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괜찮은 詩

한 사람을 사랑했네

by 이성근 2021. 8. 2.

 

7초간의 포옹 2/ /신현림

심야식당/박소란

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이현호

마음 한철 /박 준

기다림의 단상(短想) /김춘경

쓸쓸한 날에 강윤후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2

빗길 강윤후

성북역 - 강윤후

서른 살의 사랑 강윤후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잘 가라, 여우 - 김 인 육

외사랑 손상근

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한 사람을 사랑했네 4 이정하

슬픈 눈빛 김옥남

들켜버린 삶 - 용혜원

그냥 좋은 것 원태연

사랑해 원태연

연체 원태연

정말 싫어질때 원태연

사랑해요 원태연

일기 원태연

하나만 넘치도록 원태연

이별역 - 원태연

하루에도 몇 번씩- 원태연

미련 1 원태연

눈물에얼굴을 묻는다 원태연

누군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 원태연

기다림 원태연

다 잊고 사는데도 - 원태연

알려줘 원태연

취미 - 원태연

복구공사 - 원태연

착한 헤어짐 원태연

요즘 우리는 원태연

우울해지는 이유 원태연

자랑 원태연

사용설명서 원태연

아침 원태연

상처 원태연

익사 원태연

거울 원태연

 

 

7초간의 포옹 2/ /신현림

 

사람의 몸은 참 따뜻해

7초간 포옹했을 뿐인데

비 그친 후의 태양처럼 향기롭지

 

사람끼리 닿으면 참 많은 것을 낫게 해

상처가 낫고 슬픔이 가라앉고

외로운 눈동자가 달콤한 이슬비에 젖지

 

닿고 싶어, 낫고 싶어

온통 기쁨을 낳고 싶어

당신과의

가슴 뭉클한

 

7초간의 포옹

 

 

심야식당/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듯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 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이현호

 

나침반처럼 언제나 너를 향하는 것이다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너와 내가 있고

자침이 뱅뱅 도는 그곳에는

만질 수 없이 흐릿한 유령만이 있는 것이다

 

두 갈래 물줄기가 있는 것이다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온 수염고래의 그것 같은

분수처럼 흩어지며 가끔 무지개를 그리기도 했던

마음과 기억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심해에서 망각의 바다에서

해변으로 떠밀려오는 사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잃고 표류하는 튜브를

먼바다의 어부는 건져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그것은 죽은 별을 바라보는 일과는 다른 슬픔이다

어제는 게릴라성 집중호우 아래서

오늘 죽은 신()을 만나 젖은 담배를 나눠 피운 것이다

 

맑게 갠 하늘 아래서는 아이들이 개미를 태우며 노는 것이다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불을 붙이는 볼록렌즈처럼

너를 거쳐간 시간들이 나의 거의 모든 순간에 모여

세상을 불태우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은 남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아무도 손댈 수 없도록 보호된다

누구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 그림은

다른 그림보다 오래 살아남아 명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작은 무인도였을 때

너는 닿을 수 없이 머나먼 바다

그 바다에 살던 한 마리 물고기가 길을 잃고

우연히 나의 해안에 닿았었던 것이다

 

 

 

마음 한철 /박 준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기다림의 단상(短想) /김춘경

 

1.

기다림은

강물에 하늘을 담그듯

깊고 깊은 그림자를

심장에 드리우는 것이다

 

2.

기다리는 일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족한 마음을

가슴에 넣어 보는 일이다

 

3.

기다림은

사랑하는 마음 보다도

더 큰마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감싸는 것이다

 

4.

기다림은

기다릴수록 커지는 바램이

뼈아픈 혼란으로 와도

그냥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5.

기다리다 보면

스스로 지워야 할 것들조차

온통 서글픔으로

소리 없이 지워진다

 

6.

오래 기다리면

오지 않는 것들조차

간절함이 실려

온 듯한 착각이 든다

 

7.

기다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미치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8.

기다림은

아직까지 느리도록

오지 않는 것에 대한

곱고 아름다운 애정이다

 

9.

기다리다 지쳐 쓰러져도

기다려 주는 것이

최소한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일이다

 

10.

