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예술원 풍경 -송경동
블라디보스토크/신준영
처서(處暑) /박명숙
돌에 입 닦고 잠드는 뱀처럼/장옥관
한 호흡/ 문태준
묶음/문태준
정작 그는/천양희
남 생각을 했다/박은숙
사실은/이영광
시골 창녀/ 김이듬
길-김기림
미수未遂/정진규
산수유국에 들다/ 문성해
나이를 먹으면/도로시 파커
덜 빚어진 항아리/ 김행숙
내눈을 감기세요 / 김이듬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유홍준
능소화는 또 피어서/ 김은령
폭우반점暴雨飯店 / 조우연
빗방울에 대하여/나희덕
月經 김선태
짝짓기의 바벨탑 김상미
매미허물 같은, 이영춘
양변기 위에서 김선우
숭고한 밥상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김선우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박정대
― 프렌치 얼 그레이 백작에게
될 대로 된다는 것- 김제김영
상처와 사막에 관한 에테르 강다솜
책도둑 다락방에서 만난 유령의 자서전 김길녀[1964 ~ 2021]
내 어린 당산나무에는- 이문희
초대 김경인
대한민국예술원 풍경 -송경동
얼마 전 ‘대한민국 예술상’을 받아보라고 연락이 왔다
대통령상이라 했다 영장이라면 모를까
김진숙이나 복직시키지 비정규직 양산법이나 없애지
개성공단 열고 남북열차나 잇지
몇 년 전 약속했던 예술인권리보장법이나 통과시키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안 받겠다고 했다
상금도 있다 했지만 싫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 살아온 걸까
매번 대통령 선거 때마다
주요 캠프에서 웬 벤또도 아니고 멘토나
무슨 위원이 돼 달라고 한다
그때마다 싫다고 했다
전엔 친일부역하고 5·18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각하께 바치는 시를 썼던
미당 서정주 문학상을 받아보라는 연락이 왔었다
받지 않을 까닭을 조목조목 말해주던
그땐 그래도 세상에 대한 자상함이 남았던가 보다
그런데 어떤 교수 출신 저명한 예술가들께서는
기존 연금에 더해 한 달에 꼬박꼬박 180만원씩을 받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고 싶어 줄을 서고
자신들끼리 모여 몇 년짜리 한시적인 명예를
‘종신제’로 바꾸는 정관 개정도 했다는데
몇 년 전 작고한 서른두 살 청년작가 최고은은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있을까요
번번이 죄송합니다. …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 드릴 수 있게 하겠’다는 쪽지를 남겼었지
그나마 나는 선방했다는 위안이나 긍지보다
기껏 저항이라는 게 이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소극적 반항밖에 없는 것인지
자꾸 뭘 받아보라는 건
이젠 내가 티끌만큼도 불온해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
놓쳐버린 웬 상다리나 상금보다
그게 그렇게 분하고 서글플 뿐이다
4·19혁명 후 김수영을 빌려 얘기하자면
시중의 부동산값 금값만 천정부지로 뛰고
계란값마저 한 판에 만 원이라는데
기성 육법전서를 넘어 구 자유당처럼 불법을 감행해도 모자랄 혁명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은
그놈들의 사진을 다시 떼어 밑씻개로나 쓸까
이런 옹졸한 내게 상까지 주시겠다는
높으신 가카야 고매하신 선생님들아
나는 여전히 얼마나 작으냐
모래알처럼 티끌처럼 나는 얼마나 작으냐
블라디보스토크/신준영
우수리스크 호텔 방에서 가위에 눌렸다 거울이 없는 좁은 객실엔 낡은 싱글 침대가 둘, 침대에 눕자 튀어 올라 온 스프링이 물밖으로 던져진 물고기가 되어 필사적으로 파닥였다 안내인은 배수 시설이 없는 욕실바닥에 관하여 몇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나는 밤새 물속에 잠긴 신발이 되어 언제 이 물을 다 걸어서 어항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나 생각했다
아이러니야 부동항 앞에서 얼어붙다니
저 바다는 배수시설이 없어
채우기만 하고 쏟아 낼 데가 없는
삶 같은 거
강제 이주가 시작되었던 라즈톨리노예역 앞 벤치에 앉아 맨발을 주무르던 걸인과 눈이 마주쳤다 너희들이 온 곳을 알고 있다 갈곳도 안다는 듯 동요가 없는 눈, 팔십 년 전에도 저 자리에서 우리를 주시하던 바로 그 눈이다 그때 나는 푸른 비늘을 가진 소년이었다 울컥함이 오려 할 때 비린 바람 냄새를 먼저 보내오듯 소금기를 앞세운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여기서부터 40일을 짐승인 채로 화물차에 실려가야 된다 살아서 혹은 죽어서 알수 없는 곳에서 하역되리라
