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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영성 없는 진보'와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by 이성근 2024. 3. 17.

영성 없는 진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김상봉 지음 / 온뜰 /2024-02

김상봉-독일 마인츠 대학교에서 철학, 고전문헌학, 신학을 공부하고 이마누엘 칸트의 유작(Opus postumum)에 대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서 가르치다가 해직됐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예아카데미 교장과 학벌없는사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호모 에티쿠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이상 한길사), 서로주체성의 이념』 『만남의 철학(공저) 철학의 헌정』 『네가 나라다(이상 도서출판 길), 굿바이 삼성(공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상 꾸리에), 만남(공저, 돌베개) 등이 있다.

목차

참된 믿음을 기다리며

1.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인가?

2. 비판과 형성 사이에서

3.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 사이에서

4. 교육의 실패와 정신의 빈곤

5. 혁명과 영성전태일과 서준식의 경우

6.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서

7. 새로운 믿음을 기다림

참고문헌

 

책속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도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도, 그 믿음에 근거하여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이런 믿음의 실종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면, 정치는 나를 던져 세계를 구하겠다는 열정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쟁취하고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의 경연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참된 믿음을 기다리며 접기

우리가 사는 나라를 바로 우리 자신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어,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집단적 자살을 향해 치닫고 있는 지금, 이성의 언어만으로는 결코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썩은 흙담처럼 무너져 가던 시절, 동학이라는 새로운 믿음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국가가 아니라 민족 자체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절망적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믿음이다.-참된 믿음을 기다리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느 정도 낙관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의 능선이 더러는 내리막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다시 전진하리라는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되어 가는 지금, 여전히 우리는 이런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에겐 이제 역사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체념과 절망만 남은 것일까?-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인가?

그러므로 문제는 비판이 아니라 형성이다. 낡은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데 비하면 쉽다. 한국 민주화의 역사는 불의한 국가 권력을 파괴해 온 역사이다. 그러나 불의한 권력을 타도한 용기와 열정에 비하면 새로운 나라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지혜는 모자랐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집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망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파괴하기 위해서는 파괴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건설은 파괴와는 전혀 다른 지혜를 요구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 사이에서

사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혁명과 영성전태일과 서준식의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와 그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다. 오직 이 믿음 속에서만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아닌 다른 모든 종교적 신앙이란, 믿음의 힘으로 세상의 고통에 자기를 던지는 헌신의 열정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신만 벗어나려는 이기적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신앙이 이 세상에 아무리 넘친다 한들, 그것이 세상을 고통에서 구할 수는 없다. 오직 믿음이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그리고 내가 그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일 경우에만, 그런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새로운 믿음을 기다림

 

영성 없는 진보정치가 민주주의 위기 불렀다

한국 민주주의가 죽어간다는 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나라 밖 기관(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조차 한국에서 독재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어쩌다가 우리 민주주의는 이렇게 된 것일까?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쓴 영성 없는 진보는 우리 진보 정치 진영의 정신적 상황’, 특히 영성의 상실을 민주주의 위기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다. 지난해 10월 경남대 K-민주주의연구소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을 대폭 보강한 책이다.

지은이가 한국 민주주의 위기를 진보 진영에서 찾는 이유는 먼저 이 책이 평생 진보 진영에서 활동해온 지은이 자신의 반성과 성찰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분화한 진보신당에 합류해 강령 기초 작업을 한 바 있다. 그런 경험을 포함해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진보 정치를 겪으며 영성의 부재가 진보 정치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둘째로 지은이가 진보 정치에 위기의 원인을 묻는 것은 이 나라의 보수 정치에는 전체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정신 자체가 없으므로 믿음이나 영성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를 탄생시킨 이른바 보수 세력은 극복의 대상이기에 아예 논외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영성이 문제인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영성, 좁혀서 말하면 종교적 영성이 이끌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영성은 나와 전체, 나와 역사가 하나라는 믿음을 뜻한다. 19세기 말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이라는 종교적 영성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쟁이었고, 31운동도 믿음 깊은 종교인들이 대표로 참여해 이끈 거족적 항쟁이었다. “19세기 이래 다른 나라에서는 진보적 정치 행위가 세속주의에 의거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 나라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혁명적 진보운동의 토양이 됐던 것이야말로 한국 근현대 민중운동사의 고유한 특성이다.

지은이는 이마누엘 칸트의 구도를 빌려 지성과 이성과 영성을 구분함으로써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한다. 지성이 개별적인 사태를 이해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전체를 사유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지성이 이해한 개별적 사태를 총괄해 전체를 모순 없이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그러나 이성은 그렇게 이해한 세계를 대상으로 앞에 세워놓는 관찰자일 뿐이어서, 그 자체로 세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의지는 내 안의 강렬한 욕구와 열망이 있어야만 발동한다.

관찰자로서 이성은 의지의 활동을 돕는 도구적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지의 방향이 잘못되면 이성은 악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근대 이성이 도구적인 것이 됐다고 비판했지만, 이성은 애초부터 도구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성으로 파악한 세계 전체에 어떤 믿음을 싣느냐다. 그 믿음은 이성으로 규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영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다. 전체가 나와 하나라는 믿음, 그리고 그 전체의 역사가 뜻과 의미를 지녔다는 믿음은 오직 영성에서 얻을 수 있다.