기다린다는 것은

밤새 다 비워 내도

다시 또 채우는 일이다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을 보면..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귀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하는 것 같기에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유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었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논 빨간색, 육체의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 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내 청춘의 레지스탕스, 지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생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을

별빛의 찬란함으로 팔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애꾸눈으로 사랑하리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2

 

사춘기의 나날,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오르넬라 무티, 린제이 와그너, 엘리다 벨리......

세운상가 다리 위에서 이방의 여배우 이름이나 뇌까리는 것,

 

세운상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

내 세포들의 상점을 가득 채운 건 트레이시와 치치올리나,

제니시스, 허슬러, 그리고 각종 일제 전자 제품들,

세운상가는 복제된 수만의 나를 먹어치웠고

내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

 

후미진 다락방마다 돌아가던 8미리 에로티카 문화영화

포르노 세상이 내 사랑을 잠식했다

여선생의 스커트 밑을 집요하게 비추던 손거울과

은하여관 2층 창문에 매달려 내면의 음란을 훔쳐보던

거울의 포로인 나, 오 그녀는 나의 똥구멍

가끔은 서양판 변강쇠 존 홈스가

나의 귀두에 다마를 박으라고 권한다

 

금발 여배우의 매혹이 부풀린 영화 감독이라는 욕망,

진실은 없었다. 아직 후끼*된 진실만이 눈앞에 어른거렸을 뿐,

 

네가 욕망하는 거라면 뭐든 다 줄 거야

환한 불빛으로 세운상가는 서 있고

오늘도 나는 끊임없이 다가간다 잡힐 듯 달아나는

마음 사막 저편의 신기루를 향하여,

내 몸의 내부, 어두운 욕망의 벌집이 웅웅댄다

그렇게 끝없이 웅웅대다가 죽음을 맞으리라

파열되는 눈동자, 충동의 벌떼들이 떠나가고

비로소 욕망의 거울은 나를 놓아줄 것이다.

 

*중고제품을 새것처럼 조작하는 기술을 가르키는 은어

 

 

빗길 - 강윤후

 

그리움이 깊어지기 위하여 비는 내리는가

비가 내리면 새들도 갈 곳 모르는데

기억은 못이 툭툭 빠져 물 위를 흐르고

높아서 흐려지는 고층의 창들

사람들 사이가 젖어 흔들려도

더 멀리 가는 길은 서슴없이 밝아져 아득하고

잎 떨어진 가지 끝에 침묵이 굳기까지

완고한 그림자 위태롭게 걸려 나부끼리니

무심히 흘린 발자국에 쫓기며

비가 멎는 곳까지 걸으면

뒤늦어 소문뿐인 그대 기다림

맑은 햇살에 잠겨 먼지처럼 흩날리며

내 기약 없이 떠돈 그 많은 날들

다 용서해줄 텐가

눈부신 현기증에 고단한 내 젖은 옷

또 하나의 기다림으로 증발할 텐가 그러나

나는 아직 좁은 어둠으로 우산 받쳐든 채

빗속에 갇혀 있고

迷兒처럼 방황하는 세상의 다른 길들

포개지며 묽어져 정녕

길을 묻지 않는 자의 정처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비는 내리는가

비가 내리면 흔들림은 깊어져

기억의 저지대가 끝내 침수되고 마는데

 

 

 

성북역 - 강윤후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알게 되었지

이미 네가

투명인간이 되어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불어 기다리기로 한다

 

 

 

서른 살의 사랑 - 강윤후

 

사랑은 기다림이 아니라

서투른 몸짓으로 조급하게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서슴없이

네게 다가가기라는 것을

오랜 기다림 끝에

내 기다림에 지쳐 네 기다림이 떠나고서도

다시 많은 날이 흐른 뒤에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

 

힘줄 질긴 미련이 갑자기 끊기던

그 깨달음의 순간

심장이 한 치쯤 자리를 옮기는 듯한 아픔이

약기운처럼 지긋이 내 온몸에 퍼지고 나는

연거푸 찬물을 들이켰지 그리고는

제풀에 맥이 빠져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

너에 대한 기다림을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잘 가라, 여우 - 김 인 육

 

