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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1945년 해방 직후사

by 이성근 2024. 3. 3.

 

1945년 해방 직후사정병준 지음 돌베개 펴냄 2023.11

鄭秉峻-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다. 역사와 현실편집위원장, 이화사학연구소장, 한국문화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한국 현대사 자료를 찾아 세계를 횡단하며, 새로운 자료에 기초한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데 긍지를 가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은 김규식 평전을 쓰고 있다. 여운형, 이승만, 김구, 김규식, 박헌영, 현앨리스, 염동진 등 한국 현대사의 인물들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긴 호흡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몽양 여운형 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전쟁,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독도 1947,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한반도 관련 조항과 한국정부의 대응등의 책을 썼으며, 50여 권의 한국 현대사 자료집을 기획ㆍ해제했다. 47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저술상(2006), 독도학술상(2010), 36회 월봉저작상(2011), 56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저술상(2015) 등을 수상했다.

목차

서문

1. 폭풍: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이중권력의 창출

1. 프롤로그

2.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여운형

1) 여운형과 건국동맹의 활동(1943~1945)

2)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여운형 교섭(1945810~814)

3. 일제의 패망·한국의 해방·건국준비위원회의 출범

1) 여운형과 총독부의 합의: 치안유지와 건국 준비의 간극

2) 건국준비위원회의 출범: 일제 통치의 종말, 해방의 공간

4. 막간극: 건준의 분열과 조선인민공화국의 창설

1) 건준의 제1·2차 개편과 분열

2)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평남 건준의 상황

3) 조선인민공화국의 창설과 제3차 건준 개편

5. 조선인민공화국의 귀결

1) 낙관적 정세관과 과도한 서울 중심주의

2) 조선인민공화국의 최후

6. 에필로그: 총독부의 전후 공작

 

2. 미군의 남한 진주와 알려지지 않은 막후의 영향력: 일본군·통역·윌리엄스의 역할

1. 24군단의 남한 진주와 최초의 정보: 17방면군의 정보공작, 통역·문고리 권력의 등장

1) 인천으로 향하는 미24군단

2) 24군단과 일본군의 무선교신: 음모의 복화술

3) 통역·문고리 권력의 등장: 오다 야스마와 이묘묵

2. 알려지지 않은 정책 결정자 윌리엄스의 역할

1) “아무도 아닌 자들의 결정: 미군정의 실권자 윌리엄스

2) 국무부 정치고문 베닝호프와 랭던의 동조

 

3. 미군정의 총독부·인공·임시정부 정책과 권력의 불하

1. 미군정의 첫 조치: 총독부 관리의 유임, 선교사·가족의 입국, 한국인 정보의 유입

1) 조선총독부 관리의 유임과 해임

2) 주한 선교사 및 가족들의 입국 추진

3) ‘기독교전국고문회의’, ‘연희전문 정부

4) 관대한 친일과 엄격한 반공,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

5) 한국인들이 제공한 정보

2. 미군정의 인공 부정·임정 활용 정책과 남한 정치의 재편

1) 최초의 정책 결정: 여운형·인민공화국의 부정

2) 두 번째 정책 결정: 임시정부의 활용과 이승만·김구의 입국

3. 권력의 불하, 벼락권력의 시대

1) 고문회의의 창설

2) 두 달 만에 이뤄진 한국인 관리 75,000명의 임명

3) 한민당의 세상

4) 미국 유학생, 기독교, 선교사 학교 출신자

 

4.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귀결

1. 순진한 하지의 순진한 계획

1) 고위급 정책을 파기한 하지

2) ‘정책 결정자하지: 정무위원회 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추진

3) “엉망진창하지

2.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 독촉중협의 전말

1) ‘잊힌 인물이승만의 귀국

2) 독촉중협: 임정 지지와 독자노선의 사이

3) 독촉중협의 지향: 국무회의·민의 대표기관, 한국 정부의 모체

4)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 미군정·이승만·한민당의 3중주

 

남은 말: 19465월의 대분기

참고문헌

·도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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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가 주는 교훈, “용감하게 직시하라

한성원 그림

서점에 갔다가 고대하던 책을 만났다. 정병준의 1945년 해방 직후사. 보자마자 머리말도 읽지 않고 바로 샀다. 현대사 연구자 정병준의 역량을 알기 때문이다. 내용이 궁금해 근처 빵집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문과 프롤로그를 읽는 데 한 시간여가 걸렸다. 천천히 오래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해방의 감격이 분단의 비극으로 귀결되는 아픈 역사를 대면하는 괴로움과 이런 연구자가 있어 다행이라는 고마움이 걸음마다 엇갈렸다.

