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탐독 우리 문장가들의 고전문집을 읽다 저자 조운찬|역사공간 |2018.11
저자 : 조운찬 대학에서 한국사를,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다.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사회부·문화부·국제부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베이징특파원과 문화부장, 문화에디터, 후마니타스연구소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을 수료했으며 이후 틈틈이 한국과 중국의 오래된 글을 읽어왔다. 옛글을 인문학과 연계시켜 글을 쓰고 삶의 지혜를 찾는 일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옛글의 풍경에 취하다』가 있다.
목차
서문
1부 고품격 문장을 쓴 우리 문학사의 별들
대신 써준 글마저도 얼마나 훌륭했던지 _최치원의 『계원필경집』
시의 마귀가 따라다니니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네 _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중국 대륙을 풍미한 고려의 베스트셀러 작가 _ 이제현의 『익재집』
문학의, 문학에 의한, 문학을 위한 글쓰기 _ 장유의 『계곡집』
모두가 인정하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 _ 박지원의 『연암집』
조선 한문학 천 년의 대미를 장식하다 _ 정인보의 『담원문록』
2부 끝내 세상을 바꾸어낸 치열한 연구자들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간다 _의천의 『대각국사집』
선비의 본분은 독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꾸다 _이이의 『율곡집』
역사의 격변기를 살며 끊임없이 기록한 다재다능 문장가 _신흠의 『상촌집』
철저히 기록하고 또 반성하라 _이항복의 『백사집』
한번 결심하면 끝을 본다, 조선 최고의 출판인 _김육의 『잠곡유고』
쓰고 또 쓰고, 정통 관인학자의 기록문학 _이의현의 『도곡집』
3부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열어준 안내자들
나는 나의 길을 가리라 마이웨이 책벌레 _허균의 『성소부부고』
호락논쟁의 중심에서 새 사상을 배태하다 _김원행의 『미호집』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탐색자 _홍대용의 『담헌서』
근대적 미의식을 도입한 선구적 시인 _박제가의 『정유각집』
아름다움에 가려진 치열한 학문의 세계 _김정희의 『완당전집』
통념을 배격하라, 조선 사상계의 이단아 _심대윤의 『심대윤전집』
4부 부조리한 세상에 당당히 저항한 문장가들
목숨을 바쳐 의리를 지킨 사육신의 충절 _박팽년 외 『육선생유고』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방외인의 방랑 _김시습의 『매월당집』
치열한 글쓰기로 세상에 승부를 걸다 _최립의 『간이집』
허례허식을 신랄하게 비판한 합리적 생각의 실천가 _양득중의 『덕촌집』
고독한 지식인의 고뇌, 차라리 벙어리로 살리라_ 윤기의 『무명자집』
5부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 인재들
새로운 나라를 꿈꾼 조선 왕조의 설계자 _정도전의 『삼봉집』
절의를 버린 것인가, 공훈을 좇은 것인가 _권근의 『양촌집』
생각은 달라도 나라 위하는 마음은 같거니 _김상헌의 『청음집』과 최명길의 『지천집』
격변의 시기를 살아간 어떤 문장가 _김윤식의 『운양집』
죽음으로써 뜻을 알린 순절한 독립운동가 _황현의 『매천집』
민족혼을 일깨운 중국 한류의 개척자 _김택영의 『소호당집』
출판사 서평
문집은 개인이나 집안, 제자들이 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상이나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경우에는 조정이나 지방 관아에서 공적인 경비를 들여 간행했다. 학술과 사상 연구의 텍스트로 명성을 얻은 문집도 있지만, 많은 개인 문집들은 한두 번 간행된 뒤 통용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한 문집도 부지기수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랫동안 문집에 어떤 내용이 실려 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우리 고전문학 연구자들은 문학사를 정리하기 위해 꾸준히 문집을 연구해왔다. 이와 함께 고전국역 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가 지속적으로 문집을 발굴해 학계에 소개해왔다. 지금은 이 기관의 후신인 한국고전번역원이 국가사업으로 문집 편찬과 번역을 담당하고 있다. 고전번역원은 2012년 최치원의 문집 『계원필경집』에서 일제강점기 조긍섭의 『암서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문집 1259종을 총정리해 영인한 ‘한국문집총간’ 500책을 펴냈다. 여기에는 『삼봉집』?『율곡집』?『연암집』?『완당전집』등 유명 문집들이 망라됐다. ‘한국문집총간’ 가운데 95종 443책(2011년 기준)을 번역했다. 저자는 한때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문집 번역 원고를 교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집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문집의 방대함에 놀랐고, 다음에는 문집 속의 다양한 콘텐츠에 놀랐다. 그러면서 많은 독자들이 문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그때 품었던 생각을 다시 길어 올린 결과물이다.