해빙기의 얼음 속 박제된 전생을 보다니
그런데 이상하지
저 바다는 채우기만 하는데
넘친 적도 없다는 거
2020 <실천문학> 신인상
처서(處暑) /박명숙
귀뚜라미가 돌아왔다
못갖춘마디로 운다
허물 벗은 첫 소절이 물먹은 어둠을 파고든다
낯 익은 울음을 만날 때도
모노드라마로 운다
가슴에 목젖을 묻고
초사흘 달처럼 운다
덜 여문 곡절들이 풀씨보다 쌉싸름하다
가다가 낯선 울음 채이면
귀청을 딸각, 끄기도 한다
돌에 입 닦고 잠드는 뱀처럼/장옥관
뱀은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몇 번이나 허물을 벗는다고 해
벗은 허물 머리 부분은 꼭 제가 먹는다지 옛사람들
그 허물 머리 부분을 거둬 쌀뒤주 아래 두려 했다는 거야
허물 다 벗은 뱀은 돌에 입을 닦는데,
입 닦은 돌에 입을 대면 동지섯달 겨우내 밥 먹지 않아도 배고
픈 줄 모른다는 거야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은 정녕 모를 거라, 그게 엄마나 끔찍한
일인지 몸은 염치가 없어
뱀이 입 닦은 돌 구하려는 건
다석 선생*처럼 밥 안 먹고도 살 방도 찾자는 게 아니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거야 왜 그런광고 있었잖아 새해 첫 날에 귀
엽고 어여쁜 탤런트가 손나발 대고' 부자 되세요오오' 소리치던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더라
부자가 얼마나 좋기에 그 드물다는 뱀 허물이나 입 닦은 돌 구
하려는 걸까 뱀이 되고 싶다 그거잖아 뱀이되어
늘 축축한 구멍이나 파고 싶다는 거잖아
하지만 뱀이 돌에 입을 닦는 건
염치없는 입 달래기 위해서가 아닐까 제 머리 허물 먹는 건 잡
념 잡풀 속 쓰레기더미 누가 볼까봐 얼른 먹어치우는 것일테고
그게 염치를 아는 거지 그래, 나는 뱀이 되고 싶어, 이슬에 몸
씻고 돌에 입 닦는 뱀
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을 한번 더 울려
꽃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 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 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갑자를 돌아 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묶음/문태준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골짜기의 귀에 두어마디 소곤거리는 봄비를 묶었다
난과 그 옆에 난 새 촉의 시간을 함께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어 묶을 한단
정작 그는/천양희
죽음만이 자유의지라고 말한 쇼펜하우어
정작 그는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렸고요
자녀 교육서의 지침서인 <에밀>을 쓴 루소
정작 그는
다섯자식을 고아원에 맡겼다네요
백지의 공포란 말로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고백한 말라르메
정작 그는
다른 시인보다 평생을 고통없이 살았고요
<행복론>을 써서 여덟가지 행복을 말한 괴테
정작 그는
일생동안 열 일곱 시간밖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네요
정작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변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확하다는 것을요
정작 그는 또 알고 있었을까요
위대한 사상은 비둘기 같은 걸음걸이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을요.
남 생각을 했다/박은숙
오늘은 두어 명의 남 생각과
또 두어 명의 나를 생각했다.
거울이 늘어나면 결국,
반사되는 얼굴들은 조각이 되겠지
생각과 오래 대화하는 일이
조각난 거울 속을 한데 모아
와장창 깨지는 일과 닮았을까
문득, 또는 불현 듯 같은 순간들이
깨진 사금파리 같이 눈을 찌를 때
두어 명의 남 생각과
내 생각에 찡그린 정각이 찾아온다.
때로는 늦은 일이 빠르기도하고
더딘 것이 오히려 나을 때도 있지만
정각이 울렸다는 것은 이미
늦었거나 지나쳤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두어 명의 남이거나
두어 명의 나의 일에 불꽃이 튀었다는 것이다
남의 일이 곧 나의 일
남처럼 두근거리는 일도 없다
내가 오늘 기쁘다면
그건 두어 명의 남이 해결된 일이다
남은 언제나 나보다 크고 넓다.
