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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이름 부르는 일

by 이성근 2021. 8. 2.

 

 

별빛 - 강인호

별빛 오정방

사랑이 내 삶의- 이정하

그저 그렇게 이정하

나무와 비 이정하

눈 내리는 겨울 밤, 꿈의 형상학 - 이정하

저녁 별 이정하

떠나간 자리 - 김 림

가슴에 묻는 사랑 - 김 림

 

사랑에 대한 관찰 10 서동욱

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 박철

꽃그림 박철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 넣으며 - 박철

키스 2 김언

가을 그대 강희창

푸른 하늘 아래 홍영철

사랑, --- 불치의 함성호

..., 검게 사무치는 - 함성호

해변여관 함성호

밀물 때가 온다 함동선

님은요 함동선

잠 못 이루는 밤 한승원

시 계 -열애 일기 1 한승원-

이별 - 촛불 연가 53 한승원

저녁 강 하재봉

겨울강 - 하재봉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최승자

돌아와 이제 최승자

기억하는가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최승자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천양희

허기 천양희

화석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지독한 사랑 채호기

연가 정일근

, 경주 남산 정일근

연리지(蓮理枝) - 정끝별

내 품에, 그대 눈물을 이정록

그리운 그대 이승희

그리운 그대·2 이승희

그리운 그대·3 이승희

가을戀歌 - 이승철

익는 술 - 이성부

어떤 하루 / 나호열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별빛 - 강인호

 

저들도 외롭긴 외로운 것이다

저들도 누군가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밤이면 그렇게 멀리서

깜박깜박 신호 보내오는 것이다

 

- 덕유산 애가/대한 BooKs/2012

 

 

별빛 - 오정방

 

나에게 이르기 위하여

여느 먼 옛날에 집을 나섰구나

수 십년,

수 백년,

아니 수 천년 전에

내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헬 수 없는

그 옛날, 아주 오랜 그 옛날에

너는 이미 집을 나섰구나

나에게 조용히 이르기 위하여

 

나에게 이르기 위하여

멀고도 먼 길을 날아왔었구나

구름을 타고,

바람을 타고,

아니 흐르는 세월을 타고

내 머리로는 도저히 거리를 잴 수 없는

높디 높은 저 하늘 끝에서

너는 미련없이 집을 떠났었구나

나에게 말없이 이르기 위하여

 

 

 

사랑이 내 삶의- 이정하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불빛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네.

밤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줄 수 있는 불빛 같은 것.

그 불빛 하나로

깜깜한 밤을 지새는 사람에게

새벽 여명을 기다릴 수 있게 하는

한 줄기 소망 같은 것.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나무 그늘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네.

힘겨운 삶의 짐을 지고 가다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 쉬었다 갈 수 있게 하는 나무그늘.

그 무성한 잎새 아래 땀을 식히다

멀리 바라보는 석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쉼표 같은 것이었다가

마침내

마지막 가는 길에 손 흔들어주는

만장(挽丈)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네.

 

 

그저 그렇게 - 이정하

 

살아 있는 동안

또 만나게 되겠지요.

못 만나는 동안

더러 그립기도 하겠지요.

그러다가 또

무덤덤해지기도 하겠지요.

 

살아가는 동안

어찌, 갖고 싶은 것만 갖고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나요.

그저 그렇게

그저 그렇게 사는 거지요.

 

마차가 지나간 자국에 빗물이 고이듯

내 삶이 지나온 자국마다

슬픔이 가득 고였네.

 

 

나무와 비 - 이정하

 

오랜 가뭄 속에서도 메말라 죽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나뭇가지와 잎새를 떨궈내면서도

근근히 목숨줄을 이어가는 것은

언젠가 네가 반드시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대여,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껍데기가 벗겨지고 목줄기가 타는 불볕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도 가시지 않은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다.

 

- 사랑해서 외로웠다/자음과 모음/2005

 

눈 내리는 겨울 밤, 꿈의 형상학 - 이정하

 

1.