책은 해방 직후에 일어났으나 이제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비사(祕史)’로 가득하다. 숨겨진 그 역사는, 저자가 말했듯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건준, 인공, 미군정, 초기 반탁운동 등에 대해 기록되지 않은 일들이 기록된 일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상식의 저항을 불러일으킬수도 있는데, 저항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저자가 발로 뛰며 모은 방대한 자료와 치밀하고 객관적인 분석이다. 꼼꼼한 자료 분석은 좋은 연구서의 조건이지만 일부 독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될 수 있기에 저자는 서문에서 주요 내용을 요약해 제시한다. 따라서 완독이 부담스럽다면 서문이라도 보기를. 아마 그걸 보면 모든 페이지를 읽고 싶을 것이다. 내가 사실(事實)이라 믿었던 것이 정말 사실(史實)인지 확인하고 싶을 테니까.

먼저 저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해방 당일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만남에서 산출됐으며 한민당 계열의 우익은 총독부와의 만남을 거부했다는 상식부터 깨뜨린다. 다양한 자료를 통해 복원한 사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흔히들 한반도의 해방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을 받는 격으로 느닷없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1942년께 일제의 패망을 예측했고,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부터 해방에 대비한 구상을 시작해 8월에 출옥하자마자 비밀조직을 만들고 1년 뒤에는 조선건국동맹을 발족했다. 패전 당시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치안유지 교섭을 한 것은 이런 조직력에 더해 그가 협상을 할 수 있는 합리적 인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건준은 해방 당일 갑자기 급조된 것이 아니라 오랜 건국 준비 계획 아래 탄생한 것이며, 그랬기에 일제의 소망과 달리 단순한 치안유지가 아니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준비 조직으로 해방공간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한민당 계열은 일제의 패망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운형의 합작 제의를 거부하다 뒤늦게 총독부 의중에 따라 건준을 치안유지회로 변화시키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친일파로 가득했던 한민당 세력이 해방 직후 주도권을 잃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귀축영미(鬼畜英米)를 외치던 친일파에서 단숨에 친미파로 변신해 미군정하에서 다시 득세한다. 저자는 그 배경으로 한국에 무지한 미군정, 이를 이용한 일제와 친일파의 공작, 존 하지(미군정 사령관)의 개인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스 같은 선교사 가족의 역할을 지적한다.

미군은 사이판, 괌 같은 다른 점령지에는 미리 군정 계획을 수립했으나 한국에 대해선 사전 준비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의 군정이 실시된 유일한 지역은 남한이었고 더구나 주둔군 사령관이 국제적 합의를 무시하고 대결적인 안을 모색한 유일한 지역이었으니, 이후의 비극은 예견된 것이라 하겠다. 미군 선발대가 한국인과의 접촉을 엄금한 채 일본군 수뇌부와 맥주 파티를 벌인 데서 볼 수 있듯이, 미군정은 현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일본군 및 총독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한국에 대한 인식을 수립했다. 그 결과 이묘묵 같은 친일파가 존 하지의 통역이자 비서실장으로 미군정의 '문고리 권력'이 되었고, 한국인이 신망하던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이자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고 배제되었다.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둘러싼 비사

이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이들이 윌리엄스, 언더우드 등 한국에 자리 잡은 선교사 가족이었다. 의무관으로 우연히 미군에 동행했다가 한국어 실력 덕에 존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중용된 조지 윌리엄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에선 아무것도 아닌 자였지만 한국에선 미군정의 인사정책을 좌지우지하며 기독교·반공 등을 기준으로 한민당 출신자를 중용했고, 존 하지가 본국의 지침인 정치적 중립을 무시하고 한민당 편향의 반공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여 남한의 정치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일본에서와 달리 존 하지의 미군정은 정부 정책과 국제 합의를 무시한 채 독단적인 방책을 추진했다. 한국에 대한 무지와 무시의 반영이었다. 그 결과 미군정 초기부터 국무부의 다자간 국제신탁통치지침을 부정하고 비밀리에 미군정 예하의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려는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반탁이라면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임정 계열이 주도한 반탁운동을 떠올리는 게 상식이지만, 저자는 그보다 먼저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의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이 있었으며,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좌우한 분기점은 1945년 말의 반탁이 아니라 미군정 주도의 반탁운동이었다고 지적한다.