바람 속으로 긴 꼬리 가오리연을 띄운다

여름이 가고 있다

폭풍 속

영혼을 탕진한 나의 여름은 컹컹 울부짖으며 가고 있다

 

꼬리가 긴, 그녀는 틀림없는 여우

나의 간을 빼내어 호호 갖고 놀던 여우

바람이 부는 저녁

긴 머릿결의 여우가 날아오른다

살랑대며 바람을 타는 유연한 꼬리

, 홀딱 홀리어서 죽음도 두렵지 않던 마법의 긴 꼬리

빙글빙글 바람을 굴리며 재주를 넘는다

 

붉게 울음 우는, 미친 꽃아

두 눈 숭숭 불타버린, 청맹과니 꽃아!

너도 더듬더듬 허공을 짚으며 길 떠나는구나

거친 바람 속 선혈의 낙화송이 흩날리는 해거름

내 간을 빼내, 호호 갖고 놀던

홀린 사랑을 날려보낸다

 

깊은 어둠이

어둠보다 더 깊은 절망이 야수처럼 오기 전에

손목의 동맥을 끊듯 이제 연줄을 끊어야 할 시간

바보 같은 열망을 뚝, 끊어야 할 시간

빙글, 재주를 넘으며 내 넋 달뜨게 호리던

긴 머릿결의 여우를

푸드득, 새처럼 날려 보내야 할 시간

 

 

외사랑 - 손상근

 

내 마음

일렁이는 잔 물결

당신은 모릅니다

수련 한 송이 떠올려도

나의 선물인 줄

당신은 모릅니다

소리 내지 못하는

나의 흔들림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 발 소리

저만치 멀어져 가면

알 수 없는 향기에 가슴은 젖고

번져가는 파문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 이정하

 

사랑을 얻고 나는 오래도록 슬펐다.

사랑을 얻는다는 건

너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아니었으므로.

너를 체념하고 보내는 것이었으므로.

 

너를 얻어도, 혹은 너를 잃어도

사라지지 않는 슬픔 같은 것.

아아 나는 당신이 떠나는 길을 막지 못했네.

미치도록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슬픔에 빠져 나는 세상 다 살았네.

세상살이 이제 그만 접고 싶었네.

 

 

한 사람을 사랑했네 4 - 이정하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할 때

당신은 또 내게 오십니다.

 

한동안 힘들고 외로워도

더 이상 찾지 않으리라, 할 때

당신은 또 이미 저만치 오십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대여,

잊고자 할 때

그대는 내게 더 가득 쌓이는 것을

 

그대 깊숙이 내 안에 있어

이제는 꺼낼 수도 없는 그대를.

 

 

 

 

슬픈 눈빛 - 김옥남

 

그대의 눈빛이 슬프다

진실을 말하는 건

그대의 입술이 아니거니

쓸쓸한 눈빛이었다

 

여린 풀을 흔드는 바람이 슬프다

풀을 자라나게 하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거니

대기에 가득찬 바람이었다

 

눈빛으로 하는 말을

듣지 못했고

바람이 사랑임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날

 

아픔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그대의 눈빛이 슬프다

그대의 눈빛을

뒤늦게사 읽고 있는

지금 나의 눈빛이 또한 슬프다

- 사랑은 그러하다/일광/2001

 

 

들켜버린 삶 - 용혜원

 

밤이 되어

슬픈 것이 아니라

밤이 되어도

홀로인 것이 슬프다

 

침실의 고독이 싫어

불을 수없이

끄고 다시 켠다

 

어둠 속에 있으면

더욱 외로워져

불이라도

밝히고 싶지만

 

불빛 아래 있으면

들켜버린 삶이 더욱 슬프다

 

기억 속에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

그 가운데 한 사람과

이야기한다

 

추억 속에 다가오는

그리운 얼굴들

모두 다 어디에 살고 있나

 

우리들의 삶은

우리들의 사랑은

언제나

못다 부른 노래인가

 

- 사랑이 나를 찾아오던 날/양피지/2000

 

 

 