어느 누가 아름다운 꿈 꾸지 않으리

내 이런 불면의 밤에도

속절없이 눈은 내린다

씨팔씨팔 잠도 없이 흩날리며

내린다는 것은

늘 목숨처럼 가엾고도 아름다운 일이었지

 

누가 죽었길래 이토록 폭설이 내리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대 태어난 기슭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이 시대의 한 끄트머리는 늘 메마르다

누구는 바람부는 날의 풀잎처럼 흔들리며 사랑하며

쉽게 살아가라고 말하지만 눈발이여

지금은

슬픔을 슬퍼하고 아픔을 아파할 때가 아니다

 

말해주마 눈발이여

내게도 한때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노라고

행복에 겨워

운명조차 잊고 있었던 때가 많았노라고

수정되고 수정되어 불투명한 우리들의 꿈

끝으로 갈수록 왜 이렇게 우울해야 하는 것인지

동전소리만 짤랑짤랑 꿈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인지

생각하는 불면의 밤이 깊어질수록

돌아가고 싶었다 유년의 그 향기롭던

크레용 냄새속으로

한 조각 클레용이 되어 문드러지고 싶었다

 

-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푸른숲/1997

 

저녁 별 - 이정하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너를 바라보는 기쁨만으로도

나는 혼자 설레였다.

 

다음에 또 너를 보았을 때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깨닫곤

한숨지었다. 너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마음엔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던 거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 게 있으랴.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당장 숨을 거둔다 해도

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냉랭하게 나를 내려다볼 밖에.

 

내 어둔 마음에 뜬 별 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떠나간 자리 - 김 림

 

한때는 나의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지워진 이여

 

이름조차 잊었노라

억지를 부려가며

밤마다 베갯머리 적시던 그 날 동안

그대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는가

 

허락도 없이

남의 가슴팍에 들어앉아

한 부분인 듯 굴더니

어느 날 빈 자리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만 사람

 

쓰라린 가슴으로 불어닥친 바람끝에

잔혹한 상처를 입고

날마다 신음하던 그 자리엔

어느새 고름이 맺히고

살짝 딱지가 앉았다.

 

꽃 진 자리

열매가 맺힌다더니

그대 잘라내고 난 자리엔

슬픔으로 다져진

굳은 살이 남았구나

 

 

 

가슴에 묻는 사랑 - 김 림

 

누구에겐가 말하고 싶은

사랑 하나 가지는 일이

그대 얼마나 큰 축복인 줄을

알고 있는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은

애틋한 이름하나 가슴에 묻고

한평생을 벙어리로 사는 일

 

살아있어도

산다고 할 수 없는 날을

형벌처럼

또 견디어냈구나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죄

아껴도 모자란 얼굴에

피눈물 흐르게 한 죄

어찌 다 갚을 수 있나

 

지금 사랑을 하는 그대여

행여라도

맹세일랑 하지 마시게

 

사랑에 대한 관찰 10 - 서동욱

 

내가 기다리는 오직 한 여자. 강 안에 밀리는 모래처럼 씻겨진 시간들 지난밤은 물이 얼고 또 조각조각 깨지며 살에 부딪혀 이 아침 모래들 반짝이는 피를 흘린다 저들도 모래가 되기 전엔 사람의 형상 속에 갇혀 괴로워했을까? 나는 알아보았다 올 봄 나무에 핀 살구꽃이 지난해 눈길 마주친 그 꽃이란 것을. 얼마나 섬뜩했겠는가? 무슨 볼일 있어 이 에 저렇게 돌아왔는지. 그러나 내 욕망도 지난해의 꽃들처럼 생사를 넘어서까지 당치 않은 모험을 감행한다 이번 생은 나가리라고 치지요, 하지만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당신의 머리카락은 옛날처럼 길게 자라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이해 뒤에도, 욕심을 지닌 몸뗑이는 계속 이 생의 중심에서 부들부들 떨린다 그리움의 금단현상. 강 안에 누운 저들은 무슨 수로 이 생에 모래로 태어났는가, 다음 생도 그 다음 생도 시간이 이어지고 또 누군가 돌아오길 완강히 거부하며. 그리고 나, 나는 왜 살고 왜 그리워했는가?