책에는 이 밖에도 놀랍고 충격적인 비사가 가득하다. 그 속에서 야심만만했으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좌익의 모험주의, 우익의 물불 가리지 않는 정치적 욕망과 책략, 총독부의 용의주도한 공작, 순진했던 미군정의 초기 정책, 용감하고 혁명적이었으나 테러와 공작의 희생자가 된 여운형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솔직히 읽기 답답한 역사다. 그래도 읽기를 권한다. 희망과 열정으로 시작해 분노와 좌절로 끝난 시대를 알아야 비로소 진실과 대면하고, 감정적일 수 있으나 냉정을 유지하고, 비관도 낙관도 불허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감하게 직시할 것”, 아픈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시사인 /김이경 (작가)

하루의 시간이 40년의 역사를 압도했던, 1945년 해방 직후사

시간에 밀도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밀도를 계산하려면 부피와 질량을 알아야 하는데 시간의 밀도를 재는 데 필요한 부피는 시간의 길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럼, 질량은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밀도를 계산하려고 하는 시간 내에 일어난 사건들이 이후의 시간에 끼치는 영향의 크기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하여, 누군가의 생애에서 아주 밀도가 큰 어떤 한 달은, 다른 몇 년의 시간보다 무거울 수 있다. 개인뿐 아니라 역사의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대한민국 역사는 임시정부 수립을 기점(19194)으로 했을 때 10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은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해방, 분단과 전쟁을 겪었고 휴전 이후에는 독재와 이에 항거하는 혁명(4.19)이 일어났다.

두 번의 군사쿠데타(5.1612.12)가 만들어낸 기나긴 군사 독재는, 민주화 운동으로 끝내 막을 내렸고 1990년대에는 국가부도 사태에 빠지며 경제적 국난을 겪다가 이를 극복하며 2000년대를 맞이했다. 불과 몇 해 전에도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촛불 혁명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시간의 밀도는, 언제나 최대치에 근접했다.

그런 대한민국 역사의 시간 중에서도 가장 밀도가 컸던 시기를, 1945년 해방 직후사의 저자 정병준 교수는 19458월 해방 직후라고 말한다.

해방 직후 역사의 시간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었고, 하루의 시간이 40년의 역사를 압도했다.-1945년 해방 직후사p197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위원장에게 환호하는 시민들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해 아주 약간의 관심과 지식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발발 사이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혼란과 분열의 시간, 딱 여기까지다. 그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를테면 어떤 양상으로 혼란과 분열이 전개되었는지, 어떤 사건이 일어나 훗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시기를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제대로 들여다보기에는, 여전히 우리 사회 내부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분열과 갈등이 남아 있어서다. 실제 어떤 모습이었는지 밝혀내기보다는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이 시기는 수많은 인물과 단체가 등장해 저마다 주장하고 서로 대립하다가 같은 주장을 하던 이들이 다시 분열하고 분열했던 자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아수라장이었다. 가치관과 신념, 욕망과 분노, 열망과 좌절의 용광로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모조리 엉긴 채 어디까지 사실이고 주장인지도 모호한 상태로 굳어졌다.

카메라에 찍혀 온 국민이 확인할 수 있는 일도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고 우기면, 열에 서너 명은 정말 아닌 줄 알거나 아니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일이 요즘 같은 세상에도 버젓이 일어나는데, 가뜩이나 혼란과 분열이 극에 달해 있는 해방 직후 시기에 일어난 일을, 지금은 생존해 있지도 않은 관련 당사자들의 진술과 유실되고 남은 일부 기록에 의지해 재구성하는 일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김구, 이승만의 임시정부 환국행사

당시에 대립했던 당사자들은 같은 일을 겪고도 서로 다른 증언을 하기 일쑤였고, 이를 토대로 나름 객관적 사실을 내보이겠다고 하는 무리마저 각자의 정치적 필요와 입맛에 따라 선택적으로 자료를 인용하고 편향된 시각으로 해석해 왔던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제대로 알기에 너무나 어려운 데다 제대로 알려고 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았던,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밀도가 컸던 해방 직후 반년의 시간.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떠올렸을 때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고 꼬여도 너무 꼬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이 시기.