문집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다,
옛 문장가들의 세상을 읽는 특별한 방식
이 책에서는 수천 종의 문집 가운데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을 위주로, 통일신라 시대의 『계원필경집』부터 일제강점기 때 쓰인 정인보의 『담원문록』에 이르기까지 문집 30종을 뽑아 총 5개 주제로 묶어 소개했다.
1부에서는 ‘고품격 문장을 쓴 우리 문학사의 별들’이라는 주제로, 특별히 빼어난 문장을 쓴 문장가들의 문집을 소개했다. 2부에서는 ‘끝내 세상을 바꾸어낸 치열한 연구자들’이라는 주제로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끝에 우리 정신문화 및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문장가들의 문집을 소개했다. 3부에서는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준 안내자들’이라는 주제로, 색다른 자신만의 철학을 통해 세상에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주었던 문장가들의 문집을 다루었다. 4부에서는 ‘부조리한 세상에 당당히 저항한 문장가들’이라는 주제로, 세상과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온 문장가들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5부에서는 ‘격변기의 혼란 속에 살아간 인재들’이라는 주제로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문장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며 후대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던 문장가들에 대해 소개했다.
문집을 선택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기준은 좋은 문장이다. 문집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은 옛 사람의 명문장을 만나는 일이다. 옛 사람들의 좋은 문장에 대한 갈구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은 빈부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문장 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문장가로 이름을 얻기 위해 좋을 글을 찾아 읽고, 부단히 글쓰기를 연마했다. 또 뛰어난 문장가들은 각자 독특한 글쓰기 철학을 갖고 있는 문학이론가들이었다. 오래된 문집만큼 좋은 글쓰기 텍스트는 없다. 비록 한문으로 되어있지만 번역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글쓰기 철학, 문체의 미학, 텍스트 구성 방식 등을 배울 수 있다.
또한 문집에는 역사서나 사상서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문집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사상사나 정치사, 생활사가 매우 빈약했을 것이다. 문집은 그 자체로 사료인 경우가 많고, 당대 현실과 시대인식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한 인물의 사상이나 시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집 읽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교감, 고전문집을 읽는다는 것
전통시대에 독서는 사대부의 필수 교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과 생각을 시로 짓고 편지로 주고받았으며, 친구가 시집을 내면 서문을 써 축하했다. 그리고 이런 글들을 모아 문집으로 편찬했다. 물론 문집의 글이 모두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독자의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문집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개인의 사적 기록이 비교적 많아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지만, 문집은 역사서나 유교 경전에서 볼 수 없는 내용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 지식을 채워왔다. 문집 속 글들을 읽어나가며 우리 정신문화 세계가 어떤 발자취를 남겨왔는지,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문집 속 명문장가들의 희로애락과 삶, 깊은 고뇌와 사상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그들의 삶 또한 현재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고뇌가 그리 먼 옛날 사람들만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과거는 결국 오늘로 향하는 길이다. 옛 문장가들은 글을 통해 이 세계와 학문을 연구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탄생시켰다. 또한 글로써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가 하면,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왔다. 문집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살고, 생각하고, 실천해왔는지를 엿보면서 현재 우리의 삶 또한 새롭고 다채롭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분명 굉장히 매력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문집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집은 개인이나 가문 또는 제자들이 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상이나 문학으로 이름이 있는 경우에는 조정이나 지방 관아에서 공적인 경비를 들여 간행했다.”(9쪽)
신라 시대 최치원의 『계원필경집』은 최치원 자신이 생전에, 그것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편찬해 어람御覽을 위해 임금에게 진상한 책이다(19쪽).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다하는 노력을 했다〔人百己千〕.”최치원 『계원필경집』 서문
“‘계원桂園’은 최치원이 고변 아래에서 활동했을 때 머물렀던 중국 회남시의 별칭이며, ‘필경筆耕’은 어지러운 시기에 문필로 먹고살았다는 뜻이다.”(20쪽).