지은이는 개인이 느끼는 고통에서부터 영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나의 한계는 고통의 한계다. 내가 고통을 느끼는 내 육체가 내 존재의 한계다. 그러나 나는 내 한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 그 타인의 고통에 내가 열리는 만큼 나의 존재는 확장되고, 마침내 세계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때 나와 세계는 하나가 된다. 영성이란 세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고통받는 타인과 세계를 향한 응답이며, 이 응답의 다른 말이 사랑이다. 세계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믿음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전태일의 영성적 자기희생은 1970년대 진보운동의 동력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영성을 한국 진보운동의 중심에 세운 것이 바로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자신의 한쪽 눈을 팔아 착취 없는 사업장을 세우려 했고, 그 꿈이 좌절당하자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으로써 그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전태일을 이끈 것은 고통받는 타인이 나의 전체의 일부이자 나의 또 다른 나라는 믿음이었다.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진보 운동은 전태일의 영성적 자기희생을 동력으로 삼은 것이었다.

지은이가 주목하는 또 다른 사례는 1971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서준식이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영성이 종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주는 텍스트다.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던 서준식은 옥중에서 기독교 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를 소외되고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해방을 바라는 자의 모범으로 발견한다. 서준식에게 예수는 사랑 없이 증오에 몰입하는 속류 혁명가의 대척점에 선 인간이었다. “영원히 약자 편에 설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써 서준식은 유물론적 영성의 전범이 됐다.

옥중에서 유물론적 영성을 키운 서준식.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전태일과 서준식이 걸은 이 영성의 길은 1980년대 이후 혁명사상의 도래와 함께 목적이 선하다는 확신이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무차별하게 정당화하는가치 전도의 늪에 빠졌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전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 치우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높은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차이 속에서 적대적으로 분열한다.” 1980년대 이후의 진보 정치는 그렇게 영성을 잃어버리고 권력투쟁에 함몰되고 말았다.

지은이는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전체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영성의 도래를 열망한다. “오직 이 믿음 속에서만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 자신을 던져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이 공허한 영성이 되지 않으려면 언제나 이성이 함께해야 한다. “역사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 반대해서 비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멈추는 곳에서 더 멀리 나아가는 것, 아니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다.” 수난과 저항과 투쟁 속에서 형성해온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 영성의 알맹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보수도 진보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우리나라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진보란 빨갱이, 좌익, 주사파, 공산주의를 연상하게 된다. 평등이나 복지, 약자배려를 우선 가치라고 주장하는 시민단체나 한겨레신, 경향신문, 전교조와 같은 단체들이 그렇다. 우리나라의 진보, 그들은 누구인가? 수수세력들은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 통일 주장하는 사람들, 혹은 양심적인 지식인조차 싸잡아 좌파니 빨갱이 취급을 한다. 제주 4·3항쟁이나 연좌제와 같은 극우냉전의 시대를 살아 온 세대들은 빨갱이란 곧 저주의 대상이요, 상종 못 할 좀비 취급을 당해야 했다.

우리나라 보수, 그들은 누구인가? 프레시안의 김상수작가는 한국사회에서 보수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에서 반공을 허울과 빌미로 악행도 서슴지 않고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훼손하려는 세력들,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이라 받들었고 시간을 거슬러 일본제국주의 시절엔 천황폐하의 신민(臣民)이 되자고 주창하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내고도 오늘까지 전혀 부끄러움도 일말의 반성문도 발표한 사실이 없는 신문들이 보수일 수 없다고 단정한다.

김상수작가는 나라가 위난을 당했을 때 개인의 일신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행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나 패권주의에 매몰되어 이데올로기로 동족을 압살했던 세력들에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들, 군사독재시대 때 민주주의를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했던 사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정신을 일깨우는 촛불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정의한다. 김상수작가의 주장대로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란 진보가 아니라 보수에 가깝지 않은가?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가 있는가?>

우리나라에 진보는 정책이 없고 보수는 철학이 없다”. “지금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듯, 진보도 진보가 아니다스스로 보수요, 진보라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담론이다. “한국에 보수가 있는가”, “그간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이 보인 행태는 수구라는 비판이 쏟아지지만, 여전히 보수는 낡은 반공에 기댄 수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보는 어떤가? ‘분열하며 이합집산의 대명사가 된 진보는 권력을 잡은 후 수구화, 기득권화됐다. 이런 비판을 부정할 수 있는가?

진보는 좌파요, 보수는 우파인가? 진보(進步)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요, 보수(保守)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는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민주당은 진보요, 국민의 힘은 보수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그렇게 이해해도 좋을까? 솔직히 말하면 민주당은 보수의 아류일 뿐, 진보가 아니다. 왜 어떤 점에서 그런 해석이 가능한지 살펴보자.

<보수와 진보의 기준은 자유와 평등...?>

자유평등은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핵심 가치다. 보수는 자유, 경쟁, 효율이라는 가치를 우선시하고, 진보는 평등, 분배, 약자에 대한 배려, 복지라는 가치를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경제를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진보주의자들은 시장을 자율에 맡기기보다 정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는 선분배·후성장, 보수는 선성장·후분배를 주장한다. 그래서 진보는 일반적으로 큰 정부를 선호하고 보수는 자유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 또 보수는 대체로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우선시한다.

또 보수는 개인의 가치를, 진보는 집단의 가치를 더 중시한다. 성과주의·개인주의·사유재산권은 보수가 지지하는 가치이고, 분배·집단주의·공유·복지는 진보적 가치에 가깝다. 보수정당이 개인의 자유와 경쟁 효율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고, 진보정당은 약자에 대한 배려, 평등과 분배 복지를 실현할 정책을 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우리나의 민주노총, 참여연대,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민주언론시민연합과 같은 단체는 진보성향이고, 한국노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바르게살기운동, 일베, 어버이연합과 같은 단체들은 보수 또는 극우성향의 단체들이다.