마치 짙은 안개에 가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형태조차 가늠하기 힘든데 풍기는 악취만큼은 뚜렷하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일까.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의 어려움과 별개로 못나고 뼈아픈 과거를 굳이 샅샅이 파헤쳐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희망과 열정으로 시작해 분노와 좌절의 그라데이션으로 남겨진 해방과 분단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외면하지 말 것, 진실과 대면할 것, 용감하게 직시할 것, 감정적일 수 있으나 냉정을 유지할 것. 비관도 낙관도 불허할 것 등이다.-1945년 해방 직후사p24

1945816,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

1945년 해방 직후사(이하 해방 직후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이라 할 만한 6개월을 다룬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하루의 시간이 40년의 역사를 압도했으니 엄청난 밀도의 시간이기도 하다.

해방과 자주독립을 향한 민족적 열망을 억누르고 있던 일제의 식민 통치라는 압력이 일왕의 항복 선언과 함께 일시에 사라져 버리자,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해방 공간이 되어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에너지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빅뱅의 장으로 바뀌었다. 엄청난 힘의 크기가 향하는 방향은 각자 꿈꾸었던 국가와 사회의 모습만큼이나 여러 갈래였으므로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혼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어지러움이었다.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일제의 자리를 대신해 들어온 미군정은 그런 혼란을 원하지 않았다. 냉전의 씨앗은 이제 막 싹을 틔웠을 뿐이었지만,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미군정의 공포는 이미 만개한 꽃밭이었다. 미군정은 남한의 정치적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미국의 입장에서 믿을 만한 정부를 수립하여 38선 이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문제는 그러기에 자신들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제에 부역하며 식민지 시스템 유지에 크고 작은 역할을 담당했던 자들에게 미군정이 마주한 문제는 기회였다. 재빨리 친일이라는 이름표를 반공으로 바꾸어 달고 자신들이야말로 미군정의 가장 믿을만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접근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딱히 이들을 내칠 이유가 없었다. 조선총독부나 미군정이나 외부 세력이 들어와 권력을 행사하면서 시스템 작동의 실무는 현지인 부역자(협력자)에게 맡겨야 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약간의 관심과 지식만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해방 직후사는 우리가 뿌옇게 알고 있었던 부분의 해상도를 높여 보다 선명한 배경과 정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과 사건까지 더불어 제시하면서 해방 직후 6개월의 시간을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재구성한다.

해방의 막전 막후

1945816, 연설을 위해 서울 휘문중으로 들어서는 여운형

해방을 몇 년 앞둔 1940년대 초반까지도, 식민지 조선에서 실질적인 해방 후의 건국 준비를 생각하고 실천한 인사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오히려 일본이 망할 리 없다는 체념이 굳어져 변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와중에 여운형은 태평양 전쟁의 실제 전황을 접하면서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을 발족시켜 해방 공간이 된 한반도에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조선이 해방된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나라가 하늘에서 떨어질 리 만무하며, 행정 시스템을 갖춘 국가를 건설하는 게 어디 하루아침에 하고 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건국 준비는 해방에 대해 매우 실질적이고 필수적인 밑 작업이다. 물론 중경 임시정부가 존재하긴 했지만 나라 밖에 있다는 한계가 있었고, 앞서 말했듯 국가 운영 시스템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힘만으로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해방이 자주독립으로 이어지기 위한 건국 준비가 조직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사에 따르면, 해방을 전후로 한 며칠 동안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패망이 공식화된 후, 본토로 돌아갈 때까지 안정적으로 치안을 유지, 관리하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 내 주요 인사들에 접촉하며 협력을 구하는데, 이 중 가장 제 목소리를 내며 협상에 임했던 인물이 건국 준비 활동을 하며 조직 기반을 다져온 여운형이었다.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은 해방을 맞아 건국준비위원회 출범으로 나아가며, 조선총독부가 요청한 치안 유지를 넘어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건국 준비를 실행에 옮긴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우파 계열의 한민당이 조선총독부와 여운형의 협상을 두고 여운형이 친일 행각을 벌였다며 맹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오히려 친일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던 쪽은 한민당이었다.