“이규보에게 모든 생물은 평등하다. 저마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다. 크다고 더 존중받아서도 안 되고 작다고 하찮게 대해서도 안 된다. 생명이라는 견지에서 벌레와 인간은 차이가 없다. 그는 바위와 대화하는가 하면〔答石問〕, 정신과 영혼의 문제를 놓고 땅의 정령과 토론을 벌인다〔土靈問〕. 이규보 작품을 한국 생태주의문학의 시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30쪽).
“1323년 간신 유청신·오잠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를 원의 한 성省으로 병합시켜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제현은 고려 400년 왕업을 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원나라 도당都堂에게 글을 올려 병합 요청을 철회하게 했다.”(34, 35쪽).
“이제현은 여행지에서 만난 제갈공명·측천무·항우·한신·소동파 등의 유적지에서는 해당 인물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40쪽)
“우리나라 시인의 용사는 거개가 남의 말을 빌려온 것뿐이다. 다만 제 눈으로 보고 제 발로 밟아본 이는 오직 익제 이제현 한 사람뿐이다.”(41쪽). 연암 박지원
“왜 연암인가? 남다른 글을 쓰기 때문이다. 무엇이 남다른가? 판에 박은 틀에서 벗어나 있다.
연암 글의 무기는 독창성이다. 그 독창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옛글을 모범으로 삼으면서도 새롭게 창조한 데서 온다.
연암이 박제가의 문집 서문(「초정집서」)에서 밝힌 ‘법고창신法古創新’이 그 방식이다.
옛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
이에 대해 연암이 내놓은 게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롭게 지어내면서도 법도에 맞아야 한다’는 법고창신이다.”(57쪽).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아이가 읽기 싫어하는 것을 나무랐더니, 하는 말이 ‘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천‘자는 전혀 파랗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 합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은 창일이라도 기가 죽게 만들거요.”(58쪽).연암이 (옛것을 모방하려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내세우는) 유한준에게 보낸 편지글 중
“아내는 자주저고리에 남치마 차림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앉았다가 내가 밖에서 돌아오면 말도 미처 하기 전에 자기 방으로 물러나버렸다. 치마를 끌며 대청을 내려갔고, 급히 지게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에 늘 섭섭했었다.”(77쪽)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로 들면서 『담원문집薝園文集』에서
정인보는 13살 때 결혼해 7년 되던 해에 동갑내기 첫 부인 성씨와 사별했다.그리고 14년이 지나서야 썼다는 「그리움을 적다〔抒思〕
“오성부원군으로도 불리는 백사를 이야기하면서 한음 이덕형과의 교유를 피해갈 수는 없다. ‘오성과 한음’의 우정은 동화·만화 등으로 각색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백사와 한음은 죽마고우가 아니다. 백사가 한성의 서부 양생방(지금의 남대문 부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음은 남부 성명방(서울역 부근)에서 태어났으니 두 사람의 교제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음은 오성보다 다섯 살 어린데다 어린 시절을 경상도 상주의 진외가에서 보내어 두 사람이 어울려 놀았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두 사람의 개구쟁이 일화는 훗날 만들어진 이야기다. 백사의 제자 박미의 『백사선생 연보』에 따르면 백사와 한음이 처음 만난 것은 둘의 나이가 각각 23세, 18세 때라고 한다. 실제 『백사집』이나 『한음유고』에 이보다 앞서 두 사람이 교제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113쪽). ‘죽마고우’(竹馬故友)의 전형적인 사례로 알고 있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관계를 바로 잡음
역사인물들 누구 글이 최고인가
1.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아이가 읽기 싫어하는 것을 나무랐더니, 하는 말이 “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천’자는 전혀 파랗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은 창힐(蒼頡)이라도 기가 죽게 만들거요.