사상의 은사라 불리던 리영희교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좌는 옳고 우는 나쁜가? 우는 옳고 좌는 나쁜가? 새가 똑같은 두 개의 날개가 있어야 날 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좌와 우가 공존해야 그것이 제대로 된 세상이 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좌우가 공존하는 세상인가? 아니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있는가? 진보는 보수를 수구꼴통이라고 비하하고, 보수는 진보를 좌파, 빨갱이, 주사파, 공산주의라고 매도한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민주당은 진보적인가? 국민의힘은 보수인가? 보수세력으로 위장한 정치인들은 보수가 아니라 이념도 없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세력들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주권자들을 기만하는 이들은 위장술의 천재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진보정부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리해고, 구조조정, 민영화, 개방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해 노동고용의 유연화를 법으로 만들어 비정규직을 양산하지 않았는가?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없는 나라,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라에는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진보도 살아남기 어렵다. 나는 진보인가 아니면 보수인가?

김용택 : 뉴스프리존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은이)알마 2010-03

김규항-사회문화 비평가이자 교육운동가. 사람들이 정치나 경제 고민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작은 일상에 골몰하는 세계를 소망한다.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천착, 간결한 문체와 통찰력 있는 문장의 글을 써왔다. 근래에는 저술에 집중하면서 현대예술 분야 사람들과의 협업도 시도한다. 2003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예수전》 《B급 좌파》 《혁명노트등이 있다. 자본주의 세미나는 장기화하고 깊어지는 자본주의 위기를 현상만으로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근본 원인을 성찰한다. 자본주의의 체제 구조 및 작동법칙을 밝혀, 오늘날 역사 속의 한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가 늙고 노쇠했음을 드러낸다. 새로운 세계가 생겨나는 이행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변화의 주역은 선구자나 성난 비판자가 아닌, 스스로 사유하는 개인들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목차

1B급 좌파, 김규항이 그리는 세상

2장 문화로 우리 사회 엿보기

3장 김규항의그 페미니즘

4장 한국 사회의 진보를 묻는다

5촛불추모앞에서

6장 예수에게 묻는 이 시대의 진보

7장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 교육

 

책속에서

약간 모자란 줄 알았대요

김 사람이라는 게 인생이 너무 희망차면 좋지 않은 거 같아요. 좀 비관적인 데가 있어야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많이 좌절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 비관적인 정서가 있으면 훨씬 낙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어요. 요즘 한국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 하는 것도 비관적인 정서가 길러지지 않아서 그래요. 사람들이 경제개발 독재 시대에 워낙 세뇌가 되었어요. 인생에 대단한 의미를 두고,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늘 열심히 노력하고, 하여튼 좀 공격적으로 살아가는 걸 미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게 바로 인생을 끊임없이 고단하게 만듭니다. 만날 보다 나은 미래만 생각하지 오늘이 없어요. 인생은 오늘의 연속이잖아요...P. 21~22

교회와 근본적인불화가 필요한 때

김 이젠 교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야 될 때입니다. 예수는 마몬(‘부요富饒라는 뜻의 아람어 마모나에서 유래된 말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탐욕의 화신, 의 신을 가리키며, 성경에서는 지상의 부를 말한다?편집자)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방식은 그렇게 막 해도 되는 시절에나 통하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오히려 상식을 거스르지 않고 법도 지키면서 그 방식이 본격화되는 게 문제죠. 마몬의 가르침을 체화하는 겁니다. 아주 점잖게, 그러나 매우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들을 담아내는 거죠. 다른 생각은 모조리 빨갱이고 사탄으로 모는 게 아니라 자본의 가치관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런 가치관으로 경쟁하고 성공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교회 개혁을 논할 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교회들이 있는데요.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좀 낫다는 교회들이 바로 이런 상태라는 겁니다. 섬뜩하죠?(웃음)... P. 27

아이들은 죄가 없다

지 어린이 잡지인 고래가 그랬어발행도 교육 문제에 관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시작하신 건가요?

김 처음에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소박한 심정으로 시작했죠. 그런데 지금은 교육 문제가 지배 체제의 정수라는 생각을 해요. 교육 문제가 좌파나 진보 운동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장악하고 있어요. 교육 문제는 그렇지 않아요. 공적인 토론이나 성명서를 내는 행위 말고 실제 자기 아이의 교육 문제 말이에요. 그 문제만큼은 반이명박 세력은 물론 극좌까지도 거의 포괄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교육 문제가 바로 문제의 정수인 거죠. P. 33~34

내 글을 읽어주는 이들은 평범한 이웃들이다.

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평범한 이웃이나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김 오히려 당연한 얘기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요. 반응이 아주 단순해요. ‘맞는 말인데 뭐그런 식이죠. 좀 배웠다는 사람들, 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는 어렵게 받아들이는 거 아닌가요.(웃음) 진짜 삶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인터넷에서 만날 수 있는 자칭 진보 논객들을 보면 좌파적인 책을 읽고 저녁마다 인터넷에서 시사토론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선거 때만 되면 비판적 지지를 하거나, 대안으로서 문국현 같은 인물을 지지한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건강하지 않은 방식의 지적 소통이 본질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P. 45

좌파, 이런 점이 아쉽다

김 비판적 지지라는 게 전체를 조망해서 균형이 필요하다고 보는 거잖아요. 극우가 너무 세니까 그걸 막아야 한다, 이런 건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죠. 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균형을 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울어진 쪽으로 더 편향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래야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죠. 고종석 씨 경우는 지식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지성의 차이라고 보는데요. 좋은 자유주의자가 미숙한 좌파보다 훨씬 훌륭하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좌파라는 분들이 선거 때 비판적 지지를 하지 않고 진보 정당을 찍는 걸 넘어서서 왜 더 편향되지 않는지, 특히 절박하고 더 필요할 때 왜 입을 닫고 있는지, 그게 아쉬워요. 우리가 욕을 좀 먹어야 됩니다. 좌파는 투신해야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1980년대에는 너도나도 투신했다가, 이제는 투신하려는 좌파가 없는 듯 보여 때로는 안타깝죠. 좌파라는 사람들이 극우와는 불화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는 절대 불화하지 않는 희한한 상태를 유지하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불화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유주의 싸움에 올인하고 있다고 봅니다. P. 51~52