 

 

 

* 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 - 박철

 

사랑은 큰일이 아닐 겁니다

사랑은 작은 일입니다

7월의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바람을 불어 주는 일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잠을 깬 이에게

맑은 물 한 잔 건네는 일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손등을 한 번 만져 보는 일

 

여름이 되어도 우리는

지난 봄, 여름, 가을, 겨울,

작은 일에 가슴 조여 기뻐했듯이

작은 사랑을 나눕니다

큰 사랑은 모릅니다

태양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라는

지구에서 큰 사랑은

필요치 않습니다

해 지는 저녁 들판을 걸으며

어깨에 어깨를 걸어 보면

그게 저 바다에 흘러 넘치는

수평선이 됩니다

 

7월의 이 여름날

우리들의 사랑은

그렇게 작고, 끝없는

잊혀지지 않는 힘입니다

 

 

* 꽃그림 - 박철

 

새해가 오고 새봄이 오고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는 않으리

당신이 내 마음에 새겨준 꽃그림 문신 하나

그 푸르른 자욱을 지우지 못하리

누군들 좋아 어둔 골목길에 기대어 섰고

누군들 좋아 빈손 저어가며 사랑을 노래하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의 한가운데

잡을 수 없는 바람이 맡기고 간 삶을 살다가

당신이 잠시 잠을 일깨워 푸른 햇살을 보다가

나 다시 그 깊은 잠으로 돌아가니

지우지 못해도 슬퍼하지는 않으리

먼 훗날 내게 묻는 이 있어

꽃그림의 주인을 찾으면

젖은 얼굴 가득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나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리

 

 

 

*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 넣으며 - 박철

 

청솔가지 긁어 넣으며

서울은 너무 혼잡한 것 같애요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맞바람 아궁이에 앉아

갑자기 누구라도 찾아올 것 같은 해거름

솔가지 밀어 넣으며

당신은 얼마나 좋겠읍니까라고

써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젖은 연기 내게로 밀려오는

맞바람 아궁이에 청솔가지 넣으면

눈물이 나네

* 키스 - 김언

 

나는 나라고 가끔씩 싱거운 생각을 한다. 너는 너라고 가끔씩 싱거운 맛을 본다. 내 생각이 어디 발라져 있나, 물어보면 손가락을 쭉 뻗어 내 입술을 가리킨다. 너는 너라고 맛은 네가 보고 내 입술은 달다 쓰다 말이 없다. 한없이 거추장스러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혀를 깨물고.

 

 

* 키스 2 - 김언

 

우리가 일그러진 키스를 할 때 너의 눈은 이마에도 있고 가슴에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코를 포옹하고 입을 끌어안고 보이지 않는 혀를 쪽쪽 빨아들일 때도 너의 눈은 너의 등뒤로 돌아가 냄새를 맡는다. 너의 눈에서는 잘 익은 고기 냄새가 난다. 동시에 혈색이 돈다. 그것은 미끄럽다. 우리가 우리의 키스를 서로 껴안고 눈알을 굴리고 사탕처럼 콕콕 씹어먹을 때도 너의 눈은 조각조각 머릿속에 가 박힌다. 너의 눈은 심장에 가 있다. 너의 눈은 폭발하는 가슴에도 들어가 있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우리는 우리의 눈을 감았다가 뜬다. 너의 눈에 깊은 밤의 태양과 너의 고깃덩어리가 들어가 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너의 눈에서도 창문이 발견되는가? 가장 가까운 곳에 꽃봉오리가 있다. 사막이 있다. 익어가는 밤하늘과 함께 두 사람의 시체가 증발하고 있다. 매순간.