2.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
3.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르겠네.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 꽃들에게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簾)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 誨汝知之 知之爲知之’(내가 너에게 앓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고 하는 것이다)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않느냐?’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라고 했네.
세 글은 모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글이다. 1번 글은 당대의 라이벌 문인 유한준에게 보낸 편지고, 2번 글은 56세에 지리산과 덕유산을 낀 안의현감으로 제수되어 4년간 지내면서 쓴 글이다. 3번 글은 제비와 장난하며 소일하는 일상을 박남수에게 보낸 글이다. 글쟁이라지만 글감옥에 갇히지않고 때로는 글을 희롱하고, 때로는 글과 사물이 몰아일체의 경지로 노닐게 하는 것이 과연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할만하다.
수많은 문집에서 옥석들을 골라 실은 책이 나왔다. <문집탐독>(역사공간 펴냄)이다. 신문 기자이자 고전번역가이기도 한 조운찬 작가의 신간이다. 이 책에는 연암의 글만이 아니라 대표적인 문장가들의 29명의 문집을 담아냈다. 흔히 옛 문집을 읽는다는 것은 박석에서 옥돌을 골라내는 작업에 비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으로부터 한문학의 대미를 장식한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1200여년 문집으로 옥돌들을 가려서 선보인 것이다. 이를 보고 우응순 고전번역가이지 인문학자는 “기자들이 이런 깊이 있는 책들을 내니 전문가 연 하는 이들이 자극을 받지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그런데 조운찬 작가는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과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기자지만 단지 기자로만 볼 수가 없다. 그는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고, 20년 전 외환위기 때는 신문사를 떠나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에서 국역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문고전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문집 번역 원고를 교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처음엔 문집의 방대함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문집 속의 다양한 콘텐츠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많은 독자들이 문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품었던 생각을 출간작업으로 옮겼다.
29명의 대표 문집가들을 한구슬로 꿰면서 이를 분야별로 정리한 것은 기자적 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가령 1부에선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제현의 <익재집> △장유의 <계곡집> △박지원의 <연암집> △정인보의 <담원문록>을 ‘고품격 문장을 쓴 우리 문학사의 별들’로 묶어냈다. 이어 2부 ‘끝내 세상을 바꾸어낸 치열한 연구자들’에선 △의천의 <대각국사집> △이이의 <율곡집> △신흠의 <상촌집> △이항복의 <백사집> △김육의 <잠곡유고> △이의현의 <도곡집>을, 3부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준 안내자들’에선 △허균의 <성소부부고> △김원행의 <미호집> △홍대용의 <담헌서> △박제가의 <정유각집> △김정희의 <완당전집> △심대윤의 <심대윤전집>을 정리했다. ‘부조리한 세상에 당당히 저항한 문장가들’은 4부에 묶었다. △백평년 외 <육선생유고> △김시습의 <매월당집> △최립의 <간이집> △양득중의 <덕촌집> △윤기의 <무명자집>이다. 대미는 △정도전의 <삼봉집> △권근의 <양촌집> △김성헌의 <청음집>과 최명길의 <지천집> △김윤식의 <운양집> △황현의 <매천집> △김택영의 <소호당집>을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 인재들’로 묶었다.