그냥 좋은 것 - 원태연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사람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사랑해 - 원태연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을 년

미친 개한테 주둥아리 물릴 년

달리는 차바퀴에서 튕겨나온

돌에 맞아 죽을 년

발바닥을 바늘로

죽을 때까지 찔러도 시원찮을 년

아무리 심한 욕을 하고

죽일 년 살릴 년 해 보아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

 

 

 

연체 - 원태연

 

당신은

지정된 기간 내에

미련을 정리하지 못했으므로

현재 지니고계신 아픔에

10%가 가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차 정리 기간 내에도

미련 구좌 정리를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담보로 잡혀있는 앞으로의 사랑을

부득이

차압할 수 밖에 없사오니

부디 정해진 기간 내에

정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싫어질때 - 원태연

 

정말 싫어지면

말이 없습니다

표정이 없습니다

꼴도 보기가 싫다 하지 않습니다

인상을 찌뿌리지도 않습니다

때리지도 않습니다

 

정말 싫어질 때는

표정도,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말없이

떠나달란 뜻입니다

 

 

 

 

 

사랑해요 - 원태연

 

문득

가슴이 따뜻해질 때가 있다

입김 나오는 겨울 새벽

두터운 겨울 잠바를 입고 있지 않아도

가슴만은

따뜻하게 데워질 때가 있다.

 

그 이름을 불러보면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렇게 문득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일기 - 원태연

 

자다가도 일어나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얼핏 눈이 떠졌을 때 생각이 나

부시시 눈 비비며 전화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터무니없는 투정으로 잠을 깨워놔도

목소리 가다듬고

다시 나를 재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워낙에 욕심이 많은 것일까 생각도 들지만

그런 욕심마저 채워주려 노력사는 사람이 생겨준다면

그 사람이 채워주기 전에

욕심 따위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양치를 하다가도

차가 막힐 때도

커피를 사러 가다가도 생각이 나는 사람

그런 사람 있다면

그런 사람이 나를 원해 준다면

자다가도 일어나 반겨줄 것 같습니다.

 

 

 

하나만 넘치도록 - 원태연

 

오직 하나의 이름만을

생각하게 하여 주십시오.

햇님만을 사모하여

꽃피는 해바라기처럼

달님만을 사모하여

꽃피는 달맞이꽃처럼

피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새벽 종소리에 긴긴 여운

빈 가슴 속에

넘치도록 채워주십시오.

하나만 넘치도록...

 

 

이별역 - 원태연

 

이번 정차할 역은

이별 이별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잊으신 미련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내리십시오.

계속해서

사랑역으로 가실 분도

이번 역에서

기다림행 열차로 갈아타십시오.

추억행 열차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당분간 운행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원태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을 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보고 싶어

넌 누구니?

 

 

미련 1 - 원태연

 

사랑이 떠나버린 사람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무너지게 하는 것은

길에서 닮은 사람을 보는 것보다

우연히 듣게 된 그 사람 소식보다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진보다

한 밤에 걸려온

그냥 끊는 전화일 것입니다

 

 

눈물에얼굴을 묻는다 - 원태연

 

1

너의 목소리, 눈빛, 나를 만져 주던 손길, 머릿결

부르던 순간부터 각인되어 버린 이름, 아름다운 얼굴

그렇게 시작되었던 어쩌면 재앙과도 같았던 사랑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사랑에 중독되어 갔다

 

언젠가 니가 조금만 더 천천히 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때

천천히 턱 끝으로 모여든 너의 눈물에

손끝조차 가져가 볼 수 없었던 그때

단 한 번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이유로

살점을 떼어 내듯 서로를 서로에게서 떼어 내었던 그때

나는 사람들이 싫었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랑도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인가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그렇게 서로를 버렸음에도

단 한 번뿐인 사랑을 지켜내지 못했다.

 

 

누군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 - 원태연

 

다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여전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당연히 너를

다시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또 너를

허나

다시 누군가와 이별해야 한다면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한다면

두 번 죽어도 너와는.

