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 이바라기 노리코
절철 안에서 여우를 꼭 닮은 여자를 만났다
이리 보다 저리 보나 여우다
마을 골목길에서 뱀의 눈을 가진 소년을 만났다
물고기인가 싶을 정도로 하관이 넓적한 남자도 있고
개똥지빠귀 눈을 한 노파도 있고
원숭이를 닮은 사람은 쌔고 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은
머나먼 여행길
아득하고 긴긴 노정
끝에서 한순간 피어나는 것이다
네 얼굴은 조선사람 같아 선조는 조선인이겠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본 적도 없는 조선의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그 청명한 푸르름이 펼쳐진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네 선조는 파미르 고원에서 왔어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간 적도 없는 파미르 고원 목초에서
풀 냄새가 일고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청결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나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아주 바보였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혼자서는 생기발랄
혼자 있는 것은 생기가 넘친다
활력이 넘치는 생기발랄한 숲이다
꿈이 톡톡 터진다
좋지 않은 생각도 샘솟는다
독버섯도
혼자 있는 것은 생기가 넘친다
활력이 넘치는 생기발랄한 바다다
수평선도 기울고
무척이나 난폭한 밤도 있다
물결 잔잔할 날 태어나는 개량조개도 있다
혼자 있는 것은 생기가 넘친다
억지를 쓰는 게 아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운 사람은
둘이 모이면 더욱 외롭다
여럿이 모이면
타 타 타 타 타 타락이로군
사랑하는 사람이여
아직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그대
혼자 있을 때 생기발랄한 사람으로
있어 주세요
총독부에 다녀오다
한국 노인은 지금도 변소에 갈 때
조용히 허리를 일으키며
<총독부에 다녀온다>
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조선총독부에서 호출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배겼던 시대
어쩔 수 없는 사정
그것을 배설에 빗댄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상경한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한복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소년이 그대로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순수함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러 명이 선 채로 일본어를 조금 지껄였을 때
노인의 얼굴에 두려움과 혐오의 표정
획 달려가는 것을 봤다
천만 마디의 말을 쓰는 것보다 강렬하게 일본이 해온 짓을
거기에서 봤다
이웃 나라 언어의 숲
숲의 깊이
가면 갈수록
뻗은 가지 엇갈려 교차하며 저 깊숙이
외국어의 숲은 울창하기만 하다
한낮 여전히 어두운 샛길 혼자 터벅터벅
밤
가제(風)는 바람
오바케는 도깨비
헤비(蛇) 뱀
히미츠(秘密) 비밀
기노코(耳) 버섯
무서워 고와이
첫머리 언저리에선
신명나게 떠들어대었다
뭐든지 신기해
명석한 표음문자와 맑디맑은 울림에
히카리 햇빛
우사기 토끼
데타라메 엉터리
아이(愛) 사랑
기라이 싫어요
다비비토(旅人) 나그네
세계 지도 위 이웃 나라 조선국에
검디 검도록 먹칠해가면서 이 가을바람 듣네
타쿠보쿠의 명치 43년의 노래
일본어가 예전에 내차버렸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우려해도 결코 지워 없애지 못한 한글
용서하십시오 유루시테쿠다사이
땀 뚝뚝 흘리며 이번에는 이쪽이 배울 차례이지요
어떠한 나라의 언어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굳센 알타이어족 하나의 정수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싶어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지요
왜놈의 말예(末裔)인 나는
긴장을 놓고 있으면
순식간에 한(恨)이 담긴 말에
잡아먹힐 듯한
그런 호랑이가 확실히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옛날 옛적 오랜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만의 즐거움
어딘가 멀리서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
노래
시침 딱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고
대사전을 베개삼아 선잠을 청하면
"자네 들어 오는 것이 너무 늦었어"라고
윤동주(尹東柱)가 다정하게 나무란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인
8월15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겨우 반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교복을 입은 채