 

 

 

* 가을 그대 - 강희창

 

그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뜨겁게 달군 지난 날을 뒤로하고

그리움이 이리도 사무쳐 멍드는 것은

우리가 함께 할 날이 짧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떠날 채비로 분주하기에

들뜬 마음 추수하고 드는 날을 골라

잊었던 화장을 한번 해봅니다

같이 걸어온 발자국만큼

같이 맞춰온 호흡만큼

서로를 사랑할 날이 줄어 들었네요

 

남겨진 것의 애처러움과 후회스러움

그것이 싫어서 라도 아니

남겨진 흔적이 또 다른 그리움의

빌미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떠나야 할 때를 압니다

그대 향한 그리움 한 점 남김 없이

다 태우고 가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주고 앙상한 뼈로 남는다 해도

또 다른 분신의 잉태를 믿기에

잊혀진다는 길고 긴 나락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 갈 수 있습니다.

벌써

금쪽같은 하루해가 이울고 있네요.

 

 

* 푸른 하늘 아래 - 홍영철

 

희망인 것 같으면서도

희망이 아닌

꿈인 것 같으면서도

꿈이 아닌

푸른 하늘

시월

이 푸른하늘 아래

더이상

당신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참 미치겠어요.

 

* 사랑, --- 불치의 - 함성호

 

입술을

세상이 무너져버릴 키스를

한입 가득히 너의 심장과 피를

흡입해내는 나의 사랑을

용서해줘, 와락, 포옹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너의 몸을

허무를---, 낙엽이 진눈깨비처럼 지는 대낮을

걸어, 무수히 가슴에 상처를

자해하는, 무진 힘겨운 발걸음을

일보 일보 이끌며 가는, 절망의 행보를

아아, 살아 있다는 것을

허나 너의 사랑을

끓는 솥 가운데에 전신을 데인, 火傷,

나는 문 여닫는 소리에도 온몸이 아픔을

그 아픔을 불치로 알아 살아감을

너는 모를......

그 바다에 뿌린 눈물을

양식으로, 그물에 담아올리는 사랑을

넘쳐오는 파도를

산산조각내는, 나의 고독을

땅거미로 번져가는,너의 웃음을

 

 

* ..., 검게 사무치는 - 함성호

 

잡년아, 울지 마라

웃지마라, 미련한 것.

마른 지풀 같은 니 머리칼에 흰 가루가 하염없고

니는 그만 눈을 감는구나

나는 잠속에서 긴 꿈을 꾼다,잡년아.

 

잡년아.

그리운 늬가 하염없이 내 잠 속에서 꿈을 꾼다.

무사해라 부디,

겁붉은 숯불처럼 사그리 타들어가는 니.

뜨거운 살집이 이 시리게 그리웁고

검푸른 바다의 수심처럼 니는 자꾸 깊어만 가는구나.

해저의 심연에거 나는 고요히 자라며 바다를 태워먹고.

 

잡년아,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갇힌 니 모습 이젠 보이지 않는다.

시원스럽게 토해내지도 못한 채 분해되지 않는 화학주처럼

피가 나게 긁어도 시원치 않는 게 사랑이다, 잡년아.

 

잡년아,

니가 가는 먼길은

겨울 바닷가 초저녁의 물투명한 호박색으로 저물어가고

확확, 나는 목이 타고 눈에는 불이 일어

늬 떠나고 난 자리에 날개 터는 소리만

(푸드득) 불꽃 피어 푸른 밤으로 솟구치더라

 

잡년아,

타오르는 불의 중심처럼 사무치는 고온이면서도

뜨겁지 않은 게 사랑이다,

, 잡년아.

 

 

* 해변여관 - 함성호

 

해당화와.

해변에 버려진 떡과 명태 눈깔에 대한 숭배

나는 향과 불에 취해. 푸른 발자국 사이에 젖어

붉은 살 송어처럼 노래 부르고 있다

온 몸이 귀가 되어

너를 향해 열려 있는 이 하루 종일

저 바다. 미망을 딛고 넘어오는 그리움 없는 오랜 항해

너는 해당화.붉은 해당화와.

사라져버린 너의 샛노란 축제

바람의 길이여. 부디

이 푸르름 속에 나타내어라

온갖 잡종과 교배의 방식을 숭배하는

내 귀는 아직도

심연에서 웅크린 채 다시 떠다니고 있으니

없는 길을 보여다오

나의 푸르른 누벽에 새겨진 목 쉰 향내와

모든 환각의 존재를

그리고.