그들이 나보다, 가 아닌
내가 그들을 더 미워한 일이 많다
어쩌면 남 생각에 너무 불려 다녔는지
오늘은 유독 피곤하다
사실은/이영광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다는 것
쓸쓸한 척을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책을 읽고 있지만 사실은 열중하지도
않는다는 것
술집으로 옮겨 낮술을 마셔보지만
환자가 오만상 쓰며 약을 먹듯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
글을 쓴다지만 사실은 꼭 할 말이
있지도 않다는 것,
사실은 꼭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
하루종일 섹스생각 돈 생각만 나기도
한다는 것
글쟁이도 선생도 아니라는 것
무언지 몰라 잠시 이것들이라는 것
가장 확실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실은,
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라는 것
거의 살아 있다는 것
물속에서 오줌을 누듯
빗속에서 눈물을 훔치듯
희망이란 좀체 입 밖에 내질 않는데도
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하고
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 한다
시골 창녀/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가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 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친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 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줄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 너 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지방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춘다
- 2014.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수상
길-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젓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미수未遂/정진규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굴과 칡순들과 한
그루 木百日紅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없었다
들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미수未遂에 그쳤다
산수유국에 들다/ 문성해
그 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꽃 이름을 앞 세운 국가들이 나뭇가지마다 열린다네
단 하나의 시조설화도 없이
산수유국 목련국 진달래국 매화국이
가난한 가지마다 봉긋봉긋 솟아 오른다네
향기가 없으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나라
향기로운 코 하나로 누구나 백성이 되는 나라
스스로 치장하고 목청 높여 백성들을 부르는 나라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아름답고 곡진한 국가는 없을 터
그 곳 서방정토의 삼월에는
백성을 호객하며 핵폭발로 태어나는 국가들이 있다네
거창한 국민헌장도 영토도 없는 나라
일체의 세금도 의무도 지우지 않는 나라
알 수 없는 곳에서 아기가 오듯 흥성스러운 날에
코에 담뿍 꽃분을 묻힌 백성들의 붕붕거리리는 한 때*가 지나면
알 수 없는 곳으로 늙은이가 져 내리듯
캄캄하게 져 버리는 나라들이 있다네
그건 한 순간의 일이라서
단 한명의 열혈백성도 따라갈 수 없다네
나이를 먹으면/도로시 파커
내가 젊고 담대하고 강했을 때는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것은 잘못 된 것이었다
나는 깃털 장식 세우고 깃발 날리며
세상을 바로 잡으러 달려 나갔다
' 나와라, 개새끼들아, 싸우자!'고 소리쳤다
한번 죽지 두번 죽느냐고 하면서 분해 울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들었다. 선과 악이
종 잡을수 없이 얽혀 있어
앉아서 나는 말한다. ' 세상이란 원래 그래
그냥 흘러 가는 대로 두는게 현명해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거야
이기고 지는게 별 차이가 없단다, 얘야'
무력증이 진행되어 나를 갉아 먹는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철학이라 부르는 것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1893년-1967. 74세).
평생의 대부분을 호텔에서 거주하며 글을 쓰다가 결국 호텔에서 생을 마감
도로시 파커는 신랄한 독설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 비평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불우한 생애를 보낸 탓에 도로시 파커하면 알콜중독, 섹스, 우울증, 자살시도 등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생을 살다가 뉴욕의 호텔방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도로시 파커의 불우한 인생은 그의 직설적인 논평과 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주로 호텔에 투숙하며 글을 쓰기로 유명했는데, 뉴욕의 알곤퀸(Algonquin)호텔에는 '도로시 파커 스위트룸'이 있다.
파커는 더 뉴요커 등의 매체에 문학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을 설립 멤버 중 한명이 되었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Algonquin Round Table)은 1920년대 당시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인 '바이셔스 서클 '(Vicious circle)이 주도한 비공식적 작가모임이다.
파커는 1920년대 당시 알곤퀸 호텔에서 묵으면서,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창립멤버로 1919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했다. 도로시 파커 외에도 뉴요커 잡지 창립자인 헤롤드 로스(Harold Ross), 영화배우 로버트 벤츨리(Robert Benchley), 하포 마스(Harpo Marx), 극작가 조지 S.코프만(George S Kaufman) 소설가 에드나 페버(Edna Ferber)등이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로 있었다.
존 F.케네디의 어린 시절 소원 중 하나가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가 되는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당시로서는 주류적인 모임이었다
멤버들은 뉴욕의 알곤퀸 호텔의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시사와 문학에 대해 토론했다. 알곤퀸 호텔의 라운드 테이블에서 많은 책과 영화가 탄생했으며 주간잡지 '뉴요커'(Newyorker)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뉴요커의 본사는 지금도 알곤퀸 호텔 맞은편에 위치해있다. 파커도 뉴요커에 논평을 여러편 실었다.