 

 

기다림 - 원태연

 

가장 고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전화를 걸지요

고된 날에는

망설임도 힘이 들어 쉬고 있을테니까요

 

가장 우울한 날을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편지를 쓰지요

우울한 날의 그리움은

기쁜 날의 그리움보다

더욱 짙게 묻어날테니까요

 

고된 일을 하고

우울한 영화를 보는 날이면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을 달래며

그대의 회답을 기다리지요

 

 

다 잊고 사는데도 - 원태연

 

다 잊고 산다

그러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가슴이 저려올 때가 있다

 

그 무언가

잊은 줄 알고 있던 기억을

간간이 건드리면

 

멍하니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 무엇이 너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못다한 내 사랑이라고는 한다.

 

 

 

알려줘 - 원태연

 

네 사람만 건너뛰면

아는 사람이고

세 시간만 걸어 다니면

아는 사람을 만나고

두 시간만 얘기하면

아는 사람이 되는

어지간히 좁은 세상에 살면서

한 시간도 마주할 수 없는

너와 나는

아는 사람이니

모르는 사람이니?

 

 

취미 - 원태연

 

니가 내 취미였나 봐

너 하나 잃어 버리니까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

뭐 하나 재미난 일이 없어

 

 

복구공사 - 원태연

 

추억공사중

사랑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현재 미련구간 복구공사로 인해

사랑통행이 금지되오니

다른 사랑을 이용하시거나

부득이한 분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구가 끝난다 해도

예전 같은 통행은 어려울 것 같으니

이 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착한 헤어짐 - 원태연

 

떠나갈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해

모진 척 싸늘하게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나 간 사람을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아니라고

죽어도 아니라고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

억지로 삼켜가며

헤어지는 자리에서는

슬프도록 평번하게

 

 

이런 젠장 - 원태연

 

생각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이제는

술만 마시면

생각이 나네

 

 

요즘 우리는 - 원태연

 

이별하려고

사랑을 하고 있다

 

 

우울해지는 이유 - 원태연

 

잊으려는 고통보다

잊혀지는 슬픔이

더 크기 때문에

 

 

자랑 - 원태연

 

우리 아버지를

좀 알려 주고 싶은데

착하게 살아오셨다고

정직하게 살아오셨다고

존경받으실 만하다고

이런 걸 좀 나타내고 싶은데

미약한 필력으로

행여 욕되게 할지 몰라

그저 존경한다고

엄마를 좀 고생시킨 것만 빼고는

모두가

자랑스럽다고

 

 

 

사용설명서 - 원태연

 

씹어 삼키면 안 됩니다

목구멍이 크게 아프지 않을

적당한 크기로 얼려

꿀꺽 한번에 삼켜야 합니다

목구멍부터

찌릿한 찬 기운이 밀려올 테지만

참고 또 참으며

먼저 삼켰던 얼음들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삼켜 채워넣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감기에 걸리거나

복통으로 받는 고통이

훨씬 덜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어느 정도 얼음들이 쌓여

가슴을 다 얼렸다 생각이 들 때

준비했던 손망치를 사용합니다

한 번에

정확히.

 

 

 

아침 - 원태연

 

막 뽑아낸 커피를 마신다

막 떠오르는 그리움

눈물이 나온다

.

 

 

상처 - 원태연

 

먹지도 않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있는 것 같다

그것도

.

 

 

 

 

익사 - 원태연

 

자살이라뇨

저는 그럴 용기 낼

주제도 못되는 걸요

그저

생각이 좀 넘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뿐이예요.

 

 

거울 - 원태연

 

보여준다

그리고 덧붙여

그는 이렇게 생긴 사람을 사랑하다

그만두었다고 한다.

 

* 원태연

1971년 서울 출생

경희대 체육학과 (사격전공)

 

발표작

<< 시집 >>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1992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수 있는한 크게 그걸 뺀만큼 널사랑해" 1993

"원태연 알레르기" 1994

"사용설명서" 1998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 2010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나라원 2000

 

<< 에세이 >>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0) 2021.10.10
이름 부르는 일  (0) 2021.08.02
먼 불빛  (0) 2021.07.03
그런 거다  (0) 2021.07.03
봄날 이런 저런 시  (0) 2021.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