너의 끝없는 몸을 더듬을 수 있게

 

 

* 밀물 때가 온다 - 함동선

 

사람은

만나지 못하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예요

고구려 벽화 속에 잠들었던 민들레가 피고

잠자리 메뚜기 딱정벌레가 살아나는데요

당신이 이렇게 자리 차지한 것은

내가 당신 앞에 이미 그런 자리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요

석모도 보문사의 석탑 그림자가

긴 막대기 되어 내게 걸쳐 오는 것은요

당신이 삼천 배 할 적의

그 솔바람 소리이었구요

물 흐르는 소리이었구요

그리고 이어질 듯 끊어지고 사라질 듯 나타나는

풀벌레 소리는요

하늘하늘 떨어지는 나뭇잎이었구요

나는 썰물에서 몸을 뒤집다가

개펄의 작은 배가 되어 옴짝 못하고 있으니

주위는 새까만 적막 뿐인데요

내일은 주저하며 다가오는지 몰라도

오늘은 화살처럼 날아가구요

어제는 영원히 제자리걸음이어요

 

 

* 님은요 - 함동선

 

이별은 길었지만요

그 이별 이전의 세월은 더 길었다구요

비록 서로 다르게 걸어온 길은

오랜 시간에 걸쳐졌다 해도

정말로 마음을 합치고 나면

모래의 발자국처럼 바람 한줄기 불어도

파도 한 자락이 들이쳐도

무너진다구요

그래서 시작은 준비할 수 있어도

끝은 대비하기 어렵고

인연이란

시작할 때보다 끝이 날 때라는 말이

더 대견하다구요

이제 마지막이란

늘 마지막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라 믿으니까요

오늘도 기다리는 님은요

시간을 멎게 할 님은요

 

 

* 잠 못 이루는 밤 - 한승원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혼자 헤매이게 한다

그대는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대가 아니므로 나는

어찌할 수 없이 그대를 사랑하는 그대라고 말해야 한다

, 나의 말은 늘 사랑하는 그대를 죽인다 그러므로

내 그대를 얻어도 얻은 것이 아니고

잃어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대 내게 와서 강으로 흐르고

나 그대의 강에서 헤엄친다

사랑함이 있으므로 미워함이 있다 하여

어찌 그대 나 보기를 태워버린 *

곡식의 싹같이 하며

나 그대 대하기를

공중에 찍힌 새의 발자국 같이 할 수 있으랴.

* 유마경'관중생품'`愛見으로 大悲를 일으키지 말라.'

 

 

 

* 시 계 - 한승원

- 열애 일기 1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너는 발 빠른 분침으로

나는 발 느린 시침으로

한 시간마다 뜨겁게 만나자

순간을 사랑하는 숨결로 영원을 직조해내는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먼지알 같은 들꽃들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우리 그리고

한 천년의 강물이 흘러간 뒤에

열두 점 머리 한가운데서

너와 나 얼싸안고 숨을 멈추어버린

그 시계

다음 생에는 우리 이 세상 한복판에서 너의

영원을 함께 부둥켜안은 미이라가 되자

박새들의 아프고 슬픈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 이별 - 한승원

- 촛불 연가 53

 

그 겨울 영하의 맵고 찬바람이 휘도는 항구의 한 모퉁이에서 우리는

서둘러 부두 머리를 떠나는 검은 구름장들처럼

아직 덜 연소된 사랑 한 점씩을

애초에 그 항구에 들어서면서 지고 온 배낭 속에

간밤에 먹다가 남은 사과 한 개와 초콜릿 한두 알과 귤 몇 개와 함께

넣어 짊어지고 떠나가면서 말했다

헤어진다고 하지 말자

다시 만나기 위하여 간다고 말하자

세상은 하나의 드넓은 구덩이 아니던가 그 안에서는

헤어짐은 없고 헤어짐이 있는 듯이 보일 뿐

사실은

가는 것은 없고 오는 것만 있다

가는 것은 가는 것처럼 보일 뿐

우리들 주변에서 늘 머물러 맴을 돌고 있다가

우리들의 연꽃바다 한가운데서 다시 어우러질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아 슬퍼하지 말자

떠남이 떠남 아니고 머무름이 머무름 아닐 때

떠남이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떠남 아니던가.