해방 직후사’ 1장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중요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관문인 것 또한 사실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조선총독부, 여운형을 비롯한 건국준비위원회, 한민당 인사를 중심으로 한 우파 계열이 하는 증언이 모두 엇갈리는 부분이 많은데, 이를 모두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 적지 않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많은 인명과 단체명, 계열 명이 등장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 있다. 이는 우리가 해방 직후의 근대사에 본의 아니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책의 시작부터 맹렬하게 밀려오는 대명사의 압박에 잘 대처하려면, 스쳐 가는 이름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매달리지 않고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 낫겠다. 어차피 중요 인명과 단체명은 출현 빈도가 높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에 익게 될 것이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이 건국준비위원회가 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창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조직 구성과 위상의 변화, 여기에 원인이 되는 사건과 인물의 행적을 쫓는 일은 분명 숨이 차지만 달려온 보람이 있다. 당시 남한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몰랐던 아무것도 아닌 자

(왼쪽부터)존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 아널드 군정장관, 통역관 이묘묵

이묘묵과 윌리엄스 소령은 해방 직후사가 아니었다면 영영 모르고 살았거나 어딘가에서 잠시 스쳐 갔지만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이름으로 남았을 인물이다. 이들이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해방 직후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은, 어쩌면 익히 잘 알려진 인물의 잘 알려진 사건과 행적을 뛰어넘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서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은 두 가지다.

어떻게 그런 영향을 끼쳤나?

어떻게 그런 영향을 끼치고도 잘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나?

그들 자신이 대단한 지위에 있거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남한의 최고 권력자인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곁에서 귀에 대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까닭에, 음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 중장이 194598일 인천항에 당도했을 때, 함께 했던 미군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어 소통이 가능한 인물이 군의관 윌리엄스 소령이었다. 그리고 이묘묵은 하지 중장이 한국 땅을 밟은 며칠 후에 그의 개인 통역이 된다.

앞서 말했듯, 미군정과 하지 중장은 한국의 실정과 한국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상황에서 남한의 통치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어에 능통한 미군과 한국인 통역사가 미군정 사령관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의 크기는, 단순히 말을 전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이묘묵과 윌리엄스 소령의 개인적 배경과 이들이 해방 직후 대한민국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사를 통해 직접 마주하기를 바란다. 덧붙여 책에 등장하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이 둘만은 아니다.

해방 이후 전개되는 우리 역사가 한국 전쟁으로 이어진 것을 볼 때, 해방 직후사는 곧 비극의 역사다. 권한도 자격도 능력도 없었던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하루의 시간이 40년의 역사를 압도했던 시기에, 자격과 능력 없이 권한만 있었던 권력자의 곁에서 정책과 인사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비극의 역사를 길러낸 토양이다.

미군정 초기,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의 개인비서 겸 정치고문이었던 조지 윌리엄스

해방 직후의 빅뱅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질서

일제가 누르고 있던 해방과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이 해방 직후 다소 무질서하게 분출되고 있던 시기, ‘하루의 시간이 40년의 역사를 압도했다는 저자의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해방 공간에서 각자의 이상과 열망, 야망과 욕망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엉켜 부딪히는 빅뱅의 장에서, 특정 방향으로 가해진 내외부의 힘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질서가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

친일파는 친미 반공주의자로 변신하면서 몰락이 아닌 득세의 길을 걸었다. 기회주의는 대한민국 힘의 질서에서 일종의 법칙으로 여전히 통한다. 해방 직후의 시간부터 이미 기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입지를 방어하기 위해 반대파에 빨갱이딱지를 붙여 댔다.

아는 게 별로 없는 최고 권력자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아무것도 아닌 자의 문고리 권력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중이다. 기나긴 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에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이렇게까지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고도 믿기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미군정 하에서 이제 막 조직된 당시 사법부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법권(기소와 판결)을 남용하는 장면에서는 당혹감마저 느껴진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힘의 질서가 해방 직후의 빅뱅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원형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1945년 해방 직후사, 이 책의 부제는 현대 한국의 원형이다.

딴지일보 /홀짝/ 죽지않는돌고래