스스로 변화하라

김 본질적인 문제를 놓고 보면 의견이 다를 게 없어요. 스크린쿼터 제도에는 찬성합니다. 세계적인 차원의 독과점과 불공정 경쟁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 문제를 사회에 호소할 때는 자신들이 그 사회 안에서 어떤 사회적 행동을 보였으며, 어떤 사회적 태도를 취했는지 뒤늦게라도 되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 영화계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들은 대중들에게 호소해서 지지도 받고 도움도 받았잖아요. 한데 자신들은 거기에 걸맞은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했죠. 아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문화적 국적을 얘기하려면 문화적 국적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들면서 그런 소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한 상업주의에 입각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잖아요. 장르영화는 한국영화나 미국영화나 다 똑같습니다. 그런 영화를 만들면서 국적이 한국이냐, 미국이냐를 내세우며 호소하는 행태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P. 74

문화를 죽이는 것은 문화다

지 한류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심각해 보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한데요. 한류라는 게 천박하기 이를 데 없어요. 비보이들을 거지새끼 보듯 하던 사람들이돈이 된다, 산업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다하니까 그들을 고상한 광고에 내보내고, 그런 식이죠. 경박합니다. 근본이 없는 문화, 장사꾼의 문화는 절대 오래 못 갑니다. 문화가 장사의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장사꾼의 생각이 문화를 압도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장사로서의 문화는 오래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류에 대해 사회적으로 다들 찬성하고 지지한다는 데 있어요. 그런 식의 생각이 주류가 될 수는 있죠. 다만 문제 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전혀 없다는 게 아쉬운 겁니다. 진짜 놀랄 정도로 없어요. 신자유주의라는 게 참 무서운 거예요. 다들 돈 귀신에 단단히 홀린 듯해 보입니다. 하긴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지만.

지 최근 김규항은 개혁과 진보의 차이에 대한 천착과우리 안의 이명박과 관련된 글을 많이 써왔다. 그가 주로 천착했던 문제는 지식인들의 위선이었고, 진보개혁 진영의 자기 성찰이었다. 2002년 김규항은씨네21유토피아 디스토피아그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중산층 여성 위주의 페미니즘 진영이 조금 더 계급성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주문하는 글이었다. 그 글은 논란이 되었고, 페미니즘 진영은 왜 취약한 여성운동에만 매질을 하느냐며 서운해했고, 공격했다. 김규항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옳든 그르든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으며, “좀 더 나은 방식으로 얘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기반성을 했다. 이후 김규항은 여성주의 진영인 이프If의 김신명숙과 교류했다. 그의 책김신명숙의 선택에 추천사를 요청받아 글을 쓰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정희진과는 메일을 주고받았다. 짧지만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오해가 풀린 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오해를 풀기 위한 소통을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P. 107~108

페미니즘,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김 나는 나 나름대로 중산층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겁니다. 더 가난하고 약한 여성들,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여성들을 배제하는 분위기를 비판한 거죠. 그러니까 여성 문제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여성운동 내부에서 일어나는 계급적인 상황을 주목한 겁니다. 그러한 비판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시점이라 내 의도가 오해되거나 감정적으로 왜곡되기 쉬운 상황이었어요. 말하자면 여성운동의 외부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태도란 지지하든가, 아니면 반대하든가 둘 중 하나였죠. 그래서 어떤 비판이든,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여성주의자로 취급받기 쉬운 분위기였다고 봅니다.P. 109~110

김규항이라는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진보적 칼럼리스트’ ‘어린이 잡지 출판인’ ‘사회주의자라는 설명이 첫 줄에 뜬다. 그는 진보적인내용의 칼럼을 쓰고 있으며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인문교양 잡지 발행인이다. 그러나 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좌파 김규항일 것이다. 그렇다 김규항은 좌파다. 20103한겨레21800호 특집에서, 정치인과 사회인사 5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그는 가장 왼쪽의 정치 성향을, 시장의 자유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도 가장 높은 쪽의 성향을 드러낸 자유주의 좌파로 드러났다.

김규항의 말은 스스로가 말했듯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국외자인양 논평하는 책상물림인 지식인의 말이 아니다. 몸으로 체득한 자기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그래서 울림이 깊고 진정으로 와 닿는다. 그는 씨네21유스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칼럼에서 1인칭 시점을 선택하고, 본인 스스로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하기 시작한 지식인이다.

 

진보를 꿈꾸 이들의 삶에 성찰의 용기를 주는 책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 그들은 진보인가?

한나라당이니 조중동이니 하는 세력의 대부분에게 그들은 분명 진보다. 아니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좌파다. 그런데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선 답들이 제각기 엇갈리는 듯하다. 그만큼 헷갈린다는 것.

그런데 이에 대한 김규항(어린이 진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의 답은 단호하다. 그에게 그들은 진보가 아닌 가짜 진보. 물론 그들은 다 좋은 분들이고, 이른바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분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진정한 변화를 막는” “치명적인 반동이다. 그렇다면 왜?

답은 인터뷰집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에 실려 있다. 이 책을 통해 김규항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전문인터뷰어 지승호가 인터뷰했고 지난 3월말 출간됐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분기점, 신자유주의

그렇다면 왜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은 진보가 아닌 치명적 반동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라고 할 때는 상대적 개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규항에게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분기점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보수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진보인 거죠. 한국은 다들 흔히 하는 말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아닙니까?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말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고요. 자본주의 체제에 찬성하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인 거죠.”

모든 것의 구분은 신자유주의입니다. 반독재도 아니고, 정치적 민주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이 분명해져요.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모두 확실하게 구별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거죠.”