순결만을 동경하는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난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이렇게 노래하고
감연히 한국어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처롭습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인가를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조금도 웃어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 가다가 쓰러져 병들어도 싸리 핀 들녘
그 사람이 사는 나라
그것은 사람피부를 지니고 있는
부드러운 악수이고
톤의 소리이며
배를 깎아 주는 손놀림이며
온돌방의 따뜻함이다
시를 쓰는 그 여인의 방에는
책상이 두 개
답장을 써야 하는 편지다발이 산더미
왠지 타인의 아픔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벽에는 늘어뜨린 커다란 곡옥이 하나
서울 장충동 언덕 위의 집
앞뜰에 감나무가 한 그루
올해도 주렁주렁 영글었을까
어느 만추
우리 집을 방문해 주었을 때
황량한 뜰의 풍정이 좋다고
유리문 너머 바라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낙엽더미도 쓸지 않고
꽃은 시들어 있어
황량한 뜰의 주인으로서는 부끄럽지만
꾸밈이 없이 좋다던 객의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
일본어와 한국어 짬뽕으로
지난날을 이것저것 얘기하며
나의 양심의 가책을 구제해주듯이
당신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솔직한 말씨
청초한 차림새
그 사람이 사는 나라
눈사태 같은 보도도 넘치는 통계도
그대로 삼키지 않는다
자기대로의 조정이 가능하다
지구의 여기저기서 이러한 일은 일어나고 있겠지
각자 경직된 정부 따위 내버려두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제가
조그마한 회오리바람이 되어
전파는 자유롭게 덤벼들고 있다
전파는 빠르게 덤벼들고 있다
전파보다 느리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낚아채고
무언가를 되던진다
외국인을 보면 스파이라고 생각하는
그렇게 교육받은
나의 소녀시대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
행방불명의 시간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삼심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멍하니 혼자
외따로 떨어져
선잠을 자든
몽상에 빠지든
발칙한 짓을 하든
전설 속 사무토 할머니처럼*
너무 긴 행방불명은 곤란하겠지만
문득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얼하는지
그날그날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도 없는데
길을 걸을 때나
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곧장 휴대전화를 쥡니다
"빨리 와"나 "지금 어디야?"에
응답하기 위해
조난당했을때 구조될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배터리가 나가거나 통화권 밖이라면
절망은 더 깊어지겠지요
차라리 셔츠 한 장 휘두르는 게 낫지
저는 집에 있어도
종종 행방불명이 됩니다
초인종이 울려도 나가지 않습니다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습니다
지금은 여기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곳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회전문이 있습니다
으스스하기도 멋있기도 한 회전문
무심코 밀고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별안간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한번 돌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쪽 세계를 방황하게 되는 구조
그리 되면
이미 완전한 행방불명
제게 남겨진 단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때에는
온갖 약속의 말들도
모조리 없었던 일이 됩니다
* 행방불명 됐던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되어 나타났다는 일본의 전설
6월
어디엔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의 일과 끝에는 한 잔의 흑맥주
괭이를 세우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나 여자나 커다란 맥주잔을 기울이는
어디엔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단 가로수가
어디까지나 잇달았고 제비꽃 빛깔의 노을 속에
젊은이들의 다정한 속삭임이 가득찬
어디엔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아름다운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근함과 즐거움,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솟아오르는
역
아침마다
시부야 역을 지나