1922년 파커는 '그런 작은 그림처럼(Such a Pretty Little Picture)' 이라는 제목의 첫 단편을 발표했다.
1925년에 발표한 첫번째 시집 '이너프 로프'(Enough Rope)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29년엔 자신의 자서전인 단편소설 '빅 블론드'(Big Blonde)로 오 헨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이 해체된 후 할리우드에 입성하고 영화 각본 집필을 추구하였으며 아카데미상 후보가 된 작품 2편을 포함하여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은 좌익 정치에 관여했다고 하여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도로시 파커는 보그(Vogue)와 베니티페어(Vanity Farir)에서 드라마 등의 논평을 쓰며 평론가로 첫 일을 첫 시작했으나 신랄한 독설로 베니티 페어에서 해고된 이후 라이프 지(Life)로 자리를 옮겼다.
파커의 이야기에는 가족, 인종, 전쟁 및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묻어나며 소외계층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미국 내 흑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파커는 글을 쓰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는 천상 '글쟁이' 였던 모양이다.
그는 1930년대 할리우드로 옮겨 1937년 영화 시나리오인 스타탄생(A star is born)을 써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파커는 정치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를 휩쓴 반공주의에 대항한 좌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두 번째 이혼을 맞은 파커는 다시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호텔에서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1967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진채 발견됐다.
파커는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고 알려진다./ 시인 박영미
덜 빚어진 항아리/ 김행숙
나는 너를 항아리 만드는 사람으로 키운 줄 알았더니, 너는 항아리 깨뜨리는 사람이 되었구나. 항아리를 빚는다는 것은 안과 밖을 만드는 일이다. 밖이 있어야 안이 생긴다. 안이 있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나의 항아리는 밖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안으로 비밀을 보존한다. 이대로 영원히 멈췄으면, 기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나의 항아리의 형식을 결정한다.
항아리는 혼돈입니다. 안인 줄 알았더니 밖에 버려져 있더군요. 그래서 밖이구나, 했는데 안에 갇혔더란 말입니다. 잘 빚어진 항아리*나 덜 빚어진 항아리나 깨지기 쉬운 건 똑같고, 깨지면 환상이 깨지듯 항아리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요. 항아리를 만들어야 항아리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태어나야 죽을 수 있습니다. 가마에 불을 지피며 죽음을, 다가오는 죽음을 뜨겁게 묵상합니다. 선생님은 죽음의 불꽃 속에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나의 항아리를 깨뜨리려고 너를 키웠구나. 너는 도끼를 들고 글을 쓰는 거냐? 손목은 도끼를 들어 올리려 하는데 도끼가 손목을 부러뜨리는구나. 어리석은 자여,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면 무기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말하라, 내가 누구냐? 내가 누군 줄 알아야 네가 누군지 알지 않겠느냐.
선생님이 항아리를 만들면 나는 항아리를 깨겠습니다. 어떤 항아리에서는 술이 익어가고, 어떤 항아리에서는 시체가 썩어갑니다. 어떤 항아리에서는 뱀이 기어 나오고, 어떤 항아리 속에는 총 한 자루가 끈적이는 침묵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항아리에 손을 넣는 것이 두렵습니다. 항아리에서 손을 빼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선생님의 손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생님은 선생님의 말을 이해 못하고, 나는 나의 말을 이해 못합니다. 어느덧 누가 누구의 말을 하는지, 누가 밖에 있고, 누가 안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는 한 개의 항아리도 완성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한번만 더 묻자. 너는 누구냐? 네가 누군 줄 안다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내눈을 감기세요 / 김이듬
구청창작교실이다. 위층은 에어로빅 교실, 뛰고 구르며 춤추는 사람들, 지붕 없는 방에서 눈보라를 맞는다 해도 거꾸로 든 가방을 바로 놓아도 역전은 없겠다. 나는 선생이 앉는 의자에 앉는다.
과제검사를 하겠어요. 한 명씩 자신이 쓴 시 세편을 들고 와 내 책상 맞은편에 앉는다. 수강생과 나는 머리를 맞댄다. 어깨를 감싸는 안개가 있고 나는 연달아 사슴을 쫒아가며 총을 쏘는 기분이다. 전쟁을 겪은 후 나는 총을 쏘지 못하게 되었다
이건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하잖아요. 이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노인이 내민 시에 칼질을 한다. 깎고 깎여서 뼈대만 남은 조각상처럼 노인은 앉아 있다. 패잔병의 앙상한 뺨을 타고 곧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분노로 불신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아니다. 선생님, 방금 그 작품은 내가 쓴게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시를 쓸 수가 없어 유명한 시인의 수상작품을 필사해 봤어요
내 머리는 떨어진다. 책상 위에는 첨삭하느라 엉망이 된 유명시인의 작품이 있다. 그것은 마치 왜 비싼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품브랜드 가방 같다. 노인이 나를 보며 웃지 않으려 애쓴다.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 이름을 가리면 못 알아보는 내 식견으로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덤빈 걸까?