물론 자본주의에 찬성하는 데도, 반대하는 데도 여러 층위와 방식이 있기에 보수라고 다 같은 보수가 아니고 진보라고 다 같은 진보는 아니지만 큰 덩어리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의 진보성 및 한나라당, 조중동 같은 세력과의 차이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 “그러나 엄연히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의 진보성이고 그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한다는 말이다. 김규항에게 그들은 진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지키는 세력으로서 인민의 눈을 흐리게만드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수호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명박 정권보다도 더 큰 반동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사회 비판의 대상이 그 사회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아요.”

누가 보기에도 진보적이지 않아 보이는 건 실제적인 반동성이 없다는 겁니다.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면서 진보적이지 않은 게 우리를 미궁으로 몰아넣어요.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죠.”

그는 개혁이라는 건 보수의 일부라고 말한다. “개혁을 경계하는 건 개혁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 의미에 집착할수록 어느새 진정한 변화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보와 개혁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계급도 좌우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제시한다. “우파적 관점은 시종일관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로 나누어 보게하지만 좌파적 세계관은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보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

계급을 말하지 않을 때 좌파는 좌파 명찰을 단 자유주의일 뿐이죠.”

결국 진보를 위해서는 현 체제를 옹호하면서도 인민들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김대중, 노무현, 유시민, 박원순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의 삶에서 진보의 희망을 찾다

그럼 김규항은 우리 시대 진보의 희망을 어디서 찾고 있을까. 그에게 희망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는 진보와 영성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영성이란 사회변혁에 조응하는 나의 변혁이라는 관점에서의 영성이다.

그는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을 영성이라며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된다.

예수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내면의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모두가 봉착한 한계에 대해 비전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인류 사회의 진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인물이에요.”

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는 불과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사람들의 영혼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남보다 많이 갖거나 보통사람들과 격차를 벌이는 것에 대해 기뻐하는 사고방식이 지배계급만이 아닌 서민 대중, 농민, 노동자의 사고방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노골적인 시대인 만큼 그는 오로지 지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예수의 말씀을 따르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회개란 회심지금까지 살던 방식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살라는 말, 즐거움을 바꾸라는 말이라고 한다.

어제까진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앞서고, 대개의 사람들과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즐겁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게 전혀 즐겁지 않은 사람으로 바뀌는 거죠. 덜 가진 사람을 보면 내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민망하고, 뒤처진 사람들이 눈에 밟혀 불편하고, 그런 격차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빼앗긴 권리와 인권을 위해 함께 싸우는 게 훨씬 마음 편하고 즐거워지는 거죠.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한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혁명의 최종 목표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란 말이다.

예수의 방식대로, 더 근본적인 질문만이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잘살고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좀 못살고 덜 행복하더라도 훌륭하게 살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잘 산다는 게, 행복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그런 삶의 실천의 한 구체적 예로 교육문제를 제시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흘러가고 있는 가치관이 아닌 다른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게 아이에게 손해가 아니라는 것, 부모의 별난 세계관으로 아이를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게 더 낫네, 내가 잘못 생각했네, 깨닫게 해야 하는 거죠.”

결국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 사는 방식이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변혁없이는 진보의 희망도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바뀌는 순간 진보의 희망은 싹 튼다.

변화는 조금씩이라도 눈에 띄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계단처럼 툭 튀어 오르기도 하죠.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한건 변화가 일어난다는 건데요. 변화가 내 눈 앞에서 목도되지 않는다고 해서 일희일비할 건 아닙니다. 당연히 절망할 것도 없어요. (...) 회개하면 바로 천국입니다.”

 

과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불피요한 것일까. 김규항은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의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키워지는 대로 길러지고 말하는 대로 믿고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 심어지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가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어요. 실은 교육이라는 게 사라진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거죠.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올인합니다. - P. 292

이 말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람은 못 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하는 게 아닐까. 김규항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오십보 백보의 싸움은 되지 않도록 나 스스로부터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새로운 우파의 탄생/김진호/오월의봄/2020.07

목차

1장 책머리

2장 대형교회는 왜 보수주의적인가

3주권신자의 탄생

4장 교회의 캐릭터화 1-제자훈련

5장 교회의 캐릭터화 2-귀족영성

6장 교회 건축과 캐릭터 대형교회

72000년대 보수대연합의 시대

8장 청부론과 새로운 캐릭터 교회의 탄생

9장 자기계발의 시대, 신자유주의적 귀족교육

10아버지학교귀족 아빠되기

11()으로 성()하라’-웰빙 신성가족의 신앙 서사학

12장 교회 청년에게 세습되는 웰빙보수주의

13장 선교의 웰빙보수주의화, 그 가능성과 한계

14장 맺음글

보론 1 ‘한경직의 종교’-개신교 극우주의의 기원

보론 2 전광훈 현상을 읽다-극우의 좌절과 촛불정치의 효과

보론 3 신천지 현상을 읽다-신천지와 한국 교회, 적대적 공생

한국교회의 보수주의

선교사들에 의한 개신교 전래 역사는 각 교단별 지역분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을 전담하였던 미국 북장로교 파송 근본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서북지역의 교회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품게 된다. 이어서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로 월남하게 된 서북지역 개신교인들에 의해 남한의 개신교회는 반공주의로 무장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40-50년대 한국교회의 보수적 성향을 가리켜 서북주의라 명명한다.