 

 

* 저녁 강 - 하재봉

 

우리 죽어 한 천만 년쯤 뒤에나

다시 말못하는 짐승으로 태어나 사랑한다

말할 수 있다면, 아니

죄없는 바람의 때조차 묻지 않은

우리들만의 뜻으로 그렇게

눈짓할 수 있다면

 

늘 연한 새김질하는 소처럼

나도 다시 그 순간에 살아

한 목숨

눈감고 돌아앉은 산이여

천한 피 물려받은

벌레같은 목숨처럼

 

이 한 몸 눕힐 만큼

빈 자리 마련해 놓고 바람은

왜 아직 갈대속에서 우글거리고 있나

온갖 시름 품에 안고 저 혼자 미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타오르는 눈물 감추고

누구를 만나겠다는 것인지 저녁 강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 그날

나와 함께 살을 적셨던 부끄러운

노을의 첫 순결도

고개 비뚤며 딴전 피우는 갈대밭

소금기 적은 바람도 이제는

만나볼 수 없네 붉은 저녁의 강

 

 

* 겨울강 - 하재봉

 

해가 진 뒤 그대는

바람의 손을 잡고 안개 속으로 말달려가고

나무 그늘 아래 빈 몸으로 앉아 있는 내 귓가에선

무수히 작은 눈물로 부서지는 강물소리

겨울 강물소리

 

저물녘엔 강안의 갈대숲마저 깊숙이 가라앉히는

바라보면 즈믄 달이 알알이 맺혀 있는 것을

강이 처음 시작한다는 설산의 상류에서

내 천상의 도끼날로 모질게 마음 가다듬고

붉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물어 던지우니

 

허리에 구름 두르고 삼림 속으로

걸어들어가 석달열흘 가부좌틀고 기다려도

도무지 잠들지 않던 그대의 산에서

그대의 강으로 채 피다만 눈꽃 같은

내 사랑이 흘러간다

 

맑은 살결 부비며 아프게

산 밑둥이를 적시기도 하는, 지난 가을

그대 손끝에서 영글던 즈믄 달도 데불고

세상의 눈물 위를 지나 보이지 않는 꿈 곁도 지나

어디서 다다를지 흐르는 어둠 위에

나는 또 무엇을 버려야 하나

 

오늘도 그대는 안개 덮인 강 저편에 나가 있고

나는 발목에 피먹은 이슬 적시며

갈대숲 걸어걸어 이렇게

눈 먼 강물 앞에 다시 섰다

 

 

* 우우, 널 버리고 싶어 - 최승자

 

식은 사랑 한 짐 부려놓고

그는 세상 꿈을 폭파하기 위해

나를 잠가 놓고 떠났다.

나는 도로 닫혀있다.

 

비인 집에서 나는

정신이 아프고

인생이 아프다.

배고픈 저녁마다

아픈 정신은

문간에 나가 앉아,

세상 꿈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기다림을 벗고 싶어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어

따뜻한 무덤을 마련하고 싶어

 

천천히 취해 가는 술을 마시다

천천히 깨어 가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보면 내 얼굴이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

 

 

* 돌아와 이제 - 최승자

 

새들은 항상 낮게 낮게 가라앉고

산발한 그리움은 밖에서,

밖에서만 날 부르고

 

쉬임 없는 파문과 파문 사이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춤추었다.

 

이젠 너를 떠나야 하리.

 

어화 어화 우리 슬픔

여기까지 노저어 왔었나.

 

내 너를 큰물 가운데 두고

이제 차마 떠나야 하리.

 

오래 전에 내 눈 속 깊이 가라앉았던 별,

다시 떠오르는 별.