- 히스테리아 2014. 문지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유홍준
벤자민과 소철과 관음죽
송사리와 금붕어와 올챙이와 개미와 방아깨비와 잠자리
장미와 안개꽃과 튤립과 국화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죽음에 관한 관찰일기를 쓰며
죽음을 신기해 하는 아이는 꼬박꼬박 키가 자랐고
죽음의 처참함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아내는 화장술이 늘어가는 삼십대가 되었다
바람도 태양도 푸른 박테리아도
희망도 절망도 욕망도 끈질긴 유혹도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별일없냐
별일 없어요
행복이란 이런것
죽음 곁에서
능청스러운 것
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 들이는 것
어머니도 예수님도
귀머거리 시인도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喪家에 모인 구두들> 2004. 실천문학사
능소화는 또 피어서/ 김은령
저것 봐라
화냥화냥 색을 흘리며
슬쩍 담 타넘는 품새라니
눌러 죽인 전생의 내 본색이
살아서 예까지 또 왔다
능소凌宵
능소凌宵,
아무리 우겨보아도
결국
담장 아래로 헛헛이 지고 말
운명이면서
다시 염천을 겁탈하는 꽃
눈멀어 낭자히 통곡하는
누대의 습생
폭우반점暴雨飯店 / 조우연
주문한 비 한 대접이 문 밖에 도착
식기 전에 먹어야 제 맛
수직의 수타 면발
자작 고인 국물
허기진 가슴을 채우기에 이만한 요긴 다시 없을 듯
빗발
끊임없이 쏟아져 뜨거움으로 고이는 이 한끼
단언컨대,
죽지 말라고 비가 퍼 붓는다
자, 대들어라
피골이 상접한 갈비뼈 두 가락을 빼들고!
빗방울에 대하여/나희덕
1
빗방울이 구름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디언 마을에 가서 알았다
빗방울이 풀포기를 타고 땅에
스며들어
죽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2
인디언의 무덤은
동물이나 새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멀리서도 빗방울이 길을 찾아올 수
있도록
3
새형상의 무덤은 흙에서 날고
사슴형상의 무덤은 아직 풀을 뜯고
있다
이 비에 풀이 다시 돋아날 것이다
4
나무들은 빗방울에게 냄새로
이야기한다
숲은 향기로 소란스럽고
오래된 나무들은 빗방울의 기억을
털고 있다
5
쓰러진 나무들은 비로소 쓰러진
나무들이다
오랜 직립의 삶으로 부터 벗어 난
나무들의 맨발을 빗방울이 천천히
씻기고 있다
6
빗방울은 구름의 기억을 버리고 이
숲에 왔다
그러나 누운 뼈를 적시고
다시 구름과 천둥의 시절로 돌아 갈
것이다
7
구름이 강물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디언 마을에 와서 알았다
죽은 영혼을 어루만진 강물이
햇빛을 따라 날아오르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月經 김선태
보름달이 무슨 놋세숫대야만큼이나 누렇고 크다랗게 사립을 엿보는 밤이면 마을처녀들은 밤새 들판을 쏘다녔다 그때마다 그네들은 어김없이 월경을 하거나 원인 모를 임신을 했다 달의 경전을 읽었는지 암고양이며 밤 짐승들도 징상스럽게는 울어댔다 멀리 방조제 너머 바닷물도 그렁그렁 차올랐다 냇갈에서 목욕하는 아낙들의 희고 둥근 엉덩이가 보름달을 닮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번은 보름달을 거울삼아 둠벙 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홀연 사라진 일이 있었다 물에 비치는 달빛에 홀려 몽유병 환자처럼 둠벙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긴 간짓대로 휘저으면 머리 푼 처녀가 수면 위로 불쑥 떠올랐다 마을사람들은 물귀신의 짓이라고 수군댈 뿐 아무도 달빛을 탓하지 않았다 그날 밤은 둥글고 환한 웃음소리가 온 우주에 가득했다
짝짓기의 바벨탑 김상미