1960년대 이후 개신교의 성장을 이끈 동력은 성장주의적 부흥사들이었다. 본래 서북주의와 성장지상주의는 상호모순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1공화국 이래 유신체제에 있던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는 사회 통합의 원리였으며, 반공주의의 "증오"가 성장지상주의를 촉발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전투적인 성장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십이 필요했고 이 시기의 대형교회는 여지없이 이러한 1인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추었다.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교회의 성장세가 주춤하며 각 교회의 리더십이 세대교체기를 맞게 되자 대형교회들은 변화를 맞게 된다. 선발대형교회에 해당하는 교회에서 종전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은 점차 소멸해갔지만,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시대에 적응하고 새롭게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교회들이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교회가 후발대형교회인데, 본질적으로 이런 교회들에서도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며 신자들은 위로부터의(목회자로부터의) 권위에 순종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주권신자의 탄생

1990년대 이후로 한국교회의 절대적인 성장은 둔화되며, 신자 수가 감소하게 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흐름 속에서도 성장을 경험한 교회들이 있는데 이들은 떠돌이 신자들의 수평이동의 수혜를 입은 셈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기존의 대형교회로부터 흩어져 떠돌아 다니는 신자들의 취향과 요구에 민감하여 그들에게 맞춤형 목회를 제공한 결과다. 이러한 후발대형교회의 성장동력을 저자는 주권신자의 탄생이라 명명하고 있다. 이들이 곧 웰빙보수주의를 선도하는 집단이 된다.

신학교와 목회자의 강단은 학력 수준이 높아진 신자들의 변화로 인해 신뢰를 잃게 되고, 이들은 더 이상 목회자의 권위에 복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후발대형교회가 대두하게 된다. 특히 후발대형교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력은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에 해당하는 집단으로, 시대에 적응하는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게 된다. 이렇게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주권신자의 범위와 역할에 대한 논쟁과 갈등이 존재하지만, 결국 여기에서 "주권 밖으로 내몰린 대중"은 교회에서 내몰린 존재로 남게 된다. 보수주의의 배타성은 이러한 방식으로 후발대형교회 안에서 작용하여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후발대형교회의 캐릭터화 성공

저자는 대표적인 사례로 사랑의교회(제자훈련)와 온누리교회(성령운동, 이른바 귀족영성)의 캐릭터화를 제시하면서 1990년대 이후 어떻게 후발대형교회가 신자들을 유치하고 그들에게 발맞추어 대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랑의교회가 선두한 제자훈련은 이성주의적 신앙의 반응이며, 온누리교회가 선두한 성령운동은 감성주의적 신앙의 반응이라 요약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사회를 살펴보면 왜 이런 기획들이 성공적일 수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는 한국사회에 이성적인 기획들이 늘어났고, 수없는 주체들의 논쟁이 이루어지면서 공부에 대한 열정이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성주의적 기획이라 할 수 있는 제자훈련(사랑의교회)의 발흥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경배와 찬양"으로 대표되는 온누리교회의 성령운동, 곧 감성주의적 기획이 맞아떨어질 수 있었던 배경으로서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IMF)를 주목하게 된다. 이렇게 시대에 맞는 기획으로 신자들을 유치했던 두 교회(옥한흠 목사의 사랑의교회, 하용조목사의 온누리교회)는 이후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의 롤 모델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두 교회의 캐릭터화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요인으로 막대한 자본 능력을 들 수 있다. 강남을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그곳으로 모여든 중상위 계층 신자들의 자본능력을 통해 교회가 대규모 건축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유지하며 성장을 이루게 된다. 교회 건축을 이루어 낸 막대한 자본력은 이후 제자훈련과 귀족영성을 통한 교회성장의 원동력으로도 작용한다.

대형교회의 보수주의화

1990년대 이후로 대형교회는 이렇게 중상위 계층을 필두로 하여 보수주의 세력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2000년대 보수 대 진보의 양극화(이분화)가 첨예해지면서, 대형교회는 다시금 보수진영의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 개신교계는 이념 대립 속에서 보수대연합의 기치를 들었고, 정치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경제적·사회적으로도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보수주의의 흐름을 저자는 웰빙보수주의라 칭하고 있다. 좀더 품격있는 삶에 대한 논의인 "웰빙"과 사회정치적인 범주인 "보수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한 형태로, 후발대형교회와 이를 일으킨 중상위계층의 주권신자들(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30대를 맞이한 강남권의 고학력 중상위계층은 한국의 소비문화 변화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2000년과 그 이후까지도 한국사회와 교회의 흐름을 이끌어 왔다. 이 세대를 기점으로 웰빙보수주의가 등장했다고 저자는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구시대적, 시대착오적인 보수주의와는 결을 달리하는 모습으로, 품격을 강조하는 문화적 태도를 그 특징으로 한다. 웰빙에 대한 보수주의적 접근, 곧 자유주의적인 성격으로 개인의 웰빙에 대한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흐름이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을 압도하고 있는게 오늘날의 분위기이다. 그 바탕에 후발대형교회의 영향력이 있다.

후발대형교회 신자들의 웰빙 신앙은 과거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아닌 협력적, 설득적 리더십을 지닌 목회자와 함께 동역하며 수평적 소통을 행하는 모습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한데 이들 대부분은 사회에서도 성공을 거둔 이들로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캐릭터라 할 수 있기에, 교회를 자신의 일터와 같은 야생으로 만드는 측면도 있다. 그들에 의해 형성된 교회라는 장소는 "신자유주의적 전사들이 쉼을 누리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소외되는 계층(가난한 자,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여러 형태의 결핍자들)이 생기며 이들은 주권신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며,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후발대형교회는 그들의 웰빙보수주의적인 문화를 통해 경제권력과 문화권력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까지도 장악하고자 한다. 웰빙보수주의의 계급주의적인 양상은 이전의 보수주의와 비교하였을 때에도 전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교묘한 방식으로 공교화된다. 더욱 세련된 외양을 갖추고 있으나, 오히려 편견과 차별이 훨씬 교묘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별 생각이 없는 대중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차별과 배제를 아무렇지 않게 옹호하고 이에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저자가 우려하는 후발대형교회로부터 비롯된 웰빙보수주의의 정치적 헤게모니화이며, 이를 굉장히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출처] 한국교회가 만드는 새로운 보수주의 트렌드|작성자 유리거울