삼월 심일일에
아침거리 없어
아내가 갖옷 잡히려 하기에
처음엔 내 나무라며 말렸네
추위가 아주 갔다면
누가 이것 잡겠으며
추위가 다시 온다면
올겨울 난 어쩌란 말이오
아내 대뜸 볼멘소리로
당신은 왜 그리 미련하오
그리 좋은 갖옷 아니지만
제 손수 지은 것으로
당신보다 더 이낀다오
허나 입에 풀칠이 더 급한 걸요
(…)
-<옷을 전당 잡히고 느낌이 있어 최종번 군에게 보이다(與衣有感 示崔君宗藩)>
조운찬 기자 겸 작가 그냥 글이 아니다. 그의 삶의 내공을 담아낸 글들이 뭇 사람들의 눈물을 훔치게도, 두 주먹을 불끈 쥐게도 한다. 그것이 글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위 글은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이규보(1168~1241)의 시다. 조작가는 그에 대해 “이규보는 가난을 숨기지 않았다. 가죽 옷을 전당 잡혀 쌀을 구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하려 했다”고 평했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가 8천 여수에 달한다고 밝혔고, <동국이상국집>에만 2088수가 실려 있다. 그렇게 다작이면서도 하나 같이 수준급이라고 한다. 이규보는 ‘3첩(捷)’으로 불렸다고 한다. 걸음이 재고, 말이 빠르고, 시를 빨리 지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에선 문집만 탐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그 인물의 이면까지 엿보는 맛이 쏠쏠하다.
<익재집>은 700년간 21쇄를 찍은 베스트셀러 문집이라고 한다. 지은이 이제현(1287~1367)은 고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사신을 가서 27세부터 36세까지 긴 세월을 대륙에서 보내며 수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명망이 천하에 넘쳐흘렀다. 몸은 고려에 살았는데, 도덕과 문장이 유학의 종장이었다. 모두 한유처럼 우러러 존경하였고, 주돈이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기상이 있었다.
고려 말 문익 목은 이색이 이제현의 묘비명에 쓴 글이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세상과 불화하며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반면 이제현은 문학·학문·정치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비루하고 졸렬하여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이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짓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왔다. 그러니 평소에 이런 일을 빼놓으면 마음을 쓸 곳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장유(1587~1638)가 <계곡집>을 간행할 때 <계곡만필>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달랐다. 장유가 세상을 뜬 직후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그 문장의 기운이 완전하고 이치가 분명하니 세상에 그에게 미칠 이가 없다. 문형을 두 차례나 맡아 공사의 문서 제작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고, 천관(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 오래 있었으나 항상 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었으며, 조금도 그를 헐뜯는 이가 없었다.
장유는 올바른 학문은 잡학이 성행한 가운데 찾아진다고 했다. 오곡이 돋보이는 것은 돌피와 함께 있을 때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학문이 융성할 때 정학은 더욱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의 융통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말보다 글을 강조했다. 문인의 면모다. 그가 당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선공 육지를 예로 들어 ‘문인의 붙끝에 혀가 달려있다’는 표현도 아래 그의 글에서 나왔다.
<주역>에 이르기를 “글로는 말하고 싶은 생각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말로는 가슴속의 뜻을 다 표현해내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고 하였다. 마음속의 정미한 뜻은 입으로도 제대로 표현해 낼 수가 없는 것인데, 붓으로 표현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육(陸)선공(宣公)은 입으로 잘 표현해내지 못할 것을 붓으로 휘갈겨 쓴다”라는게 있다. 이는 육 선공은 입으로도 불가능한 것을 글로 곡진하게 표현했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붓끝에 혀가 있다’(筆端有舌)는 것이 아닐까.
KBS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편에서 갈무리
KBS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편에서 갈무리
문집을 통해 고금을 횡단한 작가는 객관적 비교를 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기도 한다. 가령 조선 후기 200여년 동안 불과 12차례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의 행적과 기록에 환호해 2002년부터 매년 조선 통신사 재현행사를 개최하고, 2017년에는 통신사 기록물 333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는데, 통신사 기록물의 수백 배에 달하는 ‘콘텐츠의 보고’인 연행록은 홀대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만도 1천회 이상의 연행사가 중국으로 갔으며, 그들이 남긴 연행록만 400여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 작가는 “이제부터라도 한·중 양국이 협력해 연행로를 부활하고, 관광 상품으로 연행사절단을 재현해 동아시아 우호의 길을 열어라”고 한다. 또한 “연암이 6일 동안 머무르며 <열하일기>를 구상한 중국 하북성 승덕시와 4년여간 현감으로 재직하며 이용후생의 실학에 눈을 뜨게 한 경남 함양군이 자매결연을 맺으면 어떨까”고 제안한다./2.1 한겨레 휴심정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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