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님 보세요/김혜순
지나간다/ 천양희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삶을 껴안으며 루 살로메
볼가강 - 루 살로메
달 /김용택
그대 / 최수경
노을 / 차성기
사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 최라라
날씨님 보세요/김혜순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달이 당신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한다.
당신인 척하는 달과 나인 척하는 나무가 살랑살랑 대화를 나누는 달밤.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빗줄기가 당신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한다.
당신인 척하는 비와 나인 척하는 우산이 주루주룩 대화를 나누는 달밤.
눈물이라는 거울을 눈동자 위에다 내뿜으며 나는 재빠르게 중얼거린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100번 반복한다 우리가 살다간 집이 한번도 공기를 바꾸지 않고 문닫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거기서 살았던 걸까, 그집 무너지면 우리는 어디에 남을까.
바람인 척하는 귀신과 구멍인 척하는 귀신들이 흐느낀다.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는 날씨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올린다.
당신한테서 전화가 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빈집이 당신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한다.
당신인 척하는 빈집과 나인 척하는 먼지가 사그락사그락 대화를 나누는 새벽.
지나간다/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 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이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삶을 껴안으며 루 살로메
그대가 나를 사랑하듯이
나 진실로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삶이여, 의문투성이 삶이여
그대가 나를 환희에,
혹은 슬픔에 떨게 하건
행복과 고통을 가져다주건
상관없이 사랑하겠습니다.
그대의 모든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끝내
나를 파멸로 몰아야 한다면
아프게 나는 그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붙잡은 손을 놓듯이
살며시 빠져 나올 것입니다.
삶이여!
지금 있는 힘을 다해
그대를 안습니다.
그대의 불꽃으로
나를 태워 주십시오.
투쟁의 불길 속에서
그대 아득한 본질의
수수께끼를 풀게 해 주십시오.
수천 년에 걸친 존재와 사고를
그대의 두 팔 안에 간직하게 해 주십시오.
설사 그대가 더 이상 내게 줄
행복을 가지지 않았어도
그래도 좋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내게 줄 고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볼가강 - 루 살로메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난 너를 볼 수 있다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넌 내게 머물러 있다
표백될 수 없는 현재처럼. 나의 풍경처럼. 내 생명을 감싸고 있구나
네 기슭에서 내 한 번도 쉬지 않았더라도 네 광막함을 난 알 것만 같다
꿈결은 항상 네 거대한 고독에 날 상륙시킬 것만 같다
달 /김용택
어젯밤
나는
네 얼굴을 보려고
달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대 / 최수경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이유
알고 있을까 그대
내 마음안에 있다는 것을
그대여 이밤
내가 있으므로 하여
외롭지 마라
노을 / 차성기
자신을 그렇게도 불태워 살았구나
구름에 새어나가 많이도 아팠겠다
세상을 불 질러 놓고 붉은 함성 지른다.
난 네가 살아있어 바라보고 있구나
이제는 편히 쉴 때 되었는데 어떡하나
그렇게 붉은 눈동자 바라보고 있구나.
네 뒤에 서성이는 어둠이 널 끌면은
내 가슴 사랑으로 꽃 한 송이 피워 볼 게
황홀한 아름다움이 물들일 수 있도록.
사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 최라라
벗어놓은 구두를 오래 들여다보는 날이 있다
그것이 처음 왔던 순간을 생각해 보는 날이 있다
어쩌다 받은 상처를
소리 나게 못질해 주었으면
잘라 내거나 꿰매 주었으면
가지런한 구두를 신으면 다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날
아무리 광을 내고 굽을 갈아도
돌아갈 수 없는 구두의 뒤축이여,
구두를 닦아 햇볕 아래 놓으면
잠깐 처음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현관을 나서다 말고 구두 한 번 닦아보는 일은
착각을 불러보는 일
거기 있는가 처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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