 

출판사 서평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웰빙보수주의를 본격 탐구한 저작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하나는 개신교 우파의 강력한 정치세력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만들기에 연달아 지대한 공을 세웠던 개신교 우파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을 계기로 분열하며 잠시 뒤로 물러나 있지만, 언제 또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설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들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태극기부대와의 결탁 때문에 극우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지만, 최근 전광훈과 한기총 세력의 급격한 왜소화에서 보듯이, 개신교 우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상적 분화는 보다 면밀한 검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한국 개신교를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전통적 키워드, 극우 반공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흐름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주요 대형교회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양상, 웰빙보수주의가 오늘의 한국 개신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다. 또 이들 중심으로 형성된 웰빙보수주의가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의 우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1990년대 중반 이후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웰빙보수주의를 본격 탐구한 노작이다. 새 신자의 급격한 감소라는 위기 속에서 기성 교회에 실망하여 떠돌이신자가 된 이들을 적극 유치함으로써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들의 성장 전략을 웰빙보수주의로 개념화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이 책의 독창적 의의가 있다. 저자는 웰빙보수주의를 문화 현상으로서 웰빙의 정치화된 담론과 제도 양식으로 규정한다. 품격 있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성찰, 웰빙적 문화 실천이 대형교회의 보수주의적 정치성과 결합함으로써 나타난 것이 웰빙보수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웰빙보수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두되었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한국 사회 전반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

대형교회(Megachurch)는 일요일 대예배에 출석한 성인 신자가 2,000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의 대형교회는 대략 900개소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즉 전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7%밖에 되지 않는데도 대형교회가 한국 개신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대형교회 목회사역자는 각 교단에서 교단정치의 핵이며 교회 연합기관들에서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또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리더십 스타일은 거의 모든 목사들의 사역 표준이 되고, 대부분 교회의 예배 양식이나 프로그램 및 담론 등도 대형교회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대형교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한국 개신교를 과잉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 수가 정체/감소 추세로 변환된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대형교회에서 흥미로운 내적 분화가 일어나 특정한 계급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장이 형성되었다. 저자는 이전에 급성장한 대형교회 유형을 선발대형교회’, 이후에 급성장한 대형교회 유형을 후발대형교회라고 부른다. 전자가 성장지상주의와 절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특징으로 한다면(대표적인 예로 영락교회와 순복음교회), 후자는 탈권위주의와 설득적 리더십에 기초하고 있다(대표적인 예로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개신교 인구가 증가하던 시절 탄생한 선발대형교회는 새 신자의 유입이 중요한 변수였지만, 개신교 인구 정체/감소 시대에 등장한 후발대형교회는 수평이동신자의 유입이 더욱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새 신자가 담임목사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존재라면, 수평이동신자는 마치 상품을 구매하듯 교회를 선택하는 자라는 점에서, 목사에 대한 의존성이 훨씬 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 신자 중심의 대형교회들은 전국의 대도시에 분산되어 있는 반면, 수평이동신자가 유입되어 대형교회가 된 교회들은 강남권(강남, 강동, 분당)에 집중되어 있다. 새 신자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농민들이 많았지만, 수평이동신자는 주로 비강남 지역에서 강남권으로 이주한 이들이다. 그들은 학력도 더 높고 자산도 더 많으며 상징자본도 더 많이 가진 이들이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중상위계층이 강남권 후발대형교회에 집중되면서 그들 특유의 계급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저자는 바로 그것을 웰빙보수주의라고 명명한다.

후발대형교회와 주권신자의 탄생

선발대형교회의 성장에 절대적이었던 새 신자들은 대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 빈민층을 형성한 이들이었기에, 교회에 유입될 때 목사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순응하여 교회의 일방적인 훈육 대상이 되었다. 반면 후발대형교회의 주축을 이룬 수평이동신자들은 선교 상황의 변화와 맞물려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이사나 결혼 등이 사회 유동성의 주된 요인이었던 반면, 이후에는 신념이나 취향의 선택과 맞물린 경계 넘기가 더 활발해졌다. 그것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즉 신념이나 취향의 차이를 더 예민하게 느끼면서 속했던 교회를 떠나 이곳저곳 물색하며 떠도는 이가 크게 늘었다. 서울처럼 인구가 과잉 집중된 사회, 그리고 교통수단이 대단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회는 일종의 종교시장의 상품처럼 전시되고 소비된다. 이때 디지털화한 콘텐츠가 무한 유통되는 정보사회의 매스미디어가 충분히 발달하면 선택될 상품들이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전시된다. 따라서 수평이동신자들은 교회들에 대해 더 많고 깊은 정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된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런 정보 능력은 사회적 지식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떠돌이신자들 가운데 사회 엘리트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후발대형교회들에서도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모든 가용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리더의 성장 전략이 효과를 드러내려면 주체적인 신자들을 위한 선택지를 더 확대해야 한다. 즉 그런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정착시키려면 담임목사가 디자인하는 교회나 목회가 그들의 신념과 기호에 잘 맞아야 한다.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는 설득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설득적 리더십은 떠돌이신자들을 재정착하도록 유인하는 데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담임목사는 재정착한 신자들과 함께교회를 만들어간다. 이제 신자들은 담임목사에게 충성심을 갖는 추종자가 아니라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협력자혹은 동역자가 된다. 그런 신자를 저자는 주권신자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민주국가의 제도적 주체를 주권국민또는 주권시민이라고 부르는 것에 병행되는 표현이다. 권위주의 체제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와 그에게 절대 충성하는 백성들의 수직적 네트워크가 제도화된 사회라면, 민주주의 체제는 설득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와 주권국민/주권시민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제도화된 사회다.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교회로 성장하는 데는 설득적 리더십의 담임목사와 주권신자의 효과적인 조합이 중요하다. 이 조합이 잘 작동하는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공동체들은 독특한 신앙문화를 발명해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웰빙 신앙이다.