다마치행 버스를 탄다
기타사토 연구소 부속병원
거기가 당신의 일터였다
거의 육천오백 일을
하루에 두 번씩
거의 만삼천 번을
시부야 역 통로를 힘껏 밟으며
많은 사람에게
밟히고
밟혀서
모든 계단과 통로가
조금은 휘어져 있는 듯한
이 안에 당신의 발자국도 있겠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발자국을
느끼며
그리워하며
이 역을 지날 때
산봉우리 사이사이로
스며나오는 안개처럼
내 가슴의 갈비뼈 언저리에서
한숨처럼 솟아나오는
슬픔의 운연雲烟
더 강하게
더 강하게 바라도 좋다
우리는 아카시산 돔이 먹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도 좋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잼이 늘 식탁 위에 있었으면 한다고
더 강하게 바라도 좋다
우리는 아침 햇살 드는 밝은 부엌을
갖고 싶다고
닳아서 떨어진 구두는 과감히 버리고
뽀드득거리는 새 구두의 감촉을
좀 더 자주 느끼고 싶다고
가을 여행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윙크로 배웅하면 될 일이다
어째서일까
졸라매고 사는 게 생활이라고
철석같이 믿게 된 마을
집들의 차양은 치뜨는 눈꺼풀
여보시오 조그만 시계방 아저씨
굽은 허리를 펴고 외쳐도 좋아요
올해도 끝끝내 장어 맛을 못 봤다고
여보시오 작은 낚시방 아저씨
당신은 소리쳐도 좋은 것이다
나는 아직 이세(伊勢)의 바다도 보지 못했다고
여자가 필요하면 빼앗는 것도 좋은 것이다
남자가 필요하면 빼앗는 것도 좋은 것이다
아아 우리가
강열히 원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카메라
눈
그것은 렌즈
깜박거림
그것은 나의 셔터
머리칼로 에워싸인
작고 작은 암실도 있어
그래서 나는
카메라 따위는 메고 다니지 않는다
아시는가? 내 마음 속에
당신의 필림이 많이 간직되어 있음을
나무 틈 햇빛 아래서
웃음 짓는 당신
물결치는 밤색의 눈부신 몸뚱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아이처럼 잔다
난초처럼 향기롭다 숲에서는 사자라
세계에서 단 하나 아무도 모른다
나의 필름 라이브러리.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가 물주는 것을 게을리 하고서는
나날이 까다로워져 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함이 더해 가는 것을
가족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얼 하든 서툴기만 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初心)이 사라져 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초에 깨지기 쉬운 결심에 지나지 않았던가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나는 존엄(尊嚴)을 포기한 것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은 사람아
서둘러야 해요
서둘러야 해요
조용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요
감정을 가다듬고
당신 있는 곳으로
서둘러야 해요
당신 곁에서 잠드는 것
두 번 다시 깨지 않을 잠을 자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성취
도달할 목적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지천명
어떤 사람이 와서
이 꾸러미의 끈 어떻게
푸느냐고 묻는다
어떤 사람이 와서
뒤엉킨 실 묶음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한다
가위로 자르라고 조언하지만
싫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돕는다 꼼지락 꼼지락
살아있는 인연으로
이런 것이 살아있다는
그런 것인가 그렇지만 별로
휩쓸리고
지치고 지쳐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다
어쩌면 아마
수많은 친절한 손이 도와주는 것이다
혼자서 처리해 왔다고 생각하는
나의 여러 연결점에서도
여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티 내지 않고
처음 가는 마을
처음 가는 마을로 들어설 때에
나의 마음은 어렴풋이 두근거린다
국숫집이 있고
초밥집이 있고
청바지가 걸려 있고
먼지바람이 불고
타다 만 자전거가 놓여 있고
별반 다를 것 없는 마을
그래도 나는 충분히 두근거린다
낯선 산이 다가오고
낯선 강이 흐르고
몇몇 전설이 잠들어 있다
나는 금세 찾아낸다
그 마을의 상처를
그 마을의 비밀을
그 마을의 비명을
처음 가는 마을로 들어설 때에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떠돌이처럼 걷는다
설령 볼일이 있어 왔다고 해도
맑은 날이면
마을 하늘엔
어여쁜 빛깔 아련한 풍선이 뜬다
마을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처음 온 내게는 잘 보인다
그것은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랐지만
멀리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영혼이다
서둘러 흘러간 풍선은
멀리 시집간 여자가
고향이 그리워
놀러온 것이다
영혼으로라도 엿보려고
그렇게 나는 좋아진다
일본의 소소한 마을들이
물이 깨끗한 마을 보잘것없는 마을
장국이 맛있는 마을 고집스런 마을
눈이 푹푹 내리는 마을 유채꽃이 가득한 마을