오래 갈구해온 나의 땅에

다시 피가 돌고

돌아와 이제 내 울타리를 고치느니,

 

허술함이여 허술함이여

버려진 잡초들이

이미 내 키를 넘었구나

 

 

* 기억하는가 -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 언젠가 다시 한번 - 최승자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잔

끝없는 나날

죽음 앞에서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끝없는 그 삶의 무도를

다만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너를 피해

 

언젠가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천양희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건너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그땐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 허기 - 천양희

 

너와 둘이 있을 때 외롭지 않으려고

나는 너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았다.

갈 데 없는 마음이 오늘은 혼자 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외로움이 더 덤빈다.

그래서 밥을 많이 먹어본다. 밥을 먹고 돌아서도

허기가 진다. 허기가 지면 나는 우울에 빠진다.

어느 땐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

 

 

* 화석 - 천양희

 

내 가슴에 네가 피어날 때

아이 웃음 같은 앵초꽃 핀다.

내 눈에 네 눈동자 박힐 때

함박 웃음 같은 갈대꽃 핀다.

꽃 꺽어들 듯 널 꺽어들고

만년설 속에 앉아 있으면

난 천 년 묵은 화석 되리.

 

 

 

*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千佛山

품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 지독한 사랑 - 채호기

 

기차의 육중한 몸체가 순식간에 그대 몸을 덮쳐 누르듯

레일처럼 길게 드러눕는 내 몸

 

바퀴와 레일이 부딪쳐 피워내는 불꽃같이

내 몸과 그대의 몸이

부딪치며 일으키는 짧은 불꽃

 

그대 몸의 캄캄한 동굴에 꽂히는 기차처럼

시퍼런 칼끝이 죽음을 관통하는

이 지독한 사랑

 

내 자궁속에 그대 주검을 묻듯

그대 자궁 속에 내 주검을 묻네

 

* 연가 - 정일근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하루 스물 네 시간을,일년 삼백예순닷세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방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 , 경주 남산 - 정일근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연리지(蓮理枝) - 정끝별

 

 

너를 따라 묻히고 싶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열 길 땅속에 들 한 길 사람 속에 들어

너를 따라 들어

외롭던 꼬리뼈와 어깨뼈에서

흰 꽃가루가 피어날 즈음이면

말갛게 일어나 너를 위해

한 아궁이를 지펴 밥 냄새를 피우고

그믈은 달빛 한 동이에 삼베옷을 빨고

한 종지 치자 향으로 몸단장을 하고

살을 벗은 네 왼팔뼈를 베개 삼아

아직 따뜻한 네 그림자를 이불 삼아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오래된 잠을 자고 싶어

남아도는 네 슬픔과 내 슬픔이

한 그루 된

연리지 첫 움으로 피어날 때까지

그렇게 한없이 누워

 

 

* 내 품에, 그대 눈물을 - 이정록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 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 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 그리운 그대 - 이승희

 

내게 걸어올 때 그대 몸에선 오래된 목조 계단을 지날 때처럼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상처가 그대 발목에 걸려 있기 때문일까? 그런 날이면 난 그 삐걱임 속 어디쯤으로 내 몸을 뉘여야 하는지 몰라 밤새 앓았다.

한 귀퉁이가 이미 오래전에 떨어진 듯한 그대의 잠은 잔 물살에도 자주 뒤척였고, 그렇게 조금씩 비어 있는 곳을 만지고 싶었는데 내가 잠들 때쯤이면 그대는 깊은 목관 악기로 울곤 했었다.

비가 내리고 내가 그대 몸을 안았을 때도 그랬다. 나무 바닥, 오래될수록 더 따뜻한 온기를 담아내는 그런 나무 냄새가 났었다. 그대는 언제 살아서 시퍼런 잎사귀 흔들며 펄럭였던가, 울컥이며 그대의 생애 일부가 내 입속으로 오래 흘러왔다. 그렇게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 아주 커다랗고 오랜 목조가옥 같았다.

 

 

* 그리운 그대·2 - 이승희

 

낮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밤이면 먼 별빛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적이 있다 정신없이 걷다 뒤돌아 보니 지나온 길이 없을 때, 난 어디를 걷고 있었던 것일까. 살다 보면 길 없는 길에 서 있기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미 그때는 오도 가도 못하는 삶이 있을 뿐이고 누가 말한다. 움직이지 마 너는 지금 움직이면 깨지고 말 얼음판에 서 있어.