짝짓기는 외로운 사냥개, 표적이 잡히면 엄청난 즐거움에 울고 웃는 탐색전,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넋 잃고 빠져드는 함정 속의 함정, 연속 다발적으로 벌어디는 실수 속의 실수, 다시 한 번, 또, 또… 속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기다림, 혼자서 치르는 한탄의 손가락꼽기, 슬프고도 슬픈 집중, 딱 한 번 걸린 절호의 찬스 같지만 환영인사인 동시에 작별인사, 한순간의 유혹과 멋진 감동으로 끝나는, 다시는 미래를 향해 안타를 날릴 수 없는 도박, 옷이 홀딱 벗겨진 환희의 무덤, 모든 예술의 끝과 시작처럼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파라다이스, 속과 겉이 다른 자살미수, 행갈이가 전혀 필요 없는 죽음, 천천히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퍼즐게임, 모든 아담과 이브가 착각 속에 쓴 철없는 면사포, 神이 인간을 향해 만든 병기 중 가장 성공한 병기, 아무도 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에로스의 화살, 너뿐이야, 내겐 오로지 너뿐이야, 끝없이 펼쳐지는 황홀한 꽃밭 같지만 순식간에 무성한 잡초로 우거지는, 쓰디쓴 환상, 평생 동안 어마어마한 헛된 호기심 속에 탕진한, 짝짓기의 바벨탑, 그 아래 뻥뻥 뚫린 맹목의 가슴을 부여안고도 새로운 짝짓기를 향해 손 내밀고 구걸하는 너와 나, 짝 잃은 사냥개들의 유원지, 유일하게 인간이 神의 기쁜 장난감이 되어 神의 손에 황망하게 놀아나는!
매미허물 같은, 이영춘
매일 그 자리에 누워 있는 매미
땅 속 깊이 잠들어 있는 매미,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눈 흐린 형광등과 고성을 지르는 TV속 정치인들의 정쟁과
볼모로 누워 있는 국민이라는 풀잎 같은 이름들과
무심하게 돌아가는 둔탁한 분침과 초침의 숨소리와
바가지 없는 바가지를 긁어대는 내외內外라는 이름들과
코로나 19라는 괴상한 짐승과
우후죽순 밀려나는 실업자 청년들과
골목마다 숨 멈춘 창문틀의 돌쩌귀와
아- 아- 꽉 막힌 세상, 꽉 막힌 땅 속 매미 껍질들,
나의 껍질은 어느 나무에 붙어서 울어야 하나?
날개 잃은 겨울 매미 어디로 날아가야 하나?
양변기 위에서 김선우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숭고한 밥상 김선우
밥 잡채 닭도리탕 고등어자반 미역국
이토록 많은 종족이 모여 이룬
생일상을 들다가 문득, 28년 전부터
어머니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시금치 닭 고등어처럼 이 별에 씨뿌려져
물과 공기와 흙으로 길러졌으니
배냇동기 아닌가,
내내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생각이
지금 먹고 있는 닭 한 마리
내 할아버지를 이루었던 원소가
누이뻘인 닭의 깊은 곳을 이루고
누이와 살을 섞은 내 핏속엔 지금…
누대에 걸친 근친상간의 밥상
비켜갈 수 없는,
무저갱의 밥상 위에
발가벗고 올라가 눕고 싶은 생각이
어머니가 나를 잡수실 수 있게 말이지요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김선우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의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지 너무나 오래 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 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 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박정대
― 프렌치 얼 그레이 백작에게
오늘은 날이 흐려 저녁이 너무 일찍 찾아 왔다
낡은 녹색의자에 기대어 앉아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다
창가의 산국화 바람에 흔들리는 저녁
말안장 위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오랜 동무가 써 보낸 글을 읽노라면 조금씩 어두워지다 다시 화안하게 밝아지는 저녁
그대는 잘 있는지
난 하루에 밥은 한끼
산책하고 글 쓰고 가끔 책을 읽기도 해
요즘은 해 질 녘도 좋고 동 틀 무렵도 좋더라
밤새 꼼지락거리다 맞이하는 아침의 햇살과 바람, 그런 게 밤과 낮을 이루는 소립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게 삶과 시의 본질적 성분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리적 고립이 형성하는 공간, 감정의 고독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의 사용, 그런 걸 나는 저항의 멜랑콜리라 부른다
공간이 만들어낸 무한의 고독이라 부른다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오는 아침의 맑은 공기와 풍경들이 나는 좋다
아침이 오면 숲 속으로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돋아나는 풀잎과 작은 돌멩이의 행성들
이런 걸 나는 아름다운 감정의 무한, 저항의 멜랑콜리라 부르고 싶어지는 거다