성난 마을 바다가 보이는 마을
남자들이 으스대는 마을 여자들이 활기찬 마을
팬티 한 장 차림으로
팬티 한 장 차림으로
오락가락한대도
품위 있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함께 사는 동안에
배우자가 그리 생각토록 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일 텐데
당신은 수월히도 잘 해냈지요
어깨에 힘 한번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쭉 생각했습니다
채 따라잡기도 전에 떠나가는군요
단 한가지 위안은
당신이 살아 있을 때에
제가 당신의 가치를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의 알
물고기가 그토록 많은 알을
헐떡이며 품는 건
부화하는 알이 적기 때문이다
부화해도 살아남을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어설픈 총질도 여러 번 쏘면 맞는다
시인의 알이 오래전부터
빽빽이 들어차 있다고 해도
현실에 잡아먹히는 시인은 많으니
어깨를 펴 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야
어떤 말이 부화할지
흐르는 물도 알지 못한다
살아 있는 녀석은 모두 알이다
기대지 않고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 속 깊이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과 귀
내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뭐가 불편하단 말인가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 뿐
칠석(七夕)
이슥한 밤
저 멀리 상수리 숲 언저리에
작은 등불이 가물거린다
아다치가하라(安達が原)의 오두막처럼 매혹적이다
무사시노(武蔵野)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수풀 무성한 길
이곳에 오면 아직도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별들
은하수에는 잔물결이 일고
강기슭엔 견우성과 직녀성이
오늘 밤도 깊이 숨죽이고 있다
“당신들! 내 뒤를 따라온 거야?”
갑자기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붉은 구릿빛 알몸뚱이가 위협한다
훅하고 풍기는 소주 냄새
나는 흠칫 방어태세를 취한다
방어태세를 취하는 건 얼마나 나쁜 버릇인가
“오늘 밤은 칠석이잖소
별을 보러왔지요”
남편의 목소리가 너무도 태평하게 어둠 속을 흐른다
“치일석?
칠석… 아아 그랬군
난 또, 내 뒤를 쫓아왔나 싶어서…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는 마법사 ‘키요의 집’ 사람이었다
몇 명의 가족이 살고 있을까
다 쓰러져가는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수수께끼 같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귀여운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새 그 아이도 중학생이 되어 나타났다
개조차 낯선 이의 접근을 막으며 맹렬히 짖어대고
무더운 한여름 밤 축시(丑時)가 되면
으레 펼쳐지는 조선말의 화려한 싸움
벼랑 끝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그 집 근처까지 오고 말았다
오늘 저녁 내리는 비는 견우성이 바삐 배 저어 건너올 때
노에 이는 물보라인가
기원전부터 생겨나 서서히 모양을 갖춰 온
한민족(漢民族)의 아름다운 옛이야기
일찍이 만요 사람들(万葉人)이 사랑했던 소재들도
기원을 따지면 저 멀리 고구려, 백제를 거쳐
전해져 온 것이 아니었던가
문자며 직물이며 철이며 가죽이며 도자기며
말 사육이며 그림이며 종이며 양조기술이며
바느질하는 사람이며 대장장이며 학자며 노예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전해져 왔던가
옛 은사(恩師)의 후예들이건만
이곳에서 저곳에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경원시 되고
여름 밤 바람 쐬러 나온 사람조차 미행인가하고 두려워하네
칠석이라는 말 한 마디에 갑자기 온순히 등을 보이며
되돌아가는 잠방이 차림의 아저씨
내 마음은 까닭 모를 슬픔으로 가득하다
차가운 은하를 올려다 볼 때마다
이제부턴 틀림없이 나를 휘감으며 놓아주지 않겠지
온몸에서 풍기던 강한 소주 냄새가
훅 하고
벚꽃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봅니다
사람들은 평생
몇 번이나 벚꽃을 보는 걸까요
철이 드는 것이 열 살 정도라면
아무리 많아도 칠십 번쯤
삼십 번, 사십 번인 사람도 부지기수
어쩌면 그토록 적은지
더욱더 더욱더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조상들의 시각도
섞여 들어와 겹쳐지고 안개가 드리워진 때문이겠죠
화려한 듯, 요염한 듯, 으스스한 듯
그 어느 쪽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꽃의 빛깔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벚꽃 아래를 거니노라면
순간
명승名僧처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일상,
삶은 소중한 신기루임을
답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이제껏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열네 살의 어느 날