주권신자들을 위한 웰빙 장소로서의 교회

후발대형교회는 수평이동신자들의 신념과 취향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교회 개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주권신자가 되어갔다. 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설교였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이 까다로운 신자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적극적 비평가가 된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교회들은 설교 내용과 설교자의 테크닉에만 의존하지 않고, 예배 형식, 예배 음악, 예배당의 공간 배치, 음향·조명·시각 효과 등을 캐릭터화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신자 프로그램이나 교회 건축물에서도 그 교회만의 개성을 추구했다. 바야흐로 이 시기에 성공한 교회가 되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정착할 교회를 찾아 떠도는 이들은 이러한 캐릭터로 교회들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재정착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1990년대 후반 후발대형교회의 선두 주자인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캐릭터화에 성공함으로써 주권신자들을 사로잡았다.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이라는 캐릭터로, 그리고 온누리교회는 귀족영성이라는 캐릭터로 말이다. 선발대형교회의 성공 스토리에서 핵심 요소였던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목사의 주도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만, 후발대형교회적인 교회의 캐릭터화는 신자들의 주도성에 방점이 찍힌다.

웰빙보수주의는 위기에 처한 교회가 산업화 시대의 낡은 보수주의에 대한 개혁과 쇄신의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발대형교회들은 이제 빠른 도시화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친밀성이 치명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시기에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친밀성의 공간이 되었고 또 거대한 인맥 공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형교회의 주권신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귀족적 품격이 넘치는 웰빙의 장소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웰빙보수주의의 맨얼굴

한국인 중 개신교 신자 비율은 아무리 많아도 20%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파워엘리트 중 약 40%가 개신교 신자다. 그런데 후발대형교회에는 선발대형교회보다 파워엘리트의 비율이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선발대형교회가 전국의 대도시에 산재해 있는 반면, 후발대형교회는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발대형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막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정부와 정치권, 학계, 재계, 법조계, 군부를 망라한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소망교회 인맥이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것을 빗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지역)’이나 박근혜 정부 시절의 사미자’(사랑의교회·미래를경영하는연구모임)라는 표현은 그러한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촛불정치태극기정치로 양분된 진보와 보수의 정치 지형 아래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사회적 범주가 보수주의의 정치 어젠다를 추동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한편 많은 교회들에서 주권신자의 범위를 둘러싼 갈등이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다. 즉 파워엘리트가 주도하는 교회(엘리트 정치)가 될 것인가, 모든 신자의 범위로 확장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된 교회(시민 정치)가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방식의 주권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주권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교회의 내부 정보, 가령 재정 운용이나 교회 정책 등에 대해 신자 일반은 거의 접근할 수 없다. 대개의 경우, 신자들은 단순히 박수부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이너서클과 나머지 사이의 벽은 대단히 높다. 최근 법적 공방을 통해 재정 장부와 당회(목사와 장로들의 회의) 회의록의 열람권이 신자들에게 있다는 것이 인정되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벌어지고 갈등이 극한까지 치달을 경우에나 그런 요구를 둘러싼 논란이 실체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교회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한 사회 단위다. 선발대형교회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권력이 담임목사 1인에게 집중되었지만 후발대형교회에서는 목사와 당회, 그리고 일부 특권적 신자에게로 권력이 분산되었을 뿐이다. 주권신자는 여전히 소극적인 주권의 주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무게 축이 이동하든, 여기서 고려되지 않은 것이 있다.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담론적 갈등 속에 그들의 외부, 주권 밖으로 내몰린 대중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주의가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바깥에는 가난한 자, 이주노동자, 난민, 성소수자, ‘정상가족 관계가 결핍된 자 등이 있다. 그런 이들이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권신자로서 교회의 비전을 만들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도와 담론 형성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하위 주체(노예적 주체)로서 가련한 표정을 짓고 교회에 스스로를 위탁하는 자일 뿐이다. ‘바깥에 대한 성찰이 없는 보수주의가 웰빙적 주권신자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교회 개혁 담론의 맨얼굴일지도 모른다. 강고하게 구축된 그들만의 웰빙 리그는 낡은 보수주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차별과 혐오의 정치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후발대형교회에 대해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신천지 현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절대 악처럼 지탄받고 있는 신천지에 대한 메타적 분석이다. 후발대형교회 패러다임이 약진하자,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신앙적으로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이 재결속하여 여러 유형의 종교사회적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데, 신천지 현상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후발대형교회적 신앙 양식이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교회들이 이 모델을 광적으로 모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 모델이 (강남권의 경우처럼) 물적 자본과 인적 자본이 충분해야만 달성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모방이 교회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 외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모방 과정에서 실패한 자들(교회 사역자와 신자 모두)을 위한 복음의 정신이 망각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가난한 신자들은 교회에서도 비존재가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무력감에 빠졌다. 신천지는 이렇게 소외되고 무력감에 빠진,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개신교 신자들을 집중 공략했다. 교회가 잊어버린 약한 자들을 향한 위로와 치유의 기능이 신천지에서는 매우 잘 발달되어 있는데, 그것이 2000년대 신천지의 광속 성장 비결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격랑에 급속히 빨려들어갔다. 그것이 수반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경쟁 사회의 치열함이 훨씬 더 가혹해졌다는 점이다. 그런 변화는 무수한 이들에게 깊은 마음의 병을 안겨주었다. 하여 상처받은 이를 향한 위안과 치유가 오늘의 종교에 부여된 사회적 요구의 주요 항목이 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과연 이에 부응하고 있을까.”

신천지 현상은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가 잊어버린 것과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