그럴 때면 저 멀리 두고 온 세상을 향해 이렇게 한 마디하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니, 세계여 닥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보내준 프렌치 얼 그레이 차를 한동안 뜯어보지도 않은 채 선반에 놓아두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먼지처럼 흩어지며 겨우 존재하는 세계여
한 마리의 추억이 구름처럼 이동하고 다시 허공에 봉인되는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서
옛 사랑 같은 건 옛날에나 있었고 옛날은 아직, 여전히, 오지 않은 날들이었나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내 옛 사랑으로 남으리라
선반에서 얼 그레이 차를 꺼내보는 저녁이다
찻잔 속에서 맑은 눈동자 하나 돋아나 얼 그레이 얼 그레이, 초저녁 별빛처럼 어른거리며 번지는데
늦은 저녁 속으로는 하염없이 비가 내려 세상의 모든 음악은 비에 젖고 있다
저녁연기처럼 피어올라 컹컹컹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순한 짐승의 울음소리여
세상의 모든 음악은 끝나고 세상의 모든 삶이 다시 시작되는 이 시각에도
누군가는 밤새 등불 곁에 앉아 책을 읽고
누군가는 밤새 리스본의 타호 강변을 서성거리고
누군가는 밤새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고요히 삶을 횡단하느니
뜨거웠다 식어가는 한 잔의 프렌치 얼 그레이 차를 마시며 아직 오지 않은 추억이 하염없이 창밖의 생을 바라보는 저녁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삶을 꿈꾸던 자가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는 낯선 저녁이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다
될 대로 된다는 것 김제김영
될 대로 되라는 말
참 무책임한 말 같지만
지구의 모든 실개천과 그보다 더 큰 강들과
천년을 넘게 걷고 있는 옛길들,
가을걷이 끝에 꼭 입 닫고 있던 곡식들이
몇십 배, 몇백 배로 불어나는 일 그거,
알고 보면 다 될 대로 된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힘의 순차를 세상은 힘겨운 듯하지만
불가역 앞에선 오히려 편안해진다
될 대로 되는 일은 순리의 첫 번째 말
욕심의 반대말쯤 되지 않을까
코카콜라 병이 용케도 비탈을 찾아
한 번은 반드시 굴러보는 일과
평생을 묵언하던 코젤 다크가 정수리를 따는 순간
한 번은 반드시 제 목소리를 내는 것도
될 대로 되는 일이다
냉혈동물인 방울뱀이 사막의 햇빛 아래
똬리를 트는 일도, 다 익은 열매가
끝내 땅으로 뛰어 내리는 것도
될 대로 되는
되고 있는 일이다
아무 힘도 없다고 하지만
찾아보면 이 순리에는 될 대로 되는 힘이 있다
온통 남의 힘을 뺏어 내 힘에 보탤 때
오직 내 편인 힘
나와 순리 사이를 돌고 있는
톱니바퀴 같은 내 힘이 있다
상처와 사막에 관한 에테르 강다솜
고비 사막을 건너던
어느 시인의 여행기를 읽다가
책장에 손을 베었다
상처 속 사막을 횡단하던 도중 여자를 만났다 하늘이 붉은 저녁, 종아리부터 사막의 일부가 되어가는 여자는 당장으로 무릎을 튕겨 앞으로 나아갈 듯 아슬아슬하게 정지해 있었다 머리카락이 아직도 싱싱한 여자, 조금도 시들지 못한 선인장꽃의 모가지가 뚝 뚝 떨어지며 모래 위로 구르던, 한낮
사막을 건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듣게 된다 이방인을 경계하느라 전갈과 선인장이 수런거리며 자라나는 소리, 별들이 뾰족한 발로 하늘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것들에 대하여 이 사막에 없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와,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생의 감각이 청각인 것처럼
비가 내리자 사막에 수많은 귀가 생겨났다 여자의 남은 상반신은 비를 맞으면서 서서히 사막으로 스며들고, 그녀의 땀과 혈액과 눈물도 비에 녹아들어 갔다 붉은 선인장꽃들은 그녀가 사막이 되어가는 순간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이곳의 마지막 소리예요, 남은 목소리가 순수한 고통으로만 귓가에 전해져 왔다
상처는 소금기를 한가득 품고 거대한 무덤처럼 열려 있다
책도둑 다락방에서 만난 유령의 자서전 김길녀[1964 ~ 2021]
보이지 않는 긴 눈빛을 실은 채
눈 쌓인 마을 따라
기차는 느리게 가고 있네
눈보라 잠시 멈춘
햇살 얇게 비추는
간이역 근처, 눈 쌓인 공동묘지