나는 문득 물었다
할머니가 참말로 쓸쓸해 보이던 날
지나온 세월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천천히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의외로 단번에 대답하셨다
“아이들을 화로에 둘러앉혀놓고
떡을 구워줬을 때“
눈보라치는 저녁
눈의 마녀가 나타날 것 같던 밤
어스름한 램프 밑에 대여섯 명
화로 앞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우리 엄마도 있었으리라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너무도 구체적이고
빠른 대답에 놀랐다
그날 이후 오십 년
사람들은 모두
감쪽같이 사라지고
내 맘 속에서만
때때로 종알대는
소박한 단란
꿈같은 대보름 축제
그 시절 할머니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절절히 음미한다
그 말 한마디 안에 담겨 있던
구운 떡처럼 은근하게 짭조름한 맛을
호수
<원래 엄마란
아주 고.요.한.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명대사로구나!
뒤돌아보니
갈래머리와 단발머리 두 소녀의
책가방이 달랑달랑
낙엽 길
엄마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마음 깊은 곳에
흔들림 없는 고요한 호수가 있어야만 해
다자와호처럼 깊고 푸른 호수를
남몰래 간직한 사람은
이야기해보면 알 수 있다 두 마디 세 마디 만에
그야말로 쥐 죽은 듯 고요하여
간단히 불지도 줄지도 않는 자기만의 호수
바스락바스락 아무나 내려올 수 없는 산기슭 호수
교양이나 학력과는 상관이 없다
인간의 매력이란
아마도 그 호수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다
빨리도 그걸
알아챈
작은
두
소녀
되새깁니다 –Y.Y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약아지는 거라고
믿었던 소녀 시절
몸가짐이 우아하고
발음이 정확한
멋진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애쓰고 있단 걸 알아챘는지
무심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수함이 중요해
사람을 만날 때나 세상을 대할 때나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을 때
타락한단다 추락해가는 걸
감추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지
저는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깨달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갈팡질팡해도 되는 거구나
서툰 인사 못나게 얼굴이 빨개지고
실어증 자연스럽지 못한 언동
철없는 꼬마의 욕설에도 상처 입고
믿음 안가는 생굴 같은 감수성
그런 걸 단련할 필요가 없었구나
나이 들어도 갓 핀 장미처럼 보드랍게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
세상 모든 일
온갖 좋은 일의 핵심에는
떨리는 연약한 안테나가 숨어 있다 반드시......
저도 예전 그분과 비슷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문득 떠올리며
지금도 가끔씩 그 의미를
가만히 되새길 때가 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져
자동차도 없고
워드프로세서도 없고
비디오데크도 없고
팩스도 없고
퍼스콤이건 인터넷이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특별한 지장이 없어
그렇게 정보를 모아서 뭐에 쓰는 건데?
그렇게 서둘러서 뭐 하게?
머리는 텅 빈 채 말이야...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시인
일본 현대시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로 유명한 이바라기는 전후(戰後)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지한파 시인으로 한국의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풍속,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글을 썼다. 한국어를 직접 배웠을 뿐 아니라 동시대 한국 시인들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였고, 시와 수필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기도 하였다. 윤동주의 시와 생애에 대해 쓴 수필은 일본에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이바라기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알게 되었고,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한국 문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수필집 『한글로의 여행』(1986)은 한국 문화 입문서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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