구적인 정체성이었고 실제 제주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제주민중항쟁은 오직 핍박 받는 제주민중이 피압박의 막다른 골목에서 분노를 표출한 사건일 뿐이다. --- p.234
박진경은 영어를 잘했으며 지휘능력이 탁월하여 미군정의 신임이 두터웠다.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강력한 “초토화진압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마구잡이식으로 주민을 잡아들였다. ……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 문상길 중위는 충청도 사람으로 육사 3기다. 제3중대장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최후진술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 p.238~240
여순민중항쟁은 결코 군인들의 항명이 아니다. 항명은 항명이되 항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사건사태가 반란으로도, 항명으로도, 민중의거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석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이며, 그 인식의 변화를 가능케 하려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시각의 변화는 근인近因과 동시에 모든 원인遠因을 밝혀야만 달성케 되는 것이다. --- p.250~251
어떻게 이순신은 좌수영에서 그토록 완벽한 전쟁준비를 완수할 수 있었는가? 이 미스테리 중의 미스테리는 우리민족사에 던져진 최대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은 성웅 이순신의 예지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적 예지, 우리민족의 행운은 여수 지역의 하부구조와 여수 인민의 축적된 기술력, 그리고 제주인민의 지혜를 배제하고서는 설명이 될 길이 없다. --- p.260
그러자 미군정은 도시민에 대한 식량배급을 명분으로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식량공출을 단행하는데, 결국 미곡 자유시장을 포기하고 과거 일제 강점기의 공출보다 더 잔인한 강제수거를 단행했다. 미군정의 배급정책은 농촌에까지 적용되었는데, 그 결과 곡물섭취량은 오히려 식민지시대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원인이었으며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 p.293~294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을 죽임). 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정규경찰화 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유숙계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 우리는 너무 조용했다. --- p.304~305
Walk Away Renee (Left Banke)(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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