작은 무덤가에
줄 긋다만 문장들만 하얀
책 한권 비석으로 남겨지고
검은 눈 터널 따라
엄마는
아픈 뒷모습으로 떠나갔네
오래된 다락방에 유배 온
책도둑 소녀와 유령은 따뜻한 악수를 나누며
말없이 쓸쓸하게 오랫동안 웃었네
유치한 이념을 검붉게 내걸고
명분 가득한 구호 속에서
책들의 화형식이 열리자,
불타는 책들을 훔치고
블루커튼 쳐진 창문을 넘어
또 책들을 훔치며
물고기 소년과 책도둑 소녀가 놀았다네
죽어가는 혁명가에게
훔친 책을 읽고 또 읽어 주고
지하방에는 책과 눈사람이 함께 살았네
혁명가는 살아서 떠나갔다
다시, 돌아 왔다네
기억할 수 없는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조금씩 죽어 가기 시작했네
눈밭에 묻었던 남동생에 대한 슬픔
물고기 소년의 죽음에 바친
마지막이자 처음인 뜨거운 입맞춤
길거나 짧은
회색눈의 나날에 대한 기록이었네
며칠은 고요가 머물다 가고
며칠은 전쟁터 같은 폐허가 생겨나기도 했다네
눈 내리는 마을
눈 내리는 공동묘지
광장 바닥에 불타던 글자들의 울음으로 새겨진
문장과 문장 사이로 지워진 지문
불꽃재의 목숨들, 유령의 긴 손짓으로 화석이 되었네
젖은 노트를 기억하고
유령의 긴 여행을 떠올리며
다리 아래 차가운 강을 추억하는
서늘하고 따뜻한 책들의 일기
검은 눈의 마을에서 하얗게 돌아 왔네
몇 번의 폭설이 점령군처럼 다녀가고
몸이나 마음이 한 번도 아픈 적 없던
사람들이 구경꾼의 얼굴로 기차를 타고
몇 번의 겨울을 다녀갔다네
1964년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 1990년 《시와 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키 작은 나무의 변명』, 『바다에게 의탁하다』와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 있음.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수상.
내 어린 당산나무에는- 이문희
마음속에 웃풍이 자랄 때 생각한다
내 어린 당산나무를
마음 속 돌부리에도 자주 넘어지는 나는
어느 계절을 걷고 있나
푸르고 무성한 이파리 다 지고
화병 속 물 시들고
실은 우리가 아픈 사람들이라는 거
너의 아픔을 알고 난 후 그렇게 시작된 사랑처럼
누구를 안다는 거
내면의 깊은 골짜기를 안다는 거
(함부로 안다고 말할 일 아니다)
먹[墨]은 한 가지 색으로 모든 형상을 표현해낸다 회색이나 갈색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는 자기 색을 다 버린 까닭이다, 라는
문장을 읽고
마른 수수껍데기 같은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얻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자주 넘어지는 나는
이 지상의 모든 밤이
웃풍을 뚫고 마음의 구멍 속으로 들어올 때 생각한다
길을 잃어본 사람만의 심정으로
예배당에서 언 손 모으던 사람
간절함이 간절함을 모르고 기도하던 옛사람
초대 김경인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건 시인이었지
시인은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수백의 계절을 걸어서 왔다고 말했어
물론 너는 믿지 않겠지만 나의 스승과 친구와 후배와 자식뻘 되는 또 후배들의
무려 백 년 동안의 시상식에 참석하느라 나는 죽는 것도 까먹었지 뭐야
시인은 누구든 용서하기 싫어졌다고 말한 후
돌연 가방 속에서 한 뭉치 원고를 꺼내 읽기 시작했지
거울와의 비밀 연애 그 지루한 분노의 시를
백 년 동안의 독서와 필사적인 필사를
그동안 무처럼 갉아 먹은 기억을
무말랭이처럼 바닥에 쏟아져 말라가는 언어를
황금 재즈 시대 트럼펫처럼
무대 위에서만 빛나는 비유들을
다 버리고 나서도
겨울밤 두더지처럼 늘어나는 슬픔들에 대해
시인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
너는 하품을 참으며
상투적인 교양 소설의 독자처럼 차근차근 말해주었어
거울 속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물만 줘도 쑥쑥 자라 어른이 되지 않고
언어는 불평등의 얼음판 위를 날랜 스케이트 날처럼 휙휙 가르지 않으니
유사 낭만 시대의 별처럼 빛나지 않아도 좋아
나의 시인이여, 이제 그만 죽어도 된단다,
너는 다정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그는 울면서 돌아갔지
내일이면 집이 조금 가벼워지리라
창밖엔 산뜻한 구름, 너는 허공에다 줄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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