봄밤은 왜 그리 달큰한 냄새로 다가오는지, 그리움은 순식간에 참혹한 것이 되어 먼지처럼 자욱하고, 본드 냄새를 풍기며 눕는 시간 위로도 별들은 뜨는구나, 누가 그 별들에 선을 그어 가슴 아픈 기억을 만드는가, 내게는 언제나 한겨울을 살아낸 무겁고 낡은 외투 한 벌이 걸려 있을 뿐인데.

아름다운 것들도 버려야 할 때가 있듯이 서러운 것들, 아픈 것들도 버려야 할 때가 있을 것임을, 다만 그것이 버려지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삼천 년 지난 후에 석탄이 되는 나무들처럼 제 안에 아름다운 불씨를 깃들여 가기를 내 눈물 섞어.

 

 

* 그리운 그대·3 - 이승희

 

한낮의 봄 햇살은 참혹했습니다. 그 거리에 서서 나는 주머니 속의 성냥갑을 만지작거립니다. 다시 불 켤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다시는 집짓지 않으리라 그냥 둥둥 떠서 한세상 살아가리니, 서러운 것들은 가라고 연필심에 침 발라 쓰듯 가슴에 꾹꾹 눌러 썼습니다.

 

그대는 낙타였는가, 왜 난 여기 사막의 한복판에 서 있는지, 그러나 내가 기꺼이 맨발로 이 사막을 받아들이고 걸어가고자 하는 것은 끝내 통속적이게 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 거짓말입니다, 누가 있어 내게 다 그런 거라고 사랑도 그런 거고, 삶 또한 늘 그렇게 너를 속이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어서 적당히 쓰러지라고, 그래서 조금만 울고 일어나라고, 정말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지나는 길에 나무에 흰 페인트칠 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곧 베어질 나무들입니다. 나는 가만히 내 종아리를 내려다봅니다.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게도 그런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 가을戀歌 - 이승철

 

사람은 때때로 울고 싶을 때가 있는가 보오

이 가을에 푸르른 하늘은

엉망진창으로 출렁여 차마 견딜 수 없고,

해 다 저문 강변 따라

하이얀 갈대숲들 우거져 그대 얼굴처럼 흔들리는데

들리느냐 내 사랑아

험하고 답답한 세월에 살아도 어찌 내 그대를

잊었으랴

잊었으랴, 그대를

우린 달빛 젖은 들길 보듬고 넘어졌지 않느냐

키 큰 미루나무 손짓해쌓는 이 시월달에

그대 입김에 서린 꽃숭어릴 품으며 꽂으며

그대 없이 찢긴 세월 구겨진 몸뚱이에

오직 넋이야 한가닥 살아

가네 가네 그대 떠난 길 찾아

천근 바윗더미 아래 깔린

숨막힌 가슴팍 화들짝 펼쳐 보이며,

저 큰 산을 못 넘으랴 저 깊은 바다 못 건너랴

이 가슴에 쌓인 눈물 죄다 닦고서

새벽 이슬 나리는 소리에 잠 깨어나

엄청 소중한 그대 이름 사무쳐 불러보네.

 

 

 

* 익는 술 - 이성부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차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놓고

너의 넉넉한 잠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어떤 하루 / 나호열

한낮은 고단하였다 가도가도 너른 풀밭은 보이지 않았고 멍에는 무거웠다

끝내 풀 수 없었던 밧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얽혀져 있었다 쇠방울을 울리

며 외양간으로 돌아오는 발굽 아래로

저녁은 부끄러웠다 진통제가 풀리는

밤이 깊을수록 피로와뒤섞인 꿈은

더욱더 병들어 갔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더 많은 꿈들이 필요하였고 더 많은 현실이 차용 되었

다 마지막에 꾼 꿈은 푸른 하늘 비스듬

히 내려앉은 언덕에 기대앉은 나의 모

습 누군가 액자에 그 풍경을 담아 갔는

데 아직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아직도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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